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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 작성자 지새는달
  • 작성일 2007-04-01
  • 조회수 355

 정선생님, 여깁니다. 예. 이 쪽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왔습니다. 아니, 오래는요. 저도 방금 왔지 말입니다. 하하, 그냥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있었죠. 신경 쓰실거 없습니다. 정말 방금 왔습니다. 한 오분, 십분 됬을라나요. 아, 이거요. 제가 좀 심한 골초라서요. 앉아서 시간 때울 일이 딱히 없어 물고 있다보니 좀 많이 했나 봅니다. 그 쪽으로 앉으시죠. 죄송하지만 말씀만 얼른 전해 드리고 일어나봐야 할 것 같아서요. 간만에 뵈었는데 실례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오후에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랑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예, 대충 누나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뭣 떄문에 연락 하셨는지 말이죠. 정선생님 얘기야 평소에도 워낙 많이 들었으니 잘 알지요. 이번에 새로 영화를 준비하고 계신다구요. 그런데 이거야 뭐, 저도 술자리에서 반쯤 취해서 꺼냈던 얘기라…. 남의 얘기를 허락도 없이 멋대로 전하는 것도 맘이 편치는 않고. 워낙에 오래전 얘기라 기억이 확실해야 말이죠. 서른 반을 넘어가니 이십대 때  이야기는 까마득하더군요. 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언제 이런 이야기가 다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녀석들도 어디서 즐겁게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거구요. 어쩄든 다 지나간 일이니까 곤란할거야 뭐…….
 담배 한 대 주시겠습니까? 아까 끝장을 봐서 말이죠. 예, 감사합니다. 아무튼 불확실한 기억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아는 한 말씀은 드려야죠. 제가 술자리에서 뱉은 한 마디로 큰 영화 하나가 기획되고 있다는데 모른척 할 수야 있습니까. 한 대 피우면서 얘길 시작하지요.

 L은 제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삼년을 같이 지낸 친구였기에 어떤 녀석인지는 잘 알고 있었죠. 아주 자세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외모까지? 영화를 하신다고 하니까 이미지도 말씀드려야 하나 어쩌나 싶어서 말입니다. 어쨌든 평범한 애였습니다. 농구부였는데 키는 별로 큰 편이 아니었죠. 저희학교 농구부 같은 경우는 대회도 여러번 하고 해서 실력없는 녀석들은 퇴출도 잘 당했거든요. 그래서 주위에선 뭐하러 안될거 사서 고생을 하냐 했었는데 2학년 땐 결국 주장을 맡더군요. 애들 사이에서는 좀 독하다는 소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꼭 농구부 일이 아니더라도, 성적도 거의 꼴찌랑 비슷하던 녀석이 후반부엔 중상위까지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것도 유난스러워보였던 것 같구요. 녀석은 누나만 둘이었는데 그걸 감안했을 때 여자를 잘 챙기거나 대할 줄 아는 녀석은 못 됐습니다. 장난도 굉장히 심해서 좀 어린애 같은데가 있었죠. 그런데도 농구부라는 플러스 점수 덕이었는지 어쨌는지 여자들에게는 몇 번 고백을 받더군요. 다른 학교에 꽤 예쁘다 하는 여자애랑도 사귄 적이 있었고요. 아무튼 대충 그런 녀석이었습니다. 그러다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또 만나게 됬구요. 대학에 가서도 계속 농구를 했죠.
 아무래도 이 이야기를 풀자면 P의 소개도 해야겠군요. P와는 대학을 들어가서 만났죠. P는 아주 키가 크고 까만 녀석이었는데 제법 남자답게 잘생긴데다, 그 키만큼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습니다. 학생 운동이란 운동은 모두 섭렵하고 거기서도 꼭 주동을 하던 녀석이었는데 선생들에게는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었겠죠. 학점은 엉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유쾌하고 털털한 녀석이라 친구들 사이에서는 존재감이 강한 녀석이었습니다.
 그 둘이 처음 친해진 건 아마 MT에서였을 겁니다. 전부 잠이 든 숙소에서 그 둘만 깨어 있었으니까요. 다들 술에 완전히 쩔어서 떡이 되어 엉켜서 잠 자는데 L은 새로운 곳에서는 워낙에 잠을 못 잔다는 이유로 P는 술만 먹으면 잠이 확 꺤다는 이유로 깨어 있었죠. 밤새 할게 뭐 있었겠습니까? 저들끼리 찌게라도 한번 더 끓여서 한잔 더 했겠죠. 얘기도 했을거고요. 둘이 마음이 꽤 맞은 모양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완전히 친해졌거든요. 그러고보니 하도 친해서 걱정이란 얘기도 좀 있었죠. P는 2학년 중간 쯤 같은 과 J양과 사귀었었는데 그 J가 하루가 멀다하고 불만을 토로했거든요. 둘이 데이트를 하는데 자꾸 L군을 끼운다는 거였죠. J양도 L군과는 허물없는 친구였지만 방해받는 것에는 영 짜증이 났었나봅니다. 자기랑 했던 약속이 깨지는 건 무조건 L이랑 만날 때였구요. 과친구들은 그말에 그저 웃고 지나가곤 했습니다. 남자 녀석들이 L과 P의 편을 들어줬죠. 남자들 의리가 원래 다 좀 유치한거다, 니가 이해해라. J와 P가 결국 헤어질 때까지 그런 일이 반복되곤 했습니다.
 제가 앞에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P는 학생운동에 미친 녀석이었습니다. 민주주의 만세! 시위대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다 한번은 그 P가 학생운동 중에 사진에 찍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요령인데 말입니다. 사진에 찍히는 일을 피하기 위해 시위하는 학생들은 모두 마스크를 하고 나갑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도망을 쳐야 했죠. 그런데 이 P가, 그렇게 많이 해본 녀석이 왠 실수를 한 건지, 마스크 한 쪽이 살짝 흘러내린 채 사진에 찍히고 만 겁니다. 강의실로 갑자기 전경이 들이닥쳤죠. 이 사진 누구냐, 이 중에 있냐면서 그 봉을 들이댔죠. P는 그 강의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L이 바보짓을 하고 말았죠. 저가 했다고 손을 번쩍 든 겁니다. 그 시위가 벌어지던 시간에 그 녀석은 분명히 과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에 별 관심도 없는 놈이었고, 괜히 나서서 안 좋은 꼴을 보일 이유가 전혀 없었죠. 경기에 나가 구단주에게 잘 보여 선수로 뽑히는게 유일한 꿈인 녀석이 굳이 그런데에 얼굴 도장을 찍혀 좋을게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L은 경관 손에 질질 끌려 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경관은 그저 아무나 데려다 패야 했던가 봅니다. 그 사진은 아무리 마스크로 조금 가려졌다고 해도 L의 얼굴과는 확실히 틀렸으니까요. 소식을 듣고 P는 엄청나게 떨었다더군요. 전해 듣자마자 난리를 쳤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녀석은 해도해도 꼭 병신 짓을 한다며, 화를 냈다고. 다행히도 L은 감옥에 가거나 하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좀 두들겨 맞고 풀렸났지요. 하지만 맞은 것이 아주 잘못된 모양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그렇게 치료를 했는데도 다시 운동을 하기는 도저히 무리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L의 선수로서의 생은 끝이 나는 거였죠. 시작도 하기 전에.
 아, 이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후…….
 하지만 학교로서는 수확도 있었습니다. 그 소란스럽던 P가 학생 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으니까요. 신기한 일이었죠. 그렇게 얻어 맞고 끌려다니고 또 도망치면서도 거기에 목숨을 다 바치던 그가 더 이상 주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참가조차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글쎄요. P 특유의 그 정의감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쩄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그 둘은 친했지만, 그 일 후에는 부쩍 붙어다니게 되었죠. 우리는 모두 당연히 그러려니 했습니다. 의리 하나로 친구 대신 끌려갔다가 인생을 완전히 종친 녀석을 P가 어떻게 무시하겠습니까. 하나라도 더 챙겨줘야죠. 남자 녀석들끼리 유별나다며 웃어대는 녀석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그 둘에 대해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 문젯거리인데. 지금도 그런 걸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지 않습니까? 예, 그렇겠죠. 징그럽게 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으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아웃사이더가 되는 건 역시 바보짓이구요. 그 때는 그게 또 훨씬 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지런히 쌓인 벽돌 중 모난 것 하나만 있어도 그 벽돌은 바로 가루가 되는 세상이었단 얘기죠.
 아무튼 그 녀석 둘이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의 입술을 찾아 헤매던 그 것을 한 학년 후배 여자애가 보게 된 건…… 그들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재앙이었습니다. 왜 하필 과실에서였답니까. 처음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만 얼마 안가 소문은 몇 배로 부풀려졌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그러기 마련이지만, 말이란 것이 사실보다 훨씬 크게 뻗어나가죠. 그들은 커져나가는 소문에도 변명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 하나 변명을 하다보면 원점으로 돌아오기 마련인데, 그 여자 후배가 이미 두 눈으로 본 것을 도저히 다르게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당시 그들은 죄를 지은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슈퍼에서 돈은 없는데 너무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걸 훔쳐 달아나다 붙잡혀 혼나고 있는 아이.
 정확히 그 둘이 언제부터 그런 관계를 유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도. 하지만 저는 그들이 원래부터 그런 분류의 사람들, 분류라는 말도 좀 우습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그렇게 서투르지는 않았겠죠. 숨기는 방법도 알았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둘은 숨겨야 하는 것인 줄은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죠. 뭐, 그렇게 정확히 목격당한 상황에서는 누구도 그걸 설명할 수는 없었겠지만요. 뭐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성병을 퍼트리는 자들이 아니다? 이런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 말들? 그들은 그 방면에서 똑똑하지도 못했지만 그렇게 했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무서워했죠. 걸어다니는 병균체 쯤으로 둘을 인식하면서.
 일은 굉장히 조용히 진행이 되더군요. P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글쎼요. 말이 좋아 유학이었겠죠. L의 경우에는 더 나빴습니다. 학교 내에는 더 이상 L과 말을 섞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손가락질과 수근거림이 그의 꼬리처럼 달라붙어 쫓아다녔죠. 그는 더 이상 수업에 제대로 나오질 않았습니다. 가끔 교정에서 보게 되더라도 어디서 그렇게 일찍부터 술을 마셨는지 반은 취해서 멍하니 딴 데만 쳐다보고 있기 일쑤였고요. 그리고 얼마안가 L은 자퇴했습니다. 그에게 그 끔찍한 학교에 더 붙어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겠죠. 다리를 앗아가고 누군가를 앗아가고 본인의 감정마저 허락하지 않은 그 학교에 더는 정이 없었을 겁니다. 물론 미련도 없었던 것 같구요. 그리고 그렇게 영영 연락이 끊겨 버렸습니다. L은 그대로 먼 도시로 이사를 했고 누구도 그와 얘기를 않은 탓에 이사를 했다는 것도 나중에야 퍼졌으니까요. 그 후로는 소문만 무성했습니다. 둘이 아직도 만나고 있더라는 둥, P는 아예 중국 여자와 살림까지 차려 거기 산다는 둥, 어쩐다는 둥……. 

 좀 길어졌습니다만, 여기까집니다. 제가 아는 이야긴 여기까지군요.
 하하, 실감이라뇨. 다 지난 옛날 이야기에 무슨 실감이랍니까. 워낙에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라 살을 좀 붙혔나보네요. 아니면 제가 굉장히 훌륭한 이야기꾼인가 보죠. 정선생님께서 그렇게 흥미롭게 들어주셨다니 말이죠. 그럼 이제 그 영화를 기대만 하면 되겠군요. 혹시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아, 그러게요. 그 둘 사이에서 어떤 감정이 언제 싹텄는지는 저도 잘 모르죠. 동기가 부족하다…라. 선생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좀 그렇지만 말입니다. 감정에 어디 이유가 존재합니까. 사람의 언어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거죠. 그러니까 신의 언어를 도구로 가진 선생님께 잘 만들어주시길 부탁드리는거구요. 결말이 없는 거요? 저도 그 후론 소식을 못 들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어짜피 좋게도 못 끝날 엔딩, 없는 편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영화인이라는게 다 그런 것에 살도 붙이고 뭣도 붙이고 하는거잖습니까. 정선생님이 만들어주시는 영화가 실제 얘기보다 훨씬 그럴 듯 하고 좋겠지요. 어짜피 아름다운 결말은 아니었을테니.
 저 말입니까? 다시 여행을 가려고요. 하하, 아무래도 몸에 방랑의 피가 흐르는가봅니다. 그냥 가방 하나 들쳐매고 떠나는 거지요. 우리 잔소리꾼 누님한테 연락하셔도 연락이 안 닿을 겁니다. 떠날 때는 아무에게도 어딜 가는지 말 안 하고 가니까요. 사실 출발하는 그 전 날까지 어딜갈까 못 정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돌아올 떄 쯤이면 영화도 완성해 있겠군요.
 아니, 선생님. 누나랑 꼭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누나도 얼른 좋은 여자 만나서 장가나 가라던데. 제 운명엔 아무래도 결혼할 운이 없는가봅니다. 사람이 다 자기 운이 있는거 아닙니까. 머무르는 삶 자체도 별로구요. 눈이 높아서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째 소개가 들어오는 아가씨들마다 영 맘에 안 차더라구요. 주제를 모르죠, 제가. 나이는 생각도 안하고 말입니다.
 이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됬군요. 그럼 실례지만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삐끗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안 잡아주셔도 걸을 수 있습니다. 이거 뭐, 모르는 사람이 보면 꼭 장애라도 있는 줄 알기 좋군요. 그런건 아닙니다. 이 빌어먹을 다리가 말이죠. 평상시엔 말짱하다가도 꼭 어딜 오래 앉았다 일어나면 남의 다리처럼 굴지 뭡니까. 정선생님도 조심하세요. 다친건 꼭 후유증이 오기 마련입니다. 저도 이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한창일 때는 그래도 견딜만 하던 것이 나이드니까 이 말썽이란 말이죠. 제가 이 다리 떄문에 한 군데 오래 못 머무는지도 모르죠…….

지새는달
지새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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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새는달
  • 2007-03-23
안녕 아지

죽으려고 했다. 어짜피 삶도 죽음이라면, 그보다 더 나빠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옥상의 난간 밖으로 몸을 뺐다. 바람이 얼굴을 칼처럼 뱄다. 그래도 아프지 않았다. 차라리 구원처럼 느껴져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상했다. 저 아래에 떨어질 내 모습, 내가 보지 못할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일초가 하루처럼 흐르고.  밖으로 더 고개를 뺐다. 꿈처럼 몸은 가벼웠다. 그대로 떠날 수도 있었다. 끝일 수도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아주 오래된 사진처럼 빛 바랜 색으로 머릿속에 흩어졌다.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끝이라면…. 그 순간 몸에 온기가 닿았다. 다리 옆으로 기대오는 따듯한 기운. 난간에서 몸을 떼고 옆을 봤다. 아래에 작은 강아지가 있었다. 길게 늘어진 하얀 털, 그마저도 군데 군데 빠지고 누렇게 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하얀색인지도 잘 알 수 없는 강아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내 다리에 부볐다. 짖었다. 꼬리를 흔들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걸까, 주인은 없는걸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따듯한 혀가 손을 핥았다.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첫눈에 반해서….떠날 수 없었다.  아빠는 그 날도 술에 취해 들어왔다. 아지는 이제 겨우 우리집에 적응하고 잠이 들어 있었다. 불안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지를 가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강아지를 키우겠다는 말을 하기엔 지금은 타이밍이 별로다. 술을 먹은 아빠는 어떤 것에나 화를 내니까. 걱정하고 있는 사이, 일이 터졌다. 잡을 새도 없이 문소리와 동시에 아지가 튀어나갔다. 급히 쫓아갔지만 이미 한번 발로 걷어차인 뒤였다. 아빠의 입에서 욕이 이상한 발음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아지를 꼭 끌어안았다. 등 위로 아빠의 발이 마구 떨어졌다. 항상 그랬듯 신경질적이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새어나오는 어줍잖은 말들과 함께 주먹세례가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아지를 놓지 않았다. 끝까지 놓칠까 꼭 잡고 있었다. 등을 구부려 누구든 손을 댈 수 없게 안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십분, 아니면 그보다 더? 아빠는 휘청휘청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강아지가 있다는 것 신경도 안 쓴다는 태도. 그냥 언제나처럼 화풀이 뿐이다. 나는 겨우 일어서 아지를 안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났다. 다른 날처럼 울거나 화를 삭히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이제는 아빠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 발길질이 두렵지도 않았다.  내 손으로 지켜야 할게 있으니까. 아지의 가슴에 귀를 댔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내 곁에도 살아있는 누군가가 있다. 그걸로 충분했다.  " 학생, 이미 너무 많이 아픈 강아지여서 어쩔 수가 없네. " 의사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아지가 며칠이나 그렇게 앓았다는데 약도

  • 지새는달
  • 2007-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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