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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살자 살자

  • 작성자 진명훈
  • 작성일 2007-06-03
  • 조회수 1,536

 

                      

                       자 살자 살자


 

진명훈




“캬아- 쓰다!”


 영훈은 소주의 쓴 목넘김에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재빨리 오징어 다리를 입에 넣었다. 술을 잘 하지 못하는 영훈은 이제 딱 한잔째 인 데도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술을 못하는 것도 사업이 망하는데 한 몫했을 것이다.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마련된 술자리에서 영훈은 억지로 술을 마시다가 항상 먼저 뻗어버렸기 때문이다. 영훈은 거칠게 오징어를 찢어 입에 넣다가 질겁하며 오징어를 입에서 떼어냈다. 술을 못하기 때문에 안주만 먹던 버릇이 또 나온 것이다.

“에이, 죽는날까지 안주벌레 꼴 이라니.”

 영훈은 오기가 생겨 소주를 다시 한잔 들이 삼켰다. 캬아,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영훈은 켁켁 마른기침을 토했다. 괴롭게 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올린 영훈의 눈에 밤하늘의 별이 들어왔다. 고향을 떠나 오기 전에 역에서 마지막으로 올려 보았던 별이 무수히 많았던 밤하늘이 떠올랐다. 그때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것 같았는데. 지금 겨우 한두개만이 빛나고 있는 저 도시의 별들처럼 내 꿈도 모두 사라져 버린 걸까. 영훈은 이 순간 삶의 쓴 맛에 비하면 소주는 설탕물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 추워, 내일 나 구경하러 나올 사람들, 많이들 춥겠는걸...”

 아파트 옥상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유난히도 심하게 불었다. 영훈은 술에 취해 빨개진 볼이 찬 바람에 에인듯해 두 손으로 따뜻이 감싸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파트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수천의 저마다의 창문마다 환하게 밝혀 있는 불빛들이 보였다. 저 불빛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간직하며 살고 있겠지. 그때, 딸랑하는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손에 케이크를 든채 빵집을 나서는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내 생일이였네.‘

 영훈은 왠지 쓸쓸한 생각이 들어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휴대폰을 켜고 번호판만 만지작 거린채 무언가 망설인듯 했다. 그래, 어쩌면 내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너한테 인사는 해야겠지. 영훈은 무언가 다짐하듯 입술을 굳게 깨물고는 1번을 꾸욱 누르려던 차, 문자가 왔다. 영훈은 깜짝 놀라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을 때었다. 그리고 문자를 확인했다.


‘누구한테 온거지? 빚쟁이들이 내 휴대폰 번호까지 알아낸건가.’


[문자메시지 001

오빠, 나 미연이야. 미안해. 우리 결혼...

좀 생각해 봐야 할것 같아. 결혼은 현실

이잖아. 미안해.]


 그래, 니가 결국 죽겠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아주는 구나. 고맙다고 전화를 할까. 아니야, 목소리를 들으면 가지말라고 울어버릴지도 몰라. 영훈은 휴대폰의 폴더를 닫았다. 결국, 네게 마지막 인사도 못하게 되버렸구나. 영훈은 이제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피부로 느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혼자 남겨질 그녀 생각에 이제껏 미루고 미뤄 왔던 것인데, 이젠 그럴 걱정도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영훈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음은 하얀 입김이 되어 어둠속으로 흩어졌다.

 영훈은 신발을 나란히 벗어 놓고 난간위로 비틀 거리며 올라섰다. 높은 곳을 그렇게도 무서워 했었는데, 지금 심장은 이상하리 만큼 고요하고 평안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심장은 내가 세상에게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이 순간, 자신의 고동소리가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주었다. 밤바람이 내 등을 떠밀기라도 하려는 듯이 세차게 몸에 부딪쳐 왔다. 넥타이가 마치 피리에 반응하는 인도의 뱀처럼 요란스럽게도 춤을 추었다. 바람아 서두르지마 곧 뛰어 내릴테니까. 영훈은 차가운 밤공기를 폣속 깊이 들이 마셨다. 얼음가루가 섞인듯한 공기가 찌르르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호흡이다. 살면서 들이쉬는 마지막 호흡이다. 영훈은 눈을 꽈악 감았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한발만 내 딛으면 모든게 끝나는 거야.

 “아, 거참 언제 뛰어 내릴거야. 아저씨! 밤 새겠네,”

 영훈은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며 뻗었던 발을 황급히 거둬 들였다. 무게 중심이 흔들리며 영훈은 양팔을 크게 흔들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난간에 몸을 엎드렸다.

 “허억, 죽는줄 알았네!”

 영훈은 숨을 헉헉 몰아쉬며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때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영훈이 그 쪽을 바라보니 방금까지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 어떤 여자가 앉아 배를 잡고 영훈을 향해 웃고 있었다.

 “아저씨 방금 표정 대박이다 대박! 허억, 죽는줄 알았네! 아 웃겨...”

 그녀는 영훈의 놀라는 흉내까지 내면서 배꼽이 빠질정도로 웃어 재꼈다. 얼굴이 빨개진 영훈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나니까 그렇지!”

 그녀는 챙피해 하는 영훈을 보자 더 크게 웃어댔다. 영훈은 난간에 바짝 엎드린채로 소리쳤다.

 “아 그만 웃고 빨리 가! 남 자살하려는 게 그렇게 웃겨?”

 그녀는 한참을 웃더니 그제서야 좀 진정한듯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채 영훈을 바라보았다. 검은 단발머리에 너무나 하얀 얼굴, 처음 보는 얼굴이였다. 그녀는 소주잔에 소주를 채우더니 단번에 들이켰다. 영훈은 어이가 없어 그녀에게 소리쳤다.

 “아니 무슨 구경났나? 나 얼른 뛰어내려야 하니까 빨리가! 그리고 웃기네 아가씨. 남의 술은 왜 마셔!”

 그녀는 씨익 웃더니 영훈이 보란듯이 소주를 한잔 더 따라 마셨다.

 “어차피 죽을 분이 소주까지 가지고 가게? 욕심도 많으셔라.”

그리고 오징어도 일부러 크게 씹으며 쩝쩝 거리는 소리를 냈다. 영훈은 그녀에게 놀림 받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나 난간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그녀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소주를 든 팔목을 잡았다. 그녀의 피부는 밤바람에 얼었는지 너무나도 차가왔다.

 “결국, 난간에서 내려오셨네요 아저씨.”

 그녀는 뜻 모를 미소를 영훈에게 지으며 잡힌 팔목을 빼 소주를 들이키고는 캬아- 쓴소리를 뱉으며 눈을 찡그렸다. 표정을 보니 그렇게 술을 잘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 술도 못하면서 나 내려오게 하려고 일부러 술 마신거야?”

 “한잔 마시고 얼굴 빨개지는 아저씨 보단 잘하니까 걱정마세요. 그리고 제 이름은 당신이 아니에요. 서경숙에요. 서경숙.”

 “몰라, 당신이름 알것 없고! 나 지금 죽는데 당신이 방해된다는거 몰라? 밤도 늦었는데 어서 집에 가시죠 앙?”

 영훈이 협박조로 경숙에게 말하자 경숙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흥 뀌며 지지 않고 맞 받아 쳤다.

“죽으려는 사람이 왜 남의 눈은 신경쓰실까. 그냥 콱 뛰어 내리면 되지.”

 영훈은 처음 보는 이 여자의 능청스러움에 혀를 내 둘렀다. 남의 거룩한 생과의 이별의 순간을 쩝쩝 거리는 오징어 씹는 소리로 망쳐 놓고는 쏘주까지 제 것인냥 먹고 있다니, 영훈은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해 경숙에게 말했다.

 “아, 나 얼른 죽어야 한단 말이야. 내일이면 못 죽는다 말야.”

 “왜요, 아저씨?”

궁금한듯 경숙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영훈은 머리를 신경질 적으로 긁적이더니 솔직히 말해줘야 경숙이 사라져 줄것 같아서 내 뱉듯 말해줬다.

 “내일이, 내일이 내 생일이라서...”

 “생일인데 왜 못 죽어요?”

 경숙은 큰 눈을 꿈뻑 거리며 정말로 궁금한듯 말했다. 영훈은 이제야 술이 깨어 쑥쓰러운 감정이 되살아 난듯, 경숙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일에... 자살하는 불효자가 어딨어...”

 경숙은 그런 영훈의 모습을 빤하게 잠시동안 쳐다보더니 이윽고 웃음보를 터트렸다. 영훈은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져 경숙에게서 고개를 돌려 소주를 한잔더 들이켰다. 경숙은 배를 쥐어잡으며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효자 납셨네. 생일되기전에 죽는게 마지막 효도에요? 정말 골때리는 아저씨야!”

 “몰라! 하여튼 열두시 되기전에 죽어야 하니까. 얼른 사라져 주기나 해!”

 경숙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갑자기 찾아온 무거운 정적에 영훈을 놀라 경숙을 바라보았다. 경숙은 방금까지 웃음으로 가득했던 표정을 거두고 왠지 진지해진 표정으로 멍하니 무언가를 떠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의식속에서 떠오른듯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젖어있었다.

“아저씨... 죽는다는게 그렇게 좋은건줄 알아? 죽은 놈만 억울한거야. 누가 아저씨를 슬프게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웃고 있을때 아저씨는 이 세상에 없게 되는거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휙휙 젓더니 영훈에게서 소주를 빼앗아 한잔더 들이켰다. 켁켁 거리며 기침을 토해내곤, 다시 그 웃는 얼굴을 영훈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약간 젖은 눈이 반달모양으로 슬픈 빛을 띄고 있어 영훈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저씨 죽는거 방해 안하는게 소원이야?”

 “으,응.” 영훈은 얼떨결에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럼, 아저씨 소원 들어주기 전에 내 소원도 하나 들어줘야해.”

 영훈은 어서 이 정체를 알수 없는 여자를 쫒고 오늘이 가기전에 자신의 몸을 이곳에서 던져야 하겠다는 생각에 덜컥 약속해버렸다. 영훈은 이 여자를 강제로 쫓아낼 그런 담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조용히 이 곳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원이 뭔데?”

 “한 남자한테 주먹 한 대만 먹여줘.”

 “뭐?”

영훈이 경악할 틈도 없이 경숙은 영훈의 팔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시내 곳곳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고, 가게마다 트리와 전등이 치렁치렁 매달아 빛나고 있었다. 거리는 연인들과 가족들의 웃음소리와 따뜻한 크리스마스 전등의 불빛들로 가득차 있었다. 회사가 부도난후 오랫동안 방안에만 틀여박혀 있었던 영훈은 느닷없는 밝은 빛에 둘러 싸여 얼떨떨한 기분으로 경숙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경숙은 어리벙벙한 영훈을 보며 별꼴 다 보겠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크리스마스 시즌이잖아. 아저씬 그것도 몰랐어? 심하다. 선물 줄 애인도 없나봐?”

 영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잊고 있었다. 올해 크리스마스엔 미연이에게 목걸이라도 해주려고 했었는데, 내가 힘들다고 그것도 챙겨줄 생각을 못하고 있었네. 하긴, 이제 뭐 그럴 필요도 없겠지. 그녀도 떠나가 버렸는데.

 “와, 저거 너무 이쁘다!”

경숙이 갑자기 악세사리 노점상 앞으로 뛰어가더니 넋이 나간듯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영훈은 어기적 어기적 걸어와 경숙의 옆에 섰다.

 “와 아저씨 이거 너무 예쁘지 않아요? 나 이거 사주면 안되?”

 영훈은 질색하며 말했다.

 “내가 너 선물 사주려고 따라왔냐. 네 부탁들어주려고 나왔지.”

 영훈이 소리를 지르자 노점상 주인이 영훈을 쳐다보았다. 쳐다보는 눈길이 따가워 영훈은 경숙이 가리킨 머리핀을 재빨리 집어 돈을 주고 돌아섰다. 뒤에서 꺄르륵 웃는 경숙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영훈이 멀어지자 노점상 주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중얼 거렸다.

 “미친 남자인가...?”


 “근데, 누구를 왜 때리라는 거야?”

경숙과 한참을 걷던 영훈이 느닷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머리핀을 만지작 거리던 경숙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 졌다. 영훈은 괜한걸 물어봤다는 생각에 머리를 긁적였다. 경숙은 애써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놈이 나 버렸거든, 내 가슴은 이렇게 아픈데, 그 놈은 웃더라. 그게 미워서 한방 먹여주고 싶은데. 난 그놈 아직도 사랑하거든. 차마 내가 때리지는 못하겠어.”

 영훈은 이제껏 밝게 웃기만 하다가 눈물을 비춰 보이는 경숙이 안쓰러워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 거들먹 거리며 말했다.

 “에이, 나 보고 골때리는 아저씨라더니 여기 골때리는 아가씨가 또 있구만, 왜 그런 녀석을 가만히 둬, 걱정마, 내가 시원하게 한방 먹여줄테니까!”

 경숙은 그런 영훈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아저씨가 반 죽을것 같은걸?”


경숙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어느 건물 안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이곳이 전 경숙의 애인이 이 시간이면 자주 간다는 카페였다. 경숙은 카페 창문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앉은 어떤 한남자를 가리켰다. 그 남자는 어떤 여자와 히히덕 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좋아 저 녀석이구나. 영훈은 카페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경숙을 보고 말했다.

 “너 약속 지켜야 한다. 저 자식 때리고 오면 나 자살하게 내버려 둬.”

 “걱정마, 근데 아저씨 저기...”

 경숙이 말을 끝내기 전에 영훈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경숙은 안절 부절 못하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저 자식 전에 복싱챔피언이였어...”


“야, 너 뭔데 갑자기 주먹질이야! 이자식아!”

카페 테이블이 엎어져 있고 그 위에 영훈이 코피를 흘린채 씩씩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 있다. 가까이서 보자 경숙의 전 애인은 체격이 상당했다. 진작에좀 말해줄 것이지. 나는 운동 안한지 꽤 됐단 말이다. 영훈은 코피를 쓱 훔쳤다. 한 대 얻어 맞은 코가 얼얼하게 뻐근했다. 경숙의 전 애인 인 남자 곁에는 어떤 여자가 놀란 표정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저 자식 경숙을 버리고 그새 애인을 사귀었구나.

 영훈은 다시 한번 그에게 달려들었다. 남자는 금새 복싱 자세로 몸을 숙이더니 영훈의 솜방망이 같이 느린 주먹을 위로 흘려보내고 그대로 영훈의 턱을 주먹으로 올려쳤다. 영훈은 몸이 반쯤 공중에 떴다가 무참히 바닥에 내팽겨졌다.

‘커억, 이대로 자살도 하기전에 저 녀석 손에 죽는거 아냐.’

 영훈은 이제 아에 쌍코피가 터진 코를 움켜잡았다. 전에 같으면 술집에서 붙은 싸움에도 먼저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던 영훈이였지만, 어차피 죽을 생각이였다. 저 놈 손에 죽던 투신 자살해 죽던 마찬가지란 생각에 온몸에 힘이 돌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면 한계란 없는 법이였다. 영훈은 마지막 있는 힘을 쥐어짜내 몸을 일으켜 남자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이건 내 주먹이 아니라 경숙이가 너한테 날리는 주먹이다! 이 개자식아!”

 “경숙......?”

남자는 경숙이라는 소리를 듣자 무슨 일인지 복싱자세가 느슨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영훈은 달려 들어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세차게 꽂았다. 남자의 몸이 무너지며 그 거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영훈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 듬다가 유유히 카페 밖으로 나왔다.


 “아, 아저씨이...”

카페 밖으로 나오자 경숙은 얼굴에 눈물 범벅을 한 채 울고 있었다. 경숙은 남자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는 영훈의 모습을 보며 울고 있었다. 영훈은 그런 경숙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다리가 휘청거려 쓰러질뻔했다. 그런 영훈의 몸을 경숙이 얼른 바쳐주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영훈은 터진 입술이 쓰라렸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약속대로 그 자식한테 한방 먹였다. 이제 속 시원해?”

 경숙은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영훈을 따라 미소지었다.


“자, 이젠 약속 지켜야지. 이제 집에 들어가세요 아가씨.”

경숙에게 힘없는 몸을 기댄체 한참을 걷던 영훈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인도에 늘어선 포플라 나무는 잎은 모두 져버렸지만 잎 대신 가지를 휘감고 있는 색색의 전구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깜빡 거리는 붉고 노란 빛이 경숙의 얼굴에 번지었다가 금새 사그라들었다. 영훈은 경숙에게 다가가 옷깃을 단단히 여며주며 말했다.

“그 녀석 때문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마. 너는 그 보다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거야.”

 경숙은 고개만 숙인채 말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때 그렇게 밝게 웃고 있던 녀석이 왜 그럴까 하는 생각에 영훈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영훈은 웃으며 경숙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천천히 뒤돌아 섰다. 왠지 모르게 안녕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경숙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제 곧 자신 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안녕’하기 위해 아파트 옥상으로 가리라는 것을. 그녀에게 더 이상 살아갈 용기를 잃은 자신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갑자기 경숙이 영훈의 등뒤를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

 영훈은 뒤돌아 보지않은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경숙은 무언가 말하려던 것을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저씨 정말 죽을거야?”

 영훈은 자기보고 얼른 죽으라던 경숙의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났지만 여전히 뒤돌아 선채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래, 나보고 얼른 뛰어 내리라며?”

 “하지만......”

경숙은 말문이 막힌듯 손가락만 만지작 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 이제껏 아저씨한테 말 못한게 하나 있어! 나 사실은......”

 “잠깐,”

 영훈이 갑자기 경숙의 말을 끊었다. 놀란 경숙이 영훈을 바라보니 영훈의 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경숙을 향해 뒤돌아 섰다. 영훈은 웃고 있었다.

 “눈이 내리네.”

 경숙이 하늘을 올려다 보자 하얀꽃들이 하나둘 지상을 향해 내려 앉고 있었다. 밤하늘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내려오는 꽃들은 마치 검은 종이에 흩뿌린 하얀 물감방울 같았다.

 “경숙아, 너 머리핀 잘 어울린다.”

 경숙은 자신의 머리에 달린 머리핀을 만지작 거렸다. 영훈은 그런 경숙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려는 듯이 잠시동안보더니 뒤돌아서서 경숙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경숙은 그런 영훈을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 살아가는건 정말로 슬픈거야! 하지만 그 슬픔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으면 해...... 아저씨가 복싱챔피언을 쓰러뜨린 것처럼......”

 영훈은 경숙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손만 뒤를 향해 들어 흔든 다음 미련없이 앞으로 걸었다.


 영훈은 다시 아파트 난간에 올라섰다. 시계를 보니, 아직 내일이 되려면 10분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결국 생일에 죽는 불효자는 면할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경숙은 집에 잘 들어갔을까. 영훈은 왠지 모를 그리움에 경숙을 처음 보았던 그 자리를 돌아보았다. 역시 그녀는 없었다. 어린 네가 이해할수 없는 슬픔이 이 안엔 가득 들어있어. 경숙아 미안해, 난 더 살아갈 힘이 없다. 영훈이 눈을 딱 감고 뛰어내리려 할때 뒤에서 철문을 벌컥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영훈이 뒤를 돌아보니 카페에서 싸웠던 경숙의 전 애인이였다. 어이가 없어진 영훈이 소리쳤다.

 “아니, 이것들이 쌍쌍으로 남 죽는거 방해하러 오네. 뭐야, 한판 또 뜨러 왔냐? 시간 없어!”

 경숙의 전 남자친구란 남자는 영훈을 급하게 찾아왔는지 숨을 헉헉 거리면서 힘들게 말했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무언가 대단한 사실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허억, 허억, 당신이 겨,경숙이를 어떻게 아십니까.”

 영훈은 뭐 별거 아닌라는 듯이 말했다.

“경숙이가 당신 패주라고 나한테 시켰소, 됐소?”

영훈의 그런 말을 듣자 남자의 눈이 커지며 놀란듯 휘청거렸다. 저러다 나보다 먼저 심장마비로 죽겠군 영훈은 내일이 되려면 몇분 남지 않은 시계를 보며 어서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남자가 그의 등뒤를 향해 소리쳤다.


 “겨, 경숙이는 1년전에 죽었어!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뭐?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영훈의 몸의 중심이 난간 밖으로 넘어가버렸다. 영훈을 향해 뛰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슬로우처럼 느리게 사라진다. 드디어 난간 밖으로 발을 떼어낸 영훈은 발 밑에 아무것도 딛어지는 것이 없음을 알고 모든게 드디어 끝이 났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발에서 자신의 무게를 느낄수가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영훈의 몸에 부딪쳤다. 그래, 경숙이가 말못한게 하나 있다더니 바로 그거였나. 너도 여기서 죽었었구나. 그래서 내가 죽는걸 막으려고 나타난 거였어? 미안해, 나는 그것도 모르고 뛰어내려버렸어. 그래서 그렇게도 슬픈 얼굴로 눈물을 보였었던 거였구나. 미안해, 미안해, 이제 와서 다시 살고 싶다고 하면 너무 염치가 없는 걸까? 그래도, 경숙아, 나 살고 싶다.


 

 따뜻한 아침햇살이 아파트 건물 사이로 비춰 들어와 화물트럭 짐칸에 누워 있는 영훈의 볼을 간지럽힌다. 종이 박스 사이로 삐져나온 스티로폼들이 영훈의 주변에 어지로이 흩어져 있다. 진눈깨비 눈 한송이가 영훈의 콧등에 살며시 내리 앉는다. 영훈의 미간이 꿈틀 거린다. 영훈이 잠에서 막 깬 것 처럼 부스스 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띵동, 문자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영훈 화들짝 놀라며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낸다. 문자가 2개 와있다.


[문자메시지 001

KTE 고객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저의 서비스 많은......]


[문자 메시지 002

오빠, 나야 미연이. 어제 했던 말, 내 진심 아니야.

그냥 무서웠어. 앞으로 우리가 부딪쳐야할 많은 장애물들이.

오늘 오빠가 죽는 꿈을 꿨어. 깨어나도 울음이 멈추질 않더라.

나 오빠 너무 사랑해. 오빠와 함께라면 견뎌낼수 있어. 사랑해.

그리고 오늘 오빠 생일 축하해.]


 영훈은 이제까지 얼떨떨한 기분에서 점점 깨어나기 시작하자 어제일이 떠올랐다. 분명히 나는  뛰어내렸었는데. 모든 것이 끝장난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다. 머리를 흔들어 보려 머리카락을 만지자 무언가가 만져졌다. 떼어보니, 경숙에게 선물했던 머리핀이 손에 들려 있었다. 순간, 영훈의 눈에 눈물이 쏟아졌다. 날 니가 살려준거야? 너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영훈은 그대로 뒤로 쓰러져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앞을가려 보이질 않았지만 그 사이로 태양만은 분명히 보였다. 그래, 오늘이 내 생일이다. 과거의 모든 어두운 것들을 떨쳐내 버리고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은.


 경숙, 네가 선물해준 생일이야!    

진명훈
진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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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분 소녀

  일곱시 삼십분 소녀   일곱시 칠분,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아, 내 기억속의 그날에는 왜 이리도 복잡한 도시 위에 안개가 많이 끼였는지. 간헐적으로 지나치는 차의 질주하는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의 짖음, 가게문을 여는 소리를 제외 하고는 마치 라디오의 불륨을 최대로 낮춘 것처럼 정적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였다. 그 안개의 해운을 해치며 횡단보도 앞에 다다른 나는, 여느날처럼 헛된 공상을 하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르르---- 마침 신호등이 바뀌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리고 나는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 그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예상하지 못한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던 것이다.   짧은 신음이 심장에서부터 전류를 타고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약간 젖어있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감은 듯 뜬 눈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계를 쫓고 있어 살짝 웃고 있었다. 이 세상엔 존재 하지 않는 천사의 나팔소리라도 듣고 있는 걸까.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녀는 호수위를 걷듯 가벼운 걸음으로 천천히 내곁을 스쳐갔다. 지금도 귓가에 선명한 그녀의 콧노래 소리를 회상하면 아직도 그날의 전류는 내 몸에서 전율한다.   점점 나는 야위어 갔다. 밤에는 잠들기가 두려웠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불을 끔과 동시에 그녀의 미소가 불현듯 가슴속에서 치고 올라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리는 것이였다. 점점 선명해져 가는 그녀의 기억 앞에서서 손에 닿을수 없는 그녀에 대한 내 간절함은 더욱 골이 깊어져 갔고,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내보지 못한 내 무능력함을 한 없이 자책하고 가슴아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손으로 내 심장의 균열을 후벼파다가 지쳐 쓰려져 잠이드면 꿈 속에서 조차 그녀를 그리다가 아침엔 다시 그녀를 만난다는 두근거림으로 내 하루는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또다시 돌고 있었다. 이런 하루는 나를 점점 야위어 가게 만들었다.  그날 하루는 도저히 어떻게 흘러 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친구들의 수다에도 그저 망연한 미소만을 띄운채 흘려 듣고 선생님의 말소리 조차 먼 산의 메아리처럼 울려 올 뿐이였다. 나는 햇빛이 쨍쨍한 이 오후의 하늘 아래에서도 그 일곱시 삼십분의 안개에 둘러 쌓여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되고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불꺼진 뒤 찾아온 이 무섭도록 조용한 정적속에 그녀의 콧노래와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미소가 가득차 흐붓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죽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행복했을까.  기다렸어. 평소에도 네가 오는 일곱시 삼십분을 기다렸어. 우린, 서로를 기다려 했었네?  

  • 진명훈
  • 2007-09-09
초혼

   “그래요, 언제부터 였나요.” “하지만......” “그러니까, 지금은 어떠한 의심도 없이 묻는 겁니다. 당신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뒤통수를 쫓는 어머니의 애절한 눈빛은 제 머리채를 쥐어 잡는 듯 했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제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대한모욕이자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이였습니다. 아버지를 헛된 허깨비의 망상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에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병원 밖을 나와 어머니가 나올 때까지 어머니의 차앞에서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무척이나 탐탁지 않은 표정이셨습니다. 차가 병원을 떠나고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주홍빛 조명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경수야, 너 왜 그러니?” “뭐가 말이야.” 글을 쓴다는 친구였습니다. 그는 말 없이 제 옆에 앉아 있다가도 이따끔씩 저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전 말없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끝까지 저를 추궁해 답을 얻었을 텐데, 그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 없는 미소가 그에게는 더 확실한 대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는 그 말없는 미소의 의미를 여러모로 파헤친 생각들을 소설화 시켜 글을 써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친구인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 아이는 여러편의 소설을 제게 보여주었는데, 사실 제가 유령이였다느니, 몇 년전에 이 학교에서 자살한 귀신이였다느니, 독특한 상상들이 가득한 소설들이였습니다. 그 친구는 오늘도 제 옆자리에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뭐가 말이야.”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생각에만 몰입하는 일.” 저는 말없는 미소를 다시 지어 주었을 뿐이였습니다. 그날밤 이였을까요, 아니면 그 후 얼마더 지나서 였을까요. 저는 제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결핍되 오던 외로움을 잊을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4 촉도 낮은 형광등 아래 어머니와 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상자안의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책상을 손으로 텅텅 치며 배를 잡고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와 저의 얼굴에는 알록달록한 텔레비전의 색채가 여기저기 일그러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뭐가 말이야.” “의사가 하는말 못들었니? 너 정신병이라잖아.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온 정신병이......” 저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러버렸습니다. 텔레비전 속 방청객들의 환호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 보았습니다. 눈가에는 눈물이 이미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잔주름을 가득 적신 눈물은 그마저도 모자라 어머니의 볼 위로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울컥 저려왔습니다. “경수야.” 저는 탁 풀려버린 맥에 그

  • 진명훈
  • 2007-08-26
블루 다이어리

  학교 점심시간 이였다. 핸드폰을 학교 선생님에게 들키면 압수 당하기 때문에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핸드폰 폴더를 젖혔다. 경숙의 문자였다. 폴더를 다시 닫았다. 닫히는 순간 들리는 딱 하는 소리가 정적속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 핸드폰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머뭇거리다가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경숙의 번호를 꾸욱꾸욱 눌렀다. 한 번호 번호를 누르기가 왜 이렇게 망설여 지는지 알 수 없었다. 짧은 신호음이 흐르고 딸깍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미안하...” “수술비는 내가 낼게.” “뭐?” “그런데...?” “끊을게. 곧 수업 시작해.” 2  경숙은 짧은 미니스커트에 귀걸이를 한 차림새로 날 맞이했다. 나는 그녀의 억지로 짓는 미소 띈 얼굴보다 그녀의 배를 먼저 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자신의 배를 살짝 본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배가 고픈 게 아니야. 알지?” “아주 식성 좋은 아이가 태어날 것 같군.” “나 사실 무서워.”  콜라 컵의 뚜껑을 열었다. 때마침 얼음이 미끄러져 사그락 거리는 맑은 소리를 냈다. 나는 얼음을 입에 넣고 오도독 씹었다. 얼음을 씹을 동안 그녀는 가만히 나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지우자. 마치 연필로 잘못 쓴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듯 지워버리자. 그 아이는 어떤 글자를 잘못 썼을까. 모음을 잘못 썼나 자음을 잘못 썻나 아님, 마침표를 잘못 썼을까?” 3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현철이와 여자들이 소란 거리는 소리가 문 밖에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현철이가 방안에 들어와 여자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루에서 여자들은 발에 묻은 백사장의 모래를 털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현철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들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간간히 고개만 끄덕여줄뿐 다행이 분위기는 현철이가 재미있게 이끌어 가고 있었다. 처음 마신 소주가 이제야 취기를 돋기 시작했다. 이미지가 정신 없이 허물어지고 여자들의 톤 높은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리는 와중에 나는 그 사이로 눈동자 두 개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블링처럼 물위에 퍼지는 이미지 가운데 또렷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어지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숙박집 문을 나섰다. 그리고 해변가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밤이 되자 해변가는 낮보다는 한산했다. 여름방학동안 추억을 쌓자며 현철이와 동수는 억지로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그들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였고 나는 조용한 사람이였다. 그들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나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사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보단 관심이 없기에 대충 흘려듣고 나는 내 속의 이야기들에만관심이 있었다. 증거 없는 거짓말이기에 그들은 완전히 속아 나를 배려심 많은 친구라고 믿은 것이다. 어둠과 맞닿은 바다의 해안선을 바라보다가 뒤쪽에서 모래가 사각 사각 밟히는 발소리가 들

  • 진명훈
  • 2007-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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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մϴ ̸Ͽ´ ^^

    • 2007-06-29 20: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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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감동적이에요.ㅠㅠ

    • 2007-06-21 20:58:1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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