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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 작성자 변혜지
  • 작성일 2007-06-19
  • 조회수 840

#1

 

엄마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바로 두,세달 전까지만 해도 기억 저 편으로 꾸욱꾸욱 눌러 숨기려고 했었다. 분명 엄마를 뺏기는 아이의 마음은 아니다. 엄마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엄마를 사랑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엄마를 책망할 마음도 없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혼자 오빠와 날 키우느라 고생했을 엄마에게도 의지할 사람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저씰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엄마의 짝으로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해봐도 가슴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묘한 배신감을 지울 수 없다.

 

정아야 밥 먹어야지.

됐어요.

그래도 좀 먹어, 그래야 공부하지 너 시험기간이라고 고생하잖아.

배 안고프다고.

 

 엄마는 천천히 방문을 닫고 나간다. 요즘 들어 이상해진 나의 태도에 엄마 또한 뭔가를 느낀 듯 평소와는 다르다. 내가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 같지는 않다. 단지 무언가 내가 힘들어 하고 있다고 어렴풋이 느끼는 정도가 다일 것이다. 나는 여태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해왔으니까. 짜증이 밀려온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고는 침대 위에 엎어졌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질러댔다. 이불에 묻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았다. 극도로 짜증이 날 때 마다 나오는 나의 못된 버릇이다. 내가 울기 시작하면 주변의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오빠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분명 엄마의 한숨소리에 잔뜩 열이 받아 들어왔을 오빠지만 우습지도 않다. 오빠에 비하면 나의 말썽은 효녀상을 받을 정도니까.

 

너 엄마한테 대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오빠나 엄마 속썩이지 말고 그런 말 해봐.

윤정아 너 맞고싶냐.?

나 좀 가만 내버려 두라고!.

 

 내 위에서 잔뜩 날 노려보며 주먹을 쥐고 있는 오빤 내버려 두고 눈을 감았다. 오빠 따윈 사라져 버렸으면 한다.

                       

철썩

 

 볼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느낌과 함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굳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씩씩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은 세게 닫혔다. 오빠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귀에 맴돈다. 넌 아직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건 오빠 자신이다.

 

열 일곱 이라는 나이는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행복한 아이로 놓아 두지 않는다.

 

#2

 

아침이다. 그리고 혼자. 엄마는 일을 나갔을 것이고 오빠는 밤중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옆 방에서 통화하는 것을 들은 바로는. 시계 바늘은 이미 아홉시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두렵다. 학교에서 날 보며 또 수근거릴 말들이 두렵다. 이미 낙인 찍혀 버린 날 누구도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난 문제아다. 중학교 때 까지 만해도 착했던 아이가 변해버렸다고 어른들은 말하고 친했던 아이들은 놀지도 못했던 아이가 나댄다며 깔본다. 두렵고 서럽다. 억울하다. 나는 변한 게 아니다. 잠깐 주저 앉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주저 앉은 어깨를 일어날 수 없도록 짓눌러 버린다.

 

  교복을 주워 입고 나가려는데 문소리가 들리고 오빠가 들어온다. 눈이 마주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말 없이 서로가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오빠가 집안으로 들어서고 그리고 나는 그런 오빨 지나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게 끝이다. 서로 가족이라고 불려 지는 사람들의 인사는 그게, 끝.

 

  이 시간에 학교를 가는 나를 사람들은 묘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앞만 보고 지나가려고 노력하지만 눈길 받고 있다는 불쾌감을 지울 순 없다. 결국 나는 학교로 가는 인적 없는 골목까지 달렸다.

 

하아 하아 ……”

 

 숨을 몰아 쉬며 걷고 있는데 골목 옆으로 학교 아이들이 보인다. 담배를 물고 있고 명찰을 보니 나와 같은 1학년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옆을 지나 걸으려고 했지만 들리는 목소리에 내 발자국은 거짓말같이 멈춰버렸다.

 

찌질이 같은 게 나대기는…”

 

  난, 나는 저런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무언가를 잘못한 것이 없다. 화가 나고 열 받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항할 힘 같은 건 없다.

 

가던 길 가라?

 

   발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무언가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발만큼이나 입이 무거워 떨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날 욕하고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화가 난다. 몸을 돌려 얼굴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너 같은 게 내 속을 아냐고 소리지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미친년…”

 

 내 옆으로 침을 뱉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난 그저 뒤에서 잔뜩 노려볼 뿐이다. 날 비웃는 소리가 계속 귀에 들려온다.

 

씨발…”

 

 뒤에선 얼마든지 욕하면서 앞에선 말 한마디 못하던 내 모습이 혐오스럽다. 하지만 앞에 나서서 항의할 용기는 없다.  내가 친했던 아이들한테 모든 걸 말하지 않은 이유도 비슷했다. 내게 내 사정을 밝힌다면 그래, 앞에서는 동정해줄지도 모른다.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해 줄 것이다. 하지만 뒤에선 단지 흥미 있는 친구들과의 이야깃거리로 전락 해버린다는걸 안다. 여태까지 나도 그래왔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심각한 얘기들을 그 아이들과 가벼운 말투로 주고 받다가 잊어버리곤 했으니까. 그 걸 뻔히 알면서 그 아이들에게 이야기 할 용기는 내게 없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다가 결국 다시 뒤 돌아 걸었다. 다시 그 아이들이 있는 곳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골목을 빠져 나오려다가 나는 다시 멈칫, 했다. 날 이상하게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길이 생각났다. 병신, 병신 윤정아. 아무것도 못하는 겁쟁이 윤정아. 학교가 끝날 시간이 될 때 까지 나는 그 골목에 멍하니 서있었다.

 

#3

 

  거실에서는 끊임없이 기분 좋은 듯한 엄마와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이 사실을 기억에서 꺼낸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우연히 엄마의 휴대폰을 열었고 나와 같은 기종의  휴대폰이라 어렵지 않게 여러 메뉴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메모장에서 글을 보게 되었다. 아저씨와의 그 동안의 추억들, 그리고, 엄마의 마음까지도. 나는 그대로 휴대폰을 닫고는 서둘러 엄마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글들은 내 마음을 휘젓고 있다.

 

정아야 나와서 과일 좀 먹어.

 

  잠긴 방문을 두드리며 하는 엄마의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방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상 앞에 앉아 과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TV를 보는 척 하며 엄마와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웃는 엄마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가슴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고 올라왔다. 우리들 앞에서 엄마는 행복한 표정을 잘 보이지 않는다.

 

자기도 그러잖아.

 

  그 전에 아저씨가 했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말한 한 단어가 내 머릿 속에 맴돌았다. 자기자기..자기.. 엄마는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여전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가 TV에 푹 빠져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으로 안 걸까, 아니면 내가 이제는 이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과일 그만 먹니.?

.

 

  내가 자신의 말에 충격 받은 거라고는 엄마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 공부 열심히해 힘내 우리딸 이라는 말을 끝으로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는 내게서 눈길을 거둔다. 자기 순간적인 생각에 재빨리 컴퓨터를 켜 자기 라는 말을 검색해 보았다. 여러 검색 결과 중에서 하나의 문장이 눈에 띄었다.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대명사…”

 

#4

 

  잠들었다가 어렴풋이 깨어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거실에서 오빠와 엄마가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속을 썩이는 오빠인데도 엄마는 오빠와 대화 할 때는 밝은 표정이다. 항상 내 앞에서 들리던 한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순간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가만히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아저씨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몸이 바짝 긴장해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굳어버렸다. 재혼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며 빠르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나가 엄마와 오빠를 빤히 바라보았다. 슬쩍 당황한 듯한 엄마와 오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멍청하게 서있는 날 엄마와 오빤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화장실 가려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난 화장실에 들어가 재빨리 문을 잠갔다. 머리가 아프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아야.?

 

  한참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앉자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며 난 물을 내리고 문을 벌컥 열고 나가 방으로 들어갔다.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정아야 잘자렴.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방문을 타고 그대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나는, 엄마의 짝을 반대하진 않지만 이대로 새 아빠가 생기는 건 바라지 않는다. 십 오년간 그렇게 살아왔던 인생에 다른 누군가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끼어 드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제 와서 생기는 아빠 따위, 인정 할 리가 없잖아…”

 

  창 밖으로 뿌옇게 달빛이 보였다. 유난히 달의 상흔이 크게 보였다. 저 상처 자국을 만져보면 어떤 느낌이 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보름달이다.

#5

 

아침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빠짐없이 하루에 한번 꼴로.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보다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아침이 훨씬 더 무섭다. 옷걸이에 얌전하게 걸려있는 교복이 보였다.

 

학교가야지

 

  학교보다 집에 있는 것이 더 끔찍했다. 거실에는 오빠와 엄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치우지 않은 빈 맥주 두 캔 , 그리고 빈 접시들.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 캔을 들어 힘껏 손에 쥐었다. 캔은 달그락대며 손 안에서 오그라들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도 힘껏 쥔다면 오그라들어버렸으면. 나나, 오빠나, 엄마, 그리고 아저씨의 마음마저도 있는 힘을 다해 쥐어 짤텐데. 그대로 캔을 내던져 버리고 집을 나왔다. 학교로 가는 길은 이상하게 싸늘했다. 참 많은 아이들이 가고 있는 길인데도 참 이상하게.

 

, 오랜만에 학교 왔네?

 

  입술을 뒤틀며 이죽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오늘만큼은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머릿속에 그 아이들의 모습이 들어올 공간이 지금은 없다. 비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까지 왔다가 멀어진다. 눈을 감아 버렸다. 책상 앞에 앉아 밑을 내려다 보니 낙서가 가득했다.

 

미친년

나대지 말아라 찌질아

 

  비식비식 웃음이 비져 나왔다. 그렇게도 끔찍하게 여겼던 것들인데 그런데 더 큰 고민이 생기자 마자 우스워져 버리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쪼개기는 미친년

 

  한 노는 아이의 말과 함께 그 무리 아이들의 웃음이 터진다.. 다른 아이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아무것도 담지않은 무심한 방관자들의 표정. 어쩌면 비웃는 아이들보다 그냥 저렇게 바라보는 아이들이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엎드려 버렸다. 지금은 조금 자고 싶었다.

 

잠깐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들어오는 선생들마다 나를 깨우려고 했고 그 때마다 나는 일어나지 않은 채 엎드린 자세에 더 힘을 주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들은 내 앞에서만 항상 악마가 되어버린다.

 

우리 정아 머리가 너어무 아프대요

 

  한 아이의 말이 장난스럽게 나오자 아이들은 저마다 킥킥 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선생은 나를 한 번 더 툭, 치고는 수업을 시작했다. 정말로 지금 나는 머리가 너무 아 프 다.

 

#6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시계는 여섯시를 넘어 있었고 아이들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몇몇 아이들의 힐끔 거리는 눈길이 느껴졌다. 난 가방을 싸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빠져 나왔다.

 

어이, 거기 너 어디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까불지 말고 들어가.

 

   딱딱하게 굳은 선생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난 그대로 교문을 향해 내달렸다. 소리를 지르며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교문을 빠져 나와 이젠 됐다 싶을 때쯤 나는 서서히 달리기를 멈췄다. 학교를 나오기는 했는데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골목에서 서성이던 나는 근처 PC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드 가지고가.

 

  그냥 컴퓨터를 향해 들어가려던 나에게 카운터를 보던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카운터를 내려다보던 나는 카드 한 장을 가지고 제일 구석진 자리로 가 주저 앉았다. 유난히 외진 자리라 일부러 발꿈치를 들어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여기저기서 음악소리와 게임소리가 귀를 자극해왔다. 소리에 묻혀 내가 없어져 버렸으면.

 

  막상 컴퓨터를 켰는데 할 게 없었다. 내게는 즐겨 하는 카페도, 즐겨보는 만화도, 하다 못해 메일조차도 없었다. 중학교 때 하던 카페는 주소조차 기억 나지 않는다. 십오분 정도 이것 저것을 만지작 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일어서 버렸다.

 

얼마에요.

그냥 가.

 

  금방 나온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흘끔흘끔 쳐다보던 아저씨는 이내 눈길을 거둔다. 얼굴이 괜히 화끈거려 빠른 걸음으로 PC방을 나왔다. 거리는 밝고 활기차서 내가 끼어들 곳이 없었다. 결국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

 

다녀왔습니다.

 

  잠깐 나갔는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 엄마의 휴대폰이 보였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다시 엄마의 휴대폰을 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메모장을 눌러 보기 시작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더라, 정아가 많이 힘들어 하면 다시 생각 해보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꿋꿋하게 혼자 숨겨왔다고 생각 했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엄마는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른 척 하려 했기 때문에 , 그랬기 때문에 모른 척 해 준건가 엄마는. 다시 생각해 본다는 말이 그렇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일을 다시 생각해 본다는 건데도 기분이 좋지 않다.

 

정아 와있었네 일찍 왔구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엄마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죄책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응 다녀오셨어요. 그럼 나 들어간다 이제.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빠르게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가 무언가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이 무엇인지 나도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정아가 많이 힘들어 하면 다시 생각해보자

다시 생각해보자

다시 생각

 

다시 생각, 해볼게

 

  나도

 

#7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저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인사말 몇 마디를 하더니 이런 저런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목소리를 낮춰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았다. 몇 마디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내 이름이 간간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더 이상 말이 나오면 안될 것 같아서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당황하는 아저씨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내 이야기 하고 있던 건가 정말.

 

배고파

 

  어색해진 분위기가 싫어 불쑥 말을 꺼내고 거실에 가 주저앉아 TV를 켰다. 이제, 됐겠지. 하고 안심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불쑥 일어나 부엌으로 가셨다. 불안이 온 몸을 엄습했다. 아까 그 얘기를 이어서 하려는 걸까. 아니면 이미 끝나버린 걸까.

 

정아야 안녕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

안녕히 가세요.

 

  일이분도 되지 않아 아저씬 부엌에서 나와 가셨고 엄마가 상을 차려 거실로 나왔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기분 탓 일거야. 그럴 리가 없어 얼마 전 까지 결혼이야기도 꺼냈는  걸. 결혼을 반대하는 생각과 헤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상충되어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난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아저씨와 헤어진 채 혼자가 되는건 싫다. 이기적 인건가 난.

 

아저씨랑 무슨 얘기했어?

뭐 그냥 이런저런…”

 

  엄마는 대답을 피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이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에서 자꾸만 막혔다. 아저씨는 그 후로 몇 칠간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엄마와 만난 기색도 없었다. 설마 하면서도 자꾸만 불안했다.

 

나도 다시 생각해 본다고 했었잖아 그랬잖아 엄마.

 

   그리고 방학이 찾아왔다.

 

 #8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머리가 자주 아팠다. 그렇게 앉아 있는데 정말 오랜만에, 아저씨가 오셨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리면 엄마도, 나도, 아저씨도, 모두 불행해져 버리는 일이 올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 그래…”

 

  두분 다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했다. 엄마의 표정은 죄인을 보는 것 같았고 아저씨는, 씁쓸해보였다. 그 두사람의 표정의 원인은 모두 나, 란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좁다란 집이 갑자기 크게만 보였다.

 

저기, 할 말이…”

,엄마! 애인 왔는데 앉으란 말도 안하고 뭐해? 아저씨 앉아서 얘기하세요!

 

  아저씨의 입에서 무언가 심각한 말이 나올 것 같아 다다다 말을 해버리고 나서 나 또한 놀라 버렸다. 엄마와 아저씨의 표정이 뭔가 묘하다. 거실에 잠시 이상한 적막감이 돌았다. 나도 모르게 방으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다.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고맙다 딸]

 

   계속 아파왔던 머리가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다.

 

 

 

 

 

 

 

 

소설은 처음 이빈다...

(떨고 있음

변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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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혜지
  • 2007-12-02
변비

 변비1잠자리에 누워서도 배는 여전히 묵직했다. B양은 결국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변비는 불면증의 원인이 된다던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다. B양은 배를 붙잡고 어기적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인상을 찌푸리며 힘을 주는 B양의 얼굴에 잠시 환희의 표정이 어렸다. 뿌우웅. 변이 아님을 깨달은 B양은 휴지를 쥐어뜯어 말아 들고 다시 힘을 주기 시작했다. 누가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했던가. B양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에 먹은 감자탕이 아직도 배에 자리 잡고 있다. B양은 눈을 감았다. 더 힘을 주기 위해 엉덩이를 뒤로 빼고 몸을 수그렸다. B양의 항문에서 미세한 반응이 일었다. B양은 그 기세를 밀어붙여 항문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휴지를 말아 쥔 손에 땀이 배어나왔다. 퐁. 짧은 순간 기쁨에 가득 찼던 B양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짧은 반응, 여전히 찝찝한 아랫배.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난 B양은 변기통을 보고 이를 갈았다. 엄지 손톱만한 변 덩어리가 B양을 약 올리듯 물속을 떠다니고 있었다.너 뭐 하는거니?반쯤 열린 문 사이로 B양을 쳐다보며 B양의 어머니는 경악했다. 엉덩이를 깐 채로 치켜 올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 B양의 모습은 가히 엽기적이었다. B양은 급히 문을 닫았다. 아무것도 아니야.B양은 휴지도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바지를 올리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B양의 등 뒤로는 여전히 변 덩어리가 떠다니고 있었다. 물 좀 내려! 아휴 지겨워.B양의 엄마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B양은 아무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B양은 무언가에 홀린 듯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똥 싸고 싶어…….2B양은 지난 밤 꾼 꿈 때문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꿈에서 B양은 똥 무리를 보았다. 각각의 똥에는 이름표가 하나씩 붙어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자신의 이름표 같은 건 없었다. 아이들은 누렇게 뜬 얼굴로 학교에 온 B양을 슬슬 피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평소엔 말 한마디 걸지 않던 D가 얼굴에 비웃음을 띄며 말을 건넸다. B양은 멍하게 D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장에서 더 밑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면…다시 소장으로 역류하고 천천히 위까지 올라올거야. 그리고….D는 미친 여자를 보는 듯 한 표정으로 B양을 흘낏 보더니 자기의 무리로 돌아가 B양을 가리키며 쑥덕거렸다. 한참을 킬킬대던 무리는 B양을 빙 둘러싼 채 킬킬 거렸다. 야 너 변비냐? 한 아이의 말이 떨어지자 다른 아이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B양은 그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고개를 숙인 채 아랫배에 대해서만 생각하려던 B양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D의 검지손가락이 B양의 눈 앞 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와하하. 다시 아이들의 웃음이 터졌다. B양은 주먹을 쥐었다. 어쭈, 니가 주먹 쥐면 어쩔 건데?당연히,어쩔 도리 같은 건 없었다. B양은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B양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한참을 웃어대던 무리는 종이 울리자 B양의 머리를 다시

  • 변혜지
  • 20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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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외계인 )) 킥킥 남탐 포기 (... 아 힘드러 감사하빈다 유하언니 )) 에헤 감사하빈당♡

    • 2007-06-25 22:54:3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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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처음치곤 잘 썼네 ㅇㅅㅇ 그럼 또 까칠평[... 1. 내 위에서 잔뜩 날 노려보며 주먹을 쥐고 있는 오빤 내버려 두고 눈을 감았다 -> '나는'이라는 주어가 없습니다. 2. '내가 이 사실을 기억에서 꺼낸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 어떤 사실 말인가요? 3. 대화문은 들여쓰기 합니다. 4. 몇 칠간 -> 며칠간 수고했어요.

    • 2007-06-24 21:01:0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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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berte

    생각보다 잘썼네... 수고했음 잘했다 마무리 맘에 듬

    • 2007-06-21 05:29:26
    libe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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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우와아...잘쓰셨다!!!고등학생분같에요...ㅠ.ㅠ부러워요.그런데 결론은...?궁금해요오~!!!

    • 2007-06-20 18:33:0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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