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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다이어리

  • 작성자 진명훈
  • 작성일 2007-08-02
  • 조회수 2,055

 


블루 다이어리



진명훈



1


 [축하해줘, 2개월이래. ]


 학교 점심시간 이였다. 핸드폰을 학교 선생님에게 들키면 압수 당하기 때문에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핸드폰 폴더를 젖혔다. 경숙의 문자였다. 폴더를 다시 닫았다. 닫히는 순간 들리는 딱 하는 소리가 정적속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 핸드폰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머뭇거리다가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경숙의 번호를 꾸욱꾸욱 눌렀다. 한 번호 번호를 누르기가 왜 이렇게 망설여 지는지 알 수 없었다. 짧은 신호음이 흐르고 딸깍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문자 봤니?”

 나는 보이지도 않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럴 때 해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그것 이외에 적합한 단어를 알지 못했다.

“미안하...”

“도대체 뭐가 미안한데?”

 그녀는 미안한 일이 무엇이냐고 도리어 내게 물었다. 사실, 그녀가 그 말을 물을 까봐 나는 두려웠었다. 그것은 그녀가 앞으로 겪어야할 현실들을 내 입으로 설명해 줘야 한다는 소리였다. 너는 앞으로 주위사람들의 바늘 섞인 시선을 받아야 할거야. 그리고 고등학생이란 어린 나이로 산부인과에 들어가야 하겠지. 네 어린 나이에 간호사는 너의 등뒤로 혀를 끌끌 찰 것이고 의사도 탐탁치 않은 얼굴로 너를 훑어 볼것이야. 여자의 몸은 소중한거야. 비슷한 말을 내 뱉겠지. 속으로 말을 꾸욱 삼켜냈다. 간신히 한 단어가 입술사이를 비집고 삐져나왔다.

“수술비는 내가 낼게.”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핸드폰의 스피커 사이사이로 훅훅 불어나왔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차갑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애기 날거야.”

“뭐?”

“애기 날거라구. 왜 싫어?”

“싫은건 아니야. 그런데 ......”

“그런데...?”

“넌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

 그녀의 비웃는 듯 한 조소섞인 말투가 뚝 멈추었다. 우린 서로 사랑하지 않잖아. 차마 그말만은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 사이를 간신히 엮어주고 있는 가느다란 실마저도 끊어버릴 잔인한 가위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둘 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못 본척 발견하지 못한 척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그로써 우리는 평범한 연인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잔인해 질수가 없었다.

“끊을게. 곧 수업 시작해.”

 그녀의 전화기가 끊어졌다. 그녀는 끝내 날 사랑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순간 무엇인가가 목구멍으로 치솟아 올라 괴물과도 같은 단발마를 내질렀다. 우아악- 고막이 찢어질 듯한 괴성이 화장실 안에 메아리쳤다. 다행히도 화장실에는 나 혼자 뿐이였다. 그리고 또 다행히도 괴물의 울부짖음을 들은 것도 나 혼자 뿐이였던 것이다.


2


“늦지는 않았네.”

 경숙은 짧은 미니스커트에 귀걸이를 한 차림새로 날 맞이했다. 나는 그녀의 억지로 짓는 미소 띈 얼굴보다 그녀의 배를 먼저 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자신의 배를 살짝 본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2개월이야. 눈에 띌 정도로 배가 부르진 않아.”

 그녀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경숙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고등학생티를 벌써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대학생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성숙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그녀는 멀쑥하니 서있는 나의 소매를 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소매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나는 도망가지 않아. 내 말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한번 더 흘렸다. 그녀는 다른 한손으로 몇 블럭 떨어진 햄버거 가게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배가 고픈 게 아니야. 알지?”

“잘 모르겠는데.”

 내 말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그녀는 나를 끌고 햄버거 가게로 가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 들어와 테이블에 앉자 마자 그녀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은 채 대충 아는 햄버거 이름을 말하고 빨리 만들어 달란 말과 함께 주문을 했다. 햄버거가 나오자 그녀는 햄버거를 싼 종이를 재빨리 벗겨 입안에 햄버거를 우겨 넣었다. 작은 입에 욕심껏 햄버거를 집어 넣고 우물우물 거리는 그녀가 낯설어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녀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주 식성 좋은 아이가 태어날 것 같군.”

“널 닮은 거야.”

 햄버거를 다 먹은 그녀에게 내가 한입 베어 먹은 햄버거를 내밀었다. 그녀는 사양 않고 내 햄버거 까지 다 먹어 치웠다. 그녀의 마른 체형을 보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식성이였다. 햄버거 가게는 한산했다. 점심시간을 한창 넘긴 시간이라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어디선가 한번 들어본 듯한 팝송이 건너 테이블의 대화소리가 들리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콜라를 다시한번 삼키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였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도 그녀는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나 사실 무서워.”

뜻 모를 그녀의 말에 콜라를 마시던 얼굴로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하자는 대로 따를 생각이야. 아이를 지우고 싶으면 지워야 겠지. 어쩔수가 없잖아. 우린 아직 학생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 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너의 발목을 잡은거니?"

 콜라 컵의 뚜껑을 열었다. 때마침 얼음이 미끄러져 사그락 거리는 맑은 소리를 냈다. 나는 얼음을 입에 넣고 오도독 씹었다. 얼음을 씹을 동안 그녀는 가만히 나의 말을 기다렸다.

“미안해. 나뿐만 아니라 너를 위한 길이야.”

 그녀의 미간이 순간 꿈틀했다. 그리곤 억지로 무엇인가 삼켜내듯 입술을 질근 깨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지우자. 마치 연필로 잘못 쓴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듯 지워버리자. 그 아이는 어떤 글자를 잘못 썼을까. 모음을 잘못 썼나 자음을 잘못 썻나 아님, 마침표를 잘못 썼을까?”

 미안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해줄수가 없었다. 그녀는 열을 식히려는 듯 콜라를 먹다가 쿡하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녀의 눈에서도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얀 얼굴 위로 액체는 또르르 굴러 치마위로 부서져 내렸다. every's body changing. 이제야 가게안에 흘러 나오는 노래의 제목이 떠올랐다.


3


 “야, 야, 가만 있지 말고 자리 좀 만들어 봐.”


 동수가 허겁지겁 숙박집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수선을 떨었다. 나는 동수를 도와 방안에 있는 소주병들과 어지러진 과자들을 방 한구석으로 치워 내었다.

“무슨 일인데?”
“현철이가 헌팅에 성공해서 여자들 데리고 온다고 하잖아. 얼른 얼른 치워.”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현철이와 여자들이 소란 거리는 소리가 문 밖에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현철이가 방안에 들어와 여자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루에서 여자들은 발에 묻은 백사장의 모래를 털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현철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우리끼리만 노는 거라며?”

 현철이는 장난끼 섞인 미소로 고개만 나에게 살짝 끄덕이고는 여자들이 앉을 자리를 하나하나 안내 해주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여자들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간간히 고개만 끄덕여줄뿐 다행이 분위기는 현철이가 재미있게 이끌어 가고 있었다. 처음 마신 소주가 이제야 취기를 돋기 시작했다. 이미지가 정신 없이 허물어지고 여자들의 톤 높은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리는 와중에 나는 그 사이로 눈동자 두 개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블링처럼 물위에 퍼지는 이미지 가운데 또렷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어지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숙박집 문을 나섰다. 그리고 해변가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밤이 되자 해변가는 낮보다는 한산했다. 여름방학동안 추억을 쌓자며 현철이와 동수는 억지로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그들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였고 나는 조용한 사람이였다. 그들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나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사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보단 관심이 없기에 대충 흘려듣고 나는 내 속의 이야기들에만관심이 있었다. 증거 없는 거짓말이기에 그들은 완전히 속아 나를 배려심 많은 친구라고 믿은 것이다. 어둠과 맞닿은 바다의 해안선을 바라보다가 뒤쪽에서 모래가 사각 사각 밟히는 발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 보았다. 얼굴을 확인할수 없는 어둠속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달빛에 언뜻 비춰왔다. 숙박집 방안에서 문득 느껴졌던 눈빛. 그 눈빛과 동일한 눈이였다.

 그녀는 내 옆에 사뿐히 앉았다. 바닷바람에 실려 그녀에게서 마른 국화 향기가 살며시 불어 오고 있었다.

 “제 이름은 경숙이에요. 서경숙.”

 “알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떠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또 다른 해안선이 보였다. 그것에 빠져들다가 문득 내가 그녀의 얼굴을 너무나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전 사람을 너무 쉽게 사랑하거든요. 반대로 사람은 너무 쉽게 헤어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전 너무 쉽게 상처를 받게 되죠. 그래서 너무 쉽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겁니다. 너무 쉽게 모르는 남자에게 이야기를 건 당신에게는 더욱.”

 “여기 운명을 믿는 가련한 사춘기 청소년이 또 있었네요.”

 “또 라는 말은 한명 더 있다는 이야기군요. 만나고 싶네요. 나 같은 놈이라.”

 “눈 앞에 있잖아요.”

 그녀는 장난스런 미소와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이제껏 후덥지근 하게 가슴을 뎁혀오던 열기를 한번에 씻어주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가슴속으로 주체할수 없이 밀려들어왔다.

 “블루 다이어리. 인터넷 소설 연재 순위 3652위. 거의 꼴찌죠. 그래도 꾸준히 글은 올라오더군요. 우연히 한번 읽어 보았다가 매번 그 글을 읽기 시작했어요. 솔직히 재미는 없더군요. 그래도 무척이나 솔직한 글이였어요. 그래서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작가소개란에서 당신의 사진과 이름을 알았어요. 현철이라는 당신 친구가 우리를 데려가려고 횡설수설 말하다 지나가는 투로 영훈이라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길래 혹시나 호기심이 들어 친구들을 따라 가보니 사진속 그 블루다이어리 작가가 거기 떡하니 있는거에요. 그래서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죠. 이쯤 되면 운명이라는 것에 눈이 먼 사춘기 청소년의 자격에 합당한가요?”

 순간 머릿속에 블루다이어리란 소설에 적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반된 스토리는 전무한 순전히 나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한 낙서장에 불과했다. 헌데 이상하게도 항상 조회수가 1이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 항상 내 글을 보고 있다는 뜻이였다. 별 대수롭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나의 유일한 독자가 내 옆에 앉아있었다.

 “47화 나의 첫사랑편 나오는 당신의 첫사랑 이미지와 내가 닮지 않아서 실망하신 건가요?”

 순간 볼이 화끈해졌다. 블루다이어리에 숨김없이 적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애써 태연한척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검지 손가락을 뻗어 모래위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숫자였다.

 “내 전화번호에요. 연락해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숙박집으로 멀어졌다. 나는 그녀의 번호를 머릿속으로 다시한번 읽은후 손으로 쓱쓱 지워 버렸다. 내일 아침이 와도 이 번호가 잊혀지지 않는다면 연락하리라. 그것은 정말 운명일것임으로.


4

 

 “넌 밖에서 기다려.”

 산부인과 병원 앞 포플러 가로수 앞에서 경숙은 병원 건물을 쭉 올려다 보았다. 끝이 잘 보이지 않는지 그녀의 목은 한껏 뒤로 젖혀져, 햇빛에 가까워 지는 시선에 눈을 찡그렸다. 산부인과 병원은 확실히 우리에게 너무나 높고 거대했다. 난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잘 할 수 있겠어?”

 순간 경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느낀건 나의 착각이였을까. 주체 할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녀의 공포에 떨리는 어깨를 감싸고 나는 그녀와 함께 이 두려움에 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몹시나 어리석게 그녀만이 홀로 저 날카로운 메스와 시선이 가득한 백색의 가시덤불속으로 들어가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더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것은 그런 사실을 그 순간 깨닳고 있었음에도 산부인과 문을 향해 걸어가는 경숙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두시간 동안 초조함에 가로수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렇게 가로수 그림자에 나를 숨긴지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경숙이 보였다. 창백해진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운 걸음이였다. 나는 달려가 경숙을 받쳐 안았다. 내 품안으로 경숙은 순간 쓰러졌다. 아기는 그녀에게서 얼마나 무거웠던 존재였길래 수술을 마친 그녀는 너무나 가벼웠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뻔했다.

 “아프진 않았어?”

 경숙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입술에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눈에 잡혔다. 고통을 삼켜 낼 때마다 질근 깨물었을 입술에 투명하게 핏자국이 비쳤다. 거짓말. 나는 중얼거리듯 울음과 함께 그 말을 삼켜내었다.

 “의사 아저씨가 너무 친절했어. 나 같은 애들 많이 봤대. 그리고 잘 선택한거래. 물론 낙태는 불법이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망칠순 없지 않느냐 네 앞길이 구만리인데. 의료보험이 안되니까 수술비가 좀 비싸긴 한데 돈은 충분히 가져왔느냐. 카드는 안된다. 네 아저씨. 돈은 남자친구가 두둑히 줬어요......”

 경숙의 눈동자는 조금 풀어져 있었다. 마치 깨어있는 상태로 꿈을 꾸는 듯 회상적인 어조로 어쩔수 없이 기억에 각인된 악몽들을 펼쳐내고 있었다. 나는 제발 그만, 이라 말하면서 경숙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나 잔인하다는 생각에 묵묵히 경숙의 떨리는 어깨를 감쌌다.

 “아주 간단해, 요 조그만 쇠꼬챙이가 모든 걸 해결해 줄거야. 간단히 생각해. 너의 공포와 근심을 자꾸 부풀게 만드는 종양을 떼어내는 거야. 그 아저씨는 상냥하게 웃으며 아기를 종양이라고 말했어. 종양이라고. 종양이라......”

 경숙은 한참이나 그 말을 웅얼거리다가 결국엔 눈물이 터졌다. 스산한 바람이 가로수 잎사귀의 머리채를 잡고 무작정 흔들어 대었다. 울음소리는 그 안에 묻혀 가느다란 새의 울음같이 느껴졌다. 그녀와 나는 지금 어느 위태로운 가지위에 앉아 슬픈 울음을 짓고 있나. 더 안아줄 수 있는 팔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5


 마치 불덩이를 삼킨 것 같았다.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넘어간 술의 흔적을 따라 뜨거운 기운이 확확 뻗쳐 올랐다. 학교가 끝날무렵 같은 반의 조금 논 다는 애들끼리 한잔하러 가자고 킥킥대며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과 엮이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 아이들은 그들을 피해 다녔다. 나도 역시 그들과 사적으로 이야기 해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끼리끼리만 놀았다.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자 현철이가 놀란 듯 커다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들에가 다가가 말했다.

 “나도 좀 껴줄래?”

 그들은 처음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 웃어 재꼈다. 그리고 한명이 아직 웃음이 채 가시지 않은 입꼬리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그들과 어울리는 것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의 돈을 아낌없이 꺼냈으며 그때마다 그들은 나를 향해 박수를 쳤다. 술 한잔을 목 뒤로 넘길 때마다,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소음이 고막을 찌르고 눈 앞의 사물들은 정신 없이 제 발에 걸려 넘어 졌다. 기괴하게 뒤틀린 미소가 내 옆자리에 촛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그들의 입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본 듯했다.

 “야.”

 돌연 정적이 찾아왔다. 목소리의 크기를 의식하지 못했기에 내가 얼마나 큰 소리로 그들을 불렀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들은 경계심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말이 없고 조용해 불량기 한번 보인 적 없던 내가 그들과 술을 하고 싶다고 따라온 것 자체가 신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앞에서 고고한척 턱을 치켜들고 침묵하며 존중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그들의 발길질에 깡통 처럼 잔뜩 찌그러 지고 싶을 뿐이다.

 “너희들은 참 웃겨. 그거 아냐? 개폼이나 잡으면서 학교에서 마치 주인처럼 다니고 말이야. 애들이 너희들 무서워 하는 줄 아냐? 근데 이거 아니.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거던, 냄새가 아주 아주 독해서 말야.”

 혀가 꼬부라져 그들이 내 말을 잘 들었는지 의심이 갔으나 건너편에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한 녀석이 보이자 안심했다. 그는 단순했다. 욕설을 내 뱉으며 나를 건방지다고 몰아 넣기 시작했다. 그때 테이블의 가장 윗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들 무리중에서 가장 말이 없고 과묵한 녀석이였다. 그녀석의 이름은 지금까지 몰랐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관심이 없었다.

 “영훈이 너 갑자기 왜 그러냐. 내가 보기에 너 일부러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는 아주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제서야 그들의 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로 인해 잔뜩 망가져 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일부러는 무슨 일부러야. 이 겁많은 놈들아. 깡패새끼들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주먹이면 다 해결되는거 아니냐? 응?”

 내 말을 듣자 그 녀석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 아주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그들의 송곳니가 반짝였다고 느낀 것은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6


 “꼬마야.”

 대략 일곱 살이나 여덟 살 정도나 되었을까. 꼬마는 자리에 주저 앉아 흙장난을 치고 있었다. 꼬마는 아래 조그마한 두꺼비집을 토닥이며 정성스레 다듬고 있다. 나는 꼬마의 두꺼비집이 내 발걸음에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히 다가갔다. 꼬마는 나를 의식하지 못한듯 했다. 날 보고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꼬마를 불렀다.

 “꼬마야.”

 꼬마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상처로 욱신 거리는 입술을 움직여 미소를 지어보였다. 꼬마가 나를 따라 배시시 웃는다. 왠지 모르게 가슴에서 뭔가 따뜻함이 번져간다. 나는 꼬마에게 물었다.

 “꼬마야 미안한데. 여기가 어디지? 그리고 너는 왜 혼자 여기서 놀고 있는 거니?”

 꼬마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경숙이 나와 대화할 때 뭔가 삐치는 일이 있으면 자주 하던 버릇이였다. 나도 꼬마를 따라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자 꼬마가 또 배시시 웃는다.

 “꼬마야 아직 말을 못하니?”

 꼬마는 웃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아 하고 벌렸다. 그 안에는 혀가 없었다. 꼬마는 다시 입을 닫고 두꺼비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꼬마의 옆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꼬마에게서는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마른 국화향기가 났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의 혀를 누가 잘라 갔니?”

 꼬마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슬프고 원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꼬마는 천천히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나는 꼬마의 눈을 마주볼 용기가 없어 가슴께로 깊이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나는 꼬마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아가야. 내 아가야. 난 용기가 없었어. 미안해.”

 나의 들썩이는 어깨위로 작은 손이 얹혀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에 흐릿한 고개를 들자 웃고 있는 꼬마의 얼굴이 보였다. 웃는 얼굴이 경숙을 참 많이 닮았었다. 꼬마는 몸을 돌려 두꺼비집으로 향했다. 나는 아쉬움에 꼬마의 등뒤로 외쳤다.

 “날 용서해 주는거야?”

 꼬마는 배시시 웃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꺼비집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꼬마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은 아직 8개월이나 남았었던 것이다.


7

   

 얼굴 위로 강하게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떴다. 아마 그들이 나를 어떤 공터에 버리고 간 모양이였다. 옷은 이미 흙과 발자국과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온몸 여기저기 상처가 욱신욱신 거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다시 바닥에 누워 버렸다. 무척이나 청량한 하늘이였다. 핸드폰의 폴더를 열자 부재중 전화가 다섯통이나 와 있었다. 세통은 부모님의 전화, 한통은 담임의 전화, 한통은 경숙의 전화였다. 나는 경숙의 번호를 눌렀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다음 처음으로 거는 전화였다. 신호음이 조금 길게 가고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 안에서 뭔가가 툭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늦게 전화를 받은거야.”

 “수업시간에 지금 몰래 빠져 나온거야. 할 말 있으면 얼른 말해.”

 경숙의 평상시와 다른 없는 목소리를 듣자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따끔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꿈을 꿨어. 우리 아기꿈.”

 “무슨 말이야...?”

 “아주 아주 이쁜 아이였어. 경숙이 널 닮은.”

 경숙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큰 소리로 하하 웃었다. 찢어진 등뒤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우리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을 축하해주고 기뻐해주는 그런 날이 올 때. 다시 우리 애기를 만나자. 경숙아, 나를 믿어줄 수 있겠니?”

 수화기 너머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이 힘이 빠진 손에서 미끄러져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작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밝은 목소리로 미루어봐서 나쁜 소식은 아니리라. 잠이 몰려왔다.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워 졌다. 잠을 자야지. 이 한숨만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경숙을 보러가야지. 그리고 꿈 속에서 본 아기 모습을 제대로 말해줘야지. 잠을 자야지.


 꼭. 아, 이 한숨만 자고 말이다.



진명훈
진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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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분 소녀

  일곱시 삼십분 소녀   일곱시 칠분,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아, 내 기억속의 그날에는 왜 이리도 복잡한 도시 위에 안개가 많이 끼였는지. 간헐적으로 지나치는 차의 질주하는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의 짖음, 가게문을 여는 소리를 제외 하고는 마치 라디오의 불륨을 최대로 낮춘 것처럼 정적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였다. 그 안개의 해운을 해치며 횡단보도 앞에 다다른 나는, 여느날처럼 헛된 공상을 하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르르---- 마침 신호등이 바뀌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리고 나는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 그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예상하지 못한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던 것이다.   짧은 신음이 심장에서부터 전류를 타고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약간 젖어있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감은 듯 뜬 눈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계를 쫓고 있어 살짝 웃고 있었다. 이 세상엔 존재 하지 않는 천사의 나팔소리라도 듣고 있는 걸까.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녀는 호수위를 걷듯 가벼운 걸음으로 천천히 내곁을 스쳐갔다. 지금도 귓가에 선명한 그녀의 콧노래 소리를 회상하면 아직도 그날의 전류는 내 몸에서 전율한다.   점점 나는 야위어 갔다. 밤에는 잠들기가 두려웠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불을 끔과 동시에 그녀의 미소가 불현듯 가슴속에서 치고 올라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리는 것이였다. 점점 선명해져 가는 그녀의 기억 앞에서서 손에 닿을수 없는 그녀에 대한 내 간절함은 더욱 골이 깊어져 갔고,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내보지 못한 내 무능력함을 한 없이 자책하고 가슴아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손으로 내 심장의 균열을 후벼파다가 지쳐 쓰려져 잠이드면 꿈 속에서 조차 그녀를 그리다가 아침엔 다시 그녀를 만난다는 두근거림으로 내 하루는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또다시 돌고 있었다. 이런 하루는 나를 점점 야위어 가게 만들었다.  그날 하루는 도저히 어떻게 흘러 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친구들의 수다에도 그저 망연한 미소만을 띄운채 흘려 듣고 선생님의 말소리 조차 먼 산의 메아리처럼 울려 올 뿐이였다. 나는 햇빛이 쨍쨍한 이 오후의 하늘 아래에서도 그 일곱시 삼십분의 안개에 둘러 쌓여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되고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불꺼진 뒤 찾아온 이 무섭도록 조용한 정적속에 그녀의 콧노래와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미소가 가득차 흐붓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죽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행복했을까.  기다렸어. 평소에도 네가 오는 일곱시 삼십분을 기다렸어. 우린, 서로를 기다려 했었네?  

  • 진명훈
  • 2007-09-09
초혼

   “그래요, 언제부터 였나요.” “하지만......” “그러니까, 지금은 어떠한 의심도 없이 묻는 겁니다. 당신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뒤통수를 쫓는 어머니의 애절한 눈빛은 제 머리채를 쥐어 잡는 듯 했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제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대한모욕이자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이였습니다. 아버지를 헛된 허깨비의 망상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에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병원 밖을 나와 어머니가 나올 때까지 어머니의 차앞에서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무척이나 탐탁지 않은 표정이셨습니다. 차가 병원을 떠나고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주홍빛 조명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경수야, 너 왜 그러니?” “뭐가 말이야.” 글을 쓴다는 친구였습니다. 그는 말 없이 제 옆에 앉아 있다가도 이따끔씩 저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전 말없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끝까지 저를 추궁해 답을 얻었을 텐데, 그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 없는 미소가 그에게는 더 확실한 대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는 그 말없는 미소의 의미를 여러모로 파헤친 생각들을 소설화 시켜 글을 써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친구인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 아이는 여러편의 소설을 제게 보여주었는데, 사실 제가 유령이였다느니, 몇 년전에 이 학교에서 자살한 귀신이였다느니, 독특한 상상들이 가득한 소설들이였습니다. 그 친구는 오늘도 제 옆자리에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뭐가 말이야.”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생각에만 몰입하는 일.” 저는 말없는 미소를 다시 지어 주었을 뿐이였습니다. 그날밤 이였을까요, 아니면 그 후 얼마더 지나서 였을까요. 저는 제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결핍되 오던 외로움을 잊을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4 촉도 낮은 형광등 아래 어머니와 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상자안의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책상을 손으로 텅텅 치며 배를 잡고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와 저의 얼굴에는 알록달록한 텔레비전의 색채가 여기저기 일그러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뭐가 말이야.” “의사가 하는말 못들었니? 너 정신병이라잖아.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온 정신병이......” 저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러버렸습니다. 텔레비전 속 방청객들의 환호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 보았습니다. 눈가에는 눈물이 이미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잔주름을 가득 적신 눈물은 그마저도 모자라 어머니의 볼 위로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울컥 저려왔습니다. “경수야.” 저는 탁 풀려버린 맥에 그

  • 진명훈
  • 2007-08-26
자 살자 살자

                       “캬아- 쓰다!” “에이, 죽는날까지 안주벌레 꼴 이라니.”  아파트 옥상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유난히도 심하게 불었다. 영훈은 술에 취해 빨개진 볼이 찬 바람에 에인듯해 두 손으로 따뜻이 감싸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파트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수천의 저마다의 창문마다 환하게 밝혀 있는 불빛들이 보였다. 저 불빛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간직하며 살고 있겠지. 그때, 딸랑하는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손에 케이크를 든채 빵집을 나서는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문자메시지 001 이잖아. 미안해.]  영훈은 신발을 나란히 벗어 놓고 난간위로 비틀 거리며 올라섰다. 높은 곳을 그렇게도 무서워 했었는데, 지금 심장은 이상하리 만큼 고요하고 평안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심장은 내가 세상에게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이 순간, 자신의 고동소리가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주었다. 밤바람이 내 등을 떠밀기라도 하려는 듯이 세차게 몸에 부딪쳐 왔다. 넥타이가 마치 피리에 반응하는 인도의 뱀처럼 요란스럽게도 춤을 추었다. 바람아 서두르지마 곧 뛰어 내릴테니까. 영훈은 차가운 밤공기를 폣속 깊이 들이 마셨다. 얼음가루가 섞인듯한 공기가 찌르르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호흡이다. 살면서 들이쉬는 마지막 호흡이다. 영훈은 눈을 꽈악 감았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한발만 내 딛으면 모든게 끝나는 거야.  “허억, 죽는줄 알았네!”  그녀는 영훈의 놀라는 흉내까지 내면서 배꼽이 빠질정도로 웃어 재꼈다. 얼굴이 빨개진 영훈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아 그만 웃고 빨리 가! 남 자살하려는 게 그렇게 웃겨?”  그녀는 씨익 웃더니 영훈이 보란듯이 소주를 한잔 더 따라 마셨다.  “결국, 난간에서 내려오셨네요 아저씨.”  “한잔 마시고 얼굴 빨개지는 아저씨 보단 잘하니까 걱정마세요. 그리고 제 이름은 당신이 아니에요. 서경숙에요. 서경숙.” “죽으려는 사람이 왜 남의 눈은 신경쓰실까. 그냥 콱 뛰어 내리면 되지.”  “왜요, 아저씨?”  “생일인데 왜 못 죽어요?”  경숙은 그런 영훈의 모습을 빤하게 잠시동안 쳐다보더니 이윽고 웃음보를 터트렸다. 영훈은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져 경숙에게서 고개를 돌려 소주를 한잔더 들이켰다. 경숙은 배를 쥐어잡으며 웃으며 말했다.  경숙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갑자기 찾아온 무거운 정적에 영훈을 놀라 경숙을 바라보았다. 경숙은 방금까지 웃음으로 가득했던 표정을 거두고 왠지 진지해진 표정으로 멍하니 무언가를 떠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의식속에서 떠오른듯

  • 진명훈
  • 200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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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맙습니다 민유하님 &&

    • 2007-08-04 16: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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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쓰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 2007-08-03 17: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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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넵 그럴게염

    • 2007-08-03 13:15:4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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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잘 읽었습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진솔한 글을 써 보시면 더 좋을 것 같다는........^0^

    • 2007-08-03 12:42:5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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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엇 리플이다 ㅠ_ㅠ 감사해요.

    • 2007-08-03 03:15:0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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