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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

  • 작성자 진명훈
  • 작성일 2007-08-26
  • 조회수 1,470

 


초혼


 

진명훈

 

 

1


“그래요, 언제부터 였나요.”


아버지, 지금 눈 앞에 가운을 입은 의사는 저를 정신이상자로 보고 있습니다. 하얗게 날이선 흰 가운의 칼라가 번득이고, 그의 냉철한 눈매는 그 보다 더욱 날카롭습니다. 안경뒤의 그의 눈빛을 마주볼 용기는 없었지만 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이후 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는 계시는 군요.”

“하지만......”

“하지만, 뭐요?”

“아버지는 지금도 저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의사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지금 그 사람의 굳건히 닫힌 입술이 열린다면 쏟아질 저에 대한 비난과 설득을 저는 예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주 철저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제가 예상했던 단어들을 교묘히 피해 이 한마디를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제 옆 작은 의자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는 저의 소매를 잡아 끌어 내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저를 올려 보셨습니다. 저는 하는 수없이 다시 자리에 주저 앉았습니다. 어서 그 의사의 말이 끝나기를 빌면서.


“그러니까, 지금은 어떠한 의심도 없이 묻는 겁니다. 당신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모든걸 이해한다는 말투와 제 모든걸 경멸한다는 그의 표정은 모순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의 표정은 점점더 알수 없다는 듯이 굳어갔습니다. 목을 죄어오는 교복 넥타이를 어서 벗어 던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 가만히 앉아 있을수가 없었습니다. 제 불안해 하는 행동을 눈치 채셨는지 어머니가 한 손으로 가만히 제 손등을 덮으셨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깊은 한숨을 돌렸습니다.


“한경수씨. 지금 당신은 심각한 자아분열 증세를 겪고 계십니다. 일반 환자와 다른 점은 아버지라고 생각 하시는 당신의 또 다른 자아가 내면에서만 존재할 뿐, 밖으로 표출되지는 못한 다는 점이지요. 그러나 그것 또한 자아로서 독립된 삶을 살지 못하는 한경수씨의 의존증 적인 행동을 유발 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으시겠습니까.”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뒤통수를 쫓는 어머니의 애절한 눈빛은 제 머리채를 쥐어 잡는 듯 했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제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대한모욕이자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이였습니다. 아버지를 헛된 허깨비의 망상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에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병원 밖을 나와 어머니가 나올 때까지 어머니의 차앞에서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무척이나 탐탁지 않은 표정이셨습니다. 차가 병원을 떠나고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주홍빛 조명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치료 받아야 해.”


어머니의 말은 짧았습니다. 그러나 내게 다가 오는 그 의미는 너무나도 커다랗습니다. 어머니 조차 저를 믿지 않는 것이란 사실이기 때문이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 화가난 감정을 억누르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아버지, 왜 제게 오신 것입니까. 저는 이토록 아버지의 존재를 제 안에서 확연히 느끼고 있는데 어머니는 왜 그렇지 못하신 것입니까. 제 하잘것 없는 슬픔 보다는 어머니의 슬픔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위로해 주지 않으시고 왜 제게 오신 것입니까. 어머니는 제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마음약한 제가 어머니의 슬픔에 동요하여 무너지고 말까 걱정이 되신 탓일겁니다. 그러나 새벽녘 이불보에 얼굴을 묻은채 쓴 울음을 삼키고 있는 모습은 왜 제게 들켜버린 것일까요. 아버지, 잘못 선택하셨었던 것입니다. 저보다 어머니는 훨씬 여린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원한대로 진료 받았어. 이제 그만해 엄마.”

“의사선생님이 치료 받아야 한다잖아. 학교에는 내가 말해 놓을 테니까......”

저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의 말을 듣는 다는 것도 대답하겠다는 의지도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였습니다. 어머니는 대답없는 저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포기한듯 유리창 너머 끝없이 펼쳐진 도로를 내다 보셨습니다. 이따끔 귓청을 찢어낼듯 날카로운 공기를 부딪는 차 지나가는 소리가 옆을 스쳤습니다. 차안의 움직이지 않는 공기를 가끔 흔들어 놓는 것도 그 소리 뿐이였습니다.



2



아버지, 당신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육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당신께서 아시던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여름이 찾아오면 아버지의 동창들과 함께 계곡으로 피서를 떠났던 일들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냉정히 돌아선 동창들의 뒷 모습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비디오 가게도 수증기 가득한 국밥집으로 변해 예전 모습을 기억해 낼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곳이 그렇게 보고 싶으셨나요. 학교에 수업시간에 가만히 앉아 수업을 듣고 있으면 눈이 흡수하는 이미지의 껍질 안으로 아버지의 기억이 흘러 들어 옵니다. 그리 특별할것 없었던 인생이었다고 슬퍼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제게 보여줄 영상들이 그것 밖에 없다고도 슬퍼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회색 담벼락 아래 피어난 작은 민들레를 바라보다가 부엌에서 물 한 컵을 떠내 그 뿌리를 적셔주던 당신의 순수와, 바닷바람 날카로운 항구길을 홀로 걷던 당신의 고독과, 술 한잔과 달빛을 안주삼으시던 당신의 애수는 나를 눈물짓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회상에 깊이 빠진 현실의 나는 학교 안의 그들의 눈에 거슬렸나 봅니다.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멍하게 얼이 빠져버린 저를 화를 내다가, 설득하다가, 다시 화를 내다가, 하다가 지쳐버렸는지 이젠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습니다. 포기한거죠. 친구들도 축구와 레슬링 같이 활동적인 문화에 익숙한 그들이기에 움직이지 않는 제 자신이 두렵고 피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렇게 전 혼자가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당신을 원망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는 남은 생을 평생 당신을 추억하며 살아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경수야, 너 왜 그러니?”

“뭐가 말이야.”

“나는 가끔 네가 두려워.”

“뭐가 말이야.”

“너는 껍질만 있는 것 같아. 내용물이 없고 껍질만 있는 달걀같이...”


글을 쓴다는 친구였습니다. 그는 말 없이 제 옆에 앉아 있다가도 이따끔씩 저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전 말없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끝까지 저를 추궁해 답을 얻었을 텐데, 그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 없는 미소가 그에게는 더 확실한 대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는 그 말없는 미소의 의미를 여러모로 파헤친 생각들을 소설화 시켜 글을 써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친구인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 아이는 여러편의 소설을 제게 보여주었는데, 사실 제가 유령이였다느니, 몇 년전에 이 학교에서 자살한 귀신이였다느니, 독특한 상상들이 가득한 소설들이였습니다. 그 친구는 오늘도 제 옆자리에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말이야, 그리움이 아니니?”

“뭐가 말이야.”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든, 개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 대한 것이든, 그리움이 아니면 너처럼될 수가 없거든.”

“뭐가 말이야.”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생각에만 몰입하는 일.”


저는 그 친구의 말에 문득 호흡을 멈추었습니다. 아버지, 그 친구의 말이 맞는 겁니까. 저는 지금 제 삶을 게을리 하고 있었던 걸까요. 아버지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현실의 모든 것들을 잊어가고 있었던 겁니까. 그 친구는 표정이 변한 제 얼굴을 보더니 깔깔깔 웃으며 말했습니다.


“뭔가, 내가 근접한 모양이구나.”

저는 말없는 미소를 다시 지어 주었을 뿐이였습니다.


3



그 날은 왜 그렇게도 잠이 안 왔던지 모르겠습니다. 밤 하늘 가득한 구름은 저마다 달빛을 머금어 노랗게 은은한 빛을 내고 덕분에 거리는 그닥 어둡지가 않았습니다. 어두운 방 구석 곱게 접혀진 삼베옷에선 아직 흙냄새가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날은 아버지를 묻고 돌아온 길이였습니다. 저는 삼베옷을 가만히 들어 올려 흙냄새를 폣속 가득히 들이 마셨습니다. 그러자 낮의 꿈같았던 기억이 머릿속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관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흙소리가 제 심장을 섬뜩하게 쥐어 잡았습니다. 삽자루를 잡았던 손의 느낌이 채 가시질 않아 손을 겨드랑이에 껸채 몸을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실것만 같은데, 그럼 내가 흙을 뿌렸던 관은 누구의 관이였었나. 아버지는 지금 편안히 주무시고 계실까. 그 흙더미 속에서 깨어나 내 이름을 부르고 계시지는 않으 실까. 어느덧 삼베옷이 눈물에 축축히 젖어갔습니다.

그날밤 이였을까요, 아니면 그 후 얼마더 지나서 였을까요. 저는 제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결핍되 오던 외로움을 잊을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찾아왔어.”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어린 나를 품에 꼭 껴안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 우는 거였을까요 어머니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제 안에서 제 심장을 품에 안아 주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어머니는 왜 우셨던 것일까요.


4



촉도 낮은 형광등 아래 어머니와 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상자안의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책상을 손으로 텅텅 치며 배를 잡고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와 저의 얼굴에는 알록달록한 텔레비전의 색채가 여기저기 일그러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미안하다.”


어머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습니다. 무척이나 고심한 뒤에야 입을 여신 것 같은 흔적이였습니다. 저는 무심한 듯 눈은 여전히 텔레비전 화면에 고정시킨채로 말했습니다.


“뭐가 말이야.”


어머니는 다시 한동안 말이 없으 셨습니다. 그 동안에도 텔레비전 속 깔깔대는 웃음소리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시끄럽게 울려대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따라 웃을수가 없어 미안해 질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귀에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린 것이...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이렇게 까지 되버렸니.”

“무슨 말이야.”

“의사가 하는말 못들었니? 너 정신병이라잖아.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온 정신병이......”

“그만해!”


저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러버렸습니다. 텔레비전 속 방청객들의 환호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 보았습니다. 눈가에는 눈물이 이미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잔주름을 가득 적신 눈물은 그마저도 모자라 어머니의 볼 위로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울컥 저려왔습니다.

“정신병이 아니라구. 정말로, 아버지는......”

“정신차려라 경수야. 아버지는 죽었어.”
“엄마, 내 말을 믿어줘. 아버지를 묻은날, 그 날부터인가......”

“경수야.”


돌연 냉정해진 어머니의 말투에 저는 제가 하려던 말을 멈추었습니다. 어머니를 바라보자 그녀의 눈은 애처로움과 동정심이 가득 배어있었습니다. 한참의 정적 끝에서야 어머니는 제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경수야, 이제 아버지를 놓아 드리자.”

저는 탁 풀려버린 맥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저의 방에 들어가 문을 잠궜습니다. 어머니도 지쳐버리신듯 집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을 제 삶 평생 기억해 가기란 왜 이리도 힘든 것입니까. 어른이 되어버린 그날부터, 저는 아버지를 놓아 드려야 했던 것입니까. 더 이상 아버지에게 기댈 나이는 지났던 것인가요. 알수 없습니다. 알수 없어요.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에 그날밤도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5

“뭐 드시려구요?”

“국밥 한그릇만 주세요.”


아직 어려 보이는 제가 이런 가게에 와서 국밥을 시키는게 어색했을까요. 국밥가게 아주머니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주문을 받더니 금방 주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 이곳이 당신께서 남은 절반의 생애를 보내셨던 곳이였습니다. 가게 안을 가득 매우던 비디오들은 사라지고, 테이블들과, 야한 사진의 달력으로 도배된 이곳은 지금 당신에겐 얼마나 낯선 곳일까요.

아주머니는 금새 국밥 한그릇을 말아 가지고 들어오셨습니다. 간소한 반찬과 김이 솟아 오르는 국밥을 저는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자리가 전에 서양영화 코너가 있던 자리였을것 같습니다. 저는 그 진열장 앞에서서 비디오 케이스를 훑어 보며 시간을 보냈던것 같습니다. 비디오 하나하나들은 저마다 두 세시간의 이야기를 속에 간직한채 조용히 제 자리에 꽂혀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하나만 골라 잡으면 제게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죠. 울음을 삼키려 국밥을 목 구멍안으로 넘겼습니다. 자꾸만 울음이 새어나오려 해 꾸역꾸역 국밥을 씹어 삼켰습니다. 그런 제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아주머니께서 다가와 테이블 위에 음료수를 올려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학생, 무슨 일 있어? 안 좋아 보이네?”


저는 아무일 없는 척 울음을 삼켜 넘기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아주머니, 국밥이 맛잇네요. 그런데 혹시 이사 오기전에 여기가 무슨 가게를 하고 있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주머니는 한참을 깊게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아, 전에 비디오 가게를 했었지. 기억하고 있단다. 예전에 이곳에서 비디오 많이 빌려 봤거든. 문 닫아서 좀 아쉬었었지. 가게 주인이 참 친절하신 분이셨는데.”

아버지, 저만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이 살아 계셨던 그 순간의 것들이 변하고, 그 변함을 막을 수 없더라도 당신은 아직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저 뿐만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였단 말입니다.


“언니, 가스벨브가 또 세는것 같은데?”

주방에서 어떤 여자가 손에 묻은 물기를 앞지마에 닦으며 아주머니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으로 그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지난 번에 와서 고쳤는데도 그런단 말이야? 이거 일을 어떻게 하는거야.”

“몰라, 저것 때문에 불안해서 일을 못하겠다니까. 언니 무슨일 나기전에 얼른 고쳐.”

“알았어. 가서 일이나봐 내가 연락해볼게. 학생 잠깐만.”


아주머니는 제게 씽긋 웃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카운터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싸우는 듯 한 격양된 목소리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고 다시 저와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며 식어버린 국밥을 한참이나 휘저었습니다. 그러나 전화는 얼마동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운터로 가 돈을 내고 가게를 빠져나왔습니다. 저를 붙잡으려던 아주머니의 손은 수화기 너머 누군가의 말에 공중에서 우뚝 멈추고, 저는 어색한 미소를 아주머니에게 보이며 가게를 황급히 빠져 나갔습니다.


6



“또라이 자식.”


학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였습니다. 조금 이라도 틀에서 벗어나면 비난하고 욕설을 퍼 붓는 그런 곳이였습니다. 저도 그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축구나 레슬링을 좋아하지 못했고, 웃고 떠드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살다 살다 너 같은 또라이는 처음 봤다. 선생들 까지 포기한 이유를 알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하게 있는 거냐.”


그는 내 이마를 툭툭치며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아이들이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마 지금 제 이마를 때리고 있던 아이는 그들과 저를 도발 시키자는 내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너 말은 할줄 아냐? 야 또라이, 말좀 해봐. 야, 벙어리냐?”


화가 났기 보다는, 주목을 받는게 싫었습니다. 아버지 당신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이러한 상황을 자주 마주칠 것이 분명하기에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놀라는 그들의 표정이 보였습니다.


“오, 한 대 칠려고? 쳐봐. 쳐보라고!”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에 옆에 있는 복도로 난 창문에 주먹을 던졌습니다. 와장창 거리며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교실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경악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피로 흥건하게 젖은 제 주먹에 꽂혔습니다. 저는 창문에서 주먹을 빼냈습니다. 유리에 찢긴 주먹은 형편없이 피로 젖어있었습니다. 시비를 걸던 아이가 뒷걸음질 치는게 보였습니다. 저는 말 없이 자리에 주저 앉았습니다. 자, 이제 아버지. 당신과 편히 대화할수 있어요.


“반 아이들이 이제 아드님을 무서워 하고 있어요. 학부모들 성화도 만만치 않구요.”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담임선생님에게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붕대로 감은 오른 손에 시선을 내린채 그 옆에 서 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착찹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정신과 치료 기록이 있더군요. 이대로 애를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치료를 받으셔야죠.”

“우리 애가, 사고를 저지른건 이번이 처음이잖습니까 봐주세요 선생님.”

“평소에도 전혀 삶에 흥미가 없는 아이였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폭력적인 행동을 할지 몰라요. 학교를 그만두시고 치료를 받게 하시는게......”


어머니와 담임선생님은 한참을 옥신각신 하시다가 제 눈치가 보였는지 저를 나가게 했습니다. 복도로 나온 저는 문에 기대어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붕대에 살짝 비친 붉은 피가 보였습니다. 아버지, 당신과 지내는 시간은 저 뿐만이 아니라 왜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7  

“후, 꽤 멋있었어. 주먹으로 그 애를 쳤다면은 네가 졌을 테지만, 이번 싸움으로 넌 우리 학교 짱이야.”

 

글을 쓴다는 친구는 잔뜩 흥분한 어조로 주절주절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교에 소문이 퍼져 아이들이 저를 무서워 하기 시작해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친구는 웃는 저를 보고 따라 하늘을 향해 하하 웃음을 피어 올렸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왜 유리창을 깻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더 이상 묻질 않았습니다. 그 순간 이 친구에게는 제 안에 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말해줘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라면 저를 이상하게 보기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으로 봐줄 테니까요. 저는 그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 함께 해온 시간들을 말해주었습니다. 그제서야 제 말없는 미소의 모든 의문이 풀린 친구는 잔뜩 얼이 빠진채 있다가 껄껄 웃더니 말했습니다.


“뭐야, 넌 자살한 귀신이 아니였구나.”

“미안하게 됐군.”

친구는 잠시동안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속에서 거울속에서 보았던 제 눈빛과 같은 색깔을 읽어 냈습니다. 애수. 그의 눈에서 처음 그 것을 본 나는 의아심이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친구는 살며시 입을 열었습니다.


“슬픔을 가슴속에 오래 붙잡아 둔다는 거. 그건 참 미련한 짓이야.”

“무슨 말이야.”

“내가 말 안해줬구나. 나도 형을 2년전에 교통사고로 잃었었어.”


형을 잃은 그 이야기를 하는 그의 표정은 슬픔이라기 보단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찾은 반가움이였습니다. 알수 없는 그의 표정에 저는 그의 얼굴만을 쳐다보았습니다.


“내가 아니면 형을 기억해줄 사람이 없을 것만 같아서, 1년 동안 형을 그리워 하느라 참 많이 힘들었어. 그런데 말이야, 인정해야해. 남은 사람들은 그가 다시 돌아올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해. 그리고 살아가야해. 살아 있었던 동안 그 사람이 주었던 기억들을 굳이 잊지 않으려 할 필요 없어. 그 순간은 그 소중했던 순간대로 잊혀져야 새로운 소중한 순간들이 다시 찾아 오는 거거든. 하! 이런, 내 말이 너무 감상적이였나?”


그는 다시 한번 껄껄 웃었습니다. 정말 그의 말이 맞는 걸까요.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당신을 붙잡고 거스르려는 행동은 나약 했던 저의 미련함이였을까요. 아버지. 저는 당신을 놓아 드려야 했었던 것인가요. 대답해주세요.


8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였습니다. 그 날은 왠지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텁텁하게 느껴져 기분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도로 멀리서 엠뷸런스 소리가 잉잉 울어대는 소리에 문득 올려다본 저 편에, 피어오르는 연기 기둥이 보였습니다. 그 방향은 아버지의 가게 였던 국밥집이 있는 곳이였습니다.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는 불안함이 들어 그 쪽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국밥집이 가까워 올수록 저는 좀더 가깝게 다가오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제발, 제발, 그곳은 아버지의 흔적이 남은 마지막 공간이야. 제발 안되. 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그곳을 향해 달렸습니다. 가까워져 올수록 매퀘한 연기는 더욱 진해져 폣속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저는 헉헉 거리는 숨으로 모퉁이를 돌아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보자 자리에 주저 앉을 뻔 했습니다. 그곳은 국밥집이였습니다. 아버지의 흔적을 간직한곳, 마지막 남은 그곳이 불에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선 국밥집 아줌마가 주저 앉아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불에 잔뜩 일그러져 타버린 간판이 벌건 재를 흩날리며 땅에 떨어지자 이웃주민들은 아주머니를 부축해 끌고 갔습니다.

무섭게 치솟는 불길속에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잊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 지도록 놓아 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저는 아버지가 걱정하시던 작은 초등학생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 홀로 충분히 견딜수가 있습니다.

검은 연기는 치솟아 올라 국밥집 근처의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얼굴에 잿가루를 묻힌 소방수들이 호스로 여기저기 물길을 뿌려대고 있지만 불길은 쉽사리 멈출것 같지가 않았다. 열에 녹은 유리창에 와장창 깨지고 거센 물길이 가게 유리문을 다시 깨뜨리고 가게안에 무엇이 터졌는지 작은 소음이 쾅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마다 화재현장을 쭉 둘러싼 마을 주민들은 환호성과 비명이 섞인 소음을 내질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러 들줄은 모르고 더욱 거세진 불길은 하늘 저 끝에 닿을 듯 타올랐다.


타오르는 불길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어디선가 안녕. 하는 소리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진명훈
진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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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분 소녀

  일곱시 삼십분 소녀   일곱시 칠분,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아, 내 기억속의 그날에는 왜 이리도 복잡한 도시 위에 안개가 많이 끼였는지. 간헐적으로 지나치는 차의 질주하는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의 짖음, 가게문을 여는 소리를 제외 하고는 마치 라디오의 불륨을 최대로 낮춘 것처럼 정적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였다. 그 안개의 해운을 해치며 횡단보도 앞에 다다른 나는, 여느날처럼 헛된 공상을 하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르르---- 마침 신호등이 바뀌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리고 나는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 그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예상하지 못한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던 것이다.   짧은 신음이 심장에서부터 전류를 타고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약간 젖어있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감은 듯 뜬 눈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계를 쫓고 있어 살짝 웃고 있었다. 이 세상엔 존재 하지 않는 천사의 나팔소리라도 듣고 있는 걸까.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녀는 호수위를 걷듯 가벼운 걸음으로 천천히 내곁을 스쳐갔다. 지금도 귓가에 선명한 그녀의 콧노래 소리를 회상하면 아직도 그날의 전류는 내 몸에서 전율한다.   점점 나는 야위어 갔다. 밤에는 잠들기가 두려웠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불을 끔과 동시에 그녀의 미소가 불현듯 가슴속에서 치고 올라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리는 것이였다. 점점 선명해져 가는 그녀의 기억 앞에서서 손에 닿을수 없는 그녀에 대한 내 간절함은 더욱 골이 깊어져 갔고,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내보지 못한 내 무능력함을 한 없이 자책하고 가슴아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손으로 내 심장의 균열을 후벼파다가 지쳐 쓰려져 잠이드면 꿈 속에서 조차 그녀를 그리다가 아침엔 다시 그녀를 만난다는 두근거림으로 내 하루는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또다시 돌고 있었다. 이런 하루는 나를 점점 야위어 가게 만들었다.  그날 하루는 도저히 어떻게 흘러 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친구들의 수다에도 그저 망연한 미소만을 띄운채 흘려 듣고 선생님의 말소리 조차 먼 산의 메아리처럼 울려 올 뿐이였다. 나는 햇빛이 쨍쨍한 이 오후의 하늘 아래에서도 그 일곱시 삼십분의 안개에 둘러 쌓여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되고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불꺼진 뒤 찾아온 이 무섭도록 조용한 정적속에 그녀의 콧노래와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미소가 가득차 흐붓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죽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행복했을까.  기다렸어. 평소에도 네가 오는 일곱시 삼십분을 기다렸어. 우린, 서로를 기다려 했었네?  

  • 진명훈
  • 2007-09-09
블루 다이어리

  학교 점심시간 이였다. 핸드폰을 학교 선생님에게 들키면 압수 당하기 때문에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핸드폰 폴더를 젖혔다. 경숙의 문자였다. 폴더를 다시 닫았다. 닫히는 순간 들리는 딱 하는 소리가 정적속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 핸드폰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머뭇거리다가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경숙의 번호를 꾸욱꾸욱 눌렀다. 한 번호 번호를 누르기가 왜 이렇게 망설여 지는지 알 수 없었다. 짧은 신호음이 흐르고 딸깍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미안하...” “수술비는 내가 낼게.” “뭐?” “그런데...?” “끊을게. 곧 수업 시작해.” 2  경숙은 짧은 미니스커트에 귀걸이를 한 차림새로 날 맞이했다. 나는 그녀의 억지로 짓는 미소 띈 얼굴보다 그녀의 배를 먼저 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자신의 배를 살짝 본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배가 고픈 게 아니야. 알지?” “아주 식성 좋은 아이가 태어날 것 같군.” “나 사실 무서워.”  콜라 컵의 뚜껑을 열었다. 때마침 얼음이 미끄러져 사그락 거리는 맑은 소리를 냈다. 나는 얼음을 입에 넣고 오도독 씹었다. 얼음을 씹을 동안 그녀는 가만히 나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지우자. 마치 연필로 잘못 쓴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듯 지워버리자. 그 아이는 어떤 글자를 잘못 썼을까. 모음을 잘못 썼나 자음을 잘못 썻나 아님, 마침표를 잘못 썼을까?” 3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현철이와 여자들이 소란 거리는 소리가 문 밖에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현철이가 방안에 들어와 여자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루에서 여자들은 발에 묻은 백사장의 모래를 털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현철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들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간간히 고개만 끄덕여줄뿐 다행이 분위기는 현철이가 재미있게 이끌어 가고 있었다. 처음 마신 소주가 이제야 취기를 돋기 시작했다. 이미지가 정신 없이 허물어지고 여자들의 톤 높은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리는 와중에 나는 그 사이로 눈동자 두 개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블링처럼 물위에 퍼지는 이미지 가운데 또렷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어지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숙박집 문을 나섰다. 그리고 해변가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밤이 되자 해변가는 낮보다는 한산했다. 여름방학동안 추억을 쌓자며 현철이와 동수는 억지로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그들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였고 나는 조용한 사람이였다. 그들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나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사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보단 관심이 없기에 대충 흘려듣고 나는 내 속의 이야기들에만관심이 있었다. 증거 없는 거짓말이기에 그들은 완전히 속아 나를 배려심 많은 친구라고 믿은 것이다. 어둠과 맞닿은 바다의 해안선을 바라보다가 뒤쪽에서 모래가 사각 사각 밟히는 발소리가 들

  • 진명훈
  • 2007-08-02
자 살자 살자

                       “캬아- 쓰다!” “에이, 죽는날까지 안주벌레 꼴 이라니.”  아파트 옥상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유난히도 심하게 불었다. 영훈은 술에 취해 빨개진 볼이 찬 바람에 에인듯해 두 손으로 따뜻이 감싸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파트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수천의 저마다의 창문마다 환하게 밝혀 있는 불빛들이 보였다. 저 불빛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간직하며 살고 있겠지. 그때, 딸랑하는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손에 케이크를 든채 빵집을 나서는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문자메시지 001 이잖아. 미안해.]  영훈은 신발을 나란히 벗어 놓고 난간위로 비틀 거리며 올라섰다. 높은 곳을 그렇게도 무서워 했었는데, 지금 심장은 이상하리 만큼 고요하고 평안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심장은 내가 세상에게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이 순간, 자신의 고동소리가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주었다. 밤바람이 내 등을 떠밀기라도 하려는 듯이 세차게 몸에 부딪쳐 왔다. 넥타이가 마치 피리에 반응하는 인도의 뱀처럼 요란스럽게도 춤을 추었다. 바람아 서두르지마 곧 뛰어 내릴테니까. 영훈은 차가운 밤공기를 폣속 깊이 들이 마셨다. 얼음가루가 섞인듯한 공기가 찌르르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호흡이다. 살면서 들이쉬는 마지막 호흡이다. 영훈은 눈을 꽈악 감았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한발만 내 딛으면 모든게 끝나는 거야.  “허억, 죽는줄 알았네!”  그녀는 영훈의 놀라는 흉내까지 내면서 배꼽이 빠질정도로 웃어 재꼈다. 얼굴이 빨개진 영훈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아 그만 웃고 빨리 가! 남 자살하려는 게 그렇게 웃겨?”  그녀는 씨익 웃더니 영훈이 보란듯이 소주를 한잔 더 따라 마셨다.  “결국, 난간에서 내려오셨네요 아저씨.”  “한잔 마시고 얼굴 빨개지는 아저씨 보단 잘하니까 걱정마세요. 그리고 제 이름은 당신이 아니에요. 서경숙에요. 서경숙.” “죽으려는 사람이 왜 남의 눈은 신경쓰실까. 그냥 콱 뛰어 내리면 되지.”  “왜요, 아저씨?”  “생일인데 왜 못 죽어요?”  경숙은 그런 영훈의 모습을 빤하게 잠시동안 쳐다보더니 이윽고 웃음보를 터트렸다. 영훈은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져 경숙에게서 고개를 돌려 소주를 한잔더 들이켰다. 경숙은 배를 쥐어잡으며 웃으며 말했다.  경숙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갑자기 찾아온 무거운 정적에 영훈을 놀라 경숙을 바라보았다. 경숙은 방금까지 웃음으로 가득했던 표정을 거두고 왠지 진지해진 표정으로 멍하니 무언가를 떠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의식속에서 떠오른듯

  • 진명훈
  • 200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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