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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쓴 일기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07-09-26
  • 조회수 145

 

1

 

 

2007년 4월 12일 화요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아, 이제 새벽이니까 어제라고 해야 되나? 어쨌든 4월 12일은 내 생일인 것 같다. 생일…… 도대체 누가 생일에는 축하받아야 된다고 정했을까? 아무런 축하도 받지 못한 나는 왠지 생일도 없는 것 같다. 짜증난다. 어제 그 일만 아니었어도……. 그래도 성우만큼은, 나와 제일 친한 성우만큼은 이해해줄 것 같았는데. 재수 없게 생일 전날 그런 일이 터져서 더 우울하다. 일기고 뭐고 더 길게 쓰기도 귀찮다. 인제 12시도 지났으니까 자야지. 내일 학교가기가 갑갑하다.

 

2

 

 

현수가 눈을 떴다.

 

“오빠! 학교 안가?”

 

방문 앞에는 먼저 일어난 동생이 서있다. 현수는 잠시 멍한 얼굴로 동생을 쳐다본다.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다. 새벽에 일기장을 덮고 누운 뒤부터 아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빠라밤빰빰! 빠라밤빰빰!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울어대는 알람소리였을까.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햇살이었을까. 현수는, 어쩌면 먼 미래에는 시몬스침대가 사실 타임머신이었다라고 밝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놔, 완전 망했네.”

 

시계는 알람으로 맞춘 여섯시 삼십분을 한참 지나서도 계속 울고 있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먼저 집을 나서는 동생의 쾅, 하는 문소리에 맞춰 현수는 꽝, 소리가 날 정도로 시계를 집어던진다. 쿵. 그러나 시계는 벽에 맞고 떨어져 더욱 힘차게 울어댄다.

 

“아, 오늘 지각하면 진짜 뒈지는데.”

 

시계의 울음소리 따위는 이미 현수의 안중에도 없다. 현수에게는 아침부터 시작된 담임의 매질에, 새어나올지도 모르는 자신의 울음소리가 더 다급하다.

머리는 감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양이세수만 한 현수는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티셔츠는 뒤집어 입고, 양말은 다 신지도 못했다.

 

“주니임! 정의로운 택시를 허락해주세요!”

 

주님이 있다면 참 뻔뻔하게 여길 정도로, 절에 다니는 주제에 현수는 간절하게 주님을 부르짖었다. 왼팔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면서, 현수는 초침과 경쟁이라도 하듯 발을 점점 빠르게 굴렸다.

 

“매화남고요!”

 

현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얼마 기다리지도 않아서 택시는 현수 앞에 멈춰 섰다.

 

“어디요?”

“매화남고요!”

“어딘지 잘 모르는데. 길 안내 좀 해줘요.”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택시기사는 느긋한 얼굴로 운전을 시작했다. 그 느긋함이 전해지는 승차감과 함께, 택시는 현수의 지시대로 미끄러져갔다.

택시는 생각보다 빨리 학교 앞에 도착했다. 돈을 내자마자, 불난 집을 빠져나오듯이 택시에서 나온 현수는 시계를 살필 틈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현수는 몇몇 선생들과 학생주임이 지키고 있는 교실을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담임에게 지각이 아님을 입증하려면, 교실에 일곱시 이십분까지는 앉아있어야 했다.

숨 가쁘게 뛰는 현수의 눈에 백 미터쯤 떨어져있는 삼학년 건물입구가 보였다. 헉, 헉, 하며 위아래로 흔들리는 저 건물입구는 이제 낯이 익다. 그런데 건물입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성난 얼굴로 입구에 서있는 담임의 얼굴도 또렷해진다.

 

“김현수! 너 또 지각이야!”

 

어제, 그제, 엊그제와 똑같은 결말이다. 새드엔딩. 현수는 담임에게 어제, 그제, 엊그제보다 더 강한 강도로 맞으면서 알람을 몇 번이나 끈다.

 

“내일 또 지각하면 각오해.”

 

게임 NPC처럼 항상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담임을 보면서 현수는 또 시몬스침대가 이틀 전쯤으로 자신을 보낸 게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겼다.

 

“네, 죄송합니다.”

 

그러나 달력은 오늘은 오늘일 뿐이라고 웃고 있었다. 현수는 이제 담임이 쓰는 침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반 분위기는 오늘따라 썰렁했다. 시끌벅적하진 않았지만, 몇 명씩 모여서 떠들곤 했는데. 현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아이들의 얼굴을 살핀다. 다들 수학문제 같은 얼굴이다. 무표정이라는 공식이 있지만, 현수는 절대로 그 얼굴을 풀지 못한다.

아무 책이나 펴놓고 반쯤 졸고 있으려니까 수업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공부하고 있던 책을 집어넣고, 말없이 교과서를 꺼낸다. 현수는 이 냉랭한 분위기가 자기 탓만 같아서 씁쓸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짧은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수업은 장기자랑처럼 진행됐다. 선생님마다의 개성을 살려서, 마이크에 대고 지르는 노래는 박수보다 졸음을 더 유발하기 쉬웠다.

 

“맨 뒤에.”

 

꾸벅꾸벅 졸던 현수는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본다. 나오라는 신호다. 그리고 나간다는 것은 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우, 현수는 짧은 한숨을 토해낸다. 50분간 맨 정신으로 저 노래를 다 듣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아마 예선에서 탈락하겠지만, 혹시 선생님이 전국노래자랑에 나간다면 0.5초만에 땡 소리를 듣는, 그런 신기록을 세우진 않을까. 현수는 맞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오늘은 점심시간도 고요하다. 급식을 받으려고 한 줄로 죽 늘어선 아이들의 얼굴엔 여전히 다 풀지 못한 수학문제가 남아있다.

 

“형진아, 숟가락 좀.”

 

항상 수저를 가져오지 않는 현수는 늘 친구들에게 빌려서 쓴다. 집에 수저가 없는 것은 아닌데, 몇 번 까먹고 안 가져오다가 이제는 빌려 쓰는게 편해져서 아예 놓고 다니는 실정이다. 그런데 현수의 말을 들은 형진의 표정이 짜증스럽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현수는 형진에게 한 번도 수저를 빌려본 적이 없었다.

 

“넌 왜 염치가 없냐?”

“뭐?”

 

생각지도 못한 형진의 반응에 현수는 당황했다. 형진은 얼굴까지 붉어져서, 계속 퍼부을 기세였다.

 

“너 언제 한번 수저 가져온 적은 있냐? 왜 맨날 애들한테 수저를 빌려? 너 때문에 너한테 숟가락 빌려준 애는 젓가락으로만 먹어야 되잖아! 미안하지도 않냐? 새끼야 염치 있으면 좀 수저 좀 들고 다녀!”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말이었다. 수저쯤 빌리는 거야 친구들에게 별 피해가 없다고 생각했던 현수는 형진의 말에 창피함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늘 자신보다 더한 잘못을 저지르고 다니는 형진에게 그런 말을 듣자 한편으론 형진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아 빌려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현수의 말에 형진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현수도지지 않고 형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보다 더한 새끼가 존나 잘난 척 하고 있어. 병신아 내가 숟가락 좀 빌리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할 시간에 니 담배나 좀 끊어! 존나, 점심시간마다 냄새 풍기는 게 얼마나 좆같은 줄 아냐? 꼰질르질 않으니까 병신이 끊을 생각을 안 해, 아주.”

 

결국 형진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이던 현수는 번쩍, 하는 반짝임과 동시에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번쩍, 고장난 형광등처럼 깜빡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은, 오늘 본 얼굴 중 가장 생동적인 모습이었다. 현수도 반격을 하려고 주먹을 휘둘러보긴 했지만, 허공을 때릴 뿐이었다.

 

“어엇!”

 

허공에 주먹질을 하던 현수는 갑자기 무게중심이 아래로 쏠리는 것을 느끼면서 주저앉았다. 뻐억, 그리고 곧바로 현수의 얼굴에 형진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머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야 말려, 말려!”

 

그제야 아이들도 형진을 말리기 시작했다.

 

“씨발아 내가 담배 피는거랑, 니가 염치없는 거랑 같애? 앞으로 수저 안갖고다니면 진짜 뒤진다.”

 

현수는 코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쏟아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또렷하게 형진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아으…… 씨이발.”

 

싸움에서 진 탓이었을까. 아이들은 대부분 형진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수의 소꿉친구인 성우만이 현수를 부축하며 양호실로 향했다.

어릴 적부터 현수가 싸우고 나면 항상 현수 편을 들어주던 성우가 이번에는 말이 없었다. 아직도 어제 일을 담아둔 건가? 미안한 마음에 현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니가 잘못 했어.”

 

양호실에 거의 다다르자 성우가 말을 꺼냈다.

 

“나중에 형진이한테 사과해라.”

 

대꾸가 없는 현수를 남겨두고 성우는 그대로 교실로 가버렸다.

 

“씨발…….”

 

현수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3

 

 

고3이 싸워서야 되겠냐는 선생님의 잔소리와 매질을 견뎌낸 현수는 조퇴를 했다. 퉁퉁 부어오른 현수의 얼굴 덕인지, 담임은 내일 지각하면 진짜 각오하라는 말만 강조하고 순순히 조퇴를 허락했다.

 

“후우…….”

 

집에 도착해서까지 두통이 잦아들질 않는다. 옷을 갈아입은 현수는 일기장을 펼친다.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기억력이 나쁜 현수는,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만 일기장을 찾곤 했다. 한 달 전 일기를 읽어보던 현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펜을 딸각거리며 오늘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2007년 4월 11일 월요일

 

수저로 시비가 붙어서 조형진과 싸웠다. 개발렸다. 아직까지도 아프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양호실로 가는 도중에 성우가 내 잘못이라고 했다. 개새끼…… 어제 수진이랑 깨진 것 가지고 아직 화가 난 것 같다. 이놈의 주둥이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그리고 이수진 그년은 왜 내가 술 먹고 몇 마디 한 걸 성우랑 헤어지면서 불어버린 거야. 시발. 이래서 여자는 입이 싸단 말이 있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년이 성우 비밀 좀 말해달라고 했을 때 그냥 모른 척 하는 건데. 하긴 아무리 술이 들어갔어도 그렇지 여자친구한테 그놈 여자 하나 더 있다고 한건 좀 심하긴 했지. 주둥이가 아니라 술이 진짜 웬수다. 이래서 미성년자는 술을 마시면 안 되나보다. 시발…… 따른 놈들은 다 버려도 성우랑 어떻게 화해할지 깜깜하다.

 

4

 

 

일기를 다 쓴 현수는 시계를 본다. 12시 5분. 이제 13일이다. 일기에도 썼지만, 진짜 학교 가서 애들 볼 생각하니 갑갑하다. 현수는 언제쯤 교실 분위기가 풀릴지 걱정이다. 가방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수저를 확인한 현수는 침대에 누웠다. 부우우웅, 그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생일추카해 현수야. 아직 12시 안 지났지? ㅎㅎ.. 까먹고 있어서 선물도 준비 못했다. 억울하면 너도 내 생일에 선물 주지 말든가ㅋㅋㅋ 생일 축하햇!>

 

문자를 확인한 현수는 핸드폰 시계를 본다. 11시 58분. 현수는 12시 5분을 가리키고 있는 알람시계를 집어던진다. 시계가 벽에 맞고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더니 갑자기 알람이 울린다. 빠라밤빰빰! 빠라밤빰빰! 일어나라, 일어나라. 빠라밤빰빰! 빠라밤빰빰! 일어나라, 일어나라. 빠라밤빰빰하는 울음소리는 꽤 오랫동안 그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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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 45분 즈음

 초기 인물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눈빛이다. 카메라가 영혼을 앗아간다는 미신이 만연했기 때문에, 그 즈음의 일반인 모델은 하나같이 강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눈을 통해 왕래하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의 구멍을 메웠다. 신념, 공포, 분노, 혹은 순수한 동경 따위로. 그런 의미에서 K의 눈은 낡아빠진 싸구려에 가까웠다. 아직 과학이 진리를 대신하기 전, 미신이 미신으로 불리지 않던 시대를 살아가는 듯, K의 눈은 기묘한 생명으로 불탔다. 그녀는 분명 이성보다 심장을 우선하리라. 촬영자로 하여금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눈이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삼각대를 세웠다. 카메라의 노출값과 함께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갑한 교복 넥타이를 연신 긁어대며, K의 알몸에게 렌즈를 겨눴다. 석고상처럼 바스라지는 신체, 그 위로 수놓아진 푸른색 멍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응시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녀가 진심 아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시퍼런 눈을 치켜뜬채 나를 바라보는 것도.  K와 나는 방과후 빈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양 팔에 아로 새겨진 멍자국이 염증처럼 부풀어오르는 탓에, 종일 묶어뒀던 팔토시를 막 벗어던진 참이었다. 나는 선생과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서 불어터진 흉터를 말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처가 덧나고 함부로 엉겨붙기 때문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거, 얻어 맞은거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채 호흡을 삼키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적막이 감도는 교실에서 K의 시선을 눈치챈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뿐 차마 할 말을 고르지 못 했다. 담홍색 저녁 노을을 받은 하얀 피부가 꼭 석고상처럼 눈부시다. 교실 뒷문에서 꼿꼿이 펼쳐진 척추가 아름답다. 따위의 사고를 반추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K가 먼저 입을 열기까지,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어.”  다만 그런 대치상황을 넘어 날아온 K의 한마디는 너무나도 뜻밖의 물건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노라 고백했다. 죄값을 치르는 건 두렵기 때문에 내일 자살을 할 것이라며, 초연한 어투로 속삭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해를 필요로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새 다가와 내가 반사적으로 움켜쥔 DSLR을 검지로 쓸어올렸다. 슬쩍, 미소지었다.   나에게 처음 카메라를 건네주던 날, 아버지는 말했다. 사람의 눈동자도 카메라처럼 풍경을 담아둘 수 있다고. 잠깐 빛을 응시한 다음 눈을 감으면 눈꺼풀 속에 그 잔향이, 불꽃이, 똑똑히 보이잖아. 이게 바로 그 증거야. 보호안경 너머로 용접 불꽃을 튀기며 그는 곧잘 떠들었다. 삭으로 뜬 달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무렵의 나를 사진으로 이끈 매력적인 미소였다. 꼭 지금처럼, 체념 한방울 섞이지 않은 강인한 미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양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K는 꼭 술을 마시지 않은 아버지처럼 따뜻했다.  “그러니까 내 영정사진을 찍어줘. 너, 사진 찍는거지?”  그날부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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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2
보이지 않는

 남자는 늑대였다. 손바닥만한 핏덩이로 태어난 그에게는 입술 대신 주둥이가 있었다. 남자의 어미는 탯줄도 채 자르지 않고 그 모습을 긴밀히 살폈다. 길게 뻗은 주둥이, 옹골찬 회색 눈동자, 전신을 덮은 이중 모피, 남자에게 인간 다운 신체 부위는 온전히 돋아난 다섯 손가락이 전부였다. 그 꼴이 영락없이 괴물이었기에, 남자는 버려졌다.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바야흐로 이단 심판관이 악마와 마녀를 때려잡던 시기였다. 가축이 죽고, 곡식이 마르는 건 전부 악마의 소행이라고, 교회는 말했다. 달리 탓할 대상이 없어,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숲속에서 홀몸으로 지내는 여성은 화형, 기형아를 출산한 일가는 몸이 찢어졌다. 단, 귀족은 예외였다. 그들은 단두대 아래서 목이 잘렸다.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남자는 부모가 기요틴 아래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열일곱이 되는 나이에 몰래 성을 빠져나와 무법지를 거닐었다. 힘들지는 않았다. 남자는 금방 자랐다. 성을 빠져나왔을 때, 그의 신장은 이미 2m 가까이 되었다. 단단하게 솟은 송곳니는 돌을 부술 만큼 강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버려진 저택에 둥지를 틀었다.  "저곳에는 용이 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몸을 붙인 폐 저택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용이 몸을 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이제 30년 가까이 삶을 영위한 남자는 더는 아무것도 먹고 마실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호수를 핥았다. 자기 직전, 저택 주류 창고에 남아있는 위스키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걸로 족했다. 덩치는 점점 커져,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 하지만 남자는 늑대였다. 괴물이었지만, 용은 아니었다. 폐허에 버려진 정장을 손질하여 입고, 혀를 굴릴 때, 보다 고풍스러운 단어를 벼렸다. 마을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황금을 탐하지 않았다. 다섯 손가락 달린 괴물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누구보다 인간성을 갖춘 영혼이, 기사가 그의 심장을 꿰뚫어주길 바랐다. 남자는 괴물이었다. 괴물은 인간에게 죽어야 했다.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남자는 결론 내렸다.  폐허는 나름대로 지낼 만했다. 가구에 남아있는 문양으로 추측해 볼 때, 몰락 귀족의 저택인 것 같았다. 정장, 거대한 거울, 마찬가지로 거대한 시계.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모두 폐허에 남았다. 남자는 그들을 입었다. 버려진 것들을 입었다. 편안했다. 몸을 옥죄는 정장 안에서 남자는 편안할 수 있었다. 시계의 먼지를 털고 기름칠을 했다. 거울 역시 관리하긴 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닦아도 비치지 않았으니까. 본인 만큼은 절대로.  남자는 저택의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처음 그 앞에 섰을 때 깨친 사실이었다. 세상을 담은 조각은, 남자를 제외한 모두를 비췄다. 이따금 비를 피해 들어오는 올빼미, 토끼, 여우를 비췄다. 잘 정돈된 정장을 비췄다. 출처 모를 와인과 위스키 역시 그곳에 담겼건만,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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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꽃비

할머니는 소녀의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쭉 이어진 벚나무의 행렬에 양 뺨을 살짝 붉혔다. 여든에 가까워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지만 초봄의 내음 앞에서 그녀는 소녀가 되었다. 두 눈을 활짝 열고서 가만가만 떨어지는 꽃비를 응시했다. 노인답지 않은 풍부한 생기가 그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엄마는 종종 ‘어머니가 너무 늙으셔서 그래’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늙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놓쳐온 과거를 향해서. “너희 아빠랑 요양원 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오늘만 할머니랑 둘이 있어.” 그 말과 함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삼이 된 너를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슬픔이나 연민 대신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최근 들어 엄마와 아빠는 자주 그런 한숨을 토했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처럼, 응, 그래, 괜찮아. 짧은 세 마디로 둘을 배웅했다. 부모님의 한숨을 닮아 무거운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돌려, 거실 탁자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머리도, 눈도, 뇌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노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째서 우리의 몸은 이렇게 쪼그라들고 마는 걸까요.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나는 창문에 기댄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렸다. 거슬거슬한 촉감이 검지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감겼다. 젊음이 빠져나간 노인의 육체였다. 내 검지 손가락의 촉감이, 세월을 뚫고 올라온 그녀의 주름이, 그 사실을 열성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뇌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스스로가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이 점점 깎여나가는 것도 모두 당연한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건 당연하다고 잘난 듯이 말하는 주제에, 어째서 기어코 어제를 돌아보는 걸까.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제,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담임이 내뱉은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 때가 참 좋을 때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린 지금은 그저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저녁 열 한시에 독서실을 빠져나오는 일상은 빈말로라도 그리워할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맨 앞자리에서 담임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그는 그때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 꽃이 그렇게 좋아요?” 나는 그리 묻고서, 잠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가 마무리되면 벚꽃도 지겠지. 문득 그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햇빛 아래서 벚꽃을 볼 일이 없는 탓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을 나와 해가 떨어지고서 돌아오는 나날에

  • 탈퇴 회원
  •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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