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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작성자 변혜지
  • 작성일 2007-12-02
  • 조회수 793

화장

* * *

세안을 끝낸 후 스킨을 바른다. 스킨은 피부의 결을 따라 천천히 문질러주고 30초 후 로션 을 바른다. 로션을 바르고 다시 2분 후 선크림을 바른다.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른 후에는 기다리지 말고 파우더를 발라야 한다. 흰색 볼터치 제품으로 코를 오똑하게 보이게 한 후 갈색으로 턱 선을 갸름하게 감춘다. 눈썹은 티가 많이 나지 않도록 살짝 그려준다. 아이섀도우는 흰색을 베이스로 바른 후 그때그때 원하는 색으로 발색한다. 뷰러로 속눈썹을 살짝 말아올리고 마스카라를 바른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립글로스를 바른다.

화장을 끝낸 후의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1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서두를 수 없다. 아이라인을 그릴 땐 평소보다 신중해야 한다. 아이라인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눈의 모양새가 결정된다. 실제 얼굴은 중요 하지 않다. 다만, 화장 후의 얼굴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관건일 뿐. 색깔별로 있는 립글로스 중 펄 핑크를 집어 들어 입술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같은 핑크색이라도 미세한 차이에 따라 종류는 열 가지가 넘어간다.

화장을 끝내고 나니 이미 약속 시간이 살짝 넘어가 있다. 서둘러 가방을 들고 약속장소로 향한다.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선망의 시선들. 저 눈길은 결코 두터운 화장을 침투해 나의 맨 얼굴을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화장을 한다. 아름다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면 아무도 나를 멸시할 수 없다.

늦었구나.

끝까지 뛰지 않는 나를 현정이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옷차림을 정돈 한 후에야 현정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미안, 준비할 게 조금 많아서.

그래, 오늘따라 화장이 더 짙은걸 보니까 알 만 하네.

톡 쏘는 말을 마지막으로 현정은 뒤돌아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손거울로 다시 한 번 화장을 확인 한 후 현정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다른 아이들과 남자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현정이 자리에 앉고 나는 끝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자연스럽게 많은 눈길들이 내게 쏟아졌다. 당연하다, 고 생각하면서 눈을 들어 살며시 웃음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늦었죠?

아니에요. 저희도 금방 왔어요.

호의를 가진 미소들, 거리에서 날 바라보던 눈빛과 다름없는 시선들.

야, 방금 온 애, 죽이지 않냐?

맞은편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내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나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자아이들의 곱지 않은 눈길들이 쏟아졌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런 순간 외에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장하고 서로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아이들. 학교나 이런 자리에서 밥을 먹으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눌 때에나 필요한.

이제 슬슬 자릴 옮길까요?

앞자리에 앉은 남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2

집에 들어와 화장을 지우며 언제나 보게 되는 맨얼굴은 화장을 했을 때의 얼굴보다도 낯설다. 낯설고 못생겨서, 나는 거울속의 보이는 진짜 나를 외면해 버렸다. 화장을 지우는 일은, 가면을 벗겨 내는 일은, 가면을 쓸 때의 심정보다 두렵고 서럽다. 진짜 나로 있는 시간은 하루 중 삼분의 일도 채 되지 못한다.

화장을 하지 않은 채로는 밖에 나가지 않은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화장을 하고나서부터, 나는 진짜 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못생기고 평범한, 주목할 것 하나 없이 볼품없는 아이. 친구라고는 하나도 없이 밥 먹을 때에나 눈치를 봐가며 겨우겨우 무리에 끼어 다니는 게 전부였던 그시절이 맨얼굴을 볼 때 마다 떠올랐다. 화장을 시작하고 나서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할 수 없다. 절대로.

고등학교 때의 나는 관심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못생기고, 볼품없는데다가 성격 또한 소심해서 아이들 사이에 잘 끼지 못했다. 서로의 첫 인상에 대해 이야기 하던 자리에서 아이들은 웃고 떠들어 대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자 멈칫 하더니 저희들끼리 수근댔다.

야, 근데 쟤 첫인상은 기억 안 나지 않냐?

맞아, 원래 눈에 잘 안 띄다 보니까 기억 안나.

웃었다. 나도 내 얼굴이 잘 기억 안 난다는 등의 우스갯소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있었다. 나는 혼자 주절대던 것을 멈추고 다시 아이들의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이야기를 들었다. 3년, 아니 학교를 다닌 12년 내내 그랬다. 존재감 없고 초라한 아이. 기억되지 않는, 사라져 버려도 눈치조차 채지 못할, 졸업사진을 바라보며 야, 저런 애도 있었냐? 라고 지껄일 만도 한 그런 아이였다 나는. 대학에 와서까지 이럴 순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첫 개강 날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메이크업 샵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거울에 비춰본 내 모습은.

와, 메이크업이 진짜 잘 어울리세요.

일대에서 가장 비싼 메이크업 샵 이라고 몇 십 만원대의 돈이 들었지만 계산을 하면서 나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화장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내게 눈길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내 가면에게 보내는 그눈길 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강의실로 들어서자 몇몇 아이들이 함께 앉아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바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르게 살 수 있다. 집과 멀리 떨어진 대학에 온 이상 나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뜨거운 희망이 가슴에 치밀어 올랐다.

난 화장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모두 메이크업 학원비에 쏟아 부었다. 학비는 부모님께 받아 충당했다. 메이크업을 배우는 것에만 열중하자 당연하게도 대학 강의는 뒷전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안 좋은 소리와 눈총이 쏟아졌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처음 받게 된 선망의 눈길을, 희망이 가득해 보이는 행복한 삶을 놓칠 수는 없었다.

첫 수강이 끝나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집으로 들어간 나는 한참동안 거울 앞을 벗어나지 못했다.

화장을 지우며 거울을 보는 데 피부에 조그맣고 오돌도돌한 것 몇 개가 얼굴에 돋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만져보다가 고등학교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드름이 나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그것에서 손을 뗐다. 며칠간 그대로 두면 발긋발긋 부풀어 올랐다가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진 언제나처럼 화장으로 감추고 있으면 될 테니까.

3

강의는 아홉 시부터 시작된다. 제 시간에 맞추어 가려면 다섯 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씻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만, 기초화장부터 모든 메이크업을 마치기까지의 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는다.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아직 바깥은 어둡다. 시계는 네 시 오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 탓인지 몸이 온통 쑤셔댔다. 삐걱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현관문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낡은 싱크대가, 오른쪽으로는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은 변기에 앉으면 문을 닫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변기 옆에 있는 샤워기와 작은 대야 하나로 화장실은 가득 찬다. 미닫이문을 변기 쪽으로 밀어 놓고 신발이 놓여있는 현관에 쪼그려 앉아 양치질을 한다. 그리고 물을 받아 대야를 현관으로 끌어낸 후 몸을 앞으로 숙였다. 머리를 적신 후 손을 뻗어 화장실 안쪽을 더듬대자 화장품을 사며 받은 샴푸의 샘플들이 만져졌다. 하나를 집어 뜯은 후 대충 내용물을 쥐어짜내고 부엌 쪽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대충 손으로 쥐어짜고 세수를 했다. 젖은 머리와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가 수건을 찾았다. 빨래를 하지 않은지 벌써 며칠이 지나 새 수건을 찾을 수 없었다. 옷은 언제나 세탁소에 맡겼다. 빨래 통에서 눅눅해진 수건을 집어 들었다. 얼굴을 닦고, 머리를 털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옷가지들을 밟고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작은 옷장과 화장대, 이부자리와 늘어져 있는 옷가지들로 자취방은 언제나 비좁았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얼굴 전체를 보기보다는 거울을 가까이 들이대고 화장할 부위부터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런지 뺨에 먼저 눈길이 갔다. 닭살같이 돋은 오돌도돌한 돌기들은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였다.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두어번 문질러 보다가 스킨을 손에 들었다.

불을 킨 것과는 또 다르게 해가 뜨며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 방안은 평소와 달리 유난히 따뜻했다. 눈이 부시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원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임을 생각하면 확실히 다른 날과 달랐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 스킨을 얼굴에 문지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화장을 끝내고 나자 축축하게 젖어있던 머리는 거의 말라 있었다. 드라이를 들어 머리 모양을 만들고 나자 시계는 일곱 시 반을 지나 있었다. 방안을 훑어보다가 세탁소에 맡길 옷을 대충 집어 들어 쇼핑백에 넣고 옷장을 열었다. 화장품과 마찬가지로 매달 구입하는데도 옷장을 열면 입을 옷은 항상 없었다. 한참 옷장을 뒤지다가 겨우 옷을 고르고 잠옷의 단추를 끌렀다.

집을 나온 것은 여덟 시를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주인집 딸인 선혜에게 세탁소가 열면 옷을 맡겨 달라고 부탁한 후 계단을 내려왔다.

집 앞 편의점에서 커피우유 하나와 샌드위치를 샀다. 밥 종류를 먹고 싶었지만 화장을 한 상태에서는 무언가를 먹는 것 조차 조심스러웠다. 계산을 끝내고 편의점을 나와 지갑을 살펴 보았다. 8만2천 원. 이 돈으로 보름을 살아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해 받은 돈은 옷과 화장품을 사고, 사람들을 만나며 다 써버렸고 학비를 제하고 부모님이 매달 보내주시는 돈은 20만원 남짓, 그돈으로 식비와 생활비, 매달 월세를 내는 것은 빠듯했다. 월세 10만원을 제한 나머지 10만 원으로 생활비와 식비를 충당해야 했다.

여덟시 이십오 분. 여러 가지로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삼십분 정도 가야 했으므로 시간이 빠듯했다. 시계를 보다가 정류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4

버스에서 내려 거의 뛰다시피 했는데도 이미 시간은 아홉 시를 조금 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강의실로 들어가 앞을 보자 다행히도 아직 교수님은 들어오시지 않았다. 뒷 문을 열자 몇몇 사람들의 눈길이 내 쪽으로 쏟아졌다.

끝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꺼내 앉았다. 현정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곯아떨어져 있다가 오후 시간에나 얼굴을 내밀 것이다. 나는 단지 대신 출석에 대답만 해주면 된다. 학교 밖에선 펴보지도 않는 교재를 꺼내놓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제 만났던 남자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잘 잤냐는 말과 함께 오늘 시간이 있냐고 물어오는 문자였다. 아직 교수님은 오시지도 않았지만 수업이 끝난 후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핸드폰을 닫았다.

그뒤로도 십 분이 지나서야 교수님은 강의실에 들어왔다. 나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펜으로 교재에 낙서를 했다. 피곤해서 자고 싶었지만 엎드리게 되면 머리와 화장이 흐트러져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강의 시간이 끝나고 점심 시간이 되자 현정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지금 일,이교시 끝났어.

그래? 대출 했지?

응, 학생 식당으로 와.

곧 학생 식당 안으로 현정이 들어왔다. 변함없이 날카롭고 도전적인 눈길로(남자들에겐 도발적이고 섹시하게 보이겠지만) 사람들 사이를 훑어보던 그녀는 내게 걸음을 옮겨 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현정은 신경질 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 그 남자 재수 없더라.

왜?

지는 얼마나 잘났다고 사사건건 어디에 사느냐, T대학이면 지방대 중에서도 낮은 축 아니냐, 이런 것만 물어 보더라. 열 받아 죽는 줄 알았다. 못생겼으면 겸손하기라도 해야지.

그말을 한 귀로 흘리며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현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오늘 학생식당에서 밥 먹기 싫다. 나가서 먹자.

안 그래도 돈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수업 언제 끝나요? 오늘 시간 있어요?

학교를 나와 식당으로 가는 도중 어제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삼 교시부터 휴강이래요. 교수님이 개인 사정으로 못나오시게 돼서.

휴강은 무슨, 이라고 현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휴대폰에 귀를 기울였다.

아, 그러면 지금 만날래요? 나 수업 안들을 생각이었는데.

T대 앞으로 오실래요? 지금 친구랑 그 앞 커피숍에 있는데.

알았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자 현정이 입을 열었다.

나머지 수업 나보고 다 들으라고? 밥 네가 사라?

5

그저 그런 하루였다. 일, 이교시 학교에 있다가 현정과 점심을 먹고, 남자를 만나 늘 그렇 듯 영화를 보고, 커피숍에 가 비싼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고, 집 앞까지 바래다준다는 걸 만류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는데도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꽤 괜찮은 남자였다. 매너도 좋았고, 유머감각도 있었다. 얼굴도 못생긴 편은 아니었다. 내게 어느 정도의 호감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하려는데 다시 얼굴에 난 것들이 눈에 들어 왔다. 아침보다 더 많이 나 있는데다가 크기도 더 커졌다. 밖에서 조금씩 가렵긴 했지만 바깥에서 두터운 화장을 하고 먼지에 노출된 채 오래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런데 두 뺨의 절반 가량을 그 것들이 차지하고 있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여드름이 다시 돋나, 아니면 아토피인가 해서 몸을 살펴봤지만 몸에는 아무 것도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세수를 끝낸 후 다시 거울을 봤지만 그 것들은 그대로였다. 조금씩이지만 가렵기도 했다. 여드름이겠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애써 그 기분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한 채 자리에 누웠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안됐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6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일주일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화장을 하고 대학에 다니고, 남자를 만났다. 남자에게는 사귀자는 이야기도 들었다. 예전에 만났던 어떤 남자보다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들떠있어야 하는 데 온몸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제부터 밖에 나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조금씩 얼굴에 늘어가던 그것들은 지금 온 얼굴을 장악한 해 있었다. 이마부터 시작해서 콧잔등까지, 도저히 화장으로 가릴 수 도 없었거니와 화장을 할 때마다 미칠 것 같은 가려움에 참을 수가 없었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가려움은 점점 더 커져갔다. 자꾸 긁어대니까 피가 나올 것 같이 부어오르기도 해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만나자는 남자의 문자가 왔다. 몸이 아파서 오늘은 쉬어야겠다고 하자 전화가 왔다. 괜히 짜증이 솟았다.

많이 아파요 하영씨?

아니요, 하필이면 여름감기에 걸려버려서요. 조금 쉬었으면 하는데.

전화를 끊고 옷을 갈아입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집을 나왔다. 화장을 하지 않은 채로 집 밖으로 나온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어느 누구와도 마주치기 않길 바라며 시내에 나갔다. 가는 도중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 만 같았다. 서둘러 택시를 잡고 제일 가까운 피부과로 갔다. 시내에서 걸어가면 십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려웠다.

접수를 마치고나서 의자에 앉아 얼마간 기다리자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하영씨 들어오세요.

진료실에 들어서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안이 온 몸의 신경세포들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모자는 벗어 보시구요.……흠, 언제부터 이렇게 되셨죠?

일주일이 조금 넘었어요. 처음엔 조금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이것 때문에 어디에 나갈 수가 없어요, 선생님.

그 뒤로도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해왔지만 어떻게 대답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가지 검사가 끝난 후 3일 후에 다시 오라는 말뿐이었다.

지금 당장 고칠 방법은 없나요? 네? 선생님.

검사의 결과가 나오기 까진 최소한 3일은 걸립니다. 그 때까지는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할지 저희도 모릅니다.

멍한 정신으로 병원에서 나왔다. 하늘은 지나치게 밝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거리를 걸었다. 차도로 발을 내딛고 다시 택시를 잡아 집 앞까지 올라왔다. 이 상태로는 어디에도 나갈 수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습관적으로 제일 먼저 화장품들에 눈길이 갔다. 한숨이 쏟아졌다. 3일 동안,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신경질적으로 현정에게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의 배터리를 뽑았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며칠간 못나갈 것 같아. 그 사람한테도 잘 좀 말 해줘.

7

피부과가 문을 여는 10시에 맞추어 집을 나왔다. 3일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어서인지 얼굴이 푸석푸석 했지만 가려움은 어느 정도 멈춰 있었다. 접수를 마치자마자 나는 진료실로 안내되었다.

유하영님 이시죠?

예, 저, 검사 결과는……?

불안에 찬 나의 물음에 의사는 서류들을 뒤적이며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꺼냈다.

알레르기성 접촉 피부염이군요. 매일 화장 하고 다니시죠?

……네.

상담 때에도 그렇고 해서 화장품에 대한 알레르기를 집중적으로 검사해 봤는데 거의 반응 결과가 확실하더군요. 매일 열두 시간 이상 화장 하고 계시죠?

숨이 막혀왔다. 검사를 받을 때부터 예정해 놓은 선고서를 읽는 것처럼 의사의 말투는 담담했으며 냉정했다. 오히려 그 냉정함이 나를 더 불안으로 밀어 넣었다.

음, 약물 치료를 꾸준히 받으셔야 합니다. 연고 받아 가셔서 피부에 꾸준히 발라주시고, 화장은 절대 안됩니다. 그 밖에 피부에 자극을 줄만한 향수나, 염색약 같은 것도 일체 사용하지 마세요. 보통 약물이나 연고 하나만 사용하는데 유하영 씨 같은 경우에는 증상이 너무 심하군요. 증상을 보인 후에도 계속 화장을 하셨죠?

사형선고와도 같은 말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내게 화장을 하지 말라는 말은, 고등학교 때의 생활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아니 그 말보다 더 끔찍하게 들렸다. 그 뒤의 말은 더 이상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고와 약을 받고,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문자가 왔다. 현정이었다.

나 지금 네 남자친구랑 있어, 나와. 여기 학교 앞 커피숍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둘이, 같이 있다고……?

8

여느 때와 다름없이 네 시 오십오 분이 되자 알람이 방안을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불을 켠 나는 제일 먼저 화장대 앞으로 갔다. 전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약을 먹고 연고를 바른 덕분에 가려움은 거의 멎었고 알레르기 반응도 조금 수그러들었다.

평소처럼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빨래 통을 뒤져 수건을 찾았다. 대충 머리를 털고 나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결코 맨 얼굴로는 어디에도 나갈 수 없었다. 스킨 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킨이 피부에 닿자 다시 미칠 것 같은 가려움이 이어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꾹 참고 스킨을 얼굴에 문지르고 로션을 발랐다. 얼굴이 떨어져 나갔으면 했다. 선크림까지 바르기를 마쳤을 때쯤, 가려움은 내게 있어 익숙한 감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화장 외에는 얼굴에 손을 대지 않았다. 화장을 끝낸 후에는 결코 얼굴을 긁을 수 없다. 참아야 했다. 참아야 해, 참아야 해…….

남자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결코 이상한 점을 보여선 안됐다. 어제 현정의 문자 이후 바로 남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유쾌한 목소리로 날 반겼으며, 내일 시간이 있냐고 물어오기까지 했다. 나는 만나자는 남자의 제안을 받아 들였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다정하게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이 왠지 모를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화장을 마친 나는 거울을 보았다. 예전보다 두 배 이상 두껍게 화장을 했다. 그래야만 피부에 난 알레르기들을 가릴 수 있었다. 두꺼운 화장이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레르기가 일어난 피부를 보이는 것 보단 이편이 훨씬 더 나았다. 집을 나오기 전 나는 거울을 보고 중얼 거렸다.

잘 될거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변한 건 없어…….

9

강의실에 도착했을 땐 일교시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화장에 평소보다 시간을 훨씬 더 들인 탓이었다. 현정은 맨 끝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옆자리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었다. 현정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차가운 눈매. 모든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귀찮은 표정. 가슴 속에서 이상하게 피어오르는 불안감이 차차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 괜찮을 것이다.

일,이교시가 끝나자 현정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으러 가자.

나 그 사람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만나지 뭐.

현정은 그 말을 끝으로 앞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저 담담하고 당연하다는 말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별 일 없을 것이다. 혹시 이상한 낌새가 보이나 나는 옆에서 눈치를 살피면 된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때는…….

남자는 이미 학교 앞에 도착 해 있었다. 대학 현판이 붙어 있는 정문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모습은 사뭇 멋있어 보였다.

왔어요? 현정 씨도 왔네요?

네. 혹시 둘만 쏙 가버리실 생각은 아니었죠?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상당히 친해 보이기는 했지만 이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남자친구를 대하는 태도로, 여자친구의 친구를 대하는 태도로, 전혀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하영씨, 부모님은 괜찮으세요?

네 많이 나아지셨어요. 지금은 퇴원 하셔서 집에 계세요.

당황해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버렸다. 몇 달간 전화 한통 하지 않은 부모님 생각이 났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짧은 안부를 물어 본 것은 그보다 더 전의 일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을 지워냈다.

다행이네요. 현정씨한테 그 얘기 듣고 많이 걱정했어요.

유쾌한 어조였지만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 뭐 먹을까요?

10

집에 들어오자마자 서둘러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끝냈다. 이제 가려움은 거의 사라지고 피부가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알레르기들 하나하나가 저마다 비명을 질렀다.

아악……!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본 나는 비명을 질렀다. 거울에는 얼굴이 발갛다 못해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천천히 매만졌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미끌미끌한 진물이 만져졌다.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걸 느끼며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적지 않은 충격이 머리에 전해졌다. 아프지 않았다. 아니, 얼굴이 아파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쓰러진 의자에서 일어났다. 머리에서 육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남아 있던 약을 집어 삼켰다. 하루에 한 봉지씩 먹으라던 약을 8봉지 모두 삼켰다. 병원이야 내일 또 가면 된다. 내일도 화장을 해야만 한다. 이런 꼴로 밖에 나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거울을 봤다. 흐르는 진물을 닦아내고 상처 하나하나를 보았다.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면봉을 찾아 상처에 남아 있는 진물을 모두 짜냈다. 소름이 끼치고 눈물이 맺힐 만큼의 통증이 전신을 쓸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나하나 그렇게 진물들을 짜나가자 상처들에서 더 이상 진물이 나지 않게 되었다. 내일 화장을 하고 나가면 다시 생길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상처와 알레르기로 가득 찬 얼굴에 피부과 연고를 잔뜩 바르고 그 위에 다시 항생연고를 발랐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하루하루는 괜찮을 것이다. 매일 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지라도.

연고를 바른 나는 천천히 방안을 보았다. 먼저 화장대 앞에 놓인 거울을 들어냈다. 그리고 방의 구석에 뒤집어 놓았다. 화장실 변기 측면에 달린 작은 거울을 떼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자신의 얼굴이 보일 때 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내가 우습고 비참했다. 화장을 하는데는 작은 손거울 하나면 충분하다. 거울이 끔찍해……. 멍한 얼굴로 중얼 거리는 내 목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11

피부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초조해 죽을 것 같다. 며칠 간 진물을 닦아내고, 연고를 바르고, 그 위에 항생연고를 바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딱지가 생기려 할 때 마다 손으로 뜯어버렸다. 그렇게 며칠을 반복하자 어제 저녁부터는 진물이 멈추지 않는다. 어디서 이것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다.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이것들을 멈추기 위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다시 피부과에 온 것이다.

유하영씨 들어오세요.

나를 바라보던 의사는 눌러쓴 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을 보고 표정이 굳는다. 얼핏 한심하다는 표정이 드러나기도 해 화가 나기도, 서럽기도 했다.

증상이 아주 심각합니다. 당장 화장을 멈추세요. 안 그러면 저희도 그 뒤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멈출 수 없어요.

네?

멈출 수 없어요. 절대, 절대 못해요.

아프지 않으세요?

아파요, 아파 미칠 것 같아요. 하루에도 몇 번 씩 얼굴을 뜯어내고 싶은 충동이 들만큼.

의사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목소리는 분명하고 또렸했다.

몇 마디 나를 설득해보려던 의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약과 연고를 처방해 주었다.

적어도 진물이 멈출 때까지는, 화장을 하지 마세요.

의사의 말을 뒤로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약을 받아 택시에 올라타서 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자는 유난히 현정의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최근 들어 남자와 둘이서만 만난 기억이 흐릿하다. 현정은 남자와 있을 때면 어딘가 달라 보였다. 차가운 목소리를 한 톤 높였고, 불만스럽게 위로 치켜 올라간 눈도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였다. 나와 남자, 그리고 현정. 점점 이상한 관계가 되어 가고 있었다. 현정과 내가 남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직은 내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뒤는 알 수 없었다.

방안에 들어서자 벽을 향해 세워 놓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을 안본지 꽤 오래되었다. 화장을 할 때에도 눈을 그릴 때에나 완성된 모습을 확인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거울은 그 어떤 것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나를 본다는 것,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12

화장대 앞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까, 남자의 그 당황한 듯한 눈빛과, 표정이 떠올랐다. 남자는 화가 난 것 같기도,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 뒤로 남자는 내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현정은 책망도, 걱정의 눈빛도 아닌 뭔가 묘한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뛰어난 유머로 분위기는 금방 회복 되었지만 나는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일요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알람은 네 시 오십오 분에 울렸다. 남자와는 12시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씼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이 없는 화장대를 볼 때 마다 며칠 째 보고 있지 않은 내 얼굴이 떠올랐다. 요즘 학교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남자와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만났다. 약속은 주로 내가 제안하는 편 이었다. 세 번에 두 번은 남자와의 만남에 현정이 함께 나왔다.

삼일에 한 번 정도만 화장을 하고 그 밖에는 집 안에서 연고만을 바르고 약을 먹자 끊임 없이 흐르던 진물은 멈추었다. 하지만 화장을 한 날 저녁이면 언제나 면봉을 들고 눈물을 질금대며 진물을 짜내어야 했다. 화장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과 가려움도 사라지지 않았다. 화장을 마치자 시계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옷을 고르고, 머리를 하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갔다.

십 분정도 일찍 도착했음에도 남자와 현정은 이미 약속장소에 나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일은 점심을 먹을 때 일어났다. 남자는 나와 마주보고 앉았고 현정은 내 옆에 앉았다. 테이블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영씨, 화장 안 해도 예쁠 것 같은데.

남자가 장난스럽게 말을 하며 내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건드리지 말아요!

당황한 내가 남자의 손을 쳐내며 소리 지르듯 말하자 남자는 어색하게 손을 거두어가며 살짝 웃었다.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남자는 불쾌한 것 같았다.

미안해요.

아……저, 그게.

남자가 화제를 돌리며 사건은 끝이 났지만 나는 그 뒤로도 무언가를 들켜버린 것 같아 쭉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만난 날이면 항상 잘 들어갔냐고 전화 해오던 남자의 연락이 오늘은 없다. 얼굴이 아프다. 나는 진물을 짜며 눈물을 질금댔다.

13

남자에게서 일주일 째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나마 먼저 취하던 연락마저 하지 못한 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일주일 동안 나간 일이라고는 집 앞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살 때 와 새벽에 목욕탕을 다녀온 것이 다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물건을 내미는 날 아르바이트생이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 눈빛이 아니다. 예전과는 달랐다. 집에 들어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남자의 번호를 누르고 초조하게 휴대폰을 귀에 댔다. 오랫동안 신호음이 울리다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막상 전화를 받자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우물쭈물 하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만날래요?

뜻밖의 행운이었다. 남자가 먼저 만남을 제의해 온 것은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내게 기분이 상해 있을 거라고 불안해하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웃음이 나왔다. 역시나 유쾌한 남자였다.

그러실래요? 아 저, 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 제가 접촉에 조금 민감해서요.

아, 벌써 잊어버렸는데요 뭐. 아! 수업 시작 했다. 그럼 내일 봬요.

아까의 걱정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내일 뭐 입고 나가지, 내일은 어떻게 화장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벌써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남자와 만나지 않은 일주일 간 화장을 하지 않았다. 꾸준히 연고를 바르고 약을 먹어온 덕에 얼굴은 꽤 많이 가라앉아 처음 피부과를 가기 전과 비슷해 보였다.

내일 입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옷장을 뒤지고 바닥에 늘어놓은 옷들을 이리저리 들어 몸에 대어보았다. 옷을 사러 나갈까도 싶었지만 그러려면 화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 내일은 가능한 최상의 상태로 화장을 하는 편이 나았다.

내일 세시에 T대 앞 커피숍에서 만나요.

남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는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휴대폰을 닫았다. 내일 잘해서 저번의 실수를 만회하면 된다. 내일이면 남자를 본다.

14

학교에 나가지 않은 뒤부터 일곱 시로 맞추어 놓은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만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잠을 잘 시간이 늘어 전처럼 일어나서의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를 만난다.

씻고 화장을 끝냈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약속 시간까지 커피숍에 있을 생각으로 열두시 반 쯤 집을 나왔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사십분 정도가 걸린다. 버스에 타 창밖을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이다, 남자를 보는 것은.

T대 앞에서 내려 커피숍 쪽으로 걸었다. 남자가 들어오면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까. 어떤 화제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할까. 무엇을 하고 시간을 보낼까. 등을 생각하다 보니 커피숍 앞에 도착했다.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맑게 울리며 방문자를 환영했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앉을 자리를 찾다가 가방을 떨어뜨렸다.

남자와 현정이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는 분명, 현정이 온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셋이 만날 땐 언제나 현정이 내게 먼저 연락을 해왔었다. 오늘은 남자의 연락도, 현정의 연락도 없었다. 몸이 떨렸다. 둘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이야기의 내용은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둘은 날 보지 못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변기 위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이럴 수는 없다. 파노라마처럼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현정의 묘한 표정, 남자와 현정의 대화, 대부분의 만남에 이상하게 끼어들던 현정…….

웃음이 나왔다. 아침의 내가 생각이 났다. 가려움과 따끔거리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고, 이를 악물며 화장을 했던 내 모습이 우스웠다. 가려운 얼굴을 화장이 망가질까 두려워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고 옷자락을 붙잡고 버스 안에 앉아 있던 모습. 길을 걸으며 만나면 무얼 할지 생각하던 모습. 심장이 빠르게 식어갔다. 아니, 주체할 수 없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어서 차갑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비틀 대며 세면대 앞으로 걸어갔다. 물을 틀었다. 핸드백을 옆에 내려놓고 손을 걷었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얼굴을 문질렀다. 클렌징 크림이 없어서 화장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오직 물만을 받아 두 손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댔다. 그렇게 십여 분을 반복하자 피부가 아파왔다. 양 손으로 세면대를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세면대 앞의 거울을 보았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화장이 얼굴에 흉하게 뭉개져 있고, 박박 문질러댄 탓에 상처에서 흘러대던 진물이 물과 함께 온 얼굴에 남아 있었다. 입을 벌려 거친 숨을 내쉬어 대며 눈 화장이 흉하게 번져있었다. 나였다. 이게 진짜 나였다.

핸드백을 들었다. 휴지로 얼굴의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진물이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화장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변혜지
변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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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혜지
  • 2007-09-23
문자

#1 엄마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바로 두,세달 전까지만 해도 기억 저 편으로 꾸욱꾸욱 눌러 숨기려고 했었다. 분명 엄마를 뺏기는 아이의 마음은 아니다. 엄마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엄마를 사랑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엄마를 책망할 마음도 없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혼자 오빠와 날 키우느라 고생했을 엄마에게도 의지할 사람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저씰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엄마의 짝으로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해봐도 가슴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묘한 배신감을 지울 수 없다.  “됐어요.”“너 엄마한테 대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나 좀 가만 내버려 두라고!.‘혼자……”  숨을 몰아 쉬며 걷고 있는데 골목 옆으로 학교 아이들이 보인다. 담배를 물고 있고 명찰을 보니 나와 같은 1학년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옆을 지나 걸으려고 했지만 들리는 목소리에 내 발자국은 거짓말같이 멈춰버렸다. “가던 길 가라?…”  내 옆으로 침을 뱉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난 그저 뒤에서 잔뜩 노려볼 뿐이다. 날 비웃는 소리가 계속 귀에 들려온다.  “정아야 나와서 과일 좀 먹어.”   “과일 그만 먹니.?”   내가 자신의 말에 충격 받은 거라고는 엄마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자기‘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대명사…” #4   잠들었다가 어렴풋이 깨어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거실에서 오빠와 엄마가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속을 썩이는 오빠인데도 엄마는 오빠와 대화 할 때는 밝은 표정이다. 항상 내 앞에서 들리던 한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순간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가만히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아저씨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몸이 바짝 긴장해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굳어버렸다. 재혼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며 빠르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나가 엄마와 오빠를 빤히 바라보았다. 슬쩍 당황한 듯한 엄마와 오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멍청하게 서있는 날 엄마와 오빤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정아야.?”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방문을 타고 그대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나는, 엄마의 짝을 반대하진 않지만 이대로 새 아빠가 생기는 건 바라지 않는다. 십 오년간 그렇게 살아왔던 인생에 다른 누군가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끼어 드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학교… 아저씨의 마음마저도 있는 힘을 다해 쥐어 짤텐데. 그대로 캔을 내던져 버리고 집을 나왔다. 학교로 가는 길은 이상하게 싸늘했다. 참 많

  • 변혜지
  • 200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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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저번에 평한 바가 있어서 이렇게 간단히 말하는데, 이번에도 주장원'은' 탈 수 있을 것 같군요. 아, 참 1,2주 주장원이 없지.

    • 2007-12-03 00:05: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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