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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 작성자 시진
  • 작성일 2010-05-21
  • 조회수 258

 

"오래 씹을수록 고소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짙은 육즙을 한 번이라도 맛보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고기에 환호하는지 짐작할 텐데……."

그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그가 떠난 이후 몇 번 혼자 고기를 먹었지만 예전과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음식의 맛은 그를 만나기 전에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와 같이 고기를 먹었더라면 벌써 고기의 맛을 느꼈을 거란 확신이 든다. 고기를 한 점 집어 올렸다. 부분부분 내 마음처럼 타버린 고기를 노려보다가 입안에 넣고 마구 씹었다. 침이 필요만큼 흘러나오지 않아 입안이 텁텁했으나 이 이상으로 분비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움직여 고기를 잘게 만들지 않고, 마치 고기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나 그 순간 내가 무엇을 음미했었다면 그건 고기가 아니라 그일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본의 아닌 채식 주의자였다. 살육에 반감을 가졌다거나 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건 아니고 질기기만 한 고기를 영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야채는 아삭거리기라도 하지, 이에 끼기만 하고 고무줄보다 더 질긴 고기를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그는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채식주의자는 인생의 즐거움 중 30%를 포기하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일까, 내가 채식 주의자에 미각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꼭 내 미각을 찾아주겠노라고, 고기 맛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애당초 찾아올 미각도 없는 데 말이다.

그가 처음 쓴 방법은 병원의 치료였다. 내가 뭘 몰라서 그러는 데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그깟 미각상실쯤은 하루 만에 고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관찰을 받고 의사와 상담까지 받은 뒤 나왔을 때 그의 표정은 꽤 볼만했다. 봤죠? 내가 뭘 모르는데? 비아냥거림이 목까지 차올라 목젖을 간질였지만 나는 그 말을 삼켜버렸다. 잔뜩 풀이 죽은 체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평생 단 하나의 맛도 느끼지 모한 나를 동정했다기보다 정말로 내게 고기의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한 행동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진심으로 나를 위해 애쓰는 사람에게 비아냥거릴 만큼 성격이 고약하지 않았다.

그는, 제법 끈기 있는 사람이었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사고 없는 미각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했건만 그는 언제나 불가능은 없다며 내게 이것저것 시도를 했다. 게 중에는 혀에 침놓기, 일주일동안 굶기, 식신에게 홀리기 등 어처구니없는 것도 있었지만 대게는 맛을 설명해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설탕이 달다고 말해도 단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이해를 못하는 것처럼 그의 설명도 고기 맛을 느껴본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물론 아주 소용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흘러가듯 말한 설명은 내게 고기의 맛을 느끼고 말겠다는 의지를 심어주기 충분했다.

"오래 씹을수록 고소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짙은 육즙을 한 번이라도 맛보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고기에 환호하는지 짐작할 텐데……."

엉터리 같은 그의 도전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혹시 정말로 사람들이 고기에 환호하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아쉽게도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지만.

시커먼 연기에 놀라 내려다보니 고기가 모두 타있다.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돈을 내고 밖으로 나온다.

그가 일방적으로 나와 약속한 이후부터 그는 퇴근 후 버릇처럼 정육점에 들렸는데 우리 동네에는 정육점이 존재하지 않아 고기를 사려면 꽤 멀리 나가야 했다. 정육점에 갈 일이 없는 내가 그 사실을 알아챈 건 거의 기적과도 같았다. 내가 알아챈 후에도 그는 항상 정육점을 들려서 아무리 윽박지르고 화를 내도 다음날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웃으며 고기를 들고 오곤 했다. 그러면 내가 또 화를 내고 그는 웃으며 고기를 굽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고기를 사오고……, 매일 이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 날은 유독 날이 춥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꽃샘추위로 보기 힘들 정도로, 내린다더니 비는 눈이 되어 흩날렸다. 오늘은 절대로 고기를 사오지 말라고 전화까지 해서 당부했지만 그가 고기를 사올 건 안 봐도 비디오였으므로 어느새 외워버린 그의 퇴근시간에 소주를 사들고 기다렸다.

30분쯤 기다렸을 땐 차가 많이 막히나 보다 했다.

40분쯤 기다렸을 땐 야근을 하나?

1시간 쯤 지났을 땐 오늘은 안 오려나보다 하고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소주를 냉장고에 넣었다. 고기를 사오며 내게 부담 주는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면서 정말로 오지 않자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번호는 그였다.

"여보세요?"
"……."

전화를 건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끊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불안정한 숨소리가 들렸다. 운동을 했거나 추울 때의 숨소리와는 다른, 불안한 흐느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내게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건 사람은 그가 아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지나자 핸드폰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앳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빨리, 와주세요……."
평소라면 장난전화로 치부하고 끊어버렸을 통화건만 다급하게 장소를 묻고 택시를 탔다. 제발. 손을 깍지 끼우고 눈을 감았다. 장난전화이기를.

택시 안에서, 나는 내내 그 전화가 장난 전화일 확률을 믿고 있었다. 평소에 꼼꼼하고 차분한 그가 실수로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한 여학생이 그의 핸드폰을 발견한 뒤 최근 통화함에 찍혀 있는 번호로 장난전화를 칠 확률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택시에서 내린 뒤 잔뜩 울먹이며 나를 맞이하는 교복 입은 학생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확률이 0%에 가깝다는 걸 인정해야했다. 심장이 밑으로 밑으로 자꾸 가라앉았다.

학생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큰 도로의 중앙에 커다란 무엇인가가 눈에 띄었다. 마침 차도 다니지 않았기에 홀리듯 도로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 커다란 무언가는 주변의 눈을 모두 붉게 물들일 만큼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고기가 들어있는 검은 봉지를 꽉 쥔 채. 깜짝 놀란 여학생은 서둘러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너무 늦고 말았는지 내가 병원에 갔을 때 그는 이미…….

어제가 바로 그의 장례식이었다. 나는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가서 그의 시체를 보거나 그의 누나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될 것만 같았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 왔어요……. 문자인데, 속았지?'

문자는 택배회사의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라는 확인 문자였다. 최근에 인터넷이나 홈쇼핑으로 무언가를 산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뭘 부쳐준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의아해 하며 서둘러 발길을 집으로 옮겼다. 경비실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린 택배를 받자마자 윗부분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낯설지 않은, 그러나 친구나 가족의 이름은 아닌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아!"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그의 누나였다. 굉장히 독특한 이름이라서 딱 한번밖에 만나지 못하고 두세 번밖에 듣지 못한 이름이었지만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택배안의 물건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더 증폭되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뜯어본 택배상자 안에는 CD한 장, 손난로,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쪽지에는 짧게 '유품'이란 말만 적혀 있었다.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지 말고 그가 죽은 것을 인정하라는 듯 단 두 글자가 나를 계속 찔러대고 있었다. CD는 무엇이 나타나 나를 괴롭힐까.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수백 번을 고민하다가 더 고민하기 전에 끝을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노트북에 넣고 돌렸다. CD안에는 동영상파일이 하나 있었다. 클릭하자 노트북 화면 전체에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울컥하고 무엇인가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 얼굴은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동영상은 재생을 끝내고 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재생시키고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좀 바보 같아 보이겠지만 당신이 모든 것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때 한 가지 고백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맛을 느끼게 해주자, 하는 건 내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 행복한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게 마지막이에요. ……아, 참. 아까 한 가지 고백을 한다고 했잖아?"

그가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등을 돌리고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더니 그 다음 화면은 붉은 화면으로 꽉 찼다.

"되게 분위기 없고 일방적인 고백이긴 하지만, 나랑 결혼해 달라는, 거예요."
좋아요. 뭐가 그리 급했기에 이 한마디 듣지 못하고 간 거예요. 대체 왜. 눈을 세게 감고 다시 떴을 때 동영상에는 '손난로를 눌러요. 지금 당장!' 하는 글이 나오고 있었다. 얼떨결에 손난로안의 둥근 부분을 누르자 따스한 온기가 전해진다. 노트북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연홍색 고기가 구워지는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찌나 가까이서 찍었는지 고기에 맺힌 방울들도 모두 보였다. 고기 굽는 소리에 고기가 알맞게 구워지는 모습, 따뜻한 온기까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진 않았다. 난생 처음으로 내 입 한가득 침이 고였으니.

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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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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