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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

  • 작성자 空?
  • 작성일 2010-08-30
  • 조회수 489

 

1

 “아이고, 어르신!! 아이고!!”

 통곡소리가 푸른 기와를 지고 있는 담을 넘어 무영의 귀에 닿았다. 무영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하녀 봉순이가 거인 같은 대문을 부수듯이 열며 무영에게 왔다. 무영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봉순이 왔던 길을 되밟아 갔다.

 “도련님!!”

 무영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종들의 통곡소리가 파리처럼 앵앵거리며 무영의 귓가를 맴돌았다. 무영은 그들을 지나쳐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무영이 들어가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희디힌 꽃 같은 천으로 덮여 있었고, 그의 몸은 이불이 꽁꽁 붙들고 있었다.

 “……가셨구나.”

 무영은 딱딱하게 말했다. 봉순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차라리 눈물을 보였으면, 어린 아이처럼 징징 짰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을……. 애써 현실을 받아들이려 눈물을 삼키는 무영의 모습에 봉순은 가슴이 저려 왔다.

 

 무영의 아버지는 광주 최고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독립 운동가가 되었다. 무영의 아버지는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독립 운동을 했다. 그렇게 열렬하게 독립 운동을 하던 이가 어찌 잡히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결국 감옥에 갇혔고, 끝내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무영의 어머니인 안 씨 부인은 한양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심성이 곱고 현명하였다. 안 씨 부인은 무영의 아버지와 14살에 만나 결혼했고, 무영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는 건강한 편이 아니어서 무영을 낳고 얼마 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영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할아버지는 엄격하셨지만 무영을 무척 사랑하셔서 그에게는 다정하였다. 할머니는 온화하시고 현명하셨는데, 안타깝게도 3년 후에 무영을 두고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무영은 그렇게 할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그러나 할아버지마저 10살, 아직은 너무나 어린 나이인 무영을 놔두고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제……, 도령께서 우리 가문을 맡으셔야지요.”

 작은 어머니가 무영에게 말했다. 작은 아버지는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잡혀 죽었다.

 무영은 작은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무영이 달리 선택할 길은 없었다.

 사흘 후, 무영의 할아버지는 아직 녹지 않은 땅에 고이 묻혔다. 그리고 무영은 그 날, 크고 푸른 기와집의 주인이 되었다.

 

2

 

 “그 말 들었소?”

 한 농부가 거대한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바둑을 두고 있던 다른 농부에게 물었다.

 “암, 들었고말고. 그 어린 주인 말이지?”

 다른 농부가 바둑 하나를 탁 놓으며 물었다.

 “그래, 이 시기에 주인은 무슨 주인? 양반이고 우리들 같은 농부고 다 죽어나게 생겼구먼.”

 “그러게 말일세. 어린 주인도 참 불쌍하게 되었지.”

 다른 농부가 맞장구를 치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어린 주인이 물려받은 땅을 지킬 수 있으려나.”

 방금 전에 말한 농부가 덧붙였다.

 “지금 어린 주인 걱정할 시간도 없네. 우리 걱정하는 것도 벅차.”

 맨 처음에 말했던 농부가 바둑을 툭 내려놓으며 어린 주인에 대한 말을 끝맺었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무영은 집안을 잘 이끌어 갔다.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이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처리했으며 농부들과 하인들이 일을 잘 하고 있는지 한 달에 한 번 직접 나서서 확인했다.

 “독하기도 하지. 힘들 텐데도 모든 일을 꼼꼼하게 살피다니…….”

 “열심히, 정직하게 일 한다고 누가 알아주남? 더러운 놈들이 판치는 세상인데.”

 “어쩌겠나?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죄지.”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무영과 그의 행동에 대해 수군거렸다.

 봉순은 그런 무영이 걱정 되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무영에게 다과를 챙겨 주는 등 무영을 잘 챙겨주었다.

 작은 어머니도 무영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작은 어머니는 참다못해 무영에게 말했다.   

 “조카님, 이 시기에 정직하고 열심히 일해서 무엇 하시겠다고 이러십니까? 이러다가 그 못된 놈들에게 걸리시면 어쩌시려고…….”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무영의 태연한 말에 작은 어머니는 애가 탔다. 그녀가 무영에게 조언한 뒤로도, 무영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5년이 흘러갔고, 무영은 혼기가 찼다.

 

3

 

 “무슨 일이오?”

 작은 어머니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물었다.

 “이 집 주인을 보러 왔소.”

 무장한 조선인이 능숙한 일본어로 말했다. 아니, 조선인이라 불리기엔 너무나 과분한 사람이었다.

 결국 이렇게 찾아오고야 말았구나, 라는 생각에 작은 어머니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하였다. 그들이 남편과 아주버님을 해코지 했듯이, 이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무영을 해코지 하리라.

 “주인께선 자리를 비우셨소.”

 작은 어머니는 한 가닥 실 같은 정신을 잡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주인이 없겠지. 여봐라, 집안을 샅샅이 뒤져라!”

 왜의 앞잡이는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작은 어머니는 그런 놈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여긴 아니 계십니다.”

 사랑방을 청소하고 나오던 봉순은 금세 상황을 눈치 채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지?”

 병사들은 봉순을 못 미더워 하며 물었다.

 “제가 방금 여길 청소하고 나왔지만, 주인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계셨다면 제가 봤겠지요. 제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직접 열어 보여드리겠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봉순 앞에서 병사들은 쩔쩔 맸다. 하지만 곧, 확인도 없이 보고하면 대장에게 혼날까봐 두려워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린 확인을 하고 대장에게 보고해야겠으니 열어주시구려.”

 한 병사의 말에 봉순은 당황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시죠.”

 봉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사랑방 문을 벌컥 열었다.

 “!!!”

 “……정말로 안 계시군.”

 병사들보다 더 놀란 것은 봉순이었다. 하지만 봉순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자, 보셨지요? 그러니 이만 물러가시죠.”

 가시 돋친 봉순의 말에 병사들은 힐끔힐끔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달아났다.

 

 “없습니다.”

 “사랑방에도 없었습니다.”

 여러 군데를 뒤진 병사들이 대장에게 보고했지만, 환청으로라도 주인이 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

 대장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작은 어머니를 째렸다. 하지만 작은 어머니는 대장의 달갑지 않은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기만 하였다.

 “이거 실례를 했소.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요.”

 대장은 고개를 까닥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우르르 왔던 것처럼 우르르 몰려 나갔다. 작은 어머니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풀썩 주저앉았다.

 “마님!!”

 “괜찮다.”

 하녀 한 명이 그녀를 일으키려 하자, 거절하고 스스로 일어섰다.

 “헌데, 무영은?"

 “그것이……잘…….”

 하녀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내가 직접 가보겠다.”

 작은 어머니는 입술을 꼭 깨물며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봉순은 주인이 된 무영을 아직도 ‘도련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갔느냐?”

 무영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구석에 위치해 있는 크고 아름다운 상자에서 나왔다.

 “네. 가긴 갔습니다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습니다.”

 봉순의 말에 무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영아!!”

 작은 어머니가 치마를 부여잡고 뛰어왔다.

 “어디 갔나 싶어 놀랐잖느냐!”

 작은 어머니는 무영을 꾸짖었다. 무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들키지 않아 다행이구나. 허나, 다음엔 어찌 될지…….”

 “…….”

 왜의 앞잡이가 기와집에 쳐들어 온 일은 그 집 사람들 모두를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4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무영이 몇 번이나 물었는데도, 작은 어머니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심각한 일이옵니까?”

 “그래…….”

 작은 어머니의 입술의 작은 틈으로 힘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말씀해 보십시오. 나쁜 일일수록 빨리 아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래……, 맞는 말이다.”

 너무나도 옳은 무영의 말에 작은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몇 주 전에 친일파의 한 명이 우리 집에 들이닥친 일을 너도 기억할 것이다. 그 일로 우리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닌 것도 알 테지. 다음에 그들이 온다면, 아마 그들은 네가 정직하게 일하는 것을 꼬투리 삼을 것이야. 그리고 그 일로 너를 일본인과 결혼시키려 하겠지.”

 “왜 일본 여인과……?”

 무영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너도 알다시피 너희 아버지와 네 작은 아버지는 독립 운동가였고, 네 할아버지도 왜놈들과 가까이 지내려 들지 않았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되기 전에 싹을 자르려는 것이겠지. 왜놈과 결혼하면 감히 일본에 반항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무영은 깨달았다. 작은 어머니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무영이 일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 전에 조선 여인과 혼인시키려는 것이리라.

 그러나, 무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누구와 혼인하고 같이 살 생각은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상황은 무영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꽁꽁 붙들었다.

 “……네가 결혼 같은 것은 아직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네 나이 열다섯. 네가 혼기가 찼음은 분명하느니라. 하루 빨리 네 아내가 될 여인을 찾고 혼인을 올리려 하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작은 어머니의 단호한 말에 무영은 그녀가 자신을 매우 걱정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느꼈다. 분명 그녀는 무영을 보며 왜놈과 친일파 손에 죽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주버님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무영은 천천히 일어서서 안채를 나왔다. 무영이 돌아서서 나올 때, 작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봉순아, 그거 들었니?”

 열네 살의 봉순이와 같은 나이이자, 그녀와 매우 친한 하녀인 연이가 설거지를 하며 봉순에게 물었다.

 “무얼 말이니?”

 봉순은 연이를 돌아보았다.

 “아, 글쎄 말이야. 마님께서 새 아씨를 찾으신대.”

 “정말?”

 연이의 말에 봉순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럼~!! 내가 빈말하는 거 봤니?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연이는 자랑스러움을 담아 말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혼인하신다구?”

 “응. 나 사실 주인님 좋아했는데……. 혼인하신다니깐, 너무 아쉬워. 바라보는 것두 허락되지 않는 건가?”

 연이는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지금 뭐하는 거야? 떠들 시간이 있으면 일하기나 하라구!”

 “어, 네네!!”

 열일곱의 소향이가 실경질적으로 외치자, 연이와 봉순이는 큰 소리로 대답하며 설거지 하는 데 집중했다.

 밤이 되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봉순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연이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마님이 새 아씨를 찾으신대. 내가 빈말하는 거 봤니?’

 봉순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봉순은 무영을 하인으로서 주인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오빠처럼 좋아하고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봉순은 감히 무영을 여자로서 좋아한 것이었다.

 봉순은 연이처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봉순은 가슴 아픈 깨달음에 밤새 뒤척였다.

 

5

 

 과연 연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작은 어머니는 귀한 집 자식들 중에 무영에게 좋은 짝이 없나 살피고 다녔다. 그런 작은 어머니의 행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은 소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고운지고. 현명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지니고 있구려. 너무나 훌륭하오.”

 “부족한 점이 많사온데, 그리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작은 어머니는 무영의 아내로 점 찍어놓은 여인을 보며 매우 흡족해 하였다.

 

 무영의 처로 들어올 사람은 고려 시대의 유명한 문신인 정지상의 후손으로, 이름은 정인홍이었다. 그녀는 작은 어머니께서 입에 마르도록 칭찬한대로 아름다운 외모와 현명함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런 인홍에 대해 들으면서 봉순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인홍은 학문과 인품에 있어서 무영에게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무영에게 좋은 친구, 좋은 조언자이자 좋은 아내가 될 것이다. 봉순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영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 봉순의 가슴 속 한 곳에는 무영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오늘 아씨께서 오신다지?”

 “혼인하시는 거 구경하고 싶은데, 우리는 죽도록 일만 해야 하니…….”

 “아씨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말이나 되는 소릴 해.”

 시녀들과 하녀들이 참새 떼처럼 재잘거렸다. 그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려 지나가는 사람의 기분도 들뜨게 만들었다.

 소녀 같은 시녀들과 하녀들 사이로 봉순은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봉순아, 어딜 가? 곧 새 아씨 오실 텐데…….”

 연이가 쪼르르 봉순의 뒤를 쫓아왔다.

 “도련님이랑 새 아씨 주무실 방 청소해 놔야지.”

 “얘도~! 매일매일 쓸고 닦고 해 놓구서. 그 정도면 됐어.”

 연이가 봉순의 어깨를 툭 치며 핀잔을 주었다.

 “매일매일 청소 안하면, 먼지 쌓여. 가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셔.”

 봉순은 비를 집어 들고 신혼 방으로 향했다.

 “쟤도 참……. 뭘 더 할게 있다고…….”

 연이는 툴툴거리며 봉순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새 아씨가 오셨다는 외침에 종종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사실 신혼 방은 아침에 미리 치워 놓았었다. 깨끗하게 쓸고 닦고,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그러나 봉순은 직접 눈으로 무영과 인홍이 혼인을 올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봉순은 이미 인홍을 인정했지만, 무영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만약 그들이 혼인을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봉순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줄줄 흘릴 것이 분명했다.

 ‘보면 안 돼. 어떻게 될 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봉순은 입술을 꼭 깨물며 비질을 해댔다. 봉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입술에는 피가 맺혔다.

 

 작은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처럼 새 부부를 보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안채에 품위 있게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꼭 그림 같구나. 헌데……걱정을 떨칠 수가 없어.”

 작은 어머니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여봐라, 게 있느냐?”

 “예, 마님.”

 연이가 잽싸게 달려 와 작은 어머니 앞에 섰다.

 “봉순이는 어디 간 게냐?”

 “아, 그게 말입니다. 나리와 아씨 방 치우러 간다고…….”

 연이는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혹스러웠다.

 “헌데, 왜 봉순이를……?”

 “되었다. 가 보아라.”

 연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물러갔다. 작은 어머니는 곧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봉순을 직접 찾아가서 비밀리에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작은 어머니는 무영과 인홍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6

 

 “안에 있느냐?”

 “마, 마님!!”

 봉순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도련님께서 혼인하시는 거 안 보시고…….”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다.”

 문씨 부인, 혜영의 말에 봉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봉순은 문씨 부인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왔다는 것을 어렴 풋이 느끼고 물었다.

 “나가서 이야기 하자꾸나.”

 문씨 부인은 봉순을 데리고 옆문으로 나갔다.

 

 혼인식이 진행되고 있는 기와집 마당에서는 풍악이 울리고, 구수한 음식 냄새들이 풍겼다. 혼인식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신랑 신부를 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어린 주인님께서 참 잘 생겼지?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아, 새 아씨께선 또 어떻고? 아름다우시고 현명해 보이시는 게, 큰 인물이 되실 게야.”

 “천생연분인데.”

 “암, 그렇고말고. 저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또 어디 있겠나?”

 사람들의 목소리에 마당은 시끌벅적했다.

 “저, 마님께서 안 계십니다.”

 하인 동수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파묻혔다.

 “아, 글쎄! 마님께서 사라지셨다니까요!!”

 동수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그 때서야 사람들이 동수를 돌아보았다.

 “마님께서?”

 “도대체 어디로 가신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냐?”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걱정 하지 마시고, 혼례식이나 진행하세요.”

 연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지금 마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도 모르는데 혼례식을 치르란 말이오?”

 동수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께서는 일이 있으시니, 알아서들 혼례를 마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건 마님의 명령입니다. 혼례를 진행하시지요.”

 조리 있는 연이의 말에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혼례식은 다시 시작되었고,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도 다시 되살아났다.

 사실, 연이는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다. 문씨 부인이 일이 있다고 한 적도, 알아서들 혼례를 마치라고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연이는 봉순이 어디 있냐고 문씨 부인이 물었던 것으로 보아, 그녀가 봉순을 만나러 갔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이 분명했다. 연이는 사람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거짓을 고했다. 그래도 연이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문씨 부인, 봉순, 그리고 모두를 위한 거짓말이었으니깐.

 

 문씨 부인과 봉순은 오래도록 걸었다. 봉순은 누가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문씨 부인의 마음을 눈치 챘다.

 “저, 마님……. 이쯤이면 들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봉순이 머뭇거리며 문씨 부인에게 말했다.

 “그래…….”

 문씨 부인은 대답하고는 뒤돌아섰다. 문씨 부인의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봉순은 문씨 부인과 얼굴을 맞대고 나서 몇 주 만에 다시 본 부인이 이렇게 초췌해 보일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마, 마님…….”

 봉순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 내가 많이 변한 것 같아서 어색하느냐?”

 “이, 이렇게 초췌해 보이실 줄은……. 쇤네는 언제나 위엄 있고 당당하신 마님만 생각했나이다.”

 봉순은 마음이 저렸다. 저 분이 정말 내가 알던 마님이 맞는가. 봉순은 끝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 이리 멀리까지 나온 이유는, 너에게 긴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봉순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봉순은 문씨 부인이 이렇게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기뻤다.

 “말씀해 보시옵소서.”

 봉순의 재촉에도 문씨 부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 명이, 얼마 남지 않은 듯싶구나…….”

 “!!!”

 그 어떤 말도 이렇게 봉순을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문씨 부인이 죽는다는 것을 봉순은, 아니 모든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봉순은 주인 나리의 죽음을 맛보았을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때도, 그 분께서 돌아가시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였는데…….

 “그런데 말이다……. 왜놈들이 조만간 다시 쳐들어 올 것 같아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구나. 무영이와 새 아가를 해치려 하지 않을지…….”

 문씨 부인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봉순의 기분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해서, 쇤네가 도련님과 아씨를 지키면 되옵니까?”

 봉순의 말에 문씨 부인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탁한다, 봉순아. 나를 대신해서, 그 애들을……지켜다오.”

 “쇤네,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봉순은 존경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구나.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해서…….”

 위엄 있고 당당하던, 눈물이라곤 내비친 적이 없던 문씨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붉은 비단 같은 노을빛에 문씨 부인의 눈물이 보석처럼 빛났다.

 

7

 

 문씨 부인이 봉순에게 무영과 인홍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얼마 후, 문씨 부인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봉순은 문씨 부인과 무영, 인홍의 곁을 개처럼 맴돌았다.

 “오늘은 어떠하십니까, 마님?”

 봉순은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서 일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새벽닭이 울면 쪼르르 문씨 부인의 방으로 달려갔다.

 “오늘은 좀 나은 것 같구나.”

 문씨 부인이 힘겹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봉순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마님, 무슨 병입니까? 알려 주셔야 어떻게 하든 말든 할 것인데…….”

 봉순이 발을 동동 굴리며 물어도 문씨 부인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문씨 부인은 처음에 고뿔이 든 줄로만 알고, 의원도 부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찌르는 것 같이 아프고 호흡이 힘겨워 지니, 부인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해서, 무영의 혼인식을 하루 앞두고 문씨 부인은 의원을 불렀다.

 “……무슨 병이오?”

 문씨 부인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저……, 그것이…….”

 “내 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 의원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오?”

 문씨 부인은 머뭇거리는 의원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과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초췌한 부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저, 부인의 병은……급성 폐렴입니다. 이런 증세가 언제쯤부터……?”

 문씨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나 더 사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오래 사시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씨 부인의 눈은 멍했다. 아마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의원은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문씨 부인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죽은 뒤가 두려웠다.

 ‘누가 무영일 책임져 줄 것인가? 그 애는 아직 성인이 되지도 못했어. 또 새 아가는? 종들이 그 아이들을 어리다고 다들 얕보거나 명령을 어기진 않을까, 걱정스럽구나.’

 문씨 부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때, 그녀는 봉순이 떠올랐다.

 ‘그 아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게야. 밤이 늦었으니 내일 이야기 해야겠구나.’

 한시름 놓자, 문씨 부인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마님,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소향이가 문씨 부인에게 아뢰었다. 문씨 부인은 회상하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시오.”

 문씨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윤길, 김윤상 형제가 들어왔다.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어떠신지요?”

 윤길이 푹신한 방석 위에 앉으며 물었다.

 “괜찮소.”

 문씨 부인이 배시시 웃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윤상은 문씨 부인의 말을 영 못 미더워 했다.

 “헌데, 우릴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여 기억나오? 그대들 친구 무조 말이오, 박무조.”

 갑자기 옛 친구 이야기를 꺼내는 문씨 부인의 말에 윤길과 윤상은 어리둥절해 했다.

 “갑자기 무슨……?”

 “그 분이 내 아주버님 아니오.”

 윤길과 윤상은 그녀의 말에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박무조, 그는 매우 용감한 사나이였다. 아마 그만한 사내는 조선 팔도 뒤져 봤자 얼마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리더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의병의 주동자로서도 활동했다. 독립군에서도 그는 매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다른 독립군들처럼 감옥에 갇히고 끝내 자살을 택했다. 그건 조선 백성이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그는 백성들의 영웅이었다.

 “그 분 아이가 여기 있소.”

 윤길과 윤상은 눈을 껌뻑였다.

 “두 분께서 그 아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거든, 도와주길 바라오. 그 아이의 편은 얼마 되지 않소.”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윤상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곧 알게 될 거요.”

 윤길과 윤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체 무엇이기에 문씨 부인이 저렇게 숨긴단 말인가? 아주버님의 친구들이자, 자기 남편인 무현의 친구인데.

 “마님, 나리와 아씨께서 드셨습니다.”

 “들어오너라.”

 문씨 부인의 말에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길과 윤상을 본 무영은 발을 헛디뎌 엉덩방아를 찍을 뻔했다.

 “작은 어머님, 저 분들은 누구신지요?”

 무영은 넘어질 뻔했는데도 금방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윤길과 윤상은 무영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작은 어머님’이라고 부르기도 전에. 그는 아버지인 무조와 매우 닮아 있었다. 반듯한 이목구비, 침착한 모습과 위엄 있는 모습까지.

 “마침 잘 왔구나, 인사드려라. 네 아버지 친구 분들이시다.”

 문씨 부인의 말에 무영은 윤길과 윤상을 향해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구나. 나는 김윤길이란다.”

 “나는 김윤상이고. 반갑다.”

 윤길과 윤상이 무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앉거라, 얘야. 새 아가도 앉아라.”

 문씨 부인이 무영과 인홍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방석 위에 품위 있는 모습으로 앉았다.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실 분들이시다. 잘 기억해 두거라.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땐 봉순이에게 말하거라. 그럼 봉순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네.”

 무영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대답했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윤길과 윤상은 일어서며 말했다.

 “좀 머물다 가지 그러오?”

 문씨 부인은 윤길과 윤상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러다가 이 집안사람들이 다 망할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독립군이 나왔던 집안 아닙니까? 그나마 지금 독립군이 나오지 않아서 괜찮지요. 하지만 독립군 중 두 명과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분명히 의심할 겁니다. 허니 저희가 여기 머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윤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봉순이라도 보고 가시지요. 부모가 없어서 지금 외로우니까요.”

 문씨 부인의 말에 윤길이 눈을 치켜떴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누님과 자형이 지금 없다고요?”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봉순이 혼자 남아서 저희가 거둬들였답니다. 지금은 우리 집 하녀로 있지요.”  

 문씨 부인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 아이는 만나고 가야겠군요.”

 윤길과 윤상은 문씨 부인과 무영, 인홍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방을 나오면서 비틀거렸다.

 “그 아이가……, 누님이……!!”

 그들은 그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윤길과 윤상은 발을 질질 끌며 봉순의 침소로 향했다.

8

 

 “어머니, 우리는 친척이 없어요?”

 봉순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있단다. 내 남동생들인데, 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야.”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왜요?”

 “일하느라 바쁘기 때문이지.”

 호기심 어린 봉순의 질문에 어머니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을 하는데요?”

 “아주 좋은 일이란다. 하지만 네 외삼촌들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외삼촌들은 숨어서 그 일을 해야 하지.”

 어머니의 말에 봉순은 그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 더 묻고 싶었다.

 “그럼, 외삼촌은 언제쯤 오시는데요?”

 “모르겠구나.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아니면 아예 못 볼지…….”

 봉순은 어머니의 대답에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외삼촌이 얼른 오시면 좋겠어요.”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어머니가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봉순은 어머니와 그 대화를 나누고 10년 후에야 외삼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나서…….

 그들은 봉순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캐물었다.

 “네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니?”

 “4살 때요.”

 “그럼 아버지는?”

 “7살 때요.”

 “박 이조판서 댁엔 언제 왔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세 달 후에요. 그 때도 7살이었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이야기를 해주련?”

 윤길과 윤상의 물음에 봉순은 그 때를 회상했다.

 

 그 때는 한밤중이었다.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고른 숨소리 속에 불협화음처럼 불규칙한 숨소리가 들려 왔다.

 “봉순아. 아가야, 깨어 있니?”

 힘겨운 목소리에 봉순은 눈을 비볐다.

 “어머니……?”

 “그래.”

 봉순은 잠이 확 달아났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불안감이 어린 봉순의 가슴을 후벼 팠다.

 “어머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그렇죠?”

 봉순은 알고 있었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다짐을 받으려고 물어보았다.

 “……아가, 엄만 곧 가야한단다.”

 봉순은 어머니의 눈에서 유리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안 그럴 거예요. 괜찮을 건데……괜히 겁주지 마요!”

 봉순은 끝까지 부정했다. 믿고 싶지 않아, 믿고 싶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날 리가 없어……. 아버지와 날 두고 떠날 리가 없지, 그렇고말구…….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단다. 봉순아, 엄마 없어도 건강하게 잘 자라렴. 조선 여인은 강하단다. 너도 강한 사람이 되려무나. 그리고……사람들을 사랑하렴. 사람들을 껴안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역경이 와도 이겨내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란다.”

 “어머니…….”

 봉순은 더 이상 울음을 참지 못하고 펑펑 울어버렸다.

 “울지 마렴, 아가. 내 마음은 항상 너의 곁에 있을 테니…….”

 어머니의 차가운 손이 봉순의 손을 어루만졌다.

 “……너의 곁에, 더 있어주지 못하는 이 어미를……, 용서하렴…….”

 어머니의 눈이 점점 감겼다. 작게 들리던 심장소리도 어느 순간 멈춰 버렸다. 봉순의 손을 잡아주던 어머니의 손은, 툭 떨어졌다.

 봉순은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이게 꿈이라면……, 제발 이게 꿈이었으면……. 내가 잘못 본 것이기를……, 내가 잘못 느낀 것이기를……!

 “어머니, 눈 좀 떠 보세요. 살아 있다고, 피곤해서 주무시는 것뿐이라고 말해주세요! 방금처럼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손을 잡아주세요, 어머니!!”

 봉순은 슬프게 외쳤다.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심장소리도 들으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차가웠고, 심장박동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 이건 꿈일 거야. 꿈이 분명해.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께서 일어나 계실 거야. ‘아가, 밥 먹자.’ 하시면서 날 깨우시겠지.”

 봉순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다가 그녀는 깨달았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는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봉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죽은 어머니의 옆으로 갔다. 어머니를 본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봉순은 죽은 어머니를 껴안으며 오열했다.

 

 봉순의 말을 들은 윤길과 윤상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누님……!”

 그들의 눈물처럼 그들의 외침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들은 누님을 잃은 슬픔에 빠져들어서 자형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도움이 필요하거든, 우리에게 부탁하거라. 우리가 무조건 들어주마.”

 윤길과 윤상은 인사 대신으로 그 말을 하고는 터벅터벅 박 이조판서 댁을 빠져나왔다.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봉순도 눈물을 지으면서 외삼촌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기만 하였다.

 

9

 

 “마님!!”

 박 이조판서 댁 모든 종들이 소리 높여 통곡했다.

 “이리 가시면 어찌 하옵니까, 마님? 도련님과 아씨는 어쩌시고…….”

 봉순은 넋이 나간 듯이 서서 중얼거렸다.

 “작은 어머님, 편히 눈을 감으시옵소서.”

 무영은 문씨 부인의 사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눈 같이 깨끗하고 하얀 천을 그녀의 얼굴 위에 덮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문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봉순은 투두둑 투두둑 비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깬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마님?”

 봉순은 구석에 처박혀 있던 도롱이를 걸치고 안채로 향했다. 그녀는 안채 문을 삐꺽 열었다.

 “마님?”

 봉순은 순간 가슴에 돌이 쿵 떨어진 것만 같았다. 그 때의 숨소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의 숨소리와 너무나도 닮은 숨소리가 들려 왔다.

 “……마, 마님, 괜찮으세요?”

 떨리는 봉순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도련님! 아씨! 동수야! 연아! 소향아! 모두모두 일어나 봐요!!”

 봉순은 두려움에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봉순의 목소리는 빗속에서 흩어져 소리가 작게 퍼져나갔을 뿐이었다.

 “모두 일어나요~!!!”

 봉순은 목이 쉬도록 외쳤다. 그러자 아까보다는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일이야?”

 잠귀가 밝은 연이가 눈을 부비며 나와 물었다.

 “마, 마님께서……!!”

 연이는 봉순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모두 일어나세요! 마님께서 위독하세요!!”

 연이는 박 이조판서 댁의 모든 종들을 깨웠다. 그러자 봉순은 무영과 인홍을 깨우러 갔다.

 “도련님, 아씨! 마님의 숨소리가 거칠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봉순의 말에 두 사람은 눈을 번쩍 뜨고 옷을 챙겨 입었다. 봉순이 두 사람을 데리고 안채로 가자, 모두 그곳에 몰려 있었다.

 “비켜 서거라.”

 무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의 말에 종들이 모두 비켜섰고, 무영과 인홍은 그 길로 안채에 들어갔다.

 “……수건에 물을 묻혀 들고 오너라.”

 봉순은 그의 말에 얼른 가서 수건에 물을 묻혀 왔다.

 “……들고 들어오너라.”

 그의 말에 봉순은 안채로 들어갔다. 봉순의 눈에 어렴풋이 문씨 부인이 보였다.

 “작은 어머님의 땀을 닦아 드리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자러 들어가 있거라.”

 무영의 명령에 봉순을 뺀 모든 종들은 침소로 돌아갔다. 봉순은 문씨 부인의 땀을 열심히 닦았다.

 “하아……하아……!”

 문씨 부인의 힘든 숨소리가 새벽 내내 멈추지 않았다. 문씨 부인의 곁에는 무영과 인홍, 봉순이 계속 머물렀다. 봉순은 문씨 부인의 땀을 닦아 드리면서, 어머니가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봉순의 눈물이 문씨 부인의 얼굴에 떨어졌다.

 

 사흘 후, 문씨 부인은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축축한 땅에 묻혔다. 그녀의 꽃가마가 지나가는 길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비가 머물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으허헝……마님!!”

 “왜 이렇게 일찍 가십니까……으흐흑…….”

 “마님~!!!”

 문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무영은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10

 

 문씨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무영은 문씨 부인이 죽기 전처럼 변함없이 일을 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영은 괴로운 심정으로 문씨 부인이 땅에 묻힌 다음 날을 떠올렸다.

 

 “주인 계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을 맞이하는 봉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서 있다는 것을 무영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집 주인을 만나러 왔소. 어서 뫼시지 않고 무엇하오?”

 그 손님은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예.”

 봉순의 목소리는 불만스러웠다.

 “도련님.”

 봉순이 사랑채 문을 벌컥 열었다.

 “친일파 중 한 분이 오셨는데, 피하실 수 없을 듯합니다. 들일까요?”

 봉순의 말에 무영은 시선을 책에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봉순은 곧 그 사람을 데려 왔다.

 “안녕하시오.”

 무영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사람은 방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영은 그 때서야 책을 물리고 그 사람과 마주보았다.

 “나는 이정수란 사람이오. 저번에도 한 번 왔는데, 계시지 아니하시더군요.”

 “무슨 일로 오시었소?”

 무영은 정수를 경계하며 물었다.

 “허헛, 주인장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말이외다.”

 정수의 말에 무영은 의심스러워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 없소이다. 그냥 가끔 놀러 와서 장기도 두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 말씀이오.”

 정수의 말에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오늘은 아니 되오. 다음에 다시 오시오.”

 “알겠소이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정수는 무영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정수는 그의 말대로 가끔 장기를 두러 와서 이야기도 풀어 놓곤 하였다. 정수는 무영에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 새로운 문물 이야기, 조정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정수는 무영에게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무영이 정수와 가까이 지내게 된 이후로는, 광주 사람들 모두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박 이조판서 댁에 머물고 있던 종들도 대부분 무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를 욕했다. 무영의 본처인 인홍마저도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편이 거의 없는 마당에,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수는 놓아주기에도, 그렇다고 해서 붙잡고 있기에도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두 갈림길 사이에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11

 

 “서방님, 어째서 그런 놈과 친분을 맺으셨습니까?”

 박 이조판서 댁에 정수가 왔던 어느 날, 인홍은 그가 가 버리고 나서 무영에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감시를 피하자는 생각에서 그랬소. 난 지금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소.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알았으니까.”

 무영의 말에 인홍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설마 벌써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서방님? 아버님께서 누구에게 대항하셨으면, 왜 자살하셨는지…….”

 “잊지 않았소.”

 무영은 수천 번도 더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가 일본에 대항하셨으며, 감옥에 갇히자, 일본의 손에 죽는 것보다 자살하는 것이 낫겠다며 총으로 스스로를 쏘아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조선 팔도에 퍼졌다. 사람들은 무영이 아버지 무조의 뒤를 이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무영은 어쩌면 그 마음 때문에 자신이 정수와 어울리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실망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문씨 부인께서는 서방님을 옳은 길로 이끄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헌데 미처 끝맺지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인홍은 잠깐 숨을 골랐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서방님! 부인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른 길로 가시니 말입니다!”

 인홍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무영은 화가 치솟았다.

 “나는 그 길이 그른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옳은 길 아니오? 내가 갈 길은 내가 정할 것이니, 부인은 신경 쓰지 마시오.”

 무영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안채를 나왔다.

 “하지만,”

 무영은 인홍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섰다.

 “한 나라의 황제께서도 혼자서 정사를 이끌어 가지는 못하십니다. 신하의 도움이 필요하시지요. 서방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서방님도 혼자서는 서방님의 인생을 이끌어 가지 못하실 거예요.”

 무영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난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무영은 속으로 다짐했다.

 

 “도련님, 친구 분께서 오셨습니다.”

 봉순의 말에 무영은 현실로 돌아왔다. 언제부터인가 봉순은 정수를 ‘친구 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들어오시오.”

 무영의 말에 정수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만이오. 다시 이렇게 보니 너무도 반갑소.”

 무영은 그의 말에 빙그레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요. 어떻게 그 시간을 참고 지냈는지 모르겠소.”

 정수가 ‘푸하하’ 시원하게 웃었다. 무영도 정수를 따라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래, 오늘도 장기를 두시러 오셨소? 봉순이를 부르리까?”

 무영의 말에 정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무슨 일로 오시었소?”

 “…….”

 정수는 무영의 물음에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혹여 일본에 유학 갈 생각 있소?”

 정수는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말에 무영은 놀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곳은 매우 좋은 곳이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라 장담 할 수도 있소! 4년 동안만 그곳에서 공부하면 되오. 그곳에 집 한 채를 사 놓고, 정씨 부인과 종 몇 명을 데려가면 되오.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소!”

 정수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줄줄이 말을 쏟아냈다. 그의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무척 흥분 된 모습이었다.

 “어떻소? 한 번 해 볼만한 가치는 있지 않소?”

 정수는 무영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소. 왔을 때 얼른 잡으시오!”

 무영은 정수의 말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무영의 말에 정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시오. 다음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생각해 보도록 하오. 그 땐 가겠다는 대답을 듣고 싶구려.”

 정수는 사랑채에서 나왔다. 그리고 말을 타고 박 이조판서 댁을 빠져 나왔다.

 정수가 박 이조판서 댁을 나간 지 한참이 지났지만, 무영은 여전히 정수가 말한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12

 

 “뭐라고요?”

 인홍이 무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

 “유학을 가겠다고 했소.”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묻는 인홍에게 무영은 또박또박 끊어서 다시 말해주었다.

 “일본으로 말이오. 그곳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으니 배울 게 많을 거요.”

 “어째서 꼭 일본인 거예요? 다른 나라도 많잖아요!”

 인홍은 끝까지 가지 않으려 버티며 말했다.

 “일본으로 갈 기회가 왔지 않소.”

 무영은 참을성 있게 대꾸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전 안 갈 거예요. 가려면 서방님 혼자 가세요!”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어진 인홍은 일본으로라도 가지 않으려고 버티었다. 그녀는 휙 뒤돌아 앉았다.

 “부인도 배워야 하오. 그래야 시대를 따라가지 않겠소. 지금 부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론 부족하오.” 

 인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홍은 배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무영은 지금 인홍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그러면 인홍이 일본에 유학을 가려고 하리라는 것을 그는 짐작했다. 인홍은 그런 여자였다. 자존심에 상처가 나면 그것을 메우려고 무엇이든 하는 여자. 그런 인홍이 자존심이 짓밟힌 마당에 일본 유학을 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알아서 하세요.”

 무영은 인홍이 허락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안채를 나왔다.

 

 “날세.”

 “들어오게.”

 무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수는 문을 쾅 열어젖히며 방 안으로 서둘러 들어왔다.

 “생각해 보시었소?”

 “어허, 이 사람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소?”

 무영은 장난스런 목소리로 나무랐다.

 “미안하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됐소?”

 정수는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기대에 찬 목소리였다.

 “갈 거요. 어디 봐 두었소?”

 정수는 무영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와세다 대학이오. 어느 학과 갈 지는 마음대로 결정하면 되오.”

 “고맙소!”

 무영은 정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정수는 나머지 손 하나를 무영의 손 위에 얹으며 말했다.

 “잘 해 보시오.”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너무 흥분 돼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계속 두 손을 계속 꼭 잡고 있다가 해가 뉘엿뉘엿 져갈 때 즈음에서야 겨우 놓았다.

 

13

 

 “하아~!”

 봉순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오랫동안 선실 안에서만 있었더니 답답하였다. 그녀는 얼른 땅을 밟고만 싶었다.

 “저기 일본이 보이네요.”

 한 여자가 봉순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 정말!”

 봉순은 무척 기뻐하며 외쳤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거예요.”

 그 여자도 무척 기쁜지 표정이 밝았다.

 봉순은 안개에 둘러싸여 뿌옇게 보이는 일본을 희망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봉순은 몇 달 전 의 일을 떠올렸다.

 

 몇 달 전이었다. 그 때는 무영이 일본 유학을 결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 시기에 윤길과 윤상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세요, 삼촌? 들키시면 어쩌시려구……. 도련님 친구 분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봉순은 불안해하며 물었다.

 “안에 들어가자꾸나.”

 윤길과 윤상은 대답을 피하고는 종들의 숙소에 들어갔다.

 “어서 말씀하세요.”

 “봉순아, 무영이 일본 유학을 결정했다는 소문이 나돌던데……. 그 소문이 사실이더냐?”

 윤상이 먼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예, 도련님 친구 분께서 제안하셨다합니다.”

 “그럼 너도 가는 게냐?”

 윤길이 천천히 봉순을 향해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윤길과 윤상, 그리고 봉순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봉순아, 우리가 곧 만주 지방으로 가게 될 것 같구나.”

 윤길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말을 꺼냈다.

 “네? 갑자기 왜요?”

 봉순은 깜짝 놀라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기가 힘들어져서 말이다.”

 윤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거야 그 전에도 힘들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더욱 힘들어졌어. 왜놈들 때문이지.”

 봉순은 그의 말을 듣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삼촌들이 떠난다는 사실에 슬퍼졌다.

 “언제쯤 가실 것 같은데요?”

 “모르겠구나. 언제가 될지. 며칠 뒤가 될 수도 있고, 몇 달 뒤가 될 수도 있고, 1년 뒤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분명한 건 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짐을 싸서 떠날 거란 사실이다.”

 윤길의 대답에 분위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윤길과 윤상은 무거운 분위기가 계속 되기 전에 방을 나가 버렸다.

 

 “도련님, 아씨! 도쿄 항에 도착했어요!”

 봉순은 선실에 있는 무영과 인홍을 불렀다.

 “그래?”

 인홍은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무영보다 더 흥분해 있는 듯 했다.

 “서방님, 어서 가요.”

 인홍은 무영의 손을 끌고 선실 밖으로 나갔다. 봉순이 선실 밖으로 나갈 때, 그들은 벌써 배에서 내린 상태였다.

 봉순은 천천히 배에서 내렸다. 봉순은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을 느꼈다. 그녀는 신비로운 기분에 둘러 싸였다. 낯선 이 땅에서 4년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안녕, 일본.’

 봉순은 일본의 땅과 건물과 하늘과 모든 것을 찬찬히 보며 속으로 인사했다. 

 

14

 

 “흥!”

 “아씨, 제발 화 푸세요.”

 봉순은 쩔쩔 매며 인홍을 달랬다.

 “어째서 말이냐? 너도 어땠는지 봤지 않느냐?”

 인홍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그걸 알고 그러셨겠습니까? 아씨, 제발 진정하세요.”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그건 상관없느니라! 나는 배운다는 말에 여기 왔단 말이다! 근데 이게 뭐란 말이냐?"

 인홍은 봉순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도련님께서 조선에 이화 학당이 있으니 여기 와세다 대학에서도 여인을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죠.”

 “그만 하거라, 듣기 싫다! 어서 나가라!”

 인홍은 획 돌아앉으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봉순은 인홍과 더 말을 해봤자 그녀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봉순은 고개를 내저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몇 시간 전의 일을 회상해 보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는 저희 와세다 대학교에 다니실 수 없습니다.”

 “왜, 왜요?”

 인홍이 당황해 하며 물었다.

 “저희 학교에서 여학생은 받지 않습니다.”

 “제 친구가 추천장까지 써 주었는데…….”

 무영은 품속에서 정수가 써준 추천장을 꺼내보였다. 교장은 그 추천장을 건네받았다. 교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는 사람이군요. 그 사람 이름이 뭡니까?”

 “이정수라 합니다.”

 교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 사람이 써 준 추천장이라도 여학생은 안 됩니다.”

 “제발……, 제발 이번만, 이번만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네?”

 인홍이 두 손을 마주 모으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안 됩니다. 당신은 내일부터 나오고 아가씨는 오지 말도록. 어서 나가요! 나도 할 일 많으니까.”

 교장은 끝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인홍과 무영은 쫓겨나듯이 교장실에서 나왔다.

 “……미안하오. 나는 와세다 대학에서도 여인을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소.”

 “다른 곳에도 받아주지 않겠죠?”

 인홍은 실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만 돌아갈래요.”

 인홍은 무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말했다.

 “혼자 돌아가겠다고?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돌아간다 하더라도 어떻게 광주까지 갈 것이오?”

 “그럼 어쩌라고요? 여기서 서방님이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는 동안, 저는 집안에 콕 틀어박혀서 놀고만 있으라고요? 그것보단 돌아가는 게 나아요.”

 인홍은 화내는 무영에게 삐죽거리며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갈 수 없소. 봉순아, 어서 아씨를 모시고 집으로 가거라.”

 무영이 벌컥 화를 내며 옆에 있는 봉순에게 명령했다.

 “주인님께서는요?”

 “나도 곧 들어갈 것이다. 연이가 학교 밖에 마중 나와 있으니, 연이를 따라가면 된다.”

 무영은 인홍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연이는, 연이는 혼자서 일본에 오게 하시고 왜 난 안 됩니까! 왜 내가 여길 떠나는 게 안 되는 거요! 조선의 내 집으로 가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입니까?”

 인홍은 이때다 싶어 소리를 질렀다.

 “연이는 다른 종들의 보호를 받고 안전하게 부산까지 갔소. 허나, 당신은 어떻소? 당신은 안전하게 한양까지 데려갈 사람이 하나라도 있소? 그리고 연이는 나의 명령으로 일본에 집을 사 놓으러 간 것이잖소. 연이와 당신은 확연히 차이가 나오. 봉순아, 어서 뫼시거라.”

 무영은 인홍의 말에 차분하게 대답하고 봉순에게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예. 아씨, 가시지요.”

 봉순은 인홍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데리고 갔다.

 “놔라! 서방님, 왜 이러시오! 날 겨우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하는 아낙으로 만들 작정이오? 난 가만히 있지 않을 테요! 놓거라! 난 그곳에 가지 않을 테다! 놓으래도!”

 인홍은 봉순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봉순은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인홍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무영은 그 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15

 

 “새로 전학 온 애다. 사이좋게 지내라. 너는 저기 앉거라.”

 무영은 교수님이 가리킨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안녕, 나는 다케유시 히네요야. 만나서 반가워.”

 옆에 앉은 남자 아이가 말했다. 그는 키가 훤칠하지만 적당히 통통하다. 인상은 부드럽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잘생겼다.

 “난…….”

 무영은 머뭇거렸다.

 “나쓰메.”

 그는 정수가 그에게 신신당부했던 것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일본문학과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나랑 친하게 지내자.”

 “응.”

 다케유시의 다정한 말에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그와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쓰메 군.”

 교수님이 무영에게 다가오며 그의 일본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그대의 이름과 똑같은 사람의 작품을 읽게 될 거라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거기에 대해서 토론할 테니 그리 알게나. 어떻게든 ‘도련님’을 구해 읽게.”

 “예.”

 무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오늘 수업은 ‘우리’만 읽었던 책에 대해 하는 것이니까, 그대는 그냥 듣고만 있게. 안 읽어 봤을 가능성이 많으니깐.”

 교수님이 조소를 띠며 말했다.

 “히노메 교수님이셔. 대부분 우릴 가르치시지. 좀 까칠하시긴 해도 좋으신 분이야.”

 무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 후, 다케유시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책에 대한 토론에 열심히 참여하고,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매우 설득력 있게 말했다. 무영은 다케유시의 말을 듣고, 그의 말이 무조건 옳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케유시의 말이 끝나고 나자, 무영은 지루해졌다. 그는 책상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기도 하고,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자, 무영은 몇 달 전에 정수가 찾아 왔던 날을 떠올렸다.

 

 “자네, 곧 떠날 테지?”

 정수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벌써 얼마 남지 않았구려.”

 무영은 정수와의 헤어짐이 아쉬웠지만, 그곳에선 또 어떤 친구가 생길지 어떤 것을 배울지 궁금한 게 더 커서 슬픔에 빠져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내가 자네에게 해 줄 말이 있어서 찾아왔네.”

 정수가 분위기를 잡으며 말하자, 무영의 기분도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무엇인가?”

 “그게 말일세……."

 정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는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내 무영에게 건넸다.

 “……이건, 추천장 아닌가?”

 “그러하네.”

 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내게 이걸……?”

 “이미 교장에게 말해 놓았지만, 그가 자네와 자네의 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수도 있어. 그래서 자네에게 주는 걸세. 그런 일이 없을 테고 없어야 하지만, 혹여 생길 수도 있으니 챙겨 두었다가 필요하거든 꺼내 교장에게 보여주게. 아마 그럼 받아들여 줄게야.”

 정수가 천천히 하나하나 짚어가며 대답해 주었다.

 “고맙네.”

 “아, 그게 끝이 아닐세.”

 정수는 갑자기 기억났는지 말했다.

 “말해 보게.”

 “자네는 일본식 이름을 정해야 하네.”

 무영은 정수에 말에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이름은 나쓰메로 정했네. 부인의 이름은 마사에로 정했고.”

 정수는 무영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무영과 인홍의 일본식 이름을 말해주었다.

 “우리가 왜 그렇게 바꾸어야 하나?”

 무영의 말에 정수는 혀를 찼다.

 “쯧쯧, 이보게. 일본에선 우리를 조센징이라고 부른다고. 분명히 자네와 부인은 따돌림을 당하게 될 거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괴로울 거야. 그러니 잔말 말고 그렇게 바꾸게나.”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4년 후에 다시 보지.”

 “4년 후라니?”

 정수가 일어나며 말하자, 무영도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유학 갔다 올 것 아닌가?”

 정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바빠서 자네가 떠나기 전까지 못 올 것 같네.”

 정수가 그 말을 할 때는 그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많은 것 배워서 오길 바라네.”

 “자넬 잊지 않을 걸세.”

 무영은 정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영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잘 가게.”

 정수는 사랑방을 나와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말을 천천히 걸어가게 했다. 정수는 박 이조판서 댁을 완전히 빠져 나갈 때까지 무영을 돌아보았다. 무영도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같이 가자, 나쓰메.”

 하교할 때 다케유시가 말했다. 무영은 ‘응’이란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나쓰메’란 새 이름이 어색하기만 했다.

 “집이 어디야?”

 “오른쪽으로 쭉 가다가 왼쪽으로 틀어서 좀 더 가면 나와.”

 무영은 다케유시의 말에 자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같은 방향이네. 잘 됐다.”

 다케유시가 활짝 웃었다.

 “나쓰메, 너는 왜 문학과에 들어왔니?”

 “글쎄,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내가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난 작가가 되고 싶어서 들어왔어. 나도 책을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야. 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즐겨 읽어. 아마 모든 일본인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무영은 그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너는 잘 모르는가 보구나?”

 “으응……, 이름은 들어 봤어도…….”

 다케유키의 물음에 무영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되게 유명해. 그의 작품들을 보면 너도 분명히 반할 거야.”

 다케유키가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무영은 시간이 참 느리게 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안녕, 내일 또 보자.”

 다케유키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영은 그에게 손을 흔들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16

 

 “봉순아, ‘도련님’을 구해오너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영의 부름을 받고 온 봉순은 그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도련님’이란 책을 구해 오란 말이다.”

 “예.”
 봉순은 일어나서 나가려고 했다 .

 “잠깐 기다려라. 돈은 가져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봉순은 도로 앉아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몇 개 안 되는 동전이 봉순의 손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정도면 충분히 사고도 남을 것이다. 어서 가서 사오너라.”

 봉순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5엔! 이렇게나 많이!”

 봉순은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는 누구에게 도둑 맞을까봐 두려운 듯 손에 꼭 쥐었다. 마땅히 넣어 놓을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봉순은 서둘러 집을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거리가 북적거렸다.

 “죄송하지만, 제가 길을 잘 몰라서요. 책방이 근처에 있나요?”

 봉순이 한 남자를 붙잡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갈 수 있나요?”

 남자의 대답에 봉순이 물었다.

 “쭉 가다보면 길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 꽤 될 겁니다. 그런 곳을 세 번 지나고, 그 다음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보일 거예요. 저는 바빠서 이만.”

 “저기요! 조금만 더 설명해 주시지…….”

 봉순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서둘러 가버렸다.

 “어쩔 수 없지. 가볼 수밖에.”

 봉순은 한숨을 쉬었다. 봉순은 남자가 가르쳐 준대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런데 그녀는 책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일 거라고 했는데……. 잘못 왔나?”

 봉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때, 그녀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책방이 있는 것을 보았다. 봉순은 책방을 발견한 것이 기뻐 뛰어 갔다.

 “어서 오세요.”

 책방에 들어가자 머리가 살짝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봉순은 그가 책방의 주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기, ‘도련님’이라는 책이 있나요?”

 “아, 물론이죠.”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책은 언제나 잘 팔려 나간답니다.”

 “아, 그, 그래요?”

 남자의 말에 봉순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찾아 드리겠습니다.”

 그가 안쪽으로 들어가서 ‘도련님’을 찾는 동안, 봉순은 책방 안을 쓰윽 훑어보았다. 대학생인 듯 보이는 남자 몇몇과 꼭 선생님처럼 엄격해 보이는 30대 남자도 있었다. 또, 글자가 잘 안 보여서 눈을 부비는 할아버지도 계셨다.

 “아, 아가씨. 이리 좀 와 봐요.”

 할아버지는 봉순을 발견하고 손짓을 했다.

 “아가씨 이름은?”

 “미, 미야코요.”

 봉순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미야코 양, 이 책 제목 좀 읽어 주겠어요? 나는 눈이 나빠서…….”

 할아버지가 아까부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책을 봉순에게로 내밀며 부탁했다.

 “네, 이 책의 이름은 ‘무희’예요. 모리 오가이가 지었어요.”

 “어떤 내용이지요?”

 할아버지가 봉순에게 물었다.

 “으음, 집안이 좋고 장래가 촉망되는 독일 유학생 오타 토요타로와 가난한 춤추는 소녀 에리스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이야기라네요.”

 봉순은 그 말을 하고는 할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고맙군요, 미야코 양.”

 “아니에요. 힘든 것도 아니었는걸요.”

 봉순이 할아버지의 감사 인사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힘든 것이 아니라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할아버지는 봉순의 말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미야코 양, 언제 한 번 우리 국수집에 국수 먹으러 오시구려. 와세다 대학 근처에 있어요.”

 할아버지가 봉순에게 부탁하듯이 말했다.

 “정말요? 저희 집도 와세다 대학 근처에 있는데. 언제 한 번 가 볼게요.”

 봉순이 기뻐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계산하시겠어요?”

 주인처럼 보이는 그 남자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얼마입니까?”

 “90전만 주십시오.”

 할아버지가 돈을 탁 내려놓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었고, 봉순이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여기 ‘도련님’ 있습니다.” 남자가 책을 내밀며 말했다.

 “얼마예요?”

 “90전만 주시면 됩니다.”

 봉순은 만지작거리고 있던 5엔을 냈다.

 “꽤 많은 돈을 들고 다니시군요. 조심하십시오. 도둑놈들의 딱 좋은 먹잇감이니까요.”

 남자는 봉순이 5엔을 내자 걱정스러워 하며 충고해 주었다.

 “네.”

 봉순은 도련님의 돈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봉순은 한 손에는 동전을, 다른 한 손에는 ‘도련님’을 들고 지는 노을을 향해, 그리고 집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17

 

 “오늘은 ‘도련님’에 대해서 토론해 보자. 토론 주제는 ‘항상 정직하고 올곧은 주인공의 행동은 좋은 것인가, 좋지 않은 것인가’이다. 자, 시작하자.”

 히노메 교수님이 토론을 시작하셨다.

 “다케유시.”

 히노메 교수님이 손든 다케유시를 지목했다.

 “사람들은 악에 물들지 말아야 하며, 항상 정직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자신만이라도 옳은 길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악에 둘러 싸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에 물들지 않았으며, 항상 올곧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인공의 행동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케유시가 의견을 말하고 자리에 앉자, 여러 사람이 박수를 쳤다.

 “저는 히네요 군의 말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쳐다보았다.

 “나쓰메, 말해 봐라.”

 히노메 교수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히네요 군의 말대로, 사람은 정직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지만, 항상 정직하고 곧을 수는 없습니다. 너무 곧으면 꺾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끔씩은 숙여서 피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주인공은 거짓을 모르고, 옳은 것만 고집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건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주인공은 사회에 적응해 사는 법과 옳은 것만 고집하다보면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무영은 말을 끝내고 의자에 앉았다. 몇몇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한 것치곤 잘 했구나.”

 히노메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너의 의견이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구나. 다음부터는 의견을 명백히 하도록.”

 “네.”

 히노메 교수님의 조언에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새삼 ‘이 교수님이 참 대단하시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음은 누가 해보겠니? 아, 마시모토?”

 히노메 교수님이 마시모토가 손을 든 것을 보고 말했다..

 “저도 다케유시처럼 주인공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마시모토는, 원래 조센징이야.”

 “정말?”

 무영은 깜짝 놀라 물었다.

 “응.”

 다케유시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무영은 마시모토를 힐끔거렸다.

 “그럼 원래 이름은 뭔데?”

 “글쎄, 아무도 모를걸?”

 다케유시가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고, 토론에 다시 집중했다.

 

 “야, 마시모토!”

 학교 끝나고, 무영은 마시모토를 쫓아갔다.

 “왜 그래, 나쓰메?”

 “그게, 있잖아…….”

 무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너 조선인이라며?”

 무영이 마시모토 귀에 대고 물었다.

 “응. 너도 그렇지?”

 마시모토의 물음에 무영은 깜짝 놀랐다.

 “그, 그걸 어떻게……?”

 무영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내 본래 이름은 송계백이야.”

 계백은 무영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 난 무영. 박무영이야.”

 “난 평원 출신이야. 너는?”

 무영의 소개를 들은 계백은 출신지를 말했다.

 “나는 경기도 광주야.”

 “타향에서 동포를 만나니 기분이 좋은 걸.”

 계백이 활짝 웃었다. 무영은 ‘동포’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그래. 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래, 너랑은 왠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계백이 손을 내밀었다. 무영은 머뭇거리다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것뿐인데도 무영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마주 잡은 채, 한참을 빙긋 웃고 있었다.

 무영은 계백과 맺은 인연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8

 

 무영이 일본에 유학을 온 지 약 3년이 지난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동경유학생들이 웅변회를 열었다. 그 날, 실행위원 10명이 붙잡혔는데, 그 중에 송계백도 끼어 있었다. 이 일은 무영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죄인을 찾아라!”

 무영의 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경찰들은 무례하게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이게 무례하게 무슨 짓입니까?”

 봉순이 경찰 중 한명을 막아서며 말했다.

 “나는 명령을 받고 죄인을 찾으러 왔을 뿐이다. 잔말 말고 비켜라.”

 그 경찰은 봉순은 탁 밀쳤다.

 “죄인을 잡았다! 돌아간다.”

 한 경찰의 외침에 다른 경찰들도 그곳으로 몰려갔다.

 “도련님!”

 봉순은 경찰들에게 붙들려 있는 무영을 보고 놀라 달려갔다.

 “당장 놓으시오! 도련님께서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이러십니까?”

 “낸들 알겠냐? 위에서 잡아오라니까 잡아가는 거지. 가자!”

 한 경찰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무영을 끌고 갔다.

 “우리 도련님은 잘못 없소!”

 봉순이 끝까지 매달렸지만 그들은 차갑게 뿌리쳤다.

 “죄가 없다면 풀어줄 거다. 그러니까 걱정이랑 말아라.”

 봉순은 그들이 무영을 끌고 가는 모습을 눈물과 함께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왜 잡혀 왔는지 아느냐?”

 심문관이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 있는 무영에게 물었다.

 “잡아오니 끌려 왔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그 이유를 알겠느냐?”

 무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들을 불러 와라.”

 심문관이 명령하자, 형사들이 학생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을 데리고 왔다.

 “그 때 했던 말을 이놈 앞에서 다시 말해 보거라.”

 심문관이 무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쓰메는 조센징인 마시모토와 어울려 다녔습니다.”

 “가끔 다른 조센징들과 만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바로 이번에 잡혀온 놈들이었어요.”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했다.

 “인정하느냐?”

 심문관이 악동처럼 씨익 웃으며 물었다.

 “계백과 어울리고, 그가 만나는 친구들은 만나보기는 하였으나……,”

 “이놈을 옥에 쳐 넣어라!”

 심문관이 무영을 가리키며 외쳤다.

 “옙!”

 “난 이번 사건과 관련 없소! 그들을 알고 있단 죄 밖에 없단 말이오!”

 무영은 끌려가면서 심문관을 향해 외쳤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무영은 옥에 갇히고 말았다.

 

19

 

 옥에 갇힌 무영은 자기가 계백과 어울린 것이 그렇게 잘못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온 대답은 ‘아니요.’였다. 무영은 이제 그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지겨워졌다.

 “이보시오.”

 누군가 무영을 불렀다.

 “무슨 일이오?”

 자신을 부른 청년이 앞으로 같이 지낼 죄수 중 하나라는 것을 안 무영이 물었다.

 “여긴 무슨 죄를 지어 들어왔소?”

 “난 죄가 없소.”

 무영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조선인이오?”

 무영은 ‘조선인’이라는 말에 한쪽 눈을 치켜떴다.

 “그렇소만.”

 “나도 조선인이오. 독립 운동을 하다가 왜로 도망쳐 왔는데, 여기서 잡혔지 뭐요.”

 청년은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번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앞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 있는 듯한데…….”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제 친구가 그 거사에 참여했었으니까요.”

 무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연루자로 잡혀 오셨구려.”

 청년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 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 가두더이다. 그게 사람 취급이더이까? 말도 못하는 동물이나 다름없지 않소.”

 청년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무영은 공감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우리 동포들의 사정이 말이 아니오. 하긴, 폐하께서도 현재 강제로 폐위되셔서 사정이 안 좋으신데, 우리 백성들이라고 무사하겠소?”

 청년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무영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나는 징역 3년을 받았소. 올해가 2년 되는 해요. 딱 1년 남았소. 당신의 징역은 1년이니, 나와 같이 나갈 수 있을 것이오. 그 때 꼭 같이 나갑시다. 나는 이 감옥을 나가면…….”

 청년은 흥분해서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왜놈 간수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한 표정이었다.

 “……이 감옥을 나가면 말이오. 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시 싸울 거요. 간도로 가서 왜놈들과 싸울 겁니다.”

 청년이 목소리를 낮추며 무영에게 말했다. 청년은 자신의 계획이 만족스러운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무영은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무영은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계백을 따라 다니면서도 그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할 날이 1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그 때에도 그랬다. 무영은 청년의 말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아참, 내 이야기 하느라 이름도 못 물어 봤구려.”

 청년은 무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내 이름은 박무영이요.”

 “아, 그렇소? 난 이창암이요. 나이는 어찌 되시오?”

 창암은 무영의 이름을 외워버리려는 듯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스물 둘입니다. 그 쪽은?”

 “스물아홉이오. 내가 형님이구려.”

 창암이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턴 형님이라 부르시오. 나는 아우라고 부를 터이니.”

 무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이상 창암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감옥을 쓰는 이상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어려워 보였다.

 “관식이오!”

 어떤 남자가 음식을 들고 나오며 외쳤다.

 그 남자가 관식을 내려놓자, 죄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영은 자리에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게 될까.’

 무영은 가만히 그 생각을 하고 있다가 어서 먹지 않으면 도로 가져 갈 거라는 간수의 반 협박에 식어버린 음식을 천천히 떠먹었다.

 

20

 

 계백을 처음 만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무영의 집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계백이 불쑥 그의 집을 찾았다.

 “누구……? 아니, 계백, 자네가 웬일이야?”

 무영이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사랑방에 들어오고 나서도 계백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무영은 빨리 대답하라고 계백을 다그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무영아, 이건 아주 큰 비밀인데……. 너, 이거 지킬 수 있겠니?”

 마침내 계백이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무영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계백이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말해 봐.”

 무영이 계백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여기서 말하긴 좀 그래. 내일 와세다 대학 앞의 사이카쿠 국수집에서 온다면 말해줄게.”

 계백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여기서 말해주면 안 될까?”

 “안 되겠어.”

 계백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분명 날 배신하지 않겠지?”

 “물론이야.”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계백이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그는 계백이 자신에게 동포를 배신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고 있음을 알았다.

 “……그럼 내일 보자.”

 무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백이 나가는 모습을 보는 무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무영은 계백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지만, 그는 무영을 완전히 신뢰하진 못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무영은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무영은 내일 그 자리에 나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무영은 몇 시간의 고민 끝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무영은 내일 어떤 일이 있을지 걱정스러워 밤새 뒤척였다.

 

 “손님이 찾아왔다.”

 간수가 무영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무영은 그의 말에 회상을 그만두었다.

 “누구였습니까?”

 “너덜거리는 옷을 입고 머리를 땋아 내린 계집애. 네 안사람이냐?”

 그 간수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무영은 그의 말에 화를 꾹 참고 대답했다.

 “아마 하녀일 겁니다.”

 무영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 마님의 말씀을 주인께 전하러 왔나 보지?”

 그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무영은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었다간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자 간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새 면회실 앞에 도착했고, 간수는 거칠게 문을 열었다.

 “도련님!”

 앉아 있던 봉순이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무영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게 말입니다…….”

 봉순이 굵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울지 말고. 상황을 설명하렴.”

 무영의 말에도 봉순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거렸다. 무영은 어쩔 줄 모르고 봉순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아씨께서, 돌아가시겠답니다.”

 봉순이 겨우겨우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봉순의 간단한 말에도 무영은 그녀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했다.

 “조선으로?”

 “네.”

 “연이와?”

 “네.”

 “너와 나를 놔두고 말이냐?”

 “네. 아씨께서 저더러 도련님 곁에서 1년 보내다가 오라 하셨습니다.”

 무영의 연달은 질문에 봉순은 꼬박꼬박 대답했다.

 “조선 갈 돈은?”

 “……그, 그것은 제 돈으로…….”

 무영은 그제야 봉순이 사이카쿠 할아버지의 국수집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사이카쿠 국수집에서 일하고 받은 돈?”

 무영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봉순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째서 간다 하더냐?”

 무영의 질문에 봉순은 훌쩍거리며 겨우겨우 그 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씨, 도련님 어쩝니까? 죄 없는 도련님께서 끌려 가셨습니다.”

 봉순이 훌쩍거리며 인홍에게 말했다.

 “계백이란 사람과 어울릴 때부터 알아 봤다. 서방님이 일으키신 일이시니 서방님께서 어떻게든 끝맺으셔야 한다.”

 인홍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씨, 어떻게든 도련님을 구해내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도련님은 아씨의 지아비 아니십니까.”

 봉순이 간곡하게 말하였지만 인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옥살이 몇 달이나 몇 년만 하시면 돌아오실 게다. 그 때 동안 나와 연이는 조선에 가 있을 생각이다.” 

 “아씨, 제발…….”

 봉순은 끝까지 인홍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인홍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내게 손대지 마라! 그리고 내 결정에 토를 달지 마라! 난 내 뜻대로 밀고 나갈 것이다. 서방님께서 옥에서 나오시거든 그 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마.”

 인홍은 방바닥에 쓰러진 봉순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하곤 안방을 나가버렸다.

 봉순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인홍이 조선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도련님…….”

 봉순은 무영과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스러워 눈물을 흘렸다.

 

 “지금 생활은 어떠세요?”

 봉순이 자신의 말을 끝내곤 물었다.

 “나쁘진 않아. ‘이창암’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좋은 사람이다. 독립 운동을 하다가 일본에 건너왔는데 이곳에서 잡혔다더구나. 그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감옥 생활도 그렇게 싫진 않을 것 같다.”

 무영은 빙그레 웃으며 봉순을 진정시켰다. 봉순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좀 놓인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오늘 몰래 빠져나온 것이거든요. 자주 못 찾아 뵐 것 같았는데, 마음이 맞는 친구 분이 계신다니 전 너무나 안심되네요.”

 봉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면회 시간 끝났다.”

 간수가 들어오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자꾸나.”

 무영이 애써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그를 따라갔다.

 “어서 들어가.”

 감옥 문이 열리고, 무영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무영은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래간만에 봉순이 찾아와서 내심 그는 기뻤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기쁨은 어느 새 그의 마음속에서 빠져나가버렸다.

 무영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아무 일도 없을 내일을 떠올리니 어깨가 추욱 쳐졌다.

 

21

 

 “으아악~!!”

 무영은 갑자기 들려온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그 쪽을 쳐다보았다.

 “형님, 저건 또 무슨 소립니까?”

 무영이 창암을 향해 물었다. 그는 창암과 처음 대화를 나눈 뒤로 창암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저 소리 말인가? 또 시작했나 보네 그려.”

 창암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무영이 창암 쪽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물었다.

 “고문이네, 고문.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는 자가 있는 모양일세.”

 창암은 혀를 차며 말했다.

 “왜놈들이 우리 조선인들에게 하는 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악형, 둘째는 굶기기, 그리고 셋째는 은근히 꾀는 일이다. 아마 이번에도 똑같은 수를 쓰겠지.”

 그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괜찮을까요?”

 “악형 말이냐? 아우야, 악형은 견딜 만한 게 아냐. 아마 살아오지 못하거나 병신 돼서 돌아올 게다.”

 무영의 호기심 반, 걱정 반이 섞인 질문에 창암이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남 걱정할 시간도 없다. 지금 내가 죽을 지도 모르는데.”

 창암이 조금 있다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무영은 창암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말았다. 반박해 봤자 싸움만 일어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말 머리에 꼭 새겨라. 네 걱정 돼서 하는 얘기니.”

 창암은 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그에게 말하고는 뒤돌아 앉았다. 무영과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겠다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말을 끝맺었지만, 무영은 그 일을 그 뒤로도 결코 잊지 못했다.

 

 그 뒤로 몇 주가 흘렀다. 그 때 즈음, 무영은 바깥의 모습을 그리거나 감방에서 나갈 날을 손꼽아 보는 일이 잦았다.

 “널 만나고자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느 날, 간수가 무영에게 말했다. 무영은 그의 말투가 그 전하고 사뭇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어서 따라 와라.”

 무영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저를 면회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영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무영은 간수의 말에 너무 기뻤다.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가 지겨웠던 참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하루에 새로운 일이 끼어들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누구인가요?”

 무영이 애써 기쁨을 누르며 물었다. 그러나 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면회실 문을 열었다.

 “……다케유시?”

 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봉순일 거라고 예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예상이 아주 빗나갔다. 다케유시라니! 다케유시 히네요라니!

 “오랜만이야, 나쓰메.”

 다케유시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정말. 너무 늦게 왔지?”

 “그래, 다케유시.

 무영도 그에게 웃어주며 말했다.

 “……솔직히 네가 이렇게 찾아오리라곤 생각 못했어. 히네요 집안은 대단한 부자 집안이니까…….”

 무영이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친구니까 당연한 거 아냐?”

 다케유시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당연한 거지.”

 무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는 다케유시가 진정한 친구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 생각 덕분인지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근데, 그 소문들 어떻게 된 거야?”

 다케유시가 갑작스럽게 생각난 듯 무영에게 물었다.

 “어떤 소문들?”

 “네가 형무소에 잡혀갔다는 소문 말야. 네가 이번 사건과 관계있어서 잡혀 갔다는 소문들이 파다했거든. 그리고 네가 조센징이라는 소문도 돌았어. 게다가 네가 염알이꾼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고, 네가 나에게서 정보를 빼내려고 접근했다는 소문까지……. 하여간 와세다 대학에 너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은 데가 없었어.”

 다케유시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듣고 있는 무영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넌 그 말을 믿니?”

 무영의 물음에 다케유시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소문들에 대한 네 변명이라도 듣고 싶어.”

 “알았어.”

 무영은 다케유시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건과 내가 관계있다는 소문은 거짓이야. 난 이번 사건과 관계있는 게 아니라 계백과 관계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조센징……이란 말은……사실이야.”

 무영의 말을 들은 다케유시의 눈이 커졌다.

 “네가 진짜……?”

 “응, 그래. 그리고 난 염알이꾼이 아냐. 난 그냥 공부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것뿐이야.”

 다케유시는 무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조선……사람이란 거 빼곤 다 거짓이구나.”

 그는 머뭇거리며 결론을 내렸다. 그의 말에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선인이란 이유로, 그리고 계백과 그의 친구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잡혀 있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든 감방을 나오도록 도와줄게.”

 다케유시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어떻게? 탈옥하도록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무영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다케유시는 진지했다.

 “진심이야.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지금은 괜찮아. 나중에 진짜로 네 도움이 절실해 지거든 도움을 청할게.”

 무영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그럼 간다.”

 무영은 장난스럽게 다케유시의 어깨를 툭 치곤 면회실을 나갔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

 다케유시가 무영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

 무영은 다케유시의 말을 들으며 면회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는 간수보다 앞서 걸어 제 발로 감방에 들어갔다.

 ‘좋아. 이제 계획만 세우면 돼.’

 무영은 털썩 주저앉아서 열심히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22

 

 “도련님, 아씨께서 얼마 전에 연이와 함께 조선으로 떠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봉순이 무영을 찾아와 말했다.

 “그랬구나.”

 “그리고 20엔을 주고 가셨답니다.”

 무영은 봉순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 사람이 어디서 돈을 구했다더냐?”

 봉순은 무영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 돈으로 사식 넣어드릴게요.”

 봉순은 나름 돈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아니다. 관식만으로도 충분해.”

 “아니에요. 관식만으론 부족하실 거예요. 도련님은 더 건강해 지셔야 해요. 감방에 계시더니 살이 더 빠지신 것 같아요.”

 무영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봉순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생각할 게 많아서일지도 모르지. 나는 됐으니까 사식 넣어줄 생각일랑 말거라. 알겠느냐?”

 봉순은 무영의 말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봉순은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사식을 넣어주었다. 무영도 더 이상 봉순의 그런 행동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봉순과 다케유시가 적어도 닷새의 한 번씩은 찾아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무영은 생기 있어졌다. 어느 날, 봉순과 다케유시가 한꺼번에 무영을 찾아왔고, 그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맞이하였다.

 “오늘은 손님이 둘씩이나 찾아오셨네 그려.”

 무영은 기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오늘 내가 자넬 찾아온 것은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 것이 있어서이네.”

 다케유시가 진지하게 말했다.

 “탈옥 말일세……. 자네 생각 있는가?”

 “없을 리가 있겠나.”

 무영이 다케유시의 말에 가볍게 대꾸했다.

 “정말요, 도련님? 그럼 제가 기꺼이 도울게요.”

 봉순이 기뻐하며 말했다.

 “자자, 아가씨. 진정하고……. 천천히 이야기 해 봅시다.”

 “봉순이에요. 도련님 댁 하녀니까 말 놓으셔도 되요.”

 봉순이 다케유시의 말에 대꾸했다.

 “어쨌든 간에, 나쓰메 자넨 어쩔 생각인가?”

 “무영이라 불러 달라고 했지 않은가.”

 무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네. ……무영.”

 다케유시가 한숨을 쉬곤 말했다.

 “계획이라도 세워 보았는가?”

 “물론 해 보았지.”

 무영이 다케유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생각엔 일단은 형무소의 일부 사람들, 즉 간수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럼 탈출할 때 더 수월해 질 테니까.”

 다케유시와 봉순은 무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은 내가 맡겠어. 나만 믿게.”

 다케유시가 무영에게 말했다.

 “그래요. 히네요 도련님께서 맡아주시면 더 쉽게 넘어올 테죠. ……에돗쿄이시고, 또 유명한 가문의 독자이시니까요.”

 봉순이 다케유시의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에돗쿄라고 말했다.

 “그럼 저는 형무소 밖에서 안전하게 도련님을 모시도록 할게요.”

 봉순이 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어떻게 하려고……?”

 다케유시가 걱정되는지 물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사이카쿠 국수집 아세요?”

 “물론 알고말고. 그 집 주인 할아버지 성품이 얼마나 좋으신데. 그 분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럼 내가 그 분께 너와 무영이를 배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가도록 부탁드려야겠다.”

 다케유시는 봉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배? 어떤 배?”

 무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 배 말야. 내가 배 구해줄게.”

 다케유시가 무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그럼 언제……?”

 봉순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내 생각엔 한 달 쯤 뒤가 좋겠는데.”

 다케유시가 조용히 말했다.

 “7월 8일 말인가?”

 무영의 물음에 다케유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이 도련님께서 여기 오신지 다섯 달 째 되는 날이네요.”

 봉순이 괜찮다는 뜻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마 한 달 안엔 그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한 달 동안은 내가 매일 찾아오겠네.”

 “저두요.”

 봉순이 거들며 말했다. 그러나 무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될 말이야. 너와 다케유시가 닷새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으로도 충분히 눈에 띄었어. 그런데 둘 다 매일 찾아온다면 더 눈에 띌 거고, 분명 의심하는 놈도 생길 거야. 그러니까 일본에서 태어났고, 또한 여기 도쿄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다케유시가 찾아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그렇다고 다케유시 너도 너무 자주 찾아오지 마. 나 같은 조선인들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거든.”

 무영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건 무영이 말이 맞는 것 같다, 봉순아. 그러니까 이번만은 우리의 생각대로 하려무나. 그리고 무영이 너도 너무 걱정하진 마. 나에게 수가 있으니까.”

 다케유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봉순과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쯤하고 가야겠다. 너무 오래 감방을 떠나 있었어.”

 무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다케유시와 봉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찾아올게. 잘 지내.”

 “다음에 다시 올게요, 도련님. 건강하셔야 돼요.”

 다케유시와 봉순이 동시에 말했다.

 “알았어.”

 무영의 얼굴이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면회실을 나가 간수과 함께 감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무영의 얼굴에는 어느 새 미소가 사라지고 침착함이 깃들여져 있었다.

 

23

 

 다음 날부터 다케유시는 그의 말대로 매일 찾아왔다. 하지만 무영은 다케유시와 접촉할 수조차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무영은 봉순에게 다케유시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도련님, 히네요 도련님께서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괜찮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말해 봐.”

 무영은 궁금한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말이죠…….”

 봉순은 전해들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후지와라 경관님, 안녕하십니까?”

 다케유시가 경관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경관이 반갑게 웃으며 물었다.

 “물론 잘 지냈지요. 아참, 오늘 찾아온 이유는 이 근처의 형무소에 가보고 싶어서입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위험한 데를 가려고 하십니까?”

 경관은 다케유시의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궁금해서 말입니다. 작문 시간에 써 내 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

 “그래도 안 됩니다. 겐카이 나리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경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버지의 허락도 받아왔으니, 가게 해주시지요.”

 다케유시가 아버지 겐카이의 편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후지와라 경관은 그 편지를 읽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분의 말씀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경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동안 찾아오실 생각이십니까?”

 “내일부터 시작해서 한 달간 찾아올 생각입니다.”

 다케유시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나 길게 말입니까?”

 경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 달 쯤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자세히 알지요.”

 “하지만…….”

 경관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이 기회에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경관님. 허락해 주시지요.”

 다케유시는 끈덕지게 경관을 졸랐다. 마침내, 경관도 허락하고 말았다.

 “제가 졌습니다. 내일부터 오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후지와라 경관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다케유시가 경관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렇게 허락을 구해내셨답니다.”

 봉순이 말을 끝내고 숨을 헐떡였다.

 “어째서……?”

 “왜 6월 10일에 시작해서 7월 10일에 형무소 답사를 끝내는 것인가, 그거 물으려 하신 거죠?”

 봉순이 무영의 말을 가로챘다. 무영은 봉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여쭈어 보았어요. 그 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7월 8일에 답사를 끝내고 그 날에 도련님께서 탈옥하시면 그 사람들이 히네요 도련님을 의심할지도 모른대요. 그리고 7월 8일에 실패할지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역시 다케유시는 머리가 좋구나.”

 무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정말 그러셔요.”

 봉순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케유시가 다른 이야긴 안하든?”

 “하셨어요.”

 무영의 물음에 봉순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긴 정치범들이 많이 들어 있는 방입니다. 2월에 조센징들이 많이 들어온 것 아시지요? 조센징들은 그 사건을 독립선언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후지와라 경관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 그 사건 말인가요? 우리 와세다 대학에서도 많은 말이 돌았습니다.”

 다케유시가 웃으며 말했다.

 “와세다 대학에서도 조센징들이 잡혀 갔으니까 그렇겠지요. 하여간 그 사건 뒤로도 계속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바람에 조센징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렇군요.”

 다케유시는 방금 본 감방의 위치를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십니까?”

 경관이 다케유시가 표시한 것을 흘낏 보며 물었다.

 “참고 자료로 쓰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도처럼 만들 생각입니까?”

 경관의 말에 다케유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일단 위치만 설명해드리지요.”

 경관은 그 말을 하고 앞서 갔다. 다케유시는 기뻐하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위를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도를?”

 무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다음에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봉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앞으로 히네요 도련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에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 마음을 놓을 순 없겠지만요.”

 그녀가 빨리 덧붙였고, 무영도 동의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어요. 오늘은 짬을 내서 찾아온 거거든요.”

 봉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사식이에요. 맛있게 드세요, 도련님.”

 봉순은 무영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면회실을 급히 빠져나갔다.

 무영은 도시락을 열어보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그는 따뜻한 밥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영은 자기도 모르게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24

 

 “무영아.”

 다케유시의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무슨 일이야, 다케유시.”

 무영은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게다가 면회실이 아닌 감방으로 찾아오다니.

 “내일이 그 날인 거 알지?”

 다케유시의 물음에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내일 일어날 일들이 떠올랐다. 내일이면 그는 이 감방에 없을 것이다. 그 생각 때문에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던 무영은 이 늦은 시각까지 깨어 있었다. 분명 다케유시도 그의 마음을 예상하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겠지.

 “혹시 작전 생각나니?”

 “물론.”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케유시의 아버지가 히네요의 부탁대로 음식들과 술을 하인 편에 보낼 것이다. 그리고 형무소 안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 아닌 잔치를 벌일 것이다. 그 때, 봉순이 면회실에서 무영과 만나고 있는 중일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잔뜩 취하면 그 때 형무소를 빠져 나와 사이카쿠 할아버지께 간다. 그 분의 보호를 받으며 봉순과 무영은 배까지 가게 될 것이다. 그럼 그 배를 타고 그들은 조선으로 간다.

 “근데, 작전 몇 부분을 바꿔야겠어.”

 “왜?”

 다케유시의 말에 무영은 깜짝 놀라 물었다.

 “쉿!”

 다케유시가 무영의 입을 막았다.

 “사실 내가 그들의 완전한 신뢰를 받고 있는지 알 수는 없어. 면회실에서 널 만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거든. 그리고 눈치가 빠른 놈이 있다면 금방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다케유시의 말에 무영은 식은땀이 흘렀다. 안 된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는, 아니 그들은 조선으로 꼭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안에서 끝까지 있을 거야. 다음 날 아침까지 말이지. 난 술에 엄청 취해야 할 거야. 그래야 의심 안 받지.”

 다케유시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무영은 그의 눈에 눈물이 괴여 있는 것을 봤다. 아니, 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데리러 오는 사람이 바뀔 거야.”

 무영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둘 사이에 있는 쇠창살이 오늘만큼 미운 적도 없었다.

 “미안해. 아마 너희들 떠나는 거 못 볼 거야.”

 다케유시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영은 그에게 그 동안 고마웠다고, 넌 정말 좋은 친구였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이 메어 말할 수가 없었다.

 다케유시가 무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무영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동안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조선 가서도, 잘 지내.”

 눈물이 무영의 눈앞을 가렸다.

 “너도.”

 무영이 겨우 말했다.

 “……그 말 하고 싶었어.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무영의 손을 잡고 있는 힘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 지내라고.”

 다케유시의 마지막 말을 들은 그 순간, 무영의 손이 툭 떨어졌다.

 “……다케유시?”

 무영이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바람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 얘기하고 싶었어. 그동안 고마웠다고, 넌 정말 좋은 친구였다고 말이야. 그리고……,”

 무영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보고 싶을 거라고…….”

 무영의 작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네가 알아서 찾아가라. 보아하니 널 찾는 사람이 많아서 자주 가 본 것 같던데.”

 잔치라는 말에 눈이 뒤집힌 간수 한 명이 말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다행히 아무도 내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사이카쿠 할아버지시군요.”

 “헐헐헐……. 이거 오랜만이오.”

 할아버지 특유의 웃음은 무영을 편안하게 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허헛……, 허리 통증은 덜 하였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젊은이는 어떻소?”

 사이카쿠 할아버지가 농담처럼 말했고, 무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 말입니까? 사람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연루죄로 잡혀 왔는데, 잘 지낼 리 있겠습니까.”

 무영이 한숨을 내쉬었고,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할아버지가 담배 한 대를 피우며 말했다.

 “피울 거요?”

 “아니요, 됐습니다.”

 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어쨌든 기다리려면 지루하겠구려.”

 할아버지의 입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책이라도 읽는 것은 어떻소?”

 할아버지가 봉순과 만났던 날 산 책을 꺼내며 말했다.

 “‘무희’로군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으로 인해 미야코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지.”

 그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미야코라면……, 봉순이 말인가요?”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군. 그 애도 조선 출신이라고 했으니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애가 우리 집에서 일합니다.”

 “하녀……란 말인가?”

 할아버지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도 조선에 신분제도가 남아 있는지 몰랐군.”

 할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물론 법으론 그렇지 않습니다만, 대부분은 주인이 놔 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거의 붙잡혀 있는 거죠. 풀어준다 해도 손에 들어온 자유를 쓸 줄 모르고 명령을 받고 실행하는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종종 있고요.”

 “그렇겠지. 시대가 빠르게 변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야.”

 할아버지의 시선이 책 쪽으로 갔다. 책이 펴진 채 무영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도저히 책을 읽을 기분이 아닌가 보군.”

 “네.”

 무영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야기나 하세.”

 무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아버지께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여러분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다케유시가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음식과 술은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다케유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손이 음식과 술로 갔다.

 “후지와라 경관님, 제가 한 잔 따라 드리지요.”

 다케유시는 경관의 잔에다 술을 따라 주었다. 경관은 술을 쭈욱 들이켰다.

 “도련님, 술과 음식에는 역시 기생이라며 주인님께서…….”

 하인이 다케유시의 귀에 속삭였다.

 “기생을 보낸다고? 여기에?”

 “네. 돈을 많이 지불하셨답니다.”

 다케유시는 수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인이 문 밖으로 나가 기생들을 데리고 왔다.

 “오늘 밤은 미친 듯이 놀아 보자꾸나!”

 거의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외쳤다.

 그 뒤로 몇 십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취하거나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께선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요?”

 기생 하나가 다케유시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친구, 현재, 그리고 미래다.”

 다케유시가 술을 다 마시고 술잔을 턱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입가를 손으로 쓰윽 훑었다.

 ‘무영아, 부디 성공해라. 꼭 조선으로 가야한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상황에서도 다케유시는 몇 번이고 그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25

 

 “잘 가거라.”

 할아버지가 봉순이와 무영의 손을 꼭 잡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잘 지내세요, 할아버지.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했어요.”

 무영과 봉순이 번갈아 인사했다.

 “……어서 가거라. 배가 곧 출발하겠다.”

 “안녕히 계세요.”

 할아버지의 재촉에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배에 올라탔다. 곧, 배가 출발했고, 도쿄항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졌다.

 무영은 배의 갑판에 서서 점점 작아질 때까지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처음 본 그 날,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 날은 계백과 사이카쿠 국수집에서 만나는 날이었다. 그곳에서 무영은 계백과 그의 친구들을 만났다.

 “무영, 자네에게 소개하지. 내 친구들일세. 여긴 최팔용이고, 여기는 이광수. 그리고 여긴 서춘이고, 이 사람은 김도연, 그리고 백관수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영이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지만, 무영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미안하네. 자네가 용서해 주게나. 하지만 내 말을 들으면 자네도 이해가 갈 걸세.”

 계백이 무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시키신 국수 나왔습니다.”

 그 때, 사이카쿠 할아버지가 국수를 들고 나왔다. 무영은 그의 얼굴을 보고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었다.

 “우린 좀 있다 먹을게.”

 계백이 다른 친구들에게 눈짓을 하고 무영을 데리고 나왔다.

 “말해 보게.”

 무영은 가게를 나오자마자 계백을 재촉했다.

 “사실 난 조선청년독립단에 들어가 있는데, 몇몇 사람만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 그런데 자네에게 알리면 혹시라도 새어 나갈까 싶어 동지들이 경계하는 것뿐이네.”

 계백이 소곤소곤 말하였다.

 “자네……이거 지킬 테지?”

 계백이 다짐 받듯 물었다.

 “물론. 걱정 말게나.”

 무영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제대로 확인 받고자 한 것뿐이니까. 동지들도 자네에게 경계를 풀 걸세.”

 계백이 무영을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무영과 어깨동무를 하고 국수집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이제 조선으로 가는 거죠?”

 봉순이 흥분된 목소리로 그에게 다짐을 받으려는 듯 물었다.

 “그래.”

 무영이 슬며시 웃었다. 그 전에는 고향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따뜻해지는지 몰랐다.

 “……도련님, 제가 생각해 본 건데요……, 도련님의 현재 성함으론 다니실 수 없을 것 같아요.”

 작은 봉순의 말에 무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걸 어떻게 잊고 있을 수가 있었을까? 그는 무영이란 이름으로 다닐 수 없었다. 조선에서 그가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제가 한 번 생각해 봤는데요…….”

 봉순이 무영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무진이란 성함으로 다니시는 게 어떠실지…….”

 봉순의 목소리가 점점 자신 없어졌다.

 “박……무진이라. 뜻은 어찌 되느냐?”

 “‘없을 무’에 ‘끊어질 진’ 자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봉순은 무영의 물음에 재빨리 대답했다.

 “좋구나.”

 무영의 말에 봉순의 얼굴이 환해졌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오누이로 지내야겠구나. 물론 말을 놓아야겠지.”

 “제가 어찌 그렇게 하겠습니까?”

 봉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해라. 조선에 가거든 모든 종들을 풀어줄 생각이니.”

 “예?!”

 무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봉순을 보았다.

 “갑오개혁 이후로 신분 차별이 없어졌지 않느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풀어줄 것이다.”

 무영은 단호하게 말하고 앞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도련님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봉순의 말에 무영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모시고 싶습니다. 도련님께서 절 풀어주시거든 전 학교 선생이 될 겁니다. 도련님도 같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았다.”

 봉순의 말에 한참 고민하다 무영이 말했다.

 “앞으론 넌 박수정이란 이름으로 다니거라. ‘편안할 수’에 ‘기 정’자다. 그리고 날 오라버니라고 불러라.”

 “예, 도련……아니, 오라버니.”

 봉순은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그래.”

 무영이 만족한 듯 웃고는 선실로 들어갔다.

 ‘형무소만 탈출하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미래가 어둡구나.’

 무영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26

 

 “광주에서 오셨다고요?”

 “네.”

 교장의 물음에 봉순이 대답했다. 교장은 추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좋습니다. 내일부터 나오시지요.”

 교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봉순과 무영은 방을 나왔다.

 “잘 됐죠, 오라버니?”

 그녀는 ‘오라버니’라는 말이 완전히 입에 붙어버렸는지 여전히 그를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그렇구나.”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학교 이름이 적힌 문패를 보았다.

 “……양정고등보통학교.”

 무영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광주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서, 서방님, 벌써 풀려 나셨습니까?”

 인홍이 버선발로 뛰어나온 것을 보아 적잖이 놀랐음을 무영은 짐작할 수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을 터이니, 어서 들어가 쉬시지요.”

 연이가 무영을 깍듯이 맞이하며 말했다.

 “아니, 그러기 전에 할 말이 있느니라. 이 집안의 모든 종들을 불러 모으거라.”

 “네? 일손을 멈추고 말입니까?”

 연이가 물었다가, 무영의 눈빛을 보고는 얼른 모두를 부르러 갔다.

 “오시자마자 무엇을 하시려고?”

 인홍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는 종들의 수를 세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다 모였구나.”

 무영이 중얼거렸다.

 “너희들을 이리 부른 것은 너희들을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내 생각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미 갑오개혁 이후부터 법적으로 신분 차별이 없어졌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나와 내 조상님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너희를 풀어주려 한다. 내일 안으로 모두 이 집을 떠나도록 하여라.”

 무영은 모든 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저희를 쫓아내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저흰 지금까지 명령 받은 것만 행했습니다. 헌데, 이제 와서 알아서 하라고 하시면 어찌 합니까?”

 종들이 목소리를 높여가며 외쳤다.

 “그렇습니다, 서방님. 이리 갑작스럽게 떠나라 하시면 저들은 어찌합니까? 조금만 더 저와 서방님, 그리고 저들을 생각해 주세요.”

 인홍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선택은 너희가 하거라. 구차하게 다른 집에 들어가서 상전의 명령만 받들고 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며, 자유롭게 살 것인지.”

 무영의 말이 끝나고,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너희가 방금 화가 나고 소리 지른 것도 누구에게 명령 받고 한 것이냐? 방금 한 말들이 너희들의 진심에서 나온 말들이 아니더냐. 너희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방금 너희들의 행동에서 난 너희들의 미래를 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겠지만, 난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오늘, 내일 이틀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해라.”

 무영은 뒤돌아 사랑방으로 걸어갔다. 종들은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방님,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저들 없이 저희가 어찌 산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예?”

 인홍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부인은 부인의 친정에 가시오. 나는 곧 떠나겠소.”

 무영의 말에 인홍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그 말대로요.”

 무영이 인홍의 물음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죄를 짓진 않았으나, 잡히면 어찌 될지 모르오. 언젠가 그들도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이니. 그러니 집을 팔고 떠나는 수밖에. 부인이 나와 같이 있으면 위험할 테니 하는 말이오. 내일 떠날 것이니, 부인도 내일 친정으로 가도록 하오.”

 무영의 말에 인홍은 몸을 떨었다.

 “……알았어요.”

 인홍은 한참 후에 겨우 입을 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서서 사랑방을 나갔다. 나가는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 집이군요.”

 봉순이 무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오라버니 방으로 하고, 이 방은 제 방으로 하면 되겠어요.”

 “그래.”

 무영은 동의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럼 제가 식사 준비할게요.”

 봉순이 피곤한 눈을 비비며 말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밥을 짓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식사 준비 됐어요.”

 식사를 다 준비한 봉순이 무영의 방문을 열었다.

 “어? 주무시네.”

 무영은 베개도 배지 않고,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봉순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무영의 머리 아래 베개를 받혀 주고, 이불을 덮어 주고 나서 무영의 방을 나왔다.

 

27

 

 “새 선생님이 오셨대.”

 “일본에 유학까지 갔다 오셨다지?”

 “곧 시작할 조선어 수업에 그 선생님께서 오신대.”

 아이들은 모여서 수군거렸다.

 “야, 선생님 오신다!”

 아이들은 얼른 제자리에 앉았다. 곧 문이 열리고, 무영이 들어왔다.

 “차렷, 열중 쉬엇,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세요.”

 반장의 구령에 맞춰 아이들이 인사했다. 무영은 고개를 까닥여 인사에 답했다.

 “오늘부터 너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게 된 박무진이라고 한다.”

 무영이 칠판에 크게 ‘박무진’이라고 썼다.

 “내 소개는 이쯤이면 됐으니 이제 수업 시작하자.”

 무영의 말에 아이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은 어떤 걸 배울 차례지?”

 그는 아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물었다.

 “……공무도하가를 배울 차례입니다.”

 반장이 씩씩하게 말했다.

 “좋다.”

 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폈다.

 “공무도하가는 고조선 때에 진졸 관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노래로서, 한국 문학사상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확실한 제작 연도와 원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대신 이 노래의 한역가인 듯한 4구로 된 한문 표기의 짧은 노래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무영이 공무도하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고서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이 그예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임이여, 이 일을 어찌 할꼬.”

 무영은 시를 읊고 나서 칠판에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柰公河’라고 썼다.

 “선생님, 지금은 한자 수업 시간이 아닌데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안다. 이걸 읽을 수 있는 사람 있느냐?”

 무영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러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무영이 그 중 한 아이를 지목했다.

 “너, 이름이 무어냐?”

 “이상헌입니다.”

 그 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상헌이 네가 읽어 보아라.”

 무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헌이 칠판에 쓰인 한자를 읽기 시작했다.

 “공무도하 공경도하 타하이사 당내공하”

 상헌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교실 안에 퍼졌다.

 “잘 읽었다.”

 무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읽은 그 한자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겠더냐?”

 “예. 해석해 보니 선생님께서 읽어주신 공무도하가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상헌이의 말에 무영은 매우 흡족해 했다.

 “한자 선생님께서 너희를 잘 가르치셨구나.”

 무영이 그 말을 했을 때 수업 시간이 끝났다.

 “와, 수업 끝이다!”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무영은 곧 교실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학교가 끝나고, 교장 선생님이 무영을 불러 세웠다.

 “박 선생, 수업은 어떻던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영은 매우 만족했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미안하네. 자네에게 국어 수업을 맡기려 했는데 조선어 선생 자리가 비어서 말일세. 그리고 자수 선생 자리가 비어서 박수정 선생은 자수를 맡게 되었네.”

 “잘 되었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영이 교장에게 인사를 하고 학교를 나갔다.

 “벌써 가나?”

 교장이 무영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지만 무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우리글을 조선어라 칭하고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다니……!’

 무영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분노가 그를 휘감아 쉬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술 하나 주시오.”

 무영은 술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안에 들어갔다.

 술이 금방 나왔고, 그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을 몇 병이고 더 시켜 계속 마셨지만 정신은 말짱하기만 했다. 분노를 잊으려고 했건만,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무영의 손에 힘이 들어가 술잔이 깨져버렸다.

 “손님!”

 무영은 돈을 탁 내려놓고 술집을 나섰다. 그날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28

 

 “차렷, 열중 쉬엇,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세요!”

 반장의 구령에 맞춰 인사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무척 밝았다. 아이들은 학교에 온 지 몇 주일 밖에 되지 않은 무영을 잘 따랐고, 그의 수업을 고대했다.

 “그래. 오늘은 황조가 배울 차례이지?”

 “네!”

 아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퍼졌다.

 “황조가는 유리왕이 지은 시조란다. 황조가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의 정치적 세력 다툼의 상황이 깔려 있어. 왕권을 강화시키려다 좌절한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무영의 설명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내용은요?”

 아이들이 궁금한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잠깐만 기다려라. 설명 아직 다 안 끝났단다.”

 무영이 웃으며 말했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가 죽자 화희와 치희 두 여인을 계실로 맞았는데, 이들은 늘 서로 경쟁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유리왕이 기산이라는 곳에 사냥을 가 궁궐을 비운 틈에 화희가 치희를 모욕하여 한나라로 쫓아 버렸어. 유리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뒤를 쫓아갔으나, 화가 난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단다. 유리왕이 혼자 돌아오던 차에 꾀꼬리 한 쌍을 보고 이 시조를 지었지.”

 무영이 황조가가 지어진 자세한 내용을 설명했다. 그리고는 시조를 읊기 시작했다.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정답게 노니는데,

외로울사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무영은 공무도하가 수업 때 그랬던 것처럼 칠판에 한자로 시조를 썼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라고.

 “편편황조 자웅상의 염아지독 수기여귀”

 아이들은 무영이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칠판의 한자를 읽었다. 무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무랄 데가 없군.”

 무영은 중얼거리곤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 배운 것 집에서 복습해 오도록. 그럼 수업 끝이다.”

 “차렷, 열중 쉬엇,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히 가세요.”

 아이들이 인사를 했다. 그들의 얼굴엔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무영은 아이들이 열심히 배우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그가 교실을 나설 때, 다른 반 수업이 딱 끝났다.

 

 “오라버니, 오늘 수업은 어땠어요?”

 봉순이 무영을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좋았어. 선생님 되길 잘 했다고 생각해.”

 그 말을 하는 무영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도요.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면 참 기분이 좋거든요.”

 “그래.” 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실 전 남쪽으로 가고 싶었어요.”

 봉순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냥 야간 학교에서 애들 가르칠까, 그런 생각 했다는 거예요.”

 봉순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왜 경성부로 왔어? 남쪽으로 갔어도 됐을 텐데.”

 무영은 ‘같이’라는 말을 쏘옥 뺐다.

 “오라버니껜 경성부가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무영은 그녀가 경성부가 숨어 지내기에 좋고, 들켰을 때 도망치기에도 쉬울 것이라는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무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순도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교무실까지 갔다.

 

29

 

 “오늘은 찬기파랑가에 대해 배울 거란다.”

 무영이 책을 펴며 말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라의 향가이지요?”

 한 아이가 물었다. 무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니 성철이었다.

 “그래. 충담사라는 스님께서 지으셨지.”

 무영은 한동안 놀라 대답하지 않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미리 공부하고 왔니?”

 성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약간요.”

 무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언제 놀랐냐는 듯이 침착하게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아까 성철이가 말했던 것처럼 찬기파랑가는 신라의 향가이며, 충담사께서 지으셨지. 삼국유사에서 가사와 그에 관련된 실화를 찾아 볼 수 있단다.”

 무영이 잠깐 말을 멈추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구름 속에 나타난 달과 하늘에서 기파랑의 순결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지으신 향가이다. 찬기파랑가에선 기파랑의 이상과 절조를 찬미하고 있지. 삼국유사에 실린 실화로는 경덕왕과 충담사의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단다. 경덕왕께서 그에게 찬미파랑가의 뜻이 매우 깊다하던데 과연 그러한가, 라고 묻자 충담사께서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내용이란다.”

 무영은 말을 끝마치고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럼 찬기파랑가의 내용을 들려주마.”

 무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시를 읊었다.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 있어라

 

그 맑은 냇물 속 조약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 끝을 따르고 싶어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랑이시여”

 무영이 시 읊는 것을 끝내고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바라봤는데, 아이들이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왜, 왜들 그러느냐?”

 무영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멋져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던 아이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무영은 그들의 대답에 매우 기뻐했다.

 “너희들이 시를 보는 눈이 생겼구나.”

 “감동 받았어요.”

 “어떻게 저렇게 멋진 시를 지을 수 있는 거죠?”

 아이들이 무영을 향해 물었다.

 “글쎄다. 그만큼 훌륭하신 분이셨겠지. 그런 조상님들을 둔 데에 자랑스러워해야 할 게다.”

 무영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네!”

 아이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무영이 조선어 교과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조선어라는 글자에 꽂혔다.

 ‘조선어…….’

 그는 글자를 손으로 만졌다. 곧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생각을 털어버리고 교실을 나섰다.

 

 “선생님!”

 몇몇 아이들이 무영을 향해 뛰어 왔다.

 “복도에서 뛰면 안 돼.”

 무영은 그 아이들에게 나무라듯이 말하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선 나무라는 말투가 아닌 부드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죄송해요. 근데 다음 시간엔 뭐 배울 건가요?”

 “모죽지랑가 배울 건데. 왜 그러니?”

 무영이 아이들의 질문에 웃으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들 중 한 명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장한이었다.

 “미리 공부해 오려고?” “사실은……예, 그래요.”

  아이들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모죽지랑가는 오늘 배운 찬기파랑가와 비교하며 보는 게 좋을 거야. 수업 시간에도 그렇게 할 생각이거든.”

 무영의 말에 아이들은 궁금증이 일었나 보다.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둘 다 누군가를 찬미하는 시이지. 그 찬미하는 사람이 화랑인 것도 같고. 게다가 신라의 향가라는 것도 같단다.”

 그들은 무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장한이 무영을 향해 인사하며 말했다.

 “그래. 열심히 하거라.”

 그들은 얼른 교실을 향해 뛰어갔다.

 “뛰지 말래도!”

 “네!”

 아이들이 달리기하는 것을 멈추고 걸었다.

 무영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이미 자신이 무영이 아닌 무진으로 지내는 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무영으로 지내는 것보다 무진으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무진은 쫓기지 않았다. 무영이 쫓길 뿐이었다.

 ‘그만 하자.’

 무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생각을 탈탈 털어버렸다.

 “잠시 동안 이렇게 지내는 것뿐이야. 언젠간 돌아가야 해.”

 무영은 다짐하듯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30

 

 어느 덧 10년이 흘러 1929년이 되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무영의 손을 거쳐 학교를 졸업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를 좋아했으며, 그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어느 토요일이었다. 봉순이 그의 방을 찾아갔다. 봉순은 평소 때와는 달리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너무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무언가 심각한 일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무슨 일이냐?”

 무영이 침착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으로 뒤엉켜 있었다.

 “……삼촌께 편지 하였습니다.”

 하마터면 그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게 그렇게 심각하게 대화해야 하는 거냐?’

 라고 물으면서. 하지만 그는 웃을 수 없었다. 봉순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로?”

 “그 전에 삼촌들께서 간도로 가셨다고 오라버니께 말씀 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봉순의 말에 그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도련님, 쇤네의 삼촌께서 간도로 가신답니다. 혹여 간도에 가시려거든 도움을 청하시라 하시며…….” 

 “왜 간도로 가신다더냐?”

 봉순의 말에 무영이 물었다.

 “여기서 활동하시기가 힘드시다 하더이다. 해서 간도에 넘어가 독립 운동을 하시겠다고…….”

 “그렇구나.”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거라. 허나, 내가 그분들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겠느냐? 마음만은 고맙구나.”

 무영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도련님,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훗날 삼촌들의 도움이 필요하실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쇤네는 삼촌들의 도움을 거절하지는 않겠나이다. 감사하다는 도련님의 말씀만 전해 드리겠습니다.”

 봉순은 고개를 저으며 무영에게 조언했다.

 “……알았다. 그만 나가 봐라.”

 무영의 말에 봉순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사랑방을 나섰다.

 

 “그분들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냐?”

 무영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요, 오라버니. 그 쪽에서 건너오라고 하셨어요.”

 “뭐?!”

 무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도대체 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고 편지했는데도 불안하신지 계속 건너오라고 하세요.”

 봉순의 말에 무영은 불현 듯 화가 치밀었다.

 “왜 나한테 알리지 않은 것이냐?”

 “죄송해요, 오라버니.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서…….”

 봉순이 고개를 푹 숙이며 무영에게 사죄했다.

 “되었다. 다음부턴 사사로운 일이여도 내게 알려라.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네…….”

 봉순은 그가 자신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기뻤다.

 “그래서, 간도로 떠날 거란 말이냐?”

 무영이 상황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확인을 받으려 했다.

 “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말이냐?”

 “되도록 빨리요. 준비만 다 되면 출발할 거예요.”

 봉순의 대답에 무영은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언제든지 곧 떠날 것이다. 그 사실이 무영을 슬프게 했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물건 정리도 끝나고, 마음 정리도 끝나면 떠날 거란 말이에요.”

 봉순이 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덧붙였다.

 “그래…….”

 무영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조심스레 일어나서 슬쩍 방을 나갔다. 무영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곧 떠나야 한다…….’

 마음이 욱신거렸다. 10년 동안 너무나 정이 들었다. 봉순이도, 학교도, 학생들도, 경성부도. 과연 경성부에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갈 수 있을까? 봉순이는 물론 그와 함께 갈 테지만 너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그는 과연 간도에서의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무영은 이 모든 것들을 곱씹어 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영은 벽에 기대 생각을 쫓아내려고 했고, 곧 그는 잠이 들었다.

 

31

 

 이틀이 지났다. 무영은 이틀 동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지냈다. 봉순은 자기 짐을 싸고 삼촌에게 편지를 쓰는 등 분주했다. 그녀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그런 봉순이 걱정이 되어 무영은 그녀를 불러 앉혔다.

 “수정아, 요즘 가만히 있질 못하는 것 같다. 먼지 터는 일처럼 사소한 일도 매일하고, 먼지 하나라도 보이면 또 털고. 보는 내가 다 불안하구나. 그만 가만히 앉아 있어 봐라.”

 무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봉순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집중할 게 필요해요.”

 봉순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는 그 순간 알아차렸다. 씩씩하고 명랑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그녀도 사실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봉순도 마음을 정리하는 게 힘든 것이었다. 무영은 모든 걸 이해하기에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봉순은 방을 나가 버렸다.

 

 “아니, 뭐라고 하셨습니까, 박 선생?”

 교장이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여기 사직서입니다. 저 가르치는 일 그만두려구요.”

 봉순이 교장에게 사직서를 내밀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도 박 선생을 좋아하고, 선생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교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랬죠.”

 봉순은 굳어진 얼굴로 답했다. 그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좀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떻소?”

 봉순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봉순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교장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자네, 그 말 들었나?”

 한자 선생이 무영에게 물었다.

 “당연히 들었겠지요. 아니, 알았겠지요. 오라버니가 누이 소식을 몰라서야 되나요.”

 산수 선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정이가 어쨌다는 겁니까?”

 “자네 누이가 사직서를 냈다더라.”

 수신 선생이 무영의 물음에 답했다.

 “소문을 무조건 믿어선 안 돼.”

 한자 선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사실일지도 모르잖아요? 오늘 박수정 선생은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다구요. 자수 수업이 오늘 진행도 되지 못했어요.”

 산수 선생이 한자 선생의 말에 반박했다.

 “아플지도 모르잖나!”

 한자 선생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누이 일은 어떻게 된 건가?”

 수신 선생이 무영에게 속삭였다. 무영은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 가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수신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곤 싸움을 말리러 갔다.

 “지금 현재 정확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이런 싸움은 그만 두게나.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을 건 없지 않은가.”

‘결국엔……저지른 건가…….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생각의 잠긴 무영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32

 

 “선생도 가시렵니까?”

 교장이 교장실로 찾아온 무영에게 물었다.

 “예. 말리지 말아 주십시오.”

 무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교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

 “……잘 가시오.”

 그 말을 하는 교장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무영은 잠시 후 교장실을 빠져 나왔다.

 

 “……그 말이 사실이더냐?”

 무영은 뜸을 들이다 봉순에게 물었다.

 “네.”

 “어째서……?”

 무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빨리 정리할수록 좋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질질 끌수록 더 가기 싫어질 테니까요.”

 무영은 봉순이 자신에게 조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하라는 것처럼 들리는 구나.”

 봉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마.”

 혼란스러워 하며 무영이 말했다. 봉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나가지 않으려고?”

 “나가길 바라세요, 오라버니?”

무영의 질문에 그녀는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

 “……혼자 생각하고 싶다.”

 그의 말에 봉순은 천천히 일어서서 방을 나섰다. 무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빨리 정리할수록 좋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질질 끌수록 더 가기 싫어질 테니까요.’

 그녀의 말이 무영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과연 그게 옳은 선택인가?’

 

 “오라버니, 서두르세요. 배 출발하겠어요!”

 봉순이 큰 소리로 무영을 불렀다.

 “알았다.”

 무영이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붙잡으며 봉순을 향해 달려갔다. 곧, 그들은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배에 오르자마자 선실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그리고 무영과 봉순은 밖으로 나갔다. 어느 새 배는 육지로부터 많이 멀어져 있었다.

 “또 조국을 떠나야 하는 구나…….”

 말을 하는 무영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렇네요. 하지만 간도에서의 생활도 즐거울 거예요. 힘내세요, 오라버니.”

 봉순이 무영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분이 별로 나아진 것 같진 않았다. 그런 무영의 기분을 돋아주려는 듯 바람이 그를 어루만졌다.

33

 

 “어서 와라!”

 윤길과 윤상이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외쳤다.

 “오랜만이에요, 삼촌.”

 봉순이 삼촌들의 손을 잡으며 활짝 웃었다. 무영은 그 모습을 보고 뒤에서 빙긋 웃었다.

 “오라버니, 안 오시고 뭐하세요?”

 “봉순아, 오라버니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윤상이 깜짝 놀라 봉순과 무영을 번갈아 보았다.

 “설명해드리지 않았니?”

 “그게……10년이나 되니깐 너무 익숙해 져버려서 모르고 계시다는 걸 잊어버렸어요.” 

 봉순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설명을 좀 들어야겠는데…….”

 윤길이 헛기침을 했다.

 “일단 짐 풀고 방에서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무영의 침착한 말에 윤길과 윤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과 봉순은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 봐라.”

 윤길과 윤상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10여 년 전, 일본에 갔다 돌아오면서 오라버니는 무진이라는 이름으로 다니기로 하였고, 저와 오누이처럼 지내기로 했어요. 저는 수정으로 지내기로 했구요. 지금까지도 계속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봉순이 자세히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명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양정보통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조선어’ 수업을 맡았고, 수정인 자수 수업을 맡아 가르쳤죠.”

 무영이 봉순의 말을 넘겨받았다. 그는 ‘조선어’라고 말할 때 이를 뿌득 갈았다. 윤길과 윤상도 무영과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원래의 이름을 쓰지 않고 굳이 바꾼 거지?”

 윤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설명을 안 해드렸네요. 동경에서 오라버니 절친한 친구이신……,”

 “송계백이라고, 아실 것 같습니다만……. 그 친구랑 친하니까 그걸로 꼬투리 잡아서 연루자로 저를 체포했지요.”

 무영이 봉순의 말을 가로챘다. 윤길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그럼……?”

 “……탈출했지요.”

 윤길의 물음에 대답하는 무영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 해도 괴로운 모양이었다.

 “그래……, 피곤할 테니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윤길이 뭔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 삼촌." 봉순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만 가 봐.”

 무영이 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윤상이 말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빠져 나갔다.

 “무영이, 저 애,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겠어.”

 윤상이 윤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래……, 의지만 있다면 말이지.”

 윤길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될 거라고 생각해. 그 애가 국어 선생 했다는 거, 들었지, 형? 조선어라고 말하면서 증오가 느껴졌어. 형도 그렇게 느꼈지, 형, 그렇지?”

 윤상이 침을 튀겨 가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잠깐, 김구 선생이라면……?!”

 윤길의 흑진주 같은 눈이 반짝 빛났다.

 

34

 

 “총재님, 김윤길, 김윤상 형제가 총재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라.”

 김구가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슨 일로 예까지 오셨나? 상해까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말이야.”

 윤길과 윤상이 들어오자 앉으라고 손짓하며 김구가 말했다.

 “그게……, 선생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윤길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보게.”

 “저희가 아는 사람 중에 무영이라고 있는데, 선생께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윤상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그래? 어떤 사람인가?”

 김구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윤길과 윤상 형제는 보았다.

 “무영은 아버지 박무조와 어머니 안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송계백과 친하게 지내서 연루자로 잡혀 갔다가 감방에서 탈출했었거든요. 그렇게 조국으로 돌아와서 무진이라는 이름을 쓰고, 국어 선생으로 지냈었죠. 10년 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저희가 불러서 간도 지방으로 넘어 왔습니다.”

 윤길의 말을 듣는 김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박무조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그 집안은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태어났었지, 아마?”

 “그렇습니다. 그 아이의 작은 아버지인 박무현도 독립 운동가였고, 그의 아내 문혜영과 그의 할아버지인 박현무 어르신께서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 많이 안 좋으셨죠. 그런 가정에서 자랐으니 왜에 대한 감정이 좋진 않았을 겁니다. 거기다가 국어 선생을 하면서 우리 국어가 조선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화가 더해져 더 감정이 악화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길이 헉헉거리며 김구에게 설명을 했다. 김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를 데리고 와 보게나.”

 윤길과 윤상은 김구의 말에 잠깐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다시 김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김구는 그들의 말에 인자하게 미소만 지었다. 윤길과 윤상이 나가자, 그는 백범일지를 기록하는 데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다.

 

 “잘 됐다. 그렇죠, 형?”

 윤상이 윤길을 보며 물었다. 윤길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실히 결정이 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무영과 선생께서 서로 첫 대면 하실 때 확실하게 정해질 게다.”

 “그러겠지. 무영이가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

 윤상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하실 거야. 그렇게 믿어야지. 아 참,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까?”

 윤길의 말에 윤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우리가 간도까지 갔다가 무영일 데리고 다시 오는 게 좋지 않겠어? 그 녀석은 중국 땅을 밟아 본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형. 상해까지 찾아오는 데 길을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까?”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해도……그게 나으려나?”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윤길이 말했다.

 “우리가 좀 고생하겠지만 그 앨 생각하면 그게 낫지 않겠어?”

 “그러자.” 윤길이 동생의 말에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서둘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예엣? 김구 선생이시라고요?”

 무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 얼마 전에 상해에 갔다 오지 않았느냐. 임시정부에 계시는 김구 선생을 만나 뵈러 갔었지. 너를 받아달라고 부탁드렸더니, 너를 직접 만나 보시겠단다.”

 “하지만……왜 굳이 이렇게까지…….”

 무영이 당혹스러워 하며 말했다.

 “지켜보니까 네가 독립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네가 활동하는 데 도움을 주실 게다.”

 윤상의 말에 무영의 당혹감이 더욱 깊어졌다.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독립 운동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적은 없습니다.”

 무영의 말에 윤길의 눈가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알았다. 일단 생각해 봐라. 하지만 네가 미처 몰라서 그렇지, 네 마음속에는 독립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어. 난 느낄 수 있단다. 네가 그 길을 택한다면, 분명 네 아비만큼 훌륭한 일을 해낼 거라고 난 믿는다.”

 윤길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얘야, 우리의 마음을 받아주었으면 좋겠구나. 형님도 네게 기대를 많이 하고 계신 것 같아.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해라.”

 윤상이 무영의 두 손을 꼭 잡아주고는 윤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무영은 두 사람의 기대에 큰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일에 대한 흥분도 느꼈다.

 ‘김구 선생이라…….’

 백범 김구. 그를 떠올리자 또 다른 흥분이 그를 감쌌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래, 그런 분을 만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라고 그는 생각했다.

 ‘네가 그 길을 택한다면, 분명 네 아비만큼 훌륭한 일을 해낼 거라고 난 믿는다.’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과연 그럴까? 그도 아버지 박무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버지, 저도 당신의 뒤를 따르려 합니다. 도와주세요.”

 무영이 작게 읊조렸다. 곧 그의 몸에 따뜻한 기운이 가득 찼다. 고개를 든 무영의 눈동자는 자신이 넘쳤다.

 “할 수 있어.”

 그는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퍼졌다.

 

35

 

 “이 아입니다, 선생님.”

 윤상이 말을 하면서 무영을 앞으로 슬쩍 밀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생님.” 

 무영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김구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길과 윤상 형제는 그의 반응에 슬쩍 웃었다.

 “어떠십니까?”

 윤길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며 물었다.

 “마음에 드는 청년이구려. 참 보는 눈이 좋은 것 같소.”

 “아닙니다.”

 윤길과 윤상은 겸손해 하며 말했다.

 “내 너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

 김구가 무영을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깍듯이 인사했다.

 “임무는 언제……?”

 그가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이 윤상의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그에게 맞는 임무를 주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소. 그리고 지금 글을 쓰고 있어서…….”

 “아, 두 아드님께 쓰시는 글 말이시지요? 알겠습니다.”

 백범일지를 떠올리며 윤길이 말했다.

 “그렇소. 그래서 적당한 임무를 내려줄 때까지 여기서 지냈으면 한데……. 어떻소, 박 동지?”

 무영은 ‘박 동지’라는 김구의 말에 당황스러웠지만 곧 침착하게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무영은 인사를 하고 윤길, 윤상과 함께 방을 나왔다.

 

 “무영아, 임무를 오늘 받지 못해서 섭섭하느냐?”

 윤길의 물음에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기다리기 힘겨울 것은 분명하군요.”

 무영은 몸이 얼른 무언가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윤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큰 걸 주시려는 듯한데……. 많이 걸리지 않을 듯하니, 참고 기다리도록 하려무나.”

 “네.”

 무영은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백범 선생께서 그분의 인생을 기록하시는 중이시라 더욱이 너를 봐주실 시간이 없으실 게다. 아까 들었겠지만 말이다.”

 ‘더욱이 너를 봐주실 시간이 없으실 게다.’

 라는 윤길의 말에 무영은 가슴에 큰 돌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만 돌아가련다. 봉순일 오래 혼자 둘 수 없지 않느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구나. 이곳에서의 생활이 즐거웠으면 좋겠구나. 잘 있거라.”

 윤길은 무영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얹었다. 윤상은 무영을 한 번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벗어나 간도에 있는 집을 향해 말을 몰았다.

 

36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한 것이 어느 새 2여 년이 흘렀다. 무영은 할 일도 없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한 남자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총재님께서 박 동지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그의 말에 낯선 목소리가 답했다.

 “곧 가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무영이 입을 옷을 꺼내며 말했다.

 “총재님께선 지금 당장 모셔 오라 이르셨습니다.”

 그는 의문이 들었다. 김구는 지난 2여 년 동안 거의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지금 당장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흔들어 질문을 떨쳐 내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어서 가지요.”

 무영이 먼저 앞서가며 말했다. 남자는 곧 그의 뒤를 따라갔다.

 

 “총재님…….”

 “들어오라.”

 김구 선생은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무영은 문을 열고 그의 방에 들어갔다. 무영은 그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못 본 지 좀 되었는데도 그는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허헛, 이렇게 부른 게 많이 없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보는 것 같구먼.”

 김구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오랫동안 임무를 주지 않고 있었지, 아마? 내가 올해에 ‘한인애국단’이란 단체를 만들었는데, 자네가 그것에 들어와 주었으면 하네.”

 김구의 말에 무영이 자기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겠습니다.”

 김구는 그의 대답에 매우 흡족하게 웃었다.

 “헌데, 어떤 단체인지요?”

 무영의 물음에 김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왜의 주요인물들을 살해하는 거지.”

 김구의 말에 무영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왜, 싫은가?"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심각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 못해서 그랬습니다.”

 “작은 노력이 큰 것을 이룰 힘이 될 수 있어.”

 무영의 말에 김구는 힘주어 말했다. 그는 김구가 하나하나 작은 단체들의 노력이 독립을 이룰 때의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해석했다.

 “그 작은 노력에 제가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네.”

 김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무영의 앞으로 내밀었다. 무영은 그 종이를 집어 들며 물었다.

 “이게 무슨……?”

 종이에는 이름 두 개가 적혀 있었다. 이덕주, 유진만.

 “자네와 거사를 함께하게 될 이름들일세. 기억해 두게나.”

 김구의 말을 들으며 무영은 이름들을 머릿속에 꼭꼭 새겼다. 이덕주와 유진만. 이덕주와 유진만.

 “……더 이상 용건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무영의 말에 김구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무영은 곧 그 방을 벗어났다. 그의 가슴 한 편에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37

 

 1년 후, 2월의 끝자락이었다. 무영은 이덕주와 유진만과 처음 만남을 가졌다. 김구 선생께서 임무를 주시겠다고 하신 날이었다.

 “이덕주라고 하오. 당신은?” 

 “저는 박무영이라고 합니다.”

 “저는 유진만입니다. 잘 해 봅시다.”

 그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악수를 했다.

 “흠흠!!”

 김구가 헛기침을 해서 그들의 시선을 불러 모았다.

 “임무를 주겠다.”

 그의 말에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우가키 가즈시게를 살해해라.”

 덕주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놈들이 조선총독부라고 부르는 곳에 가야겠군요.”

 “그래.”

 김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곧 국내에 잠입하게 될 것이다.”

 “꼭 성공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영이 굳은 결심을 하며 말했다.

 “그러길 빈다.”

 김구는 자리를 일어났다. 그는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무영은 그렇게 김구 선생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이 이봉창 의사의 폭탄 투여 사건 때문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김구가 나가고 몇 분을 앉아 있던 이덕주와 유진만, 그리고 무영도 곧 밖으로 나갔다.

 

 “에취~!”

무영이 기침을 했다. 그러자 이덕주와 유진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고뿔에 걸리셨나 보구려.” 

 “그런 가 봅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난 지 좀 되었습니다.”

 유진만의 말에 무영이 대답했다.

 “저런. 몸 조심하셔야지요.”

 이덕주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무영은 그의 말에 그저 웃기만 했다.

 “박 동지가 추운 듯하니, 일단 저희 집으로 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유진만이 그들에게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오.”

 이덕주가 박수를 짝 쳤다.

 “그럼, 제가 모시지요. 어서 따라 오십시오.”

 유진만이 앞서 가며 말했다. 이덕주와 무영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이 날 배를 타고 귀국해서, 총독부에 잠입하게 될 건데……. 다 같이 움직이면 들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진만의 말에 이덕주와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리고 들켰을 때 모두 잡히니까 완전히 실패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따로따로 움직이는 게…….”

 무영과 이덕주가 유진만의 설명을 이었다. 유진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효과적이지요. 하루하루 돌아가면서 보는 게 어떨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요.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무영이 유진만의 말에 동감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을 물었다.

 “일단 제가 먼저 가지요. 그 다음은 이 선생이 가시고, 또 그 다음날은 박 선생이 맡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합시다.”

 이덕주가 결론을 내렸고, 무영과 유진만도 찬성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덕주가 겉옷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리고는 그는 일어나서 유진만에게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저도 그럼……. 다음에 또 만나도록 하지요.”

 무영도 일어나며 말했다.

 “아마 그 날이 되지 싶습니다.”

 “귀국하는 날 말이지요?”

 무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유진만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38

 

 “무사하길 빌겠네.”

  3월 초였다. 이덕주와 유진만, 그리고 무영은 배를 타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가슴에 열정과 김구가 해준 여러 가지 힘이 되어 주는 말을 품은 채.

 그들은 집을 한 채 구해서 같이 생활하기로 정했다. 첫 날, 계획대로 이덕주가 총독부 안을 정찰하러 갔다. 무영은 그가 실패할까봐 매우 불안하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곧 그런 불안은 사라졌다.

 

 “아니, 자네 무영이 아닌가?”

 어느 날, 무영이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퍼뜩 자신이 일본에 갔다 와서는 무진이라는 이름을 썼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한데, 누군가 그의 본명을 알고 있었다. 무영은 불안해져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왜 그러시나? 날세, 나. 이정수 말일세. 그새 잊어버린 겐가?”

 그의 말에 무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정말로 정수가 서 있었다.

 “어떻게 자넬 잊어버리겠나. 정말 오랜만이네, 그려. 한데, 자넨 변한 게 별로 없구먼.”

 무영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정수는 그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런데 자넨 많이 바뀌었구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야위었소. 그리고 안색이 창백하기까지……. 게다가 최근에 자네 집에 갔는데 그 집엔 자네가 없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더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정수가 침을 튀겨가면서 물었다. 무영은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놔도 될지 망설여졌다.

 “애들 가르친다고 학교 근처에 집 사놓고 거기서 살았지.”

 “그래? 지금도 하고 있는가?”

 정수의 질문에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아니. 그만 두었네.”

 “그래?”

 무영의 말에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럼 총독부에 들어오는 건 어떤가?”

 그의 말에 무영은 깜짝 놀랐다.

 “총독부?!”

 “자네만 괜찮다면야 나야 대환영이지. 물론 일본 관리들에게 환영 받진 못할 테지만…….”

 정수는 그의 반응에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한다면 통역관으로 추천해주지.”

 정수는 그를 설득하고자 했지만 무영은 그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조금만 시간을 주게나. 되도록 빨리 결정을 내리겠네.”

 “그럼 사흘 뒤에 저 술집에서 만나세.”

 정수는 근처의 술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뭐라고 했는가, 지금?”

 이덕주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의 입이 떡 벌어져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내 친구가 총독부에 있는데, 오늘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총독부에 들어온다면 통역관 자리에 추천해 준다고 했는데,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총독부에 들어가면 총독을 살해하기 더욱 쉽겠군.” 

 유진만이 말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진정 자네를 위해 그 자리를 추천해 준 것인지 어떻게 아나? 오히려 우리에게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네.”

 이덕주의 말에 무영은 그것에도 동의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저도 그런 가능성은 두고 있습니다.”

 “혹여 총독부에 있으면 바빠지지 않을까. 살해하기는커녕 계획 세울 시간도 없을지도 모르잖나.”

 무영은 이덕주의 말이 옳았음을 알았다.

 사실상 총독부에 들어가면 살해하더라고 의심 받을 가능성이 적고, 굳이 몰래 정찰할 필요도, 정찰하지 않으면 들킬 이유도 없어 훨씬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총독부에 들어가면 일에 발이 묶이게 될 것이고, 계획을 세우기 위해 이야기를 할 시간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그 시간부터 이 일이 안전하지 않다는 일임을 알고 있었고, 죽거나 감옥에 갇힐 일쯤은 각오했었다. 조금 더 안전하겠다고, 죽거나 감옥에 갇히지 않겠다고 총독부에 들어갈 바에야 총독을 살해하고 당당하게 죽는 것이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의 목표는 총독을 살해하는 것이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렸다. 총독부의 관리로는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다. 총독부에는 조선의 국민으로서 사랑하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들어갈 것이다.

 “이 동지 말씀이 맞습니다. 친구에게 그 제안은 거절하겠다고 말하겠습니다.”

 무영은 벌떡 일어서서 이덕주의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39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특별히 무영과 이덕주, 그리고 유진만 모두가 총독부를 정찰하는 날이었다.

 ‘조심해야 해.’

 그는 숨은 채로 자신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즈음, 무영은 여느 때보다 기침을 많이 했다. 가끔 기침과 함께 피도 나오기도 했다. 그는 병원에 가야 했지만, 한가하게 병원이나 갈 여유가 없었다. 특히 이런 위험한 일을 행하는 중에는 더욱 더. 그는 몸을 낮추고 총독의 사무실을 눈으로 찾기 시작했다.

 ‘먼저 갈게.’

 총독의 사무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이 없자, 무영이 이덕주에게 속삭였다. 그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내가 잡히거든 그냥 도망가. 그리고 다른 기회를 잡아야 해.’

 무영이 여러 번 한 충고를 다시 반복했다. 이덕주와 유진만은 너무나 잘 안다는 표정이었다.

 곧, 무영은 발소리를 죽여 총독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누, 누구냐?”

 누군가 사무실 안에 있었다. 그는 일본어로 말했다. 무영은 그를 안심시키기는 게 낫다는 생각에 당장은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송구합니다만, 총독 각하 계십니까?”

 “아니네만. 뵈러 왔다가 계시지 아니하여 나도 막 나가려고 하는 중이었다네.”

 무영의 능숙한 일본어 실력에 그 남자는 안심하며 말했다.

 “그러면, 총독 각하를 언제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회의에 가 계시다고 하니, 한 2시간 즈음은 있어야 할 걸세.”

 그 남자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무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만 나가지.”

 그 남자는 먼저 총독의 사무실을 나서며 말했다. 무영은 총독의 사무실에서 그를 죽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여겼다. 만약 그의 방에서 살인이 일어난다면 총독을 노리는 것이라는 게 들통 날 가능성이 많았다. 여러 가능성을 따져보며 무영은 조용히 그를 따라 나섰다.

 어느 사무실 앞에서 그는 멈춰 섰다. 무영은 그곳이 그의 사무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방을 혼자 쓰십니까?”

 “그런 건 아닐세. 총독부 사람은 아닌 것 같군.”

 무영의 물음에 그 남자가 대답했다.

 “예, 도쿄에서 출발해서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했고, 무영은 그 남자를 어떻게든 붙잡아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안에는 대일본제국의 사람들만 있겠지요?”

 무영은 조선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처럼 말했다.

“하핫, 그렇지. 우리도 조센징들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네. 조센징들은 여기 별로 없어. 게다가 거의 낮은 위치의 사무직을 맡고 있지. 혹여 조금 높은 위치에 있더라고 발언권이 별로 없다네.”

 무영의 그의 말을 들으면서 화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써 화를 눌렀다.

 “자, 어서 들어가세.”

 무영은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총을 몰래 꺼내 들었다.

 ‘이런, 폭탄을 미처 준비 못 했군.’

 그러나 총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고 무영은 자신을 위로하며 자신을 인도한 남자를 쏘았다.

 “윽!”

 그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무영이 독립을 외쳤고, 그가 대한독립을 외칠 때마다 일본인이 하나 둘 죽어나갔다.

 “잡아라!”

 헌병들이 총소리와 무영의 외침을 듣고 달려왔고, 무영은 그들에게 잡혔다.

 “지독한 조센징.”

 “총독부 안에까지 들어오다니…….”

 “죽일 놈들.”

 다들 무영을 향해 한 마디씩 던졌고, 어떤 일본인은 그에게 침을 뱉기도 했다.

 며칠 후,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인들을 살해한 무영은 해주지방법원으로 보내졌다.

 

40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대일본제국의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한 것이 사실인가?”

 “일본인들을 살해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무고하진 않다.”

 무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재판장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나머지는 무시했다.

 “자네는 이번에 일본인을 여러 명 살해했군. 그리고……어디 보자, 그 동경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에도 개입되어 있고……,”

 “나는 독립선언에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무영은 재판장의 말을 바로 고쳐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재판장은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판결하겠다.”

 그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대일본제국의 무고한 백성들을 아무런 동기도 없이 살해한 죄는 매우 크므로, 감방에 가둬 두었다가 사형에 처한다.”

 무영은 이미 예상을 했었지만 사형이라는 말에 살짝 떨었다. 곧 그는 경찰들에게 붙들려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영은 오랜 시간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사형 집행 기간까지 남은 시간은 많아 봤자 6개월.

 무영은 죽음이나 감옥에서 지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영은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죽음이 두려웠다. 6개월이라는 세월이 하루만치나 짧게 느껴졌다.

 그는 며칠씩이나 밥에 손을 대지도 못했고, 물만 겨우 들이켰다.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의미 있게 살아야 해.’

 어느 날, 무영은 문득 깨달았다. 그 뒤로 그는 매일 꼬박꼬박 밥 먹고 물도 마셨다.

 

 4월의 끝자락에, 어떤 이가 옆 사람에게 말했다.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조선총독부에 정탐하러 갔다가 들킨 사람들이 잡혀 왔다더라.”

 “그래?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도, 총독까진 아니어도 왜놈들 꽤 죽인 사람이 여기 있잖아.”

 무영은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렇긴 그렇군.”

 사람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지와 유 동지마저…….’

 무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겨우내 붙잡고 있던 희망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그들이라도 성공하길 바라며 여길 왔는데…….’

 무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 같았다. 더 이상 기대할 곳이 없다. 과연 이 나라의 독립이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하늘은 우리를 도와 총독을 살해하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무영은 그 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41

 

 “얘야, 봉순아.”

 윤상이 부엌에서 그릇을 씻고 있는 봉순을 불렀다.

 “예, 삼촌.”

 봉순은 치마에 손을 닦으며 그에게 달려 갔다.

 “이 편지를 우정국에 갖다 주고 오너라.”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인가요?”

 봉순은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무영이다.”

 편지를 받아 드는 봉순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윤상은 그녀가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진 않았다.

 “하던 일은 놔두고 갔다 와. 중요한 거니까.”

 “……네.”

 조금 있다 봉순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편지를 손에 쥐고 우정국으로 뛰어갔다.

 

 “어? 이건 상해로 가는 편지가 아닌데?”

 봉순은 주소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받는 사람은 무영이었지만, 그 편지는 그녀의 조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거 봐봐.”

 “뭔데?”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조선인처럼 보이는 아가씨 둘이 좀 떨어진 곳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어머!”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수많은 일본인들을 사살했대.”

 “죽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 같은데.”

 놀라 뒤로 물러섰던 아가씨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붉은 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그렇지? 나이가 몇 정도 되어 보이니?”

 “스물다섯 정도……?”

 “하여간 참 대단해. 셋 다 젊은 것 같은데.”

 “우리처럼 말이지.”

 아가씨들은 숨죽이며 웃었다.

 “저기, 잠시만 그것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봉순은 그들이 신문을 건네주자 뺏는 것처럼 가져갔다.

 “아……!”

 봉순은 그 기사를 보고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거기엔 무영이 있었다. 그는 일본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어째서……오라버니가 그곳에?!’

 봉순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삼촌들은 그가 상해에 있다고 했었다. 김구 선생님과 함께 있다고. 도대체, 왜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왜 오라버니는 떠나는데 편지 한 장이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그녀의 손에서 신문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윤상이 우정국에 갖다 주라고 했던 그 편지도.

 “이봐요! 편지 떨어뜨렸어요!”

 아가씨들 중 한 명이 소리쳤지만, 봉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라버니가 감옥에 갇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오라버니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숨겼다는 사실이 꽉 차 있어서 아가씨들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어째서……!’

 집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42

 

 “봉순아, 제발 진정해라.”

 “삼촌이 뭐라고 하시든 전 갈 거예요.”

 봉순은 윤길의 말에 대꾸하고는 배에 올라탔다.

 “얘야!”

 그가 뭐라고 하던 간에 그녀는 결심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리지 마세요. 오라버니에겐 제가 필요해요.”

 봉순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뒤돌아 버렸다.

 “얘야, 얘야, 봉순아! 이 삼촌을 생각해다오. 부디 가지 말아라. 그 아이가 원하던 거였어. 네가 어떻게든 그 애를 구하려고 해도 바뀔 수 있는 건 없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떠나려고 하는 거냐?”

 윤상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봉순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어서 내려오너라. 응? 부탁이다.”

 윤길도 간절하게 말했다. 봉순은 듣다 못해서 그만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봉순아!”

 삼촌들이 외쳤지만, 봉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선실로 들어온 봉순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녀가 화난 이유는 그들이 무영이 조국으로 돌아가게 내버려 두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그의 뒤를 따라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는 말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짐을 아무데나 나둬 버리고 쪼그려 앉았다. 비참했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지? 오라버니는 몇 십 년을 같이 지내 놓고 어떻게 떠난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가버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삼촌들은 오라버니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지? 어떻게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려고 노력은 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조카와 오누이 정을 맺은 사인데 그렇게 매정할 수가 있을까?

 봉순은 애써 며칠 전에 삼촌들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 생각은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에 머물고 싶어 했다.

 ‘마음대로 해라.’

 봉순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곤 한숨을 쉬었다. 장면들과 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삼촌!”

 봉순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벌써 편지 부치고 온 게냐?”

 윤상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아니요.”

 “봉순아! 중요한 편지랬잖니!”

 윤상이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삼촌, 어떻게 오라버니가 조선에 가 있는 거죠? 왜 조선총독부에 들어갔던 거예요? 그리고 일본인들을 살해해서 사형에 처해진다던데요? 왜 저에게 오라버니가 조선에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어요? 오라버니는 또 왜! 저한테 알리지 않았죠?”

 봉순의 말이 총알처럼 튀어 나왔다. 윤상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새하얘졌다.

 “그 애가 갇혔다고?”

 “신문까지 났어요.”

 봉순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형, 글쎄……!”

 윤상이 윤길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러나 봉순의 귀에는 그 말들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저에게 설명부터 해주세요.”

 봉순은 퉁명스럽게 말하지 않도록 애썼다.

 “내가 뭐랬더냐?”

 윤길이 윤상을 흘기며 말했다. 윤상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들어와서 이야기 하자꾸나.”

 봉순은 침착한 그의 태도에 화가 나려고 했다. 하지만 봉순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와서 꿇어앉았다.

 “자, 어디 보자……, 네 질문이 뭐였지?”

 그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가 상냥하게 말하자 그녀는 살짝 화가 풀어져 버렸다.

 “어째서 오라버니가 조선에 가 있나요?”

 봉순의 질문에 윤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흐음. 김구 선생께서 한인애국단이라는 단체를 만드셨는데……, 그 분께서 총독을 살해하라는 밀명을 내리셨다는 것 같더구나.”

 “그래서 조선에 가셨다구요?”

 봉순은 미심쩍어 하며 물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총독부에 들어간 이유에 관한 질문도 풀려 버렸네. 그럼……, 왜 오라버니는 총독이 아닌 그곳의 공무원들을 살해했죠?”

 봉순이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질문을 다시 시작했다.

 “글쎄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 말은 너로부터 처음 들었거든. 아마 침입했는데 총독이 없고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랬을 것 같구나.”

 “그럼 왜 저에게 그 소식을 알리지 않으셨지요? 또 오라버니는 왜 편지 한 통도 안 남기신 거예요?”

 봉순의 질문에 윤상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는 그런 삼촌의 상태를 눈치 챘다.

 “상이 삼촌이 그러셨어요?”

 봉순은 그녀가 가끔씩 쓰는 윤상의 애칭을 썼다.

 “그랬지. 네게 그 소식을 알려주면 분명 무영일 따라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곤 말하지 말라고 형에게 부탁했어. 무영이에게도 말했지.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 앤 바빠서 너에게 그 소식을 알릴 수도 없었을 거다.”

 봉순은 윤상의 말에 의심스러워했지만, 굳이 드러내진 않았다.

 “아 참, 그 애가 편지를 보내 왔었는데. 우리한테 보낸 거였다.”

 윤길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얘길 꺼냈다.

 “아무래도 폐병에 걸린 것 같더라.”

 윤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병!!’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윤길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 증세를 이야기 하는데 폐병이 맞는 것 같았어. 그런 증세가 나타난 지 좀 된 것 같은데…….”   

 ‘가야 해!’

 그녀는 윤길의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사형 선고 받으면……최대한 얼마 안에 사형에 처해지나요?”

 봉순은 제발 길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6개월.”

 그녀는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얼른 자기 방으로 가서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봉순아? 지금 너, 뭐하는 거니?”

 새하얬던 윤상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갈 거예요.” 

 봉순은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생각했다.

 “봉순아!”

 

 그녀는 그곳에 있는 듯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떻게든 오라버니를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것도 안 된다면 봉순은 그의 곁에 만이라도 있어주고 싶었다. 손을 잡아주며 위로하고 싶었다. 잘 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배가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모습과, 그에게 어떤 일을 해 줄지 생각하며 길고 지루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43

 

 무영은 인상을 찡그리며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숨 쉬기가 힘들다…….’

 무영은 헉헉거렸다.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괜찮은가?”

 무영은 그에게 힘겹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무영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구먼. 이를 어쩐다?”

 “병이라도 걸렸어? 무슨 병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무영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증상이라도 말하지 그래?”

 “기침……가래, 피도 가끔……. 숨 쉬기도……힘들어요.”

 무영이 겨우 말하곤 기침을 했다. 그가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나서 손을 치웠더니 피가 고여 있었다.

 “폐병이구먼!”

 어떤 사람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 들었다.

 “폐병? 그 폐결핵이라는 거 말인가?”

 “그걸 어떻게 아나?”

 그 사람은 사람들의 질문에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 누이를 폐병으로 잃었으니께…….”

 사람들은 모두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그 일로 인해 감방 안의 분위기는 더욱 더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조심하게.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미안하네만, 병이 심각한 것 같네.”

 그의 말에 무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사형 당하기 전에 그 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 무영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는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내 버렸다.

 ‘죽음 앞에선 당당할 것이다.’

 무영이 입술을 꼭 깨물고 결심을 더욱 굳혔다. 완벽한 정적과 고통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널 그냥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었느냐?”

 윤길이 봉순을 향해 물었다. 봉순은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이맘 때 쯤에 조국으로 돌아올 생각 너 때문에 한 것이다. 널 데리고 가려고 따라 왔으니까 잠자코 가자는 대로 따라오너라.”

 윤상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봉순을 째려보았으나, 봉순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와 마주 보았다.

 “그만 하거라, 윤상아. 봉순이 너, 버릇없이 그게 무슨 짓이냐?”

 윤길이 명령을 내리자 윤상은 화를 삭혔고, 봉순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널 데리고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윤길의 단호한 말에 윤상과 봉순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좀 다른 점이라면 윤상은 눈을 치켜떴고, 봉순은 기쁨으로 두 볼이 발갛게 물든 것이었다.

 “형님!”

 “삼촌, 감사해요!”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 대신, 무영일 잘 돌보도록 해. 네가 여기 온 이유를 잊지 마라는 것이다.”

 “네, 물론이죠, 길이 삼촌!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대답하는 봉순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윤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윤상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 얼른 가자꾸나.”

 그녀는 윤길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음, 그러니까……지금 오라버니를 뵈러 가시겠단 그 말씀?”

 “그렇지.”

 윤길은 두루마기를 걸치며 윤상에게 눈짓했다. 윤상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봉순은 너무 기뻐서 방을 얼른 나섰다.

 “얼른 오세요!”

 봉순은 손을 흔들었다. 윤길은 웃으며 동생의 손을 잡고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

 

44

 

 “오라버니!”

 봉순은 어찌나 반가운지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는 무영을 껴안았다.

 “수정아, 여긴 어쩐 일로……? 그리고 삼촌들까지……?”

 무영은 그들의 방문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봉순일 따라 왔지.”

 윤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감방 생활이 불편하진 않아?”

 “저번에도 한 번 지내 봤는걸.”

 무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봉순은 그가 많은 걱정 되는 모양이었다. 무영은 걱정 말라며 웃어보였다.

 “무영아, 너 많이 아프진 않니?”

 윤상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그는 겨우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괜찮아요.”

 그러나 그 말을 끝내고 나서 그는 기침을 했다.

 “아닌 것 같구나.”

 “아니에요.”

 무영은 피 묻은 손을 숨기며 그의 말을 부인했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네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굳이 숨기려고 하지 마라.”

 “그래요, 오라버니. 삼촌들께서 그러시는데 오라버니 폐병 같대요.”

 그들의 말에 무영은 침착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었다고?!”

 봉순의 말은 비명에 가까웠다. 무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 알면서도 나한테……,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안지 얼마 안 됐어.”

 흥분한 봉순을 무영이 위로했다. 그러자 봉순이 조금은 진정한 것 같았다.

 “미, 미안, 오라버니.”

 봉순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가야할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무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벌써?”

 봉순이 당황하며 말했다.

 “그래서 뭐 부탁 하나만 하고 가야겠다.”

 “부탁?”

 

 ‘이 동지랑 유 동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좀 봐 줘.’

 “오라버닌. 자기 걱정만 해도 모자랄 판에.”

 봉순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을 찾으려고 애썼다.

 “조선총독부에 침입 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요?”

 “이름?”

 “이덕주 씨와 유진만 씨요.”

 그 남자는 봉순의 말을 듣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저 사람들이야.”

 “감사합니다.”

 봉순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녀는 이덕주와 유진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저기요. 박무영 씨가 보내서 왔는데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여쭈라고…….”

 이덕주가 ‘박무영’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감방에서 지내는 생활, 뭐 다를 거라도 있겠나?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야.”

 “나도 비슷하지, 뭐. 무영이 그 녀석은 어떻게 지내냐?”

 이덕주와 유진만이 차례로 말했다.

 “그게……, 폐병에…….”

 봉순은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사형 선고도 받았고?”

 봉순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6개월 안에…….”

 봉순의 눈가에 끝내 눈물이 맺혔다.

 “솔직히 그 신세가 부럽구나. 아무 일도 못하고 들켜서 갇히기만 하고. 그 녀석은 왜놈들을 죽이고 갇혔는데.”

 이덕주가 한숨을 지었다.

 “덕주 말은 신경 쓰지 말고, 그만 가봐. 무영이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 주고, 그 애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해주렴.”

 “네.”

 봉순은 속으로 무영이 사형 당하는 날이 몇 달 안 남았고, 그리고 그가 폐병에 걸렸다는 데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예의상 한 말이라고 여겨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무영에게 대답을 하려고 뒤돌아 걸어가는 봉순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45

 

 “뭐라구요? 그게 사실이에요?”

 간수 중 하나에게 도시락을 전해주던 봉순의 손에서 도시락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렇다니까, 아가씨는. 내 말 못 믿어요?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어다니깐.”

 그는 떨어진 도시락을 보며 아까워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의 처형 날짜가 앞당겨 졌다고요?”

 “앞당겨 진 게 아니고, 확실한 게 아니었는데 이제 정해졌다는 게지. 어디 보자, 아가씨 오라비가 사형 선고 받은 지 2개월 조금 넘었을 건데……. 3개월 째 되는 날 처형한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한 달도 채 안 남은 거네.”

 그는 일일이 손꼽아 보며 말했다.

 “말도 안 돼.”

 봉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이 안 되긴 무슨.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거지. 아가씨, 도시락 남은 거 있어요? 나 밥 못 먹었거든요.”

 봉순은 도시락이 어디 있는지 보지도 않고 그에게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그는 도시락을 받자마자 뚜껑을 열어 허겁지겁 먹었다.

 “오라버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마다. 내가 맨 처음 말해 줬는걸.”

 그 간수는 쩝쩝거리며 대답했다.

 “반응이 어떻던가요?”

 봉순이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댔다. 그래서 그는 음식이 잘못 넘어가서 캑캑거렸다.

 “아가씨!”

 “죄송해요.”

 봉순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흠흠, 그 사람, 처음에는 당황스러운지 할 말을 찾지 못하더군. 얼마 있지 않아 침착해지던데.”

 “금방 침착해 졌다구요?”

 봉순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는 봉순의 반응에 부루퉁한 것 같았다.

 “그래. 그리고서 ‘수정이한텐 이야기 하지 말아요, 거의 매일 날 찾아오는 그 아가씨요. 괜히 걱정할 거예요.’라고 말하더라고. 그 양반 참 특이하기도 하지.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누이 걱정이나 하고 말이야.”

 그가 무영의 말을 거의 완벽하게 흉내 내는 것을 듣고 있는 봉순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끝까지 자기 걱정은 안 한단 말인가!

 봉순은 서둘러 무영이 있는 감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봐요, 아가씨! 그 사람한테 내가 얘기했다곤 말하지 마요!”

 봉순은 걸음을 멈추지도, 대꾸하지도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무영의 병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그가 간수에게 처형 날짜가 한 달도 채 안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봉순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모른 채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다. 핏줄은 모두 죽고, 혼자가 된 무영에게 유일하게 가족이 되어 준 사람에게 그는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인데……. 그 간수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모양이다. 봉순이 찾아 온 것을 보니.

 “오라버니!”

 봉순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무영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죽음이 바로 코앞인데……, 오라버닌 참 여유롭네요. 누이 걱정할 시간이나 있고.”

 그녀의 말에 무영은 웃음을 뚝 그쳐버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무영의 목소리는 그가 들어봐도 날카로웠다.

 “사형 날짜 얼마 안 남았다면서요. 한 달도 채 안 남았다고 했던가?”

 “누가 그런 말 해?”

 비아냥거리는 봉순의 말에 무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간수가요. 자기 귀로 똑똑히 들었대요.”

 봉순은 말을 하고 나서 그가 무엇이라도 이야기하길 바라며 귀를 기울였지만, 무영은 묵묵부답이었다.

 “도대체 왜 그걸 숨겨요? 숨길 게 뭐가 있다고? 저번에도 그러더니.”

 봉순의 말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의 눈빛으로 보아 상처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그저……네가 슬프지 않길 바랐을 뿐이야.”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그런다고 해서 슬프지 않을 수가 없어요. 슬픔이 덜한 게 아니라 상처까지 입을 걸요.”

 봉순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숨길 필요 없어요, 오라버니. 우린 가족처럼 지내오지 않았나요? 가족은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 공유해야죠.”

 봉순의 말에 무영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미안해.”

 “앞으로 더 잘하면 돼요.”

 봉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가 과연 있을까. 그 생각을 하던 찰나 그는 기침을 했다.

 “피…….”

 무영의 중얼거림에 봉순도 그의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천을 꺼내 그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괜찮아요?”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이만 가 봐야겠어.”

 봉순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돌아서서 감방으로 돌아가는 그의 뺨을 눈물이 타고 흘렀다.

 

46

 

 시간이 빠르게 흘러 무영의 처형 날짜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봉순과 윤길은 매우 불안한 것 같았다. 그러나 무영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생활했다. 참다못해 그들은 무영을 찾아갔다.

 “오라버니, 처형일이……!”

 “알고 있어.”

 무영이 그녀의 말을 싹둑 잘랐다.

 “얼마 안 남은 거 알고 있었어요?”

 봉순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그래.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관심 있더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무영은 씨익 웃었다. 윤길은 혀를 내둘렀다.

 “지금 웃음이 나오는 네가 이해가 안 되는구나.”

 “우리만 괜히 걱정했나 봐요. 탈옥 계획까지 다 짜 놓고. 뭐 하러 그랬담.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봉순이 툴툴거렸다. 그 말을 들은 무영이 눈을 치켜떴다.

 “탈옥 계획?”

 “그럼 내가 간수들에게 잘해준 까닭이 뭐라고 생각했어?”

 봉순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린 네가 이 소식을 들으면 탈옥하기로 결심할 거라고 예상했었지.”

 윤길은 봉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 예상은 틀렸습니다.”

 “오라버니!”

 단호하게 말하는 무영을 보며 그녀는 애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무영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수정아,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야. 난 받아들일 생각이야. 내가 일본인들을 살해한 건 사실이니까.” 

 무영은 ‘일본인’이라고 마지못해 말했다.

 “전엔 탈옥했었잖아. 근데 왜 지금은 안 하겠다는 건데?”

 “그 때 난 죄를 짓거나 일을 벌이지 않았어. 연루자로 지목되어서 잡혀 있었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내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 거야.”

 무영의 말에 그녀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녀는 질문을 했다.

 “죽음으로? 꼭 죽음으로 갚아야 해?”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윤길이 그 한 마디로 마무리를 지어 주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면회실을 나갔다. 윤길과 봉순은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다가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면회실을 나섰다.

 

 감방으로 돌아온 무영은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번쩍 떴다.

 “이보시오, 글을 쓰고자 하는데…….”

 간수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왔다.

 “여기 있소.”

 “종이만 있으면 됩니다.”

 무영은 종이만 받고 다른 것들은 다 돌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오른손의 검지를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 그는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죽음을 앞둔 나는 지금 이것을 쓰고 있다. 죽음까지 이틀이 남았다. 하지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저 내 누이 수정이와 내 조국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내게 누군가 바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즉각 누이의 행복과 조국의 독립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울지 않으려 했으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눈물은 종이 위에 떨어져 피가 번졌다.

 글을 다 쓴 무영은 종이를 말렸다. 무영은 종이가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그의 처형일에 봉순에게 종이를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47

 

 “잠깐만 만나게 해주시오. 지금이 아니면 가족들도 못 보잖소.”

 무영이 간수에게 부탁했다. 간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면회실 앞에 당신이 서 있다가 대화가 끝나면 나를 데리고 가시구려. 그럼 되지 않소?”

 간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면회실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천천히 좀 가시오!”

 간수는 그를 따라 가기 위해 빨리 걸음을 하면서 외쳤다.

 

 “오라버니.”

 봉순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너무나 슬퍼 보였다.

 “건강해야 해. 삼촌들도 잘 모시고.”

 무영이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봉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돌리던 그녀는 무영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보았다.

 “이게 뭐야?”

 그녀는 무영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무영은 그것을 펴보려는 봉순을 막았다.

 “나중에 봐.”

 봉순은 반박하려고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무영이 먼저 침묵을 깼다.

 “……내가 죽거든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어. 수정아, 그래 줄래?”

 봉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금방이라고 흘러내릴 듯했다.

 “노력해 볼게.”

 봉순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간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오.”

 그의 말에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봉순을 보았다.

 “잘 있어.”

 무영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는 간수를 따라 갔다. 봉순은 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 가, 오라버니.”

 

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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