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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가리를 울리다

  • 작성자 갑상선
  • 작성일 2011-05-02
  • 조회수 344

공연을 즐길만한 넓은 장소, 또 공연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과 뜨거운 호응과 박수갈채까지. 모든 조건이 딱 맞아 떨어졌다. 분명 이곳 대학로 거리는 오늘 길거리 공연을 하기에 꽤나 적절한 곳이다. 다만 이미 같은 학교 댄스 동아리 팀이 열띤 공연을 펼치고 있다는 점만 뺀다면.

“야, 김상현. 이제 우리 어떻게 하냐?”

병호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우리랑 시간이 겹치는 건 또 뭐야.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일찍 나오는 거였는데.”

병호가 계속 짜증을 냈다. 그렇지만 병호가 저렇게까지 투덜거리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이번 길거리 공연은 새로 들어온 1학년 후배들과 처음으로 나가는, 그러니까 나와 병호가 풍물놀이 동아리의 기장과 부기장이 된 이후 처음 나온 특별한 의미의 첫 공연이었다. 이 공연을 잘 끝내기 위해 한동안 열심히 풍물놀이 공연을 준비해왔는데 장소가 겹쳐 아예 공연을 선보이지도 못할 수도 있으니 짜증이 날만도 했다. 병호가 계속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거, 저렇게 반응이 좋아선 이 옆에서 우리 공연 했다가는 완전 다 묻혀버리겠다.”

병호의 말에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이 상태에선 우리가 뭘 할 수가 없었다. 댄스 팀이 저렇게나 큰 호응을 받으며 공연을 펼치는데 그 옆에서 갑자기 풍물놀이를 했다가는 병호의 말대로 완전 묻혀버릴 확률이 높았다. 나는 벤치에 주저앉아 있는 병호에게 말했다.

“이거, 어쩔 수 없겠다. 자리를 옮겨야겠어.”

“자리를? 지금 상황에서는 그래야 하겠지만…어디로 옮기려고?”

“일단은 사람이 좀 적더라도 운동장 쪽으로 옮기자. 여기선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병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그래, 그럼 일단은 옮겨야지. 얘들한테는 내가 말할게.”

병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찍이에서 댄스 팀의 공연을 넋 놓고 보고 있던 후배들에게로 갔다. 병호가 후배들에게 장소를 옮긴다고 말하자 후배들은 내색은 하진 않았지만 실망했다는 것이 표정에 드러났다. 후배들의 그런 표정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늘 아침의 후배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눌하게 치복에 맨 삼색수건을 다시 한 번 꽉 묶고, 나가선 더 멋진 공연을 선보여야 한다며 끝까지 가락을 맞춰가며 연습하던 후배들. 많은 사람들에게 흥이 넘치는 가락을 선보이고 싶어 하던, 그 후배들의 설렘에 금을 가게 한 것 같아 너무나도 불편했다.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다시 들어 댄스 팀의 공연을 봤다. 우리 동아리와 차원이 다른 화려한 안무들. 그만큼 사람들의 환호 또한 우리들과 비교가 안됐다. 댄스 팀을 향한 격려의 박수와 환호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나는 문득 깊은 의문 하나가 생겼다. 과연 우리 동아리의 풍물놀이를 즐겨줄 사람들이 있기나 할까?

“그거, 지금 여기서 할 거야?”

갑자기 들린 어린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깼다. 한 6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내 삼색수건을 잡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회색빛을 띄는 소년. 내 눈이 뭔가 잘못 됐는지 이상하게도 소년의 얼굴은 약간 흐릿하게 보였다.

“그거, 지금 여기서 할 거야?”

소년의 목소리는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맑고 순수한 목소리. 나는 그 순수한 목소리 때문인지 마치 마법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말했다.

“그래. 여기서 할 거야.”

소년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형도 TV에 나오는 것처럼 막 하얗고 긴 거 돌리고 그러겠네?”

소년의 말에 난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그리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형같이 꽹과리 치는 사람은 연주만 하고 상모돌리기는 안 해.”

소년은 금세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나 말고 다른 친구들이 상모를 돌릴 거야.”

“우와, 그럼 완전 멋지겠다. 빨리 형 공연 보고 싶어.”

소년은 다시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소년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소년이 맑은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보였다.

“야, 김상현! 준비 다 됐어. 얼른 와.”

뒤를 돌아보니 병호가 장소를 옮길 준비를 다 하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병호를 향해 외쳤다.

“병호야, 잠깐만! 조금만 기다려줘.”

나는 다시 뒤를 돌아 소년을 찾았다. 해맑은 미소로 웃고 있던 아이. 그렇지만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소년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곤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 있던 소년이 사라지자 정신이 벙벙했다. 당황한 나는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회색빛이 나는 소년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아이가 내게 했던 말이 내 귀에서 계속 울릴 뿐이었다.

‘형 공연 빨리 보고 싶어.’

그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야, 안가고 뭐하냐니깐.”

내 어깨를 잡아끈 사람은 병호였다.

“지금 준비 다 해놨어. 늦기 전에 빨리 가자.”

“그래, 가야지…….”

일단 대답을 하긴 했지만 내 발은 왠지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병호에게 말했다.

“우리 그냥 여기서 하자.”

“뭐라고?”

“우리 그냥 여기서 하자고. 할 수 있을 거야.”

병호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뭐야, 갑자기 왜 또 맘이 바뀐 거야. 어차피 여기서 한다고 쳐도 저쪽 댄스 팀도 끝나려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건데?”

“옆에서 같이 하면 되지 뭐.”

“야, 댄스 팀이랑 풍물놀이랑 둘이서 같은 곳에서 하면 누가 풍물놀이를 보러 오겠냐? 우린 완전 저쪽에 처참하게 발릴걸.”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난 그래도 우리의 가락을 같이 즐겨 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있을 거라고 믿어. 정말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온다고 해도 그들이 진심으로 즐겨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어. 그러니깐 한 번 해보자. 분명 우리랑 같이 즐겨줄 사람들이 있을 거야. 한 번만 날 믿어줘.”

내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지만 병호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이었다.

“내 생각엔 솔직히 그건 좀 무리수인데 말이야…….”

병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렇지만 네 고집을 꺾기도 힘들 것 같고…그래, 까짓 거 한번 해보자. 우리들 놀음도 댄스 팀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자고. 그럼 후배들한텐 다시 놀음 준비하라고 말할게.”

병호가 내 결정에 따라주자 나는 병호를 왈칵 안을 뻔했다. 나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다. 내 의견 따라줘서.”

병호도 웃으며 말했다.

“짜식, 고맙긴 뭐가 고마워. 빨리 준비나 하고 있어라. 난 애들한테 갔다 올게.”

그렇게 말하곤 병호는 다시 후배들에게 향했다. 나도 공연 준비를 위해 내 가방에서 상모를 꺼냈다. 새털로 만들어진 개꼬리상모를 머리에 꾹 눌러쓰자 긴 새털이 바람에 움직이며 내 얼굴을 간질였다. 나는 상모 털을 뒤로 넘기며 근처를 계속 둘러봤다. 그렇지만 여전히 회색빛이 나던 아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없단 것에 약간 실망감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꽹과리를 잡았다. 곧 있을 놀음에서 연주할 가락을 한 번 더 연습했다. 댄스 팀의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의 근처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니 몇몇 사람들이 이목이 내게 집중됐다. 그렇지만 대부분 지나가면서 힐끔거릴 뿐이지 자리를 잡고 기다리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연주할 가락들을 대강 한 번씩 다 연습하고 난 뒤, 난 후배들과 병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미 모두들 연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모두들에게 말했다.

“다들 준비 다 끝났지? 그럼 한 번 신나게 놀아보자. 자, 모두 각자 위치로.”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각자 자신들의 자리에 섰다. 나는 놀음을 하기 전 점검 차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악기들이 알맞은 자리에 서서 쇠치배인 내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는 크게 한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크게 팔을 뻗어 꽹과리를 두드렸다. 내 꽹과리 장단에 맞춰 서서히 북, 징, 소고, 장구 등 여러 악기가 녹아 들어왔다. 어느 정도 가락이 맞춰지자 나는 가락의 속도를 좀 더 높이며 걸음을 떼었다. 원 형으로 힘차게 걷는 내 뒤로 병호를 비롯한 북치배에 이어 장구, 징, 소고 순서로 이어졌다. 나는 돌면서 주위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갑자기 퍼진 경쾌한 풍물소리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을 잡아놓을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병호에게 눈짓으로 얼추 신호를 보냈다. 내 신호를 받은 병호와 후배 한 명이 북을 들고 가운데로 향했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나는 꽹과리 속도를 높였다. 가락이 점점 빨라지면서 북치배들의 북을 두드리는 손짓도 매우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병호의 상모 또한 힘차게 돌아갔다. 상모 줄이 새하얀 벌이 되어 자그만 원을 그리며 빠르게 돌아가자 그때서야 몇몇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흥이나 꽹과리를 더욱 크게 울렸다. 다른 친구들도 나와 같았는지 가락은 처음보다 매우 풍성해졌고 흥이 넘쳤다. 가락이 빨라지자 나는 다시 걸음을 떼어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렇게 원을 그리며 도는데 어디선가 “우와.”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쫓았다. 회색빛 소년이 거기 있었다. 소년은 커다란 사람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어색하게나마 가락을 쫓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소년의 눈은 빠르게 돌아가는 병호의 상모에 고정돼 있었기 때문에 나와 눈이 마주치진 않았지만 소년이 상모를 쫓는 해맑은 눈에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이들이 구경하고 응원해주고 있었기에 흥은 더해져만 갔다. 나는 더 크게 꽹과리를 울리기 위해 채를 높이 들었다. 그때였다.

“도대체 시끄럽게 뭐하는 것들인지.”

“그러게 말이야. 귀만 아프고 하나도 재미도 없고 말이야.”

나는 하마터면 꽹과리를 칠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갑자기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황한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악기들이 가락을 놓쳤고 흐트러졌다. 잘 어우러지던 가락에 누군가의 말이 커다란 구멍을 뚫은 것이다. 나는 간신히 꽹과리 가락을 유지하며 이어나갔지만 속도를 늦춰도 여전히 많은 악기들이 따라오지 못했다. 나는 꽹과리 가락을 계속 연주하며 눈으로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쫓았다. 젊은 20대의 여자들이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여자의 표정에는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과하게 찡그린 표정에서 역력한 짜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우리의 놀음이 그렇게 듣기 싫었을까?

간신히 가락을 대충 정리하고 어느 정도 맞추긴 했지만 그 전에 느껴졌었던 흥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후배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놀음을 계속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예정과 다르게 놀음을 빨리 끝맺었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충격 때문일까. 나는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길 구석의 자그만 벤치로 향해 앉았다. 그나마 계속 구경을 하던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연주가 흐지부지 끝나자 모두 그저 그런 밋밋한 반응을 보이며 돌아갔고 후배들 또한 큰 실망감에 쌓여있었다. 나는 다시 그 차가운 목소리와 눈빛을 떠올렸다. 그들은 과연 왜 그랬을까? 그들의 말대로 정말 우리의 공연이 그렇게나 시끄러웠을까? 아니면 우리가 놀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일까? 아니, 그전에 그들은 우리 놀음을 한 번만이라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라도 있을까? 계속 의문을 가져봤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고 생각하면 할수록 무언가 뜨겁고 불편한 감정이 가슴에서 용광로처럼 팔팔 끓을 뿐이었다.

“야 여기서 뭐하냐.”

병호가 내 옆으로 와 앉으며 말했다.

“다른 애들 다 패닉인데 기장이란 놈이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패닉이라고?”

병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인마. 아무래도 아까 공연 중에 들린 말이 충격이었나 봐. 너도 들었지?”

나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후배들은 이번이 첫 공연인데 그런 말을 들었으니 충격이 큰 게 당연했다. 그런 후배들을 보고 있자니 하나의 생각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되었던 거지? 분명 내가 기억 속의 풍물놀이는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풍물놀이를 본 것은 6살 때쯤이었다. 부모님을 따라 나선 지방 축제에서였다. 서울에서 내려왔다던 전문 풍물놀이단의 화려한 공연은 어린 시절의 내 눈과 귀를 사로잡기 충분했다. 내 코를 스칠 듯이 길게 돌아가는 상모는 어려운 자세 속에서도 마치 한 마리의 나비처럼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누볐고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려대는 경쾌한 꽹과리소리는 그 때의 내 마음을 마치 꽹과리마냥 두들겨댔었다. 그 강렬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여러 악기들의 향연은 조용하지도, 너무 시끄럽지도 않았다. 마치 단 하나뿐인 단짝과 나누는 유쾌한 대화 같았다. 놀음의 가락이 빨라지고 상모의 움직임도 더 날쌔지고 모든 악기가 내뱉는 숨소리마저 흥분해가며 놀음이 절정에 다다를 때면 사람들의 박수소리도 그에 맞춰 커져갔다. 박수를 치고 있는 어른들도 순박한 표정으로 놀음을 즐기고 있었다. 그 장소에 있던 모두가 순수하게 놀음을 즐기던 것이었다.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던 풍물놀이가 마치 마법과 같은 것이라고, 어릴 적의 나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릴 시적의 그 기억을 믿기가 힘들었다. 어릴 적 나를 그토록 매료시켰던 공연이 과연 오늘 내가 했던 것과 같은 것일까? 옛날 생각을 하고 나니 용광로처럼 끓던 뜨거운 감정은 식어버리고 그 위로 차가운 재만이 남았다.

“야, 이제 일어나자. 그만 가야지.”

병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병호를 바라봤다.

“애들 상태가 이런데 더 이상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이제 그만 짐 챙겨서 가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가야겠네.”

일단 말은 했지만 마음속 짙은 아쉬움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 소년은 어디 있을까. 불현 듯 그 소년을 만나고 싶었다. 상모돌리기를 해맑은 미소로 보고 있던 그 소년. 마치 옛날 사람들처럼 풍물놀이를 보며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던 그 소년.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을 찾았다. 소년이 있었던 자리를 비롯해서 그 근방을 쭉 훑어봤다. 그렇지만 소년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야 너 갑자기 뭐하는 거야.”

병호가 내 행동을 보고 묻자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었던 꼬마 어디로 갔는지 봤냐? 너 상모돌리기 할 때 저기서 쪼그리고 앉아서 웃으면서 박수쳐주던 남자애 말이야.”

병호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남자애? 무슨 소리야. 저쪽에는 다 대학생들이었고 게다가 내 상모돌리기 보면서 박수쳐주면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웃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니야, 분명 있었어. 회색빛이 나는 소년…….”

병호가 내 말을 끊고는 말했다.

“됐다. 너도 지금 많이 피곤한가 보다. 그냥 빨리 가기나 하자.”

그리곤 쉬고 있던 후배들에게 모이라고 소리쳤다. 후배들이 근처로 모여들었고 병호는 마무리를 도맡아서 했다. 우선 모두들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 애써 분위기를 살리려고 말장난을 했지만 오히려 더욱 더 썰렁해질 뿐이었다. 병호는 그렇게 한참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병호가 쉬지 않고 계속 말을 뱉어냈지만 내 귀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난 계속 회색빛의 소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익숙했던 소년. 우리의 풍물놀이에 해맑게 좋아해주던 소년.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안녕히 계세요!”

후배들이 힘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갔다. 다행히도 병호가 한동안 떠든 덕분인지 후배들은 다시 원래의 활기를 찾았다. 후배들이 모두 가고 나자 그때서야 병호도 살짝 피곤한 티를 냈다.

“하, 오늘은 겁나게 피곤하네. 나도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학교에서 얘기하자. 그럼 들어가.”

“어, 그래 들어가라. 수고했어.”

그렇게 병호와도 헤어졌다. 혼자 길을 걷게 되자 다시 그 차가운 목소리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은 매우 피곤한 하루였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었지만 그 목소리들이 날 가만두지 않았다. 그 목소리들이 귓가에 맴돌면서 그 목소리들과 그 여자들의 일그러진 표정들에 대해 의문이 생겨났고 그렇게 하나하나 생각해보면서 감정이 뜨거운 용광로가 되기도 하고 다시 차가운 잿더미로 변하기를 반복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것일까. 분명히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었는데…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어릴 적 내 가슴을 뛰게 해주던 그 소리가 그들에게는 그저 듣기 싫은 소리였을까?

이런 끊임없는 질문을 하며 가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렇게 멈춰 서서 한동안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뻥-!’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인근 초등학교로 가는 골목길 안에서였다. 그리고 골목길 위로 하얀 연기가 하늘을 향해 스믈스믈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내 콧속으로 미약하나마 익숙하고 고소한 냄새가 들어왔다. 나는 냄새를 맡고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냄새의 주인공은 새하얗고 고소한 뻥튀기였다. 난 어린 시절 뻥튀기를 사러 이 골목을 달려가던 어릴 적의 나를 떠올렸다. 엄마에게 용돈을 받으면 바로 이 골목 끝에서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장사를 하시던 뻥튀기 아저씨이게 달려가 뻥튀기를 사서 한 움큼 집어 입에 털어 넣었었다. 그 때 그렇게 달려가 먹었던 뻥튀기의 팍팍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내 혀끝에 아른거렸다. 이런 생각을 하니 뻥튀기를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너무 피곤해 가기를 망설였다. 그 때, 갑자기 한 소년이 날 지나쳐 뻥튀기 골목으로 달려 나갔다. 6살쯤으로 보이는 남자 꼬마아이. 나는 그 꼬마아이의 얼굴을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회색빛의 소년이었다!

나는 서둘러 소년을 쫓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 깊숙이 초등학교 정문 앞에 도착하자 시꺼먼 뻥튀기 기계와 함께 뻥튀기 가게 아저씨가 보였다. 그렇지만 회색빛의 소년은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보이지가 않았다.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소년이 어디로 갔는지 계속 두리번거리는 와중에 다시 한 번 ‘뻥-!’하고 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를 쫓아 뻥튀기 아저씨를 봤다. 예전 같았으면 저 새까맣고 못생긴 녀석이 연기를 슬슬 내뿜으며 폭발할 때가 되면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귀를 틀어막고 터지기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귀를 막고 뻥튀기가 터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아저씨 혼자서 터져 나온 뻥튀기들을 커다란 봉투 안에 쓸어 담을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자 나는 왠지 마음이 쓸쓸해졌다. 나는 아저씨에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나는 아저씨 앞으로 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나를 보곤 깜짝 놀란 듯 대답했다.

“아니, 이게 누구여. 상현이 아니여?”

아저씨가 정확하게 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기에 나 또한 놀라서 대답했다.

“아저씨, 아직까지도 제 이름 기억하고 계셨어요?”

“물론이지. 너 어렸을 때 툭하면 요 골목으로 쪼르르 달려와서 뻥튀기 달라고 했었잖아. 내가 어떻게 잊겠나. 아직도 생생한데. 아따, 암튼 상현이 엄청 많이 커버렸네. 지금 고등학생인가?”

“네. 이제 2학년이에요.”

아저씨는 계속 뻥튀기를 봉투에 담으면서 말했다.

“2학년이면 내년에 3학년 되겠고만 왜 요런 데를 찾아왔나.”

“저…그게 사실 쪼그만 꼬마를 찾으러 왔거든요. 혹시 이리로 들어오시는 거 못 보셨어요?”

아저씨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 아무도 안 들어왔다. 손님 한 사람도 안 들어오는데 무슨 꼬맹이가 들어와.”

나는 아저씨의 말에 의아해서 되물었다.

“손님이 한 사람도 안 온다고요? 원래 여기 손님들 엄청 많았잖아요.”

아저씨는 내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다 옛날 얘기지. 요즘엔 아무도 안 온다. 가까운 슈퍼만 가도 온갖 맛있는 과자들이 널렸는데 누가 이런 뻥튀기 먹으려고 여까지 오겠냐? 가끔씩 옛 생각 난 사람들이 전화로 주문해서 내가 배달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뻥튀기는 여전히 맛있잖아요…근데 왜…….”

아저씨는 헛웃음 하며 대답했다.

“너는 그렇게 생각 하냐?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게 아닌가보다. 뭐 어쩌겠냐. 이미 그냥 추억의 음식이 되어버렸는데.”

나는 아저씨의 말에 울컥했다. 풍물놀이를 할 때 그 여자들이 했던 차가운 말들을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가 한동안 말이 없이 가만히 서있자 아저씨는 내게 뻥튀기가 가득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봤으니까, 특별히 공짜로 줄게. 함 먹어봐라, 여전히 맛있을 거다.”

나는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녜요. 저도 돈 있어요. 공짜로 안 주셔도 되요.”

“에헤이, 그냥 내가 반가워서 그래. 이렇게 직접 찾아온 손님도 오랜만이고 해서. 그러니까 사양 말고 얼른 받아. 그래야 내 맘도 편하지.”

나는 할 수 없이 아저씨에게 뻥튀기 봉지를 받아들었다. 커다란 봉지임에도 불구하고 뻥튀기가 가득 들어가 있었다. 아저씨가 이어 말했다.

“오랜만에 봤고 해서 더 얘기하고 싶은데. 이제 주문받은 거 배달해야 해서 말이야. 이제 그만 가봐야겠네.”

“아, 네. 아무튼 오늘 이 뻥튀기 감사해요.”

“감사하긴 뭘 또 감사해.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라니깐. 오히려 말동무 해줘서 내가 더 고맙지.”

아저씨는 그러곤 소탈하면서도 크게 웃으셨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저씨는 배달을 하러 가게를 떠났다. 나는 아저씨가 떠나고 난 뒤, 뻥튀기 봉지에서 뻥튀기를 한 움큼 집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입 안 가득 뻥튀기가 들어가니 팍팍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렇게 팍팍했지만 뻥튀기를 계속 입 안에 우겨넣었다. 팍팍하고 맛도 맹맹한 뻥튀기였지만 뻥튀기의 따뜻한 온기가 내 목구멍을 넘어 차디찬 재로 가득 찬 내 마음을 새하얗게 뒤덮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해가 산 너머로 숨어버리고 깜깜한 밤하늘은 새하얀 뻥튀기 같은 별들을 하나둘 뱉어내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서 찬 겨울바람은 더욱 거세졌지만 품안에 꼭 안고 있던 뻥튀기가 여전히 따뜻하니 한결 나았다. 아직도 낮에 들었던 그 차가운 목소리가 찬바람과 함께 내 귓가를 매섭게 스치고 지나가고 뻥튀기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지만 더 이상은 ‘왜 이렇게 됐을까’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추억들이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잊혀가는 것 같아 슬플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울컥한 마음을 갖고 저녁 길을 걸었다. 계속 밀려드는 생각들을 애써 부정하며 걷는데 다시 문득 떠올랐다. 회색빛을 띠던 소년. 그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맨 처음 소년을 만났을 때도 소년은 잠깐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그리고 골목 사이로 소년을 뒤 쫓았을 때에도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었다. 도대체 그 소년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신출귀몰한 건 분명 신기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난 그것에 대해 별로 궁금해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소년이 회색빛을 띤다는 것이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궁금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가장 의아한 것은 내가 계속 그 소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난 그 소년을 쫓고 있을까? 단지 우리의 풍물놀이를 즐겁게 봐주었다는 것 때문일까?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소년에게 무언가 동질감을 느낄 뿐이었다.

끼-익 끼-익. 놀이터에서 그네의 녹슨 사슬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가 들려온 놀이터 또한 내게 매우 친숙한 곳이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이건, 혼자 놀 때건, 아니면 엄마에게 된통 혼나고 나와 혼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글퍼한 곳도 이곳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과 함께 한 곳. 추억이 담긴 장소. 나는 알 수 없는 본능에 휩싸여 놀이터로 향했다. 끼익-끼익. 쇠사슬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네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네에는 자그만 한 소년이 타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 소년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그네를 타고 있던 소년에게 좀 더 다가갔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그네를 타고 있는 소년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꼬마야, 안녕?”

소년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더니 해맑은 미소를 띠었다.

“어, 그 노란 거치는 형이네.”

“꽹과리라고 하는 거야.”

나는 품에 안고 있던 뻥튀기를 소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너 먹을래? 생긴 건 이래도 굉장히 맛있는 거야.”

소년은 뻥튀기를 보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우와! 뻥튀기다.”

그리곤 뻥튀기 봉지를 받아 들더니 그 작은 손으로 뻥튀기를 한 움큼 집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나는 소년이 뻥튀기를 먹는 모습을 보며 그때서야 깨달았다. 왜 진작 소년의 목소리를,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회색빛이 나는 소년은 머리모양이나 눈, 코, 입, 얼굴 전체의 형태나, 게다가 뻥튀기를 먹는 습관마저도 내 어린 시절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단지 가방에서 꽹과리와 채를 꺼내곤 소년에게 말했다.

“형이 꽹과리 멋있게 치는 거 보여줄까?”

소년은 뻥튀기를 입에 가득 문채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소년이 보기 좋게 달빛이 잘 비치는 곳 아래에 섰다. 우선 크게 숨을 들이 마신 뒤 채를 높이 들어보였다. 그리고 크게 꽹과리를 울렸다. 나는 처음부터 매우 빠른 가락으로 연주를 하며 나도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곤 꽹과리를 강하게, 빠르게 쉬지 않고 두들기고 또 두들겼다. 동아리 후배들과 병호를 위해, 뻥튀기 아저씨를 위해, 그리고 소년을 위해, 또 나를 위해서. 나는 내 가슴속 차디찬 잿더미들이 저 밤하늘 끝까지 흩어질 때까지 꽹과리를 울리고 또 울렸다.

갑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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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해가 중천에 뜬, 지극히 평범해야 했었던 일요일에 수많은 양복쟁이들이 우리 집을 찾았다. 이전에 안목이 있던 한 구조대원이 그 사람들을 우리 가족에게 소개해주었다. 국내 최고의 지질학자, 토양학 교수, 굴삭산업 종사자, 심해 조사 연구원 등 마치 영화에나 나오는 드림팀을 꾸린 것만 같았다. 그들은 모두 우리 가족에게 일말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우리 집 안으로 향했다. 집 안에 들어선 그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뿜으며 금세기 최고의 발견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던 아빠의 주먹 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는 차마 그들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그때, 아빠가 뛰쳐나가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난 충분히 아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정말 도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사건은 하루 전, 나른한 오후에 일어났다. “당신은 뭘 잘했다고 소릴 치는 건데? 나가서 돈 버는 사람은 나잖아!” “그깟 쥐꼬리만 한 돈 갖고 와서 우리 가족 어떻게 다 먹여 살려. 게다가 그 돈도 당신이 레펠인가 뭐 하느라고 다 까먹는데, 나보고 뭐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 빚덩이들을 이젠 다 어떻게 할 거냐고!” 또 부부싸움이셨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엄마 아빠의 한바탕의 싸움. 그 모든 것이 다 돈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돈 싸움. 대학생인 형은 나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이렇게 부모님들이 싸울 때면 형은 어려서부터 나와 동생을 데리곤 이렇게 방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런 형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일찍부터 철이 들었다고 늘 칭찬을 받을 만큼 성숙했고 생각이 깊었다. “얘들아, 엄마 아빠 지금 화났으니까 일단 여기서 조금만 조용히 있자. 괜히 성질 더 돋우지 말고.” 형이 조곤조곤 말했지만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우리가 이렇게 숨어 있어야 해? 엄마 아빠 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말이야. 나도 이젠 중3이야. 정말 이런 거 이젠 지긋지긋 하다고.” 내 말에 형은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내게 어떤 말로 훈계를 놓거나, 나를 때리지도 않았다. 형은 마치 성인군자처럼 그렇게 참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뜨거워져만 갔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지? 다른 아이들은 다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던데, 왜 우리가족은 이렇게 박 터지게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갑자기 끌어 넘치는 설움에 그만 해선 안 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다 필요 없어. 그냥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럼 적어도 싸우는 것만큼은 적어질 거 아냐!” 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갑자기 톡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을 다 마치고 나자 형의 손은 날 때리려고 높게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땅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밖에서 엄마

  • 갑상선
  • 201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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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오래된 선풍기의 날엔 먼지가 가득 얹어져 있었다. 강풍 버튼을 누르자 화석처럼 굳어져 있던 것 같았던 선풍기가 아침잠을 막 깨고 난 뒤, 기지개를 피듯 아주 천천히,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왜 항상 이렇게 늦게 돌아가기 시작한 건지, 처음부터 빨리 돌아가면 좋을 텐데. 난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선풍기 가까이 댔다. 아아아아아-. 돌아가는 선풍기 날에다 대고 소리를 내니 마치 목에 진동기라도 삼킨 듯이 떠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 소리가 신기하면서도 뭔가 이질적인 게 맘에 들었지만 금세 다시 선풍기에서 고개를 뗐다. 왠지 한심한 짓이란 생각도 들었고 선풍기 날에 많이 얹어져 있던 그 먼지들이 내 목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조금 섬뜩하기도 했다. 고개를 선풍기에서 떼긴 뗐지만, 그래도 선풍기를 내 바로 앞에 둔 채 고정을 시켰다. 선풍기의 미지근한 바람이 내 땀들을 천천히 식혀주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그렇게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풍기의 바람이 옆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회전을 누른 것이었다. 재빨리 눈을 뜨곤 고개를 들자 엄마가 내게 땅콩을 날렸다. “야임마, 집에 너 혼자 있냐? 회전을 해 놔야 집안이 다 시원해질 거 아니여.” 갑작스런 땅콩에 난 짜증을 내며 말했다. “선풍기 하나 회전해놓는다고 방 안이 어떻게 다 시원해진다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내 짜증에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요 앞 마트에 가서 모기약 좀 사와라. 남은 돈으로 용돈 좀 하고.” 그러면서 엄마가 내민 건 만원이었다. 아싸, 좋구나. 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가는 밤하늘은 매우 깜깜했다. 별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구름에 가려 흐릿해진 달빛 아래로 수많은 날파리가 윙윙거리는 가로등만이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마트는 집 앞에 있어 금방 도착할 수 있었지만 자그만 집들 사이사이로 난 으스스한 골목들을 관통해서 가야했기에 마음이 썩 좋진 않았다. 다른 여타 골목들이 그렇듯이 그 골목길 또한 다른 여러 골목들로 향하는 샛길들이 여럿 존재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그 샛길들은 낮엔 이용하기 편했지만 가로등 불빛이 다 비춰지지 않는 밤엔 그런 샛길의 어둠이 굉장히 으스스했다. 난 그 샛길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트로 향했다. 집 근처에 있는 마트는 이제 슬슬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트 안에 들어가 보니 어느새 시계의 긴 바늘과 작은 바늘 모두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우선 모기약을 아무거나 대충 집어 들곤 콜라 1.5L짜리와 구구콘과 함께 계산했다. 구구콘을 핥으면서 나와 보니 그 잠깐 사이에 달빛이 더욱 흐려져 아까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난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골목길로 들어섰다. 가로등 빛이 비치지 않는 샛길은 여전히 으스스 했기에 난 그 곳을 안 보고 지나가려 애썼다. 그 순간이었다. 악! 단발의 비명소리. 빛이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좁

  • 갑상선
  • 2011-06-21
괴물

괴물   난 허리에 손을 얹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한동안 어둠속에서 가만히 서있던 난 문뜩 무언가를 깨닫곤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난 떨리는 손으로 할아버지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얼마 크지 않은 자그만 방. 그 방의 구석에 있는 낡은 앉은뱅이책상에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할아버지는 느린 움직임으로 책상 밑 두 번째 서랍에서 양장처리 된 두꺼운 검은색 책 한권을 꺼내셨다. 그리곤 책을 펼쳐 한동안 바라보더니 갑자기 허리를 돌려 나를 바라보곤 말하셨다. “괴물이 있구나, 나를 집어 삼키려는 괴물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때서야 난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서부터 천천히 할아버지를 잠식하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괴물은 마치 매연 연기처럼 형태가 뚜렷하지 않았지만 새까맣고 긴 손톱과 발톱으로 할아버지에게 매달린 채 할아버지를 서서히 잠식하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보였다. 그 괴물에 대해서라든지 할아버지에 대해서라든지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지더니 할아버지는 그 가냘픈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려 나를 가리켰다. “상현아…너는…너는…….” 할아버지는 말을 다 잇지 못하셨다. 갑자기 할아버지는 마치 발작이라도 일어난 듯 온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러면서도 떨리는 눈동자와 손가락은 정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곤 거의 고함치듯 소리쳤다. “너만큼은……너만큼은, 너만은!” - 그 순간, 눈을 떴다. 호흡은 거칠었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커튼이 반쯤 젖혀진 창문으로 들어온 햇볕이 나를 내리쬐고 있었고 그 햇볕에 오래된 방의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꿈을 꾼 것일까?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지저분하게 대충 글씨만 지워놓은 커다란 녹색 칠판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책상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아마 강의를 듣다가 그만 깜빡 졸았나보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며 흐르던 식은땀을 닦아냈다. 닦아낸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이런 이상한 악몽은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건강에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아님 무슨 다른 문제라도……. 아, 그럴 리 없지, 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5시 30분이었다. 원래 4시 30분에 끝나는 강의니까 강의가 끝나고도 1시간이나 더 잔 것이었다. 시계를 보고나니 왠지 모를 씁쓸함이 온몸을 감돌았다. 40여명이나 가득 들어오는 강의실에서 1시간이나 계속 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냉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같은 강의를 듣는 것이 거의 6개월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도 난 지금까지 강의를 듣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렇다 할 친구

  • 갑상선
  • 2011-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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