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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 작성자 갑상선
  • 작성일 2011-06-15
  • 조회수 316

괴물

 

난 허리에 손을 얹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한동안 어둠속에서 가만히 서있던 난 문뜩 무언가를 깨닫곤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난 떨리는 손으로 할아버지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얼마 크지 않은 자그만 방. 그 방의 구석에 있는 낡은 앉은뱅이책상에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할아버지는 느린 움직임으로 책상 밑 두 번째 서랍에서 양장처리 된 두꺼운 검은색 책 한권을 꺼내셨다. 그리곤 책을 펼쳐 한동안 바라보더니 갑자기 허리를 돌려 나를 바라보곤 말하셨다.

“괴물이 있구나, 나를 집어 삼키려는 괴물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때서야 난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서부터 천천히 할아버지를 잠식하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괴물은 마치 매연 연기처럼 형태가 뚜렷하지 않았지만 새까맣고 긴 손톱과 발톱으로 할아버지에게 매달린 채 할아버지를 서서히 잠식하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보였다. 그 괴물에 대해서라든지 할아버지에 대해서라든지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지더니 할아버지는 그 가냘픈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려 나를 가리켰다.

“상현아…너는…너는…….”

할아버지는 말을 다 잇지 못하셨다. 갑자기 할아버지는 마치 발작이라도 일어난 듯 온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러면서도 떨리는 눈동자와 손가락은 정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곤 거의 고함치듯 소리쳤다.

“너만큼은……너만큼은, 너만은!”

-

그 순간, 눈을 떴다. 호흡은 거칠었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커튼이 반쯤 젖혀진 창문으로 들어온 햇볕이 나를 내리쬐고 있었고 그 햇볕에 오래된 방의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꿈을 꾼 것일까?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지저분하게 대충 글씨만 지워놓은 커다란 녹색 칠판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책상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아마 강의를 듣다가 그만 깜빡 졸았나보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며 흐르던 식은땀을 닦아냈다. 닦아낸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이런 이상한 악몽은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건강에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아님 무슨 다른 문제라도…….

아, 그럴 리 없지, 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5시 30분이었다. 원래 4시 30분에 끝나는 강의니까 강의가 끝나고도 1시간이나 더 잔 것이었다. 시계를 보고나니 왠지 모를 씁쓸함이 온몸을 감돌았다. 40여명이나 가득 들어오는 강의실에서 1시간이나 계속 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냉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같은 강의를 듣는 것이 거의 6개월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도 난 지금까지 강의를 듣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렇다 할 친구 한 명을 만들지도 못했다. 그저 형식상의 관계만 맺었을 뿐, 그들과 난 그냥 같은 수업을 듣는 대학 동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나만 혼자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공허한 차디찬 기운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강의실에서 나 말고 어떤 다른 존재가 있다는 걸 느꼈다. 온 신경이 곤두섰고 숨은 가빠졌다. 오늘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젠 온몸을 파고드는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만 싶은데. 나는 그렇게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 천천히 강의실을 훑어봤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강의실 구석,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그늘진 공간에 거대한 어둠덩어리, 그러니까 할아버지를 광포하게 집어 삼키던 바로 그 괴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괴물의 형체는 늘 뚜렷하지 않았다. 그 어떤 명암, 부피, 질감, 색체 따위가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거대한 우주처럼 끝없는 공허만이 감돌고 있는 하나의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 어둠덩어리이자 무시무시한 괴물은 그렇게 그늘 속에서 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 어째서일까. 왜 오늘도 내 앞에 나타나서 나를 그토록 괴롭히려 하는 것인가? 괴물의 존재를 확인하고 난 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이 찾아왔지만 애써 괴물을 무시했다. 그래, 이건 일종의 정신착란일 것이다. 세상에 괴물 같은 게 있을 순 없다.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미치광이일 뿐이지. 순간 할아버지가 떠올랐지만 애써 다른 생각에 집중했다. 이번 레포트는 어떤 형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좋은 아르바이트 하나라도 구해야 할 텐데, 오늘은 집에 가서 뭘 먹지? 인스턴트 음식은 이젠 지긋지긋해.

나는 이런 생각들에 애써 집중하며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을 연속하면서 최대한 괴물을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려 노력했지만 괴물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괴물을 따돌리기 위해 점점 걸음걸이를 빨리했다. 괴물을 따돌려야 해, 이젠 이 괴물을 떨쳐낼 때가 됐어. 따돌리자, 지워버리자,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꽤나 긴 복도를 거의 뛰다시피 걸어 순식간에 지나갔다. 복도를 지나고 그렇게 계속 걷고 또 걸어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교정을 계속 빠르게 걸었다. 나를 쫓아오지 못하게, 괴물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걷고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난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전과 같은 불안이나 두려움은 확실히 없었다. 혹시라도 다시 불안감이 찾아오진 않을까하는 생각에 그 어떤 다른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사이를, 왁자지껄 떠들며 킬킬대는 소녀들 사이를, 아이들과 함께 캐치볼을 하며 놀아주고 있는 한 아버지의 옆을 지나가며 홀로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그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내가 지나친 모든 이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장막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그들과 날 철저히 분리시키는 거대한 장막. 그 장막 속에서 나는 홀로 서있었다. 그 순간, 문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새까만 거대한 괴물이 나를 차츰차츰,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몸서리 쳐지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할 일이라곤 그저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 괴물이 날 잠식해가는 그 고통을 삭히며 내일은, 내일부턴 이 괴물이 찾아오지 않기를, 누군가 나를 이 괴물로부터 구원해주길, 그렇게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일뿐이었다.

아, 할아버지도 이런 느낌이셨을까? 이 고통을 매일 느끼셨을까? 문뜩 할아버지의 건조하고 메마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건조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괴물이란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한 분이셨다.

“괴물이 있구나, 괴물이 있어. 너희들은 믿지 않겠지만……정말로 괴물이 있어!”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순간 할아버지는 갑자기 괴물이 있다는 소리를 하시기 시작하셨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그런 이상행동을 할 만한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지극히 평범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치매가 걸리셨거나 한 것 역시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정신은 언제나 깨어있었고 행동도 평상시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저 괴물이 있다, 라는 소리만 반복하기만 할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증세가 전혀 나아지지 않자 부모님의 고민은 점점 깊어만 갔다.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괴물’을 없애기 위해 전국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박수무당을 큰돈을 주고 집에 모시기도 했고 유령 심리학자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리고 정신력에 도움이 된다는 여러 고가의 한약재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약들을 모조리 사들였다. 부모님은 할아버지를 위해 돈을 전혀 아끼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런 부모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괴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의 병적인 증세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할아버지는 항상 자신의 방에서 두려움에 떨며 말했었다.

“너무나도 두려운 괴물이야. 이 무시무시한 놈은 내게 어떤 약을 먹여도,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사라지지 않을 놈이야. 그러니, 그러니 제발 내 곁에 남아주렴. 어멈아, 아범아, 그냥 그거면 된단다. 단지 그뿐이란다. 날 홀로 남겨두지 말아 다오…….”

할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간곡하게 말하셨다. 곁에 남아달라고, 같이 있어주라고. 하지만 그것만큼은 부모님이 절대 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분 다 각자의 회사에서 절대 빠질 수없는 핵심 간부들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은 매일 아침마다 병적으로 말하는 할아버지에 사죄하듯 말했다.

“죄송해요…….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라 어쩔 수가 없어요. 정말 죄송해요…….”

부모님이 그렇게 얘기하면, 할아버지는 그토록 부르짖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시지 않았다. 두 분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던 것이었을까? 할아버지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곤 항상 그 메마른 눈으로 베란다를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뭐라도 있다는 듯이.

할아버지가 괴물을 언급한 지 한 달쯤이 다 되어갔지만 부모님의 일은 도저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할아버지가 혼자 지내는 시간은 점점 더 많아지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서서히 할아버지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항상 입에 달고 살던 괴물이란 존재를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괴물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어떤 다른 말도 꺼내지 않으셨다. 그저 조용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특유의 메마른 눈빛으로 허공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이런 갑작스런 변화에 걱정이 더욱 커졌지만 그렇다고 일을 그만 둘 순 없었다. 부모님의 일은 잠시라도 놓을 수 없는 그런 바쁜 일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할아버지가 서서히 나아질 것이라 억지로 믿으며 끊임없이 밀려오는 회사 일에 매달렸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은 의도치 않게 회사 일을 잠시 그만둘 수 있었다. 회사 일이 줄어들거나 휴가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일을 잠시 그만둘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할아버지가 우리 아파트 베란다, 그러니까 아파트 13층 높이에서 뛰어내리셨기 때문이다.

-

순간 가슴이 미칠 듯이 저려왔다. 마치 괴물이 뭉툭하면서도 날카로운 그 손톱으로 내 심장을 긁어내는 것 같았다. 호흡은 점점 가빠지고 식은땀이 흐르고 눈은 침침했다. 나는 근처의 허름한 벤치에 주저앉았다. 녹색으로 덕지덕지 칠해놓은 페인트가 아직 다 마르진 않았는지 벤치에서 기분 나쁜 끈적거림이 느껴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괴물로부터 탈출 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리를 부여잡고 한동안 생각에 몰두했지만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괴물이 나를 집어 삼킬 것이라는, 나도 할아버지처럼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나를 점점 더 압박했다.

나는 바지춤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할아버지처럼 가만히 당하기는 싫었다.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도움을 요청해서 이 괴물로부터 벗어나자. 갑자기 든 생각에 난 급하게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그러자 화면엔 친구들, 후배나 아는 동생들, 학교 선배들, 주변 친인척들, 그리고 부모님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떴다. 하고자 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저 여기 백여 명의 사람들 중 한 사람만 골라서 그에게 부탁하기만 하면 됐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주라고. 괴물로부터 나를 좀 구해달라고. 그렇게 전화를 걸어 부탁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쉽게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왜일까, 백여 명에 달하는 전화번호부를 두 번, 세 번씩 넘겨봤지만 맘 편히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전화번호부를 뒤지다가 초중고를 같이 나온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냐, 네가 웬일이냐?”

친구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나와라, 술이나 한 잔 하자.”

“술? 갑자기 웬 술?”

“그냥, 오늘 기분도 꿀꿀하고, 아무튼 빨리 K마트 앞으로 나와. 내가 살게.”

친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게……아무래도 지금은 좀 곤란한 것 같네. 나중에 먹게.”

친구의 말을 듣자 불안이 다시 들끓으며 나를 뒤덮기 시작했다.

“왜! 왜 안 된다는 건데? 왜!”

“뭐냐, 왜 갑자기 발끈하고 그래. 그냥 지금 술 마시러 나갈 사정이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넌 술도 잘 못 마시잖아. 한, 두잔 마시면 뻗는 놈하고 무슨 재미로 술을 마셔?”

“아, 그래도 일단은…….”

“됐다. 미안해, 인마. 나중에 내가 따로 살게.”

안 돼. 괴물로부터 나를 구해줄, 그런 도움이 필요하단 말이야. 제발 이대로 전화를 끊지 마!

“잠깐, 아주 잠깐만 나오면 안 되는 거야? 도움이, 네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 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 지금 괴물이 보여. 나를 집어 삼키려는 괴물이 보인단 말이야. 아마 이대로라면 나 미쳐버릴지도 몰라. 어쩌면 벌써 미쳤는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야. 잠깐만 나와서 그냥 내 옆에만 있어줘. 술? 그래, 그럼 안 마셔도 돼. 그냥 나와서 내 얘기만 들어줘. 단지 그뿐이야.”

수화기에선 한동안 응답이 없다가 코웃음과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괴물? 야, 심심하면 장난전화질 하지 말고 피시방이나 가라. 오랜만에 전화해선 이상한 헛소리를 지껄이네. 다음부턴 장난전화 하지 마, 임마.”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계속되는 뚜-뚜 소리만이 귀를 울렸다. 그 규칙적인 다이얼 소리에 불안과 두려움은 더 이상 주체할 수없이 증폭해갔다. 나는 점점 격양되는 불안을 품은 채 재빨리 다른 여러 사람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반응은 대부분 모든 사람이 비슷했다.

-선배, 미안해요, 오늘은 좀 많이 바빠서요

-야, 지금 내가 사정이 안 돼, 미안하다.

-괴물? 헛소리 좀 하지 마.

모두들 바빴고 모두들 상황이 곤란했고 모두들 무시했다. 마음속에 품었던 도움이란 자그만 희망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불안이 강력한 맹독이 되어 온몸을 지배해나갔다. 애초에 도움을 바라지나 말걸, 희망을 원하지나 말걸, 하고 의미 없는 후회만이 마음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후회와 탄식을 오고 가던 도중, 갑자기 하나의 커다란 의문점이 생겼다.

왜 사람들은 괴물에게 고통 받는 이들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하는 건가?

친구가 내 부탁을 거절한 것처럼, 우리 부모님이 할아버지의 간청을 무시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왜 그 간곡한 부탁들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것일까? 자기는 괴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거절을 할 수 있는 건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잠깐의 관심만 가져주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아, 그들은 과연 알까? 내 앞에 서있는, 할아버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괴물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닌, 사람들의 무관심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생겨난 순간의 의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거친 증오와 분노로 바뀌어갔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시선은 계속 땅바닥에만 고정시켰다.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은 차마 거리를 돌아 다닐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던 그곳으로.

집에는 예상대로 아무도 있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은 적막, 오직 그것만이 존재했다. 집으로 들어갔지만 캄캄한 어둠을 쫓으려 불을 키진 않았다. 이미 나 자체가 괴물이란 어둠 덩어리에 잠식당했기에, 불을 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식탁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 본 그것은 돈가스였다. 마트에서 파는 흔한 인스턴트 돈가스가 조그만 포스트잇 쪽지와 함께 있었다. 포스트잇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들, 오늘 엄마 늦으니까 이걸로 밥 먹으렴.

엄마의 쪽지였다. 하지만 나는 돈가스를 먹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먹지 못했다. 사람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와 뭉툭한 손톱으로 가슴을 계속 긁으며 파고드는 괴물 때문에, 전혀 먹을 수 없었다. 아, 엄마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을까?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괴롭혔던 것도, 지금 내가 이렇게 고통 받는 것도, 무서운 괴물 때문이 아닌 사람들의 철저한 무관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나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한동안 어둠속에서 가만히 서있던 난 문뜩 무언가를 깨달았다.

꿈, 강의실에서 꿨던 꿈의 내용과 일치했다.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던 나, 그리고 할아버지의 방에서 본 할아버지와 괴물, 그리고 할아버지의 검은 노트. 그래, 그 노트를 봤어야 했어. 나는 재빨리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할아버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기대를 하기까지 했었지만 역시 방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할아버지의 앉은뱅이책상이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 책상으로 다가가서 두 번째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 곳에 있었다, 꿈에서 봤었던 검은색으로 양정처리 된 그 책이 있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괴물을 견딜 수 있는 할아버지만의 방법이라도 적혀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도 괴물에 대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적혀있었으면……아! 혹시 꿈에서 할아버지가 내게 다 말하지 못한 그 말이 적혀 있는 건가? 나는, 나만큼은, 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요, 할아버지.

난 그 책의 표지를 살며시 넘겨봤다.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기.

아, 일기였구나, 할아버지의 일기. 나는 조심스레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그 책엔 정말 많은 날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거의 1년 가까이 되는 날들의 기록이었다. 처음엔 그래도 다소 평범한 내용이었고, 별다른 내용이 있지 않았다. 그러다 뒤쪽으로 가면서, 점차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이 격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어쩌면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날, 할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볼 수도 있었다. 난 재빨리 페이지를 빨리 넘겨 마지막 글이 써져있는 페이지로 넘어갔다. 할아버지는 과연 어떤 내용을 남기셨을까, 괴물에 관한 내용? 혹은 부모님이나 사람들에게 느낀 증오를 적어놓으셨을까? 그래, 그럴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듯, 할아버지의 고통을 무시했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오를 느끼셨겠지. 이런 점에서 나와 할아버지는 비슷했고, 서로 같다. 그러니 난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난 조심스레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내용을 읽어갔다.

-

2011년 5월 21일.

오늘이구나. 결심을 했던 그날이구나. 그런 결심을 실행할 날치곤 오늘은 날씨가 너무나도 좋아. 도대체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이젠 그 이유마저도 불투명해지고 있구나. 아, 언제부터였을까, 이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가. 그래, 처음 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다.

할멈이 나보다 먼저 떠난 뒤, 아들놈의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올라왔었지. 허름한 마을회관 대신에 커다란 공원이 있는, 고추를 널어놓던 널따란 마당 대신 자그만 베란다가 있는, 허름한 모양새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이 담겨 있는 그 집을 버리고, 이 고층 아파트로 아들놈을 따라 올라왔었다. 처음엔 모든 게 어색하고 익숙지 않았지만 그래도 편하고 쾌적했었다. 밭고랑에 매일 나가 심어 놓은 채소들을 가꾸며 땀을 흘릴 필요도 없었고 읍내로 나가려고 몇 십 분을 걸어갈 필요도 없었다. 더우면 그저 집에서 에어컨을 틀면 시원한 바람이 나왔고, 특별히 밖에 나갈 땐, 바로 택시를 타면 걸어갈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왜였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조용히 진동하는 에어컨 소리보다 밭에서 나던 시끄럽던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듣고 싶었고 이곳저곳을 빠르게 쌩쌩 달리는 택시보다도 그저 천천히, 민요가락을 흥얼거리며 마을회관까지 걸어가던 그 생활이 그리웠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더 그리웠던 건, 사람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만날 때마다 다퉜던 앞집 송씨, 동네 어른들에게 한 소리를 들을 때도, 늘 웃으면서 맡은 일 곧잘 하던 이장 경철이,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쉴 틈 없이 항상 시장통에 나가던 김 할매, 동네에서 지 또래 친구가 없어도 참 밝고 인사성 좋던 하늘이, 그리고 여기 올라온 지금도 내 꿈에 나오는, 잊을 수 없는 우리 마누라까지. 난 그런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 그리움을 채워준 건 오직 상현이 뿐이었다. 아들놈과 며늘아기는 처음엔 내 말상대도 해주고, 날 많이 신경써줬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아들 내외는 다시 일을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난 홀로 이 텅 빈 집안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홀로 있는 시간은 견디기 어려웠다. 모든 것이 낯선 그곳에서 나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하릴없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TV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상현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의 상현인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멍하니 있는 내게 맑게 웃으며 달려들었었다. 그 해맑고 순수한 웃음이 어찌나 예쁘던지, 이 나이에 애를 키운단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웃음을 보며 해낼 수 있었고, 혼자 있을 땐 그 웃음을 생각하고 고대하며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지. 그 웃음, 그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미 너무 늦어버렸겠지만, 다시 보고 싶어.

그 웃음이 상현이 얼굴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건 상현이가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였지.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상현인 온갖 학원에 몰두해야만 했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었다. 나 홀로의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이 슬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현이의 미래를 위해서, 공부를 한다는데 이 늙은이의 욕심은 버려야 하는 게 마땅했다. 다행히도 상현인 학원생활이 나쁜 것만 같진 않았다. 비록 집에서의 웃음은 사라졌지만 학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난 그걸로 만족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홀로 있을 때의 그 적막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눈앞에 괴물이 보이기 시작했었다. 홀로 있는 날 천천히 잠식하는 괴물. 괴로웠다. 그 고통이 괴로워 아들 내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은 내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현이, 그 착한 아이, 그 아이라면 내 곁에 있어주겠지. 하지만 어떻게 그 아이에게 말할 수 있을까? 공부하느라 바쁜 아이를, 한참 친구들과 뛰어노는 그 아이에게, 이 늙은이 곁에 있어달라고, 그 맑은 웃음을 다시 보여 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난 상현이에게 말하지 못했다. 말하진 않았지만, 간절히 바랬다. 나를 도와주길, 잠시만 내 곁에 있어주길, 나를 구원해주길, 내 말을 좀 들어주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그 아인 날 날 바라보고, 내 말을 들어주며 해맑게 웃어주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자기 방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아, 어쩌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었는지, 내 마지막 일기가 되겠지만, 아직도 헷갈리는구나. 이렇게까지 된 것이 내 탓인지, 아들내외의 탓인지, 상현이의 탓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난 상현이에게 희망을 걸었었다. 그 해맑은 아이에게, 그 아이라면 꼭 해낼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결국 그 어떤 변화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나만 이렇게 도태되었을 뿐, 그 어떤 이든 나로 인해 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젠 진짜로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이다. 홀로 맞는 이 죽음을 누군가 기억해주긴 할까? 아들내외와 상현인 날 생각하며 진심으로 슬퍼해줄까, 아님 주위의 시선 때문에 그저 슬픈 척만 할까? 사실, 내 죽음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해도 여의치 않다. 어차피 계속 혼자였으니까. 다만, 마음속에 계속 상현이가 응어리져있다.

아, 상현아 너만큼은……너만큼은, 너만은 날 구해줄 거라 생각했었는데……. 넌 대체 왜 나를 무시했던 것이냐?

-

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더 이상 어떤 말도 적혀있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일기는 그렇게 내게 이유를 물으며 끝이 났다. 할아버지의 일기를 다 보고 나자, 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목구멍 깊숙이에서 올라오는 질문들을 생각하고만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괴물에 잠식당하고 있는 내 구원 요청을 거절했던 것일까? 왜 난 할아버지의 그 간곡하고도 은밀한 외로움을 무시했던 것일까? 요청을 무시했던 그 사람들과 내가 다를 게 뭐가 있는 거지? 그렇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질문에 골똘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상현아, 너만큼은……너만은, 아, 상현아…….”

갑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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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해가 중천에 뜬, 지극히 평범해야 했었던 일요일에 수많은 양복쟁이들이 우리 집을 찾았다. 이전에 안목이 있던 한 구조대원이 그 사람들을 우리 가족에게 소개해주었다. 국내 최고의 지질학자, 토양학 교수, 굴삭산업 종사자, 심해 조사 연구원 등 마치 영화에나 나오는 드림팀을 꾸린 것만 같았다. 그들은 모두 우리 가족에게 일말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우리 집 안으로 향했다. 집 안에 들어선 그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뿜으며 금세기 최고의 발견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던 아빠의 주먹 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는 차마 그들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그때, 아빠가 뛰쳐나가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난 충분히 아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정말 도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사건은 하루 전, 나른한 오후에 일어났다. “당신은 뭘 잘했다고 소릴 치는 건데? 나가서 돈 버는 사람은 나잖아!” “그깟 쥐꼬리만 한 돈 갖고 와서 우리 가족 어떻게 다 먹여 살려. 게다가 그 돈도 당신이 레펠인가 뭐 하느라고 다 까먹는데, 나보고 뭐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 빚덩이들을 이젠 다 어떻게 할 거냐고!” 또 부부싸움이셨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엄마 아빠의 한바탕의 싸움. 그 모든 것이 다 돈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돈 싸움. 대학생인 형은 나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이렇게 부모님들이 싸울 때면 형은 어려서부터 나와 동생을 데리곤 이렇게 방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런 형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일찍부터 철이 들었다고 늘 칭찬을 받을 만큼 성숙했고 생각이 깊었다. “얘들아, 엄마 아빠 지금 화났으니까 일단 여기서 조금만 조용히 있자. 괜히 성질 더 돋우지 말고.” 형이 조곤조곤 말했지만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우리가 이렇게 숨어 있어야 해? 엄마 아빠 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말이야. 나도 이젠 중3이야. 정말 이런 거 이젠 지긋지긋 하다고.” 내 말에 형은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내게 어떤 말로 훈계를 놓거나, 나를 때리지도 않았다. 형은 마치 성인군자처럼 그렇게 참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뜨거워져만 갔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지? 다른 아이들은 다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던데, 왜 우리가족은 이렇게 박 터지게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갑자기 끌어 넘치는 설움에 그만 해선 안 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다 필요 없어. 그냥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럼 적어도 싸우는 것만큼은 적어질 거 아냐!” 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갑자기 톡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을 다 마치고 나자 형의 손은 날 때리려고 높게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땅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밖에서 엄마

  • 갑상선
  • 201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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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오래된 선풍기의 날엔 먼지가 가득 얹어져 있었다. 강풍 버튼을 누르자 화석처럼 굳어져 있던 것 같았던 선풍기가 아침잠을 막 깨고 난 뒤, 기지개를 피듯 아주 천천히,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왜 항상 이렇게 늦게 돌아가기 시작한 건지, 처음부터 빨리 돌아가면 좋을 텐데. 난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선풍기 가까이 댔다. 아아아아아-. 돌아가는 선풍기 날에다 대고 소리를 내니 마치 목에 진동기라도 삼킨 듯이 떠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 소리가 신기하면서도 뭔가 이질적인 게 맘에 들었지만 금세 다시 선풍기에서 고개를 뗐다. 왠지 한심한 짓이란 생각도 들었고 선풍기 날에 많이 얹어져 있던 그 먼지들이 내 목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조금 섬뜩하기도 했다. 고개를 선풍기에서 떼긴 뗐지만, 그래도 선풍기를 내 바로 앞에 둔 채 고정을 시켰다. 선풍기의 미지근한 바람이 내 땀들을 천천히 식혀주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그렇게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풍기의 바람이 옆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회전을 누른 것이었다. 재빨리 눈을 뜨곤 고개를 들자 엄마가 내게 땅콩을 날렸다. “야임마, 집에 너 혼자 있냐? 회전을 해 놔야 집안이 다 시원해질 거 아니여.” 갑작스런 땅콩에 난 짜증을 내며 말했다. “선풍기 하나 회전해놓는다고 방 안이 어떻게 다 시원해진다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내 짜증에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요 앞 마트에 가서 모기약 좀 사와라. 남은 돈으로 용돈 좀 하고.” 그러면서 엄마가 내민 건 만원이었다. 아싸, 좋구나. 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가는 밤하늘은 매우 깜깜했다. 별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구름에 가려 흐릿해진 달빛 아래로 수많은 날파리가 윙윙거리는 가로등만이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마트는 집 앞에 있어 금방 도착할 수 있었지만 자그만 집들 사이사이로 난 으스스한 골목들을 관통해서 가야했기에 마음이 썩 좋진 않았다. 다른 여타 골목들이 그렇듯이 그 골목길 또한 다른 여러 골목들로 향하는 샛길들이 여럿 존재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그 샛길들은 낮엔 이용하기 편했지만 가로등 불빛이 다 비춰지지 않는 밤엔 그런 샛길의 어둠이 굉장히 으스스했다. 난 그 샛길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트로 향했다. 집 근처에 있는 마트는 이제 슬슬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트 안에 들어가 보니 어느새 시계의 긴 바늘과 작은 바늘 모두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우선 모기약을 아무거나 대충 집어 들곤 콜라 1.5L짜리와 구구콘과 함께 계산했다. 구구콘을 핥으면서 나와 보니 그 잠깐 사이에 달빛이 더욱 흐려져 아까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난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골목길로 들어섰다. 가로등 빛이 비치지 않는 샛길은 여전히 으스스 했기에 난 그 곳을 안 보고 지나가려 애썼다. 그 순간이었다. 악! 단발의 비명소리. 빛이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좁

  • 갑상선
  • 2011-06-21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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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상선
  • 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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