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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 작성자 갑상선
  • 작성일 2011-08-07
  • 조회수 401

구멍

 

해가 중천에 뜬, 지극히 평범해야 했었던 일요일에 수많은 양복쟁이들이 우리 집을 찾았다. 이전에 안목이 있던 한 구조대원이 그 사람들을 우리 가족에게 소개해주었다. 국내 최고의 지질학자, 토양학 교수, 굴삭산업 종사자, 심해 조사 연구원 등 마치 영화에나 나오는 드림팀을 꾸린 것만 같았다. 그들은 모두 우리 가족에게 일말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우리 집 안으로 향했다. 집 안에 들어선 그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뿜으며 금세기 최고의 발견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던 아빠의 주먹 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는 차마 그들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그때, 아빠가 뛰쳐나가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난 충분히 아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정말 도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사건은 하루 전, 나른한 오후에 일어났다.

“당신은 뭘 잘했다고 소릴 치는 건데? 나가서 돈 버는 사람은 나잖아!”

“그깟 쥐꼬리만 한 돈 갖고 와서 우리 가족 어떻게 다 먹여 살려. 게다가 그 돈도 당신이 레펠인가 뭐 하느라고 다 까먹는데, 나보고 뭐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 빚덩이들을 이젠 다 어떻게 할 거냐고!”

또 부부싸움이셨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엄마 아빠의 한바탕의 싸움. 그 모든 것이 다 돈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돈 싸움. 대학생인 형은 나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이렇게 부모님들이 싸울 때면 형은 어려서부터 나와 동생을 데리곤 이렇게 방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런 형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일찍부터 철이 들었다고 늘 칭찬을 받을 만큼 성숙했고 생각이 깊었다.

“얘들아, 엄마 아빠 지금 화났으니까 일단 여기서 조금만 조용히 있자. 괜히 성질 더 돋우지 말고.”

형이 조곤조곤 말했지만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우리가 이렇게 숨어 있어야 해? 엄마 아빠 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말이야. 나도 이젠 중3이야. 정말 이런 거 이젠 지긋지긋 하다고.”

내 말에 형은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내게 어떤 말로 훈계를 놓거나, 나를 때리지도 않았다. 형은 마치 성인군자처럼 그렇게 참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뜨거워져만 갔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지? 다른 아이들은 다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던데, 왜 우리가족은 이렇게 박 터지게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갑자기 끌어 넘치는 설움에 그만 해선 안 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다 필요 없어. 그냥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럼 적어도 싸우는 것만큼은 적어질 거 아냐!”

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갑자기 톡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을 다 마치고 나자 형의 손은 날 때리려고 높게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땅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밖에서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형은 날 때리려다 말고 재빨리 방 밖으로 나갔다. 난 7살, 어린 동생을 방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충고한 뒤, 형을 따라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땅이 점점 갈라지더니 엄마가 서있던 부엌 쪽의 땅이 갑자기 밑으로 푹 꺼져버렸다. 땅이 밑으로 사라지면서 엄마도 같이 떨어지자 형과 아빠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엄마를 잡을 순 없었다. 형과 아빠가 엄마를 바로 앞에서 놓친, 엄마가 떨어진 그 자리엔 지름 5m정도의 커다란 구멍이 나있었다. 난 살며시 형 옆으로 다가가 그 구멍을 흘깃 봤다. 그 구멍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 구멍인지 그 구멍의 끝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고 오직 깊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수현 엄마! 수현 엄마! 대답해봐, 어디 있는 거야! 수현 엄마!”

아빠가 적막을 뚫곤 그 구멍에 대고 소리쳤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그 외침은 어떤 대답도 끌어내지 못하고 다시 메아리쳐 돌아올 뿐이었다. 아빠는 계속 그렇게 엄마를 찾아 외쳤고 형은 바로 전화기로 달려가 119에 구조를 요청했다. 그동안 난 그 구멍을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 깊은 구멍 속으로 사라진 엄마를 걱정하는 동시에,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그 깊은 구멍을 바라보며 어떤 두려움이 내 심장을 크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구조대원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집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그 안에 사람이 빠졌다는 신고를 받고 온 구조대원들은 마치 형의 신고를 별일 아니라고 여긴 듯, 나태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도착해서 그 커다랗고 깊은 구멍을 보자, 그들은 상부에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고 다급히 요청했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집 안은 20명이 넘는 구조대원들로 붐볐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쉽게 구조에 나서지 못했다. 어떻게, 왜, 어디서 생겼는지도 전혀 알 수 없고 오직 깊은 어둠만이 존재하는 고요한 그 구멍에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구조대원들을 보고 아빠가 소리쳤다.

“그러고도, 그러고도 당신들이 구조대원이야? 지금, 우리 와이프가 이 안에 빠졌단 말이야. 사람이 빠져 있다고, 사람이! 당신들 안 내려갈 거라면 로프라도 줘. 내가 가서 내 와이프 직접 구할 테니까!”

그 한 번의 외침으로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건 아마도 그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란 걸 그들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 암벽등반이나 레펠을 주로 하시던 아빠는 진심으로 구멍에 내려갈 기세로 레펠 장비를 챙기고 계셨다. 결국 그들은 아빠를 진정시키고 우선 3명을 선발대로 보내기로 작전을 짰다. 선발된 3명은 아무래도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뽑힌듯했다. 3명 모두 집안 튼튼한 곳에 로프를 고정시키고 플래시와 녹화장치를 몸 에 설치한 뒤, 그 깊은 구멍 속으로 향했다. 짙은 어둠으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고 숨소리는 좀처럼 안정되지 않고 격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들은 일체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게 완료됨을 확인하자 바로 로프 급강하를 통해 그 컴컴한 구멍 속으로 침투했다. 아빠와 내가 자꾸 그 구멍에서 어슬렁거리자 소방대원들은 위험하다며 우릴 밀어내기 일쑤였다. 형이 나와 아빠를 데리고 간신히 집 밖으로 향했을 때, 아빠는 울고 있었다. 아빠는 구조대원들이 오기 전까지 계속 엄마를 찾으며 절규했었다. 아빤 계속 그 구멍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아빠를 보니 난 순간 온몸이 화끈거렸다. 혹시 내가 그 말만 안 했었다면……. 그런 죄책감이 날 구멍에 자꾸 집착하게 만들었다. 과연 엄마는 무사할까? 엄마를 단지 그 구조대원들한테 맡겨도 되는 걸까? 아빠는 지금 너무 슬퍼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고, 형은 너무 허약하고, 동생은 너무 어리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나마 더 대담한 내가 어떻게든 나서서 그 구멍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금세 고개를 젓고 말았다. 난 도저히 그 끝이 안 보이는 어둠과 숨 막히는 고요함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훌쩍 밤이 되었지만 구멍으로 투입된 구조대원들한테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밖의 구조대원들이 위험하니 호텔에 가 계시라고 아빠한테 요청했지만 아빠의 완강한 거부에 우린 구멍에서 멀리 떨어진 방에서 잘 수 있었다. 그렇게 거실은 구조대원들에게 내주고 우리 가족은 방 안에서 자게 되었다. 오늘 하루 피곤했는지 형과 동생은 쉽게 잠들었다.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안 주무시고 계셨다. 다만 입을 굳게 다물고 천장만을 응시하고 계셨다. 아빠가 굳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아빠가 매우 슬퍼하고 있다는 걸, 후회하고 있다는 걸 아빠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럴 때 난 뭐 어떻게 해야 하지. 아빠를 위로해야 하나. 아빠의 잘못이 아니라고, 정작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 나라고…….

-현재 시간 2시 30분, 응답 바랍니다. 뭔가 특정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거실 쪽에서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아빠는 거실로 뛰쳐나갔고, 나 또한 아빠를 뒤따라 나섰다. 이미 잠에서 깬 구조대원이 무전기로 응답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어떤 소리가 났는지 정확하게 얘기해 봐.

-어…그게 좀 불분명한 소리였는데……마치 어떤 여인의 웃음소리 같았습니다. 지금도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인의 웃음소리란 말에 아빠가 구멍에 밀착해서 구멍 안에다 소리쳤다.

“수현 엄마! 당신이야? 수현 엄마, 대답해봐!”

구조대원들의 만류에도 아빠는 계속 버티며 소리쳤다. 그 순간, 아빠의 외침을 뚫고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에서부터 메아리쳐서 들려오는 소리.

-키키키키…크하하하하……흐하하…….

띄엄띄엄 들려오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 그건 엄마의 목소리였다. 그 소릴 들은 아빠는 더욱 절규하며 외쳤다.

“수현 엄마! 대답해봐 수현 엄마! 당신 지금 어디야,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대답해줘!"

그와 함께 덩달아 구조대원들도 바빠졌다.

-지금 당장 속도를 더 올려서 내려가. 그리고 얼른 소리가 난 곳의 위치를 파악해서 얼른 구출해 내!

그렇게 구조 작업은 밤새 이어졌다. 소리를 추적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던 엄마의 흔적은 밤을 꼬박 새웠지만 전혀 파악되지 않았고 아침이 되자 그 웃음소리마저 끊겼다. 그리고 구멍 안으로 들어간 구조대원들은 150m를 돌파한 순간,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 다음날은 온갖 학자들이 찾아왔다. 그 신기하고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이례적인 커다란 구멍에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가족은 그 구멍 때문에 비탄에 빠져있는데, 학자들은 오히려 그 구멍에 환희를 느끼는 것만 같았다. 과연 이것이 뭐 때문에 일어난 건가? 지구의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인가, 아님 정말 말도 안 되는 지각현상의 일부인 뿐인가? 그들은 아예 방 한 곳에 자리를 잡고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구멍에 대한 여러 가능성들을 제시했지만 그 의견들은 번번이 빗나갔고 구멍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들의 토론은 한없이 길어짐에 따라 구조작업도 점점 늦어졌다. 도저히 답에 근접한 이론 하나 조차도 건지지 못하고 토론이 점점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가 들어오며 소리쳤다.

“발견, 발견됐습니다! 초음파 탐지기에 사람이 감지됐어요.”

초음파탐사기로 알아본 구멍의 총 길이는 160m가량 이었다. 그리고 그 구멍 밑바닥에서 사람 4명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구멍 밑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형체가 탐사기에 뚜렷이 나타났다. 우리 가족이 탐사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한 구조대원이 말했다.

“투하된 구조대원 3명에 사모님까지, 4명이 딱 맞네요.”

구조대원의 말에 아빠는 그에게 매달릴 듯이 말했다.

“살아있겠죠? 아직은 구출이 가능한 거겠죠?”

“아직까진 정확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원들 연락도 이유 없이 두절된 마당에 대원들을 추가로 더 투입하기도 너무 위험하고, 무엇보다….”

구조대원은 고개로 한 곳에 모여 또 토론을 하고 있는 학자들을 가리키곤 말했다.

“저 양반들이 권한을 잡고 있는 터라, 우린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밖에요. 저희도 투하된 구조대원들과 사모님, 모두 다 얼른 구조하고 싶지만 저 양반들 말로는 뭐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느니,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가야한다느니 다 그런 소리로 가로막으니 저희야 뭐 할 게 없네요.”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형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없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아빠는 구조대원의 설명을 다 듣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멍하니 구멍을 바라보고 계셨다.

안에 생존자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뒤, 학자들의 토론은 다시 이어졌고 여전히 그 구멍에 대한 의문은 풀리진 않았지만, 그 구멍의 심도 깊은 조사를 위해 섣부른 구조는 당분간 실시하지 않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들은 말에 따르면 투입된 구조대원마저 실종된 상황에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의문의 구멍에 구조대원을 더 투입하는 건 너무 무모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결정에 형은 매우 반발하며 학자들을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학자들에겐 소수의 장담도 되지 않는 목숨 때문에 그 위대한 발견에 흠이라도 나게 하는 것이 탐탁치 않은 것 같았다. 결국 우리 가족은 인근 호텔로 이동 조치가 내려졌고, 우리가족이 살던 집은 일반인 출입 금지구역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빠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호텔 침대는 무척 무척이나 푹신푹신했지만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는 살아있는 건지, 앞으론 어떻게 될 건지,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의 무표정이 나를 한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구멍 안에 있는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난 다음부터, 아빠는 계속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젠 슬픔마저 메말라버린 걸까? 아빠는 호텔에 도착한 후에도 줄곧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 아빠의 모습에선 어떤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마치 피할 수없는 전투를 기다리는 장군 같았다. 지금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아빠는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향했다. 형은 이곳저곳에 격하게 전화를 걸기도 하고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리고 있었고, 아직 어린 7살 동생은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엄마를 애타게 찾으며 울다 지쳐 잠이 들어 있었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아빠가 나간 것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순간 엄습해오는 불안함에 얼른 아빠를 뒤따라서 나갔다.

새벽 2시였다. 새벽 2시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아빠의 거친 발걸음에서 비장함을 계속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쫓고 있단 걸 아빠가 눈치 채지 못하게 멀찍이 떨어져서 아빠를 쫓았다. 우리 집 대문 앞에는 순경 2명이 집을 지키고 있었고 그 뒤로 ‘일반인 출입 금지’라는 노란색 테이프가 낡은 청색 대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빠는 대문을 지나쳐 집 옆의 골목으로 빠졌다. 그리고 아빠는 집 담벼락 아래 있는 의류수거함을 밟고 담을 넘었다. 나 역시 재빨리 수거함을 밟고 담을 넘었다. 내가 담을 넘었을 때,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난 집 뒤편에 있는 보일러실로 향했다. 보일러실은 엄마가 항상 문을 열어두던 곳이다. 준비성이 뛰어난 우리 형과는 달리, 집 열쇠를 늘 놓고 다니는 나를 위해 엄마가 마련해둔 우리 가족만 아는 특별한 비밀 공간 같은 곳이었다. 보일러실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통하는 조그만 창문이 열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난 그 창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낮에 우리 집을 장악하던 그 학자들은 모두 돌아간 것 같았다. 난 조심스레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로 향했다. 새벽 2시, 바깥의 커다란 교회 십자가의 붉은 네온사인 불빛만이 투사되는 거실에는 거실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구멍과 그리고 그 앞에서 뭔가를 분주히 준비하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는 구조대원의 로프를 자꾸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빠는 내가 들어온 지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작업에만 열중하고 계셨다.

“아빠, 지금 여기서 뭐해?”

내 말에 아빠는 그때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린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네가, 네가 왜 지금 여기 있냐, 어?”

“그야, 난 그냥 아빠가 나가 길래 따라 나온….”

“그러니까 왜 따라온 거냐고!”

아빠는 굉장히 흥분하고 있었다. 엄마가 구멍에 빠진 뒤부터 이렇게까지 흥분한 아빠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난 당황스러워서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쭈뼛쭈뼛 한 자리에 서있었다. 아빠는 내게 소리친 뒤, 한동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아빠는 먼저 투하됐었던 구조대원의 로프를 8자 하강기로 아빠의 안전벨트에 달고 계셨다.

“아빠 그거, 그거 왜 다는 건데? 그거 레펠할 때 쓰는 거잖아. 그걸 지금 왜다는 건데, 어?”

아빠는 계속 로프만 만질 뿐, 대답하지 않으셨다. 난 아빠를 향해 재차 물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저 구멍 안으로 들어가겠단 거야?”

아빠는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빠는 매우 확고해보였고, 이미 모든 결심을 내린 듯했다. 아빠가 그럼 저 구멍에 들어간단 말인가? 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구멍 안을 들여다봤다. 마치 탄광의 수직갱도 같은 구멍은 그래도 달빛이 비치는 밤에 거리나 이렇게 십자가의 붉은색 네온사인 빛이 어느 정도 밝혀주고 있는 거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여전히 끝없는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깊은 어둠은 내게 원초적 두려움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아빠를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이 깊은 구멍에 들어가서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난 분주하게 로프에 안전 장비를 달고 계시는 아빠의 손을 잡곤 말했다.

“아빠, 이제 그만해. 여기 혼자 들어간단 건 무리야. 응? 구조대원들도 구조를 아예 포기한 게 아니라 잠깐 보류한 거래잖아. 게다가 형이 지금 여기저기 얘기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잘 풀릴 거야. 조금만, 조그만 더 기다려, 응?”

내가 간곡히 말했지만 오히려 로프에 안전 장비를 설치하는 아빠의 손만 더욱더 빨라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아빠는 구조대원의 로프와 아빠의 몸을 받쳐주는 안전장비를 연결하는 것을 모두 다 마쳤다. 그걸 다 마친 아빠는 조용히 말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싸우고, 서로 욕하면서 살아왔지만 그래도 내 아내인데, 내가 구해야지. 구조대원들은 이제 구조하지 않는다잖냐. 그럼 내가 가서 구해야지. 고작 이깟 구멍이 뭐가 무섭다고 내가, 내가 가지 않겠니? 저 밑바닥에 너희 엄마가 구조를 애타게 기다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안전 장비도 다 설치하고, 플래시도 2개나 준비해뒀다. 아빠 걱정할 필요 없고, 얼른 호텔로 돌아가서 네 동생 잘 돌보고 형 일 좀 잘 도와줘. 그게 아빠를 도와주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난 더 이상 아빠를 말릴 수 없었다. 날 바라보는 아빠의 눈동자나 내게 차근차근 말하던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확고했다. 난 구멍 앞에 털썩 주저앉고 말했다.

“그럼 기다릴게요. 얼른 다녀오세요.”

아빠는 큰 한숨을 쉬시곤 구멍에 들어갈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그럼 다녀오마.”

이 말과 함께 구멍 안으로 들어가셨다. 난 구멍으로 들어가는 아빠를 보지 않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빠가 저 깊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지 않길 바라면서, 꼭 돌아오길 바라면서 애써 불안함을 잠재웠다.

그리고 약 1시간 쯤 시간이 흘렀을 때, 전에 들었었던 엄마의 웃음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투하된 구조대원 3명의 웃음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애써 잠재웠던 내 불안을 폭발시켰다. 갑자기 아빠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 기분 나쁜 소리가 메아리치는 상황에서, 발을 헛디뎌서 온몸에 상처를 입어가거나 혹은 저 소리에 깜짝 놀라 입에 문 플래시를 떨어뜨리곤 완전한 어둠 속에 빠지는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밖에 도움을 청해야 하나? 애초에 내가 아빠를 보낸 게 잘못일지도 몰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내가 말렸어야 하는 건데……. 아냐, 아냐, 아빠를 믿자. 아빠라면 해낼 수 있을 거야. 여기서 경찰을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거야. 아빠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해. 결국 난 그 구멍 앞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계속 기다렸다. 하지만 날이 밝아올 때쯤이 되자, 그 구멍에선 엄마의 웃음소리와 함께 아빠의 웃음소리도 함께 들렸다.

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칠 때까지 그 곳에 남아있던 나는 다시 호텔로 이동조치가 떨어졌고 결국 남은 우리 가족은 호텔에 연금조치가 내려졌다. 그렇게 호텔에 갇힌 채로 1주일 정도가 지났는데, 다행히도 우린 간간히 집과 구멍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빠가 구멍으로 들어갔단 것이 알려지고 구조대원 2명이 더 투입되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고 그 2명 역시 연락이 두절되었다. 학자들과 구조대원들은 구멍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구멍에 녹화장치나 레이더, 진동 감지기 등 온갖 기계 장비를 투하시켜 봤지만 모두 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계 고장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사건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은 점점 흘러만 갔기에 아무리 철통같이 보안을 지킨다 해도 점차 그 구멍에 대해 기괴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안 좋은 소문이 점점 퍼지고 사회의 관심이 주목되기 시작하면서 정부 측은 구멍에 대해 정확하게 모든 걸 파악하기 전엔 일반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된다며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진 일체의 구조와 탐사 어느 것이든지 허용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우리 가족과 구조대원들의 가족들에겐 사망 위로금이 선사되었다. 부모님은 정작 그 돈 때문에 늘 싸우셨는데, 정작 이렇게 큰돈이 생겼을 때 부모님은 계시지 않았다. 형을 비롯한 구조대원의 가족들은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근거로 절대 사망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정부는 그들의 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이 사회는 구멍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나자 정부 측은 남은 우리 가족의 연금조치를 해제시켜줬지만 여전히 집 근처를 얼씬거리는 건 허용치 않았다. 형은 연금조치가 풀리자마자 위협을 무릅쓰고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인권보호단체, 여러 방송국 및 신문사, 수많은 시민 단체와 심지어는 청와대 앞까지 갔다가 제지당해서 돌아오기까지 했다. 똑똑한 형은 부당하게 묵살당한 구조대원 가족들과 우리 가족의 요구를 여기저기 외치고 다녔고 구멍에 대한 진실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모두 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형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상황은 전혀 개선된 점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형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쉬지 않고 뛰어 다녔다. 7살 된 동생은 부모님이 없이 지낸지 1주일, 이젠 어느 정도 이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이 되었는지 눈물을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 어리고 어리던 동생은 어느새 훌쩍 더 커버린 것만 같았다. 그럼, 난 그 1주일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1주일 내내 침대에 누워있었다. 형이 이곳저곳을 미친 듯 뛰어다닐 때도, 동생이 방구석에서 혼자 훌쩍이며 있을 때도, 나 혼자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천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서, 모두 다 잊고 싶었다. 구멍에 빠지던 때, 엄마의 비명소리나 구멍에 들어가던 구조대원과 아빠의 그 상기된 표정을, 그리고 그 구멍의 숨 막히는 고요함과 끝없는 어둠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잊고 싶다고 쉽게 모두 다 잊혀 지지 않았다. 왜 잊혀 지지 않을까, 도대체 이 가슴 속에서 뜨겁게 응어리져있는 것은 뭐란 말인가? 엄마에 대한 죄책감인가, 아빠를 말리지 못했던 후회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순전히 구멍에 대한, 그 짙은 어둠에 대한 공포란 말인가? 그렇게 온갖 생각들이 던지는 묵직한 의문들을 풀어 헤치는 데 1주일을 썼다. 난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새벽 2시, 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고, 동생은 잠이 들어 있었다. 난 그대로 호텔 밖으로 향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2시의 밖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난 그렇게 그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우리들의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집 앞은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난 경찰들이 보지 못하게 일부러 가로등 불빛이 비치지 않는 곳만을 통해 몰래 지나갔다. 그리고 골목에 안전히 들어섰을 때, 의류수거함을 밟고 다시 담을 넘었다. 여전히 집 뒤의 보일러실의 문은 열려 있었다. 난 보일러실의 창문을 통해 예전과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새벽 2시 15분, 어쩐 일인지 아빠와 왔을 때, 거실을 비춰주던 교회 십자가의 붉은 불빛마저도 오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실은 말 그대로 어둠의 상태였다. 거실 불을 켤 수는 없었기에 난 미약한 핸드폰 불빛으로 그나마 주위를 살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여러 구조대원의 로프가 연결되어 있는 커다란 구멍,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이는 것이라곤 컴컴한 어둠밖에 없는 그 구멍이었다. 그 구멍의 어둠은 마치 나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난 애써 구멍에서 시선을 떼고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방에 있는 궤짝에서 평소에 아빠가 쓰던 레펠 장비를 찾았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던 아빠의 레펠 장비. 난 망설이지 않고 과감히 레펠 장비를 들곤 다시 거실로 향했다. 그리곤 아빠가 앉아 있던 자리와 똑같은 곳에 자릴 잡고 앉았다. 난 떨리는 손으로 구멍과 연결된 로프에 아빠의 레펠 장비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장비를 연결하는 동안, 순간 본능적으로 뒤에 있는 구멍을 흘깃 봤다. 깊은 어둠, 마치 늪처럼 계속되는 어둠이 구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동안 잘 참아왔던 심장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자살행위와도 같다! 갑작스레 든 생각에 숨은 점점 거칠어졌고, 두려움 때문에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텅 빈 거실을 가득 매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면서도 난 장비를 연결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둘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이상한 말만 안했었더라면 엄마가 그렇게 되는 일이 없었을 지도…아빠를 어떻게라도 말리기만 했더라면……. 형은 우리 가족에게나 구조대원들의 가족에게나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형의 자그만 목소리가 그나마 진실을 전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부모님이 없는 마당에, 동생은 형의 존재가 절실했다. 그래, 하지만 나는? 내가 형처럼 나가서 우리 가족을 위해 무언가라도 할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구멍에 들어가서 우리 부모님과 사람들을 직접 구해내는 일. 아빠와 함께 레펠을 한 경험도 있으니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장비를 줄에 단단히 묶고, 입에 미리 준비해뒀던 플래시를 질근 물었다. 난 애써 구멍 안을 보지 않으려하며 구멍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히히히히……크하하하하하

갑자기 구멍 안에서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소리가 너무나 갑자기 들려와서 난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다행히 안전 장비가 받쳐주고 있어서 떨어지진 않았지만 구멍의 안쪽 벽에 오른쪽다리가 심하게 쓸려버렸다. 피가 나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쓸린 다리 때문에 벽을 딛고 제대로 서있을 수 없었다. 검은색 추리닝이 조금씩 검붉은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벽을 딛고 일어서려 했지만 그럴수록 다리의 통증은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왼발로 간신히 지탱하고서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이 상태라면, 이대로라면 구멍 끝까지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는 것 역시 할 수 없었다. 난 한동안 그대로 매달려서 구멍으로 들어가야 할지, 나와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던 도중 순간적으로 구멍에 들어가던 구조대원들과 아빠의 표정이 떠올랐다. 매우 상기된 표정, 그들도 역시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죽을지도 모르는 어두운 구멍에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갔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가족들을 구하러 나 역시 두려움을 극복해야할 차례였다. 꼭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난 차마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난 그대로 구멍 밖으로 기어 나왔다. 구멍에서 나오자마자 느낀 것은 엄마나 아빠, 그리고 구멍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그것은 날 더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난 구멍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고, 구멍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 안에서 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소리 내어 울었다.

갑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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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오래된 선풍기의 날엔 먼지가 가득 얹어져 있었다. 강풍 버튼을 누르자 화석처럼 굳어져 있던 것 같았던 선풍기가 아침잠을 막 깨고 난 뒤, 기지개를 피듯 아주 천천히,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왜 항상 이렇게 늦게 돌아가기 시작한 건지, 처음부터 빨리 돌아가면 좋을 텐데. 난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선풍기 가까이 댔다. 아아아아아-. 돌아가는 선풍기 날에다 대고 소리를 내니 마치 목에 진동기라도 삼킨 듯이 떠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 소리가 신기하면서도 뭔가 이질적인 게 맘에 들었지만 금세 다시 선풍기에서 고개를 뗐다. 왠지 한심한 짓이란 생각도 들었고 선풍기 날에 많이 얹어져 있던 그 먼지들이 내 목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조금 섬뜩하기도 했다. 고개를 선풍기에서 떼긴 뗐지만, 그래도 선풍기를 내 바로 앞에 둔 채 고정을 시켰다. 선풍기의 미지근한 바람이 내 땀들을 천천히 식혀주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그렇게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풍기의 바람이 옆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회전을 누른 것이었다. 재빨리 눈을 뜨곤 고개를 들자 엄마가 내게 땅콩을 날렸다. “야임마, 집에 너 혼자 있냐? 회전을 해 놔야 집안이 다 시원해질 거 아니여.” 갑작스런 땅콩에 난 짜증을 내며 말했다. “선풍기 하나 회전해놓는다고 방 안이 어떻게 다 시원해진다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내 짜증에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요 앞 마트에 가서 모기약 좀 사와라. 남은 돈으로 용돈 좀 하고.” 그러면서 엄마가 내민 건 만원이었다. 아싸, 좋구나. 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가는 밤하늘은 매우 깜깜했다. 별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구름에 가려 흐릿해진 달빛 아래로 수많은 날파리가 윙윙거리는 가로등만이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마트는 집 앞에 있어 금방 도착할 수 있었지만 자그만 집들 사이사이로 난 으스스한 골목들을 관통해서 가야했기에 마음이 썩 좋진 않았다. 다른 여타 골목들이 그렇듯이 그 골목길 또한 다른 여러 골목들로 향하는 샛길들이 여럿 존재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그 샛길들은 낮엔 이용하기 편했지만 가로등 불빛이 다 비춰지지 않는 밤엔 그런 샛길의 어둠이 굉장히 으스스했다. 난 그 샛길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트로 향했다. 집 근처에 있는 마트는 이제 슬슬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트 안에 들어가 보니 어느새 시계의 긴 바늘과 작은 바늘 모두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우선 모기약을 아무거나 대충 집어 들곤 콜라 1.5L짜리와 구구콘과 함께 계산했다. 구구콘을 핥으면서 나와 보니 그 잠깐 사이에 달빛이 더욱 흐려져 아까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난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골목길로 들어섰다. 가로등 빛이 비치지 않는 샛길은 여전히 으스스 했기에 난 그 곳을 안 보고 지나가려 애썼다. 그 순간이었다. 악! 단발의 비명소리. 빛이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좁

  • 갑상선
  • 201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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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상선
  • 2011-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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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당신은 그녀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녀를 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공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린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석한 긴 생머리로 얼굴을 반 가까이 가린 그녀는, 닳을 대로 닳은 허름한 자줏빛 치마와 낡은 미키마우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께에 그려진 미키마우스는 한쪽 귀는 볼록 튀어나왔지만 다른 한쪽 귀는 푹 들어가 이상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봉제 공장으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버스 뒤쪽의 좌석에 가서 앉았지만 그녀의 옆 좌석으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옆자리가 항상 비어있어도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다른 아줌마들이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있을 때도, 그녀는 홀로 창밖 풍경만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창밖 풍경을 보고 있을 때,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아줌마들의 주된 수다거리가 자신이란 것을. 아마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좁디좁은 버스에서 아줌마들과 그녀의 거리는 얼마 멀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아줌마들의 소리는 작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들으라는 듯이,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그녀의, 그 신기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그 미키마우스에 대해, 그녀의 그 가슴에 대해 마구 떠들어댔다. “세상에나, 저 흉측한 것 봐. 한쪽은 아예 보이지도 않은데 한쪽은 엄청나게 크네.” “에고, 나 같으면 차라리 한쪽에 뽕을 넣던지 하겠구만. 왜 저러고 다닌데? 진짜 사람들이 지켜보는 걸 즐기는 거 아니에요?” “그럴 지도 모르지. 저 가슴 한 짝 없는 것도 가슴 성형하다가 실리콘 중독이라던가? 그래서 잘랐다면서? 그러게 가슴수술 같은 건 왜 해가지곤. 망측하다니깐.” “그 얘기 못 들으셨어요? 저 여자 저쪽 바닥에선 꽤나 유명한 창녀였대요. 그런데 가슴수술하다 저렇게 한 쪽이 잘리고 나니 누가 써먹겠어요? 그렇게 버려진 거래요.”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그녀의 텅 빈 한 쪽 가슴과 풍만한 다른 한 쪽 가슴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얘기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아줌마들은 더욱 열성을 다해 그녀를 깎아 내렸다. 아줌마들의 그녀를 깎아내리는 대화는 공장에서도 계속되었다. 주로 짝을 이뤄 라인을 담당하는 봉제공장에서 그녀는 늘 문제였다. 아무리 성격 좋은 아줌마라 해도 그녀와 짝이 이뤄지면 불쾌함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다보니 아줌마들의 그녀에 대한 불만은 거의 하루에 한 번 꼴로 공장의 매니저의 귀에 들어가곤 했다. 그녀와 관련된 문제는 매니저 역시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한쪽 밖에 없는 창녀라니. 맘과 같다면 당장 내쫓고 싶었지만 그녀가 공장 내에서 일처리가 가장 빠르고 능숙하기에 그녀를 쫓진 못하고 늘 아줌마들과 말다툼을 할 뿐이었다. “에이, 나도 알아요. 나라고 꺼림칙 안 하겠어요? 솔직히 맘 같아선 나도 그만두게 하고 싶긴

  • 갑상선
  • 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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