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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빛 별빛을 따라

  • 작성자 봄빛나래
  • 작성일 2011-08-26
  • 조회수 452

밤빛 별빛을 따라

 

누렁이였다. 가로등 불 아래,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 더미 근처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며, 콧구멍을 벌름벌름 킁킁 거리고 있는 바로 저 개는. 우리 집 바로 맞은 편 살고 있는 노부부가 이틀 전부터 매일 애타게 찾아 다니기도 하는 바로 저 개는. 나는 누렁이에게로 한 발짝 다가서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누렁이의 목에 댕강댕강 매달려 있는, 가위로 잘랐구나, 싶은 잘려나간 개 목줄의 짤막해진 끈 자락이 눈에 밟혀서, 였다. 도대체 그 누가 저런 짓을, 속으로 웅얼거리며 나는 다시 누렁이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또 한 발짝, 정말 가위로 잘랐을까, 속으로 웅얼거리며, 내딛었다. 싹둑, 소리가 나며 잘렸을까, 잘릴 때 마구 터진 털실밥때문에 곤란하진 않았을까, 또 한 번 속으로 웅얼거리며, 나는 한 발짝 두 발짝, 내딛었다. 그러다가 바스락, 잘못 밟은 낙엽 무더기에 그만 요란한 소리가 일궈지며, 짓밟힌 낙엽 무더기에서 누렁이쪽으로 급하게 시선을 옮겼다가, 더 이상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은 누렁이를 발견, 그 대신 진흙바닥 가득히 찍혀있는 누렁이의 쉼 없는 발자국들을 발견, 하면서 밤빛은 별빛을 따라 더욱 짙게 물들어 갔다. 내일 아침에도 누렁아 누렁아, 하는 앞 집 노부부의 다 쉬어가는 목청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겠구나, 속으로 조용히 웅얼거리며, 나는 늦은 밤의 하굣길을 다시 재촉했다.

처음 그 일이 터졌을 때는 그저 그 일과 관련된 몇몇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내리는 어머, 그래요, 할 정도의 자그맣고 사소한 '일화'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그 일은 그 일과 연루가 됐건 안됐건 동네 사람들 모두의 입에 정신없이 오르내렸다. 어쩌면 좋아, 라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고, 결국 그 일은 일이 아닌 '사건'으로 취급받으며 마을 반상회의 주요 의논거리로 자리 잡았다.

이제 막 마을 회관을 지나가려는 찰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밤빛이 별빛을 따라, 이다지도 짙게 물들어 가는데, 마을 회관 창문이 밤빛을 별빛을 모르고 이다지도 환히 밝혀져 있다는 것이, 도저히 잠시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어 마을 회관 창문 가까이, 나는 내 오른쪽 귀를 슬쩍, 갖다 대었다.

"아, 글쎄 CCTV를 달면 된다니깐요."

딱히 누구라 꼭 집을 수 없는 웬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에이, 이 양반아, 그게 얼마 인줄 알고 그런 소릴 해?"

마찬가지, 딱히 누구라 꼭 집을 수 없는 웬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려왔다.

"맞수다, 그깟 개 몇 마리 지켜내자고 CCTV까지 사들이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지, 안 그러우?"

아까와는 전혀 다른 웬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동의를 구하고자 다그쳐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여보시오, 그깟 개 몇 마리라니, 자네야 물론 개를 안 키우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여기 모인 사람들을 좀 보게나, 이번 사건 때문에 기르던 개를 잃어버리거나, 현재 기르고 있는 개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 아닌가? 말조심하게나, 자네."

나는 단박에 그 목소리가 앞 집 할아버지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목소리가 바로 거의 다 쉬어가는 목청소리였던 것이다. 앞 집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고 회관 안은 잠시 동안,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앞 집 할아버지의, 기르던 개를 잃어버리거나, 현재 기르고 있는 개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 을 말하는 대목에서 다들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그럼, 오늘은 일단 당번을 뽑아서 마을 순찰을 돌도록 합시다."

잠시 동안의 오랜 침묵을 깨고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지요."

동의를 한다는 식으로 다른 누군가가 그 말을 잇고,

"그럼, 오늘 당번은 어떻게 정하지요?"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말의 연장선을 그었다.

"범인을 만나면 그 범인을 붙잡을 수 있도록 강한 남자들로 정하는 게……."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연장선에 대한 대답을 이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그 대답을 뚝, 잘라 먹으며 말했다.

"아니, 잠깐만요, 아무리 강한 남자라 하더라도 꼭 그 범인을 붙잡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범인이 무슨 흉기라도 들고 있으면, 대체 뭘 어쩌려고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경찰을 부르는 것이……."

누군가의 대답을 뚝, 잘라먹은 다른 누군가의 말을 또 다른 누군가가 또 뚝, 잘라먹으며 말했다.

"뭐요, 경찰이요? 나 원 참, 경찰이라면 우리가 열댓 번도 더 신고를 해 봤지요. 그런데 그 경찰인가 뭔가 하는, 그 나라를 지킨다는, 나랏돈 떼어먹는 놈들이 한다는 소리가, 그러게 대문 단속을 잘 하셨셔야죠, 개목 줄을 튼튼한 걸로 잘 채우셨셔야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뭐요? 지금 경찰을 부르자고요?"

그의 말이 끝나자 회관 안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온갖 말들로, 차마 더 이상 엿들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나는 몸을 다시 바로 세우고 마을 회관 안에서 새어 나오는,  시끄럽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그 말소리들을 무심히 귀에 담으며, 밤빛 별빛을 무심히 한 번 눈여겨보고는, 조용히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삐걱, 대문을 열고 집 앞 마당에 이제 막 발을 디디려던 때였다. 귓전 가득히 봄봄봄 봄이 왔어요, 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하고 마당을 쭉 둘러보는데 수돗대와 장독대 두어 대가 놓여있는 곳에, 할머니가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계신 것이 눈에 띄었다. 밤빛 별빛 아래, 할머니는 머리엔 큰 창과 리본이 조화를 이루는 밀짚모자를, 윗도리와 아랫도리는 각각 철쭉이 한 아름 실린 분홍색 블라우스와 백목련을 연상시키는 큼직큼직 주름이 진 하얀색 발목 치마를 차려입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할머니는 봄봄봄 봄이 왔어요, 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마당 가득히 낙엽들이 으스러지는데, 할머니는 그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 두 눈을 가장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던 것은 한 아름 가득 봄을 차려 입은 할머니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신발은 물론이요, 심지어 양말조차 신지 않은 할머니의 그 하얗고 주름진 발이었다.

"할머니!"

나는 소리치며 수돗대와 두어 개의 장독대 사이에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계신 할머니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얼른 슬리퍼 한 켤레를 주워 와 할머니의 발에 신겨주었다. 할머니의 발은 차디찬 가을 밤 바람에 무척이도 시려웠다.

"아이, 나는 신발 싫단 말이야."

내가 신겨준 슬리퍼를 할머니는 도로 벗어 던지며, 앙탈 부리듯 말했다. 나는 발 시리잖아, 소리치며 할머니가 벗어 던진 슬리퍼를 다시 주워와, 할머니의 시린 두 발에 신겨 주었다.

"아이, 참."

또 앙탈을 부리며, 할머니는 다시 신발을 벗어 던지려 했다. 나는 재빠르게 할머니의 두 손을 붙잡으며 할머니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할머니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추워,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

할머니는 내 손을 야멸치게 뿌리치며 삐죽이듯 말했다.

"역시, 은혜언니는 너무 무서워."

그렇게 삐죽이듯 말을 내뱉고 할머니는 집 쪽으로 종종걸음을 치더니, 가는 길에 슬리퍼를 이쪽에다 한 짝 획, 저쪽에다 한 짝 획, 벗어던지고는 이내 곧 방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정말이지, 무어라 말이 안 나왔다. 이쪽저쪽으로 한 짝 씩 획획 던져진, 할머니의 슬리퍼가 정말이지, 무어라 말이 안 나올 만큼, 경황없었다. 울고 싶기도 한데 차마 울지는 못하겠고 해서 입술만 꾹 깨물어 지는 노릇이었다. 마당 가득히 낙엽들이 이렇게나 으스러지는데 할머니는 여전히 봄, 인 것이……. 밤빛을, 별빛을 더욱 짙게 물들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7개월 전, 우리 집 마당의 낙엽들이 아직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풋풋하던 시절, 낙엽 대신 아카시아 꽃이 으스러지던 시절, 유독 햇볕이 온화롭고 따스하던 어느 날이었다. 막내 이모가 느닷없이 우리집엘 찾아왔다. 우리 민혜, 지금 유치원 봄방학이거든, 하면서 당신 배만한 캐리어 가방을 질질 끌며, 그리고 우리 민혜가 그러더라고, 엄마, 이러다가 우리 할머니 얼굴 다 까져먹겠다, 라고 해맑은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엄마는 막내 이모의 손을 꼭 붙잡고선 홑몸도 아닌 것이, 아무 연락도 없이, 이러기야, 했다. 나 역시 여긴 서울과 달리 아직 많이 추워, 이모, 하며 이모의 캐리어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청국장찌개와 김치부침개를 맛깔나게 요리하시던, 할머니가 한 손엔 주걱까지 들고 부엌에서부터 서둘러 서둘러 뛰쳐나왔다. 하얗고 주름진 그 두 발엔 슬리퍼를 얌전히 신은 채로.

"아이고, 미현아."

할머니는 반가움 반, 놀람 반으로 막내 이모의 이름을 부르다가, 이윽고 할머니, 하고 크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민혜를 발견하고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굴 가득 화색을 하고선,

"아이고, 우리 민혜."

하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활짝 벌어진 할머니의 두 팔 속으로 민혜는 쏘옥 안겼다. 민혜를 품에 안은 할머니의 모습과 그런 할머니의 품에 쏘옥 안긴 민혜의 모습은 마당 가득 으스러진 아카시아 꽃만큼이나 아름다웠다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당시와는 조금 달리 오늘의 나는 한마디 더 덧붙여야 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나머지, 그 만큼 더 시리고 아프다고.

할머니와 엄마와 막내 이모와 나와 민혜는, 그리고 막내 이모 뱃속에 든, 아직 이름이 없는 그 주먹만 한 아이도 함께,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때 맞춰 잘 왔네, 하는 할머니의 청국장찌개와 김치 부침개를 밥과 함께 오물오물 맛있게, 얼굴 표정만 봐도 틀림없이 그 맛이 전해지게끔 해맑게 웃으며, 먹었다. 그리고 이틀 남짓을 더 그렇게 맛있게 해맑게 웃으며, 먹었다. 아침 점심 저녁 차례차례 빠짐없이.

마지막 밥상. 그건 아침, 이었을 것이다. 아니, 아침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막내 이모의 두 눈이 심하게 퉁퉁, 부어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 날 아침 메뉴는 콩나물국과 계란말이, 취나물 초무침이었다. 정말 맛있었지만, 맛있지 못했다. 해맑게 웃으며 먹질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 어린 민혜마저, 젓가락을 끼적거렸으니. 아침 밥상 가득 흘러나오던 그 침체된 분위기를 그 어린 민혜마저도 알아차린 것이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의 전화 통화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막내 이모가 당신 혼자 안방에 들어가서는 문까지 굳게 걸어 잠그고 전화를 한 것이니. 당시의 나는 거실에서 민혜를 놀아주고 있었다. 막내이모가 들고 온 캐리어 가방에서 나온 인형놀이 세트를 거실 가득 풀어놓고, 민혜의 눈높이에 맞춰 민혜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은근히 안방 너머의 막내 이모를 염려하며.

덜컹,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막내이모의 전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도 이모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민혜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은근히 막내 이모를 염려하고 있었다. 이모에게 잠깐 가볼까, 생각하는데 때마침 부엌에 있던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엄마와 이모는 오래도록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간간히 소리높여 들려오는 몇몇 단어들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민혜 아빠나 그 여자, 외도와 같은.

아침밥을 다 먹고 엄마와 이모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또 다시 쿵, 문을 걸어 잠그고는. 할머니가 아침밥상을 치우는 것을 나와 민혜는 함께 도왔다. 반찬 뚜껑을 다 덮고 빈 그릇은 싱크대로 옮겼다. 그리고 할머니가 쏴아 물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할 참에는 민혜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가득 으스러지는 아카시아 꽃잎들을 주어다 새로이 아침밥상을 만들었다. 음, 이건 콩나물국이고, 음, 이건 계란말이야, 민혜가 말했다. 취나물 초무침은? 내가 물었다. 그러자 민혜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 그건 맛이 없잖아, 하였다. 나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가 다시 미소를 풀고 대신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은 채 말하였다.

"봄나물을 잘 먹어야 이뻐지지."

그러자 민혜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역시, 은혜 언니는 너무 무서워, 하였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는 거지만 그때에 그 민혜의 말을 할머니는 분명 들었을 것이다. 쏴아 하는 그 요란한 설거지 소리 사이로, 어느 틈엔가 분명 들었을 것이었다.

아카시아 꽃잎으로 만든 아침 밥상을 나와 민혜는 할머니에게 건넸다. 설거지가 끝나고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오신 할머니는 그 아침밥상을 새로이, 맛있게 해맑게 웃으며 먹었다. 그랬다. 그때 그 아침 밥상이 진짜 마지막 밥상이었다. 진짜, 마지막 밥상.

"은혜야, 민혜야, 요 앞 강에 가볼래?"

엄마와 막내 이모에겐 지금 많은 대화의 시간이 필요함을 할머니는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이 앞으로의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큰 파장을 가져올지 할머니는 미처 알지 못하신 것 같다.

그 날 그 요 앞 강가를 가던 길은 유독 아름다웠다. 벚꽃은 길게 카펫을 흩뿌리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멋진 조명을 밝혔다. 그리고 높은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듬성듬성 피어있는 새하얀 목련꽃은 우아한 샹들리에를 장식했다. 또한 요 앞 강가를 가던 길엔 유독 개 키우는 집이 많았다. 앞 집 노부부네 누렁이도 그러했고 철물집 흰둥이도 그러했고 쌀가게집 흑구도 그러했다. 그때마다 민혜는 그 개들에게 일일이 다가가 안녕 안녕, 하며 쓰다듬어주었다. 병균 옮을라, 만지지마, 라고 나는 민혜에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때 그 민혜의 그 두 눈동자가 차마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일일이 다가가 개들을 쓰다듬어주는 민혜의 그 두 눈동자는 아름, 다웠고 맑게, 빛났으며, 또한 깊었다.

"할머니, 저 개들 너무 불쌍해. 매일 저렇게 묶여서 살아야 하잖아. 하루쯤은 아주 하루쯤은……."

그런 말을 하는 민혜의 그 깊은 두 눈동자에 반짝, 눈물방울이 맺혀지는 것을 나와 할머니는 보았다. 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못한 채, 민혜의 그 깊은, 반짝, 빛나는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위로 저 개들 목줄을 잘라주고 싶어."

그 말을, 민혜의 그때 그 말을, 들었던 것이, 어쩌면 그 사건의 시작인지도 모른다고 지금에서야 나는 생각했다.

요 앞 강가에 이르러 나와 민혜와 할머니는 걸음을 멈추었다. 서울과 달리 아직 많이 추운 이 곳 강가는 여전히, 차갑고 시렸다. 강물은 항상 흐른다던 어느 시인이 목소리를 사뭇 무색하게 만드는, 일시정지, 해버린 강가였다. 그날따라 강가 주변에는 유독 나 홀로 뒹구는 얼음썰매가 여럿 놓여 있었다. 왜 그걸 발견하고야 말았을까, 지금에서야 나는 그 얼음썰매를 몹시도 원망했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에게 그 얼음썰매는 원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설렘의 대상이고 말았다.

"할머니, 나 저거 타도 돼?"

민혜는 말하며 손으로 얼음썰매를 가리켰다. 얼음썰매. 당시의 나는 민혜가 가리킨 그 얼음썰매를 보며 그저 얼음썰매, 하였다. 아무 말 없이, 얼음썰매의 존재를 그저 인지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그럼 할머니는? 그 당시의 할머니는 과연 어떠했을까? 할머니도 나처럼 그저 얼음썰매, 하였을까? 

당시의 할머니는 민혜의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큰 돌 몇 개를 주어다가 그 강가에 획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가는 여전히, 일시 정지한 상태였다. 그러자 할머니는 다시 강가로 가까이 다가가 발을 디뎌보더니 곧 온 몸을 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가는 여전히, 일시 정지한 상태였다. 이윽고 할머니는 걸음을 떼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처럼 차근차근 천천히,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더니 이내 곧 십대 소녀처럼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그래도 강가는 그 어떤 균열 하나 없이 그저 일시정지, 한 상태였다.

"괜찮다, 괜찮다, 은혜야, 민혜야."

소녀처럼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던 할머니가 말하였다. 나와 민혜는 조심조심 강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곧 시공이 일시정지해버린 그 강가로 발을 디뎠다. 처음엔 어린 아이처럼, 그러다가는 이내 곧 소녀처럼 사뿐사뿐, 걸었다. 시공이 일시정지 해버린 그 강가 위를 소녀처럼 사뿐사뿐, 사뿐, 사뿐.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어디지? 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민혜가 보였다. 얼음썰매 위에 얌전히 올라앉은 민혜가 보였다. 그리고 민혜주변으로 자글자글하게 그어져 있는 수많은 금들을 발견했다. 그랬다. 그 금은 어디선가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던 바로 그 금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내 안의 모든 시공이 일시정지 해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다가는 곧 들었다. 민혜야! 하고 크게 소리 지르는 할머니의 비명과, 쩌저져져…….쩍, 하는 강의 시공 깨어지는 소리를.

 

개나리꽃이 한 아름 핀, 노란색 슬리퍼였다. 유독 반짝, 빛을 머금은 채, 와장창, 시공이 깨어져버리고 만, 해빙하고 있는 그 강가 옆 풀밭에 얌전히, 놓여 있던 그 슬리퍼는.

할머니는 그 노오란 슬리퍼를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하굿둑 근처에서 하얗고 차갑게 얼어버린 어린 여자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적에도, 할머니는 그 노오란 슬리퍼를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민혜의 장례식 도중 막내 이모가 갑자기 배를 잡고 쓰러져버리는 통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의 응급차가 달려왔을 적에도, 할머니는 그 노오란 슬리퍼를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막내 이모가 홀쭉해진 모습으로 텅 빈 배를 매만지며 병원을 퇴원했을 적에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이모가 막내이모부와 함께 지방법원에 다녀왔을 적에도, 할머니는 그 노오란 슬리퍼를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막내 이모가 혼자 유럽행 비행기를 타고 머얼리 떠나갔을 적에도, 할머니는 그 노오란 슬리퍼를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마당에 심어진 그 아카시아 꽃 나무가 마지막 꽃잎을 떨어뜨렸을 적, 할머니는 가슴에 품어진 그 노오란 슬리퍼를 내려놓는 듯 싶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때부터 할머니는 머리엔 큰 창과 리본이 조화를 이루는 밀짚모자를, 윗도리와 아랫도리는 각각 철쭉이 한 아름 실린 분홍색 블라우스와 백목련을 연상시키는 큼직큼직 주름이 진 하얀색 발목 치마를 차려입게 된 건지도 몰랐다. 또한 신발은 물론이요, 심지어 양말조차 신지 않은 그 하얗고 주름진 발을 아무데나 내보이고 다니기 시작했는지도. 그 이후로 할머니는 걸핏하면 맨발로 밖에 나갔다가, 발바닥 가득히 나무가시를 박아 오거나 또는 유리병 조각을 밟고 피범벅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아파하지 않았다. 내가 할머니, 왜 그래! 하고 울음을 쏟아놓을 적에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가 신겨준 슬리퍼를 도로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흥얼흥얼 불렀다. 소녀처럼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봄봄봄 봄이 왔어요, 하고.

창밖으로 밤빛 별빛이 가을 밤바람을 따라 흠뻑, 쏟아져 들어왔다. 벗어놓은 교복을 가지런히 개어두고, 나는 샴푸 냄새가 진동을 하는 축축이 젖은 그 머리를 가을 밤 바람에 맡겼다. 살랑살랑, 젖은 머리가 코끝에 살짝 와 닿았다. 그러다가는 새삼 들었다. 집 안 가득 고요를 개고 덜컥, 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를. 나는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서며 창밖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지? 하고 마당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할머니가 보였다. 마당 가득 으스러지는 낙엽들을, 하얗고 주름진 발을 내보인 채, 소녀처럼 사뿐사뿐 지르밟는. 새삼 머릿속 가득히, 앞 집 누렁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하고 속으로 웅얼이는데 이번엔 새삼 그 옛날 민혜의 말이 머릿속 가득히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할머니 저 개들, 너무 불쌍해, 매일 저렇게 묶여서 살아야 하잖아, 하루쯤은, 아주 하루쯤은…….

가위로 저 개들 목줄을 잘라주고 싶어.

나는 서둘러 서둘러 할머니를 뒤쫓아 갔다. 슬리퍼도 한 켤레 챙겨서는, 최대한 서둘렀다.

"할머니!"

나는 소리쳤다.

"할머니!"

또 한 번 소리쳤다. 그러다가는 문득 발견했다. 할머니가 아니라, 손전등을 이리저리 내 비취며, 언뜻 보아도 지금 마을을 순찰 중이란 것을 알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을. 그들은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어른 남자 셋이었는데, 둘은 모르는 얼굴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철물집 주인 아저씨였다. 나는 서둘러 근처 풀가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마을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는 곳의 반대쪽으로 어기적어기적, 쭈그려 앉은 채, 걸음을 떼었다. 그리고는 내심, 현재 기르고 있는 개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데 살고 있는 사람을 생각했다. 누가 있지, 생각하며 여전히 어기적어기적 하고 있는데 눈앞에 마침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아, 하고 나는 조그맣게 소리치며, 그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 살고 있는 순애 할머니네 집 쪽으로 어기적어기적, 했다. 순애 할머니네 집은 밤빛 별빛이 가득 내려 앉아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어, 또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순애 할머니네 집 담장 안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는 발견, 했다. 하얀빛 털에 까만 반점 몇 개를 가진 어린 강아지 순애의 목덜미를 안녕 안녕, 하며 손으로 열심히 쓰다듬어주고 있는 할머니의 뒷 모습을. 나는 할머니를 향해 열심히 손짓을 날렸다. 할머니, 빨리 나와요, 어서, 하는 식으로.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히 안녕 안녕, 하고 있을 뿐, 빨리 나오라는 나의 손짓 따위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결국 손짓 날리는 것을 멈추고 나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엔가 할머니가 저 안으로 들어간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숨겨져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애 할머니네 집 옆에 나란히 놓인 밭길을 조심조심 따라가다보니, 순애 할머니네 집 뒷문이, 것도 활짝 열려있는채로 발견되었다. 나는 그 뒷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잠시 주변을 쭉 살펴본 뒤,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뒷문 문턱을 훌쩍 뛰어 넘었다. 새삼 심장 뛰는 소리가 귓전 가득히 울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곧 마을 사람들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할머니!"

나는 숨죽여 소리쳤다. 그러자 순애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할머니가 쓱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할머니를 향해 빨리 이리 오라는 손짓을 날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선 내 눈짓과 손짓을 피해 도로 획, 뒤돌아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할머니를 거의 끌고나오다시피 하며, 겨우 겨우 할머니를 밖으로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할머니의 하얗고 주름진 두 발에 슬리퍼를 신겨 주었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오른 손에 곡 붙들려 있는 가위를 역시나 겨우 겨우 빼앗았다.

"은혜언니, 미워!"

할머니가 소리쳤다. 그런데 그 소리침이 너무 커버렸다. 순식간에 이 집 저 집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댔다. 그리고 저 멀리 마을 사람들의 손전등 불빛이 어렴풋이 발견되었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는 마구 뛰기 시작했다. 최대한 마을에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방향을 잡은 채. 그렇게 얼마간을 달렸을까, 더 이상 시끄러운 개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의 손전등 불빛 또한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좀 마음이 놓였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할머니를 보았다.

"하, 할머니, 괜찮아?"

그런데 할머니의 얼굴 표정이 어쩐지 좋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가만 보니, 할머니와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그 예날 바로 그 요 앞 강가였던 것이다. 나는 애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잡고 있던 할머니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할머니, 괜찮아?"

그리고 다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그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는,

"나, 너무 무서워"

하는 것이었다. 무섭다, 은혜언니, 나 너무 무섭다, 나, 너무 너무, 은혜언니, 은혜…….할머니는 앞뒤맥락 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할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할머니, 하나도 안 무서워, 하나도, 하나도 안 무서워, 할머니, 할머니…….나 역시 앞뒤맥락 없이 계속해서 말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지금 이 어둠을, 지금 이 감정을 추슬러야만 했다. 그렇지 않음, 그렇지 않음, 앞으로의 우리에게 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 가자, 할머니, 응? 우리, 집에 가자……."

나는 말했고, 할머니는 오래도록 울음을 쏟아냈다. 강물이, 요 앞 강물이 밤빛 별빛에 유독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해서 더욱 가슴이, 가슴이…….시리고 아팠다. 나는 할머니의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또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할머니가, 이토록이나 눈물을 흘렸던 적이 과연 언제쯤이었는지, 그러다가는 새삼 처음이구나, 속으로 조그맣게 탄식하며, 할머니의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가슴에는 아직도 그 노오란 슬리퍼가 품어져 있음을, 깨달으며, 할머니, 이제는, 이제는 정말 내려놓아도 좋아, 이제는 그만 내려놓아, 마음속으로 조용히 소리쳤다. 여전히 강물은 밤빛 별빛에 유독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 반짝임만큼 할머니의 두 눈망울도 반짝였다. 할머니, 나는 조용히 할머니를 불렀고 할머니는 미안하다, 은혜야, 하였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덧붙이기까지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누우셨다. 그리고는 내 손을 붙잡으며, 잘 자, 은혜 언니, 하였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보며 지그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할머니가 잠이 들 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다. 곤히 잠이 드신 할머니에게 나는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며 가만히 앞 집 노부부의 누렁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누렁이를 비롯한 그 수많은 개들을 생각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조용히 할머니 방을 빠져나와 부엌에 잠시 들려 소시지니 빵인 하는 온갖 먹을 것들을 시장바구니에다 가득 담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들고 유유히 집을 빠져나왔다. 일단은 누렁이부터, 나는 생각하며 어젯밤 하굣길에 보았던 그 음식물 쓰레기 더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할머니와 함께, 민혜가 잠들어 있는 그 납골당에 찾아가봐야지, 그리고 막내 이모한테 전화도 해봐야지, 다짐했다. 해서 할머니에게 이제 봄은, 그 아팠던 봄은 다 지나갔다고, 머지않아 겨울이 올 거라고, 따듯하게,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알려줘야지 생각했다. 여전히 밤빛 별빛은 아름, 다웠고 맑게, 빛났으며, 또한 깊었다. 

봄빛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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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루테루보즈   그림을 그리는 애라고 했다. 명화 그림이 그려진 수첩 정도면 괜찮을 듯싶었다. 수첩을 카운터 점원에게 건네며 포장을 부탁했다. 점원은 수첩 바코드를 찍은 뒤 포장지 하나를 꺼냈다. 빨간 장미가 그려진 불그스름한 포장지였다. 그거 말고 다른 걸로 해주세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점원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으나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내 곧 점원은 하얀색 도트무늬 포장지를 꺼냈다. 깔끔하게 포장 된 수첩을 들고 팬시점에서 나왔다. 주변 경로를 이리저리 살피며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구겨져 있던 약도를 꺼내 펼쳤다. 마른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목적지의 본관건물은 이렇듯 시내 한복판에 자리매김하고 있으면서 별관건물인 목적지는 이렇듯 시내와는 한참이나 동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새삼 뼈저리게 느껴졌다. 한 5분쯤 걸어가니 주위는 온통 숲으로 변해 있었다. 울창한 나무 숲 사이로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가 사뭇 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목적지탓인걸까, 숲에서 묘한 기류가 흘러 나왔다. 그 묘한 기류란 '자연환경의 일부'라는 일상적인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소설 속 한 장면을 접한 듯, 약간은 몽상적이고 또 약간은 섬뜩한 것이었다.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옅은 봄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헤집고 숲 속으로 비쳐들었다. 보일 듯 말듯, 아주 간간히 비쳐들어 온 햇살이 가끔씩 살랑살랑 물살을 일으켰다. 아름다웠다. 지금 눈앞에 펼쳐 들어온 이 광경이 너무나도. 누군가가 하늘에서 얇고 매끄러운 실크 커튼을 내려준 것만 같았다. 아주 잠시나마, 내 머릿속을 뒤숭숭하게 만들던 온갖 잡다한 것들이 실크 커튼에 살포시 가려졌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느 무더운 여름 날 밤이었다. 갑작스레 엄마가 아버지란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다. 꾀죄죄한 몰골에 담배 찌든 내,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다지 반가워 보이는 모습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어린 시절 내가 엄마에게 울 아빠는 어디 있어, 하고 묻고 엄마가 곧 내게 이 세상 어디엔가 라고 대답한 것, 그게 다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무가 왜 봄이면 꽃을 피우고 바다는 왜 쉼 없이 파도를 치는지 하는 것과 같은 자그마한 물음표에 불과했었다. 열다섯 살의 나는 지금 눈앞에 아버지란 사람이 서 있는 것이 영 낯설었다. 아침에 함께 밥숟가락을 드는 것이, 늦은 밤 엄마도 없이 아버지란 사람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영 개의치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란 사람과 별 말을 섞지 않았다. 묵묵히 밥을 퍼주고 또 묵묵히 돈 봉투를 내주었다. 그럴 때면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혀 박혀 있는 아버지란 사람은 군 말없이 돈 봉투를 받아 후줄근한 추리닝 바지 주머니 속에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엄마는 매일같이 내 방에 들어와 나와 함께 잠자곤 하였다. 욕과 폭력, 그리고 술은 아버지란 사람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그리고 엄마는 매번 당했다.

  • 봄빛나래
  • 2010-12-28
인어

인어   오늘이 일요일이란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집을 뛰쳐나온 뒤였다. 이제 어디서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할지 눈앞이 막막했다. 원래는 미술학원에 가서 학원 선생님과 오늘 아침 일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이 일요일이란 걸 알아버렸으니 원래 생각했던 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걸었다. 내 다리는 운동용이 아니라서 그런지 금세 피곤함이 느껴졌다. 나른한 주말 아침답지 않게 햇볕이 쨍쨍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동네 공원 벤치가 눈에 띄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 냄새도 풍겨왔다. 벤치 위에 편안하게 몸을 뉘였다. 시원한 나무 그늘 사이로 짙게 무르익은 아카시아 향이 느껴졌다. 잠시 오늘 아침 일을 생각했다. "김 윤희, 너 이리 와봐." 이모의 손에는 나의 모의고사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김 윤희, 너 이모랑 한 약속 잊었어?" 미술 학원에 계속 다니는 대신 모의고사 국 영 수 성적을 모두 4등급 안에 들기로 한 약속이었다. "이모가 너 한번 경고했었지?" 마음이 초조해졌다. 부디 이모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도 더는 못 참아. 너 미술 학원 관 둬. 대신 입시 학원이나 다녀." 나의 간절한 바람이 깨져버렸다. 이모의 입에서 미술 학원을 그만두라는 말이 나와 버린 것이다. "이모, 지금 내 장래희망이 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내 장래희망은 꽤 유명한 화가가 되서 나의 미술품들이 전시된 전시관을 갖는 것이었다. "네 장래희망? 아아, 화가?" 이모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상해지 나는 더욱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래, 화가! 근데 지금 나보고 미술 학원을 그만두라고? 지금 내 꿈을 버리라는 소리야?" 이모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시더니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윤희야, 요새 그림 그려서 돈 버는 사람이 몇이나 되니? 미대 나와서 정말 그쪽 계통으로 일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되니? 응? 그림으로 돈 벌어 먹고 살려면 정말로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냥 그럭저럭한 실력가지고는 쫄쫄 굶는 것 말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이모의 말은 내가 그냥 그럭저럭한 실력이라고 하는 뜻 같았다. 갑자기 속에 있는 분노가 부글부글 화산 폭발을 일으켰다. "이모!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 내 실력이 그냥 그럭저럭 이라는 거야?" 이모는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래, 그 뜻이다. 너 실력 별로라는 뜻이다. 흥, 실력도 없는 게 까불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실력도 없는 게. 그 말 때문에 집을 나와 버렸다. 분노를 뛰어넘는 슬픔이 가슴을 사무쳐서 홧김에 집을 나와 버렸다. 엄마와 이모는 너무 달랐다. 가만 보면 둘 다 비슷한데 한 발짝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엄마나 이모나 둘 다 직업이 교사였는데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이모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또 엄마나 이모나 둘 다 남편이 없었는데 엄마는 사별을 한 경우였고 이모는 불임여성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당한 경우였다. 그리

  • 봄빛나래
  • 201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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