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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의 작가

  • 작성자 질리지않아
  • 작성일 2011-08-28
  • 조회수 363

작가1이 눈을 뜬다. 그의 두 망막에 흰색 무언가가 사로잡힌다. 작가1이 덤덤하게 자리에서 반쯤 일어선다. 흰색 천장, 흰색 벽, 그리고 흰색 바닥. 모든 게 흰색인 이곳, 작가1은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내리고 자신의 복장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 환자복. 작가1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는 주변을 더 자세히 둘러본다. 바닥에 자신 외에 누워있는 환자 하나, 중앙에 놓여 있는 새하얀 탁자와 새 하얀 의자 세 개, 그리고 그 의자 중 하나에 앉아 있는 새하얀 복장의 작가3. 작가1은 그에게 다가간다. 작가3이 천장만 바라보다가 작가1의 인기척을 느끼곤 작가1이 다가오는 걸 빤히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명찰 안 보이세요? 여기 파란색으로 작가3이라고 써져 있지 않습니까?”

작가1은 그제야 자신의 가슴팍을 본다. 자신의 명찰은 빨간색 글씨로 ‘작가1’이라고 써져 있는 걸 확인한다.

“뭐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도 오 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까?”

작가1이 의자 중 하나를 택해 앉는다. 작가3과는 거리를 두고 앉는다.

“감금된 겁니까?”

작가1이 작가3을 흘깃흘깃 보며 묻는다. 작가3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때 작가2가 잠에서 깬다. 작가2도 비몽사몽하며 자리에서 반쯤 일어선다.

“저기 한 분 더 일어나시네요. 세 명이 모이면 얘기를 나누죠.”

작가2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역시 모든 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빨리 오세요. 이 감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줘.”

작가2가 당황스런 얼굴로 남은 의자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로서 작가1, 작가2, 그리고 작가3이 중앙 테이블에 모였다.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작가2가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감금이야기를 시작한다. 역시 지금 막 일어난 사람이라 꽤나 당황한 모양이다.

“아니요. 어젯밤 집에서 잠들었고 일어나보니 여기였어요.”

작가1이 대답한다. 작가2와 3도 작가1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릴 여기 감금시킨 이유가 뭘까요? 이 문도 없는 방에·······.”

작가3이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니 덩달아 유행병처럼 작가1과 작가2도 머리를 긁적인다. 그때, 작가1이 작가3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 그러더니 동공이 커지며 놀라서 뒤로 자빠진다.

“왜 그러세요!”

작가2도 덩달아 호들갑이다. 작가3은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띠운다.

“저·······저기요! 임영철 작가님 맞으시죠? 미스테릭 소설의 대가! 장편 ‘절벽 끝에선’ 하고 ‘카톨릭’을 쓰신 분!”

작가3이 고개를 끄덕인다. 작가2는 그 말을 듣고는 작가3을 잠시 보고 호들갑을 잠재운다. 아무래도 작가2는 작가3을 모르는 눈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우리가 왜 이 문도 없는 방에 갇혔는지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잖아요? 일단 그것부터 풉시다.”

작가3이 작가1의 호들갑을 잠재우려 한다. 그러나 작가1의 커진 동공은 좀처럼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앉으세요. 저는 한 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요.”

작가2가 재촉한다. 작가1은 작가3에 시선을 놓지 않고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며 앉는다. 그러나 아직도 작가1의 표정은 실제로 외계인을 본 얼굴이다.

“일단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부터 알도록 하죠. 명찰에 작가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데 다들 작가분이신가요?”

작가3의 말을 듣고는 작가2는 그제야 자신의 가슴팍을 본다. 그러니 노란색 글씨로 ‘작가2’라고 쓰여 있는 명찰이 눈에 띈다.

“저는 무명 시인이죠. 요즈음 등단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작가1이 말을 꺼낸다. 이어 작가3이 바통 터치한다.

“저는 작가 1분이 말씀하신 대로 소설가입니다. 베스트 소설이 된 ‘절벽 끝에선’과 ‘카톨릭’을 썼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작가1은 더욱 황홀한 얼굴을 한다. 작가3이 약간 난처한 얼굴을 한다.

“그럼 이 명찰은 가짜네요”

작가2가 자신의 노란색 명찰을 가슴팍에서 떼어낸다. 작가1과 작가3의 시선이 작가2에게 몰린다.

“전 작가가 아닙니다. 전 한낱 공사장 인부일 뿐이에요.”

작가1과 작가3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다. 작가3은 심지어 화를 낸다.

“확실합니까? 작가 아니세요? 맞아요? 확실해요?”

“맞아요! 거 참! 왜 이리 화를 내실까!”

“그런데 왜 ‘작가’라는 명함이 붙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작가’가 다른 뜻도 있나?”

작가1이 또다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작가3을 바라본다. 작가3은 은근히 작가1의 눈빛을 피하며 대답한다.

“아니요.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을 뜻하는 것 말고는 다른 용도로는 안 쓰입니다.”

“그러면 이곳에는 과거의 작가인 사람, 무명작가, 이름 있는 작가를 모아놓았군요”

작가2가 입술을 꽉 깨문다. 작가1과 작가3이 작가2에게 다시 시선을 집중한다.

“작가분이셨어요? 과거에?”

작가3이 웃음을 되찾으며 묻는다. 작가2는 고개를 끄덕인다.

“10년 전에 그만뒀습니다. ‘걸음걸이’라는 시집을 냈지요.”

작가1과 작가3이 동시에 놀란다. 그리곤 작가2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뭐·······.‘걸음걸이’란 시집이 대박이 나긴 했지만! 그때 아내가 사채를 써서 그만········.”

작가2가 작가1과 작가3의 부담스런 눈빛을 피하며 대답한다. 그때 작가3이 큰 소리를 내며 작가2를 향해 삿대질한다.

“아~! 김형식씨! 신문에서도 갑자기 사라진 시인이라고 대서특필됐던!”

작가2의 표정이 안 좋다. 작가3은 머쓱해하며 손가락을 접는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 작가1이 작가2와 작가3을 번갈아본다.

“그럼 이거 하나는 확실해졌네요!”

작가1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꿔보려 애써 즐거운 목소리로 소리친다. 덕분에 작가2와 작가3이 작가1을 주목한다.

“우리 명찰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렇게 유명하신 두 분을 모셨는데 명찰이 무슨 의미겠어요? 또한 이 명찰의 색깔도!”

작가1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가1의 말이 끝나자 분위기는 다시 어색해진다. 작가1은 다시 작가2와 작가3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무거운 분위기가 흰 색 천장에서부터 지그시 밀려 내려온다. 그때 다행히도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제는 웃는 거야! 스마일 어게인! 행복한 순간이야. 해피 데이! 움츠린 어깨를 펴고 이 세상 속에 힘든 일 모두 지워버려! 슬픔은 잊는 거야. 네버 크라이! 뜨거운 태양 아래. 써니 데이! 언제나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바라면 돼!

어색한 분위기가 뭉개지고 모두가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을 자세히 보니 백색의 스피커 달려 있다.

“뭐야!”

작가3이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찡그린다. 그때 작가3에게 대답하듯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긴 뭐야! 엄정화의 페스티발이지!”

“너 누구야! 네가 우리 감금한 거지!”

작가3이 애꿎은 스피커를 향해 삿대질한다. 스피커가 억울함을 느꼈는지 음악이 더욱 크게 나온다.

“네! 맞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감금한 장본인이!”

“음악 좀 줄여! 귀 따가워!”

작가3의 매서운 기운에 음악이 줄어든다.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알았어! 성질 좀 내지 마!”

“성질 안 내게 생겼냐! 감금됐는데!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그러나 작가3은 누군가의 목소리보다 더 선명하다. 덕분에 작가1과 작가2는 구경만 한다.

“역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시네요. 그럼 저도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한 가지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건 바로 지구상에 누구도 쓰지 않은 최고의 시 한편을 써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주머니에는 매직이 있을 겁니다. 그 매직펜으로 테이블 위에 누구도 범접 못 할 최고의 시 한편을 쓰면 이 방을 나갈 수 있습니다. 셋이 힘을 잘 모아서 잘 써보세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라진다. 작가3이 전기밥솥처럼 한 번에 기운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이게 뭔 소리 입니까?”

작가2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인다.

“작가들을 굳이 이렇게 감금시켜놓고 최고의 시를 쓰라는 목적이 뭘까요?”

작가1은 더욱 초롱초롱해진 눈빛으로 주머니를 더듬거리더니 자신의 명찰 색과 같은 빨간 색 펜을 꺼낸다.

“뭐긴 뭐야! 그냥 이놈은 우리를 죽이려는 거야!”

작가3이 의자를 발로 차고 흰 색 바닥에 드러눕는다. 그러니 작가3이 입고 있는 옷이 병실 바닥 색이랑 같은 흰 옷인지라 작가3은 얼굴만 존재하는 시체와 같아져버렸다.

“진짜 죽이는 게 목적일까요?”

작가1은 드러누운 작가3을 일으키려는 눈빛으로 작가3을 바라보며 말을 한다. 그러나 작가3은 미동도 않는다.

“그럼 그쪽은 최고의 시를 여기서 쓸 수 있겠소? 아니! 그 보다 최고의 시라는 게 있는 거야?”

작가2도 신경질을 내며 의자를 발로 차고 자리에 눕는다. 작가1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진다.

“최고의 시는 어딘가 존재하겠지. 그러니 노벨 문학상이란 게 있지 않겠소?”

작가3이 작가2의 질문을 듣고 마음속으로 약간 울컥 했는지 반쯤 일어선다. 작가1은 또다시 작가2와 작가3을 번갈아 보느라 바쁘다.

“아니. 없소. 그러니 우린 죽는 거요. 여기서 목말라 죽는 거라고! 최고의 시라는 게 어디 있어! 도대체!”

작가2도 덩달아 작가3처럼 반쯤 일어선다. 작가2와 작가3사이에 얼음보다 차가운 기운이 벽을 친다.

“있어! 모든 것에는 최고라는 게 존재하지. 당신은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 막노동꾼이나 하는 거라고! 모든 영역에는 최고가 존재해! 예술에도 말이야!”

“뭐라고! 이 자식이! 언제 봤다고 사람을 비난해!”

작가2가 작가3의 멱살을 잡는다. 작가1은 동공은 커졌으나 어쩔 줄 몰라 그냥 자리에 앉아 구경만 한다.

“비난? 이게 비난이라고! 난 당신한테 충고하는 거야! 모든 것엔 최고가 존재한다고 지금 충고하는 거라고!”

작가3이 작가2의 멱살을 풀려고 아등바등한다. 일촉즉발이다. 곧 있으면 작가2가 작가3을 후려갈길 것 같은 분위기다. 그제야 작가1은 신속히 둘을 떼어 놓는다. 그러나 작가2는 여전히 눈이 살인적으로 붉다.

“그럼 당신이 말 한대로 최고는 있으니 한번 써봐! 최고를 써보라고! 다행히도 당신이 베스트셀러를 두 권이나 출간한 작가니 할 수 있겠네!”

“응. 그래서 지금부터 쓰려고! 나도 처음엔 최고를 못 쓸 줄 알았는데! 이곳에는 당신 말대로 최고인 내가 있으니 말이야! 나갈 수 있겠지. 여기서 내가 최고의 시를 써서 탈출하더라도 당신은 나오지 말라고!”

작가3이 주머니를 더듬거리더니 파란색 펜을 꺼낸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다. 작가1도 자연스레 작가3 옆에 앉는다. 작가2는 방구석에 쪼그려 앉는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작가3이 펜 뚜껑을 열며 작가1에게 묻는다. 작가1은 난처한 얼굴을 한다.

“저는·······.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작가3이 작가1을 쏘아본다. 작가1이 마른 침을 식도로 넘기며 천장을 바라본다.

“작가는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냐! 신이 내려주는 거지! 자넨 그것도 몰랐단 말인가? 작가라는 직업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대역 죄인이야. 그래서 하늘에 신이 그들을 평생 글을 고통 받으며 글을 쓰라고 벌을 내린 거지. 그렇게 해서 작가는 탄생하는 거야. 아무나 작가가 되는 게 아니라고! 알겠나?”

“아········예.”

“그리고 요즈음 사람 중에는 예술엔 정답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 개 쓰레기 같은 말은 집어치우라고 하게! 그럼 어찌 평론가가 존재하겠는가. 평가할 수 있는 건 어딘가 정답이 있기 때문이지. 우린 시를 쓰면서도 왠지 마음속으로 형식을 생각하지 않나? 그런 걸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예술에는 정답이 있다는 걸 증명해주지.”

작가3이 말을 잘한 자신이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인자하게 끄덕인다.

“지랄하고 있네!”

작가2가 어이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슬금슬금 테이블로 걸음을 옮긴다.

“넌 생각부터가 썩어 먹은 작가야!”

작가2가 작가3을 향해 삿대질한다. 작가3이 매일 자신이 하던 행동을 작가2가 자신을 향해 하는 걸 보니 울컥한다.

“뭣이!”

“예술은 정답이 없어. 그러니 새로 운 것이 창조되는 거라고! 작가 ‘이상’이라는 사람은 당신은 알겠지? 이상이란 사람을 처음에 문학계에서 받아줬나? 그 사람의 시 형식은 정답이 아니었으니까 받아줬을 리가 없지. 하지만 후세에는 어떤가? 그 사람은 위대한 우리나라의 작가 중 한 명으로 뽑히고 있지 않나?”

작가3의 얼굴이 점점 파래진다. 그의 인내에도 한계가 오는 듯하다. 그러나 작가3의 반응에도 작가2는 자신의 말을 이어간다.

“또! 작가는 탄생하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뭐든 노력하면 되는 거라고! 과학적으로 인간의 뇌는 한계가 없으니까! 신체능력이든 정신능력이든 예술능력이든 성장시키면 뭐든지 가능해지는 거야.”

작가3이 참다 못 해 작가2의 멱살을 잡는다. 작가2의 눈빛은 불타오른다. 작가1은 이번에도 동공만 커질 뿐이다.

“이 자식이! 아까부터 왜 말대답이야! 작가가 탄생하는 게 아니라면! 너는 왜 작가를 포기했냐!”

“그건 집안 사정이라고 아까 말했잖아!”

작가2가 작가3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작가3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A4용지처럼 바닥으로 나뒹군다.

“내가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고!”

흰색 바닥에 붉은 선혈이 묻는다. 작가3이 기절한 듯 아무런 기척도 없다.

“어이! 작가1! 잘 보라고 이제부터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줄 테니!”

작가2가 주머니를 더듬거리더니 노란 펜을 꺼낸다. 그리고 탁자 위에 시를 써내려 간다.

최고의 시

이 시는 최고의 시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이 시는 날카로운 칼보다 더 무섭다

보이지 않고 베어 가기에

이 시는 심장을 뚫는 총보다 더 무섭다

소리 내지 않고 심장을 뚫기에

범접할 수 없는 이 시는

최고다.

어떤 명사, 동사,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최고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는

최고의 시

나는 그러한 시를 쓰는 하찮은 시인이기에

이 시는 최고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느낄 수 있기에

- 작가2

작가2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펜 뚜껑을 닫는다. 그러니 작가2 등 뒤에서 빛이 쏟아진다.

“작가님! 저기 문이 보여요!”

작가1이 흥분한다. 작가2가 뒤돌아선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미닫이문이 보이고 그 틈으로 빛이 센다. 작가2가 다급하게 가서 문을 열어젖힌다. 긴 복도와 그 끝에 회색 철문.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한다.

“작가1씨! 나가죠!”

“작가3씨는 어쩌죠?”

“아이! 그놈은! 미션을 완수했으니까 정신 챙기면 알아서 나오겠죠.”

작가2가 복도를 허겁지겁 달려 현관에 다다른다. 작가2가 거침없이 현관문을 연다. 그동안 못 보았던 뜨거운 태양이 작가2의 이마에 쏟아진다. 매우 따듯하다.

질리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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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라거스

사월이면 네가 온다고 했는데. 이삭 끝이 단단해지고 가장 향긋한 봉오리 향내가 날 때. 분명히 약속했는데. 네가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닌데. 약속대로라면 세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손톱을 자꾸 뜯게 돼. 냉장고를 열고 멍하니 아스파라거스만 바라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딱딱하게 서 있는 초록색 기둥을.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보관해두라 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돼. 사월 안에 오지 않을 거면. 살짝 데친 후에 랩에 둘둘 싸서 냉동보관 하라고 했으면 좋잖아. 진작 그랬으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데. 네가 오면 오랜만이야 하고 냉동고에서 랩에 싼 아스파라거스를 꺼냈을 텐데. 조리하기 어려운 식재료야. 아스라파거스는. 내가 필러로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벗기려 할 때마다 너는 내 손을 멈추게 했잖아. 그렇게 다루는 거 아니라고. 끝과 봉우리가 가장 맛있는 거니까 아래쪽 반 정도만 필러로 껍질을 벗기고 밑동에서 일 센티미터는 잘라내고 껍질을 벗기는 거라고. 사실 이 말이 이해가 안 돼. 나는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몽땅 벗겨 그 속을 알고 싶은데. 조리시간에 따라 씹히는 느낌도 다르고 맛도 다른 게 아스파라거스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의 부재가 느껴질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했어. 너는 나를 잠시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에 올려둔 거라고. 네가 씹히는 게 하나도 없는 무른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싶은 거라고.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했어.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바로, 나는 아스파라거스를 데치고, 랩에 싸서 냉동고에 넣어야 했어. “잠시 시간을 갖자. 4월 안에 돌아올게.” 다시는 녹지 않게, 최악에 온도로 꽁꽁 얼렸어야 했어. 꺼내면 다시 녹을 수 있으니까, 냉동고는 못 열게 자물쇠로 잠가 놓았어야 했어. 근데 나는 바보같이 네 말을 믿어버린 거야. 돌아올 거라는 네 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넣어둔 아스파라거스가 흔들려. 냉장고 안에 바람이 부나? 눈이 시큰거려. 냉기를 너무 쇘나?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정성스레 하루에 한 번 물을 갈아줬는데. 네 봉우리가 단단해지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가만히 앉아 이것만 보는데도. 째깍째깍 너무 잘 가. 조금만 있으면 5월이네. 그럼 너는 약속을 안 지킨 거고. 너를 나를 진짜 배신한 거네. 5월이면 나도 아스파라거스를 버릴래. 아스파라거스는 4월이 가장 맛있으니까. 너 없이 필러를 사용하는 것도, 오일을 두르고 팬에 올리는 것도, 자신 없으니까. 하루에 한 번 물 갈아주기 싫으니까. 싱싱하게 기다리기 싫으니까. 나도 잔인하게 시들어 버린 후에 새롭게 피어나고 싶으니까. 생장점 순 끝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 좋다고, 네가 한 번 경고했던 내용이 이제야 생각나네. 플라스틱 통을 꺼내 초록색 기둥을 살펴보니 생장점 순이 벌어져 있어. 아, 그래서 네가 나를 떠난 거네. 아·······. 너를 사랑하는 동안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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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나가면 바로 보이는. 분리수거함 앞에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겨울에 보면 눈이 쌓여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케 하는. 쓰레기봉투들. 하얗게 잘 포장된. 꼭 크리스마스 날 산타할아버지가 건네줄 선물처럼. 하지만 가까이 가면 눈을 돌리게 되고 코를 틀어막게 되는. 그런 것들이 심장 한구석에 피라미드처럼 쌓이면 나는 설거지를 하게 된다. 그래, 분명히 그러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수도꼭지를 위로 올리고 물이 나오면 아버지가 때를 밀기 전에 탕에 들어가 몸을 불리는 것처럼 접시들을 대야에 담아놓으면 되는 것이다. 몇 분 후에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접시를 하나 들어 그것의 원형도 찾아볼 수 없게 거품만 잔뜩 묻히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수도꼭지를 위로 올려 그것의 원형을 찾도록 빡빡 거품을 씻겨주면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목욕하는 것처럼 똑같이. “쨍그랑!” 하지만 오늘은 매일 밤 오는 쓰레기청소부가 분리수거함 앞을 그냥 지나쳤는지. 혹은 그것들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착각해선지. 마음 한구석 속 쓰레기가 그대로다. 검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거품이 가득 찬 밥공기 안에 거품이 붉게 터진다. 누군가를 향한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이틀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심장 속에서 붉게 터져 오른다. 아프다. 심하게. 4. 항상 나의 성적에 붙는 숫자. “한성아. 너 성적 좀 올려야 하지 않겠니?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전교 4등·········.높은 등수이긴 하지만············.” “알아요. 선생님·········.” “이번이 마지막 시험인 거 알지?” “예.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가 봐.” 선생님의 부름에 끌려가듯이 간 교무실에서 나왔을 땐 놀이공원에 고장 나서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는 기분을 느낀다. 조명은 무슨 일인지 다 소등되어 있다. 유일하게 빛나는 곳은 내가 남아서 공부할 교실이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간신히 한 손으로 창가에 기대서 걷는다. 터벌터벌. 걸음은 내가 옮기는 것이 아니다. 옮겨지는 것이다. “이봐! 유씨! 무슨 일이야?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아?” 창명이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얹는다. 나보다 등수 높은 자식········. 혼곤한 정신이 맑게 트인다. “어····&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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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31
설원 속 자동차 한 대

하얀 무덤. 모두가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아니,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곳에 들어가겠다고 유난을 떨며 도전을 해도 결과는 ‘실종’이란 두 글자만 남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 유난을 떨며 도전을 하겠다는 사람이 어느 순간 되어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황금! 그 설원 속 어느 동굴에는 황금이 있다는 지질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장이 언론과 TV에 처음 전파됐을 때 그곳을 향한 도전의식을 품지 않은 국민은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일단 이 같은 국민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에 정부가 사전답사를 하고 여행허가를 내릴지 혹은 금지할지 정하겠다는 거였다. 당연히 몇몇은 반대했다. 여행을 가는 것은 국민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사람, 정부가 황금을 노린다고 질책하는 반대파들이 목소리를 크게 냈다. 하지만 찬성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찬성파는 위험지역을 가기 전 정부가 확인하는 건 필수라고 목소리를 크게 냈다. 결국 정부는 소규모의 탐험 조직을 그곳에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실종’이었다. 그 이후 정부는 몇 차례 더 그곳에 군인이나 이름이 알려진 탐험대를 보냈지만 결말은 항상 같았다. 그 이후 그곳은 속세에 의해 ‘하얀 무덤’이라 칭해졌다. 엄청나게 의외이지만 정부는 그곳을 여행 안전 지역으로 분류하고 여행을 허락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정부의 여행 허락은 일반 사람의 마음속에 ‘황금주의’의 불꽃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실종’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일어났다. ‘유난을 떨며 도전하겠다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었다. 한 달에 실종자가 10명 안이면 적은 것이었다. 나도 어느 순간 ‘유난을 떨며 도전하겠다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나오는 실종자 중의 한 명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회색빛으로 멍든 하늘, 지겹지도 않은지 끊임없이 내리는 눈, 그리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덮인 땅과 극한의 추위. 그 모든 게 그곳에 있다. ‘무덤’이라 할 만하다. 난 지금 이런 고통을 삼 일째 버티고 있다. 삼 일 전, 나는 자동차 지붕 위에 얹혀져 있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단지, 난 사흘 전 황금을 찾다 길을 잃었고 추위의 고통을 버티다 못해 쓰러진 것뿐이었다. 그런데 일어난 장소는 자동차 지붕 위였다. 물론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설원 위에 이 자동차는 왜 정차된 것일까. 나는 왜 쓰러져있었던 장소에서 눈을 안 뜨고 이런 자동차 지붕 위에 얹혀 있게 된 걸까. 내 짐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질문들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살아남는 것! 물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황금이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곳은 황금을 탐낼 곳이 되지 못한다. 속세가 '무덤'이라 칭한 이유가 있었다. 사흘 동안은 그럭저럭 살

  • 질리지않아
  • 201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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