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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속 자동차 한 대

  • 작성자 질리지않아
  • 작성일 2011-11-06
  • 조회수 749

하얀 무덤. 모두가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아니,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곳에 들어가겠다고 유난을 떨며 도전을 해도 결과는 ‘실종’이란 두 글자만 남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 유난을 떨며 도전을 하겠다는 사람이 어느 순간 되어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황금! 그 설원 속 어느 동굴에는 황금이 있다는 지질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장이 언론과 TV에 처음 전파됐을 때 그곳을 향한 도전의식을 품지 않은 국민은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일단 이 같은 국민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에 정부가 사전답사를 하고 여행허가를 내릴지 혹은 금지할지 정하겠다는 거였다. 당연히 몇몇은 반대했다. 여행을 가는 것은 국민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사람, 정부가 황금을 노린다고 질책하는 반대파들이 목소리를 크게 냈다. 하지만 찬성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찬성파는 위험지역을 가기 전 정부가 확인하는 건 필수라고 목소리를 크게 냈다. 결국 정부는 소규모의 탐험 조직을 그곳에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실종’이었다. 그 이후 정부는 몇 차례 더 그곳에 군인이나 이름이 알려진 탐험대를 보냈지만 결말은 항상 같았다. 그 이후 그곳은 속세에 의해 ‘하얀 무덤’이라 칭해졌다.

엄청나게 의외이지만 정부는 그곳을 여행 안전 지역으로 분류하고 여행을 허락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정부의 여행 허락은 일반 사람의 마음속에 ‘황금주의’의 불꽃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실종’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일어났다. ‘유난을 떨며 도전하겠다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었다. 한 달에 실종자가 10명 안이면 적은 것이었다. 나도 어느 순간 ‘유난을 떨며 도전하겠다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나오는 실종자 중의 한 명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회색빛으로 멍든 하늘, 지겹지도 않은지 끊임없이 내리는 눈, 그리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덮인 땅과 극한의 추위. 그 모든 게 그곳에 있다. ‘무덤’이라 할 만하다. 난 지금 이런 고통을 삼 일째 버티고 있다.

삼 일 전, 나는 자동차 지붕 위에 얹혀져 있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단지, 난 사흘 전 황금을 찾다 길을 잃었고 추위의 고통을 버티다 못해 쓰러진 것뿐이었다. 그런데 일어난 장소는 자동차 지붕 위였다. 물론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설원 위에 이 자동차는 왜 정차된 것일까. 나는 왜 쓰러져있었던 장소에서 눈을 안 뜨고 이런 자동차 지붕 위에 얹혀 있게 된 걸까. 내 짐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질문들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살아남는 것! 물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황금이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곳은 황금을 탐낼 곳이 되지 못한다. 속세가 '무덤'이라 칭한 이유가 있었다.

사흘 동안은 그럭저럭 살만했다. 자동차 덕분이었다. 자동차에는 기름이 많았고 열쇠도 꽂혀 있었다. 난 자동차에 시동을 켜고 난방을 돌려 그 안에 따듯함을 유지하게 했다. 물론 난방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장애가 있었다. 이 자동차는 오랫동안 이곳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자동차에 모든 기관이 얼어서 말을 듣지 않았다. 다행인 건 내가 젊었을 때 아르바이트로 자동차 수리를 배웠다는 거였다. 나는 그때 배웠던 지혜를 이용해 9시간 만에 자동차를 정상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난방은 아침과 저녁에 40분씩만 돌리기로 했다. 기름을 아끼기 위해서다. 앞으로 여기서 얼마나 버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에는 쓸모 있는 게 많다. 자동차 뒷좌석은 아이들이 먹는 초코바로 채워져 있고, 트렁크 안에는 장작과 다양한 연장들이 들어 있다. 물론 초코바로 허기를 채울 순 없었지만, 하루에 초코바 하나씩만 먹기로 했다. 이 또한 내가 이곳에서 얼마를 버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장작은 너무 추워서 못 버틸 것 같을 때나 동상에 걸릴 것 같을 때 불을 지피는 용도로 사용하기로 했다. 짐은 통째로 사라졌지만 다행히 주머니에 라이터는 남아 있다. 하지만 아직 이 장작들을 사용해본 일은 없었다.

사흘 동안 나의 일과는 정해져 버렸다. 아침 8시에 기상해 몸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한다.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면 자동차에 문제가 없는지 난방을 틀어서 확인한다. 난방이 나오면 40분 동안 자동차를 데우기 위해 난방을 틀어놓고 밖으로 나온다. 8시 5분, 자동차 지붕 위에 올라가 지도를 펼쳐놓는다.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네 시간을 밖에서 소비한 뒤 자동차 안으로 들어와 초코바를 섭취한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인다. 일어난다. 3시 15분, 자동차 지붕 위를 올라간다. 펼쳐놓은 지도를 3시간 동안 지그시 바라본다. 6시 15분, 자동차 난방을 틀어놓는다. 40분을 기다리다 난방을 끄고 잠이 든다.

성과는 없었다. 하루에 7시간을 들여 자동차 지붕 위에 앉아 설원과 지도를 비교해가며 바라보았지만 혹독한 추위만 느꼈을 뿐 사흘 동안 아무것도 얻은 건 없었다. 오늘도 난 자동차 지붕 위에 앉아 설원을 보고 지도를 한 번씩 번갈아 보는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다. 사흘 동안 이 정도 했으면 많이 한 것이다. 이젠 조금 더 활동범위를 늘려야겠다. 그러고 보니 난 이곳에 와서 자동차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왠지 스스로 겁쟁이가 된 느낌. 하긴 이런 설원에서 또 한 번 길을 잃는다면 어쩐단 말인가.

우물 안 개구리. 개구리 따위로 이곳에선 버틸 수 없다. 또다시 길을 잃을까 봐 겁나지만 지붕에서 벗어나 설원을 걷기 시작한다. 푹푹 빠지는 다리. 눈꺼풀에 달라붙는 거센 눈발. 얼굴을 할퀴는 바람. 자동차 위에만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드러난다. 두 다리가 얼어붙는다. 세 발 짝만 앞으로 나아갔을 뿐인데.

깊은 패배주의가 심장 속에서부터 끓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설원을 오기 전에도 이런 감정을 많이 느꼈었다. 나의 나이가 점점 칠십에 가까이 가면서부터였었다. 예전에는 잘만 됐던 것들이 '세월'이란 이유로 되지 않는 것이 나의 심장 안에 '패배주의'를 들여놓았었다.

설원보다는 아늑한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후 5시지만 초코바를 섭취하고 눈을 붙였다. 잠은 오지 않았다. 사흘 동안 정해놓은 생활규칙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자보려고 애쓴다. 그러고 보니 과학 잡지에서 잠이 오지 않을 때 가장 편안한 생각을 하며 눈을 붙이고 기다리라고 한 어떤 과학자의 주장이 생각난다. 난 그의 말대로 가장 편한 생각을 해본다.

아들. 그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다. 아내와 사별한 뒤 나는 더욱 강력한 패배주의에 빠져버렸었다. 밥도 입에 들어가지 않았었고, 밖에 나가기도 싫어했었으며, 심지어는 때때로 원인 모를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구해준 건 아들이었다. 아들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에 휴가까지 내고서 나에게 여행을 권했었다. 아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떠나긴 했지만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아내를 홀가분하게 보내고 웃으면서 평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아들. 그는 잘사는 편은 아니다. 하기야 내가 젊은 날 제대로 못 벌어서 그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못 가르쳤음에도 그가 지금 그 정도로 사는 건 ‘잘 산다.’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있고 딸이 있다. 며느리는 요즈음 젊은이들답지 않게 행동할 때마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여자다. 그도 그녀의 그런 면이 아주 맘에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의 딸은 너무 귀엽다. 그의 딸은 자신의 엄마를 매우 닮았는데 나를 마주칠 때마다 배꼽에 손을 얹고 무거운 머리를 땅에 대며 어눌한 말투로 ‘안녕하세요.’를 외쳐댄다. 나는 그런 완벽한 가족 구성원에 끼여서 살고 있었다.

아들. 그는 참 효자다. 나의 아내가 떠나고 그와 여행을 갔다 온 후 나는 혼자서 살겠다고 그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건 안 된다며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라고 나를 끈질기게 설득했었다. 하지만 우리 부자 둘 다 머리에 뿔이 두 개 달린 황소라 고집만 세서 한 달 동안 결말이 나지 않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며느리가 꾀를 부려 그 가족 구성원이 우리 집에 들어오게 돼버렸다.

과학 잡지에 말은 사실임이 틀림없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 생각을 하니 잠이 솔솔 왔다. 결국 코까지 골게 됐다. 드르렁! 드르렁!

갈비뼈 사이사이마다 한기가 몰아치는 느낌. 콧잔등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느낌. 가볍게 자동차에 부딪혀 건널목에서 나뒹군 느낌. 그런 느낌들이 한 번에 몰아쳐서 잠에서 깼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응결되고 있었다. 악몽을 꾼 느낌이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꿈같은 걸 꾼 느낌은 들지 않는다. 참으로 찝찝한 기분이다.

식은땀을 이마에서 떨어내기 위하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변함없는 하얀 무덤. 외롭다. 이곳에 와서 지금껏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건만·······. 왜 오늘이 돼서야 이런 감정은 눈보라 치듯 몰아치는 걸까.

“으·······으!”

환청이 들린다. 사람의 소리다. 이곳에 있은 지 92시간밖에 안 됐는데 이런 병까지 걸려버렸다.

“저·······기!”

환청이 들린다. 자동차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괜히 몸이 버들버들 떨려온다.

(쾅!)

굉음이 들린다. 청각 세포를 가로지르는 고통스러운 소리다. 보조석 쪽 창문을 바라본다. 손바닥이 올려져 있다. 피가 묻은 손바닥이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단 말인가. 손등으로 두 눈을 벌게지도록 비빈 후 다시금 보조석 쪽 창문을 바라본다. 피가 묻은 손바닥 자국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보조석 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창문을 통해 밖을 본다. 사람이 있다. 사람이 쓰러져있다. 하얀 무덤을 빨갛게 염색하며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나는 어서 원래 좌석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쓰러져있는 사람에게 달려갔다. 노인이다. 백발에 수염까지 하얀 노인이다. 나는 빠르게 보조석을 열고 노인을 부추겨 보조석에 앉힌 후 그를 편안하게 눕힌 다음에 보조석 문을 닫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매우 고통스러워 보인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다급함에 격앙된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나의 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를 흘리는 노인의 갈색 스웨터를 들췄다. 검붉은 피가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움직였던 손은 당황하며 노인의 갈색 스웨터를 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말 좀 해주세요!”

노인은 보조석에 누워서 더욱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항상 쫓기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돈을 꾸고, 갚지 않고, 그리고 도망치고. 아버지를 따라 나도 항상 쫓겼다. 누군가에게. 그런 아버지는 내가 막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입학식에 피를 흘리며 들어오셨다.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 그곳을 누군가 찌른 것이었다. 내가 그를 본 것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입학식 때 본 그의 고통스러운 얼굴은 지금 이 백발노인의 얼굴에서 떠오른다.

“자네·······.”

그가 말을 텄다. 칼에 찔린 고통스러운 음색이다.

“예?”

“이곳에 정말 황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유언이다. 나는 그의 유언을 듣는 사람이다. 갑작스레 모든 사물이 정숙하고 그의 유언에 귀를 기울인다. 내리는 눈도 강력한 바람도 꽁꽁 얼어버린 땅도 그의 마지막을 기도하듯 조용하다. 그런 가운데서 노인의 유언은 계속된다.

“이곳에 황금은 없어. 전혀.”

노인은 상처가 괴로운 듯 갈색 스웨터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갈색 스웨터는 색깔은 검붉게 변해간다.

“지질학자의 말도 다 뻥이야! 황금은 없어!”

노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갈색 스웨터를 꽉 쥔 노인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자네·········. 이 설원이 왜 안전구역으로 지정됐는지 아나?”

“아뇨·······.”

“이건 다 노인을 죽이기 위해서야! 자네나 나 같은 노인들을!”

칼이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로 들어온 기분. 피가 뼈와 뼈 사이에서 분출되는 기분. 그런 기분이 갈비뼈 사이사이마다 몰아쳤다. 한기는 아니다.

“설마·······.”

“실종됐다던 탐험대도! 군인들도! 다 뻥이었어! 젊은 놈들은 다 알고 있었어!”

노인은 목청을 터뜨렸다. 지금껏 들어보지도 못한 뜨거운 목청이다. 하지만 노인은 뜨거움을 토해내고 이내 풀썩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다. 기절한 것이다.

고약한 냄새다. 노인이 기절한 후 15분이나 지나고 나서야 코끝에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자동차를 나왔다. 생각하고 싶지만 생각이라는 게 도저히 나지 않았다. 결국 저 노인도 죽고 나도 죽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아들의 고등학교 때 모습이 선명하다. 짐을 무겁게 지고 내 눈앞에서 보란 듯이 집을 나가던 아들. 가난한 집이 지긋지긋하다던 아들은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당당히 합격해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그곳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를 아예 안 볼 것처럼 사라졌다. 그런 아들이 다시 나타난 건 10년 후쯤이었다. 그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내와 딸을 내 앞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10년 만에 찾아온 그는 어색하지 않게 나를 대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마치 매일 본 사이처럼. 그는 내게 다달이 자신의 월급 중 일부를 떼어 주었다. 또한 아내와 사별한 내가 적적하지 않도록 내가 귀여워하는 손녀가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오도록 했었다. 그는 10년 전과 달랐다. 나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가난한 집안을 증오하지도 않았다. 단지 받아들였다. 그뿐이었다.

그는 착한 사람이다. 그의 아내도 착한 사람이다. 둘 밑에서 나온 아기도 착한 사람이다. 그들은 착한 사람이다. 나의 기억 속 그들은.

 

하얀 무덤. 이곳에서 생긴 의문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수를 일부러라도 세면 하얀 무덤 전체를 채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믿겠다. 기억 속의 그들은 나를 배신할 사람들이 아니다.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은 접어두겠다. 살 것이다. 저 노인도 나도. 이곳을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모든 의문을 풀 것이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창문을 통해 고약한 냄새가 어느 정도 빠졌는지 냄새는 나지 않는다. 노인은 어느새 기절에서 깨 있다.

“이봐·······.”

“저는 살 겁니다. 그리고 어르신도 살릴 겁니다.”

“나도 살고 싶네.”

노인이 또 뜨겁게 부르짖었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기절할 것 같았다. 어지럼증.

“저······저기 좀 보게.”

노인이 힘없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언덕이다. 그리고 사람이다. 두 명의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사람?”

“우릴 죽이려는 사람일세.”

“설마······.”

“내가 이렇게 당한 걸 보면 모르겠나!”

노인은 더욱 간절하게 갈색 스웨터를 두 손으로 꽉 쥔다. 눈물이 난다. 제기랄. 아까 노인의 스웨터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췄던 손이 또 한 번 제멋대로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부릉릉 부릉 부릉 부릉!

걸렸다. 노인이 가리켰던 사람들이 점점 빠르게 자동차로 다가온다. 액셀을 밟는다. 그러나 바퀴가 눈 속에 묻혀 있는지 굴러갈 생각은 안 하고 헛돈다. 두 명의 사람이 자리에 멈춘다. 그리고 차 쪽으로 총을 겨눈다.

부릉릉 부릉 부릉!

최대한 세고 강하게 액셀을 밟아본다. 눈물이 난다. 왜 하필 이럴 때 손녀딸 생각은 나는지.

그의 딸은 너무 귀엽다. 내가 칠순 잔치는 열지 말라고 했지만 그가 굳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나의 칠순 잔치가 열리던 날이었다. 내가 아는 지인과 그가 아는 지인이 모두 참석해서 제법 규모가 커진 칠순 잔치였다. 그날, 칠순잔치를 진행하던 사회자가 그의 딸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너도 한마디 해봐!’라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그가 피나게 연습시켰을 ‘아빠’란 단어도 옹알이로 할 정도였었다. 그러나 그날, 그가 입을 떼고 말을 했었다. 정확한 발음으로 ‘저긴다.’라고 외쳤었다. 모두가 폭소했었다. 모두가 그녀가 외친 말을 ‘죽인다.’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감기몸살로 고생할 때 그가 그녀를 잠시 맡겼던 적이 있었다. 며느리가 임신 초기증상을 보였기에 병원을 가서 확인해야만 했었다. 그 당시 며느리는 내가 몸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죄송하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뱉었다. 그리고 며느리는 나의 점심밥을 식탁 위에 차려놓고 또 한 번 ‘죄송하다.’라는 말을 반복하고는 그와 함께 사라졌었다. 나는 그와 그녀가 사라지자 약간은 울먹이는 그녀를 품에 안고 식탁으로 가서 식사를 시작했었다. 식사가 끝나고 계속해서 울먹이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TV를 틀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약간 어눌한 발음으로 ‘하아부지 주근다.’라고 외쳤다. 식후 나는 반드시 약을 먹어야 했기에 그녀가 하는 말을 나는 ‘할아버지 약 안 먹으면 죽어요.’라고 들어서 폭소를 했었다.

피식 웃음이 난다. 미친 사람이 된 느낌이다. 앞에서 총을 쏘려고 하는데 웃는다니. ‘쾅!’하는 소리와 앞에서 번쩍이는 두 총구에서 빛나는 불빛. 무의식적으로 낮은 자세를 만든다. 총알이 자동차에 박힌 느낌. 한쪽 발은 아까부터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중이다. 바퀴는 계속 눈 속에서 헛돈다. 두 사람이 자동차에 더욱 가까이 온다. 그리고 다시 총을 잡는다. 살 것이다. 반드시·······. 그녀를 위해서라도.

 

쾅!

이번엔 빛나는 불빛을 보지 못했다. 눈을 질끔 감았기에. 눈을 조심스럽게 떠본다. 총을 들고 있던 두 사람이 안 보인다. 성급하게 자동차를 나와 본다. 두 사람이 쓰러져있다. 하얀 무덤을 빨갛게 염색하며 죽어가고 있다. ‘쾅!’ 하는 굉음은 총소리가 아니었나 보다.

하얀 무덤. 저녁 10시 20분. 잠들었어야 마땅할 시간. 난 노인을 묻기로 했다. 진짜 이 설원이 무덤이 되는 순간이다. 트렁크에 연장을 빼고 시체 두 구를 넣어두었다. 엽총 두 개를 얻었다. 식량도 얻었다. 옷도 얻었다.

삽으로 눈을 파서 노인의 무덤을 만들었다. 노인이 최종적으로 머무를 곳이다. 보조석에 노인을 들어 올린다. 너무 가벼운 느낌. 갑작스레 그의 가벼움에 눈물이 터져 나온다. 꺼이꺼이. 내가 이렇게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있던가. 무슨 정신인지 울면서 그를 그의 무덤에 가볍게 내려놓는다. 고통스러운 얼굴, 그의 얼굴이 거슬린다.

항상 쫓겼었던 아버지,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항상 증오했었고 그가 죽기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정도였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하고 쫓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는 악순환은 계속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늙어가고 계셨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늙어간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커가고 있었다.

중학교 입학식 때 어머니를 찾았다는 이모의 전화가 왔었다. 이모는 엄마를 만나고 싶으면 어디 사는지 말하라고 추궁했었다. 물론 이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이모도 아버지에게 돈을 뜯긴 한 사람이었기에.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속아 주었다. 아버지가 죽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에 칼이 찔린 채 입학식장에 들어오셨다. 3년 후에 친척에게서 들어서야 알게 됐지만, 그건 이모부의 행동이었다. 이모부는 아버지를 찌르자마자 자수하러 경찰서로 들어가셨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모부가 한눈을 판 사이 상처를 부여잡고 나의 입학식에 온 것이었다. 왜 그랬었을까. 평소에 나에게 관심도 없었으면서, 평소에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안 건네었으면서. 난 그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러면서 뒤늦게 ‘아버지’를 깨달아버렸다.

 

그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노인의 얼굴. 어서 삽으로 눈을 퍼서 그의 얼굴을 덮는다. 새하얗게 화장된 노인의 최후. 그들이 총을 쏘기 전, 노인은 차 안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자네······. 저들이 누군지 아나? 지금 우리를 향해 총을 쏘고 있는 저 사람들 말이야······. 내 아들과 딸일세. 거짓말 같지 않나? 하지만 슬프게도 진실이야. 미안하지만 진실이야. 저들이 날 쏘려고 하는지 아나? 유감스럽게도 그것도 난 모른다네. 하하. 역시 노인은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 해.”

아들과 딸에게서 죽임을 당한 노인. 그런 아들과 딸을 죽인 나. 한쪽 눈이 파르르 떨리며 눈물이 뚝 떨어진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또다시 혼자 남았다는 두려움. 마치 설원 속 자동차 한 대가 된 느낌이다.

총 두 자루 챙기고, 뒷좌석의 식량과 노인의 아들과 딸에게서 얻은 식량을 주머니 이곳저곳에 쑤셔 넣는다. 설원을 걷는다. 자동차를 벗어난다. 두렵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또한 자동차에 머물러있는 것이. 하지만 제일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다시 예전의 패배주의에 빠져 자동차에서 시름시름 앓을 수만은 없다. 스스로 할 일을 만드는 것, 그게 최우선이다.

자동차에만 있을 땐 몰랐던 것들이 설원에서 쏟아진다. 손끝, 발끝, 그리고 내 몸의 모든 끝을 마비시키는 한기. 심장으로 몰아치는 외로움. 온몸 구석구석에 붙어대는 눈발. 눈도 제대로 못 뜨게 하는 강한 바람. 밤이 되면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그러나 다리는 멈출 수 없다. 설원 속 자동차 한 대가 되기 싫기에.

터벅터벅. 사흘은 쉴 새 없이 걸은 듯하다. 눈앞이 흐려진다. 또 한 번 쓰러지면 어떨까. 그때는 또 어디에서 깨어날까. 내가 이곳에서 처음 쓰러졌을 땐 자동차에서 깨어났지만 이번에 쓰러지고 깨어나면 어디서 일어날지 모른다. 의문의 설원. 쓰러질 수 없다. 이까지 고통 따위에 굴복할 순 없다. 나는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딘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아갈 것이다. 쓰러지지 않고.

빛. 도심 속 밤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색채의 빛, 그것이 쏟아진다. 눈이 아프다. 눈을 뜬다. 정신을 잃었었나 보다. 또 여긴 어딜까. 두렵다. 주위를 샅샅이 살펴본다. 하얀 땅, 질서없이 내리는 눈, 강한 바람. 설원이다. 틀림없이 설원 위에 내가 서 있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도심. 도심이 내뿜는 강렬한 색채의 향연이다.

"악!"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고향에 도착했다. 믿을 순 없지만 저건 분명히 도심이다. 다리가 먼저 발동한다. 빠르게 질주한다. 빛을 향해, 고생이 없는 곳을 향해, 모든 의문이 풀릴 곳을 향해.

쾅!

 

다리가 멈춰버린다. 총소리. 소리가 들린 건 다리가 멈춘 후였다. 가슴팍에서 쏟아지는 피. 총을 맞았다. 뒤에서 날아온 총알. 뒤를 돌아본다.

"아버지!"

아들이다.

"아들········."

"아버지! 인제 그만······· 쉬세요."

"왜니? 왜 나를 죽여야만 하는 거니?"

아들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눈다. 도심 속에서 뿜어져 나온 화려한 불빛들이 내리는 눈 속에 스며들었는지 내리는 눈마다 오색빛깔이다. 아들이 방아쇠를 당긴다. 해가 유난히 밝아 눈 덮인 설원이 유난히 반짝인다. 아름답다.

쾅!

엉덩방아. 그리고 쏟아지는 피. 염색되어가는 눈밭. 설원을 만든 이는 누굴까. 정부? 젊은이들? 아님 노인들? 설원에 자동차를 둔 이는 누굴까. 자동차가 약간 오래되었을 뿐인데. 자동차는 더 달릴 수 있는데.

 

 

 

 

 

 

 

 

질리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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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라거스

사월이면 네가 온다고 했는데. 이삭 끝이 단단해지고 가장 향긋한 봉오리 향내가 날 때. 분명히 약속했는데. 네가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닌데. 약속대로라면 세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손톱을 자꾸 뜯게 돼. 냉장고를 열고 멍하니 아스파라거스만 바라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딱딱하게 서 있는 초록색 기둥을.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보관해두라 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돼. 사월 안에 오지 않을 거면. 살짝 데친 후에 랩에 둘둘 싸서 냉동보관 하라고 했으면 좋잖아. 진작 그랬으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데. 네가 오면 오랜만이야 하고 냉동고에서 랩에 싼 아스파라거스를 꺼냈을 텐데. 조리하기 어려운 식재료야. 아스라파거스는. 내가 필러로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벗기려 할 때마다 너는 내 손을 멈추게 했잖아. 그렇게 다루는 거 아니라고. 끝과 봉우리가 가장 맛있는 거니까 아래쪽 반 정도만 필러로 껍질을 벗기고 밑동에서 일 센티미터는 잘라내고 껍질을 벗기는 거라고. 사실 이 말이 이해가 안 돼. 나는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몽땅 벗겨 그 속을 알고 싶은데. 조리시간에 따라 씹히는 느낌도 다르고 맛도 다른 게 아스파라거스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의 부재가 느껴질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했어. 너는 나를 잠시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에 올려둔 거라고. 네가 씹히는 게 하나도 없는 무른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싶은 거라고.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했어.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바로, 나는 아스파라거스를 데치고, 랩에 싸서 냉동고에 넣어야 했어. “잠시 시간을 갖자. 4월 안에 돌아올게.” 다시는 녹지 않게, 최악에 온도로 꽁꽁 얼렸어야 했어. 꺼내면 다시 녹을 수 있으니까, 냉동고는 못 열게 자물쇠로 잠가 놓았어야 했어. 근데 나는 바보같이 네 말을 믿어버린 거야. 돌아올 거라는 네 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넣어둔 아스파라거스가 흔들려. 냉장고 안에 바람이 부나? 눈이 시큰거려. 냉기를 너무 쇘나?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정성스레 하루에 한 번 물을 갈아줬는데. 네 봉우리가 단단해지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가만히 앉아 이것만 보는데도. 째깍째깍 너무 잘 가. 조금만 있으면 5월이네. 그럼 너는 약속을 안 지킨 거고. 너를 나를 진짜 배신한 거네. 5월이면 나도 아스파라거스를 버릴래. 아스파라거스는 4월이 가장 맛있으니까. 너 없이 필러를 사용하는 것도, 오일을 두르고 팬에 올리는 것도, 자신 없으니까. 하루에 한 번 물 갈아주기 싫으니까. 싱싱하게 기다리기 싫으니까. 나도 잔인하게 시들어 버린 후에 새롭게 피어나고 싶으니까. 생장점 순 끝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 좋다고, 네가 한 번 경고했던 내용이 이제야 생각나네. 플라스틱 통을 꺼내 초록색 기둥을 살펴보니 생장점 순이 벌어져 있어. 아, 그래서 네가 나를 떠난 거네. 아·······. 너를 사랑하는 동안 생

  • 질리지않아
  • 2012-09-28
내일

아파트를 나가면 바로 보이는. 분리수거함 앞에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겨울에 보면 눈이 쌓여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케 하는. 쓰레기봉투들. 하얗게 잘 포장된. 꼭 크리스마스 날 산타할아버지가 건네줄 선물처럼. 하지만 가까이 가면 눈을 돌리게 되고 코를 틀어막게 되는. 그런 것들이 심장 한구석에 피라미드처럼 쌓이면 나는 설거지를 하게 된다. 그래, 분명히 그러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수도꼭지를 위로 올리고 물이 나오면 아버지가 때를 밀기 전에 탕에 들어가 몸을 불리는 것처럼 접시들을 대야에 담아놓으면 되는 것이다. 몇 분 후에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접시를 하나 들어 그것의 원형도 찾아볼 수 없게 거품만 잔뜩 묻히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수도꼭지를 위로 올려 그것의 원형을 찾도록 빡빡 거품을 씻겨주면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목욕하는 것처럼 똑같이. “쨍그랑!” 하지만 오늘은 매일 밤 오는 쓰레기청소부가 분리수거함 앞을 그냥 지나쳤는지. 혹은 그것들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착각해선지. 마음 한구석 속 쓰레기가 그대로다. 검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거품이 가득 찬 밥공기 안에 거품이 붉게 터진다. 누군가를 향한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이틀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심장 속에서 붉게 터져 오른다. 아프다. 심하게. 4. 항상 나의 성적에 붙는 숫자. “한성아. 너 성적 좀 올려야 하지 않겠니?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전교 4등·········.높은 등수이긴 하지만············.” “알아요. 선생님·········.” “이번이 마지막 시험인 거 알지?” “예.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가 봐.” 선생님의 부름에 끌려가듯이 간 교무실에서 나왔을 땐 놀이공원에 고장 나서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는 기분을 느낀다. 조명은 무슨 일인지 다 소등되어 있다. 유일하게 빛나는 곳은 내가 남아서 공부할 교실이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간신히 한 손으로 창가에 기대서 걷는다. 터벌터벌. 걸음은 내가 옮기는 것이 아니다. 옮겨지는 것이다. “이봐! 유씨! 무슨 일이야?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아?” 창명이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얹는다. 나보다 등수 높은 자식········. 혼곤한 정신이 맑게 트인다. “어····&m

  • 질리지않아
  • 2011-12-31
손님

거울은 잘못됐다. 내 모습이 비치지 않는 걸 보면 분명히 거울은 잘못됐다. 거울을 만져본다. 이건 분명히 거울이다. 그렇담 어찌 된 일인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정녕 내 모습이란 말인가. 그럴 리 없다. 거울에 비친 건 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집구석에 화분을 놓으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곰팡이가 푸르게 눈 밑에 피어 있었고, 양 볼은 누구에게 얻어맞은 듯 쏙 들어가 있으며, 머리카락은 오래된 미역처럼 머리 위에 얹어져 있고, 종이를 구기듯 얼굴을 구겼는지 얼굴에 주름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정녕 이십 대 후반에 남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는다. 이건 내가 아니다. 나일 리 없다. 거울이 잘 못 됐다. 잘못된 거울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선반에 숨겨둔 망치로 거울을 깬다. 거울이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바닥으로 제각기 흩어진다. 화장실을 나왔다. 준비동작 없이 화장실 바닥에 드러눕는다. 바닥이 내 온몸에 기운을 흡수한다. 더는 움직이기 싫다. (똑똑!)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 올 사람은 없었다. 이곳이 아파트라면 ‘다른 집 찾아온 사람이 잘못 두드린 거겠지’ 하며 문을 열어야 하는 책임을 방관하겠지만, 이곳은 반지하이다. 이 건물에 존재하는 방은 내가 사는 이곳뿐이다. 책임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 나는 누워있는 채로 퉁명스럽게 문을 향해 질문한다. “누구세요?” “나야! 나!” 나야! 라고 말하면 누군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짐작도 안 간다. “나야! 라고 말하면 누가 알아! 이름을 말해! 이름을!” 나는 더욱 퉁명스럽게 문을 향해 소리친다. 그러나 효력은 없다. “나라니까! 나! 나야!” 화가 심장으로부터 들끓어 올라온다. 대꾸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숨죽이고 있으면 밖에 있는 사람이 자기 풀에 죽어 떠날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원인 모를 책임감이 이미 일을 크게 만들어 놓았다. “제발 문 좀 열어줘! 우리 할 말 있잖아!” 순간 그의 ‘우리 할 말 있잖아’라는 말이 심장에 와서 콕 박히다.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 낯익은 목소리 떨림, 그리고 느껴지는 설렘.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지만, 문은 열렸고 문을 열어달라는 사람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냈다. 하얀 얼굴, 큰 눈, 꽉 차 있는 볼살, 큰 덩치, 긴 다리, 긴 팔, 붉은 입술, 높은 코, 큰 키, 당당한 얼굴, 짙은 눈썹, 화려한 정장 차림, 그리고 뚜렷이 보이는 보조개, 그 모든 게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는 기억의 안갯속에서 희미하게만 존재하고 드러나지 않는다. 불편하다. “누구시죠?” “짜식! 날 기억 못 하다니! 실망인데? 일단 들어가자!” 그가 우리 집으로 들어선다. 어디선가 맡아 본 냄새, 들어본 음성, 하지만 그것도 안개에 싸여 답답하다. 어쨌든

  • 질리지않아
  • 201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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