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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작성자 naR
  • 작성일 2012-05-27
  • 조회수 225

 내가 왔다. 너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내일을 꿈꾸고 있나?


 너하고 처음으로 말을 튼 때가 떠오른다. 아마도 어느 점심시간이었을 테지. 등 가득 짊어진 벽돌을 내려놓고, 꿀맛 같은 식사와 짧은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담배 냄새 흙냄새 먼지 냄새 땀 냄새 가득한 그곳에서 너는 책을 읽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안달이 났는데 너 혼자 밥 먹을 생각은커녕 책에만 빠져 있는 꼴이란. 나는 그런 너를 내버려두기가 영 찝찝했고, 그래서 잠깐 망설이다 어슬렁어슬렁 네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바로 곁에 설 때까지도 너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 형씨, 입맛이 없나?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이제 10분 있으면 다시 일 시작할 텐데, 안 먹고 일 할 수 있어?"
 대충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너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나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너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 감사합니다. 책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요."
 너는 급히 다가와 젓가락을 디밀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네가 먹는 꼴을 살피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뻘쭘해져서, 나는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뭔 놈의 책이길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봐? 책이 밥이라도 주냐?"
 너는 입안 가득 고기를 우물거리며 책을 들어 보였다. 하얀 표지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내가 그걸 멀뚱멀뚱 바라보는 동안, 너는 빵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 책, 진짜 재밌어요.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나 같으면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을 책을 몇 번이나 읽었다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십장이 점심시간이 끝났다고 소리를 쳐서 그냥 내 자리로 돌아갔다. 너도 책을 소중히 넣어두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나는 그런 너를 흘깃 바라봤다.

 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공사장으로 나왔다고 했다. 네 입으로는 별 볼 일없는 지방 잡대일 뿐이라고 그랬지만, 나 같은 고졸이나 심지어는 중졸, 초졸이 가득한 막노동판에서 너는 단연 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푸념과 음담패설과 험담들을 지껄이는 동안 너는 한구석에 처박혀 단 한 페이지라도 책을 읽고 있어서 더 그랬다. 나는 종종 그런 너를 쳐다봤고, 가끔은 다가가서 책 제목을 물어보기도 했다. 너는 귀찮다는 소리 한 번 안 하고 열심히 제목과 내용, 작가 따위를 설명해주었다. 글자 나부랭이가 기어가는 것만 봐도 하품이 나오던 나였지만, 너의 열성적인 설명을 들을 때면 나도 한번 읽어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너에게 그런 말을 하자 너는 내게 책을 갖다 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런 네가 기특해서 예의상 한두 쪽을 읽는 정도였지만, 읽다 보니 내용이 꽤 재밌다 싶다가, 언제부턴가는 나도 너처럼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고 있더라.
 너는 조금씩 더 어려운 책들을 갖다 주었고, 내가 책을 한 권 떼면 같이 책의 내용을 말하곤 했다. 분명 내가 읽은 책에 나온 이야기인데, 네가 들려주면 어찌나 새롭게만 들리던지. 너와 얘기하고 나면 나는 그 책을 다시 읽어야 했다. 너와 내 얘기가 다를 때는 혹시 네가 잘못 읽은 건 아닌가 의심도 해봤지만, 결국 매번 네가 맞았다. 어리고 똑똑한 너는 참 대단한 사람 같았다.

 너한테는 꿈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막노동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번듯한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다고, 툭하면 그런 소릴 지껄였다. 어렵게 살아오신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 드리는 게 네 소원이었다. 일을 마치고 함께 술 한 잔 걸칠 때마다, 너는 내게 말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구절은 있죠, 원래는 'Tomorrow is another day.' 그러니까 우리말로는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 정도 될 거예요. 근데, 형도 읽어봐서 알겠지만, 한국에 나온 책들은 거의 다 그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고 번역해 놨거든요?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그 번역이 참 마음에 들어요. 그냥 '다른 날'도 뭐 나쁘진 않지만, '내일의 태양'이라고 하면 딱 희망찬 느낌이 파바박 하고 오잖아요. 저한테도, 형한테도 곧 내일이 올 거예요. 내일이 오면,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고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너는 그 문장이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내일의 태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책 읽었다. 그때껏 내일 따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였지만, 너를 보며 내일에는 정말로 오늘과 다른 태양이 빛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너를 응원했다. 그리고 나의 내일이 오늘과 다를지도 모른단 생각도 슬쩍 떠올려봤다. 너는 내게 희망이란 걸 알려줬다.

 그러나 결국 내일의 태양은 없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 쉬는 시간이었다. 다들 안전모를 벗고 퍼질러 앉아 쉬거나 몰래 술을 한 모금 홀짝이거나 육포를 뜯거나 하고 있었다. 너는 또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얻어낸 육포를 흔들며 네 쪽으로 다가갔다. 내 인기척을 느끼고 너도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어 네가 읽던 책장이 휘릭 넘어갔다. 너는 읽던 페이지를 찾으려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난간 쪽에 부주의하게 놓여 있던 벽돌 더미가 무너져 떨어지는 것은.
 너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보고 있던 나만 비명을 질렀다. 달려가서 벽돌을 마구 들어냈다. 다른 사람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던져댔다. 누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것도 다 무시했다. 그냥 막무가내로 벽돌 더미를 헤치고 너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너는 정수리를 정통으로 맞았다. 119를 부르기도 전에, 너는 이미 죽어 있었다.
 번번이 면접에 실패하던 너는,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너는, 너무나도 어이없이 떠났다. 공사장에서의 안전사고, 딱히 드문 일은 아니었다. 다만 하필이면 그 순간 그 밑에 네가 있었을 뿐. 아마 그 순간에도 너는 내일을 꿈꾸지 않았을까. 하지만 네가 꿈꾸던 내일은, 한 조각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네가 죽고 며칠 간 나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술을 진탕 마시고 네가 준 책들이나 넘겨봤다.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 빌어먹을 책들을 붙들고 있었다. 책을 읽었다가, 너와 나눈 얘기들을 떠올렸다가, 책을 찢어버렸다. 큰 소리로 내일을 저주했다. 결국, 우리 같은 사람이 내일의 태양을 바란다는 건 헛소리였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고 말하던 스칼렛은, 비록 딸과 남편을 잃었으나 여전히 집과 땅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여자한테는 빛나는 어제도 있었다. 새로운 내일을 바라는 건 그런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희망을 말하던 너는 지금 이 풀 아래, 흙 아래 묻혀 있다. 너는 내게 언제나 옳은 말만 들려줬지만, 하나만은 네가 틀렸다. 우리의 어제는 그제와 같았고, 우리의 오늘은 어제와 같다. 그리고 우리의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내일의 태양을 보지 못한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곳에서는 더이상 내일을 꿈꾸지 마라.



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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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람은

 김은 스미는 냉기에 옷깃을 다시 여민다. 혹 빠트린 부분이 있을까 다시 한번 잘 살핀 뒤 수건을 내려놓는다. 미리 준비해둔 삼베옷을 들고, 후배와 함께 조심조심 팔과 다리를 들어 옷을 입힌다. 옷고름을 매고 버선까지 신긴 뒤, 화장 가방을 열고 도구를 꺼낸다. 고개를 들던 그의 눈길이 유리창 너머 눈물 섞인 시선과 얽힌다. 말없이 묵례하고 다시 고인(故人)에게 몸을 향한다.  ‘당신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지.’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김은 순간 몸을 흠칫한다. 고인과 유족에게 무례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김은 미묘한 승리감을 지우지 못한다.  고인은 마흔여덟 살, 김과 같은 나이였다. 마음이 뒤숭숭해지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이십여 년간 장례지도사 일을 하는 동안 김은 무수히 많은 사람을 접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가난한 사람부터 부유한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러는 동안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죽은 이들보다 한발 앞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선배?”  상념이 길었는지 후배가 작은 목소리로 김을 불렀다. 김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손에 익은 화장 도구를 집어 든다. 김은 고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과 고요히 눈감은 얼굴을 번갈아 본다. 색이 변한 피부 톤을 최대한 생전에 가깝도록 다듬어주고 혈색이 도는 듯 보이게 터치를 더해준다. 죽었다기보다 편안히 잠든 듯 보일 수 있도록, 손길 하나하나 정성을 담는다. 사자(死者)의 마지막 얼굴을 꾸민다. 김이 은은한 향의 향수로 화장을 끝내자, 후배는 유족들이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일렁이며 들어온다.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염습실 가득 울음소리가 찬다. 애써 억누르려는 사람도, 목 놓아 우는 사람도, 누구 하나 슬픈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슬픔에 함몰된 사람들 틈에서 상주 완장을 두른 청년이 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청년은 떨림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더욱 힘을 주어 김의 손을 잡는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꼭 정갈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이런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면 아버지께서도……아버지께서도…….”  그는 결국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김은 빈손을 들어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 쥔다.  “저는 아버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가족들에게 이토록 사랑을 받으신 분이라면, 분명 좋은 분이셨을 듯합니다. 고인의 마지막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he

  • naR
  • 2012-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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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소를 다듬던 노인이 문득 시계를 올려다본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칼을 내려놓는다. 짙은 블랙커피를 탄다.  노인은 갯벌 근처 외딴 집에 홀로 살았다. 아내는 오래전에 죽었고 아들은 도시로 떠나 가끔 돈을 부탁하는 전화를 할 뿐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매일같이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했다. 그 손님은 시커먼 갯벌 저 너머에서 넘실거리며 찾아왔다. 한참을 머물다 또다시 갯벌 너머로 뒷걸음질쳤다. 매일 썰물과 밀물 때를 맞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바다만이 노인을 찾아주는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노인의 집은 바다의 움직임에 따라 바닷가였다가 아니기를 반복했다. 노인은 매일 썰물과 밀물 때를 맞춰 베란다로 나갔다. 예상 시간보다 오 분 십 분 정도 일찍 나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노라면 저 멀리 지평선이 수평선으로 바뀌거나 수평선이 지평선으로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날마다 자신을 찾아와 머물렀다 가는 바다를 십 년이 넘도록 웃음으로 맞이하고 배웅했다.  베란다로 나가려다 말고, 노인은 싱크대 옆 첫 번째 서랍을 연다. 젊은 시절부터 한 푼 두 푼 모아온 통장들을 망설이듯 바라보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한숨을 내쉬며, 노인은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로 향한다. 언제나처럼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이 오늘따라 약간 어둡다. 실은 어제저녁 또 아들의 전화가 왔다. 아들은 언제나처럼 돈을 부탁했고 노인은 처음으로 아들의 부탁을 거절했다. 아들은 애원하고 설득하다 마침내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이젠 그런 전화까지도 오지 않을 테지."  어제의 통화를 떠올리며, 노인은 낮게 중얼거린다. 우울한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나 아들의 응석을 받아주기만 하는 것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아들에게도 좋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그러니 이런 충격 요법도 한 번쯤은 필요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노인은 시계를 확인한다. 앞으로 십 분 남았다. 바다는 아직 평소와 다름없지만 노인이 보기에는 바다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늘 겪는 일인데도 오늘따라 노인은 더욱 짙은 아쉬움을 담아 난간에 기대어 선다.   "네가 가면, 나는 또 혼자 남겠구나."  철썩, 약한 파도만 노인의 혼잣말에 대답한다.  그때, 노인의 귀에 웬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문은 분명 닫혀 있었고, 노인 외에 이 집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아버지, 안에 계세요?"  조금도 기대치 못했던 목소리. 설마 하던 노인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고 외친다.  "베란다로 오너라!"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 온다. 노인은 아들과 마주 앉아 바다를 배웅할 생각에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곧 아들이 노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만이구나."  "아버지, 그간 잘 계셨어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긴 시간만의 재회에 노인은 할

  • 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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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날아오른 자리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한 마리 새가 날아온다. 새는 창밖 나뭇가지로 날아와 앉는다. 텅 빈 나뭇가지가 채워진다. 새는 노래한다. 나무를 위해. * * *  우연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포장마차였다. 그곳은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곳에 맥없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였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자리가 없어서. 방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게 다였다. 그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 마스카라가 번지도록 울고 있는 여인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표정없이, 거의 기계적으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 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그렇게 마주 앉아 서로 홀로 술을 마셨다.  먼저 일어선 것은 그였다.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으면서도, 그는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왜인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또다시 그 포장마차를 찾았다. 가만히 술을 마셨다. 다시 그가 나타났다. 빈 테이블이 있었지만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또다시 홀로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밤 아홉 시,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홀로 술을 마셨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일곱째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다, 그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차였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저도요.」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웃었다. 그 날, 나는 그의 집으로 갔다. 우리는 함께 새해를 맞이했다. * * *  하룻밤은 길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한 길이였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3년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그는 제대와 함께 이별을 통보 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다. 많은 술병이 비었다. 아침이 되어 나는 말없이 그의 집을 나섰다. 그날 밤 아홉시, 나는 대학로로 나갔다. 그는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날 우리는 함께 걸었다. 우리는 그 뒤로 포장마차를 찾지 않았다. * * *  그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주로 말없이 걸었다. 다른 연인들처럼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기도 했지만, 대화는 별로 오가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았다. 우리는 말없이 소통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가 있어 행복했고 그는 내가 있어 행복했다.  그는 간혹 우리 집에 왔다. 집에서,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다. 그때만큼은 두 사람 다 약속이나 한 듯 말수가 늘었다. 많이 말하고, 많이 웃었다. 처음 그의 집에 갔던 날처럼. *

  • naR
  • 201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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