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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떠나기 전, 마지막 오 분

  • 작성자 naR
  • 작성일 2012-08-23
  • 조회수 202

 채소를 다듬던 노인이 문득 시계를 올려다본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칼을 내려놓는다. 짙은 블랙커피를 탄다.


 노인은 갯벌 근처 외딴 집에 홀로 살았다. 아내는 오래전에 죽었고 아들은 도시로 떠나 가끔 돈을 부탁하는 전화를 할 뿐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매일같이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했다. 그 손님은 시커먼 갯벌 저 너머에서 넘실거리며 찾아왔다. 한참을 머물다 또다시 갯벌 너머로 뒷걸음질쳤다. 매일 썰물과 밀물 때를 맞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바다만이 노인을 찾아주는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노인의 집은 바다의 움직임에 따라 바닷가였다가 아니기를 반복했다. 노인은 매일 썰물과 밀물 때를 맞춰 베란다로 나갔다. 예상 시간보다 오 분 십 분 정도 일찍 나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노라면 저 멀리 지평선이 수평선으로 바뀌거나 수평선이 지평선으로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날마다 자신을 찾아와 머물렀다 가는 바다를 십 년이 넘도록 웃음으로 맞이하고 배웅했다.


 베란다로 나가려다 말고, 노인은 싱크대 옆 첫 번째 서랍을 연다. 젊은 시절부터 한 푼 두 푼 모아온 통장들을 망설이듯 바라보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한숨을 내쉬며, 노인은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로 향한다. 언제나처럼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이 오늘따라 약간 어둡다. 실은 어제저녁 또 아들의 전화가 왔다. 아들은 언제나처럼 돈을 부탁했고 노인은 처음으로 아들의 부탁을 거절했다. 아들은 애원하고 설득하다 마침내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이젠 그런 전화까지도 오지 않을 테지."

 어제의 통화를 떠올리며, 노인은 낮게 중얼거린다. 우울한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나 아들의 응석을 받아주기만 하는 것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아들에게도 좋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그러니 이런 충격 요법도 한 번쯤은 필요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노인은 시계를 확인한다. 앞으로 십 분 남았다. 바다는 아직 평소와 다름없지만 노인이 보기에는 바다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늘 겪는 일인데도 오늘따라 노인은 더욱 짙은 아쉬움을 담아 난간에 기대어 선다. 

 "네가 가면, 나는 또 혼자 남겠구나."

 철썩, 약한 파도만 노인의 혼잣말에 대답한다.

 그때, 노인의 귀에 웬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문은 분명 닫혀 있었고, 노인 외에 이 집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아버지, 안에 계세요?"

 조금도 기대치 못했던 목소리. 설마 하던 노인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고 외친다.

 "베란다로 오너라!"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 온다. 노인은 아들과 마주 앉아 바다를 배웅할 생각에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곧 아들이 노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만이구나."

 "아버지, 그간 잘 계셨어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긴 시간만의 재회에 노인은 할 말을 찾지 못한다. 머뭇거리며 침묵을 깨뜨린 쪽은 아들이다.

 "저……. 아버지, 이번 한 번만, 딱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마지막으로요. 그 돈 없으면, 저희 식구들 다 거리로 나앉아야 돼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요. 네?"

 노인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결국 이런 것이었던가. 오랜만에 찾아온 이유가 고작, 이런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노인의 머리를 메운다. 노인은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한심한 놈! 그 나이 먹고도 애비한테 푼돈 받아가며 살고 싶더냐! 기껏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마지막이니 돈을 달라고? 썩 꺼져라! 너 같은 자식한테 줄 돈은 한 푼도 없어!"

 아들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마침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베란다를 떠난다. 아들이 떠남과 동시에 노인의 어깨도 축 처진다.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노인은 허탈감에 차 피식피식 웃음만 짓는다. 속을 채우고파 거푸 커피잔을 기울이지만, 커피의 쓴맛만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와 얼굴을 찌푸리고 만다. 씁쓸한 맛을 씻어내고 싶다, 고 노인은 생각한다. 바다가 떠나기까지는 아직 오 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노인은 부엌으로 간다. 그러나 미처 냉장고 앞에 다다르기도 전, 노인은 덜컥 발걸음을 멈추고 만다.

 "아, 아버지!"

 아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노인은 활짝 열린 서랍과 아들의 손에 쥐어진 통장을 번갈아 바라본다. 어떻게든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다가, 노인은 마침내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본다.

 "지금 뭣 하는 짓이냐! 사지 성하면 나가 돈 벌 생각을 해야지, 애비한테 손 벌리다 안 되니 도적질을 해? 그게 정신 멀쩡한 놈이 할 생각이더냐!"

 "아버지, 정말 딱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돼요? 자식이잖아요! 어차피 아버지 혼자 사시면서 돈 쓰실 일도 없으시잖아요. 제발 한 번만이요. 네?"

 "듣기 싫다! 뭣이 어쩌고 저째? 허이구, 내가 도적놈을 키웠구나. 제 애비 돈을 훔치는 도적놈을 키웠어. 썩 꺼져라. 네놈같이 본도 없는 놈, 더이상 꼴도 보기 싫다!"

 "아버지…!"

 노인은 성큼 아들 쪽으로 다가간다. 아들은 몸을 흠칫거리며 초조한 눈초리로 주위를 살핀다. 싱크대, 식탁, 냉장고, 그리고 도마. 아들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식칼을 집어든다.

 "오, 오지 말아요!"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집을 울린다. 노인은 당혹감에 몸을 멈칫한다.

 "무, 무슨 짓이냐! 네녀석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해?"

 "제, 젠장, 아들한테 돈 주는 게 그렇게 싫어요? 내가 그, 그렇게 한심해 보여요? 내가 이렇게 병신같이 자란 게 누구 때문인데! 나, 나도 돈 벌고 싶어요. 그, 근데, 그거 알아요? 돈도 있는 놈 배운 놈이나 버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도와줘요. 네? 돈 벌면, 아버지한테도 잘할게요! 진짜, 진짜로, 금방 쓰고 가, 갚는다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우, 움직이지 말아요!"

 아들의 손이 불안하게 떨린다.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는 칼날에 노인은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조심스레 아들에게 다가간다. 

 "얘야, 이러지 마라. 응? 진정하고, 칼 내려놔라. 자, 어서."

 "오, 오지 말아요!"

 소리를 지르며 칼을 휘둘러 보지만, 노인은 멈추지 않고 천천히 움직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다. 노인은 아들을 향해 팔을 뻗는다.

 "정말로 애비한테 칼을 휘두를 셈이냐? 자, 얼른 그 칼 내려……."

 "으아악!"

 "우윽!"

 노인의 왼쪽 가슴을 파고드는 감촉. 아려오는 고통은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도 없을 만큼 선연한 현실이다. 챙, 바닥에 부딪히는 금속음이 차갑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노인은 피가 쏟아지는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댄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풀썩 쓰러져버린다. 크게 뜬 두 눈은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이 끈이 되어 붙잡고 있기라도 한 양, 아들은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미, 미안해요, 아버지……. 그, 그러게 움직이지 마, 말라고, 오, 오지 말라고 그, 그랬잖아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돈을 줬으면 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미,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들은 비척비척 노인의 통장과 도장을 챙겨 집을 떠난다. 감기지 못한 노인의 눈에는 더이상 아들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베란다에서는 노인이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커피만 잔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간다. 노인의 공허한 눈길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에는, 떠날 채비를 끝낸 바다만이 머물러 있다.


 시간이 되었다. 바다는 천천히 뒷걸음질친다. 언제나 그에게 인사를 보내던 이를 홀로 남겨두고, 바다는 그렇게 떠나간다.

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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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람은

 김은 스미는 냉기에 옷깃을 다시 여민다. 혹 빠트린 부분이 있을까 다시 한번 잘 살핀 뒤 수건을 내려놓는다. 미리 준비해둔 삼베옷을 들고, 후배와 함께 조심조심 팔과 다리를 들어 옷을 입힌다. 옷고름을 매고 버선까지 신긴 뒤, 화장 가방을 열고 도구를 꺼낸다. 고개를 들던 그의 눈길이 유리창 너머 눈물 섞인 시선과 얽힌다. 말없이 묵례하고 다시 고인(故人)에게 몸을 향한다.  ‘당신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지.’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김은 순간 몸을 흠칫한다. 고인과 유족에게 무례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김은 미묘한 승리감을 지우지 못한다.  고인은 마흔여덟 살, 김과 같은 나이였다. 마음이 뒤숭숭해지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이십여 년간 장례지도사 일을 하는 동안 김은 무수히 많은 사람을 접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가난한 사람부터 부유한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러는 동안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죽은 이들보다 한발 앞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선배?”  상념이 길었는지 후배가 작은 목소리로 김을 불렀다. 김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손에 익은 화장 도구를 집어 든다. 김은 고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과 고요히 눈감은 얼굴을 번갈아 본다. 색이 변한 피부 톤을 최대한 생전에 가깝도록 다듬어주고 혈색이 도는 듯 보이게 터치를 더해준다. 죽었다기보다 편안히 잠든 듯 보일 수 있도록, 손길 하나하나 정성을 담는다. 사자(死者)의 마지막 얼굴을 꾸민다. 김이 은은한 향의 향수로 화장을 끝내자, 후배는 유족들이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일렁이며 들어온다.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염습실 가득 울음소리가 찬다. 애써 억누르려는 사람도, 목 놓아 우는 사람도, 누구 하나 슬픈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슬픔에 함몰된 사람들 틈에서 상주 완장을 두른 청년이 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청년은 떨림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더욱 힘을 주어 김의 손을 잡는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꼭 정갈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이런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면 아버지께서도……아버지께서도…….”  그는 결국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김은 빈손을 들어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 쥔다.  “저는 아버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가족들에게 이토록 사랑을 받으신 분이라면, 분명 좋은 분이셨을 듯합니다. 고인의 마지막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he

  • naR
  • 2012-09-12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가 왔다. 너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내일을 꿈꾸고 있나?  너하고 처음으로 말을 튼 때가 떠오른다. 아마도 어느 점심시간이었을 테지. 등 가득 짊어진 벽돌을 내려놓고, 꿀맛 같은 식사와 짧은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담배 냄새 흙냄새 먼지 냄새 땀 냄새 가득한 그곳에서 너는 책을 읽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안달이 났는데 너 혼자 밥 먹을 생각은커녕 책에만 빠져 있는 꼴이란. 나는 그런 너를 내버려두기가 영 찝찝했고, 그래서 잠깐 망설이다 어슬렁어슬렁 네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바로 곁에 설 때까지도 너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 형씨, 입맛이 없나?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이제 10분 있으면 다시 일 시작할 텐데, 안 먹고 일 할 수 있어?"  대충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너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나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너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 감사합니다. 책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요."  너는 급히 다가와 젓가락을 디밀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네가 먹는 꼴을 살피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뻘쭘해져서, 나는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뭔 놈의 책이길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봐? 책이 밥이라도 주냐?"  너는 입안 가득 고기를 우물거리며 책을 들어 보였다. 하얀 표지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내가 그걸 멀뚱멀뚱 바라보는 동안, 너는 빵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 책, 진짜 재밌어요.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나 같으면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을 책을 몇 번이나 읽었다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십장이 점심시간이 끝났다고 소리를 쳐서 그냥 내 자리로 돌아갔다. 너도 책을 소중히 넣어두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나는 그런 너를 흘깃 바라봤다.  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공사장으로 나왔다고 했다. 네 입으로는 별 볼 일없는 지방 잡대일 뿐이라고 그랬지만, 나 같은 고졸이나 심지어는 중졸, 초졸이 가득한 막노동판에서 너는 단연 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푸념과 음담패설과 험담들을 지껄이는 동안 너는 한구석에 처박혀 단 한 페이지라도 책을 읽고 있어서 더 그랬다. 나는 종종 그런 너를 쳐다봤고, 가끔은 다가가서 책 제목을 물어보기도 했다. 너는 귀찮다는 소리 한 번 안 하고 열심히 제목과 내용, 작가 따위를 설명해주었다. 글자 나부랭이가 기어가는 것만 봐도 하품이 나오던 나였지만, 너의 열성적인 설명을 들을 때면 나도 한번 읽어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너에게 그런 말을 하자 너는 내게 책을 갖다 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런 네가 기특해서 예의상 한두 쪽을 읽는 정도였지만, 읽다 보니 내용이 꽤 재밌다 싶다가, 언제부턴가는 나도 너처럼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고 있더라.

  • naR
  • 2012-05-27
새가 날아오른 자리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한 마리 새가 날아온다. 새는 창밖 나뭇가지로 날아와 앉는다. 텅 빈 나뭇가지가 채워진다. 새는 노래한다. 나무를 위해. * * *  우연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포장마차였다. 그곳은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곳에 맥없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였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자리가 없어서. 방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게 다였다. 그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 마스카라가 번지도록 울고 있는 여인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표정없이, 거의 기계적으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 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그렇게 마주 앉아 서로 홀로 술을 마셨다.  먼저 일어선 것은 그였다.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으면서도, 그는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왜인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또다시 그 포장마차를 찾았다. 가만히 술을 마셨다. 다시 그가 나타났다. 빈 테이블이 있었지만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또다시 홀로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밤 아홉 시,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홀로 술을 마셨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일곱째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다, 그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차였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저도요.」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웃었다. 그 날, 나는 그의 집으로 갔다. 우리는 함께 새해를 맞이했다. * * *  하룻밤은 길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한 길이였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3년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그는 제대와 함께 이별을 통보 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다. 많은 술병이 비었다. 아침이 되어 나는 말없이 그의 집을 나섰다. 그날 밤 아홉시, 나는 대학로로 나갔다. 그는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날 우리는 함께 걸었다. 우리는 그 뒤로 포장마차를 찾지 않았다. * * *  그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주로 말없이 걸었다. 다른 연인들처럼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기도 했지만, 대화는 별로 오가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았다. 우리는 말없이 소통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가 있어 행복했고 그는 내가 있어 행복했다.  그는 간혹 우리 집에 왔다. 집에서,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다. 그때만큼은 두 사람 다 약속이나 한 듯 말수가 늘었다. 많이 말하고, 많이 웃었다. 처음 그의 집에 갔던 날처럼. *

  • naR
  • 201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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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시간 순서로 보면 먼저 노인이 먼저 찔린 뒤에 신음을 내뱉는 게 맞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신음 소리를 빼는 게 더 좋겠네요. 서술 시제가 장면마다 바뀌는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ㅋ

    • 2012-08-23 17:45:3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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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갑자기 충격 전개... 무심한 바다가 떠나기 직전인 5분 동안의 시간에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네요. 노인은 바다에 위로를 받고 있었지만, 막상 상황이 되자 바다는 그저 바다일 뿐이군요. 마지막에 바다가 떠난다는 서술에서 노인의 고독한 처지가 더욱 부각됩니다. 어쩌면 이 바다는 아버지를 찌른 뒤 매정하게 돈만 챙겨 나간 아들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으아악!" "우윽!" 노인의 왼쪽 가슴을 파고드는 감촉.

    • 2012-08-23 17:45:3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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