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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라거스

  • 작성자 질리지않아
  • 작성일 2012-09-28
  • 조회수 764

사월이면 네가 온다고 했는데. 이삭 끝이 단단해지고 가장 향긋한 봉오리 향내가 날 때. 분명히 약속했는데. 네가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닌데. 약속대로라면 세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손톱을 자꾸 뜯게 돼. 냉장고를 열고 멍하니 아스파라거스만 바라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딱딱하게 서 있는 초록색 기둥을.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보관해두라 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돼. 사월 안에 오지 않을 거면. 살짝 데친 후에 랩에 둘둘 싸서 냉동보관 하라고 했으면 좋잖아. 진작 그랬으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데. 네가 오면 오랜만이야 하고 냉동고에서 랩에 싼 아스파라거스를 꺼냈을 텐데.

조리하기 어려운 식재료야. 아스라파거스는. 내가 필러로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벗기려 할 때마다 너는 내 손을 멈추게 했잖아. 그렇게 다루는 거 아니라고. 끝과 봉우리가 가장 맛있는 거니까 아래쪽 반 정도만 필러로 껍질을 벗기고 밑동에서 일 센티미터는 잘라내고 껍질을 벗기는 거라고. 사실 이 말이 이해가 안 돼. 나는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몽땅 벗겨 그 속을 알고 싶은데.

조리시간에 따라 씹히는 느낌도 다르고 맛도 다른 게 아스파라거스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의 부재가 느껴질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했어. 너는 나를 잠시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에 올려둔 거라고. 네가 씹히는 게 하나도 없는 무른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싶은 거라고.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했어.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바로, 나는 아스파라거스를 데치고, 랩에 싸서 냉동고에 넣어야 했어.

“잠시 시간을 갖자. 4월 안에 돌아올게.”

다시는 녹지 않게, 최악에 온도로 꽁꽁 얼렸어야 했어. 꺼내면 다시 녹을 수 있으니까, 냉동고는 못 열게 자물쇠로 잠가 놓았어야 했어. 근데 나는 바보같이 네 말을 믿어버린 거야. 돌아올 거라는 네 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넣어둔 아스파라거스가 흔들려. 냉장고 안에 바람이 부나? 눈이 시큰거려. 냉기를 너무 쇘나?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정성스레 하루에 한 번 물을 갈아줬는데. 네 봉우리가 단단해지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가만히 앉아 이것만 보는데도. 째깍째깍 너무 잘 가.

조금만 있으면 5월이네. 그럼 너는 약속을 안 지킨 거고. 너를 나를 진짜 배신한 거네. 5월이면 나도 아스파라거스를 버릴래. 아스파라거스는 4월이 가장 맛있으니까. 너 없이 필러를 사용하는 것도, 오일을 두르고 팬에 올리는 것도, 자신 없으니까. 하루에 한 번 물 갈아주기 싫으니까. 싱싱하게 기다리기 싫으니까. 나도 잔인하게 시들어 버린 후에 새롭게 피어나고 싶으니까.

생장점 순 끝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 좋다고, 네가 한 번 경고했던 내용이 이제야 생각나네. 플라스틱 통을 꺼내 초록색 기둥을 살펴보니 생장점 순이 벌어져 있어. 아, 그래서 네가 나를 떠난 거네. 아·······. 너를 사랑하는 동안 생장점이 벌어져 다친 나를 버린 거네.

눈물이나. 이제 5분밖에 안 남은 거야. 아스파라거스 가는 줄기를 뜯어 입으로 가져가. 씹으며 5분을 보내야지. 쓰지 않은 쓴 맛과 싱싱하지 않은 싱싱함. 느끼며 너를 버려야지. 나의 냉동고 속 보이지 않는 곳에 너를 넣고 꽝꽝 얼려야지. 아니면 이참에 나도 필러를 제대로 쓰는 법을 배워 너를 벗겨버릴까. 무르디 무를 때까지 오일 두른 팬에 올려두는 것도 좋고. 아님 네가 자주 하는 것처럼 그냥 소금물에 데쳐버리거나.

이젠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나네. 너를 잊어버릴 생각에. 5분이 지났어. 마지막으로 묻자 진짜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니?

“내가 말했잖아. 너 같은 미친 여자는 싫다고.”

아스파라거스가 말하네. 이삭 끝이 단단해지고 봉우리 향내가 짙을 때까지 물을 한 번씩 갈아준. 내가 냉장고 속에 넣고 정성스레 살펴준. 싱싱한 녀석이 말하네.

“이건 사랑이 아니야. 이 미친년아! 그러니 제발 나를 놔달라고!”

5월은 맛없으니까. 아스파라거스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생으로 씹어 버려야지. 쓰지 않은 쓴 맛과 싱싱하지 않은 싱싱함. 모두 잊어야지.

 

 

 

질리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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