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유서의 밤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7-03-31
  • 조회수 1,012

유서의 밤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자꾸만 혜진의 생각이 났다. 그 애의 때 탄 교복 셔츠, 밑단이 조금 뜯어진 치마, 거듭 비어져 나오던 그림자, 그걸 필사적으로 가리려던 얇은 손가락 마디까지. 나는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았다. 그 애처럼 얇진 않을 것이다. 자잘한 상처들조차 없다. 지금쯤 상처들은 더 커졌을까. 많이 다쳤을까. 아니면….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상처가 닮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걸 없다는 걸 알면서,

 

부럽다.

어?

너희 부모님은…

유서를 쓰던 혜진은 말을 늘이는 걸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볼펜 딸깍이는 소리도 멈추었다. 그 애의 구겨진 교복 틈으로 오래된 풋사과의 색깔이 보였다. 이따금씩 혜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우리 반에서 혜진을 둘러싼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가십거리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다시 등교한 혜진의 뺨에 나 있는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나는 잠시 혜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교복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쓰고 있던 유서 한귀퉁이를 구겼다가 다시 폈다. 거기서 더 진전될 리가 없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물처럼 출렁였다. 자꾸만 그 애의 갸날픈 몸이 팔레트같이 보였다. 그 애가 힘주어 깨문 입술은 빨간색 물감이 상한 것 같았다.

 

아주 폭력적인 생각인 것을 알고 있다. 그 애한테도, 나한테도. 그렇지만 그 애보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진의 아빠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손목을 잡아끌었다. 혜진의 앙다문 입술이 그리고 있던 수평이 일그러지는 걸 봤다. 몇 번이나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목에 힘을 주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결국 그 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더디게 나아가는 몸을 재촉했다. 가로등의 전기가 금세 나갈 것만 같이 보였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따라 그림자가 함께 깜빡거렸다. 위태로움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늘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앞만 보기 시작했다. 소리가 자꾸만 귀 안에서 메아리쳤다. 너희 부모님은…. 그 애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적막을 싫어했다. 목소리가 파묻히는 걸 두려워했으며 작은 소음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다른 점이라면 혜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어둡고,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밝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양가 없는 생각들. 전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 나도.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만 살고 싶지? 어. 우리 같이 죽자. 어? 언젠간 외국으로 떠서 안락사 같이 하자고. 그거 비싸잖아. 그러게. …. 그럼 그냥 같이 뛰어내리자. 언제? 스무 살 되기 전에. 그래놓고 안 죽을 거잖아. 유서 오백 장 되는 날 그 때 죽자. 그래. 같이 죽자. 그래.

뭐가 문제지? 우리는 언제나 유서를 같이 썼고 펜을 비웠다. 그걸 교환해 읽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애의 유서는 온통 빨간색이었다. 피로 유서를 쓴 것도 아닌데 읽다 보면 세상이 계속해서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색깔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글로 자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사건들이 터진 채로 곪아가고 있었고 절박한 절규들이 그 틈을 메웠다. 그에 비해 나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잘못된 점이 없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다정한 부모님과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들과의 관계.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재정적인 지원들과 감정적인 응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정했고 죽음을 꿈꾸었다. 미쳐도 내가 단단히 미친 거였다.

 

유서를 써야 했다. 아까 다 쓰지 못했는데 펜과 종이는 혜진에게 있었다. 피씨방의 문을 열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 본체를 켰다. 교복을 입은 앳된 남학생들은 게임을 했고, 컵라면을 옆에 쌓아두고 포커를 치고 있는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숨을 쉬었다. 내가 죽기 전에 뽑아 놓을 유서를 써야 했다. 글은 내가 되고 나는 글이 된다. 순간마다 활자들과 함께 간신히 호흡했다. 죽고 싶어서 유서를 쓴다. 죽음을 미루기 위해서 유서를 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몰랐다.

나는 감정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한글 파일에 빨간 줄이 자꾸 보였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파일에 긁힌 흔적은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걸 지웠다가 되돌리기 버튼을 눌렀다. 그게 혜진의 상처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온전치 못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절대로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애는 나를 지지대로 삼고 있었을까? 난 그걸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다시 글을 썼다. 빨간 줄이 자꾸만 그어졌다. 내버려두었다. 혜진의 상처는 피부에 있었다. 어쩌면 내 상처는 나일지도 몰랐다. 화면에 상처가 늘어갔다.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의자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구경했다. 모니터가 일제히 꺼지기 전까지는.

 

열 시였다. 미성년자는 나가라는 알바생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발소리 여럿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꺼진 모니터 앞에서 아이들이 몰려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혼잡했다. 각자의 세계가 엉키듯. 전원을 내려버린 순간에 아흔 아홉 대 정도의 컴퓨터가 꺼졌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아흔 아홉 명의 사람이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쓰고 있던 내 유서가 전부 날아갔다는 걸 알아챘다.
자살할 날까지 하루가 더 늘었다.

윤별

추천 콘텐츠

더 레드

*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 2018-11-30
플루토 카니발

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라.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라,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라,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김선재

    *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 "어스름한 비상구의 녹색등이 깜빡거렸다. 나는 그 꼴이 꼭 아까 건너던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첫 문장의 어스름하다와 두 번째 문장의 깜빡거리는 꼴,의 주어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 사이에는 하나의 진술문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비상구의 녹색등은 어스름하다. 어스름한 녹색등이 깜빡거린다. 깜빡거리는 꼴이 신호등을 닮았다'의 순차적 진술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 손가락을 뜯는다는 건 퍽 무시무시합니다. 정말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 손가락을 뜯은 건가요? 손톱을 뜯거나 손거스러미를 뜯은 게 아닌가요? * "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 "긁힌 자국이었다." *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 "혜진과 나는 닮은 곳이 많았다." * "다른 점이라면 혜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어둡고,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밝다는 것 정도였다." - "다른 점이라면 혜진이 어두운 그늘에 둘러싸인 환경이었다는 것에 반해 나는 대낮처럼 환한 환경에서 산다는 것 정도였다. ; 어떤 의미로 쓴 것인지는 충분히 알겠으나 단지 어둡고 밝다와 같은 모호한 표현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진술이 필요합니다. * 글을 읽고 제일 먼저 든 의문은 혜진이는 어디로 갔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나는 왜 혼자 유서를 쓰고 있나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정했고 죽음을 꿈꿨다'는 진술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이유는 있어야 합니다. 어쩐지 저는 '음료수'도 그렇고 이 작품에서도 윤별님이 진심을 털어놓기 싫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황이 있고 화자 내면의 섬세한 진술은 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상황인지, 내면을 진술하는 '나'가 왜 이토록 아슬아슬한 상태인지가 보이지 않은 채, 다만 끝없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혼잣말은 설명도, 맥락도 필요없는, 그저 청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말일 뿐이지요. 그러나 소설은 늘 불특정한 독자를 향한 글입니다. 그래서 어떤 배경을 가진 사건과 맞닥뜨린 인물이 필요하고 그 사건을 대하는 인물의 행동에는 개연성과 맥락이 필요합니다. 언제어디서누가무엇을어떻게했나,와 같은 사실에 더해 '왜'가 필요합니다. 윤별님이 최근 쓰는 작품에는 그 '왜'가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말하기 싫은 건지, 말할 수 없는 건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자꾸 현실을 유예하는 글쓰기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짐작할 따름입니다. 모든 문학은 현재형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이 그런 것처럼요. 그래서 지금 탈출이나 도피의 글쓰기는 대개 지나치게 사적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그 사적 이야기는 공간도, 인물도 흐릿할 뿐입니다. 이유도, 결과도, 맥락도 사라진 채 말이죠. 윤별님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상상해 봅니다. 제 상상은 지극히 제한적인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이래저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경쟁은 늙고젊고어림을 가리지 않고 힘든 일이니까요. 그때마다 글을 쓰시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시나요? ... 초조해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때마다 일기를 쓰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지 마세요.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초조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무엇엔가 쫓기는 심정으로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잠을 자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길 바랍니다. 잠깐 쉬어도 윤별님이 가진 재능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야기와 언어와 문장들은 윤별님 내부에서 발화할 시간을 기다리며 성숙해질 겁니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마음껏 쉬고, 놀고(물론 어렵겠지만요) 마음껏 웃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잘 수 있을 때 푹 잠들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견디면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좋아질 수 있어요.

    • 2017-04-01 19:20:04
    김선재
    0 /1500
    • 0 /1500
  • 윤별

    선생님, 철없는 징징거림으로 보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정말 글을 쓰지... 못하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예전에 어떻게 발상을 했는지, 어떻게 문장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사건을 전개했는지 모르겠어요. 원고자 80p 단편은 고사하고 10-20p 짧은 엽편조차도 손을 대지 못합니다. 제 글을 보면 그냥... 토할 것 같아요. 떠올리는 스토리마다 그리고 사건마다 진부하다고 느껴지고, 떠올리는 문장마다 역겨워 몸서리가 쳐집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던데, 지금 저는 사랑하는 방법도, 사랑할 마음까지도 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 글들에서 느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전 글들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슬럼프라고 하나요. 이 슬럼프가 몇 개월씩이나 계속되니까 영영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져요. 이 상태가 앞으로도 지속될까봐요. 오늘도 자습시간에 글을 쓰러 베란다에 나갔다가, 한 문단도 쓰지 못하고 들어왔어요. 답답하고 무섭습니다. 글을 삼 년 가까이 써 왔는데 갑자기 몇 개월 동안이나 글이 나오질 않으니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금으로서는 제3의 손이 잘린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힘을 빼고 쓰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힘의 유무와 상관없이 쓰면 전부 마음에 들지 않고 애초에 나오질 않습니다. 제 글을 보면 수준이 너무 낮아 보여요. 지금 상황에서는 글이 나오지 않더라도 써야 극복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야 나올 수 있는 걸까요...

    • 2017-03-31 20:27:54
    윤별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