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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흔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7-11-27
  • 조회수 1,204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와 함께 사라졌다. 강아지와 피사체의 발자국만이 남은 잔디엔 빛만 쏟아졌다. 무영은 무심하게 잔디밭을 힐끔 곁눈질하고 카메라 덮개를 닫았다.

“감사합니다.”

“사진은 현상하는 대로 보내드릴게요.”

피사체의 즐거움은 제대로 찍힌 것 같아요. 아마도요. 무영은 눈을 감았다. A컷으로 나온 거 확인하면 그만큼 더 입금해 드릴게요. 여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이 뭉텅했다. 손목에 나 있던 빨간 줄과 같은 현상흔이 눈 위에 선명히 새겨졌다. 피부가 선분 정중앙부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

 

박제된 천재를 아시오?

무영은 촬영 후 현상을 마치고 비로소 통증이 몸을 덮칠 때마다 이상의 구절을 외웠다. 모든 사람은 천재이기에 박제되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박제되어서라도 천재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걸까. 무영은 통증을 무시하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한낮에 찍은 사진을 자정에 현상했다. 눈썹을 지나 눈꺼풀을 가로지른 새빨간 줄은 선명히 무영의 눈을 옥죄었다. 박제된 천재를 아시오. 눈 안쪽이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

선분은 유한하지만 직선은 무한하대. 이무영. 너는 선분이 되고 싶어, 직선이 되고 싶어? 선배가 물었던 질문에 무영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던 적이 있었다. 직선이요. 선배는 네 감정이 전부 죽은 순간에야 직선이 어울리기 시작할 거라고 이야기하면서 카메라 렌즈를 닦았다. 선배의 시선이 흘긋 무영의 첫 번째 선분에 머물렀던 것도 같았다. 직선, 선분, 직선. 그러고 보니 선배도 직선으로 죽었었지.

 

잠시 현상흔의 통증이 잦아들어 가까스로 잠들 수 있었던 사이, 무영은 죽은 여동생을 만났다. 여동생은 사진에 박제되기 삼 년 전처럼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이 길었고, 내려간 눈매가 깊었으며, 한여름 날씨에도 얇은 면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여동생은 평소처럼 무영에게서 초콜릿을 빼앗아 가고, 무영은 그걸 쫓아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직감한다. 꿈이구나.

여동생은 무영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죽음만큼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고 했다. 무영은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악몽이 늘 그렇듯, 곧 무영의 고개가 멋대로 끄덕여졌다. 여동생이 햇살 아래 선다. 거기에서 찍을 거야? 무영의 입이 위아래로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만 같은 목소리가 성대를 울리며 흘러나왔다. 안다. 이것은 마리오네뜨 인형극이다. 나는 목각인형이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

공연은 어느덧 막바지로 치달았다. 무영은 초승달 아래에서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여동생을 렌즈에 가득 담았다. 오늘 초승달인데. 보름달 될 때까지 기다렸다 찍는 건 어때. 여동생은 잔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이 가장 행복해. 오늘이 아니면 나, 죽지 못할 것 같아. 무영은 가지 말라는 말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셔터를 눌렀다. 피날레. 이건 단지 한 편의 연극일 뿐이다. 모두가 인형일 뿐이다. 나조차도.

 

무영이 잠에서 깨어난 건 햇빛이 방 안쪽까지 길게 침범한 후였다. 또다시 같은 꿈이다. 무영은 눈두덩을 아무렇게나 눌렀다. 관자놀이가 아파왔다. 그러나 반복은 모든 일에 대하여 사람을 무뎌지게 한다. 익숙해지면 평상시로 돌아오기 위해 추슬러야 하는 시간과 정신력을 아끼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이걸로 일흔다섯 번. 아니, 여섯 번인가. 아무렴 어때.

무영은 선배가 줄곧 말해왔던 직선과 선분에 대한 논증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꿈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의식적으로 다른 행동을 해야 했다.

무영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현상흔이 확연히 직선에 가까워졌다. 내가 아픔을 마지막으로 찍은 게 언제였더라. 이렇게까지 깊어질 정도로 감정이 격했던 피사체가 있었던가. 무영은 천번에서 즐거움을 찍은 대가로 생긴 눈의 현상흔을 매만졌다. 무명의 등과 배에는 무수히 많은 점이 별자리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허벅지에는 가늘고 일정한 원이 자리를 잡았다.

무영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옷걸이에 걸린 모자를 낚아채듯 눌러썼다. 현상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현상한 사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제 박제한 여자아이의 부모는 아마 사진이 도착하는 즉시 다른 사진사를 찾아가 자신들 또한 자신들의 딸처럼 박제해 달라고 할 것이다.

 

“아저씨.”

가느다란 바람 소리에 가까운 소음이었다. 무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보았다. 가느다란 다리로 간신히 땅을 지탱하고 서 있는 소녀다. 무영은 몸을 완전히 돌려 소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소녀는 마른 소리를 내었다. 나? 무영은 소리 없이 입을 작게 벌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비가 올 것만 같다. 바람이 윙윙거리며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몸 이곳저곳에 새겨진 현상흔들이 각자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자꾸만 휘청거리려고 했다. 그러나 넘어지는 대신 소녀의 가느다란 머리카락만 흔들렸다. 무영은 짙고 검은 눈썹만 살짝 찡그릴 뿐이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은데요.”

소녀는 입을 몇 번 더 뻐끔거렸다.

“갇혔어요, 저.”

무영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사진 찍는 분이시잖아요.”

“내가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말하며 무영은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사진사라는 걸 들키기 싫어 카메라도 들고 나오지 않았고 현상된 필름은 이미 우체국에 맡긴 지 오래였다. 그런데 어떻게? 소녀의 까만 두 눈이 채 가리지 못한 손목의 현상흔에 머물렀다. 무영은 의식적으로 손목을 가렸다.

“도와주세요.”

“도와줄 방법도 없고.”

“사진을 찍는 방법을 배우면, 죽지 않아도 되잖아요.”

소녀의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겨울밤 미처 떨어지지 못한 낙엽 같기도 했는데 건드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아 무영은 말을 평소보다 신중하게 골라야만 했다.

“어……, 꼬마야.”

“체이예요. 이체이.”

“그래, 체이야.”

“아저씨. 급해요.”

무영이 한숨을 내쉬고 한동안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체이는 무영의 무감하고 곤란해 보이는 눈을 들여다보았고, 무영은 체이의 목소리를 한참이나 곱씹었다. 시선이 아무리 얽혀들어도 생각은 어긋났다. 무영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체이가 침을 삼키고 입술을 물었다. 목의 얇은 살갗 뒤로 울대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현상흔이 무심하게 아파와 무영이 눈두덩에 손을 올리자 비가 갑작스레 쏟아졌다. 빗방울이 무영과 체이의 주위를 사정없이 난타했다. 폭우였다. 소리가 크게 확대되어 들렸다. 비의 마찰음, 번개와 곧 뒤따르는 천둥,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체이의 숨소리까지.

 

무영은 체이에게 수건을 던지듯 건넸다. 견주자면, 물에 빠진 생쥐가 조금 더 나을 것도 같았다. 체이는 수건을 가까스로 그러쥐고 당장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았다. 무영은 체이의 앞에 여동생이 즐겨 입던 프린팅 티셔츠와 청바지를 두었다. 체이는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문 잠기는 소리와 함께 무영은 미끄러지듯 벽에 기대어 앉았다. 얼굴을 몇 번이고 문질러 마른세수를 해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을 알려달라니. 그것은 곧 지금껏 맺었던 관계들로부터 모조리 고립되겠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무영은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 목록을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용감한 누가 자의로 카메라를 쥐는가.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언젠가의 폭우와 닮은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

 

장례는 생각보다 빠르고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사진 한 장 없이 고인의 이름 세 글자만 단출히 적혀 있었다. 무영은 식장 입구에서 나누어 주는 흰 가면을 썼다. 오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저 사진사의 장례식이라고 식장 앞에 붙여두기만 하면 되었다. 사진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본 사람에겐 행운이 깃든다는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자연히 몰릴 것이었다.

무영은 선배가 죽어 곧 묻힐, 아니 잠길 곳을 바라보았다. 사각 연못의 가장자리에는 무영처럼 흰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잔뜩 줄지어 섰고,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구름이 짙어 빛 한 점도 반사되지 않았다. 무영은 뱀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사진사는 어디가 잘려서 죽었대?”

“목이라던데.”

“운 좋네.”

“안 아프게 단번에 간 거지.”

사진사가 아닌 사람들이 사진사의 사인을 어림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타의로 인한 죽음에 대하여 가볍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세계적인 모델이나 가수들의 사생활을 일회성 가십거리로 소비하듯. 구역질 나.

“꽤 유명한 사진사라던데. 왜 작년인가 세 살짜리 최연소 피사체 있잖아….”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어?”

“그 어린애만 떴지 사진사야 누가 신경이나 쓰게.”

무영은 어쩌면 곧 자신이 듣게 될지도 모르는 말들을 전부 넘겼다. 사진사는 천한 직업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는 명언의 예외였다. 사진사는 스스로의 자살을 결심할 수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의뢰하는 감정을 찍어야만 할 뿐이다. 그 감정에 할당되는 신체 일부가 잘렸을 때에야 비로소 죽을 수 있다. 어쩌면 불운한 영생이다. 카메라를 잡은 사람들의 끝은 언제나 같았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예상했다는 듯이 우비를 썼다.

무영은 선배의 관을 잡았다. 묵직했다. 아무런 무게도 없이 사라지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다. 부패되더라도 남아있는 게 어디야. 선배는 드물게도 밝은 사진사였다. 무영은 연못에 연결된 다리를 따라 걸어 관을 옮기면서 선배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선배는 후회 안 해요? 후회할 일은 아니지. 누군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날 기억할 텐데. 세상에선 우리더러 더러운 사람이라고 해요. 그러라고 해, 우리만 떳떳하고 행복하면 되는 거 아냐? 선배는 그렇게 말하곤 눈꼬리를 접어내려 환하게 웃었다. 그 때 눈을 감아 버려야 할 정도로 밝은 빛이 났었던 것도 같았다.

흰 가면을 쓴 사람들이 마치 유령처럼 다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무영은 쥐었던 밧줄을 서서히 풀었다. 관이 천천히 내려갔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이 물밑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폭우가 수면을 때리는 소리만 끝없이 되돌아왔다. 무영이 밧줄을 완전히 놓자 사람들은 일제히 뒤로 돌아 가면을 벗어 관이 안치된 연못 속으로 던졌다. 가면이 물 위로 둥둥 떴다.

무영은 쉴 새 없이 내리는 폭우에 가면이 이쪽저쪽으로 기우는 연못을 오래 응시했다. 문득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음 생이 있다면 선배는 거기서도 사진을 찍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물론 무영은 환생을 믿지 않았다.

 

*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야.”

무영은 못을 박았다. 체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는 조금 큰 옷을 입은 채로 무영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창밖으론 금방 그칠 것 같지도 않은 비가 퍼붓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무채색인 세상에 채도도 명도도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다 이 여자아이를 집까지 들이게 되었나.

“사진사에 대해 뭘 알고 온 건진 모르겠지만,”

무영이 운을 뗐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인 직업이 아니야.”

“…….”

“외롭고 아파. 당연히 몸도.”

“……."

“너는 감당 못 해.”

“제가 죽기를 바라세요?”

내내 함묵하던 체이의 젖은 목소리를 끝으로 방 안에 묵직한 침묵이 깔렸다. 무영은 미간을 좁혔다. 체이는 그 새까만 눈을 무영에게 꽂았다. 혼자의 적막과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적막은 다르다는 걸 무영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볍지 않은 공기의 무게에 무영은 내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눈 한가운데의 불그스레한 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무영은 제 눈을 한 번 신경질적으로 쓸었다.

“자칫하다간 이렇게 된다고.”

“저를 찍었던 사진사는 배가 잘려서 죽었어요, 아저씨.”

무영은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그럼 넌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그러나 무영의 앞에서 단단히 눈을 마주하는 이체이는 결코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다. 뱀 따위의 환상도 아니었고, 온기와 목소리와 숨결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네.”

체이는 덤덤했다. 생각보다 간결하게 이체이가 답했다.

“갇혔다고 말했었잖아요.”

사진에. 체이는 입을 다물었다. 무영이 습관처럼 목덜미의 현상흔으로 손을 가져가 긁었다. 가능할 리 없었다.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죽는다. 그 감정을 지닌 채로. 벗어난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무영은 온통 혼란스러운 눈으로 체이를 응시했다. 체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굽혀 티셔츠에 새겨진 순록 프린팅을 망가뜨렸다. 입술이 몇 번이고 떨리더니 단어를 씹어 뱉듯 숨을 토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사진 알려줘요, 아저씨.”

 

*

 

신발을 벗자마자 무영은 작은방의 문고리를 돌렸다. 집이 아무리 잠잠해도 체이가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 건 새로 들인 습관이었다. 첫 번째 피사체를 박제했던 날 밤 체이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현상흔의 여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는 다음날 아침 무영을 깨우지도 않고 사라졌다. 카메라 가방은 사라져 있었다.

체이의 몸에는 점차 현상흔이 늘어갔다. 몇 년을 찍은 무영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붉은 선이 다 아물기도 전에 더 깊은 선이 본래의 흉을 가로지르며, 때로는 덧입혀지듯 생겨났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크레바스 같기도 했고, 랑게르 열선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위로 그어버린 흉터 같기도 했다. 금세 팔다리엔 낙인이 빼곡했다. 체이는 그대로 출사를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이체이 혼자만의 자해 방식일지도 몰랐다.

이체이는 출사를 나갈 때면 꼭 흰 크롭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흰 샌들을 신고 나갔다. 현상흔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맨살을 드러내고, 이어폰을 귀에 박아넣고 걷는 체이는 묘하게 당당해 보이기도, 까칠해 보이기도 했다. 보통 한두시간이면 끝나는 촬영을 온종일 끌었다. 한 번의 인물 셔터 찬스를 위해서 하루를 모두 소비한다는 것을 무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체이는 어느 정도 출사에 병적으로 재능이 있었고 벌어오는 돈으로 월세의 반을 충당했다.

 

그 시각, 이체이는 한창 피사체 나나를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의 볼륨을 최대로 높인 채였다. 더 프리티 레크리스의 마이 메디슨이 쉴새없이 반복재생되었다. 테일러 맘슨의 전자음 같은 목소리가 체이의 고막을 때렸다.

나나는 뺨이 유난히 붉고 광대뼈 부근에 콕콕 박힌 주근깨가 사랑스러워 삐삐를 연상케 하는 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였다. 체이는 다른 사진사들이 피사체라고 부르는 것들에게 전부 이름을 붙였다. 그것 때문일지, 현상하면 유난히 시안기가 많이 도는 독특한 느낌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체이에게는 부유한 상류층으로부터의 러브콜이 끊이질 않았다. 세 번째 출사에서 팔과 허리에 현상흔을 달고 유명 정치가의 여덟 살배기 딸을 촬영한 사진이 의뢰인들의 마음에 썩 들어, 의뢰인 자신들의 위신도 세울 겸, 사진도 자랑할 겸하여 중앙지에 기고를 한 후부터였다. 무영의 신예 시절보다는 사정이 확실히 나았다.

정오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길 한복판의 이체이는 한 손엔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목에 건 카메라 가방 위에 올린 채로 나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곧 체이는 다 마시지도 않은 아메리카노를 바로 옆 쓰레기통에 넣고 나나에게 다가갔다. 대개 보호자는 천박한 사진사와 자신들이 의뢰한 피사체가 오랜 시간 함께 있는 걸 탐탁찮아 한다지만 체이는 나나의 부모 되는 사람들에게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나의 부모는 흔쾌히 허락하고 예상 촬영 종료 시간을 물었다. 그 대신 메모리 원본을 달라고 했다. 체이는 고민 없이 동의했다.

나나는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보도블록의 끄트머리 한 줄만 밟으며 걷다가 체이가 저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 나나는 눈꼬리를 휘어 웃곤 몸을 홱 돌렸다. 체이는 나나의 뒤편으로 바짝 붙어 발걸음을 모방했다. 나나가 걸으면 체이도 걸었다. 나나가 뛰면 체이도 뛰었다. 나나의 발자국이 난 곳에 나이치곤 작은 발자국이 또다시 겹쳐졌다. 체이를 향해 혀를 길게 내민 나나가 몸을 다시 잽싸게 돌렸다. 지치지도 않는지 뛰려고 자세를 잡은 나나의 뒤통수에 체이가 아이스크림 먹을래? 하고 외친 건 한순간이었다. 나나가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자전거처럼 멈춰섰다. 다시 체이가 내가 살게, 라고 소리질렀다.

 

“왜 죽게?”

차도 가까이의 벤치에 앉아 욱신거리는 발목을 흔들며 체이가 물었다.

“왜라뇨?”

나나가 조금 간격을 두고 헐떡이다가 반문했다. 방금 뛰어 뺨이 더욱 붉었다.

“네가 죽고 싶다고 해서 부모님이 사진사 불러준 거 아냐?”

“음. 반쯤은 맞는데요.”

나나가 마른 침을 삼키고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근데 꼭 죽고 싶어야 죽는 거예요?”

“대개 그렇지?”

“언니는 사진사라면서 요즘 트렌드도 몰라요?”

체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제 앞을 지나가는 차들만 눈에 담았다.

“트렌드?”

“공부 안 하죠?”

“재미없잖아. 아, 흘렸다.”

나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눈꼬리를 접어내려 웃어내었다. 체이는 별일 아니라는 것 같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스크림의 바닐라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엄마아빠가 어릴 때부터 빨리 죽는 게 좋다고 했었어요.”

“왜?”

“그냥? 옛날에 진짜 어린 꼬마애 하나 찍혔을 때요. 실시간 검색어 일 위에 걔 이름 오르고 그랬잖아요.”

개미들이 벤치 다리를 타고 줄지어 오르는 걸 나나는 보았다. 체이가 흘린 아이스크림으로 천천히 몰려들고 있었다.

“좋아하죠, 명예. 엄마도, 아빠도. 어차피 죽을 거니까 말하는 건데,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언니가 처음이에요. 아니, 어, 나한테만.”

나나는 제 옆을 지나가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입은 여태 웃고 있는 채였다. 하나. 둘. 셋. 나나의 눈이 무감하게 빛났다. 아니 빛났나? 나나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뺨이 볼록해졌다가 점차 완만해졌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기를 거면 낳지를 말지.”

나나가 푸념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일지 아닐지, 체이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나 넌 죽고 싶은 거야?”

“죽고 싶진 않은데. 근데 내가 안 죽고 싶다고 해서 안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체이의 입술이 몇 번이고 달싹였다. 까만 눈이 나나의 이미 죽은 것 같은 눈과 맞물렸다. 나나는 될 대로 되라지, 식으로 개미들을 계속해서 눌러 죽였으나 개미들은 앞선 개미가 남긴 페로몬을 따라 계속해서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미들. 개미들. 레밍들. 이체이는 개미들의 다리에서 레밍의 뜀박질을 본다. 이체이는 그게 싫어서 고개를 들었고, 하지만 팔차선 도로에서 지정 속도로 달리고 있는 차들도 레밍이었다.

 

나나는 레밍이었다. 나나의 부계 양육자는 중앙지검에서 일하는 성공한 레밍이었고,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나나의 모계 양육자는 금융회사에서 안정적인 과장 자리에 안착한, 역시 성공한 레밍이었다. 레밍 사이에서 레밍이 태어나는 건 유전법칙에 의해 아주 자연스럽고 지당한 일이었다. 나나의 친가 쪽은 대대로 판검사를 지낸 집안이었다. 나나의 외가 쪽은 그다지 유서가 깊진 않았지만, 어쨌건 자수성가하는 데는 성공했다. 성공한 레밍은 다른 레밍에게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전수했다. 레밍은 그 레밍을 모방하고, 성공한 레밍이 되어 다른 레밍을 지도하고, 그 레밍은 다른 레밍을….

지루한 얘기는 그만두자. 그러니까 여태 나나는 레밍이 아닌 삶을 산 적이 없었다. 성공한 레밍들은 자신의 혈족 레밍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여태 자신의 조부가 그러했고 부친이 그러했고 자신이 그러했듯, 그리고 자신의 배우자가 그러했듯 명예로운 삶을 살길 바랐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종종 레밍들은 나나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나는 아침 여섯 시 정각에 일어나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단정하게 아침을 먹었다. 모든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등교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갔다. 칠 교시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들쳐 메고 영어학원으로 향했다. 두 시간 동안 영어를, 그 옆 건물로 옮듯 건너가 또 두 시간 동안 수학을, 한 블록 하고도 반 정도를 더 걸어 다시 두 시간 동안 과학을. 그곳의 아이들은 이름이 없었다. 불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정께에 학원가에서 튕겨나오듯 집에 돌아오면 나나는 늦은 저녁을 먹고 새벽 세 시까지 올림피아드 준비를 했다.

성공한 레밍의 바람은 어느 날 바뀌었다. 무영의 선배가 찍은 사진이 엄청난 찬사를 받으면서부터였다. 밝게 웃는 세 살배기 어린애가 고무오리와 함께 이를 다 내보이고 웃으며 찍혀 있었다. 그 애의 부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진사를 고용할 만큼 돈이 없는 사람들은 가장 순수한 웃음이 담긴 그 애의 사진을 종교로, 교리로, 예언으로 삼아 신봉하기 시작했다.

그 애의 부모는 헌금의 명목으로 돈을 걷었다.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다음 생엔 지금처럼 가난하게 태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신도들의 눈을 가렸다.

나나는 그 애보다 네 살이 많았다. 양육자들은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아무튼 너는 최초여야지. 어디서든 너는 처음이어야지. 나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너는 최대한 일찍 죽어야 한다. 부계 양육자 레밍은 그렇게 말했다. 너도 명예로워져야지. 모계 양육자 레밍이 덧붙였다. 언제부턴가 나나의 양육자 레밍들은 나나를 나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나나는 죽은 지 오래였는데.

 

그러니까, 나나의 모든 순리는 모계 양육자와 부계 양육자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나나는 가끔 그 순리가 코 작은 그물처럼 느껴져 발버둥치려고 들었으나, 곧 그물이 터지면 금붕어인 자신은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죽을 것임을 불과 일곱 살의 봄부터 알고 있었다.

나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처럼 굴었다. 가끔은 순진한 척 하기도 했고, 가끔은 미운 다섯 살처럼 되도 않을 논쟁을 하다가 눈꼬리를 축 내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아이처럼 눈을 깜빡이기도 했다. 나나는 내내 나른하다가 앙칼지지만 미워할 수 없는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바싹 올렸고, 어깨를 으쓱하다가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음을 터트리며 나 너 좋아해,를 연발했다. 정말이야. 나 너 좋아해. 나나는 열다섯 번째 생일에도 여전히 스스럼없이 사랑스러웠다.

“이제 너도 죽을 때 안 됐니?”

부계 양육자가 초에 불이 붙은 생딸기 케이크를 앞에 두고 말했다. 나나는 큰 눈만 껌뻑였다.

“왜, 계속 말했었잖아.”

모계 양육자도 말을 보탰다. 나나의 집엔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촛불만 위태롭게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네가 죽어야 우리도 죽지.”

부계 양육자가 말하는 사이 촛농이 케이크에 떨어졌다. 나나는 순간 불 꺼진 집안의 적막을 좀 더 오래 느끼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나나는 말을 아꼈다. 양육자들은 나나의 대답을 무언으로 부추겼다. 그러나 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나는 침묵이 마치 정전된 집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수재민이었다. 지금 밖에는 어마어마한 비가 퍼붓고, 그 비는 저 아랫마을을 다 덮고 나서 지금 자신이 사는 집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피난가지 않아? 저기 밖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다 잠겨 죽은 거야. 다. 한 명도 남김없이.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 앉아 있지? 왜? 나 익사는 취향 아닌데. 존중해 줘. 왜 우린 나가지 않아? 양육자들의 손끝에서 찰랑거리는 물이 보였다. 이내 물은 나나의 청바지를 적셨고, 나나의 속옷을 적셨고, 마침내 나나의 맨살에 축축하게 닿았다. 왜? 우리는? 나나는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점점 양육자들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나는 늑대와 동화되는 중인 양육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건, 그래. 쓰나미다. 밖이 물에 잠긴 게 아니라 쓰나미가 집 안쪽부터 발발한 거였다. 단층이 맞물려 진동이 생긴 거였고, 그래서 모든 전기가 끊긴 거였고, 또다시 모두가 죽은 거였다. 그럼 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는? 나나는 아, 하고 입밖으로 새된 소리를 냈다. 그러죠 뭐. 나나는 습관처럼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나나의 허리까지 차올라 케이크를 떠다니게 만들던 물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나나는 유년부터 그랬듯 나른하게, 그러나 물이 다 없어졌다는 착각 속에서 쓰나미에 휩쓸렸다. 그제서야 양육자들의 입에서 생일 축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왜?”

체이가 물었다. 나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나나의 눈이 수두룩하게 죽어버린 개미 떼를 향했다. 그러나 개미는 개미집에서 끝도 없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어, 제 삶이 아니잖아요.”

“살아 있는 건 너 아냐?”

“부모님이요, 나 말고. 나는 껍데기라니까.”

나나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통에 신경질이 난 것 같이 보였다. 체이는 그러나 이해해야만 했다. 미간을 찌푸린 체이의 얼굴을 나나가 빤히 응시하더니 지금껏 죽인 개미 시체들을 벤치 밑으로 쓸었다. 한창 환하게 꽃피는 것만 같은 낯이었다. 그러니까 나나야, 너는 왜 죽고 싶니. 체이는 입술을 쓸었다.

“언니, 카메라는요?”

체이가 카메라를 꺼냈다. 슬슬 테스트 컷을 찍어 봐야 했다. 더 어두워지면 현상할 때 색감이 모조리 망가질 수도 있었다. 체이는 나나가 죽인 개미들을 오브제 삼았다. 빛이 너무 적게 들어왔다. 체이가 조리개를 조금 더 열었다.

“나도 볼래요.”

체이는 나나에게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손간, 체이는 차라리 나나가 자신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셔터를 눌러 줘, 나나. 예쁘지 않아도 좋아. 그러나 나나는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근방의 풍경을 한 번 보더니 체이에게 다시 돌려줄 뿐이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나나는 또 웃었다. 체이는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나쁘진 않은데요?”

“뭐가?”

“내가 나올 사진, 그려봤어요.”

체이가 받아든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나나의 죽은 눈은 아이러닉하게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마침 따뜻하고요.”

나나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나나야.”

체이가 나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나나는 듣지 못한 척 했다. 도시소음들만이 체이와 나나의 사이를 꽉 채우고 있었다. 나나가 다시 담담하게 입을 열기 전까지.

“어쨌든 이것들처럼 이유 모르고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나나가 채 아래로 쓸려가지 않은 개미들의 흔적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모래 털듯 털었다. 손가락에 끈질기게 엉겨붙어있던 개미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유가 고작 그거야?”

“뭐 어때요. 어차피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건데.”

체이는 나나를 바라보았다. 나나의 발랄한 갈색 눈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입술을 쭉 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찍어요, 언니. 언니도 돈 받고 하는 일이잖아. 뭐 찍어야 하는진 들었죠?”

차가 클랙션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지나갔다. 체이와 나나는 동시에 차도로 시선을 옮겼다.

“왜요, 나 언니 좋아해요. 진짜야.”

나나가 발작처럼 차도로 뛰어들었다. 체이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

 

“이체이.”

체이는 고개를 들어 무영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흐리멍텅한 눈이 꼭 썩은 물고기 눈깔 같았다. 체이는 대답하지도 않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기만 했다. 한쪽 손은 축 늘어져 있었는데, 별다를 바 없을 다른 쪽 손으론 카메라 가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뼈가 다 툭툭 튀어나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무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얼굴.”

“알아요.”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얼굴에 사선으로 붉은 줄이 한 가닥 생겨 있었다. 체이의 목소리엔 뼈대가 없었다.

“피사체 뭐 찍었는데.”

“나나요.”

지금은 가늘지만 점차 두꺼워질 그 선을 무영이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체이는 찍은 감정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무영이 항의하듯 입을 벌렸으나 체이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아, 내일 아침엔 저 기다리지 마세요. 촬영 있어서 일찍 나가요.”

“촬영 한 번 나가면 베테랑들도 며칠은 쉬어, 이체이. 하물며 너 지금 반 년도 안 된 애가 일주일에 서너 건을 찍는다고?”

현상흔이 욱신거리기라도 하는지 체이는 얼굴을 감싸고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영은 간신히 가쁜 숨을 이어가는 체이를 간격을 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진사의 업이다. 무감한 눈에 언뜻 연민이 스쳐간 것도 같았다.

“할 수 있어요.”

“당장 네 몸 하나도 못 가누잖아.”

“할 수, 있어요.”

“고집부리지 마, 이체이.”

체이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전등빛이 체이의 얼굴에 그어진 사선을 환하게 비추었다. 붉은색이 뚜렷하게 보였다. 무영은 그것조차도 뱀 같다고 생각했다. 무심결에 주먹을 쥐었다. 이것은 환각이었다.

“아저씨 저는 속죄해야 해요. 죽게 놓아둔 거, 내가 아파서라도 미안해해야 해요.”

체이는 자신이 담은 나나와, 나나와 함께 사라지던 속도위반 중형 세단과, 나나의 부모에게 건네준 메모리를 차례로 생각했다. 체이의 낯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피사체들은 스스로 죽겠다고 자청한 거야.”

무영 자신의 말의 높낮이에 따라 뱀이 구불거렸다. 위협적으로 다가와 무영의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뱀의 찢어진 눈이 번들거리며 무영을 직시했다. 체이가 말을 이었다.

“행복하게요. 그리고 피사체가 아니고 나나예요.”

“어떤 감정이든, 걔가 원하던 대로. 넌 그 소원을 이뤄준 거고.”

“소원이요?”

체이의 한쪽 입꼬리가 뒤틀리듯 올라갔다.

“소원요?”

다시 물었다.

“의뢰했잖아. 걔는 찍히는 데 동의했고.”

무영의 대답은 간결하고 간단했다. 정론이었다. 체이는 나나, 를 발음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나의 얘기는 하지 말자. 나나의 얘기는 하지 말자.

“나도 행복하게 박제되고 싶었어요.”

체이의 안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체이의 낯에 기묘한 표정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내가 찍혔을 때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는데요.”

뱀이 입을 쩍 벌렸다. 물릴 것이다. 무영은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눈을 비볐다. 뱀은 없었다. 체이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무영의 행동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였다. 아래로 비뚜름하게 내려간 입매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영은 사진 속의 세계를 몰랐다.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결국 무영은 침묵을 택했다.

“결국 도피잖아요.”

“체이야.”

“거기는 온통 까만데, 아무도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잘라요.”

체이가 침을 삼켰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두 다리가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위태로웠다. 일단 앉아. 무영은 들릴 듯 말 듯 말했으나 체이는 여전히 두 다리를 붙박여 서서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더 주거나 방향을 바꾸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날선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계속 도망가기만 했던 사람들이, 외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미래의 감정들을 한꺼번에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터져요.”

“…….”

“처음엔 환상이에요. 아저씨 마약 해 본 적 있어요? 나도 없어요. 근데 딱 그 느낌이에요. 몸이 막 뜨는 거 같고,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빨리 뛰고, 그 다음엔 세상이 다 그냥, 다, 어, 빛으로만 보이고, 내가 갑자기 너무너무 자랑스러워지고… 내가 이 세상 전부를 쥐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다가 묘한 성취감에 도취되고… 근데 어느 순간 숨을 쉬려고 해도 공기가 안 들어가요. 나오는 건 있는데 들어가는 건 없어서 폐가 쪼그라드는 기분인데, 그 다음엔,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체이의 목소리가 점점 몽롱해졌다. 나나 같았다. 그 다음엔 체이 같았다. 또다시 나나 같았다. 그 다음엔 체이였다. 무영은 나나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르는데 체이가 나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발목에서 피가 나요. 나는 그게 아픈 줄도 몰랐어. 어, 내 발목이 잘렸네. 딱 그 생각. 잘렸네. 잘렸네. 잘렸어? 그 순간부터 아프기 시작해요. 내가 내 눈으로 내 발 나뒹구는 거 본 순간. 아저씨, 발이 잘리면 온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거 알아요? 어, 나는, 아주아주, 몽땅, 뜨거워질 줄 알았거든요… 얼어붙는 것 같아요, 피부고 내장이고 머리고 다 상관없이, 안쪽부터 말린 미역 부푸는 것 같이 온몸이 부푸는데, 내 몸이 얼음이 된 것 같고, 벽돌로 내려치지도 않았는데 금이 가는 것, 어, 같고…, 옆에서는 터져요, 펑, 펑펑펑, 펑펑…, 비명도 못 지르고. 사람들 머리 터지는 거 봤어요? 그 안에 뭐 있는 줄 알아요?”

이제 체이의 입술까지 하얗다. 체이의 목소리는 점점 더 몽롱해졌고, 점점 더 나나를 닮아갔고,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눈은 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는데, 무영이 숨을 멈춘 몇 초 후에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물에 적혈구 넣어 두면 물이 안쪽으로 꾸역꾸역 들어가 부풀어서 터지는 것처럼 그렇게 죽어요, 아저씨.”

체이의 발음이 다시 또렷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토하듯 글자 하나씩을 꾹꾹 눌러 뱉어냈다. 둘 사이에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나도 그렇게 죽었겠지. 영원이 아니었지. 막지도 못했지. 다 알고 있는데. 말해주지도 못했지. 바람이 유리창을 흔드는 소리만이 그 사이에서 머물렀다. 무영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너는, 어떻게 살아났는데.”

“터지기 직전에 굴렀어요.” 체이는 이제 담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게 그렇게도 버거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갈 때면 다시 올라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작정 보이는 빛으로요. 저기 가면 살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요.”

체이가 쓰게 웃었다. 잠시 정적을 지키더니 카메라 가방을 벗어 바로 옆에 두었다.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고 무영을 곧게 바라보았다. 시계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람이 절박해지니까 뭐라도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거기서 사람들은 차례로 터지고…, 나만 살아남았을 거예요.”

거기서 나온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건 무영도 체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발목은.”

“있더라고요. 흔적은 남아 있지만.”

나오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요. 가끔 욱신거리긴 하는데. 체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바지 밑단을 걷어 올렸다. 발목양말 위로 숱하게 그어진 날붙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무영은 숨을 멈췄다. 자신의 현상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법한 두껍고 깊은 상처들. 이것은 뱀이다. 잡아먹힐 것이다. 백사가 무영의 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영은 체이의 흉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체이의 목소리는 잔뜩 지쳐 있었다.

“그러니까 날 좀 놔두세요.”

체이는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카메라를 챙겨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힘없이 닫혔다. 이체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꼭 유언 같았다. 무영은 자신의 앞에 세워진 문만을 하염없이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

 

이체이는 다음 날 촬영이 끝나고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비밀번호 전자음. 문 여는 소리. 곧이어 발자국 소리가 차례로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체이를 본 무영은 체이에게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시계의 짧은 바늘은 새벽 두 시를 갓 넘어가고 있었다. 체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얼굴의 사선 모양 상처는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얼굴이 잘리면 어쩌지. 무영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은 생각을 했다.

체이의 손에서 신문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체이가 신문을 내팽개쳤으나 힘없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체이는 그러든 말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문도 닫지 않은 채였다. 곧이어 무게감 있는 무언가가 이불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 들었나. 쓰러졌나. 아니면 죽었나. 작은방으로 쫓아 들어간 무영은 다급히 체이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채 다물리지 않은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느껴졌다. 무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간 병적으로 피사체를 찾아다녔다. 현상을 맡기고 우체국에서 등기를 보낸 후 돌아와 죽은 듯이 잠만 자다가 휴대폰 진동에 퍼뜩 깨어나 또다시 촬영 약속을 잡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이체이는 그랬다. 지금껏 무영이 본 이체이는.

발목의 흉터를 생각했다. 발목의 뱀을 생각했다. 제 머리가 분명 백사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단단히 붙어 있었다. 뱀이다. 이체이의 발목을 자른 게 누구라고 했더라? 아니, 무엇이라고 했더라? 뱀이던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문에는 무엇이 있었지? 이체이와 닮은 사람이 치이는 사진. 무영은 자신이 그간 찍었던 피사체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웃고, 울고, 아프고…, 모두가 감정을 영구보존하길 원했는데 그런 세계 따위는 없었다. 오직 터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무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무영의 손목에 그어진 현상흔이 격렬하게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무영이 이체이를 내려다보았다. 채 놓지 못한 카메라는 체이에게 안겨 이불 위에 놓여 있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잠든 이체이의 몸에는 무수한 용서를 갈구하던 흔적들이 있었다. 목덜미부터 발끝까지, 맨살이 드러나는 곳이면 현상흔이 없는 곳을 찾기 드물었다.

무엇이 새로 생긴 현상흔이고 무엇이 원래 있던 현상흔인지가 구별되지 않았다. 시선은 어느덧 발목에 머물렀다. 무영이 체이의 카메라를 집어들어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대자 카메라 안에서 뱀이 이빨을 드러내고 경계했다.

넌 모든 감정을 단번에 느꼈지. 다시 한 번 사진 속에 갇히면 터지지 않을 거다.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이 아팠다. 현상흔이 깊게 패여 있었다. 잘릴 것만 같았다. 무영이 카메라의 초점을 맞췄다. 뱀이 무영의 눈을 물었다. 렌즈에 비친 체이는 불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무영은 남은 한쪽 눈으로 체이를 응시했다. 버겁게 카메라를 드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너는 더 이상 속죄하지 않아도 된다. 무영은 숨을 멈춰 몸을 고정시켰다. 무영의 손목에 새겨진 빨간 줄 너머로 이체이는 자꾸만 얄팍해지는 숨을 뱉었다.

무영이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가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진 파편들이 튀었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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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11-30
플루토 카니발

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라.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라,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라,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 윤별
  • 2018-06-30
유서의 밤

유서의 밤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자꾸만 혜진의 생각이 났다. 그 애의 때 탄 교복 셔츠, 밑단이 조금 뜯어진 치마, 거듭 비어져 나오던 그림자, 그걸 필사적으로 가리려던 얇은 손가락 마디까지. 나는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았다. 그 애처럼 얇진 않을 것이다. 자잘한 상처들조차 없다. 지금쯤 상처들은 더 커졌을까. 많이 다쳤을까. 아니면….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상처가 닮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걸 없다는 걸 알면서,   부럽다. 어? 너희 부모님은… 유서를 쓰던 혜진은 말을 늘이는 걸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볼펜 딸깍이는 소리도 멈추었다. 그 애의 구겨진 교복 틈으로 오래된 풋사과의 색깔이 보였다. 이따금씩 혜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우리 반에서 혜진을 둘러싼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가십거리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다시 등교한 혜진의 뺨에 나 있는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나는 잠시 혜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교복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쓰고 있던 유서 한귀퉁이를 구겼다가 다시 폈다. 거기서 더 진전될 리가 없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물처럼 출렁였다. 자꾸만 그 애의 갸날픈 몸이 팔레트같이 보였다. 그 애가 힘주어 깨문 입술은 빨간색 물감이 상한 것 같았다.   아주 폭력적인 생각인 것을 알고 있다. 그 애한테도, 나한테도. 그렇지만 그 애보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진의 아빠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손목을 잡아끌었다. 혜진의 앙다문 입술이 그리고 있던 수평이 일그러지는 걸 봤다. 몇 번이나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목에 힘을 주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결국 그 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더디게 나아가는 몸을 재촉했다. 가로등의 전기가 금세 나갈 것만 같이 보였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따라 그림자가 함께 깜빡거렸다. 위태로움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늘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앞만 보기 시작했다. 소리가 자꾸만 귀 안에서 메아리쳤다. 너희 부모님은…. 그 애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적막을 싫어했다. 목소리가 파묻히는 걸 두려워했으며 작은 소음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다른 점이라면 혜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어둡고,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밝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양가 없는 생각들. 전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 나도.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만 살고 싶지? 어. 우리 같이 죽자. 어? 언젠간 외국으로 떠서 안락사 같이 하자고. 그거 비싸잖아. 그러게. …. 그럼 그냥 같이 뛰어내리자. 언제? 스무 살 되기 전에. 그래놓고 안 죽을 거잖아. 유서 오백 장 되는 날 그 때 죽자. 그래. 같이 죽자. 그

  • 윤별
  •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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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재

    * " 세 번째 출사에서 팔과 허리에 현상흔을 달고 유명 정치가의 여덟 살배기 딸을 촬영한 사진이 의뢰인들의 마음에 썩 들어, 의뢰인 자신들의 위신도 세울 겸, 사진도 자랑할 겸하여 중앙지에 기고를 한 후부터였다." - 한 문장 안에 너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물론 소설을 쓸 때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잘 담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간절합니다. 이 문장은 그런 욕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문장을 쓸 때 이 문장에서 내가 가장 표현하고 싶은 게 뭔지,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포기해야 하고요. "(체이가) 세 번째 출사에서 유명 정치가의 여덟 살배기 딸을 촬영한 사진이 썩 마음에 든 의뢰인들이 이체의 사진을 중앙지에 기고한 후부터였다." * "체이는 나나의 뒤편으로 바짝 붙어 발걸음을 모방했다." - "체이는 나나의 뒤에 바짝 붙어 똑같이 걸었다." : 제가 읽기에는 뒤의 문장이 훨씬 편하게 읽혀요. 이런 한자어들이 아직도 많이 눈에 띕니다. * "얼굴이 잘리면 어쩌지. 무영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은 생각을 했다." - "얼굴이 잘리면 어쩌지. 무영은 생각했다." : 뭔가 강요하고 있다는... . 이 소설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이미 글을 꼼꼼히 읽은 독자라면 저 대목에서 무영의 생각이 터무니 없는 생각은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런데 자꾸 이 부분은 이렇게 생각해 줘야 해,라고 말하듯 일일히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주인공과의 공감은 중요하지만 주인공과의 거리를 갖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쓰는 나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작품 전체를 장악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 오랜만에 글을 올려주셨네요. 반갑습니다, 윤별님. ^^ 여전히 문장력이나 상황마다 묘사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그리고 캐릭터가 분명한 인물 묘사 들이 눈에 띕니다. 오래 공들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도 여전히 나나가 그랬듯 공부와 공부와 공부 사이를 바쁘게 오가시나요. 물론 제가 이런 것들이 궁금한 이유는 이 소설 때문입니다. 1.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운 건 실감없는 실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움직이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피사체와 사진사.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결국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설정. 그 설정 안에서 찍는 자의 괴로움과 찍힘을 당하는 자의 괴로움 들이 잘 표현되고 있기는 한데 그 설정에 대한 실감이 별로 없어요. 그들이 나누는 대화 또한 관념적이고요. 주인공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데 읽는 자에게는 그 고통이 잘 전해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발목에서 피가 나요. 나는 그게 아픈 줄도 몰랐어. 어, 내 발목이 잘렸네. 딱 그 생각. 잘렸네. 잘렸네. 잘렸어? 그 순간부터 아프기 시작해요. 내가 내 눈으로 내 발 나뒹구는 거 본 순간. 아저씨, 발이 잘리면 온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거 알아요? 어, 나는, 아주아주, 몽땅, 뜨거워질 줄 알았거든요… 얼어붙는 것 같아요, 피부고 내장이고 머리고 다 상관없이, 안쪽부터 말린 미역 부푸는 것 같이 온몸이 부푸는데, 내 몸이 얼음이 된 것 같고, 벽돌로 내려치지도 않았는데 금이 가는 것, 어, 같고…, 옆에서는 터져요, 펑, 펑펑펑, 펑펑…, 비명도 못 지르고. 사람들 머리 터지는 거 봤어요? 그 안에 뭐 있는 줄 알아요?” 이제 체이의 입술까지 하얗다. 체이의 목소리는 점점 더 몽롱해졌고, 점점 더 나나를 닮아갔고,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눈은 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는데, 무영이 숨을 멈춘 몇 초 후에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물에 적혈구 넣어 두면 물이 안쪽으로 꾸역꾸역 들어가 부풀어서 터지는 것처럼 그렇게 죽어요, 아저씨.” 이 부분은 체이가 극에 다다른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어떤 실체 없이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겠죠. 그런데 작품을 읽다보면 이 고통에는 분명 어떤 실체가 근거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체이의 발목에는 무수히 많은 현상흔들이 있으니까요. 처음 무영과 체이가 만나는 장면이나 체이가 극한으로 자신을 몰고 있는 일련의 과정들이 과연 무엇 때문인지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는 그것에 대한 유추조차 잘 되지 않습니다. 실감없는 세계는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종 자의식 과잉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죠. 2. 이 작품은 무영의 시선에서 체이의 시점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무영과 체이의 시점으로 향합니다. 실험적인 모색이었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그다지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아요. 차라리 체이의 시점으로 통일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게 윤별님이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를 좀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생하셨습니다.

    • 2017-12-07 09:49:24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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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안녕하세요! 사실, 음, 올릴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을 오래 했어요. 소설을 놓은 지 꽤 되었고, 분명 몸도 머리도 크고 있는데 (마음은 모르겠고요!) 소설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은 것 같아서요. 감각도 많이 죽었고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 아마 계속해서 소설 내부에서 독자에게 지시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는 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설정을 끌고 왔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세계관을 납득시켜야겠다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어서라고 생각해요. 체이는 '사진 속에 갇혔다 나온 경험'을 기반으로, 무영은 '여동생'이라는 매개체를 기반으로 천천히 무너져가고,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그 부분들이 부각되지 않았나 봐요. 다시 퇴고해서 들고 오겠습니다. 여전히 따뜻하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얼룩의 탄생 너무 즐겁게 읽었고 많이 배웠습니다. 이 말을 학기 초부터 하고 싶었는데 소설을 쓰지 않아서 뭔가 이야기하기 낯부끄럽더라고요. 시 써 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 2017-12-08 20:32:04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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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안녕하세요, 선생님! 몇 개월 만에 인사드려요.

    • 2017-11-27 23:29:23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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