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혀는 칼날보다 강하다고 믿는 소년

  • 작성자 사즈
  • 작성일 2020-08-05
  • 조회수 493

중3 1학기 기말고사 D-32

 

“아 어카냐. 이번 시험 망치면 엄마가 컴퓨터 부순다는데.” 정은이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며 말했다.

“나도임. 안 그래도 저번 시험 망쳐서 영석이 단단히 화났던데. 이번 시험 조지면 어디 암매장 당할  듯.” 영석, 맞다. 영석 초 영석 중 영석 고 설립자 이영석.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아는 그룹 영석 그룹의 설립자 이영석. 영석 그룹은 영석 중공업, 영석 화학, 영석 교육재단, 영석 출판, 영석 제당 등을 아래에 둔 한국의 대기업이었다.  승빈 말을 빌리자면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밥 벌어먹고살게 해주는 아주 대단한 기업이었다. 그 그룹의 사장이 승빈의 할아버지였고 아버지는 영석 교육재단 이사장이었다.

영석 교육재단은 31년전 사립 남자 중학교인 영석 남중을 세웠고, 개교 당시 교내에 수영장과 잔디 축구장, 영석 출판 도서로 가득 채운 도서관이 있는 학교로 주목을 받았었다.

“나 3일 이상 페북에 현활 안 뜨면 네가 경찰에 신고 해라. 백퍼 어디 암매장 당한거니까.”

 

중3 1학기 기말고사 D-30 

 

“야, 너 그거 아냐?” 여느 때나 다름없이 승빈이랑 정은이 폰 게임을 하는데, 정은이 물었다.

“우리 반 반 1등 있잖아. 최지원."

“어. 그 비실비실하게 생긴 놈"

“걔 기초 수급자에 이번에 만든 과학 장학금 대상자더라고. 오늘 교무실 가서 담임한테 혼나다 담임 책상에 놓인 서류 봤음.”

“근데 그게 왜 뭐."

정은이 말을 꺼낸 의도를 파악하지 못 한 승빈이었다. 어쩌면 일부러 파악 못 한 적 한 거 일수도.

“그거 구실 삼아서 협박하자고. 커닝 하게끔."

“이 새끼 간땡이가 부었네. 돌았냐?” 

승빈이 화를 내자 정은이 당황해서 변명했다.

“아니, 너 이번 시험 망치면 암매장이라메. 돈 몇 푼 찔러주면 암말 안 하겠지."

“그 새끼가 선생한테 찌르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네가 협박을 해야지. 너 기초수급자인 거 아는데 커닝에 협조 안 하면 아빠한테 말해서 장학금 회수한다고. 기초수급자가 영석중 학비를 장학금 없으면 어떻게 내."

정은 딴엔 괜찮은 아이디어였는데, 승빈도 그렇게 생각했는가 보다. 몇 분 골똘히 고민하더니 승빈이 말했다. 

“내일 당장 해”

 

중3 1학기 기말고사 D-29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지원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커닝 협조를 안 하면 너네 아빠한테 말해서 장학금을 회수하겠다는 거잖아."

“똑바로 들었네. 그 대신 보수는 두둑이 줄게. 얼마 정도면 되겠나? 육십?”

승빈이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말했다.

 “싫어. 난 안 해. 선생님들 한해 다 말씀드릴 거야.”

진짜  뭐 이런 또라이들이 다 있는지. 지원은 푸아그라 만들 때 쓰이는 거위의 간 보다 더 부어있을 승빈과 정은의 간 크기가 궁금했다. 갑자기 승빈이 지원의 어깨를 잡아당기더니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정의가 있다고 생각해?” 

승빈은 축구공 자는 1학년들을 흘긋 바라보며 은근하게 물어왔다. 정은은 이미 그 사이에 끼여 축구를 하고 있었다. 한심한 새끼. 초딩들이랑 붙어 이겨서 뭐하려고. 그렇게 생각하며 승빈은 말을 이었다.

“물론 어딘가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 근데 여긴 아니야. 공립학교였다면 모르겠는데, 여긴 사립학교고, 우리 아빠는 영석교육재단 이사장인데다 할아버지는 사장이야."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을 하며 미소 짓는 승빈을 보고 있자니, 지원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일 년에 몇 십억씩 지들끼리 해쳐 먹어도, 고작 집유 때리고 벌금 코딱지만큼 때리는 게 다인데, 손자가 커닝하다 들기도 조용히 묻히겠지. 여긴 법의 사각지대야. 내 말 한마디면 너는 이 학교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언론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지 않나?

“너 진짜 어리구나. 공부 잘한다고 다 아는 건 아니네. 언론에 로비해서 그거 묻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네가 인터넷에 커닝 관련 글을 뿌리면 허위사실 유포로 좋은 변호사 써서 소년원 보낼 거고, 선생님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어. 지들 밥줄이 내 손에 달렸는데 실업자 되고 싶으면 폭로하겠지." 

지원의 몸이 굳는 걸 느꼈는지 승빈이 지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쫄지마, 새끼야. 승빈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하겠다고? 알겠어. 일주일 안으로 객관식 주관식 어떻게 신호할 건지 생각해 놔. 어디 찌를 생각은 말고 “ 승빈은 후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축구경기를 하던 정은을 불러 교실로 돌아갔다.

 

중3 1학기 기말고사 D-27 

 

지원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날 승빈의 제안을 공책에 정리해 보았다.

주관식 포함, 기말고사 8과목 모두 답을 공유할 것. 방법은 네가 다 생각해 올 것.

답안을 성공적으로 공유해서 둘 다 평균 90점이 넘을 경우, 처음 제시했던 60만 원을 현금으로 받는다.

매우 위험한 짓인 건 지원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혹여나 발각된다면 승빈이 정은과 자신에게 다 뒤집어씌우는 모습이 불 보듯 훤했다. 얻는 거에 비해 잃는 게 너무나 컸다. 아니야, 어쩌면 잃는 거나 얻는 거나 비등비등할지도. 60만 원이면 노트북 사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밥 한 끼 사  드리고도 남는 돈이야. 고등학교 들어가서 쓰일 돈을 충당할 수 있다고.

어쩌면 얻는 게 더 많을지도. 커닝을 안 하겠다고 하면 당장 장학금이 끊길 텐데. 사실 승빈이 무리수를 둔 것일 수도 있지만. 승빈 아버지에게 그런 권한이 없을 수도 있지만 지원은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와 나 진짜 모순덩어리인데. 커닝 하는 것 자제가 도박인데 말이야. 아무튼 커닝 해서 60만 원 얻고 설령 무사히 졸업하지 못한다 해도 최후의 보루인 검정고시가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지원은 자기 합리화를 했다. 죄책감과 양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양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중3 1학기 기말고사 D-25

 

“똑똑한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멍청하다, 너.” 

예준이 한심한 눈빛으로 지원을 쳐다봤다.

“도대체 뭐가 갖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에어팟? 명품 운동화?”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사실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원은 반문했다. 예준이 지원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커닝. 너 그거 하는 대가로 돈 받는다며.”

 쿵, 하는 소리는 1학년들이 축구공으로 벽을 쳐서 나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지원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였을까.

“사 년만, 아니 삼 년 반만 버텨서 좋은 대학 가면 부잣집 애들 과외하면서 심심찮게 벌 건데, 왜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갈라?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야지.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회를 줄게. 네가 여기서 컨닝 안 하겠다고 하면 난 그냥 이거 묻어줄 수 있.." 

“너는 몰라” 

지원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년 모른다고. 폐지 줍느라 종일 허리 한 번 못 피는 할머니랑 잔뜩 뒤틀린 인간들한테 온종일 시달리는 일흔 넘은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지원은 지금 이 순간에도 힘들게 일하고 있을 조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 학교 일 년 치 학비가 얼만지 알아?” 

잠시 동안의 침묵. 1학년들이 공차고 모래 차는 소리만 들렸다.

“하긴, 대기업 다니는 엄마 둔 아들은 그런 거 알 필요 없겠지. 엄마가 알아서 다 내주니까.” 

또다시 침묵. 길고 긴 침묵의 시간에 지원은 스스로 되뇌었다. 울지마.

“일러 바칠 거면 맘대로 해. 이딴 학교, 안 다니고 검정고시 쳐도 되니까. 근데,”

결국 터졌다. 안 울고 싶었는데 눈물이 나왔다. 흐른 눈물을 옷소매로 찍으며, 당황한 예준 앞에서 지원은 말을 이었다.

“같잖은 충고는 하지 마. 아무것도 모르면서 도덕이니 뭐니 운운하는 거 진짜 뭣 같으니까. 할거면 돈부터 주고 해.”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지원은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다. 분주하던 운동장에는 머릿속이 복잡해진 예준만 남았다.

 

중3 1학기 기말고사 D-24

 

“서술형 답안은 모스부호로 할 거야.”

조금 빨개진 눈을 하고 지원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승빈과 정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모스부호가 뭐야? 무슨 암호 같은 건가?” 

정은이 물었다. 모스부호.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초등학생 때 읽던 추리소설에서인가?

“섀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가 고안한 전신 기호야.” 

지원이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 두드렸다.

“이건 영어로 SOS라는 뜻이야.”

“설마 영어로 한글 서술형 답안을 보내겠다는 건 아니겠지?”

승빈이 물었다. 승빈은 의자에 걸터앉아 아주 위험한 자세로 의자를 앞뒤로 까딱이고 있었다.

“한글 모스부호도 따로 있어. 문제는 너희가 모스부호 체계를 다 외워야 한다는 거지.”

이거 골 때리네. 승빈과 정은은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외우는 거든 뭐든, 머리 쓰기 싫은 정은이 물었다. 게으른 새끼. 지원이 생각했다.

“없어. 더 찾아보면야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기말이 3주 조금 넘게 남아서 나는 공부를 해야 하거든.”

승빈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지원이 덧붙였다.

“모스부호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 자음 모음 합쳐서 26개인데, 4개 이내의 점, 선으로 이루어 져서 있어서 각 잡고 외우면 하루면 충분해

“단점은, 시간이 조금 오래 걸러서 서술형 답안은 과목당 2개정도 밖에 전달 못 해. 대략 20자 안팎이라 해도 글자 하나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자음 모음을 다 보내야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무리야.”

지원의 말에 따르면, 25문제 중 3문제가 서술형인데 그중 한 문제 정도는 너희가 풀 수 있지 않겠냐는 거였다. 아니 애초에 그걸 풀 수 있었으면 너한테 커닝 제안을 안 했지. 정은은 불만스러웠지만 승빈이 아무 말 않고 있었으므로 가만히 있었다.

 

중3 1학기 기말고사 D-20 

 

아침 자습 시간, 지원은 수학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학교 도서관에 있는 3년 치 기말 시험지를 훑어보니, 대략적인 시험 출제 경향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시험은 어렵게 낼 거다.” 

지원네 반의 담임, 국어 선생 정석형이 말했다.

“공부 안 하는 인간들,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해라. 니들 이제 고등학생이다.″ 

석형은 '공부 안 하는 인간'이라고 말할 때 정은과 지태를 바라보았고, 지태와 눈이 마주셨다.

“아 참, 그리고 최지원 너는 1교시 끝나고 교무실로 와라.”

지원이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석형은 앞문으로 사라졌다.

“선생님, 부르셨죠?” 

지원이 석형의 책상 앞에서 쭈뼛거리며 말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혹시나 커닝 하는 걸 알고 부른 건지 긴장돼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 다름이 아니고 네가 우리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더구나.” 

석형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지원을 보았다.  지원이 너무 말라서 서 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석형은 말을 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너 보니까 어릴 적 내가 생각나서.”

“나도 어릴 때 집이 가난했거든. 밥도 없어서 동생 여섯이랑 아사 직전일 때 외국인 선교사 분이 도와주셨다.“

“아무튼,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물어보고. 내 아는 선에서 가르쳐 줄 테니까. 아 참, 지원아!"

지원은 앞문으로 나가기 직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이거 가져가라. 삐쩍 말라가지곤. 친구들 주지 말고 너 혼자 먹어"

석형이 지원에게 준 것은 초코파이 한 상자였다. 지원은 얼결에 초코파이 상자를 받아들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몰라. 지원은 초코파이 한 개를 까서 우물거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나마.

 

중3 1학기 기말고사 D-16

 

#올만에_코노 와따 #티어스는_무리지? #하늘여중 #전정은 #이슬비 #한영지 #김지민 #니들_이쁘더라 #뒤져도_놀다뒤지자

 

코노 가서 한바탕 놀아재낀 모양인데. 지원은 승빈의 인스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커닝 한다지만 너무 대책 없이 노는 건 아닌지. 이래놓고 시험 잘 지면 뭐라고 둘러댈 건 지? 찍신이 강림했다고 하려나? 아니면 천재 컨셉으로 가려고? 기말 2주 남기고 코노 가는 전정은이나 이승빈이나 하늘여중 날라리들이나. 도긴개긴 도토리 키재기 거기서 거기 오십보백보지만, 지들 인생 지들이 꽈배기처럼 꼬고 있는 게 너무 부러웠다. 미래 따윈 잊고 죽어도 놀다 죽는다는 그 무책임함, 가진 자에게서만 나오는 그 초딩 같은 마인드가 부러웠다.

열등감에 휩싸여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나는 참... 죄를 저울질하는 저울에다 가난한 집 공부 잘하는 열등감 덩어리와 잘사는 집 무책임한 날라리를 저울질하면 어느 쪽으로 기울지 궁금했다.

애초에 그걸 저울질 한다는 게 웃기긴 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폰을 끄고 씁쓸해하며 역사 교과서나 읽었다.

 

중3 1학기 기말고사 D-14

 

기말고사를 이 주 앞두고 셋은 커닝 연습을 했는데, 시간이 약간 빠듯했다는 것 빼고는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괜찮네. 이 정도면 지원이 승빈과 정은의 시험지와 답안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평균 90은 넘겠어. 지원은 안도라 해야 할지, 성취감이라 해야 할지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할 건 다 했어. 너네가 밀려 쓰지만 않으면 돼.”

 

중3 1학기 기말고사 D-10 

 

기말고사를 열흘 남기고 지원은 자정을 넘겨가며 공부 중이었다.

“지원아, 공부 고마 하고 얼른 자. 그렇게 공부하다 시험 날 쓰러지면 어쩌려구 이래.” 지원의 할머니가 마루를 걸레질하며 방에 있는 지원에게 말했다. 그때, 재난 문자가 울리기 시작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이 내려앉게 만들고 피를 식히는 소리였다.

“아이고, 시끄러버라 먼일 났는갑다. 얼른 자라 지원아.”

지원은 할머니 등쌀에 떠밀려 잠자리에 누웠지만,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재난 문자 사이렌 소리가 자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아 두려웠고, 가슴 안쪽에서는 불안한 코끼리가 쿵광거렸다. 한낱 재난 문자 따위가 미래를 암시할 리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으론 몰랐다.

 

중3 1학기 기말고사 D-7 

 

그날로부터 이 주가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예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원과 정은, 승빈이 커닝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아주 우연히. 기말고사가 26일 정도 남았을 때, 3층 음악실 앞에서 정은이 지원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정은은 조심성 없이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평균 90이니, 돈을 얼마를 주니, 커닝이니 하는 말을 내뱉으며 경박하게 낄낄거렸다. 지원 뒤에 있어 지원의 표정은 보지 못했는데, 정은이 웃고 있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원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뻔뻔한 정은의 태도에 격분해서, 당장 교무실로 가 일러바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기회는 줘봐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고, 칠판을 뚫을 기세로 맹렬히 칠판의 수학 공식을 쏘아보는 지원을 보자 그래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 솔직히 그런 명석한 머리로 그런 짓 하는 지원이 한심해 보였다. 언젠가 용돈 벌이로 이런 짓 하는 학생들 이야기를 읽은 적 있는데, 그래서 그런 거라면 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일깨워줄 참이었다.

그래서 그때 지원에게 말했던 것인데. 지원이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독수리랑 눈싸움해서 이길 것만 같은 강인한 두 눈에서 여리고 여린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질 때는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리 좀 그만 떨어 미친놈아.”

예준의 동생, 나은이 소리를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또 왜 뭐가 신경 쓰여서 지랄인데.” 

그날 이후로 자꾸 지원이 눈에 밟히잖아.

 

중3 1학기 기말고사 D-3 

 

애초에 아빠라는 사람은 내 부탁 따윈 들어 주지도 않는 사람이야. 승빈은 이어폰 볼륨을 최대로 높이며 생각했다. 나한테 명품 운동화 한 켤레 사주기 싫어하던 인간인데, 뭐 장학금을 뺏어? 그런 걸 어떻게 해 달라해. 바로 집에서 내쫓기고 최지원이랑 전정은만 병신 되는 거지 뭐. 누가 선생한테 꼰질러도 엄마랑 영석이가 커버 쳐줄건데. 설마 하나밖에 없는 아들 손자 징계 먹이겠어? 뺵 없는 니들만 불쌍하지. 너네들과 나는 애초에 스타트 라인부터가 다르단다. 아, 근데 이거 노래 진짜 좋네. 병신들. 돈이 많으면 기말고사가 삼 일 남아도 노래나 듣고 놀 수 있는데 말이야.

 

중3 1학기 기말고사 D-DAY 

 

“연습했던 것처럼 하는 거야.” 

지원이 승빈에게 살짝 속삭였다. 승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교문을 통과했다.

기말고사 첫 과목은 국어였고, 삼십 분 남짓한 자습 시간 동안 지원은 국어 교과서를 훑어봤다. 전날 밤에는 심장이 폭주하듯 뛰어서 몇몇 차들이 그렇듯 짧은 폭주 후 그대로 멈춰버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날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너무 차분히 뛰었다. 

“책 집어넣어라.”

1학년 수학 선생의 말에 아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는 가방 지퍼를 닫았고, 누구는 창백한 얼굴로 약을 삼키듯 포도당 캔디를 삼켰다.

국어 시험은 쉬웠고, 뒤이어 친 역사와 도덕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시험은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을 듯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어. 모 아니면 도야. 그렇게 남은 시험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중3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후 1

 

누군가는 교무실로 향했고, 다른 누군가는 이어폰 볼륨을 최대로 높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또또 다른 누군가는 뒷자리에 앉은 친구와 시끄럽게 욕설을 주고받았다.

교무실로 향한 누군가가 들어가고 대략 삼십 분의 시간이 지난 후 선생님들은 분주하게 회의를 시작했다. 선생님들 중 몇몇은 다량의 아스피린을 복용해야만 했다. 머리 깨나 아팠던 회의를 한 뒤 선생님들은 교무실로 들어간 누군가와 이어폰 볼륨을 높이던 누군가, 아무 말 않던 누군가와 욕설을 주고받던 누군가를 불러 상황 검증을 했다.

그중 세 명은 다 같이 짜기라도 한 듯 딱 잡아뗐고, 몇 차례 협박 아닌 협박이 있고 난 뒤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물론 그 말은 비공식적으로는 모두가 들었지만 공식적으론 그 자리에 있던 선생님 모두 듣지 못한 말이 되었다.

교무실로 향했던 누군가 또한 조사를 받았고, 어떤 선생님은 커닝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했지만 누군가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던 음성 녹음 파일을 듣고는 자신의 애제자가 커닝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누군가가 증거 자료로 제출한 음성 파일에는 한 소년이 경박한 목소리로 커닝 수법에 대해 얘기하는 소리와 또 다른 누군가가 시큰둥하게 맞장구치는 소리가 담겨 있었다.

 

중3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후 2

 

많은 것이 바뀌었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커닝에 가담한 사람은 세 명이었지만 서류에는 두 명으로 기록되었다. 커닝 수법을 제공한 학생은 장학금을 회수당하고 시험이 0점 처리되었고, 주는 답안을 덥석덥석 받아 쓴 또 다른 학생 또한 시험이 0점 처리당했다. 가담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가담하지 않은 다른 학생 한 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어폰 볼륨을 최대로 높이고 음악을 들었다. 물론 그의 기말 시험 성적표는 모든 과목에 A가 찍혀있을 것이다. 그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컨닝이 일어났던 3학년 5반 교실은 조용했다. 아이들은 영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집을 풀고, 복잡한 국어 문법을 외우며 열과 성을 다해 공부했다. 대학이 자신의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었고 세상을 믿었다. 교무실로 향했던 학생 한 명은 그런 교실 풍경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과연 그의 행동이 옳은 행동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열여섯 살은  결코 좋게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에게 들은 반협박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불공정한 방법으로 성적을 조작하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공부만 하는 친구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고, 교탁 앞에 섰다.

어쩌면 아무 것도 바뀌는게 없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그가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고소를 당할 것이고 잘 해봐야 물 흐리는 미꾸라지 취급을 받을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혀는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믿었다.

 

" 얘들아, 여기 좀 주목 해 봐."

 

추천 콘텐츠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변명

*제작년에 문예창작 관련 교육기관을 다니며 썼던 글을 수정하여 올립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오른뺨을 감싸 쥐었다. 약간은 흐릿한 시야 사이로 미끈한 대리석 바닥이 들어왔다. 얻어맞은 오른뺨이 얼얼했다. "일어나, 김서연."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순순히 일어섰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솔직히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오늘 같은 날까지 때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한여름의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이마를 짚고 긴 거실 복도를 천천히 오갔다. "고작 열댓 살 먹은 게 사내자식 하나 때문에 이 사단을 만들어? 이런 것도 딸이라고……. 내 동네 창피해서 정말, 후…" 나는 날이 선 표정을 숨기려 혀를 짓씹었다. 혀가 잘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멈춰서는 안 되었다. 왼쪽 뺨까지 얻어맞을 수는 없다. 최선은 이미 글렀으니, 최악을 면하려면 다만 공손하게 굴어야만 했다. “법원에 가려면 지금 나가야 해요.” “내. 눈앞에서. 사라져.”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방음이 완벽한 열 평짜리 안전지대로. 방문을 닫자마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혹여나 태워준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 인간과 같이 간다면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책상 서랍을 뒤져 버스카드를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이소에서 산 탁상거울로 오른쪽 얼굴을 비춰봤다. 오른쪽 뺨에는 낙인처럼, 마치 가축업자가 달군 인두로 소에게 찍은 낙인처럼 벌건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있었다. 서랍에서 덴탈 마스크를 꺼내 얼굴을 가렸다. 익숙한 일이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는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잘게 흩날리는 가루눈이 아닌, 제대로 펑펑 내리는 입자 굵은 함박눈이었다. 함박눈이 내릴 만큼 추운 십이월의 날씨에도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자석처럼 서로에게 찰싹 들러붙은 연인들, 똑같은 겨울 파카를 맞춰 입은 가족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를, 다른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를 하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남자. 나만 빼고 또 다 즐겁고 화목해 보여 기분이 나빴다. 하긴, 누구는 아침부터 뺨 맞고 지하철이나 타는데 그런 풍경이 곱게 보일 리 있나. 이 짜증 나는 기분을 누구에게라도 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친구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 초간의 신호 대기음이 들리다 어느 순간 멎었다. "야…. 아침부터 이러려니까 짜증 나 죽겠다 진짜." "또 무슨 일인데. 또 맞았어?" "응, 지가 어제 태워다 준다 해 놓고 때리는데, 꼴 보기 싫어서 걍 지하철 타고 가려고. 수틀리면 손부터 날아가는 저런 인간이 로스쿨 교수라는 게 우리나라 망했다는 증거지." "네가 아침부터 고생이 많다. 오늘 재판 있는 날이지? 이혜경이랑 서보은 걔들 때문에 이 사달 난 거 아냐? 걔들이 너 웃음거리 만들고 그랬다며. 하여튼 진짜 그런 애들은…." 그때 경쾌한 노

  • 사즈
  • 2024-07-07
회복기

*정끝별-회복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소설로 개작 해보았습니다. 동아리 시간에 '시를 소설로 바꾸기' 활동을 하며 써뒀던 글인데, 수정해서 올립니다 :)회복기-정끝별 아침 햇살이 슈거파우더처럼 내려앉은 이월의 소파에서 그루밍하다 사르르 잠이 든 고양이 조금 전에 나는 저 소파에 기대앉아 신열에 젖은 속옷을 식히며 남산타워 뒤로 떠오르는 해를 맞았어열이 내렸을까 겨드랑이로 파고든 고양이가 가르릉가르릉 불러주는 골골송을 선잠인 듯 듣다 일어나 고양이 물을 갈아주고 화장실을 치우고 밥을 주고는수란을 띄운 말간 순두부를 끓여 늦은 아침을 먹는 내내 계란을 좋아하는 고양이가 무심한 척 내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조그만 심장이 어찌나 쿵쿵거리던지설거지를 하고 다시 식탁에 앉아 연한 커피를 마시면서 슈거파우더 뭉치가 된 소파의 고양이를 보고 있어 이제 봄이겠구나어느 봄 햇살에 나도 녹아들겠구나 봄이 다디단 이유일거야. -회복기 소파에 기대앉아 바라보는 창밖은 공연 시작 전 작은 조명 몇 개만을 켜놓은 무대처럼 어둡기만 하다. 지혜는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을 멍하니 응시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작게 열어둔 창문 틈으로 들어온 서늘하고 깨끗한 겨울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불면증이 심해 잠에 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고 겨우 잠에 들어도 수면의 질이 나빠 중간에 자주 깨 뒤척이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사흘 내내 야근을 해가며 일을 쳐낸 탓인지, 아니면 최근 오래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해 왔던 데다 절연한지 오래인 부모가 어떻게 알고는 전화번호를 알아내 돈을 내놓으라 행패 부렸던 일 때문인지. 지혜는 분명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몰려 있었다. 몸살 기운이 있더니 어제 점심 무렵부터는 아예 오한 때문에 몸이 저절로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몸 상태가 너무 나빠 해열제를 먹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뉘었다. 근육 하나하나가 저리고 뻐근한 느낌인 데다 잠마저 오지 않아 한참을 끙끙거리며 앓다 잠에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지혜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밤새 식은땀을 흘려 온몸과 이불이 축축했지만 오랜만에 깊이 잔 덕인지 몸만은 한결 가뿐했다. 이불 빨래나 샤워 같은 현실적인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지혜는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거실의 소파로 향해 몸을 기대고 앉았다. 다만 일출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스물일곱 생애 단 한 번도, 지혜는 편안한 마음으로 일출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2023년 12월 31일의 해나 2024년 1월 1일의 해는 다를 바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 해돋이를 보러 가족이나 연인과 정동진이나 호미곶까지 가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나 이것은 지혜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혜는 고등학교 학창 시절 전체를 좋은 대학 취업 잘 되는 과에 가기 위해 모두 바쳤고,

  • 사즈
  • 2024-06-17
서른의 다경으로부터

하경 언니에게,   참 오랜만에 언니한테 편지를 쓰는 것 같아. 아니, 애초에 언니에게 말을 거는 것도 열다섯 살 이후 처음이지 아마?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원하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꾸준히 성장하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월급도 나랑 고양이가 넉넉히 먹고 살 만큼은 벌어. 애인이랑 관계도 순조롭고 내년 즈음엔 정말 결혼을 하고 싶은데 상황이 따라줄지는 모르겠지만. 언니가 나 어릴 때 걱정했던 것처럼 백수가 아니야. 언니의 걱정처럼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라 사람들한테 놀림받고 탕비실에서 조용히 울음을 삼키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어, 난.  십 년 넘게 연락도 없다가 왜 이제야 편지를 하는지, 전화도 문자도 뭣도 아닌 편지인지 많이 의아했을 거야. 최근 언니 소식을, 언니가 잘 먹고 잘살고 건실한 남편 만나 토끼 같은 자식까지 셋이나 두었다는 그런 소식을 접해서. 맏이가 공부를 그렇게 잘하고, 남편이랑 금실이 좋고. 둘째는 친구들한테 인기가 그렇게 많고 막내는 선생님들한테 얼마나 이쁨받는지 모른다며 올렸던 그 인스타 게시물들. 아는 선배가 언니랑 알음알음 아는 사이라 언니의 인스타 계정을 얼마 전에 접할 수 있었어. 왜, 언니가 열일곱이고 내가 열다섯이었을 때, 언니가 좋아하던 진성 오빠한테 고백했다 단칼에 거절당하고 종일 울었던 그때 있잖아. 한 사 월 쯤이었나, 기억나? 어장친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정하게 굴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근데 사실 오빤 친절이 몸에 밴 것뿐이어서 남들한테 하듯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고 학원 레벨테스트 망치고 울던 언니한테 공부 비법을 전수해 줬던 거야. 애초에 오빠가 동성애자였으니까, 본인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성에게 그렇게 한다는 게 큰 문제가 될지 몰랐던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언니가 그 사실을 알고 왜 내 주위에는 정상인 새끼들이 없는 거지, 하고 소리치던 밤에 열이 돋아 처음으로 커밍아웃했었지. 사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 게시물을 보니 내 말을 듣고 얼빠진 표정을 짓다 난 절대 너처럼 살지 않을 거라 소리치던 언니 생각이 나서, 언니가 참 언니답다는 생각이 들었어.  언니도 짐작했겠지만, 아니 알고 있었겠지만 내 학창 시절은 별로 좋은 추억으로 남지 않았어. 내가 '그런' 사람 일수도 있겠다는 것을 처음 자각한 때는 열네 살 때였고, 확실히 알게 된 건 열다섯 때였는데 그때 언니랑 다투고 거의 절연하다시피 했잖아. 열다섯 6월이후론 김희주가 내 비밀을 소문내고 다녀서 책상에 레즈년, 더러워, 나가 뒤져 이런 말들이 항상 틴트로 쓰여있었으니까. 중학교 마지막 체육대회 날에는 반 애들이 내 주위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복도를 걸을 때면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었어. 누가 계속 내 어깨를 쳤거든. 실수인 척 무심히 툭 치고 어 미안해 그러고 지나가는, 분명 모두 다른 사람인 게 틀림없는데도 똑같은 목소리에 똑같은 표정을 가진 애들이 너무 많았어.  그런 괴롭힘은 특히 중학

  • 사즈
  • 2021-05-16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선형

    안녕하세요, 서지호 님. 소설에 몰입감이 있네요. 디테일도 좋구요. 음, 컨닝이라는 소재로 예준이나 지원, 승빈이라는 세 인물 또한 각자의 캐릭터적인 개성을 갖고 있네요. 커닝과 결부해 자본주의적 환경에서 학생들이 처한 위치와 정의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부분들도 자연스러웠고, 결말 또한 무난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가 단조로울 수 있었던 부분을 다양한 세 인물들 사이의 시점과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전개하는 솜씨도 좋았습니다. 아쉬웠던 건 결말로 갈수록 소설의 속도가 빨라져 디테일 부분에서 누락한 지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커닝의 순간이나 커닝 이후도 더 성실하고 구체적으로 쓰여져야 할듯 합니다. 퇴고 이후가 기대되는 작품이에요. 다음 소설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0-09-13 23:28:57
    선형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