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파도의 손길

  • 작성자 녹두
  • 작성일 2020-10-29
  • 조회수 265

  "나를 사랑하세요?" 매일 아침이 밝으면 스텔라는 장의 옆에 우뚝 멈춰 서곤, 그리 질문하곤 했다. 그러면 장은, 길게 하품을 하면서, 혹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닦으면서, 혹은 눈을 부빗거리면서 "그럼, 우리가 왜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겠어, 이 여편네야." 하고 되려 훈수하곤 했는데, 그럼 스텔라는 군말 않고 움직여 부산스레 아침 준비를 했다. 아침마다 그런 궁금증에 답해줘야 하는 이유는 뻔했다. 오십 년을 함께 살면서도, 둘은 혼인 신고 한 번 제대로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을 때야 부모님의 반대나 재정 상황등의 이런저런 것들로 미뤄 왔다지만, 장의 검은 피부 위에 덮여 있는 머리칼들이 하얗게 샌 지금까지도 둘은 서류상 남남이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맨 정신으로 결혼 신고 얘길 꺼내기엔 장을 내심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고, 장은 결혼이라니, 죽을 날도 머지 않았는데 새삼스레, 란 핑계로 스텔라의 그런 심정을 외면해만 왔다. 장은 아침 식사를 마치면 늘 동네 호숫가에 앉아 낚시를 했다. 홀로 하는 날도 많았지만, 같이 늙어가는 처지의 동네 노인네들부터, 가끔은 학생들이나 청년들,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옆에 누군가 앉아 있는 날도 있었다. 다만 스텔라가 옆에 있는 날은 없었다. 스텔라는 집안일을 돌보고, 손님을 맞고, 장에 가느라 바빴다. 그래서 스텔라는 자주 장의 낚시 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곤 했다. 그러면 기러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호숫가에 기러기 같은 것은 있을 리 만무한데도.

  장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보통 여섯 시 언저리였다. 몸을 씻고 나서, 스텔라가 해 둔 저녁을 먹었고, 허술한 오두막의 벽과 닮은 재질의 테이블에 앉아 독서를 하거나, 낚시대를 보살폈다. 그동안 스텔라는 집의 온도를 살폈고, 장이 몸을 누일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장이 늦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스텔라가 요리를 마치는 시간도 일정했다. 하지만 예외인 날도 있었다. 어느날 밤, 장은 밤이 다 되는 시각에 집에 도착했고, 피곤에 절어 식탁으로 향했다. 웬일로 조리된 음식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지 않아, 장은 목청 높여 스텔라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스텔라는 침실 입구 앞에 쓰러져 숨을 쌕쌕 뱉어내고 있었다. 전신에 열이 올라 펄펄 끓고 있었다. 장은 스텔라의 한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침대 위로 옮기려 기를 썼다. 스텔라는 작은 목소리로 괜찮다며 신음했지만 장은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열 두시가 다 될 때까지도 스텔라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결국 장도 잠을 청하러 침대에 누웠고, 다음 날 아침 마을의 의사 선생을 불렀다. 의사 선생은 스텔라를 이리저리 진찰해 보더니, 단순 감기는 아니라며,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도심의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장은 종종 낚시를 함께 하던 정육점집 아들의 트럭을 빌렸다.

  스텔라의 검사를 기다리며 장도 건강검진을 했는데, 도심에 나올 일도 드물 뿐더러 아주 늙은 노인들의 검진료는 매우 쌌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책이니 보험이니 하는 단어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그 정도 가격이면 저녁식사 재료를 고기에서 호박으로 한 번쯤만 변경하면 됐다. 몸이 노화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정상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다. 스텔라는 폐가 병들었다고 한다. 수술을 하려면 할 순 있겠지만, 스텔라가 워낙 노쇠하였기에, 성공 가능성도 희박할 뿐더러, 성공한들 연장할 수 있는 삶의 날들도 많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의사는 입원수속을 밟겠느냐 물었는데, 장이 고민하는 사이 스텔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나치게 담담한 반응이라 반박할 틈도 없었다. 집에 돌아가자 스텔라는 그 즉시 테이블에 앉았다. 주로 장이 상주하는 구역이라 그가 앉아 있는 광경은 꽤나 이질적이었다. 손가락으로 장을 불러, 장도 마주앉아 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텔라는 장에게 대뜸 질문했다. "장, 나를 사랑하세요?" 그 순간 장은 수십년간 같은 질문을 받아 오며, 단 한 순간도 스텔라의 눈을 맞춘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답을 할 때 제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도 고민한 적이 없었다. 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텔라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서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제 얼마 뒤면 죽을 텐데, ..." 그러면서 어렴풋한 시선을 보냈다. 결혼 얘길 꺼낼 참인가. 장은 스텔라가 미련스레 구는 것이 불편했다. 아프면 가서 쉬기나 할 것이지. 스텔라에게 이만 가서 누우라고 지시했다. 스텔라는 불만스러운 눈초릴 했지만 군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장은 낚시를 하러 갔다.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신음소리가 가득한 집 안에 틀어박혀 있고 싶지가 않았다. 양동이를 챙기고 호숫가에 가 앉자 로드릭이 장을 반겼다. 로드릭 탯줄 자르는 것도 봤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방학 때만 마을로 돌아온다. 로드릭은 넉살 좋게 장에게 말을 걸어 댔다. 도시의 대학은 역시 공기부터 다르다느니, 동호회에서 수영을 배웠다느니... 허세를 떨어대다가, 급기야 물에 입수해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장은 낚시대를 거둔다. 그런데 한참 수영을 하던 청년이 강해진 물살에 이기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한다. 장은 당황하여 덩달아 호수에 첨벙거리며 들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심이 깊어져 제 허리 이상을 넘어가자, 자신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을 깨닫는다. 급히 호숫가를 벗어나 마을의 다른 이들을 부른다. 로드릭은 파리해져 의식을 잃은 채로 건져진다. 목숨은 건졌지만 이상이 있는 지는 살펴 봐야 안단다. 장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죽음은 한 순간의 물살에도 닿을 수 있는 것.

  집으로 돌아가자 스텔라가 기침을 하고 있다. 장은 스텔라의 옆에 가 앉는다. 이제껏 스텔라가 결혼을 바란다고 생각해 불편했지만... 스텔라가 얼마 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생각하니 무엇이든 들어줘야만 할 것 같은 심정이다. 스텔라에게 바라는 게 있냐고 묻자 스텔라는 다시 시뻘건 눈이 된다. 울음을 참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을 본 순간, 장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도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민다. 아, 가여운 여인! 어쩌면 스텔라가 이제껏 서류와 증거에 집착했던 이유는 자신이 스텔라의 눈을 마주봐주지 않아서, 스텔라의 바람을 한 순간도 배려해주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무릇 사랑이란 상대의 하나부터 열까지를 속속들이 알고 마음을 기우는 작업 아니던가. 그들이 함께해 온 긴 시간은 그런 사랑의 부재로 밀도 없던 고행이었던 것이다. 장은 차가운 손으로 스텔라의 눈자위를 문질러 닦아 준다. 그리고 그를 껴안으려다가..., 관둔다. 스텔라의 우는 얼굴을 눈에 오롯 담기 위해서...

  죽음을 임박한 자와의 결혼. 장은 그 날 그런 것을 각오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이 스텔라의 속사정을 알려 애썼던 그 날, 스텔라 안의 의심은 종말을 맞았다. 그릇 닦을 휴지가 다 떨어진 어느 날, 장이 스프를 흘리자, 스텔라는 서랍 안 깊숙한 곳에서 이면지라며 언제 가져왔을지 모를 혼인신고서를 꺼내 왔다. 그리고 그 날, 장은 함께 낚시를 가자며 제안했다. 저녁은 굶어도 아무래도 좋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기러기 같은 것은 떠 있지 않았다. 스텔라는 그게 아쉽다며 웃었다. 난, 당신이 낚시를 간다면 당연히 외곽에 있는 바다로 가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매일 보는 이 호수였군요. 과연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었으니까. 장은 바다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주 어릴 적 읽었던 책의 구절을 알려 주었다.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택하고 싶었던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스스로를 강가의 배에 태우고, 물에 서서히 잠기며 물고기와 기러기의 밥이 되는 것을 택했다. 스텔라는 그런 방식이 로맨틱해 보인다고 말했다. 장은 그런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시답잖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제 삶에 결혼식이라는 것은 스프가 잔뜩 묻어 사라졌고, 제 앞의 사랑하는 여인은 곧 삶을 마감하므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한다라. 적절한 장례식을 기획하는 것은 좋아 보였다.

  둘은 그날 밤 벽에 달린 달력을 꺼내 왔다. 집 안의 다른 모든 것들과 비슷하게 헐고 낡아 먼지가 잔뜩인 달력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스텔라의 죽음을 기획했다. 둘은 가난했고, 스텔라는 벌써부터 매일이 괴로운 기색이었기에, 날은 최대한 빨리, 사흘 뒤로 정했다. 회의가 끝나고 장은 스텔라에게 주어 없는 사과를 했다. 그리곤 양해를 구하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아주 오래간만의 맞닿음이었기에, 스텔라는 놀란 눈이 되었다. 얼마만인가? 그가 저를 이렇게 아끼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이. 스텔라는 아프고 지쳐 있었지만, 장이 은근히 저를 탐해 주길 바랐다. 그래서 한 꺼풀 씩 모르는 체하며 옷가지를 벗었다. 장이 가만 보고만 있자 금세 다시 빨간 눈이 되었는데, 장은 이제 그 표정에 면역이 아주 없었기에, 순식간에 그들은 장소를 옮기고, 노쇠한 사랑을 나누었다. 온통 빛바랜 것들 투성이인 오두막에 유일하게 검붉게 핀 것이었다. 희열보다는 압박감이, 기쁨보다는 먹먹함만이 남는 관계였다... 장은 일평생 재투성이 원피스를 입은 땅딸보 스텔라의 모습만을 알았지만, 그 날 본 스텔라의 몸은 그 이상이었다. 희고, 처지고, 투실투실한 엉덩이에 촉감도 마치 싸구려 솜을 잔뜩 모아둔 것처럼 움푹했지만, 그 피부에 닿아 있는 순간 장은 비애 넘치는 노인이 아니었다. 한 명의 남자였고, 세상에 존재하는 또 한 명의 인간이었다.

  사흘은 순식간에 흘렀다. 스텔라의 앞으로 온 우편물들을 처리했고, 공공기관에 있는 기록들에 수정을 요청했고, 만나야 될 사람들을 모두 만났다. 아주 적은 수라서 순식간에 끝났다. 오히려 죽음 전 하루는 할 것이 없어, 장과 낚시를 한 번 더 함께 다녀왔다. 마침내 스텔라 삶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둘은 한 번 더 사랑을 나눴는데, 서로에게 묘한 감정을 선사했다. 그래서 둘은 벗은 채로 바닷가로 향했다. 둘의 발가벗은 몸을 목격한 몇 마을 사람들은 놀라 부끄러움도 모르냐고 놀렸지만, 글쎄, 장 생각에 진정 부끄러웠던 것은 지나온 시간들이었다. 바닷가는 걸어서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바람이 차서, 파도는 꽤 세차게 그 기세를 펼치고 있었다. 스텔라는 자꾸 기침을 했다. 장은 마지막으로 바닥에 걸터앉곤, 모래사장에 스텔라의 몸을 닮은 모래 조형물을 만들었다. 커다란 배, 커다란 엉덩이, 못난 살가죽들 그렇지만 장에겐 유일한 그 여인이었다. 스텔라는 박수를 쳤다. "이건 무덤 대신이야." 듣기에는 여전히 무뚝뚝하기만 한 음성으로 장이 말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리겠지. 스텔라와 같은 운명이다. 오후가 되자 장은 스텔라의 손을 움켜쥐었다. 스텔라는 기침을 애써 삼키고 수줍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그리고 둘은 바닷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심은 점점 깊어졌고, 이제는 장이 손을 놓아주고 스텔라 홀로 안으로 걸어설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장은 또 생각했다. 오십 년 넘게 함께 해 온 공백을 그는- 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결코 홀로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생각은 저도 모르게 결심으로 이어져,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파도가 더욱 거세져 그의 발이 물 안에서 붕, 뜨게 되었다. 그는 내심 오랫동안 이런 것을 바라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스텔라는 손을 뿌리치지도 않고 웃기만 했다. 소리 내 웃는 것은 아주 오래간만에 듣는데, 참 듣기 좋은 고음역의 소리였다... 물이 들이친다. 마침내 스텔라의 귓구멍에도 파도가 잔뜩, 인정사정없이 들이친다. 그 소리가 꼭 기러기 울음 소리 같다.

  하늘이 맑다.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죽음은 한 순간의 손길에도 닿을 수 있는 것.

녹두
녹두

추천 콘텐츠

앞으로 가는 사람

앞으로 가는 사람 '오스텅스 블루 - 사막' 이라는 시를 읽고 재구성해 써본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빛이 전부인 모래사막 속.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린다. 조난자 블루,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이 노인은 며칠 간 이 사막을 홀로 배회해 왔다. 정신은 자꾸만 흐려졌고, 피부는 갈라져만 갔다. 추운 밤이면 이따금씩 야생 들개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다 죽어가는 청력이 감지하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이제 그 앞에 놓인 죽음에 어렴풋이 순응하고 있었다. 몇 시간 째 뜨거운 모래 바닥에 잠자코 누워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음이 들리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끌리듯 그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한들, 호기심의 수명까지 정해져 있지는 않은 법이니까. 멀지 않은 곳에 부서진 작은 헬기의 잔해들과, 다소 젊어 보이는 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블루가 이름을 묻자, 그는 자신을 ‘오스텅스’라는 파일럿으로 소개했다. “이런 사막에도 사람이 다 있군요. 할아버지도 조난을 당하신 겁니까? 이러나저러나 반갑습니다.” 오스텅스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요청하자, 블루는 지친 기색으로 허공에 손을 저으며 거부했다. 꼭 저는 됐으니, 피차 기운 빼지 말자는 성 싶다. “젊은이. 어차피 곧 죽을 놈들끼리 악수는 뭔 악수인가? 삶은 어차피 혼자이고, 곧 끝을 맺을 거라네.” 냉소적인 블루의 시선에도 괘념치 않고, 오스텅스도 빈정이 상해 블루에게 한 소리 한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죽기는 누가 죽습니까? 할아버지의 삶은 저보다 훨씬 길었고, 그 생을 오갔던 사람들도 저보다 훨씬 많았겠지요. 저는 삶이 혼자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아 돌아갈 겁니다.” 블루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이다. 둘은 같이 걸었다. 블루는 걷고 싶지 않았으나, 오스텅스에게 야생 들개들에 대한 조언을 해 주자, 오스텅스가 경악하며 블루를 일으켜 세웠다. 걸으며 조용한 쪽은 오히려 오스텅스였다. 블루는 시시콜콜한 근거를 대며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떠들어 댔다. 처음에는 일일이 반박하던 오스텅스도 나중에는 질린 모양인지 한 귀로 흘려 들었다. 초저녁이 되자, 둘은 드디어 나란히 앉아 쉬기 시작했다. 오스텅스는 더 이상 허기를 참을 수 없어져,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블루에게 먹을 것이 있냐고 넌지시 물었다. 블루는 이번에도 고개만 저었다. 저도 굶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들개들을 사냥하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오스텅스가 한숨섞인 말투로 말했다. 청년의 삶을 향한 의지에 기가 질려 버린 것은 블루도 마찬가지였다. 사나운 들개들이 두렵지도 않은 걸까? 청년이 살고자 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블루는 잠시 지나 온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해가 다 질 때쯤, 이렇게 말했다. “들개들이랑 싸울 바엔 나를 죽여 먹으라네. 어차피 죽을 목숨, 자네가 그리 살고 싶다면 차라리 그게 낫지.” 오스텅스는 혼란스러웠다. 평소의 상식이라면 절대로 부인했을 것을 그리하지 못

  • 녹두
  • 2020-12-29
이별한 L1과 B1이 보낸 러브레터

다미가 배신을 때릴 줄은 몰랐거든. 졸지에 길거리에 버려진 두 인형, 다미의 사자 인형과 곰 인형은 어안이 벙벙했다. 영원을 약속하며 제 갈기를 빗어줄 때는 언제고. 학교에 데려가 동생처럼 생각하는 곰이라며 통통한 제 뱃살을 꾹 눌러 자랑할 때는 언제고. 올해로 중학생이 된 다미는 얼마 전 새로 산 교복을 입고, 전신거울 앞을 기웃대며 제 모습을 요리조리 뜯어보고는 했다. 사자와 곰은 그런 다미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며 꼭 제 누나가 입학이라도 한 듯, 마음 깊이 흐뭇해했다. 다미와 어울려 놀지 못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 둘은 다미가 언제라도 자신들에게 돌아오리라 믿었으며, 그래서 오랜 공백기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다미는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놀러 오기 전, 대규모 방청소를 한다며 이런저런 물건들을 죄다 주섬주섬 모아 내놓았고, 둘도 그 파도에 함께 휩쓸리고 말았다. "내가 얘랑 같이 버려지다니. 실환가." 다미의 중딩 말투를 많이 닮은 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요즘 노는 순서가 줄었다지만, 너랑 같은 취급을 받을 군번은 아니지." 황당하기는 곰도 마찬가지였다. "야 사자, 네가 최근에 좀 총애를 받고 우쭐한 것 같은데, 다미랑 나랑 같이 산 지가 십 년이야, 임마." 둘은 한참 말다툼을 했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묘하게도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자기혐오감. 그래, 어차피 지난 영광인데 말이다. 곰이 화해를 신청했고 사자는 침묵으로 수락했다. "아직까지도 장난감 가게에서 눈을 빛내면서, 이런 인형은 처음 본다고 말 했을 때가 생생한데 말이다." 축 처진 말씨에, 곰이 말을 이어 받는다. "그래. 새 친구가 생겼다고 우리를 이렇게 내다 버릴 줄은 몰랐어. 우리는 다미랑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까 덜 소중했던 걸까?" 그렇게 시작한 한풀이는 한참을 가서, 두 인형은 더 침울한 기분이 됐다. 둘 다 언급을 피하려고 부던히 애를 쓰기는 했지만, 둘은 모두 자신들이 인형이라는 신세가 끔찍히도 슬픈 것 같았다. 그 때 마침 둘의 시야에 길거리를 배회하는 강아지 씨가 들어온다. "동물원에 데려다 달라고?" 강아지 씨는 반신반의해서 되물었다. "그곳에는 왜? 너희 같은 애들이 갈 곳이 아냐." 하지만 엄포에도 굴하지 않는 사자와 곰. "우리 같은 애들이 뭔데?" "우리도 정말 살아있는 게 뭔지 궁금해. 그 곳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온대잖니."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강아지 씨도, 사자와 곰이 하도 조르니, 결국 두 손, 아니 두 앞발을 들게 된다. "그래, 가자 가." 강아지 씨가 조심조심 사자와 곰 씨를 입에 물었다. 바야흐로 여정의 출발이었다. 며칠이 꼬박 걸려서 강아지 씨는 동물원에 도착했다. 담장의 구멍을 조심조심 찾았고, 더러우면 내쫓길까 빗물 웅덩이에 반신욕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도착한 맹수 우리 앞에서, 강아지 씨는 행운을 빈다며 두 인형을 휙, 안으로 던져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사자와 곰은 맹수들의 입에 사정없이 찢어 발겨질 것마저 각오했기에 단추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하지만 천만의 걱정

  • 녹두
  • 2020-12-29

막내야, 여섯째가 신음하며 제 동생의 이름을 부른다. 막내는 들은 척 만척 선반 위의 약통을 열어, 손바닥에 몇 알을 꺼낸 뒤에 저를 부른 제 형- 여섯째의 입 속에 들이밀었다. 여섯째는 켁켁 대며 혓바닥을 꿈틀꿈틀, 거부하지만 결국 동생 아귀 힘에 굴복하고 만다. 여섯째는 온 신경이 마비되는 질환을 앓고 있다. 병세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기에, 어서 죽어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 하지만 막내는 어디에선가 싸구려 약을 구해 그의 명을 억지로 연장 시킨다. 약을 먹으면 고통은 배가 되고, 시뻘건 두드러기가 올라와 긁지도 못하는 온 몸을 가렵게 만든다. 이는 그들 형제를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 때문이다. 평생을 마땅한 보호자 없이 자라온 칠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벌이가 변변찮은 일들만을 해 오며 겨우 삶을 꾸렸으며 그중 몇몇은 질 나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대부분 경미한 수준이었는데, 첫째는 달랐다. 강도살인을 몇차례나 저질렀 고, 3년 전 연행되는 당시 “나 먹구 살구, 동생들 먹구 살려면 어쩔 수 없잖우. 내가 문제요? 이 나라가 문제지”, 천연덕스럽게 주장해 많은 국민들의 속을 끓였다. 그 중 제일은 아들과 한 눈을 잃은 피해자였는데, 커다란 복수심에 나이 많은 순서대로 한 명씩 그들 형제를 죽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만만찮은 싸이코패스다, 아니다, 정의구현이다 말이 많았다. 그러나 막내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여섯째가 외출을 일체 하지 못하기에 1년째 살인이 멈췄다는 것, 그리고 죽으면 제가 표적이 될 것만을 염두에 두는 듯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형들이 일전에 순찰들에게 보호 처분을 요구해도 들어 먹지두 않구, 형 목숨을 어떻게든 늘려 놔야 내가 살어...’ 막내의 말을 듣고 얼마 안 있어, 여섯째가 발작을 일으킨다. 신음소리가 한참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고통에 부르짖는 소리가 매우 커지자, 막내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간 다. 어디 가냐는 듯 여섯째가 손을 뻗지만 막내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나가기 전 장롱에서 기다란 장우산을 꺼내 가는데, ‘송탄 어린이집’이라 적힌 그 우산은 일전에 다섯째가 죽었을 때, 경찰 몰래 미리 현장에서 습득한 것이다. 밤에 막내가 돌아온다. 여섯째는 막내에게서 반지하의 냄새가 아닌 아이 내를 맡아낸다. 범인은 없고, 원장도 없어. 그 대신 여자를 만났어, 막내는 퉁명스레 말한다. 어린이집은 망해가고 있었고, 효정이라는 아픈 여자가 나머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어린이집은 곧 문을 닫고, 여자는 중이 될 거라 했다. “더는 사람들이랑 엮이고 싶지 않네요. 사람들은 모두 안 해도 될 짓을 구태여 하면서 그 괴리에 속상해하죠..." "대신, 부처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 웃음이라니, 보고 있으면 온통 슬픈 마음은 가시고 기쁨만 남는 거 있죠. 부처를 닮고 싶어요.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엮이면서 마음 아파 하는 것 싫어.“ 그 이후로 막내는 외출이 무척이나 잦아진다.

  • 녹두
  • 2020-12-26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송지현

    심상치 않은 독서 이력이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스텔라의 몸에 대한 묘사,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육체적 감각에 대한 문장, 그리고 바다와 죽음에 대한 이미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이 글의 단점으로 느껴졌습니다. 읽기 좋은 글이면서 동시에 기시감을 주는 글이었거든요. 특히 스텔라와 장의 캐릭터가 전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입체적인 인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퇴고하면 정말 좋은 글이 될 것 같아요.

    • 2020-11-17 23:04:15
    송지현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