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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0-11-14
  • 조회수 643

미움 같은 거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굴지만 실은 누구보다 미움받고 있단 거. 누구나 꿰뚫을 수 있게 투명막으로 제작된 걔의 껍데기는 벗겨낼수록 탁해져서 결국엔 잔뜩 난도질당한 채 발견돼도 그 속을 아는 건 처참한 시체뿐이었고 사랑 같은 거에 목매달지 않을 거라 다짐했는데 정신 차리니 수면 위를 방황 중인 익사체는 누구의 몸이지. 할 줄 아는 거라곤 정신 나간 놈처럼 입 놀리기와 엿 같은 키스 스킬 남발밖에 없는 아가리는 억지로 소주병 꽂아 쌉치고 있지 않으면 때때로 시한폭탄이 돼서 내 앞길을 터뜨렸다.

 

석철이가 그랬다. 넌 술에 취할수록 제정신 되는데 완전히 정상인 되려면 몇 상자는 마셔야 한다고. 맥주잔에 소주 따라 마시면서 그 얘길 들어주다가 걔 입술에 그대로 얼굴 처박고 웃었다. 별 미친놈 다 있다고 욕 처먹는 와중에도 웃기만 하다 돌연 핸드폰 챙겨 술자리 빠져나오는 일이 잦았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다. 액정 위로 기다리는 이름이 뜨면 나는 또 개처럼 달려가는 거다. 멍멍, 개. 미친놈에서 개새끼로 장르가 전환된다.

 

 

 

 

김시운이 안도윤의 억장을 자꾸만 무너뜨리는 건 고의가 아녔다. 걘 사랑에 관대해서 특별한 조건 붙여가며 따져드는 법이 없었던 거다.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꼭 연애만이 사랑의 정답이라고 볼 수 없었고 그래서 김시운은 종종 쉽다고 평가된다. 아무하고 연애하고, 아무하고 키스하고, 아무하고 자는 놈. 정도로 치부되는 평판은 돌고 돌아 신입생이던 안도윤에게까지 들어갔고 그때부터 추락하는 일에 가속도가 붙었다. 김시운의 사랑에 붙는 유일한 조건이 자기라는 사실이 절망스러워서. 사랑을 주는 법만 아는 김시운은 받는 법을 몰라 자길 사랑하는 사람에게 멋대로 입술 가져다 처박을 배짱을 가진 사람이 되지 못했다.

 

친하진 않았는데 이따금 과 회식 중에 함께 나가서 담배를 피우는 일이 있었다. 안면 겨우 튼 사이에 김시운 뒤따라 나간 안도윤은 실은 비흡연자였고 김시운은 그걸 세 번째 담배 타임 가질 때쯤에야 알게 됐다. 너는 안 피워? 물으면 저 담배 안 피워요 대답했고 김시운은 그런 걸 이해할 수 없다. 그럼 왜 나왔냐 물으면 걘 늘 그랬다. 선배가 나왔으니까요. 겨우 얼굴 몇 번 맞댄 사이에. 선배가 담배 피우러 나가신다고 하셔서요. 이름도 모르는데. 선배 라이터 없으실까 봐. 아마도 안도윤은 그때부터 사랑을 했겠지만 김시운은 그런 거에 무감각하단 말이다. 감정에 둔하고 예민하지 못해 눈으로 보이는 수치 아니고선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린다. 단지 귀엽다고 넘기는 일이 숱했다.

 

안도윤은 김시운에게 헌신적으로 구니까, 그럴 때마다 몸이 자꾸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의존하게 된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머릴 눌러 침몰시키고 있다. 눈 뜨니 안도윤의 집일 때 김시운은 종종 죄책에 시달렸다. 부팅 시간이 지났다. 안도윤이 저를 좋아한단 사실을 알아버렸다. 자꾸 눈에 밟히는 게 안도윤밖에 없어서 단지 그게 조금 이상해서 계속 눈을 돌리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걔는 영역을 침범하니까. 애인은 아닌데 애인처럼 자꾸 맴도니까 그게 이상해서 회로 굴리다 알게 됐다.

 

도윤아 넌 되게 초콜릿 같애.

먹는 초콜릿이요?

엉. 초콜릿 먹으면 계속 그 맛이 남잖아. 씁쓸하게.

그쵸.

그게 너랑 닮았어.

 

김시운에게 안도윤은 실은 초콜릿이 아니라 그 끝에 남는 미약함이었을 뿐인데. 다른 사람과 연애 할 때, 다른 사람과 키스 할 때, 다른 사람과 섹스할 때. 김시운은 그 끝에 안도윤의 얼굴을 종종 떠올렸고 그건 곧 헹궈질 얼굴이라 미안해지기도 했다. 남들 다 되는데 저는 왜 안 돼요. 그런 말 걔 입에서 나오는 모습을 떠올리면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걘 그런 말 없이 언제나, 죄송해요, 좋아해요.

 

 

휴학계 내고 미국 다녀온 석철이가 돌아왔다. 자꾸만 김시운을 피하려는 걸 붙잡아두고 술 끼워 대화 몇 번 하더니 걘 말을 정정했다. 술 있어도 미친놈이고 술 없어도 미친놈이라고. 약 했냐며 탈탈 터는 거 김시운이 먼저 자리 떠서 성과 없었다. 이제 김시운은 더 이상 헤프게 굴지 않지만 사랑의 형태를 하나로 단정 짓는 법은 알고 있다. 연애를 해본 적은 많은데 사랑을 해본 적은 없어.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녔던 것 같고 무조건 입술 맞대야 사랑은 아니라지만 사랑 아닌데 입술 맞대는 것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서. 나도 알아. 사랑은 등신 같은 거야. 자꾸만 액정 들어 화면을 확인하게 되는 일이 꼭 숨을 갉아먹는 것 같아서 김시운은 점점 허물어진다. 안도윤의 감상. 죽지 마세요.

 

이렇게 깊게 빠질 거라곤 김시운도 예측 못 했다. 발등을 적시던 물이 역류해 절이는 과정에서 할 수 있던 건 없었고 이러면 안 된다는 자각이 들었을 땐 이미 오지 않는 카톡을 기다리며 밭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래서 형이 좋아한단 사람이 누군데요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요? 안도윤이 물을 때 대답을 망설였던 건 이게 비정상적이란 걸 알아서였을 거다. 이민우. 나보다 한 살 많아. 그런데 걔가 고등학교 때 첫사랑이라. 다시 보면 안 떨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도윤은 말이 없다. 가만히 빈 잔 만지작대다가 한다는 첫 마디가 착한 사람이에요? 떠오르는 대답이 없어 화제를 돌렸다.

 

앞에선 여자랑 연애하고 뒤에선 남자랑 자는 씹새끼가 이민우였는데 그 짓을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반복 중이었다. 그래도 좋다고 달려드는 건 정말 나 걔 한정 개가 된 걸까. 감정을 숨기는 일에 능숙지 못해 부르는 족족 달려나갔다. 이민우는 몇 년이 흐를 동안 고도로 발달한 사이코패스가 된 모양이라 김시운은 걔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렸다. 이민우를 만난 뒤엔 항상 안도윤의 집으로 대피했다.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제 안도윤은 새벽마다 찾아와 문 두드리는 김시운이 익숙해졌으나 초반에 걔는 그 영겁의 시간을 견디는 일이 괴로웠다. 나 더 이상 걔한테 안 휘둘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주저앉아 울면서 말했고, 아침이 되면 남는 죄책이 또다시 초콜릿처럼. 이민우는 고도로 발달한 사이코패스다. 단순히 벗어나야겠단 생각으론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고. 내일의 김시운은 또다시 이민우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김시운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민우에게서 벗어날 것을 다짐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효과도 없단 걸 알고 있었다. 과정 없이 결과만 봐오던 안도윤이 장르 전환의 순간을 첨으로 목격한 날에 걘 아주 오래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회식이라 부를 정도는 아녔고 규모 있는 술자리 같은 거였다.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동기들과 얘길 나누고. 안도윤은 먹는 것도 얘길 나누는 일에도 온전히 정신을 집중할 수 없어 자꾸만 김시운을 힐끔거리게 되고. 김시운은 멀쩡한 척 굴다가 이따금 정신을 놓았다. 다급하게 옷 챙겨 가려는 걸 안도윤이 따라잡아 물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세요.

도윤아 나 지금 가야 해.

그러니까 어디를요.

민우가 불러.

가고 싶어서 가는 거 맞아요?

그러면. 그러면 도윤아. 너는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또 새벽에 찾아오실 거잖아요.

…….

이런 거 싫다고 그럴 거잖아요.

도윤아.

가지 마세요.

너 나 좋아하잖아.

…….

나도 너처럼 민우를 좋아해. 그것뿐이야.

…….

 

그렇게 말하면 안도윤은 할 말이 없다. 천천히 떨궈지는 걔의 고개를 가만 지켜보던 김시운이 이민우를 찾아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 창피하단 생각과 많이 죽고 싶단 생각. 그리고 그날 김시운은 이민우의 집에서 잤다. 안도윤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김시운이 의식적으로 안도윤과의 연락을 끊었다. 그러고 나니 만날 길이 없었다. 안도윤은 겉으론 멀쩡하고 평범한 것처럼 굴어서 김시운의 소식이 들려와도 아무렇지 않은 듯 넘겼지만 그런 걸 꼭꼭 접어 삼켜두는 사람도 안도윤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이 점점 악질이 되어간다. 소문 속에서 김시운은 아주 불쌍해지기도 완전 미쳐있기도 해서 혼란스러웠다. 미친놈 소리는 들어도 정말 미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마음의 스펙트럼이 넓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석철이가 안도윤에게 말했었다. 이민우라는 걔 생각보다 더 개새끼더라. 맞고 있을지도 몰라.

 

도윤아.

오늘 너희 집 가두 돼?

 

쓴 사랑에 설탕을 쏟아붓는 일. 안도윤이 거절할 리 없다. 그걸 김시운은 잘 아니까 부러 묻는 거다. 며칠 만에 연락했단 사실까지 망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고 멀쩡하게. 맥주를 사서 왔다. 좁은 원룸에 몸 붙이고 앉아 마시는 동안 쓸데없고 평화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도윤이는 중학생 때 처음 드럼 배웠다고 했지. 네. 그런데 왜 음악 쪽으로 안 가구 여기 왔어. 이유 없어요. 그냥 연필 잡는 일이 드럼 치는 일 같아서. 지겨워져서요. 안도윤의 얘길 들으며 고갤 끄덕이던 김시운은 곧 유연하게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학교 밴드부 같은 것도 해봤겠네.

고등학생 때 잠깐.

우리 같이 밴드 안 할래.

 

안도윤이 입술을 씹는다. 마구 짓이긴다. 뒤이어 나올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아무 말 없이 씹어대다가 먼저 말했다.

 

이민우가 악기도 다룬다던가요.

…….

기껏 사람 맘 흔들어놓고 한단 말이 같이 밴드 할래 뭐 그런 거였나요. 그냥 머릿수 채우려고.

안도윤.

저는 정말 형한테 뭐예요. 저 자꾸 비참해져요 이럴 때마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비참해진다구요. 그게 얼마나 슬픈지 모를 거예요. 전 이미 형 앞에 무릎 꿇을 수도 머릴 박을 수도 있지만 형은 남 앞에서 그러지 않았음 좋겠어요.

 

안도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게 쉽게 되질 않았다. 감정과 술기운이 한데 엉켜 토해내지 않곤 견딜 수 없다. 그걸 지켜보던 김시운이 안도윤의 머릴 끌어다가 품 안에 안고 토닥였다. 미안해. 그런데 민우 그렇게 나쁜 놈은 아냐 정말로.

 

그날은 그렇게 종일 민우의 얘길 들어야 했다고 안도윤은 회상한다. 끔찍하진 않았는데 끔찍했어요.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에 이민우한테 전화가 와서. 또 달려나갔어요. 도윤아 미안. 이렇게 말하고 뛰쳐나가는 걸 잡을 수도 없었고요. 사랑 앞에선 더 이상 헤프지 않은데 미안함이 헤퍼졌어요. 아니, 그것보단 미안한 일을 만드는 날이 많아졌어요. 그게 싫어요.

 

그런데 밴드는 왜 하겠다고 했냐?

모르겠어요. 미쳤나 봐요.

이민우 만나봤어?

들어가니까 구석에 처박힌 라꾸라꾸 위에서 다른 놈이랑 발가벗고 자고 있던데요. 시운이 형이 저한테 또 미안해했어요.

 

 

김시운과 얼굴 맞댈 일이 잦아졌단 사실만으로 행복해지는 단순한 사고 회로를 가져서. 합주보다 회식이 더 많은 밴드에서 안도윤은 꽤 오래 붙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드럼을 친 적은 없다. 이민우는 악기에 대해선 뭣도 모르지만 보컬 하나엔 재능이 꽤 있어 합주하면 걔 목소릴 오래도록 들어야 했다. 그게 싫어서 드럼을 안 쳤다. 종종 김시운이 노랠 부르는 상상을 한다.

 

소문과 직접 보는 건 같은 듯 달라서 안도윤은 자꾸 경계를 한다. 회식 자리에서 대놓고 김시운을 꼽주는 이민우를 야리는 일이나 김시운이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 여느 때처럼 라이터를 들고 따라나서는 일, 이민우가 그런 둘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볼 때면 주머니에 손 넣고 뻐큐 날리는 일 같은 거. 김시운은 둔한 게 아니라 세뇌당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날도.

 

라이터 있지.

네.

좀 빌려주라.

예.

 

안도윤은 김시운의 속을 알기 어려울 때면 늘 담배를 떠올렸다. 피워본 적은 없지만 피워보면 답을 알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형은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지. 술을 마실 때만 피우는 건지. 그런 질문들이 함께 떠오르고.

 

도윤아 회식 재미없지.

괜찮아요.

먼저 가도 돼. 오늘 어차피 나 민우랑 가기로 해서.

왜요?

들려줄 게 있대. 합주실에 좀 더 있을 거야.

같이 있겠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김시운은 쓴웃음을 지을 때가 많다. 그런 건 직설적으로 꽂아 내리는 것보다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서 안도윤은 또 꼬릴 내리고 고개 끄덕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도윤아. 걔 나를 생각하면서 노랠 지었대. 들려줬어. 잡음이 심하고 코드가 엉망이라 잘 듣진 못했는데 그래도 그 가사가. 날 생각하며 쓴 거란 걸 듣고 나니까 너무너무 기뻐서. 봐. 정말 나쁜 놈이 아니야.

 

 

형이 밴드를 탈퇴했다. 창피해서 죽어버리고 싶어. 걘 나를 자꾸만 농락해. 물건처럼 취급해. 짐승처럼 대한다고. 정말 걔한테 나는 뭐지. 성욕 푸는 용도로 사용되는 건가. 이민우 인스타 계정을 찾았어. 피드가 온통 여자친구더라. 내가 집에 찾아올 걸 뻔히 알면서도 여자친구랑 그 짓 하고 있었고. 새벽에 찾아오지 않았다. 안도윤의 집으로 가는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걸 부축해 데려온 거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뱉어대는 걸 안도윤이 달랬다.

 

갈 곳이 없어. 걔네 집에서 지냈는데 이제 정말 갈 곳이 없어.

 

김시운 없는 밴드에 안도윤이 있을 이유는 없었으나 마지막 회식까진 참여했다. 김시운 없는 김시운 송별회였다. 채워진 잔을 거들떠보지 않고 계속 고기만 굽는 걔를 이민우가 첨으로 말 걸었다. 도윤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역겨워 간신히 참아냈다.

 

시운이 너네 집에서 지내지.

네.

있잖아, 도윤이는 시운이 애인이야?

아닌데요.

그러면.

그냥. 학교 선후배 사이에요.

 

 

데리러 가야 한다. 밴드가 빠지고 그런 일과가 추가됐다. 만취 경험이 없다는 김시운은 이제 자주 만취해 안도윤에게 연락하고 그럼 걔는 또 바보같이 김시운이 있는 곳으로 달린다. 대부분 혼자거나 석철이가 중간에 끼어있는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안도윤은 김시운을 데리러 가는 일이 힘겨웠다. 육체적으로 힘든 게 아니라 심적으로 힘들어서 호소할 수 없다. 우리 도윤이는 만취라는 전제가 깔리면 개새끼로 변질됐다. 안도윤을 개새끼라고 불렀다.

 

개새끼야 씹새끼야 하는 거 안도윤이 네네 하고 맞춰주다 보면 어느 순간 김시운은 잠잠해져 말한다. 도유니야? 네 도윤이에요. …미안해 욕해서. 그 말이 누굴 향해야 하는지 안도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싫다. 자꾸 이민우를 상기하고 있는 거니까 그게 싫다. 김시운을 업고 집까지 가는 일이 자꾸 멀게 느껴졌다. 우주가 팽창해서 그런가 봐. 그런 내용의 만화를 본 적이 있어. 김시운은 뭣도 모르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지만 안도윤은 알고 있다. 김시운은 망가졌다. 망가진 걸 들고 집까지 가는 일이 멀게 느껴지는 건, 망가지고 망가져서 자꾸 제정신 아닌 것처럼 굴게 되니까 망가지지 않도록 하려고 조심스럽게 걸음 옮기기 때문에. 이민우가 망가뜨렸다. 그러면 누가 고칠 수 있지. 실은 오늘 민우한테 전화가 왔어. 걔는 또 다정하게 말을 하고 그러면 난, 정말로. 적어도 안도윤은 아닐 거란 생각이.

 

 

저도 항상 형 생각해요

걔는 형을 생각하고 노랠 쓰지만요

저는 형을 생각하고 하루를 살아요.

 

 

이민우는 자꾸 조종하려 든다. 시도 때도 없이 김시운에게 연락해 온갖 다정한 말로 공들인다. 수작질이란 거 안도윤 눈엔 뻔히 보이는데 김시운은 표면에 드러난 것 외엔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자꾸 말려들고. 그럴수록 추락하는 건 김시운뿐만이 아니다.

 

김시운은 휴학계를 냈다. 종일 집에만 박혀 있는 걸 바라보며 이민우에게 휘둘리는 편이 나았던 것 같기도 하단 생각을 한다. 저 다녀올게요. 아침부터 알바가 있는 안도윤은 비교적 집을 일찍 나서고 그럴 때마다 김시운은 잠들어 있기 일쑤지만 이번엔 달랐다. 일찍 일어나졌다고 했다. 안도윤의 목소리에 김시운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걔에게 다가갔다.

 

잘 다녀와.

네.

그리고 가기 전에, 도윤아.

네?

우리 키스할래?

 

사랑에 헤프지 않다. 그래도 안도윤한테는. 좀 헤퍼져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는.

 

 

안도윤은 오늘도 누군가의 호출에 김시운을 데리러 가고 도착한 현장을 둘러보면 이게 무슨 세계관 충돌의 상황인지. 석철이 형과 이민우와 김시운과 안도윤. 박석철이 잔뜩 표정 구기며 안도윤에게 눈짓했다. 김시운이 쟤 불렀어. 아니 따지고 보면 쟤가 먼저 김시운 불렀는데 이미 술에 꼴아있던 상태라 쟤가 온 거지. 싸가지 존나 없더라 씨발 누가 김시운이랑 뽀뽀하고 싶어서 했냐고. 안도윤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뽀뽀가 왜 나오는데요. 쟤가 그러던데. 사랑에 헤퍼져야겠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멀쩡한 척 구는 방법을 모르니까 차라리 다시 미친놈 되겠다고. 그래서 멋대로 얼굴부터 들이미는데 쟤가 왔어. 난 바로 너 부르고.

 

돌아오니 이민우는 뚱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옆으론 김시운이 고갤 숙인 채 잠든 건지 우는 건지도 모르게 앉아있고. 안도윤은 김시운의 팔을 붙잡고 평소처럼 부축하다 이민우의 제지에 하던 걸 멈췄다.

 

우리 집에서 재울게.

싫은데요.

너 애인도 아니라며.

그러는 형은요. 애인 있으시잖아요.

헤어졌어.

그래서 시운이 형한테 달라붙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잖아.

뭐가 아니에요. 형 집에 시운이 형 보내면 뭐 어쩌라고요. 울면서 다시 저희 집 찾아올 건데. 짐도 다 거깄고요.

야, 시운아. 니가 골라.

왜 자는 사람을 깨워요?

어디 갈 건지.

 

이민우는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김시운을 자꾸만 몰아붙이고 안도윤은 그게 탐탁지 않다. 박석철은 그 꼴 지켜보다 탈주한 지 오래다. 김시운이 눈에 초점을 맞추다 말고는 평소처럼 소리 지르는데 그 말들이 가리키는 사람이 꼭 안도윤인 것 같아서. 개새끼야 씹새끼야 하는 거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민우가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며 안도윤을 쳐다보고 안도윤은 점점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알았어요 전 갈게요. 술 깨면 연락해요. 발걸음 돌려 김시운을 등진다. 이민우한테 진 것 같아서 짜증 난다. 개새끼란 말도 씹새끼란 말도 다 이민우한테 하는 말이라는 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는 기분이 드는 게. 김시운이 그랬었다. 걔 앞에서 입 열면 그대로 토해버릴 것 같아서 자꾸만 한 박자씩 늦어진다고. 그래서 자꾸 안도윤의 이름을 변질시킨다고.

 

 

오후에 문자가 왔다. 또다시 사과의 내용이라 기분이 묘해졌다. 미안하단 말을 담은 문자가 쌓일 때마다 김시운이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안도윤은 그 짧은 사과의 메시지를 어떻게든 꼭꼭 담아 읽어낸 뒤 전화했다. 신호음이 짧게 울리다 끊겼다. 여보세요. 형 저예요. 알고 있어. 저희 집에 있는 형 짐 오늘 챙겨 가실 건가요. 안도윤의 몸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눈치로 범벅되어 있으므로 그런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김시운은 이민우와 재결합 할 것이다. 언제고 다시 안도윤을 찾을 거지만 그래도 걘 이민우에게서 벗어나지 않을 거다. 이런 점이 악질이다. 안도윤이 먼저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김시운은 짐을 챙기러 다시 안도윤의 집에 왔을 것이다.

 

김시운이 초라한 짐을 챙길 동안 안도윤은 자꾸 말을 걸었다. 같이 지낸 날 손으로 꼽아봤자 한 달 남짓이면서 멀리 떠날 사람한테 하듯이 자꾸 말을 걸게 됐다. 그런데 그게 전부 시답잖은 이야기라 속상했다. 저도 형이랑 재밌는 얘길 하고 싶어요. 그런데 저는 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그게 슬퍼요. 김시운이 짐을 챙기다 말고 말한다. 도윤아. 우리 하루만 더 같이 보낼까.

 

좁은 방에 작은 이불 하나 펴서 같이 누웠다. 몸을 붙여 눕지 않으면 숨 쉬는 게 자꾸만 힘들어져서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김시운이 시작해서 끝맺는다. 대화가 오롯이 김시운 중심이다. 안도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김시운을 더 많이 알고 싶단 생각을 했다.

 

도윤아.

네.

아직 안 자지.

안 자요.

나. 정말 민우를 좋아해.

알고 있어요.

나 걔한테라면 정말 연애가 아니라 양육이어도 좋다고. 사육당해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

너는 이해 못 하겠지. 근데 그냥 그런 게 있어. 걔는 사람을 자꾸 끌어당겨. 니가 명분 없이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걜 명분 없이 좋아해. 그래서 우리가 비슷한가 봐.

형.

난 종종 생각해. 이런 마음으로 걜 사랑해도 되는 걸까. 걔 앞에선 무릎 꿇고 개처럼 길 수도 짖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는 김시운의 표정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안도윤은 이제 정말로 죽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이민우가 먹을 욕 대신 먹어가며 김시운 애인 행세했던 건 정말 걔의 애인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형한테 저는 뭐로 분류되어 있나요.

…….

이민우가 물었었어요. 시운이 애인이야? 하고. 아니라고 했어요. 아니니까요.

도윤아.

저는 정말로 그냥 개새끼였던 것 같아요. 제 목줄은 형이 쥐고 있어요.

…….

저도 형 앞에서 무릎 꿇고 개처럼 길 수도 짖을 수도 있어요.

 

안도윤은 이민우에게 했던 말을 그제서야 정정한다. 선후배 사이가 아니라 개와 주인 관계가 더 적합하단 판단하에 내려진 결정이다. 안도윤이 몸을 틀어 김시운을 껴안는다. 김시운도 말없이 걔 어깨 부근을 자꾸만 토닥였다. 형이랑 계속 만날 거예요. 응. 좋아한단 말도 안 하고 사귀자고도 안 하고 이민우랑 만나지 말란 말도 안 할게요. ……. 저 이용해도 돼요. 버리지만 마세요.

 

 

미움 같은 거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굴지만 실은 누구보다 미움받고 있단 거. 누구나 꿰뚫을 수 있게 투명막으로 제작된 걔의 껍데기는 벗겨낼수록 탁해져서 결국엔 잔뜩 난도질당한 채 발견돼도 그 속을 아는 건 처참한 시체뿐이었고 사랑 같은 거에 목매달지 않을 거라 다짐했는데 정신 차리니 수면 위를 방황 중인 익사체는 누구의 몸이지.

 

도윤아

있잖아 나

걔 앞에선 정말 개가 돼

너처럼

그래서 나는 그게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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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이 겹쳐서 한동안 글과는 거릴 두고 있다가 오랜만에 글틴에 접속합니다! 이제서야 인사 남기지만 새로운 멘토님 잘 부탁드려요!'◡'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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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코쿠료 묘

카미코쿠료 묘(1943.8.15.~1974.)는 한일 혼혈로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넘어와 죽을 때까지 일본 땅을 밟아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일본어엔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누군가는 그런 그가 일본인으로서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일제강점기를 보낸 것을 안타깝게 평하기도 한다. 한국은 묘가 3살이 되던 해 해방됐다. 이후 한반도에선 철저한 종족 분류가 이뤄졌다. 이분법의 분류 체계 속에서 묘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 다만 양쪽의 피가 섞인 그가 한국에만 체류했던 까닭은 간단하게 설명된다. 카미코쿠료 묘에게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구매할 자격이 없었다.묘가 8살이 되던 해에 한반도에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그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거라 추정된다. 황폐해진 땅을 밟고 서는 데에는 이전과 다르게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생존을 향한 지독한 인간의 본능만이 꿈틀댈 뿐이었다. 누구도 그의 출신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기회로 여겨진다. 허허벌판 위에서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던 영역의 철학에 가닿기까지 걸린 기간은 단 1년. 이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각의 폭을 넓히지 않았더라면 이루어낼 수 없는 성과라는 평을 받는다.한국전쟁이 끝나고 황무지 같던 땅은 다시금 색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은 묘가 황무지 같은 영역에서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의 사상은 온통 비유로 가득하다. 그것은 흡사 철학 서적보다는 허구의 소설류와 비슷해 보이는 게 특징이다. 인간, 양철, 지푸라기, 사자로 비유되는 사상의 전개는 오즈의 마법사를 연상시키며 그중 사자만이 배척된다는 점은 당시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철학은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구분될 수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것이 레오폴드의 생태윤리로, 무생물까지 도덕적 대상으로 봤다는 점에서 양철을 인간의 수용 범위에 포함한 묘의 윤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사자가 배척된다는 점에서 생태윤리의 완전한 분류는 곤란했다. 카미코쿠료 묘의 처음이자 마지막 철학은 그렇게 어느 곳에서도 분류되지 못한 채 한동안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았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이를 두고 어린 시절부터 소속의 열망이 꺾여 자란 인간의 안타까운 무의식으로 묘사하기도 한다.사용되지 못하고 도태된 묘의 철학은 재밌게도 몇 년 뒤 정치계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분석될 수 없다는 한계를 완전히 벗은 그의 사상은 철학계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형성했다. 동물 배척주의. 무언가를 중심으로 삼았던 기존의 철학-이를테면 인간 중심, 동물 중심, 생명 중심 등으로 불리는 것들-은 그의 사상을 대변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배척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그러나 이런 네이밍에 묘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동물 배척주의는 여론몰이가 필요할 때면 항상 등장했다. 제일 처음 그것이 사용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후의 일로, 뒤늦은 빨갱이 처단을 위해서였다. 그때 처음 묘의 철학을 인용한 정치인은 “그들은 우리와 같은 영역에 속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우리에게

  • 카임
  • 2024-01-15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말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영영은 말한다. 과장님 업무 다 끝냈습니다…. 1이 사라지지 않는 메신저 창을 바라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오랫동안 스크린을 바라본 눈꺼풀이 무거웠다. 뒤늦게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여전히 남아있는 1을 무시한 채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저 이제 퇴근해보겠습니다.흐트러진 양복 매무새를 다듬으니 영락없이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 영영은 목을 옥죄던 와이셔츠의 맨 윗단추를 풀었다. 그런다고 숨통이 트이진 않았다. 영영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을 느끼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선거철이라 곳곳에 대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영영은 이제 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태어나는 인구보다 탄생하는 관념이 더 많은 나라에선 매일 같이 새로운 관념들의 싸움이 울려 퍼졌다. 영영은 한갓 관념에 목숨을 바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만 하면 충분하고 그것조차 지켜지지 않은 때에 인권보다 앞서는 관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영영은 후보 15번으로 끝맺어진 대선 포스터를 보며 새삼스러운 권태감을 느꼈다. 이런 지독한 공허 앞에서 지끈거리는 머리 정도는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회사 앞 지하철역은 한적했다. 영영은 잠시 벽에 등을 붙이고 기대섰다. 그때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확인하니 과장의 답장이 뒤늦게 도착해 있었다. 그래, 오후에 보자. 라는 끔찍한 메시지에 따로 답장하진 않았다. 대화는 덧대어 갈수록 길어지기 마련이고 나중에는 끊어낼 수 없어지기 때문에. 어쩌면 과장과 주말 식사 약속을 잡고서야 끝맺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영영에겐 입사 초기에 이러한 수법에 휘말려 부장의 등산 메이트로 두 달을 보낸 전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겨우 정상에 올랐었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장소는 다르지만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그때는 아마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던 중 저혈압으로 쓰러졌던 것 같다. 그 덕에 지금은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생각해보면 영영의 머리는 지끈거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과거는 이유 모를 두통으로 인한 입원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 감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나. 언젠가는 고쳐질 것이라 생각한 믿음은 서른이 되어서야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 영영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생각했지만 언젠가 무당을 찾아간 적은 있었다. 그건 아마 스물 초반의 일로, 점을 보러 간다는 여자친구에게 응당 건네야 할 대답을 했던 결과였다. 나 이번 주 주말에 점 보러 가려고. 궁금하잖아? 오 그래 궁금하네(안 궁금했다). 같이 가줄까? 그곳에서 무당은 여자친구보다 영영과 눈을 먼저 맞추었다. 하지만 1인분의 돈을 지불한 그들에게 따로 2인분의 서비스를 할 필요는 없었다. 여자친구가 한국인이라면 으레 궁금해할 것들, 이를테면 학업이나 취업이나 혹은 연애와 같은 것들을 질문할 때까지도 무당은 답변에만

  • 카임
  • 2023-12-17
해피벌룬 레볼루션

고하은 형은 혁명가 기질이 있었다. 애초에 하느님의 은총이란 이름을 달고 꼬박꼬박 절에 다닌 것부터가 그랬다. 하느님이 알면 니 뒤통수 한대 후리고도 남겠네. 라는 말은 언젠가 실종된 형의 룸메이트가 남겼다. 그러면 형은 무감한 얼굴로 하느님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으셔. 하고 대꾸했는데 그러면서도 나무아미타불 하는 염불을 외우는 버릇을 버리진 못해서 결국 형은 이름을 바꿨다. 고나무. 물론 그건 형식적이라기보단 암묵적인 것이었고 대한민국은 형을 고하은으로서 통계를 낼 터였다. 왜냐하면 형은 성선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순자, 홉스, 그리고 고나무. 출판사에선 형의 생애를 인터뷰해달라는 요청을 수백 번도 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거절한 건 언젠가의 형이 말했듯 인간은 항상 남이 가장 방심한 순간에 뒤통수를 후리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뒤통수 같은 거 안 후릴 테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므로 후릴 수 있는 여지가 왕왕 있다는 것이 논리의 시작과 끝이었다. 물론 그 말투는 룸메이트에게서 옮아온 것으로 실제로 형은 그리 과격한 언어를 자주 사용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도통 ‘성악설을 믿은 고하은, 그는 대체 누구인가’ 따위의 인터뷰에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형은 성선설을 믿었으므로. * 사람 좋은 인상의 남자가 카페로 들어온다. 180이 한참 넘어 보이는 거구의 남성은 멀뚱히 앉아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하곤 크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살짝 올라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게 보였다.“안녕하세요~ 이건우 님 맞으시죠?”“네.”“오늘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저 정말 연락받고 깜짝 놀랐잖아요. 누가 요청을 해와도 거절하신다고 들었는데 먼저 연락이 올 줄이야.”“이제는… 그만 썩힐 때도 됐죠. 부패하기 전에 놓아주고 싶어서요.”“잘 생각하셨어요. 저희 출판사가 소설류의 허구에는 좀 약하지만, 이런 사실 기반 평전 같은 건 기깔나거든요. 쓸데없는 편집도 없고.”알고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다. 나는 몸을 반쯤 접어 내려둔 가방에서 힘겹게 노트북을 꺼내는 인터뷰어의 옆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잘 먹고 잘 자며 굴곡 없이 살아온 사람의 분위기 같은 게 그에겐 있었다. 노트북 세팅을 마치고 마우스를 몇 번 딸깍이던 그는 곧 휴대폰 녹음기를 틀고 눈알을 반짝인다.“그럼 시작할까요?” * 형을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죽음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건 꼭 형이 살인자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건 제 쪽에 가깝죠. 생과 사, 그건 형을 가장 잘 표현하는 키워드가 될 겁니다. 그날은 많이 지쳤습니다. 평소랑 똑같은 노동이었음에도 유독 가라앉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얼른 돌아가서 씻고 싶었습니다. 아니, 씻기 전에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휴식이 절실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룸메이트가 목을 맨 날이었어요.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곳은 가출한 놈들 몇몇이 살던 아지트 같은 곳이었는데 지나는 사람도 없고 관심 두는 이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니요. 룸메이트의 이름이 병으로 끝나던가. 아무도 그 애를 죽이지 않았을 겁

  • 카임
  • 202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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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반가워요, 카임님! 긴 글인데 한 호흡에 무척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직접적인 사랑 이야기를 읽게 되어 즐거웠어요. 다만 아쉬운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인물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구별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나 인물이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도입부에 인물의 특징적인 부분들, 꼭 외향의 묘사가 아니라도 사소한 습관같은 것으로 구분해 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자주 뵈어요!

    • 2020-12-23 21:33:35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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