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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ver.2

  • 작성자 사즈
  • 작성일 2020-12-26
  • 조회수 678

김아윤과 이아윤은 대학교 일 학년 때 처음 만났다. 민지나 지영 같은, 결코 흔한 이름이 아님에도 둘은 이름이 같았다. 그래서 더욱 신기해했다.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몇 번 학식을 같이 먹고 대화를 나누다 아윤들은 서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김아윤이 재수를 해 이아윤 보다 한 살이 많았지만, 김아윤이 만난 자리에서 말 놓는 것을 허락한데다 김아윤이 반년 정도밖에 일찍 태어나지 않았기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졸업식 날까지 딱 붙어 다니던 아윤들은 아예 대학 졸업 후에는 같이 학원을 차렸다. 대출을 좀 많이 받긴 했지만, 한 달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은 달이 일 년에 절반 이상이었지만 행복했다. 몇몇 부모들이 항의 전화를 걸어와 두통약을 삼키는 날이 늘었지만, 서로가 있어서 행복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 같다. 아침 일곱 시 기상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핸드폰으로 뉴스 보기인 김아윤이 핸드폰 화면을 이아윤에게 들이밀었을 때만 해도

 

-중국에서 그런 적이 한두 번이니?

 

하고 고작 그거 보여주려 깨운 거냐며 짜증을 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신종 바이러스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속보란을 뒤덮어 버리더니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첫 감염자가 나왔다. 

 

-중국인이네. 한국에서 감염은 없나 보다.

 

그렇게 말하며 온갖 맛집과 전시회를 순회하는 이아윤의 팔을 붙든 것은 김아윤이었다.

 

-제발 돌아다니지 좀 마. 학원 끝나면 그냥 집에 있어.. 곧 있으면 국내에서 환자들이 속출할 거야. 메르스 겪고도 그런 말이 나와 넌?

 

-뭐 어때. 그냥 심한 감기처럼 잠깐 앓고 지나가는 거겠지. 나 얼마나 건강한지 알면서.

 

이아윤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아윤은 초등학생 때 이후로 한 번도 감기를 앓은 적이 없었고, 그 흔한 염증 하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등산 모임에 참석하는 데다 꾸준히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다 오는 게 이아윤이었다. 

 

그렇지만 김아윤은 뭔가 불안했다. 약간 촉이 그랬다. 김아윤은 그날 꼭 에버랜드에 가야겠다고 뻗대는 이아윤을 막아섰다. 

 

이아윤은 태평하게 누워 '중국 음식이 먹고 싶었다'고 말한 첫 번째 환자를 욕했다. '코로나'는 자살 폭탄 테러나 아파트 화재처럼 나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보여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태평하게 누워 얘기할 수 있는 거겠지. 김아윤은 생각했다.

 

-아니 남의 나라에 병 옮겨 와 놓고 고향 음식? 지랄하네. 의료진들 고생하는 거 알면서 저러는 거야 뭐야?

 

옆에서 과도로 감을 깎던 김아윤은 이아윤의 허벅지를 때렸다. 

 

-너는 애가 어쩜 그리 공감 능력이란 게 없니? 너도 고작 일주일 미국 갔다 온 거면서 김치가 먹고 싶었다, 라면이 그리웠다 별 지랄을 떨었으면서.

 

-아니, 이거랑 그거는 다르지..

 

이아윤은 말끝을 흐리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허벅지를 매만졌다. 

 

2월. 콜라주의 달이었고 유치원과 초등학교 모두 방학이라 아이들이 많았다. 이아윤과 김아윤은 콜라주 수업에 쓸 색종이와 풀, 가위, 도화지와 반짝이 풀 따윌 준비하느라 바빴다. 김아윤은 이아윤이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한 콜라주를 이달의 미술로 정하자고 조른 탓에 학원 꼴이 이 지경이라며 눈을 흘겼고, 이아윤은 김아윤의 눈을 피하기 바빴다. 저녁 타임 즈음이 되면 오려 붙이고 남은 색종이가 산을 이루었다. 이아윤은 그걸 폐품 실 상자에 두고 뚜껑까지 덮어 뒀는데, 어떻게 찾아낸 건지 가은이가 선생님을 애타게 불렀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아윤을 쳐다보는 가은이와 해준이, 진경이를 무시할 수 없어 이아윤은 아이들에게 그걸 던지고 노는 것을 허락했다. 

 

이아윤까지 합세해 알록달록한 종이 조각들을 던지고, 뿌리고, 사이에서 뒹굴었다. 깔깔깔 웃으며 그 좁은 방에서 고함을 질렀다. 코로나도 넷이 노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아윤이 진경이가 색종이 조각으로 모래성 쌓는 것을 도와주던 그때 도화지를 가지러 김아윤이 들어왔고 눈 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2월 20일 즈음이었을까? 가은이와 해준 이가 김아윤과 이아윤의 손을 톡톡 건드렸다. 눈을 감으라 하더니 손에다 뭔가를 놓고는 눈을 뜨라고 했다.

 

-선생님 이거 보세요!

 

가은이가 이아윤의 손에 올려놓은 것은 종이로 접은 종이학이었다. 해준 이가 김아윤의 손에 올려놓은 것 또한 종이학이었다.

 

-선물이에요. 제가 어제 그거 만드느라 엄청 고생했어요.

 

이아윤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는 꼭 안아주었다. 김아윤은 고맙다고 말하면서 손안의 종이학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그날 이아윤은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종이학을 자랑했다.

 

3월에 와닿을락 말락 할 무렵, 갑자기 코로나 확진자가 늘었다. 그냥 늘었다는 말로는 설명을 못 할 정도로 엄청 많이 늘었다. 별일이야 있겠어, 이아윤은 안일하게 생각했고 다른 나라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김아윤은 불안해했다. 학원 문을 걸어 잠그고 케이에프 구십사 마스크를 끼고 아침 점심 저녁 강박증 환자처럼 손을 씻으면서도 불안해했다. 자신이 코로나에 걸리면 어쩌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지켜보는 이아윤까지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위생에 신경 쓰는 김아윤이어서, 누구도 김아윤이 코로나에 걸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십년지기 친구인 강혜미와 치킨 한 마리에 맥주 세 캔 곁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강혜미가 코로나에 걸릴 것이라고 김아윤도, 강혜미도, 강혜미에게 코로나를 옮긴 강혜미의 부모도 생각지 못했기에 검사를 받으라는 보건소의 전화를 받고 김아윤은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불안에 떨며 검사 결과를 기다렸고, 차라리 재수 생활을 한 번 더 할게요 하고 간절히 빌었지만 결국 결과는 양성이었다.

 

-아윤아 나 확진이래. 어떡해? 

 

김아윤이 떨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김아윤 자신도 이아윤이 해답을 갖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괜히 물은 것이겠지. 어떡해 앞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을까. 미술학원? 김아윤 자신? 늘어나는 빚? 이아윤은 생각했다. 어느 쪽이던지 골치 아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아픈 머리를 싸쥐고 이불 속을 굴렀다.

 

-이거 머리가 진짜 아프다? 그냥 아프다 이게 아니라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아. 염병 무증상 경증도 많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아픈 건지. 어젯밤부터 쭉 잔다고 전화 못 받았어 미안해.

 

김아윤이 오후 여섯 시가 되어 보낸 카톡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 하고 어제 아홉 시경 카톡을 보냈는데 지금 답장이 왔다. 

 

-나 코로나 투병기 써서 내 블로그에 올릴까 봐. 코로나 정말 대수롭지 않은 병 아닌데 사람들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겨. 경증 많다고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닌데. 

 

-언니 이거 봐. 내가 어제 인터넷 서핑하다 찾은 건데.. 아니 어떻게 코로나랑 독감을 비교할 수가 있지?

 

그걸 본 김아윤은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이아윤은 괜히 보냈나 후회를 하며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렸다.

 

-웃긴다, 그치? 지가 걸려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 주위 고작 네 명이 경증이라고 코로나가 위험하지 않다 주장하는 꼬라지 하곤.

 

공격적인 말투를 쓰지 않는 김아윤은 화가 단단히 난 듯했다. 하긴 이아윤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겪어 보지도 않고, 독감과 코로나19는 애초에 비교할 수가 없는 건데. 어떻게 백신도 약도 없는 신종바이러스랑 백신 약 모두 있는 독감이랑 비교를 하는 걸까. 이아윤은 학창 시절 과학을 제일 싫어했고 과학 시간마다 매일 엎어져 자 과학을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과학 성적은 오십 점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아윤도 그 블로그 운영자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괜히 보냈나 보다 언니. 미안해. 머리 아플텐데 푹 쉬어 아무 생각 말고.

 

수입이 반 토막 났다. 코로나로 수입이 준 부모들이 가장 먼저 끊는 학원이 예체능 학원이었다. 그걸 왜 생각 못 했을까. 이아윤은 중얼거렸다. 불꺼진 어두운 교실에 이아윤 혼자 남았다. 이아윤은 도화지가 쌓인 책상위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아무도 손대지 않은 도화지가 깨끗했다.

 

-선생님 엄마가 미술 그만 다니래요.. 

 

해준이가 종일 시무룩하기에 연유를 캐묻자 해준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아윤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해준의 가정형편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아이의 남루한 옷차림과 매번 기한을 훌쩍 넘기는 학원비 입금 날짜로 짐작하고 있었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해준이와 헤어질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절정을 찍었던 저번 달에도 꼬박꼬박 입금했기에 일 년, 최소한 몇 달은 더 해준을 가르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구나 해준아. 선생님 해준이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 언제부터 그만둔다고 하셨어?

 

-다다음주 부터.. 

 

다다음주. 저번 달 학원비가 입금된 시점으로부터 딱 한 달이 되는 날이다. 

 

-저 선생님 보고 싶으면 어떡해요?

 

해준은 그림 도구를 담은 쇼핑백을 어깨에 걸친 채 물었다.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딱 여덟 달 동안 그림을 가르쳤을 뿐인데 아이가 떠나간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해준의 누나 해빈을 이 년동안 가르쳤기도 했고, 해준의 부모가 늦는 날이면 어두컴컴한 교실에서 종이를 접던 마지막 아이가 해준이어서 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이아윤과 김아윤은 해준이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단순히 그림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사랑받는 법과 아주 사소한 호의를 받고 지나치게 고마워하지 않는 법을 가르쳤다. '어떤 나이에는 진짜로 사랑과 친절이 필요한데 모두가 그걸 받지는 못하'니까.

 

-선생님 전화번호 알지? 모르니? 그럼 선생님이 여기 종이에다 적어줄게. 선생님 보고 싶음 언제든지 연락해. 아니면 여기 학원으로 찾아와도 되고. 

 

아이의 왼손에 전화번호가 적힌 손바닥만한 종이를 쥐여주고, 오른손엔 과자 한 봉지를 쥐여주고 해준을 배웅했다. 데려다주겠다는 데도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해서 결국 학원 문 앞까지만 바래다주었다. 여섯 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해준. 늦은 밤 데려다주겠다는 어른에게 괜찮다고 혼자 갈 수 있다고 애써 웃어 보이는 법은 대체 어떻게 배운 걸까. 해준은 늦게 알아도 될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고 일찍 알아야 할 것을 남들보다 늦게 알아버렸다. 삼월의 밤공기가 유달리 포근했다. 가는 길은 춥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윤은 멀어지는 해준을 바라보았다.

 

삼월의 어느 날 이아윤은 광화문 광장을 지나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탁 트인 이곳은 왜인지 다른 곳보다 훨씬 추웠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윤을 잡아끈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고함이었다.

 

-코로나는, 거짓이다! 정부가 우릴 통제하려고 꾸며낸 거짓말이다!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머리에 끈을 두르고 소리쳤다. 수십 명의 사람들은 마스크조차 제대로 쓰지 않았다.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를 때마다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게 고스란히 눈에 들어와서, 머플러를 두르고 바삐 걸음을 재촉하던 이아윤은 멈칫했다. 곧 온몸이 바르르 떨려 왔는데, 분노 때문인지 당혹감 때문인지 아니면 머플러와 코트로 무장을 해도 느껴지는 빌어먹을 한기 때문인지 몰랐다. 

 

-저기요, 그만하시고 집에 들어가세요.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이아윤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하며 말했다. 몸이 너무 떨려와 이라도 악물어야 할 판이었고 추워 뒤질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따뜻한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너도 세뇌된 거야! 다른 사람들처럼 세뇌된 거라고! 사실 코로나는 사기극이었어. 정부가 우릴 통제하려고 꾸며낸 거라니까!

 

맨 앞줄에서 열심히 고함을 지르던 여성이 악을 썼다. 

 

-개소리야. 그럼 감염돼서 죽고 피해 본 사람들도 거짓이라는 거야?

 

-당연하지, 걔들도 정부가 약을 쓴 거라니까? 사람한테 쓰면 안 되는 약을 사람한테 쓰니 사람들이 반병신이 될 수 밖..

 

이십 구년 인생을 살며 주먹질 한번 한 적 없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아윤 자신도 몰랐다. 다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느낄 수 있었다. 언니가, 친언니 같은 김아윤이 코로나에 걸려 다 죽어가는데, 이런 정신 나간 새끼들은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는 말이 한심했다. 김아윤은 코로나 걱정에 집-미술학원-집-미술학원의 루트만 반복했는데. 하루에 손을 여섯 번씩 씻고 케이에프 구십사 마스크를 착용했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아쿠아리움조차 가지 않았는데. 또라이 같은 새끼들 때문에 걸렸다. 대가리에 총 맞은 새끼들이 집회한다 설쳐대고 온갖 곳을 싸돌아다니면서 퍼트려서 걸렸다. 

 

뭔가 우당탕하는 소리에 김아윤은 고개를 돌렸다. 사촌인 유은영에게서 종이 가방에 담긴 과일 잼 두 병을 막 건네받으려던 참이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키 큰 여자가 누군가의 위에 올라타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주먹을 휘두르는 기세가 너무 맹렬해서 감히 누가 말릴 엄두조차 못 내는 듯했다. 사람들은 그냥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으악, 꺅, 누가 저 사람 좀 말려봐, 112 신고해 빨리 사람 죽겠다, 싸움 났다 구경 가자.

 

-싸움 났나 보다. 구경 가자 언니.

 

유은영이 배시시 웃었다.

 

-구경은 무슨. 112 전화할 테니까 가까이 가지 말고 여기 있어.

 

김아윤이 한숨을 쉬며 롱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누르는데, 유은영이 중얼거리는 말 한마디가 귀에 와 꽂혔다.

 

-근데 저 사람 복싱 배웠나? 주먹 날리는 솜씨가 아주 제대로네.

 

퍼뜩 정신이 들었고 간이 철렁했다. 핸드폰에 박고 있던 고갤 들어 싸움터를 봤다. 익숙한 머플러, 익숙한 코트, 익숙하게 하나로 올려 묶은 금발 머리, 어딘가 익숙한 주먹 쥔 손, 칠 년 동안 복싱을 배웠다는, 이아윤의 상처투성이 손.

 

이아윤이었다.

 

마치 영화처럼 시간이 느려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김아윤은 이아윤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이아윤은, 이 또라이는 정신 못차리고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이아윤 밑에 깔린 여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찢어져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정신 차려 이아윤!

 

-저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코로나.. 거짓말..

 

이아윤이 거친 숨과 함께 내뱉는 말들은 드문드문 끊겨 연결되지 않았다.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고 있었고 김아윤은 그 손을 펴며 말했다.

 

-너 이러려고 복싱 배운 거 아니잖아, 아윤아. 그러니까 그만해. 

 

그러는 사이 경찰이 왔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김아윤과 이아윤, 이아윤에게 맞은 여성은 입에 고인 침과 피를 뱉으며 끌려갔다. 여성의 망사 마스크가 도로 위에 나뒹굴었다.

 

-잘하는 짓이다.

 

조사를 마치고 나오며 김아윤이 그렇게 말했다. 세 시간에 걸친 조사는 아윤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이아윤은 자신이 방금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조용히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던 그때 김아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 아윤아,

 

이아윤은 다급히 김아윤을 불렀고 김아윤은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 진통제, 진통제 가방에 보면, 있어 빨리 그거 줘.

 

이아윤은 김아윤이 팽개쳐 둔 가방을 헤집어 진통제를 꺼냈다. 백색의 알약을 김아윤 손에 쥐여주고, 자신의 가방에 있던 생수 한 병을 까드득 따서 내밀었다. 김아윤은 급히 알약을 삼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거 봐, 언니는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그 또라이들이 개소릴 하는 게 너무 싫었어. 멀쩡히 있는 병 가지고 없다고 우기니까..

 

-그만해 이아윤. 그래서 네가 싫으면 어쩔 건데?

 

김아윤은 무릎을 안고 쪼그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은 채로 있었다. 이아윤은 달리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떨궜다.

 

-네가 뭐 그 사람들 때려죽이기라도 할 거야? 여기가 무슨 북한이야? 인민재판이라도 하게? 

 

-사실 괜찮다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짜증나, 나도.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하던 일을 잊어버려. 뭘 하려고 네이버에 들어갔는지, 물감을 꺼내놓고 내가 뭘 하려 했는지, 너한테 전화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 이틀에 한 번꼴로 머리가 쑤시고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아. 존나 개 같아. 근데 개 같으면 어쩔 거야?

 

김아윤은 숨을 골랐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새벽의 거리는 고요했다.

 

-개 같으면, 바닥에 드러누워 울기만 하면, 다 해결돼? 걸렸던 코로나가 없던 게 되냐고! 다시 우리 살아야 할 거 아냐, 살아나가야지. 

 

-.....미안해.

 

-그냥 내가 운이 좀 없었던 거야. 걸리려면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맛집 순회하는 네가 먼저 걸렸겠지. 그렇게 조심하고도 걸린 거면, 아윤아. 그냥 내가 운이 좀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들 너무 미워하지 말자. 우리 속만 시끄러워.

 

간판을 걸던 날을 기억한다. 각종 화구를 사고 아이들을 맞던 그 순간 또한 기억한다. 아윤들은 사 년을 꽉 채워 운영한 미술학원을 접어야만 했다. 코로나 때문에 수입이 준 부모들은 가장 먼저 예체능 학원을 끊었고, 서른 명이 옹기종기 모여 수업하던 미술학원엔 딱 열두 명 만이 남았다. 학원을 계속 여는 게 손해일 만큼 수입이 적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처럼, 절대, 한순간에 펑 하고 망해버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랬다면 금방 털어내고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에이씨, 재수 옴붙었네 하면서. 코로나는 조금씩 조금씩, 저번 달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 나빠졌다가 하면서 아윤들에게 쓸데없는 기대와 희망을 불어넣었다. 조금만 버티면 나아질 거야, 조금만, 이번 달만, 다음 달만, 조금씩 좋아지고 있으니까.. 코로나는 서서히 아윤들의 피를 말렸고, 빚은 김아윤이 매일 마트에서 적립하는 포인트처럼 차곡차곡 누적되었다. 계속해서 불어나는 빚과 김아윤의 후유증- 두통과 브레인 포그, 탈모-은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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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윤이 에이포 용지에 굵은 매직으로 그렇게 써서 붙였다. 김아윤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언닌 너무 잘 울어, 이아윤은 그렇게 타박하면서도 김아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새벽의 홍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아윤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갔다. 싸늘한 십이월의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 이제 어떡하지.

 

이아윤은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며 중얼거렸다. 김아윤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몰라, 그냥 살아봐야지. 언젠 계획 세우고 살아간 적 있었나 뭐. 내일 알바 자리라도 알아보자 한번.

 

민영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들렀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그러질 못했다.

 

-힘들죠, 지금? 

 

가게 사장 박민영이 옆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와 김아윤 옆에 앉았다. 케이에프 구십사 마스크를 끼고 있는 민영의 얼굴이 수척했다.

 

-네, 지금 진짜 어떡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요 정말. 언니도 힘드실 텐데.

 

-지금 수입이 반의반 토막 났어요. 아들 원비 대기도 빠듯할 정도니.. 어휴, 말해 봐야 뭣 하겠어요. 우울한데 서비스로 딸기 스무디 만들어 줄게요 우리 그거 마셔요.

 

-미안해서 어떡해요,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김아윤은 손사래를 쳤고 이아윤도 마찬가지였다. 민영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안해할 것까지야. 지금 딸기 사 놓은 거 오늘 안에 안 먹으면 다 버려야 해서 그래요.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 정 미안하면 친구들 몇 명 데리고 와 주면 고맙고.

 

-우리 결혼 미루자. 

 

이아윤은 남자친구 강한영에게 말했다. 한영의 눈동자가 구름을 좇았다. 고개를 하늘로 약간 치켜들고 하늘을 응시했다.

 

-어떻게 잘해보면 치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나한테 결혼 자금 빼고 여윳돈이 천정도 있는데, 그거 끌어다 어떻게 하면..

 

-천 가지곤 택도 없어. 우리 계획이 뭐였어, 서울 외곽에서라도 전세살이 하는 거였잖아. 근데 지금 집값 오르는 거 봐. 전세 매물도 없고.. 우리 계획했던 돈이 대출받아서 일억 정도였는데. 지금 전세 매물이 세 배 가까이 뛰었어 한영아. 우리 영끌해도 못 해. 그리고 너 회사도 난리라며. 한 달씩 번갈아 가며 무급휴가 쓰고 여행사라 폐업한다 어쩐다, 말 많잖아. 나도 미술학원 폐업해서 빚만 늘어가. 내후년에, 내후년 겨울쯤에 알아보자. 응?

 

강한영과 이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한영은 얇은 실반지를 낀 이아윤의 손을 보았다. 하얗고 상처 많은 친숙한 손이었다. 강한영은 손을 뻗어 이아윤의 손을 잡고 이아윤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내가 좀 더 경제력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돈을 좀만 더 모아놨으면..

 

-오히려 내가 돈을 더 모아놨어도 됐겠지. 내가 러브콜 엄청 받고 전시회 엄청 여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너 다 먹여 살리고 내년 결혼은 무슨 지금 당장 결혼했어도 됐겠지. 그렇지만 이런 가정해봤자 뭐하겠어. 그냥, 살아 가는거지.

 

단호하게 한영의 말을 자르며, 이아윤은 자신이 점점 김아윤 처럼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언니 말처럼 우린 그저 묵묵히 살아나가는 거지... 이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강한영의 손을 감쌌다. 십이월의 공원에 코트 하나 달랑 걸치고 있었지만, 손만은 따뜻했다.

 

소식 끊긴 지 꼬박 일곱 달 만에 해준이의 소식을 접했다. 가은이 엄마의 연락으로 접한 소식이었다. 해준이가 차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그저께 김아윤이 뉴스로 본 소식이었는데, 그 주인공이 해준이었을 줄이야. 뉴스에 나온 여섯 살짜리 아이, 해준이는 샌드위치 가게 앞에서 샌드위치 사는 엄마를 기다리다 봉변을 당했다. 해준이의 한 살 위 누나, 해빈이도 크게 다쳤다고 했다. 일곱 살 여섯 살짜리 아이들을 혼자 집에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들 복닥이는 가게에 아이들을 들여보낼 수도 없어서 가로수 앞에서 기다리라 했다고 했다. 백주대낮에 술 쳐먹고 차를 몰던 스무 살 대학생들이 가로수로 돌진했다. 왜 그랬는지 자기들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경찰서에서 펑펑 울었다는데. 꽤 이름있는 대학의 대학생들이었고 앞길이 막힐 걸 두려워서 운 건지, 아니면 정말 속죄하는 마음으로 운 것일지 이아윤은 생각했다. 되도록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종종 있다는 것을 아윤은 어느새 깨달아 버렸다. 분명한 것은 해준이는 죽었고 해빈이는 중상을 입었으며, 그들의 부모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때 왜 내가 애들을 밖에 뒀을까, 차라리 집에 두고 왔더라면. 수십번 자책하겠지. 차에 타고 있던 네 명의 대학생 중 단 한 명만이 해준이의 장례식에 얼굴을 비췄다.

 

범인 중 한 명은 마스크와 털모자로 무장을 해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해준이 영정 사진에 절을 하고 돌아간 그녀에게, 해준의 부모는 무슨 감정을 내비쳤던가. 별로 선명히 빛을 발하지 않는 그 날의 기억들 속에서 유독 밝게 빛을 발하던 것은 그녀를 완전히 때려죽일 뻔했다는 거. 코로나 이후로 분노조절장애라도 생긴 건지 김아윤은 이렇게 행동하는 이아윤이 낯설었다. 이아윤은 멱살을 잡고 여성을 몇 차례 흔들다, 맥이 탁 풀려 그만 놓아버렸다. 여성은 풀썩 소릴 내며 주저앉았고 흐느껴 울며 죄송하다 말했다. 일곱 달씩이나 연락조차 끊고 지내다 이제 와서 이렇게 행동하는 게 웃겼다. 내가 감히 해준이 죽인 사람의 멱살을 잡고 흔들 자격이 있나 싶었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다름 아닌 해준의 가족일 텐데. 장례식장에서 드잡이하는 것은 의식조차 회복되지 않았다는 해준의 누나를 두고 막내의 장례를 치르는 그들을 욕보이는 짓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아윤은 해준의 부모를 뵐 낯이 없었다.

 

코로나가 종식되지 못한 채로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아직까지 매물이 나가질 않아 아윤들은 조급했지만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지켜만 보았다. 매년 이맘때쯤 아윤들은 항상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 와서 초를 꽂고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올해도 꼭 해야 할까, 이아윤은 망설였고 이유를 덧붙이진 않았지만 김아윤은 숨겨진 행간을 읽었다. 

 

-아무리 암울한 2020년이었다지만, 우리가 깨끗한 새해를 맞이하는 걸 막을 순 없지. 혹시 알아? 내년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지. 

 

깨끗한 새해. 해가 바뀐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들떠있는 김아윤의 기분을 망치긴 싫었다. 억지로 베스킨라빈스에 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샀고, 몇천 원 더 보태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캐릭터 실내화까지 샀다. 그러다 보니 이아윤은 조금 들떴고 케이크에 초까지 꽂고 불을 붙이자 기분이 한결 더 나아졌다. 아이스크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오늘따라 술술 잘 넘어가서 앉은 자리에서 한 판을 다 해치워버렸다. 고양이가 그려진 실내화를 신고 사진을 찍었고 무슨 근자감인지, 내년은 이아윤의 해라는 생각을 했다.

 

매년 십이월 삼십 일일 자정에는 보신각에 가서 종 울리는 것을 지켜봤다. 티비로 생중계해주는데 그 추운 날 굳이 왜 거길 가냐고 하는 사람들은 평생 모를 무언가가, 새해의 보신각엔 있었다. 시린 손을 불며 사람들 틈에 끼여 온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생판 모르는 남들이었지만 그저 같은 곳에서 같은 장면을 같은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아주 단순하고 강렬한 그 느낌이 아윤들을 매년 새해 전날 보신각으로 잡아끌었다. 그렇지만, 올해는 그저 티비로 지켜만 보았다. 정부에서 아예 제야의 종 행사를 온라인으로 돌려버려서. 이게 맞지, 하고 김아윤은 말하면서도 쩝 입맛을 다셨다. 올해를 빛낸 인물 다섯 명이 함께 뎅 하고 종을 울렸다. 

 

-드디어 2021년을 맞이했습니다. 참 2020년이 다사다난한 해였는데요. 힘들었던 지난 한 해를 흘려보내고 깨끗하고 맑은 한 해를 맞이하였으니 올해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시청자 여러분의 앞날에 꽃길이 펼쳐지길 기도해 봅니다. 

 

새해를 맞았고 새해 첫날부터 이아윤은 집 앞 카페의 사은품 증정 이벤트에 당첨되었으며 길을 가다 만 원을 주웠다. 오후에는 미술학원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세상에, 올해 진짜 이아윤의 해인가 봐. 이아윤은 낄낄 웃었고 괜스레 들떴다. 딱 샀을 때만큼만 받으면 됐는데, 아니 그 값의 절반만 받아도 되었는데 그는 거기서 오히려 값을 더 쳐주겠다고 했다. 

 

-삼백 정도 더 얹어드리면 될까요? 이거, 너무 적은 돈 아닌가 모르겠네.

 

-절대 적지 않아요. 진짜 계약 하시는 거죠? 

 

김아윤은 단호하게 말했고 그 또한 단호하게 잘라 대답했다. 

 

-당연하죠. 

 

일이 너무 이상할 정도로 잘 풀렸고 이거 사기 아냐? 하고 김아윤이 의심할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행히 그는 사기를 치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오십대 남성일 뿐이었다. 아니, 이 시국에 추가로 삼백씩 더 얹어줄 재력이 있으니 부유한 남성이라 봐야 하나.

 

2021년이 되었지만 빌어먹을 코로나는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수를 더 늘려가고 있었다. 일 년씩이나 이어진 코로나 사태로 지쳐있던 사람들은 연말 분위기를 누리려 온 거리를 활보했다. 연말 약속을 잔뜩 잡은 사람들 덕에 고깃집은 오랜만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김아윤은 그런 사람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돌아다니니 코로나가 종식 안 되는 거야, 이 이기적인 인간들아. 그럴 수도 있지 솔직히 일 년 동안 어디 안 돌아다니고 가만있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들 초등학교 입학식을 보고 싶다면서 놀이공원 가서 사진 찍는 건 무슨 경우지. 그렇게 사람들은 2020년 묵은해를 떠나보내며 지긋지긋한 코로나바이러스까지 떠나보낸 것처럼, 2021년이 되자마자 코로나가 종식된 것처럼 행동했다. 바로 두 달 전에 하루 천명 씩 확진자가 나오고 거리두기 2단계로 전환되었었단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 같았다.

 

-올해를 2021년이라 불러도 될까? 

 

이아윤은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 천오백 명씩 쏟아진다는 뉴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글쎄. 내 생각에는 2020-ver.2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2020-ver.2. 아, 컴퓨터 프로그램도 아니고 년도에 버전은 좀 이상한가?

 

김아윤이 사과를 아삭거렸다.

 

-올해는 2020년의 연장선이구나. 작년과 분리된, 묵은해와 깔끔하게 떨어진 새해가 아니었어.

 

2021년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2020년에 살고 있었다.

 

아니, 2020-ver. 2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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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기

*정끝별-회복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소설로 개작 해보았습니다. 동아리 시간에 '시를 소설로 바꾸기' 활동을 하며 써뒀던 글인데, 수정해서 올립니다 :)회복기-정끝별 아침 햇살이 슈거파우더처럼 내려앉은 이월의 소파에서 그루밍하다 사르르 잠이 든 고양이 조금 전에 나는 저 소파에 기대앉아 신열에 젖은 속옷을 식히며 남산타워 뒤로 떠오르는 해를 맞았어열이 내렸을까 겨드랑이로 파고든 고양이가 가르릉가르릉 불러주는 골골송을 선잠인 듯 듣다 일어나 고양이 물을 갈아주고 화장실을 치우고 밥을 주고는수란을 띄운 말간 순두부를 끓여 늦은 아침을 먹는 내내 계란을 좋아하는 고양이가 무심한 척 내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조그만 심장이 어찌나 쿵쿵거리던지설거지를 하고 다시 식탁에 앉아 연한 커피를 마시면서 슈거파우더 뭉치가 된 소파의 고양이를 보고 있어 이제 봄이겠구나어느 봄 햇살에 나도 녹아들겠구나 봄이 다디단 이유일거야. -회복기 소파에 기대앉아 바라보는 창밖은 공연 시작 전 작은 조명 몇 개만을 켜놓은 무대처럼 어둡기만 하다. 지혜는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을 멍하니 응시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작게 열어둔 창문 틈으로 들어온 서늘하고 깨끗한 겨울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불면증이 심해 잠에 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고 겨우 잠에 들어도 수면의 질이 나빠 중간에 자주 깨 뒤척이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사흘 내내 야근을 해가며 일을 쳐낸 탓인지, 아니면 최근 오래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해 왔던 데다 절연한지 오래인 부모가 어떻게 알고는 전화번호를 알아내 돈을 내놓으라 행패 부렸던 일 때문인지. 지혜는 분명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몰려 있었다. 몸살 기운이 있더니 어제 점심 무렵부터는 아예 오한 때문에 몸이 저절로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몸 상태가 너무 나빠 해열제를 먹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뉘었다. 근육 하나하나가 저리고 뻐근한 느낌인 데다 잠마저 오지 않아 한참을 끙끙거리며 앓다 잠에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지혜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밤새 식은땀을 흘려 온몸과 이불이 축축했지만 오랜만에 깊이 잔 덕인지 몸만은 한결 가뿐했다. 이불 빨래나 샤워 같은 현실적인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지혜는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거실의 소파로 향해 몸을 기대고 앉았다. 다만 일출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스물일곱 생애 단 한 번도, 지혜는 편안한 마음으로 일출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2023년 12월 31일의 해나 2024년 1월 1일의 해는 다를 바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 해돋이를 보러 가족이나 연인과 정동진이나 호미곶까지 가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나 이것은 지혜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혜는 고등학교 학창 시절 전체를 좋은 대학 취업 잘 되는 과에 가기 위해 모두 바쳤고,

  • 사즈
  • 2024-06-17
서른의 다경으로부터

하경 언니에게,   참 오랜만에 언니한테 편지를 쓰는 것 같아. 아니, 애초에 언니에게 말을 거는 것도 열다섯 살 이후 처음이지 아마?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원하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꾸준히 성장하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월급도 나랑 고양이가 넉넉히 먹고 살 만큼은 벌어. 애인이랑 관계도 순조롭고 내년 즈음엔 정말 결혼을 하고 싶은데 상황이 따라줄지는 모르겠지만. 언니가 나 어릴 때 걱정했던 것처럼 백수가 아니야. 언니의 걱정처럼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라 사람들한테 놀림받고 탕비실에서 조용히 울음을 삼키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어, 난.  십 년 넘게 연락도 없다가 왜 이제야 편지를 하는지, 전화도 문자도 뭣도 아닌 편지인지 많이 의아했을 거야. 최근 언니 소식을, 언니가 잘 먹고 잘살고 건실한 남편 만나 토끼 같은 자식까지 셋이나 두었다는 그런 소식을 접해서. 맏이가 공부를 그렇게 잘하고, 남편이랑 금실이 좋고. 둘째는 친구들한테 인기가 그렇게 많고 막내는 선생님들한테 얼마나 이쁨받는지 모른다며 올렸던 그 인스타 게시물들. 아는 선배가 언니랑 알음알음 아는 사이라 언니의 인스타 계정을 얼마 전에 접할 수 있었어. 왜, 언니가 열일곱이고 내가 열다섯이었을 때, 언니가 좋아하던 진성 오빠한테 고백했다 단칼에 거절당하고 종일 울었던 그때 있잖아. 한 사 월 쯤이었나, 기억나? 어장친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정하게 굴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근데 사실 오빤 친절이 몸에 밴 것뿐이어서 남들한테 하듯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고 학원 레벨테스트 망치고 울던 언니한테 공부 비법을 전수해 줬던 거야. 애초에 오빠가 동성애자였으니까, 본인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성에게 그렇게 한다는 게 큰 문제가 될지 몰랐던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언니가 그 사실을 알고 왜 내 주위에는 정상인 새끼들이 없는 거지, 하고 소리치던 밤에 열이 돋아 처음으로 커밍아웃했었지. 사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 게시물을 보니 내 말을 듣고 얼빠진 표정을 짓다 난 절대 너처럼 살지 않을 거라 소리치던 언니 생각이 나서, 언니가 참 언니답다는 생각이 들었어.  언니도 짐작했겠지만, 아니 알고 있었겠지만 내 학창 시절은 별로 좋은 추억으로 남지 않았어. 내가 '그런' 사람 일수도 있겠다는 것을 처음 자각한 때는 열네 살 때였고, 확실히 알게 된 건 열다섯 때였는데 그때 언니랑 다투고 거의 절연하다시피 했잖아. 열다섯 6월이후론 김희주가 내 비밀을 소문내고 다녀서 책상에 레즈년, 더러워, 나가 뒤져 이런 말들이 항상 틴트로 쓰여있었으니까. 중학교 마지막 체육대회 날에는 반 애들이 내 주위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복도를 걸을 때면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었어. 누가 계속 내 어깨를 쳤거든. 실수인 척 무심히 툭 치고 어 미안해 그러고 지나가는, 분명 모두 다른 사람인 게 틀림없는데도 똑같은 목소리에 똑같은 표정을 가진 애들이 너무 많았어.  그런 괴롭힘은 특히 중학

  • 사즈
  • 2021-05-16
소리

그 일은 아주 우연히, 아주 우연히 일어났다. 아주 우연히 일어났고 아무도 의도치 않은 일이니 어쩌면 실수에 더 가까울 일이었다. (거짓?)   우린 너무 어렸다. 열여섯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가 아니었다. 우리에겐 해야 할 공부가 있었고 꾸려가야 할 미래가 있었다. 그 미래에 출산은 단 한번도 고려해보지 않은 사항이었다.  (확실한 진실)   -   열여섯 생일날 서로의 몸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졌던 것은 결코 서로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현지유는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으려 애썼다. 초콜릿 케이크 때문에 약간은 달착지근했던 세 번째 키스와 조금은 야릇했던 좁은 방의 분위기도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어쩌면 의도된 것일지도 몰랐다. 지유는 '남자친구가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준성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구절절 더 많은 얘기를 덧붙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둘은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버려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지유는 남자친구와 조금 더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을 원했다. 우린 발에 채이는 보통의 중학생 커플과는 다르다고. 단지 그런 생각 때문에, 그리고 달아오른 이 분위기를 깼다가는 어색한 그 후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심결에 저지른 일이었다. 지유네 반 담당 도덕 선생은 청소년 관계가 문란한 학생만 하는 것이며, 그, 조그만 쾌감 하나 느끼려다 미성년 부모라는 딱지가 붙는다고 했다. 현지유는 조그만을 아주 힘주어 말하던 도덕 선생의 눈동자를 좇으며 자신이 저저번주 저지른 일에 대해 생각했더랬다. 그녀는 청소년 낙태가 무책임한 행동에서 비롯된 무책임한 결과라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무책임했던가? 인터넷에서 피임법을 보고 실천했고 (그 피임법이 실패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건 현지유와 김준성 둘 다 몰랐다. 관련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계 후 한 달째 되던 날, 임신 테스트기까지 사용했다. 이정도면 적어도 무책임하게 행동한 건 아니라고 믿었는데.   이 길다란 흰색 막대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두 줄짜리 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책임한 행동의 무책임한 결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지유는 그 날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할 터였다. 퀴퀴했던 화장실의 공기와 온갖 오물과 뭉쳐져 버려져 있던 휴지뭉치들, 쉬는시간이라 웅성이는 말소리가 복도를 타고 화장실까지 닿았던 것과 낙서로 뒤덮인 학원 화장실에서 하얀 막대를 응시하던 자신의 손 따위를.  그때 지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고스란히 기억할 것이었다.   -   "나 임신 했어. 네 아이야." 지유는 준성에게 희미한 두 줄이 뜬 임신테스트기 사진을 내밀어 보였다. 핸드폰을 받아들고 준성은 할 말을 잃었다.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고? 언제? 왜? 의식의 흐름은 현지유의 생일날로 김준성을 이끌었다. 준성은 곧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어정쩡하게 끄덕였다.

  • 사즈
  • 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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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이제 더 이상 코로나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게 된 것 같아요. 2021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글에서 작년 한 해 우리 나라의 이슈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서 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시의성 있는 글은 이렇게 삶을 한 번 더 조명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마무리까지 무리 없었지만 두 주인공의 이름이 같은 것으로 노린 효과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름이 같아서 읽는 내내 헷갈렸거든요. 그 부분을 명시하거나 두 인물에게 명암을 확실히 주면 몰입을 방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2021-01-12 01:01:02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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