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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다경으로부터

  • 작성자 사즈
  • 작성일 2021-05-16
  • 조회수 914

하경 언니에게,

 

참 오랜만에 언니한테 편지를 쓰는 것 같아. 아니, 애초에 언니에게 말을 거는 것도 열다섯 살 이후 처음이지 아마?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원하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꾸준히 성장하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월급도 나랑 고양이가 넉넉히 먹고 살 만큼은 벌어. 애인이랑 관계도 순조롭고 내년 즈음엔 정말 결혼을 하고 싶은데 상황이 따라줄지는 모르겠지만. 언니가 나 어릴 때 걱정했던 것처럼 백수가 아니야. 언니의 걱정처럼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라 사람들한테 놀림받고 탕비실에서 조용히 울음을 삼키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어, 난. 

십 년 넘게 연락도 없다가 왜 이제야 편지를 하는지, 전화도 문자도 뭣도 아닌 편지인지 많이 의아했을 거야. 최근 언니 소식을, 언니가 잘 먹고 잘살고 건실한 남편 만나 토끼 같은 자식까지 셋이나 두었다는 그런 소식을 접해서. 맏이가 공부를 그렇게 잘하고, 남편이랑 금실이 좋고. 둘째는 친구들한테 인기가 그렇게 많고 막내는 선생님들한테 얼마나 이쁨받는지 모른다며 올렸던 그 인스타 게시물들. 아는 선배가 언니랑 알음알음 아는 사이라 언니의 인스타 계정을 얼마 전에 접할 수 있었어.

왜, 언니가 열일곱이고 내가 열다섯이었을 때, 언니가 좋아하던 진성 오빠한테 고백했다 단칼에 거절당하고 종일 울었던 그때 있잖아. 한 사 월 쯤이었나, 기억나? 어장친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정하게 굴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근데 사실 오빤 친절이 몸에 밴 것뿐이어서 남들한테 하듯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고 학원 레벨테스트 망치고 울던 언니한테 공부 비법을 전수해 줬던 거야. 애초에 오빠가 동성애자였으니까, 본인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성에게 그렇게 한다는 게 큰 문제가 될지 몰랐던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언니가 그 사실을 알고 왜 내 주위에는 정상인 새끼들이 없는 거지, 하고 소리치던 밤에 열이 돋아 처음으로 커밍아웃했었지. 사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 게시물을 보니 내 말을 듣고 얼빠진 표정을 짓다 난 절대 너처럼 살지 않을 거라 소리치던 언니 생각이 나서, 언니가 참 언니답다는 생각이 들었어. 

언니도 짐작했겠지만, 아니 알고 있었겠지만 내 학창 시절은 별로 좋은 추억으로 남지 않았어. 내가 '그런' 사람 일수도 있겠다는 것을 처음 자각한 때는 열네 살 때였고, 확실히 알게 된 건 열다섯 때였는데 그때 언니랑 다투고 거의 절연하다시피 했잖아. 열다섯 6월이후론 김희주가 내 비밀을 소문내고 다녀서 책상에 레즈년, 더러워, 나가 뒤져 이런 말들이 항상 틴트로 쓰여있었으니까. 중학교 마지막 체육대회 날에는 반 애들이 내 주위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복도를 걸을 때면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었어. 누가 계속 내 어깨를 쳤거든. 실수인 척 무심히 툭 치고 어 미안해 그러고 지나가는, 분명 모두 다른 사람인 게 틀림없는데도 똑같은 목소리에 똑같은 표정을 가진 애들이 너무 많았어. 

그런 괴롭힘은 특히 중학생 때 심했어. 고등학교 가니까 애들이 생각도 크고 입시에 치여 남 일에 관심을 안 두는데, 중학교 때는 어정쩡하게 큰 애들이 할 일없으면 애들을 괴롭혀.

고등학교 가서는 그나마 나았는데, 그때도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 왜, 십 대 애들이 난 이런 사람이 이상형이더라 하는 그런 대화들 있잖아. 난 그 대화에 항상 끼질 못했었어. 애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서로 이상형을 물어보다, 그런 사람이 널 왜 만나냐? 빈정거리기도 하다 누가 "그래서 다경이 너는 이상형이 누군데?" 하고 물으면

"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하고 얼버무려야만 했지. 거기서 '난 셔츠에 슬랙스가 잘 어울리는 강아지상 여자가 취향이야' 할 수는 없잖아.

언니는 '내가 설마 동성애자인 걸까?' 하는 생각이 기어오를 때,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지? 중학생 때는 소속감을 되게 중시하잖아? 남들이 앞머리를 내면 나도 내야 할 것 같고, 남들이 유명 브랜드 파카를 사면 며칠 밤낮을 부모님을 졸라서라도 나도 사야 할 것 같고. 안 그러면 나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니까. 그렇게 소속감을 중시하는 때, 같은 동아리 선배를 보고 심장의 뜀박질을 느끼고 어쩌다 학원에서 만난 친구의 친구를 보고 그날 밤 잠을 못 이루면 언니는 무슨 기분이 들 것 같아?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으면 몰라. 동성애자=에이즈 퍼트리는 천하의 죽일 년놈=이상한 사람이라고 인식하는데 내가 거기서 뭘 할 수 있었겠어? 이 감정은 단지 동경일 뿐이다, 동아리 선배가 너무 예뻐서, 시원시원하게 동아리를 이끌어 나가서, 넘어져 무릎을 다치고 우는, 생판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밴드 붙여주고 아이스크림까지 사서 물려주는 세심함을 동경해서 심장이 뛰는 거라고 나를 속였지. 가끔 우리는 동경과 사랑을 혼동하기도 하잖아. 실제로 구분하기 어려운 감정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결국 나는 나를 완벽히 속이지 못했어. 선배 앞에만 서면 심장 뛰고 얼굴이 달아올라 멋쩍게 웃는 습관은 끝내 못 버려서 김희주가 눈치챘거든. 언니도 알 거야. 내가 가끔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놀았으니까. 걔가 자꾸 캐묻대. 너 예은 언니 좋아하냐고, 왜 자꾸 예은 언니 앞에서만 굳냐고. 그 말을 듣자 등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느낌이었어. 단순히 물증 따윈 없이 심증만으로 그러는 거란 걸 알면서도 너무 당황해서,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내보이라는 뇌의 명령 따윈 무시했어. 그 표정을 본 희주의 표정은 아직도 잊지 못해. 무슨 재밌는 가십거리를 찾았다는 듯한 묘한 표정이었는데. 

자꾸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캐물으니 하는 수 없이 비밀이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모조리 털어놓았는데 주말을 쇠고 학교에 가니 일 반부터 육 반까지 애들이 모조리 알고 있더라. 내가 레즈라고, 삼 학년 칠 반 김예은 좋아하는 미친년이라고, 언니가 불쌍하다고 막, 그래. 이 미친년이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게, 선배 이름은 왜 말하고 다녔을까? 난 이게 제일 이해가 안 가. 선배까지 쌍으로 엿 먹으라는 심보였을까? 그날부터 왕따 확정이 되어서 끝내 아무에게서도 답을 들을 수 없던 문제야. 그 소문은 그래도 버틸만했는데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다름 아닌 선배 때문이었어.

처음 얼마간 선배는 그 소문을 듣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어. 동아리 시간에 나를 마주쳐도 다경이 안녕, 하고 웃어주었고 도서관에서 만나면 무슨 책 재밌는지 추천 좀 해줄래? 하고 묻기도 했거든. 가끔 소문을 떠올렸는지 나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선배는 여전히 예전의 선배 같았어. 

그런데 말이야,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오자 선배가 나를 봐도 모른 척 지나가는 일이 잦아졌어. 복도에서 눈이 마주쳐도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동아리 시간엔 아예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처음에는 그냥 못 본 거겠지 생각했다? 근데 복도에서 평소와는 달리 혼자 있는 선배와 우연히 눈이 마주치고 내가 선배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하자,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돌려 안윤서를 불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어. 안윤서는 선배가 가장 싫어하는 동아리 멤버였거든. 독단적이고 선민의식이 있다면서. 안윤서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내는데도 선배는 꿋꿋이 대화를 이어갔어. 그걸 보고 선배가 나를 피한다는 것을 눈치챘어.

학교가 파하고 곧장 삼 학년 칠 반 교실로 달려갔어. 선배가 그날 주번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홀로 남아 빗자루로 쓰레기를 쓸어 모으는 선배의 뒷모습이 보였고 난 그런 선배를 불렀어.

"예은 언니,"

선배가 흠칫하더니 내 쪽으로 돌아봤어. 한 손에는 쓰레받기를 든 채로 창가에서. 

"언니 왜 자꾸 저 피해요?"

대놓고 물어봤어. 더 잃을 게 없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배가 이유를 말해주면 내가 그걸 고치면 된다는, 그럼 나와 선배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다소 아이 같은 생각 때문이기도 했어.

"..피한 적 없는데"

"피하는 거 맞잖아요. 그 소문 때문에 그래요? 언니도 내가 막 더럽고 미친 것 같고 그래요?"

선배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 선배는 계속 대답 없이 땅만 보았고 난 그 침묵에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어. 점점 목이 메여왔고 그 와중에도 창문을 넘어 가을바람이 하늘하늘 불어와 다리를 간지럽혔어.

"..이유 말해주면 내가 고칠게요."

선배는 여전히 말없이 땅만 봤어.

"선배"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답답해 죽을 것 같아"

그러자 선배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어. 선배와 내 눈이 잠시간 마주쳤고, 무슨 얼음 창 같은 게 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어. 두개골에서 창을 박아 넣어 발끝 까지 밀어 넣은 꽁꽁 얼린 얼음 창. 나를 바라보는 선배 눈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거든. 표정은 한없이 안타깝고 용서를 구하는 것 같은데, 눈은 쓸쓸하면서도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러더라.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 교복 소매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훔치는데, 마침내 선배가 입을 열었어.

"진짜 미안한데, 다경아, 나는 너를 '그런 쪽으로' 안 좋아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런 소문 듣고 나서부터 네가 좀 이상하게 보이고, 막 어색하고 별종인 것 같고,"

그런 말을 내뱉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한 마디를 덧붙였어. 내가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마지막 말을.

"솔직히 좀 소름끼쳐"

저쪽 방에서 애인이 왜 우냐고 물어. 그냥이라고 얼버무렸더니 또 어바웃타임 봤녜. 참 나.

 

-

 

어제 이런 글을 읽었다? 미국에서 신념 때문에 성소수자의 웨딩케이크를 제작하지 않겠다, 한 제빵사가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는 거야. 그 글을 스크랩한 블로그 주인은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며 케이크 만들지 않겠다 한 게 어떻게 벌금을 무는 사유가 될 수 있냐 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저려와. 정말 저릿한, 뭘 어찌해 볼 수 없는 감정이 온몸으로 퍼져나가. 신념 때문이라니. 잘 모르겠어. 종교를 믿어본 적이 없어서 남을 차별하는 걸 신념이란 이유로 면죄부를 쥐여주는 게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 치우친 판단을 하는 건가 봐. 그 사람,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르단 이유로 차별받아도 똑같은 말을 하겠지?

그 사람도 언니처럼 애가 셋이더라.

애인이랑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한 적이 있어. 둘 다 서른이고 어느 정도 자리도 잡혔고 하니 결혼하고 싶은데 결혼을 못 해. 사실 도장만 안 찍었다 할 뿐이지 우린 거의 부부나 다름없는데. 같은 집에서 같은 가재도구를 쓰면서 같이 사는데 말야. 어쩌면 몇몇 부부보다 더 부부 같을 수도 있는 우리가 말야,

그냥 성별이 같다고 결혼을 못한대. 그래도 이십대까지는 별 생각이 안들었다? 근데 서른 되니까 여기저기서 청첩장이 날아와. 특히 매화 꽃잎 날릴 즈음이면 동창한테서, 친척한테서, 회사 사람한테서 청첩장이 날아오는데 속상하더라. 저 얇고 예쁜 종이 한 장에 나랑 애인 이름을 같이 새길 수 없다는 걸 생각하니까.

언니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의 형부랑 결혼했으니까 내 마음이 어떤지 짐작이 갈 거야.

-

엄마랑은 간간이 연락하고 지내. 엄마는 안 그런 척 노력하지만 그래도 언니가 제일 좋은가 봐. 엄마 카톡 프로필 사진은 언니가 준 생일선물이고 배경화면은 조카들이랑 언니가 서울공원에서 찍은 사진이거든. 

그리고 언니, 

애인은,

목 부분 단추를 두 개 푼 셔츠를 검은 슬랙스 안에 넣어 입고 한 손에는 항상 얼음이 녹은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들고 나를 돌아보며 보조개 패인 얼굴로 배시시 웃는 사람. 맑을 류에 하늘 민을 쓰는 이름처럼 참 맑은 사람. 에리얼이랑 똑같은 머리칼을 가져서 욕조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 나와는 달리 주변 사람들에게 지지받고 자라서 마음의 여유가 있는-나 같은 사람 한 사람쯤은 더 보듬어줄 여유가 있는- 사람. 시간을 들여 꼼꼼히 큐티클을 다듬은 반달 모양 손톱을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 웃을 때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 사라지는 사람. 발목에 작은 장미꽃 타투를 한 사람. 신발만으로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 일요일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동그란 안경을 쓰고 딸기잼을 바른 식빵을 든 채로 아침 먹어 하고 나를 깨우는 사람. 내년이면 근무하는 잡지 회사에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라며 기뻐하는 사람. 소주보단 맥주를 좋아하고 치킨보단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등허리를 베고 누워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사람. 머리숱이 적어 빗질 후 빗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신경질을 부리는 사람. 꼭 안으면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나고 브랜드 향수보다 그게 더 어울리는 사람. 세상에서 더러운 게 제일 싫지만 세상에서 씻기를 제일 귀찮아하는 모순적인 사람.

애인은 그런 사람이야. 지금, 서른둘인 언니는 나와 애인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 십 대 즈음에 가치관 형성이 다 된다니 나 같은 사람들을 싫어할 확률이 구십구퍼센트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언니가 애인의 특징을 늘어놓은 이유는, 애인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란 걸 말하고 싶어서야(나는 이걸 굳이 말해야만 알까 싶지만 모르는, 언니 같은 사람도 꽤 많더라고). 애인도 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이 '남들과' 다를 뿐이지 나머진 같거든. 그거 알아? 애인은 언니처럼 오이를 못 먹어.

그래도 언니, 서른이 되니까 언니가 어렴풋이 이해는 간다. 어쩌면 내가 지금의 애인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처럼 이성을 사랑했다면 나 같은 사람들을 이해 안 간다는 경멸 섞인 눈으로 바라봤을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 끊임없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선을 긋고. 나도 사실 그런 부분이 있어. 그렇지만 모난 부분들은 최대한 감추려고 노력하지. 왜냐면 내가 항상 모난 부분에 찔리는 사람이었어서 그게 얼마나 성가시고 아픈지 아니까. 

지금의 마음을 갖고 학창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버텨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내 기억 속 학창시절은 너무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으니까. 차라리 구타였으면 상처 난 몸을 증거 삼아 보상금이라도 뜯어냈을 텐데(아니, 근데 그랬어도 부모님이나 학교 측에서 조용히 묻지 않았을까?)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작은 생채기를 자꾸, 은근히 내니까 증거도 없고 나만 예민한 사람이 된 기분에 힘들었어. 그땐 지금만큼 학폭위나 이런 것들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고(사실 있으나 마나 라는 생각이 요즘 뉴스를 보면 문득문득 들지만 이건 제쳐두자고) 신경도 잘 안 썼을 때니까 더욱. 선생들이 훈육이란 목적으로 애들을 샌드백처럼 쓰던 때였는데 뭐.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언니한테 하고 싶은 말은 속 시원히 다 한 것 같은데. 아, 그런데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해서 언니를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야. 이해와 용서는 엄연히 다른 말인데 사람들은 그걸 종종 혼동하더라. 언니는 내 학창 시절에 구름을 드리운 많은 이들 중 한 명이고- 굳이 더 말을 하진 않을게. 서른쯤 먹으면 진짜 어른이 되는 걸까, 뭐가 달라지긴 할까,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내가 그 서른이 되었네. 서른이 되니 변한 것도 많고 변하지 않은 것도 많아. 이를테면 치킨보다 청국장이 더 맛있고 화려한 옷보단 수수한 옷이 더 좋고. 난 아직 포켓몬 만화가 너무 재밌고 상사한테 모진 소리 들으면 그날 기분은 종일 안 좋지만, 그래서 아직 진정한 어른이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나는 동성애자이며 내 이름은 다경이라는거야.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거고.

 

서른의 다경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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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기

*정끝별-회복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소설로 개작 해보았습니다. 동아리 시간에 '시를 소설로 바꾸기' 활동을 하며 써뒀던 글인데, 수정해서 올립니다 :)회복기-정끝별 아침 햇살이 슈거파우더처럼 내려앉은 이월의 소파에서 그루밍하다 사르르 잠이 든 고양이 조금 전에 나는 저 소파에 기대앉아 신열에 젖은 속옷을 식히며 남산타워 뒤로 떠오르는 해를 맞았어열이 내렸을까 겨드랑이로 파고든 고양이가 가르릉가르릉 불러주는 골골송을 선잠인 듯 듣다 일어나 고양이 물을 갈아주고 화장실을 치우고 밥을 주고는수란을 띄운 말간 순두부를 끓여 늦은 아침을 먹는 내내 계란을 좋아하는 고양이가 무심한 척 내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조그만 심장이 어찌나 쿵쿵거리던지설거지를 하고 다시 식탁에 앉아 연한 커피를 마시면서 슈거파우더 뭉치가 된 소파의 고양이를 보고 있어 이제 봄이겠구나어느 봄 햇살에 나도 녹아들겠구나 봄이 다디단 이유일거야. -회복기 소파에 기대앉아 바라보는 창밖은 공연 시작 전 작은 조명 몇 개만을 켜놓은 무대처럼 어둡기만 하다. 지혜는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을 멍하니 응시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작게 열어둔 창문 틈으로 들어온 서늘하고 깨끗한 겨울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불면증이 심해 잠에 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고 겨우 잠에 들어도 수면의 질이 나빠 중간에 자주 깨 뒤척이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사흘 내내 야근을 해가며 일을 쳐낸 탓인지, 아니면 최근 오래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해 왔던 데다 절연한지 오래인 부모가 어떻게 알고는 전화번호를 알아내 돈을 내놓으라 행패 부렸던 일 때문인지. 지혜는 분명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몰려 있었다. 몸살 기운이 있더니 어제 점심 무렵부터는 아예 오한 때문에 몸이 저절로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몸 상태가 너무 나빠 해열제를 먹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뉘었다. 근육 하나하나가 저리고 뻐근한 느낌인 데다 잠마저 오지 않아 한참을 끙끙거리며 앓다 잠에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지혜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밤새 식은땀을 흘려 온몸과 이불이 축축했지만 오랜만에 깊이 잔 덕인지 몸만은 한결 가뿐했다. 이불 빨래나 샤워 같은 현실적인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지혜는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거실의 소파로 향해 몸을 기대고 앉았다. 다만 일출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스물일곱 생애 단 한 번도, 지혜는 편안한 마음으로 일출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2023년 12월 31일의 해나 2024년 1월 1일의 해는 다를 바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 해돋이를 보러 가족이나 연인과 정동진이나 호미곶까지 가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나 이것은 지혜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혜는 고등학교 학창 시절 전체를 좋은 대학 취업 잘 되는 과에 가기 위해 모두 바쳤고,

  • 사즈
  • 2024-06-17
소리

그 일은 아주 우연히, 아주 우연히 일어났다. 아주 우연히 일어났고 아무도 의도치 않은 일이니 어쩌면 실수에 더 가까울 일이었다. (거짓?)   우린 너무 어렸다. 열여섯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가 아니었다. 우리에겐 해야 할 공부가 있었고 꾸려가야 할 미래가 있었다. 그 미래에 출산은 단 한번도 고려해보지 않은 사항이었다.  (확실한 진실)   -   열여섯 생일날 서로의 몸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졌던 것은 결코 서로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현지유는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으려 애썼다. 초콜릿 케이크 때문에 약간은 달착지근했던 세 번째 키스와 조금은 야릇했던 좁은 방의 분위기도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어쩌면 의도된 것일지도 몰랐다. 지유는 '남자친구가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준성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구절절 더 많은 얘기를 덧붙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둘은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버려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지유는 남자친구와 조금 더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을 원했다. 우린 발에 채이는 보통의 중학생 커플과는 다르다고. 단지 그런 생각 때문에, 그리고 달아오른 이 분위기를 깼다가는 어색한 그 후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심결에 저지른 일이었다. 지유네 반 담당 도덕 선생은 청소년 관계가 문란한 학생만 하는 것이며, 그, 조그만 쾌감 하나 느끼려다 미성년 부모라는 딱지가 붙는다고 했다. 현지유는 조그만을 아주 힘주어 말하던 도덕 선생의 눈동자를 좇으며 자신이 저저번주 저지른 일에 대해 생각했더랬다. 그녀는 청소년 낙태가 무책임한 행동에서 비롯된 무책임한 결과라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무책임했던가? 인터넷에서 피임법을 보고 실천했고 (그 피임법이 실패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건 현지유와 김준성 둘 다 몰랐다. 관련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계 후 한 달째 되던 날, 임신 테스트기까지 사용했다. 이정도면 적어도 무책임하게 행동한 건 아니라고 믿었는데.   이 길다란 흰색 막대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두 줄짜리 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책임한 행동의 무책임한 결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지유는 그 날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할 터였다. 퀴퀴했던 화장실의 공기와 온갖 오물과 뭉쳐져 버려져 있던 휴지뭉치들, 쉬는시간이라 웅성이는 말소리가 복도를 타고 화장실까지 닿았던 것과 낙서로 뒤덮인 학원 화장실에서 하얀 막대를 응시하던 자신의 손 따위를.  그때 지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고스란히 기억할 것이었다.   -   "나 임신 했어. 네 아이야." 지유는 준성에게 희미한 두 줄이 뜬 임신테스트기 사진을 내밀어 보였다. 핸드폰을 받아들고 준성은 할 말을 잃었다.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고? 언제? 왜? 의식의 흐름은 현지유의 생일날로 김준성을 이끌었다. 준성은 곧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어정쩡하게 끄덕였다.

  • 사즈
  • 2021-02-25
2020 ver.2

김아윤과 이아윤은 대학교 일 학년 때 처음 만났다. 민지나 지영 같은, 결코 흔한 이름이 아님에도 둘은 이름이 같았다. 그래서 더욱 신기해했다.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몇 번 학식을 같이 먹고 대화를 나누다 아윤들은 서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김아윤이 재수를 해 이아윤 보다 한 살이 많았지만, 김아윤이 만난 자리에서 말 놓는 것을 허락한데다 김아윤이 반년 정도밖에 일찍 태어나지 않았기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졸업식 날까지 딱 붙어 다니던 아윤들은 아예 대학 졸업 후에는 같이 학원을 차렸다. 대출을 좀 많이 받긴 했지만, 한 달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은 달이 일 년에 절반 이상이었지만 행복했다. 몇몇 부모들이 항의 전화를 걸어와 두통약을 삼키는 날이 늘었지만, 서로가 있어서 행복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 같다. 아침 일곱 시 기상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핸드폰으로 뉴스 보기인 김아윤이 핸드폰 화면을 이아윤에게 들이밀었을 때만 해도   -중국에서 그런 적이 한두 번이니?   하고 고작 그거 보여주려 깨운 거냐며 짜증을 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신종 바이러스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속보란을 뒤덮어 버리더니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첫 감염자가 나왔다.    -중국인이네. 한국에서 감염은 없나 보다.   그렇게 말하며 온갖 맛집과 전시회를 순회하는 이아윤의 팔을 붙든 것은 김아윤이었다.   -제발 돌아다니지 좀 마. 학원 끝나면 그냥 집에 있어.. 곧 있으면 국내에서 환자들이 속출할 거야. 메르스 겪고도 그런 말이 나와 넌?   -뭐 어때. 그냥 심한 감기처럼 잠깐 앓고 지나가는 거겠지. 나 얼마나 건강한지 알면서.   이아윤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아윤은 초등학생 때 이후로 한 번도 감기를 앓은 적이 없었고, 그 흔한 염증 하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등산 모임에 참석하는 데다 꾸준히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다 오는 게 이아윤이었다.    그렇지만 김아윤은 뭔가 불안했다. 약간 촉이 그랬다. 김아윤은 그날 꼭 에버랜드에 가야겠다고 뻗대는 이아윤을 막아섰다.    이아윤은 태평하게 누워 '중국 음식이 먹고 싶었다'고 말한 첫 번째 환자를 욕했다. '코로나'는 자살 폭탄 테러나 아파트 화재처럼 나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보여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태평하게 누워 얘기할 수 있는 거겠지. 김아윤은 생각했다.   -아니 남의 나라에 병 옮겨 와 놓고 고향 음식? 지랄하네. 의료진들 고생하는 거 알면서 저러는 거야 뭐야?   옆에서 과도로 감을 깎던 김아윤은 이아윤의 허벅지를 때렸다.    -너는 애가 어쩜 그리 공감 능력이란 게 없니? 너도 고작 일주일 미국 갔다 온 거면서 김치가 먹고 싶었다, 라면이 그리웠다 별 지랄을 떨었으면서.   -아니, 이거랑 그거는 다르지.. &n

  • 사즈
  • 202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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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윤서호님 안녕하세요. 어제 차별금지법 제정 청원이 10만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읽고 이 글을 읽으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다만 소설적으로 아쉬운 점에 대해 언급하자면 인물들의 등장이 모두 갑작스럽다는 것입니다. 인물이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언니-나-애인의 구도에 집중하거나 언니-나-학창시절의 구도로 변경하는 것은 어떨까 싶어요. 그럼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1-06-16 07:08:04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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