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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나서며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3-08-20
  • 조회수 644

교복 상단에 달린 무거운 쇠단추가 성대를 짓눌렀다. 단추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셔츠 사이사이를 위태롭게 맺어놓았다. 교복의 카라는 올가미 마냥 목을 조았다.

 보라는 숨을 헐떡였다. 목젖은 찬바람을 쉬이 넘기지 못했다. 숨을 쉬자고 교복을 헤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첫째. 교내의 학생이라면 치마길이 30cm 이상, 와이셔츠에 손목 블라우스를 올리지 않으며 단정한 차림을 가질 것. 

학칙은 교복으로 시작되었다. 등교 첫날 조회시간 대머리 교장은 '차림이 정돈되어야 타인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며 모든 학칙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한 적 있었다. 

모든 학생들은 그것을 지켜야만 했다. 과연 누가 그런 의도의 학칙을 싫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열일곱째. 교내의 학생이라면 밤 열 시 이상까지 외부를 돌아다니 않을 것. 

열여덟째. 교내의 학생이라면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할 것. 

열아홉째. 교내의 학생이라면 화장실에서 용변을 10분 이상 보지 않을 것. 

학교에는 이 외 마흔 개가 넘는 학칙들이 있었다. 세화여고의 입구 초입 학생 게시판에서 너무나도 긴 나머지 바닥까지 닿은 학칙 대자보를 보라가 끝까지 읽었을 때 

그것들이 존중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애석하게 알려고 하지 않았다. 첫 문구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찔려대는 것 같았으므로. 대자보에 붙은 모든 문구들은

  '교내의 학생이라면' 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꼭 학교가 학생보다 더 우위의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외에서 그것을 상기하자면 알 수 없는 모멸감이 심장뿌리 이어진 핏줄을 움켜먹었다. 자유를 향한 보라의 피가 꿀럭거렸다.

***

처음에는 학생들도 ' 아홉째. 교내 학생이라면 개인급수 이 외의 교외 음식을 반입하지 않을 것' 이라는 문구를 마주하고서도 입안 가득 넣은 말랑카우 마냥 정신이 말랑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에 상호존중이라는 학칙의 목적에 어긋나는 규칙이었거니 그 나이대면 규칙 좀 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입에 있던 보드랍고 흰 말랑카우가 선도부 선생님의 고무장갑이 씌워진 손으로부터 강냉이 털리듯 우수수 쏟아져 나올 때에 눈물 대신 흘러내리던 침액을 기억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움직일 때 자신을 껴안은 채 함께 딸려오던 그의 형광조끼의 광을 잊을 수 없었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학생들은 교문 앞에 들어서서 학생 게시판과 그 대자보를 볼 때면 무슨 헌법을 보듯 경건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보라는 달랐다. 

학칙이 자신들을 몽둥이질 할 것 같아 그 앞을 기어 다니다시피 하는 학생들과는 달랐다. 보라가 대자보를 볼 때면 불쾌한 감정이 눈 속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쉬는 시간에 화장실 변기통 위에 올라 단추를 풀고 숨을 여러 번 내쉬고는 하였다. 수업시간에는 머릿속으로 욕설을 되뇌었다. 보라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

보라가 처음 학칙에 걸린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첫 번째 학칙 중 치마길이가 30cm가 넘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선도부에서는 강제로 연행하다시피 보라를 끌고 갔다. 끌려가던 보라의 발은 허공에 떴다. 

눈금마저 매섭게 뻗어 난 30cm 플라스틱 투명 대자는 허벅지살과 맞닿았다. 찬 바람 기운이 묻은 자의 모서리 부분이 보라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그만 움찔하며 허벅지를 경련하듯 떨었다. 

참아 

작게 쭈그려 앉은 채 형광 조끼를 어깨에 걸친 선도부 선생님이 무심히 말했다. 보라는 입술을 찢을 듯 깨물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손목에는 핏줄이 들어섰다. 다리의 떨림이 조금은 멈추는 듯했다.

 선생님은 치맛자락에 자를 대고서 길이 재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허벅지에는 자의 모서리가 예고 없이 닿았다. 떨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머릿속으로 욕을 되뇌었다. 

그러나 대자는 피부를 파고드는 통에 그 마저도 꿰뚫고 있듯이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보라는 1mm도 나아가지 않을 만큼 한탄의 신음을 내었다. 

선생님.... 저 그냥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하아... 나도 그러고 싶어, 선생님도 그냥 보내주고 싶은데 학칙에 어긋나는 걸 어떡하니? 보라 너 초등학생이야? 생각이 있으면 사람을 이해해 줘야 하는 거야 

보라는 선생님이 자신의 옆 난 시멘트 벽과 대화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움켜쥔 손아귀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심장. 피가 끌럭였다. 순간 보라는 선생님의 손아귀에 쥐어진 플라스틱 투명 대자를 낚아챘다. 

뭐 하는 거야, 김보라...? 

선생님의 어깨에 걸쳐진 형광 조끼가 세차게 반짝거렸다. 희게 빛나는 빛에 보라는 쉬이 눈을 뜰 수 없었다. 보라는 움찔하며 몸을 쭈그려 누웠다. 벌린 입에서 침만 찔끔씩 흘렀다.

***

보라는 그날 이후 복도에서 자신을 보며 씩 웃어 보이는 선도부 선생님을 보면 굳이 그를 붙잡고 원래 학교 교복이 28.9cm였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교복의 길이 따위가 아니라 학칙에 어긋나는가였다. 보라 또한 교복의 치맛길이를 그리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었던 것은 초등학생이냐고 묻는 선생님의 말이었다. 

네가 초등학생이야? 

왜 초등학생이면 안 되나요 

형광조끼를 보면 늘 어금니에 껴 있는 음식 찌꺼기 마냥 입 속에 머금게 되는 질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상 고등학교는 초등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화를 다니는 친구들의 절반은 같은 중학교를 나왔고 또 그 절반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그들은 초등학교를 포함한 10년 동안을 같은 교육과정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서로의 머릿속에 든 것은 같았다. 다른 것은 오직 학교 속에서 닳아 해진 하얀 슬리퍼의 개수뿐이었다. 

학교의 구조 또한 같았다. 1층에는 저학년, 2층에는 중학년, 3층에는 고학년. 3개의 층과 꺾은 계단. 학년이 높으면 높아질수록 올라야 하는 계단의 수도 많아졌다. 대학생이 되면 더 많은 계단을 올라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회사원이 되면 그 체력들을 가지고 건물이라는 굴레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초등학교 때부터 계단을 오르도록 하였던 것은 모두 사회를 위한 사육의 연장이었을지도 몰랐다. 사육당하는 동물 마냥 계단을 네 발로 걸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은 땅을 짚은 자신의 손을 보지 못하였다. 자신의 두 팔 마저 연필과 샤프를 드는 것에 쓰여진 까닭이다. 보라의 피만이 그 속에서 무언가의 답답함에 열심히 흘러 다녔다. 검고 타오르는 피.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보라는 그 피를 지녔을까.

***

세화여고 앞에는 50년 명문 반포고등학교가 마주하고 있었다. 서로 마주한 초례청에서 우직한 두 학교건물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햇볕에 가려진 창가에 예선이 올라앉았다. 

창 너머로는 자 눈금보다 작아 보이는 곳에서 운동장에서 뻥튀기 굽는 소리로 축구공을 튀겨대는 남고생들이 보였다. 

보라야, 넌 반포고 애들 어떤 것 같아? 

보라는 머릿속에서 반포고 남고생들을 그려 보았다. 쉽사리 그 아이들이 그려지지 않았다. 민서는 청소 도구함에 등을 기대었다. 

어제 봤는데 땀범벅에 웃통 까고 음수대에서 침 흘리듯 물을 질질 흘려대며 마시더라. 남자애들이라고 학칙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뭐 

그제야 공책을 끄적이던 보라도 남자애들이 떠올랐다 

빡빡머리에 페로몬을 뿜어대며 숨을 헐떡인 채 침이 새는 누렁니를 드러내며 웃는 학생. 옷차림도 후줄근해서 파리가 꼬이는 학생. 

남자들이야 원래 여자 보다 땀 흘리기를 좋아하는 부류이니깐. 어두울수록 혐오감을 조성하는 교복을 입은 녀석들. 그들은 차림이 단정치 못해도 뻔뻔히 학교를 다닌다. 남고에는 학칙이 없을까. 

아니다. 모두가 용인하는 거야. 저 멀리 뙤약볕에 타오르는 남고의 운동장이 더 빛을 발했다. 예선과 민서의 힘없는 고개가 그곳을 향했다. 가슴에 얹혀있던 먹한 것이 코로 나와 보라를 감싸었다.

***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는 무수히 많은 조명등이 여드름 마냥 천장에 꽂혔다. 사람들은 한산했고 책들은 책장 벽에 빽빽히 굳어있었다. 처음 보라는 방학 동안 필독서를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선생님을 대수치 않게 여겼다. 

방학 동안에도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학교가 싫었다. 그러나 필독서를 사고서도 너무나 읽을 것이 많아 골치가 쑤셔온다며 머리를 싸맨 채 독서하기를 밀어대는 친구들이 더 아니 꼬아왔다. 

보라는 겨드랑이 사이로 벽돌만한 두 권의 필독서를 끼어조였다. 멋진 신세계와 동물농장. 어릴 적 몇 번 읽어 본 기억들이 있었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읽기 위해 챙겨갔었다는 것. 

그마저도 책을 읽기 전부터 잊을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계산대 앞에서 두 책을 계산하고 있는데 옆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보라 자신과 또래처럼 보이는 생김의 남학생이 우물쭈물하며 뒷주머니에서 이제는 보기 힘든 1원짜리 동전들 여러 개와 천 원 치폐 다섯 장, 만 원 한 장, 그 외 여러 동전 자락을 훔쳐보았다. 

남학생의 계산대 위에는 두 권의 책이 있었다. 몸을 조금 기울여 자판기 새로 옮기자 책의 표지가 드러났다. 멋진 신세계와 동물농장. 계산대에 서 있던 여직원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골치를 꾹꾹 짓눌렀다. 

보라는 그녀의 한숨이 책을 향한 것인지 남학생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학생이 남은 동전 서너 개를 주머니로 도로 넣었다. 닦인 누런 동전 하나가 주머니에 걸쳐있다가는 떨어졌다. 보라의 발로 요란하게 굴렀다. 남학생이 흠칫하며 급히 몸을 쭈그리고 동전을 줍고 사과를 하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라의 눈이 흔들렸다.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남학생이었다. 

보라니?

***

성찬과 보라가 서로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초등학교 졸업식 때였다. 겨울 눈이 내리던 날 학교 운동장에서 학교를 빠져나가던 아이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던 성찬의 눈에는 녹은 진눈이 영롱히 베어있었다. LED 전등은 수풀사이에 묻혀 알록달록 빛났다. 그만큼 아이들 또한 서로의 색색들이 빛을 감싸돌았다. 평소 낡은 것을 좋아하던 성찬은 마지막 등교이자 하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허름한 옷과 목도리를 두른 채 쓸쓸히 아이들을 보았다. 서울 시청 인근에 자리한 학교에는 그날 따라 더 눈이 부었다. 성찬은 전교회장이었다. 눈이 학교에 닿는 만큼 성찬도 눈에 깔렸다. 그러나 그날을 끝으로 더 이상 성찬이 학교와 같은 눈을 맞고, 같은 무게의 눈을 맞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인연인지 운명인지는 모르겠으나 보라는 6년 연속 성찬과 같은 반이었다. 보라는 친구관계에 손속을 두는 편은 아니었지만 성찬에게 다가가 작은 포옹을 나누었다. 그 몸이 작았다. 심장이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보라뿐 아니라 모든 학생들도 공허한 입김만이 입가에 돌았으리라. 어느새 모두가 서로의 살결을 마주하고 포옹하여 겨울의 찬 기운을 가슴 깊이 가라앉혀가고 있었다. 그건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눈송이었다. 순수함이었다. 이별이 처음이 다시 피했던 친구들은 6년이란 시간을 울음로서는 도저히 무마할 수 없는 까닭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보라는 어쩌지도 못하고 몇 시간 동안 교문 앞을 떠나지 않던 자신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큰 추위와 자신을 짓누른 눈에 노을이 질 때즈음 붉은 눈길로 자신의 발자국을 새로이 옮겼다. 그 순간에도 그저 모두가 떠난 남색 철제문을 바라보던 성찬을 기억했다. 자신이 떠나고 학생들이 점차 사라져 어느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까지도 성찬은 학교에 남아있었을까.

나 그날 이후로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했어 

교보문고 옆 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난 성찬의 첫말은 의외였다. 사실 말뿐 아니라 모든 것이 의외이지 않았나. 죽을 때까지 허름하고 칙칙한 옷들만 입고 남루히 살아갈 것 같던 성찬은 

단정한 옷차림과 젤이라도 묻힌 것처럼 한 껏 들어 올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니. 

보라야, 나 많이 바꼈어? 

엉 

보라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뱉었다. 다시 되뇌어 보니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낡은 지폐와 돈들은 옛과 다르지 않은 성찬이 다운 일이었다. 

성찬은 졸업식이 끝난 밤, 알 수 없는 마음에 정동길을 산책했다고 하였다.

추운 밤이었는데도, 귀가 붉게 시려 올랐는데도, 입으로는 찬 바람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는데도, 노란 조명등 아래를 걷는 건 너무 필연적인 일이었다구. 이후 난 정동길을 빠져나와 시청 앞에 다다랐을 때, 그 색이 밝게 빛나던 시청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았어. 순간 드는 생각은 없었구, 그냥 아... 이게 이렇게 예쁜 거구나 싶었지. 그래서 난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했어. 그 이후로 얼마 안돼서 성경을 사읽었는데, 나름대로 재미있더라고. 그중에서도 창세기라고 아니? 아담과 하와라는 최초의 인간들은 원래 에덴이라는 동산에서 살았는데, 선악과라는 과일을 먹지 말라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겨서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야.  이 후 아담은 그 육신과 영혼이 불리되어 영원히 고통받았고 하와와는 갈라서야 했지.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담과 하와가 싫었거든. 그 둘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결국 인간이 죽음을 겪게 된 거잖아.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우리까지도 왜 책임이 있어야 하느냐고. 모든 게 다 아담과 하와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건 말이야, 내가 이후 중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쳐서 다시 읽어보니 아담과 하와가 불쌍해 보이는 거야. 아담과 하와도 사람인데, 궁금할 수도 있는거고 애초에 일부러 따먹은 게 아니잖아. 뱀 때문이었잖아. 사탄이 뱀으로 변신해서 일부로 그들을 속였던 거잖아. 왜 모든 것을 순수히 받아들인 아담과 하와가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 신은 제약을 만들었어. 아담과 하와를 만든 창조자면서 왜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지? 인간의 죽음은, 아담과 하와 때문이 아니라 사탄과 신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 둘이 결국 진짜 나빴던 거야. 인간을 길들이려 들었지. 그래서 나는 신을 믿지 않아. 오히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을 믿어. 사탄을 의심치 않고 순수하게 모두를 믿었던 사람을 믿어. 사람을 용서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신을 용서했던 사람을 존경해.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선조를 기억하는 사람을 사랑해. 나는 사람들을 보려고 교회로 나가.

성찬의 말이 끝나고서 보라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성찬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다시 물었다. 

학교는 어때? 

보라는 그제서야 제대로 입에서 소리를 끄집어 내었다. 

나야 뭐, 잘 사는데... 학교가 가장 문제지. 교복 입느라고 불편했던 적이 두어번이 아니어야지. 초등학교 때에는 그런 거 없었잖아. 교복 같은 거. 나는 처음 교복 같은 거 입으면 멋지고 근사해 보일 줄 알았는데 

그것도 그 나름대로 고충이 있더라고. 숨 막히고 답답하고 어쩔 때는 코르셋 보다 더 조여올 때도 있고. 학교 속에서 바빠 사니깐 차츰 익숙해지더라. 너는? 

나도 같아. 사실 난 이제 내가 누구였는지도 모르겠어. 옛날에는 확실히 무언가 굉장히 특별했었던 것 같았는데... 

보라가 미간을 좁혔다. 꾸릿한 모멸감이 올랐다. 

근데 성찬아, 너는 남고니깐 얼마든지 뛰어놀고,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며, 더우면 나름대로 상의도 벗지 않니? 

성찬이 한숨을 내쉬더니 보라를 바라보았다. 

보라야. 나 뛰어다는 거 싫어해. 근데 남학생들은 다 그런다고 하더라. 그것뿐 아니야. 체육시간이 끝나면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어. 운동장에서는 상의를 벗고 놀기도 하지만, 교내에서는 땀범벅이 된 덕지덕지한 몸으로 와이셔츠를 들러 입고 불편하게 수업을 듣는다고. 게다가 두발 자유화라고 아니? 예전에는 모두가 빡빡머리를 하고 다녔다는데, 지금도 머리만 길러도 된다 뿐이지 염색도, 탈색도, 장발도 할 수 없어. 난 단조로운 옷이 좋았어도 정갈한 교복을 입어야 한다고. 솔직히 말해서 예전과 달라진 게 뭐니? 

보라가 핏줄이 세웠다. 성찬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뭐가 달라졌고, 너는 뭐가 달라졌을까? 

한동안 말이 없던 보라는 입술을 다물고서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달라진 거 없어. 달라진 건 학교야, 학교라구. 

성찬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너는 내가 단정하다고 생각하니?

구김 없는 정장바지와 구두, 학교 명패가 달린 깨끗한 교복. 성찬은 누가 보아도 모범생이라고 할 수 있는 차림이었다. 보라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찬이 말했다. 

나는 이 옷을 입으며 단 한 번도 편안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지금도 무릎을 조여 달라붙는 바지와 뱀 마냥 허리를 꼬아 조르는 벨트가 나를 압사시켜 와. 

성찬의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보라 저도 성찬으로부터 하얗게 굳어 있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보라가 결심한 듯 목으로 손을 올렸다.

보라의 손가락이 와이셔츠의 카라로 닿았다. 단추를 구멍으로 빼내었다. 단추가 하나 풀렸다. 성대 아래로 포도 마냥 주렁주렁 달려있던 추 하나가 빠진 느낌. 목이 트이고 숨이 원활했다. 

바람 공기란 이런 것이었구나. 성찬도 따라 단추 하나 풀었다. 보라는 그 아래 단추로 손을 내렸다. 단추를 풀었다. 바람이 쇄골로 들었다. 그다음 오는 단추마저 풀자 가슴이 차가워졌다.

 수근 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벅찬 감정이 보라를 휘감쌌다. 성찬이 어느 밤 정동길을 걸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성찬을 마주 보자 그는 졸업식 때와 다르지 않는 눈으로 저를 보았다. 

영롱히 빛나었다. 그들은 상의를 벗어 나갔단 손톱만한 차이. 그 차이 하나에 피부와 견직물이 있다. 

벗으면 벗을수록 사람들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신경쓰지 않았다. 저들 모두 다섯 손가락이 있고 두 눈이 있다. 사람인 까닭에 피부의 생김이 같다. 보라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이후 하의까지 완전히 벗어버렸다.  성찬도 그랬다.

춥기만 한 것이 몸은 없고 혼만 남은 듯하다. 

아, 맨 몸이란 이런 거구나. 몸이 없는 것. 맨 몸이구나. 

성찬은 다 벗은 채로 보라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의 살덩이가 챱챱 흔들렸다. 어째 보기에 거부감이 없다. 성찬이 손을 내밀었다. 벗기 전 만 해도 뜨겁게 타오르던 보라의 심장이 춥게 시려왔다. 

라는 그 어느 때보다 청렴한 마음이자 차림으로 성찬의 손을 잡았다. 그 어느 겨울 헤어짐의 감정. 그 둘은 카페문을 천천히 열어젖혔다. 천국문을 여는 심정으로. 보라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가보실까요, 아담? 

성찬도 맞장구치며 말했다. 

이제 가는 겁니다, 하와!

***

보라는 성찬과 벗은 채로 서울을 시내를 활보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 그 순간, 보라는 성찬과 자신만을 위해 걸었다. 여름 치고는 무덥지 않다. 시원한 느낌에 몸이 살랑살랑 날려간다. 

한 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보라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발바닥으로는 시멘트의 매끈함과 돌가루 부식이 밟혀 왔다. 올퉁불퉁한 차도를 걸을 때면 따가웠다. 그러나 따갑지 않음을 느꼈다. 

살이 내리쬐는 햇살에 타올랐다. 마음속에서는 찬 눈이 휘몰아쳤다. 성찬도 마찬가지였으리. 그들이 교보문고를 지나 광화문 광장에 나란히 했을 때, 저만치에서는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성찬이 그 모습을 심심찮게 바라보다가 외쳤다. 

하와, 저기 사탄이 옵니다! 

어딜 보아 사탄이지요? 저건 하느님이잖아요, 아담! 

보라는 성찬을 나무라했다. 성찬이 머쓱하게 말했다. 

하와,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주신 저 하느님께 가봅시다. 감사인사라도 드려야지요, 하하하! 

둘은 벗은 몸으로 신호등을 건넜다. 빨간불이었고,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었지만 전부 브레이크를 밟은 채였다. 

경찰이 더욱 가까이 보였다. 저 멀리서 휘청휘청 달려오는 경찰. 그가 입고 있는 형광조끼가 뙤약볕에 그을려 더욱이 활기차게 반짝거렸다. 

광이 너무나도 났던 나머지 눈을 찡그렸다. 눈을 다시 뜬 보라의 눈동자가 작아졌다. 경찰의 형광조끼가 다르게 보인다. 보라가 외쳤다.

아담! 사탄이에요! 우리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사탄이 쫓아오고 있어요! 

성찬은 급히 보라의 손을 쥐어 잡고 옆 골목으로 뛰었다. 그러나 또 다른 경찰이 그 골목으로부터 달려왔다. 보라와 성찬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고, 그 옆 쪽으로 난 구석의 작은 계단을 올랐다. 작은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져있었다. 경찰 서너 명이 보라와 성찬을 쫓아 계단을 올랐다. 구불구불한 아스팔트 계단을 오를 때마다 맨 발에 상처가 들었다.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맨 몸으로 있을 때 개운하던 공기가 무거워지고 콧구멍이 벌렁벌렁 숨을 마셨다. 

성찬과 보라는 숨도 고르지 못하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피로 젖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면 뜯어진 살점과 튀어나온 발바닥 뼈들이 뾰족한 모서리 부분에 박혀 떼어지지 않았다.  피가 본드마냥 몸을 지상에 붙였다. 성찬이 눈이 풀렸다.

반면 경찰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오히려 거리를 좁혀가면서 계단을 올랐다. 단단한 구두굽이 계단과 딱딱 맞아떨어졌고 높지 않은 구두바닥은 성찬과 보라의 피로 묻었을 터였다. 

겨우 보라의 어깨에 의지한 채 계단을 오르는 성찬과는 딴 판이었다. 성찬의 뜨거운 숨소리가 닿았다. 

헉헉. 젠장, 이럴 거면 체육시간 때 운동이라도 좋아해볼걸 그랬어… 

보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담, 우리는 왜 항상 이렇게 되는 걸까요... 

성찬은 기운 없이 말했다. 

하와, 이제 날 버리시오. 나를 버려야 하와가 살게 되오.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부디 나를 놓으시게나. 

보라의 눈에는 시린 가슴에서 올라온 찬 겨울 녹은 눈이 내렸다. 

아담, 우리... 다음번에는 꼭, 서로 온전케 만나요 

성찬의 팔이 보라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성찬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더니 이내 피 묻은 계단을 하나하나 굴러 내렸다. 첫 계단에서는 목뼈가 꺾였고 다음 계단에서는 등뼈가, 그다음에는 갈비뼈가, 그리고는 다시 목뼈가 꺾였다. 

쫒아오던 경찰들에게로 굴러떨어졌을 떄 성찬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으깨진 피칠갑된 몸이 된지 오래였다.

나는 인간을 믿어요, 나는 인간을 믿습니다!

***

보라가 저 멀리 계단의 끝을 마주했을 때, 그 꼭대기에는 대여섯의 경찰들이 그녀를 마중 나와있었다. 보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또 다른 경찰들이 쫒아오르던 이들과 합류해서 계단을 올랐다. 

어쩌지도 못하고 있을 때 여러 남자들의 몸이 보라의 맨 살을 덮쳤다. 보라는 몸부림쳤고, 마찬가지로 형광조끼가 그녀의 몸을 따라 움직여왔다. 반짝였다. 

가슴 깊은 곳 아름답게 내리던 겨울날의 눈 속에서, 모멸감이 쾌쾌한 냄새와 쏟아 올랐다. 제압된 손목의 피가 심장으로부터 꿀럭거렸다. 이내 조명등 아래 빛나던 마음속 겨울에는 검은 피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린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피가 끓어올랐다. 보라가 울분을 내지르듯 외쳤다. 

으아악! 옷만 벗으면 다 같은 몸인데! 내가 뭘 그리 잘 못 했어!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내가 왜 쫓겨야 하는 건데! 왜! 왜!왜에엑! 

덩치 큰 경찰 하나가 보라를 후려쳤다. 보라는 정신을 잃고 신음소리와 함께 침만 질질 흘렸다. 침이 모든 액체를 내뿜 듯 흘렀다. 여전히 보라에게서는 신음소리가 흘렀다. 

나는 전부 사랑했어. 이해했어. 믿으려고 했어. 내가 벗고 있을 때에 나는 모두를 존중했다. 근데, 왜 나는 존중받을 수 없는 거야. 왜 존중받을 수 없는 거냐고!

그마저도 또 한 번 자신의 뺨으로 내려오던 경찰의 손아귀에 사그라져버렸다. 그들은 무릎으로 보라의 뒷 허벅지를 짓누르고 철쇠 수갑을 채웠다. 맨 속 살만 남은 보라는 피부를 뜯어내고 혈관으로서 살아가고 싶음을 느꼈다. 흐리멍텅한 눈으로는 방벽이 보였다. 정장과 치마, 운동복 여러 천들로 매듭이 지어진 저 허름한 방벽. 보라의 눈에는 너무나도 허약해 보아던 옷더미들이 어째 점점 그 몸 잡을 키워 다가왔다. 철보다도 우직하고, 단단한 철장이었다. 동물우리와도 같은 사육장. 그제야 보라는 그것들이 옷더미가 아니라 철장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와는 결코 저 옷더미를 헤집고 나갈 수 없었다.  보라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말았다. 경찰들의 제복에 붙은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살과 맞닿았다.

어째 올해는 겨울을 보기는 어렵겠구나. 이제 동복은 두었다 어디에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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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마지막 소설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든지 간에 끝난다는 건 씁쓸하다. 왕자와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통속적이고 관념적인 여느 이야기 마저 그렇다. 처음 글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꺠달은건, 황순원 작가님 덕분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를 보고 내 영혼이 젖어버림을 느꼈다. 이 후 씨의 작품을 열렬히 사모하게 되었다. '막은 내렸는데', '눈', '우산을 접으며' '땅울림'등등의 것들을 읽으며 나는 곧 소설이 사람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는 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멜라씨의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러했다. 와 , 와 을 읽을 떄, 그곳에서 내가 만난 것은 나의 어떠한 깊은 심장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은 김현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이다. 와 을 읽으며, 나도 이런 평론가의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소설로 방향을 튼 것은 아마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고나서 일 거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몰라도 나의 비평은 소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솔직히 하자면 태어나서 세계문학전집같은 걸 눈에 담아본 적 없다. 누군가 톨스토이와 카뮈와 카프카를 이야기 할 때,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그들의 무거운 글들을 잡아서 소화해낼 마음이 서지 않았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폴 드 만과 데리다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외국 작가였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어디 가서 부끄럽게도, 하고 있는 일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 싫어서, 억지로 토해내듯, 글 써요, 하는 말을 내뱉을 때, 난 수치심을 느꼈다.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면 주변에서 대치동 강남에서 학원받으며 과학고 간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고, 누군가는 한심하게 쳐다본다. 초등학교 떄 별볼일 없던 친구가 예고의 문예창작헉과에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너도 글 써? 나도 글 쓰는데...하고 말하면 듣는 말이, 좋아하는 작가 누구야? 카프카? 톨스토이? 글 보여주면 좋겠다...등의 것들이다. 난 사실 정지용과 황순원과 김멜라와 권여선을 사랑한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 곳에서 뽐내기 위해 아는 척 했다. 톨스토아보단 도스토예프스키지 않아? 사실 난 그 누구의 작품도 읽어본 적 없다. 이건 고해성사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말의 의중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알까? 마지막으로 쓴 글은, 작년 11월에 글틴에 기고한 다. 그건 내 전부다. 나는 그 글을 쓰며 나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알았고, 이 후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 후 알게 된 사실은, 결국 글이란 세상이란 거다. 문장이란 것을 조립, 배치하며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재미다. 근데 그 세상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결국 내 세상은 어떠한 욕망의 발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조립된 세상의 이면에는, 그 어떤 계기나 동력도 존재하지

  • 화자
  • 2024-03-21
가을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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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 2024-01-10
검은세상, 하얀 겨울

세연에게 가고 있다. 겨울이었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폭설로 인해 공사를 잠정중단하거나, 일당을 미지급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기에 하루에 붙들릴 일도 없다. 서울역 노숙자들은 눈 오는 날보다 따수운, 그러나 여전히 찬 겨울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다. 늘 막히는 한강대로도, 눈으로 인해 교통체증을 빚을 일이 없었고, 택시나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는 일도 없다. 눈을 녹이기 위해 도로에 뿌려질 염화칼슘이 세연에게 가기를 괴로워하는 나를 설득하듯,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믿서 오독오독 비명을 지르며 부숴질 일도 없었고, 그게 신경은 좀 쓰이겠지만, 나를 멈춰세울 일이 없었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또는 어느 벽 담장에 메달린, 산성비가 굳게 되어버린 고드름을 핥으려 안달난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눈은 우리를 막는 병폐로 존재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눈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을 괴롭히는, 비효율적인 자연재해인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교통체증으로 피해 볼 일이 없고, 노동을 할 일도 없으며, 노숙을 할 일은 더욱이 없었다. 누군가를 괴롭게 만나러 갈 일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여전히 추운 겨울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 만화영화를 보다가 힐끔, 창 밖을 확인하며 눈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찬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유리창 앞에 서서, 언젠가는 눈이 내릴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어른들은 출근하기 전 창 밖을 보며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교통체증으로 직장에 늦을지는 않을지, 날씨가 추워서 하루가 고되지는 않을지 걱정 하며,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지닌다. 나는 눈이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눈이 내리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을 사람은 나다. 나는 구질구질한 어른들의 세계에 살아서, 눈이 내리고 나버리면, 나를 가로막을 하얀 얼음,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도저히 세연에게 갈 수 없을거다. 세연은 눈이 내리길 바라고 있을테지. 그녀에게는 나를 만나는 것 보다 눈이 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할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적어도 하나를 알고있다. 이 세상은, 겨우 동심 하나로 어른들의 세상을 덮어 버리기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세연에게로 가고있다. 세연을 만난 건, 눈 내리지 않는 육년 전 겨울이었다. 당시 초임 영화 평론가였던 나는, 삼류 독립영화 감독들을 취재하기 바빴고, 광화문에서 한 신인 감독이 저예산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해서, 잡지사는 촬영지 근처 살고 있던 내게 신인감독 인터뷰를 맞겼다. 영화촬영장은 굉장히 지저분했고 스태프도 대여섯명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감독이라는 작자는 꽤 단아하고 청순한 여인이었는데, 어림잡아 이십대 중반, 나와 엇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안녕하세요, 신인감독 이세연입니다.그녀는,기운이 밝고 흔쾌해서 늘 깐깐하게 굴던 여타 중견감독보다 훨씬 좋았고, 질문에 답을 빙 돌려대서 말하는 어느 예술감독에 비해 시원시원한 답들과 기상천외한 담론들을 꺼내 들어서

  • 화자
  •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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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리

    자유와 존중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보라와 성찬은 아담과 하와가 되어 선악과를 먹은 거군요.. 그리고 그것을 비정상이라 여기는 세상을 뿌리치려 어디로든 도망치는 모습을 써낸 부분에서 정말로 깊게 몰입할 수 있었고 문장에 쓰인 표현들이 좋았습니다. 교복이라는 소재가 억압을 상징하고 있었고, 그것을 벗어던짐으로써 자유로워지는 두 사람이 낭만적으로 느껴졌어요. 어쩌면 누구나 꿈꾸는 세계의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미 인식이 굳게 박힌 현실에서는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점도 그랬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찾아오게 될 것 같아요. 정말 잘 읽었어요, 저의 정오를 멋진 글로 장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3-08-20 12:33:10
    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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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예리 저의 퇴고한 글을 읽고 나서 굉장히 미흡하다는 생각이 많았는데요, 비록 저의 손을 떠나 살을 붙일 수 없게 된 글이었고, '졸문이라지만 만에 하나라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독자에게는 굉장히 불친절한 글이겠다'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글을 넓게 사유해주시고, 또 뒤죽박죽이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일지라도 그것에 국한되지 않고 옳바르게 해석 또는 감상 해주셔서 존경과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사실 글쓰기에 대해 머뭇거린 적이 여럿있었는데, 예리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늘 저의 동기를 부여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같이 문학을 동경,또는 이해하려는 입장으로서 예리님의 다독과 건필을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3-08-23 11:13:18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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