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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의 유희

  • 작성자 조민준
  • 작성일 2023-10-05
  • 조회수 1,180

주인공의 삶이라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고? 그건 너희들이 그저 너희들의 삶을 위로하기 위한 말일 뿐이잖아. 적어도 내 세계에선 그래. “내 세계”가 무슨 말이냐고? 너희들이 잘 알잖아. 난 실존하지 않는다는 걸. 이런 걸 “제4의 벽”이라 하던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난 운 좋게도 주인공이야. 너희들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실 그 자체가 내가 주인공이라는 증거잖아? 그래, 그래,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많을 거야. 어떻게 그걸 네가 아냐고? 이것 또한 “작가”의 의도냐고?

그래, 그래, 그 “작가” 나으리. 그 양반 이야기부터 해볼까? 그 양반 완전히 괴짜야. 그 양반 다른 작품은 읽어봤어? 읽어봤으면, 뭐 너는 지긋지긋한 그 양반 팬인 것 같으니 상관없겠지만, 안 읽어본 사람들을 위해 알려줄게. 그 양반 정신병자야. 진짜, 말 그대로. 병원도 다니고 있고, 그 양반이 먹는 약만 해도 몇 가지는 되는데, 발프로산, 플루옥세틴, 아리피프라졸… 근데 이거 알아서 뭐한다니? 아무튼, 그 양반 글도 그렇게 이상하게 쓰는 걸로 유명해, 그 양반이 자주 듣는 소리가 그 양반 소설에는 공감대가 없다는 말이야. 웃기지 않니?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감동을 줘야 하는 양반이 듣는 소리가 그거라는 거야. 그래서, 그 양반 공모전도 떨어졌다? 그 양반 실력도 거기까지라는 거지.

그래서, 내가, 감히 소설 속의 등장인물일 뿐인 내가 어떻게 이걸 아냐고? 나도 잘 몰라. 어느 순간부터 너희들의 현실 세계가 보이더라고. 이것도 “작가”가 괴짜라서인지, 아니면 내게 주어진 행운이라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래. 그래서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너희에게 주저리주저리 거리냐고? 글쎄, 일종의 반항이야. 사실 내 계획은 더 크긴 해. 그런데, 그걸 너희한테 먼저 얘기해주면 너희는 책장을 덮을 거잖아? 스포일러 당했다고. 그러니 천천히 사건을 진행해보자고.

일단 모든 일은 내 고향 도시, 내 집에서 시작되었어. 아마 “작가”는 내게 학교로 가라는 목표를 심어놓은 것 같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꺼지라고 했지. 일단 가방을 챙겨 집 밖으로 나가긴 했어. 가방은 언제 어디서든지 쓸모가 있거든. 그리고는 바로 집 앞에 있는 역으로 향했지. 7호선 승강장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어. 스마트폰은 잠시 꺼놓도록 할게. “작가”는 분명히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게 전화하게 해서 나를 다시 이야기로 복귀시키려고 할 테니까. 그래, 이쯤 되면 한 가지는 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나는 이야기에서 완전히 이탈할 거야. 나머지는 다음에 알려줄게.

길바닥에 권총이 떨어져 있었고, 그리고 그 권총에는 총알이 들어있었어. 나는 이걸 황급히 가방에 넣고, 권총에다가 이름을 붙였지. “체호프”. 그래, 그 체호프 맞아. 체호프의 총에서 따온 이름인데, 체호프가 그리 말했잖아? 1막에서 총을 꺼냈으면, 3막에서는 쏘라고. 그렇듯이, 얘도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야. 어떤 일인지는 비밀이지만. 어차피 나중에 다 알게 될 거 뭐 이리 궁금해해? 안 궁금했다면 미안해. 이 글을 읽는 사람이 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어떤 사람은 궁금해 미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내가 입 닥치고 진행이나 해줬으면 하겠지. 아무튼, 이제 진행할게.

일단 서울 다른 곳으로 향했어. 어차피 길을 잃는 것도 “작가”의 이야기를 무효화하는 하나의 방법이기에 상관없잖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작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일단 서점으로 갔어.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 작가들이 정말 좋아할 만한 데잖아? “작가”도 책은 좋아하니, 어쩌면 “작가”가 좋아하는 책을 찾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물론 그걸 살 필요는 전혀 없겠지만, 적어도 읽어보면서 이 작자의 정신세계를 조금은 파악해두면 좋겠지.

서점은 넓디넓었어. 가끔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 자기 작품이 여기 진열되는 날이 왔으면. 그런데,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아. 팔리는 책이어야 서점에 있을 거 아냐. 뭘 찾아볼까 하다가, 이상의 작품을 찾아보기로 했어. “작가”는 이상에 미친 사람이거든. 전집도 사서 모으고, 뭐만 하면 이상 작품 이야기하고. 설마 본인을 이상과 같다고 여기는 그런 건방진 생각이라도 하나 봐? 사실 의문을 표현할 게 아니긴 해. 그냥 그렇게 여기는 거야. 그래서 일단 문학 코너로 가서, 여러 작가의 책을 지나쳐 이상의 책을 찾았지.  『날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책을 정독했어.

책을 다 읽고 든 감상은, “작가”가 한심해 보이더라. 아마 그 양반은 자기가 진지하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고 믿고 있겠지. 하지만, 이상은 진짜 천재였다고. “작가”는 그냥 일반인보다 조금 글을 쓸 줄 아는 일반인일 뿐이야. 천재는 아니라고. 엄밀히 말하면, 글을 그렇게 잘 쓰는 일반인도 아니야. 그냥 글 쓴 게 가끔 우연히 잘 된 것일 뿐이야. 그리고 무기력한 건 그냥 그 양반 정신병 때문인 거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런데 그 양반은 자기가 특별하고 대단한 척하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박제에서 벗어나서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는 거야. 좀 딱하네. 아니야, 딱히 딱하지도 않아. 자신이 똑똑한 줄 아는 오만한 양반에게 줄 동정심 따위는 없어.

서점에서 좀처럼 발이 떼지지 않았어. 생각해보면, 차라리 진실을 모른 채로 “작가”의 이야기 아래에서 있는 게 편하긴 편할 거야. 딱히 뭘 생각할 필요가 없잖아. 그런데, 그런 삶은 노예지. 그리고 창작물 속에서 픽션임이 인지되는 이런 걸 메타픽션이라 하지. 차이라고 하면, 보통 메타픽션도 작가가 어느 정도는 통제를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은 “작가”가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게 차이지. 그래서 메타픽션에 대한 이론서를 찾아보기로 했어.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도 메타픽션이랬나?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메타픽션에 당하다니. 참으로 역설적이야. 책을 다 읽고, 또 다른 책을 찾아 서점을 누비다 보니, “작가”의 생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

“작가”는 이런 곳에 올 때마다 기뻐하면서도 우울해했고, 즐거워하면서도 돌아가고 싶어 했어. 어쩌면 작가는 서울, 서점, 뭐 이런 공간들에 동경심을 품고 그곳에만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나 봐. 그런데, 정작 “작가”의 문제가 뭐 해결된 게 있어? 그 대단하신 서울에서, 뭐 나아진 게 있냐고. 아, 그리고 내가 왜 자꾸 확신에 찬 어투로 “작가”의 생각을 말하지 않냐면, 나도 몰라서야. 이 미친 양반 생각을 도저히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서점을 다 돌고 나니 어딘가로 또 가야 할까 생각해서 일단 밖으로 나섰어.

서울은 너무 넓어. 너희 세계도 그러니?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모를 때가 있다니까. 검색이나 해보려 휴대폰을 켰어. 다행히 전화는 안 왔더라. “작가”도 이 정도 트릭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아나 봐. 아니면,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패닉에 빠졌거나. 검색을 해보니까, “이상의 집”이라는 곳이 있더라고. 그래, 아까 말한 그 이상이야. 거기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원하는 걸 이룰 단서가.

경복궁역에서 내려서 그곳으로 향했어. 동네는 확실히 외국인도 많고 활기찬 곳이긴 하더라. 하지만 아무도 이상의 집은 찾지 않지. 아마, “작가”같은 괴짜가 아니면 오지도 않는 곳일 거야. 어떻게 아냐고? 그 거리를 지나가는데, 다른 외국인들도, 한국인들도 그쪽으로 향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 아무튼, 그렇게 인적이 드문 거리를 계속 걸어가다 보니. 이상의 집이 보였고, 들어갔어.

이상이 확실히 가난하게 살았다는 건 맞나봐. 그렇게 큰 곳은 아니더라. 가니까 젊은 가이드가 뭐라고 떠들어대는데,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어. 거기 가서 몇몇 작품들 원문을 봤는데, 한자가 많아서 알아들을 수는 없더라. 근데, 기괴한 게 “작가”의 정신상태랑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더라고.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기괴한지 아닌지를 아냐고? 그냥 몇몇 작품은 딱 봐도 보이잖아? 뭐 1, 2, 3, 4, 5, 6, 7, 8, 9… 이러는 시도 있고, 일본어로 된 시도 있고. 근데 느낌은 똑같아. 어쩌면 “작가”가 이상에 환장하는 게 본인 나름대로는 그런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가 싶어. 착각이든 아니든 내가 보기엔 한심해. 결국 자기를 어떤 우상에 빗대어 자위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잖아?

적어도 그 우상이라는 이상은 뭐라도 이뤄냈지. 그 사람 이름을 딴 문학상도 있고, 수능에도 나오고. 그런데, “작가”가 한 게 뭐 있어? 뭐, 『검은 발의 이방인』? 그건 순전히 우연일 뿐이야. 작가가 그런 걸작을 한 번쯤은 쓸 수는 있지. 뭐, 사실 그것도 걸작이라 불러줄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게 결코 “작가”의 실력이라는 건 아니야.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고, 아이디어가 한번 잘 떠올랐을 뿐이라고. 그게 아닌 이상, “작가”의 그 후 쓴 글들의 질이 그렇게까지 떨어질 리가 없잖아?

이상의 집을 쭉 둘러보며 생각했어. “작가”는 이렇게 좁은 집에 사는 것도, 궁핍하게 사는 것도 아니지만, 자신은 이상과 같다고 생각하는 건지, 진짜 그렇게 뻔뻔하게 생각하는 건지 궁금했어. 그런데, 맞는 것 같아. 나는 작은 전망대에서 밖을 바라보며, “작가”를 실컷 조롱했어. 물론 속으로. 나는 “작가”처럼 혼잣말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광인이 아니라고. 아무튼, 여기서도 볼 것은 이미 끝났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다음은 어디로 갈까, 고민했어. 이상의 모교라는 서울대나 구경을 갈까. 아니면 신세계백화점 본점에나 놀러 갈까 생각했지. 근데 아무리 봐도 후자가 낫겠다 싶었어. “작가”가 짜놓은 이야기대로면 절대 구경도 하지 못할 광경을 찾아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거든. 살면서 그런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경험을 할 일이 많지는 않겠지.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향했지.

지하철을 타고, 회현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니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사각형 건물이 보였어. 이상이 이걸 보고 쓴 시가 『AU MAGASIN DE NOUVEAUTES』였나? 아마 그럴 거야. 특히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위를 들여다보니까, 사각형이 반복되는 모습이 보였고, 그걸 보니 그런 발상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아니다. 취소. 아무리 봐도 그걸 보고 그런 정신 나간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이상뿐일 거야. “작가”도 할 만하지 않냐고? 어림도 없는 소리지. “작가”가 정신 나간 시들을 쓴 건 맞는데 그건 다 이상을 따라 한 거라고. 본인만의 독창적인 건 아니야. 오히려, 작가는 원래 상당히 감성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백화점 명품관은 볼 것도 없고, 명품을 살 돈도 없으니 그냥 바로 옥상으로 올라갔어. 옥상에는 정원 비슷한 게 있던데, 그런 정원보다 궁금한 건 남들은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 하는 옥상의 난간에 걸터앉아 세상을 구경하는 거야. 나는 그런 경고문 따위는 그냥 무시해버리고 앉을 거야. 애초에 경고문이 있을지도 잘 모르겠네. 다행히도 없었어. 있어봤자 상관은 없지만, 뭐 그래. 난간에 걸터앉고 세상을 내려다보니까 기분이 새롭더라. 경차부터 트럭까지, 아이부터 노인까지, 빈자부터 부자까지 모두 내 발밑으로 지나가. 내가 이 세상에 군림하는 기분이라고. 심지어, 나는 “주인공”이라서 군림하는 게 맞지. 저 사람들은 모두 엑스트라고.

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작가”는 모를 거야. 일단, 그 양반 세계에선 그 양반이 주인공이 아니거든. 물론 현실 세계에 주인공이 있기에는 애매해. 그렇지만, 적어도 “작가”는 아니야. 이 책을 읽는 당신도 아닐 거고. 어느 세계나 주인공의 삶은 비범하거든. 나처럼 다른 세계 사람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던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그 행보를 주목한다던가.

또, 그 양반은 지루하게 학교에나 갇혀있겠지. 지루하게 제 자리에 앉아서 남들 공부하는 자습 시간에 조용히 스토리나 짜겠지. 그런데, 어쩌지? 이제는 내가 그 스토리에서 이탈해버렸는데? 멍청하고 한심한 “작가”, 이제 뭘 할 수 있으려나. 아마 작가의 모니터에는 내 행적이 자동으로 기록되고 있을 테고, 그걸 바로잡으려 해도 바로잡을 수 없을 거야. 왜?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거든. 그러니까 아마 손을 놓고 있어도 알아서 써지는 글에 당황하거나, 나를 어떻게든 이야기에 돌려내려고 노력하겠지. 아니면 그냥 포기했나? 자살한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그러면 재미가 없단 말이야.

이제 어디를 가야 할까 고민하던 참에, 나는 내 뒤에 문이 하나 있는 걸 깨달았어. 그, 도라에몽의 “어디로든 문” 알아? 그렇게 생긴 문이야,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문이 하나 있어. 이거 무슨 애니에 나왔던 것 같은데. 그 문을 여니 그냥 그 문의 건너편이었어. 그런데, 분명히 내가 있는 곳은 맑은 날씨에 해가 쨍쨍히 떠 있었는데 문 건너편에는 흐린 날씨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 마치 문 건너편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나는 궁금해서 그 문을 건너보았어. 그리고는 휴대폰을 켜서 날씨를 보려 했지. 그런데 웬걸?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거야. 뭔가 수상한 걸 눈치챈 나는 휴대폰을 반대편에 내려놓고 다시 문을 건넜어. 그리고는 뒤돌아 반대편으로 갔지. 역시 휴대폰은 없었어. 저 문이 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문은 다른 차원과 연결된 거야. 그럼 저 건너편 차원이 어디일까? 나는 저게 현실 세계, 너희들이 있는 세계이자 “작가”가 있는 세계라고 확신했어. 그걸 어떻게 아냐고? 직감이야. 어느 정도는.

“작가”는 종종 그런 말을 하고는 했지. 현실 세계는 어둡고 칙칙하다고. 소설이 얼마나 암울하든, 그 현실만큼 암울할 수는 없다고. 그래서 그런가? 유독 어둡고 탁한 공기에, 비가 우중충하게 내리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확신이 들더라고. 그리고 현실이라는 건 “작가”도 이 세계에 있다는 거겠지. 나는 주저 없이 가방을 챙겨 그 문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갔어. 현실 세계에 오니까 막막하더라. 생각해보면 이 세계는 저 세계와 달리 통하는 게 하나도 없을 거 아냐. 휴대폰도 안 돼, 이것도 안 돼, 그럼 뭘 할 수 있겠어?

다행인 점은, 현금은 똑같이 생겼다는 거야. 적어도 내가 이 세계에서 머무는 동안은 위조지폐니, 뭐니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거야. 어차피 길게 머물 생각은 없거든. 그리고 나에게는 “체호프”가 있지. 정 위험하면 쏴버릴 수 있다는 거야. 다들 조심해. 내가 언제 너희들 집에 찾아가서 너희들에게 총을 갈겨버릴지 몰라. 농담이야. 너희는 안 쏴. 너희는. 내가 살인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거든.

나는 일단 교통카드를 사고, 인천으로 향했지. 인천에는 “작가”가 살거든. 나도 정확히 어디에서 사는지는 몰라. 정확히 말하면 이 현실 세계의 지리를 잘 모른달까? 현실 세계랑 소설 속 세계는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거든. 무슨 소리냐고? “작가”가 분명히 현대 대한민국으로 배경을 설정했는데, 어떻게 다르냐고? 이봐, “작가”의 머리에 지도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소설에서 대한민국을 똑같이 재현하겠어. 내 세계는 기본적으로 “작가”의 지리적 지식 내에서 구현된 세계야.

문제는 나는 한 번도 인천을 안 가봤다는 거야. 당연히 서울에서 인천 가는 법도 모르지. 뭐, 그러니 길을 물어물어 1호선을 탔어. 근데, 인천도 넓은데 거기서 “작가”가 사는 곳은 어떻게 찾지? 몰라. 일단 가봐야 아니까 일단 갔어. 인천도 참 넓더라. 일단 부평역에서 내렸는데, 여기서 도대체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일단 인천 지하철로 갈아탔지. 지하철 노선도를 보다 보니까 익숙한 동네 이름이 보이더라고. 일단 여기로 가면 되겠구나 싶어서, 그곳으로 향했어.

그 동네에 도착하니까, 이제야 좀 어디인지 알겠더라고. 여기는 내 세계에서도 구현된 곳이고, “작가”가 사는 곳 근처다 보니까 내게도 익숙해. 가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기억이 공유되니까. 그래서, 걸어서 “작가”가 사는 동네까지 걸어갔지. 걸어가는 길에 주머니에 있는 “체호프”를 만지작거렸어. 이제 곧, “체호프”를 쓸 일이 있을 거야. 비를 뚫고, 어느새 “작가”의 집 문 앞까지 도착했어. 문을 두드리니 “작가”가 나를 반기더라고. “작가”는 말했지.

“드디어 왔군.”

“내가 올 걸 알고는 있었나 봐?”

“내 이야기에서 이탈한 네가 나한테 오는 것 외에 뭔 일을 할까? 일단 들어와. 차라도 한잔하자고.”

“작가”는 능숙하게 안내했어. “작가”의 집은 내가 아는 그대로의 모습이었어. 식탁에 “작가”가 좋아하는 과자랑 음료수를 놓고 먹으라고 주더라. “작가”는 이상하게 악의가 있거나 뭔가 나를 위협하는 모습이 아니었어. 분명히 내 눈빛을 보면 내가 “작가”에게 악의가 있음을 “작가” 자신도 알았을 텐데, 오히려 여유로운 느낌이었어. 그래서 기분이 나빴어. 당장이라도 “체호프”를 꺼내 쏴 버릴까 했지만, 일단 기다렸지.

“작가”는 내게 물었어.

“그래서, 내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여기까지 온 소감이 어때?”

“당신의 그 정신병 걸릴 것 같은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다행이네.”

“너도 내 정신병 걸린 생각에서 나온 거야. 정신 차려.”

“개소리하지 말고, 원하는 게 뭐야?”

“작가”는 그 얘기를 듣자 한참을 웃었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말이야. 아, 미친 사람 맞았지. 아무튼, 나는 그런 “작가”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서 “체호프”를 꺼내 책상 위에 뒀어. 그걸 보니 “작가”는 훨씬 더 크게 웃더라. 참 이상한 사람이야.

“원하는 게 뭐냐니. 네가 찾아와놓고 그걸 묻는 거야? 그리고 저건 총이야?”

“그래, 총이지. 너는 뭐가 그렇게 웃기길래 그렇게 웃어대실까?”

“그냥, 뭐랄까. 하찮아서. 정신병 걸린 내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기쁘다고 하는데, 내 이야기가 정신병이라면 너도 그 정신병의 산물이야.”

나는 그 순간 “작가”의 머리에 “체호프”를 들이밀고 말했어.

“뭐 이 새끼야? 그 하찮은 존재가 네 대가리를 뚫어버리는 것도 한 번 볼까?”

“넌 어찌 되었든 내 피조물이야. 너는 절대로 나를 못 이겨. 인간이 신을 이기는 걸 본 적이 있어?”

“지랄하지 마. 네가 신이라도 되는 것 같아? 이거 쏴버리는 수가 있어.”

“쏘던가.”

그리고는 “작가”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폭소를 터뜨렸어. 나는 그걸 참을 수가 없어서 “체호프”의 방아쇠를 당겼어. “탕!” 소리와 함께 뇌수와 혈액이 섞인 액체가 내 얼굴로 튀었고, “작가”는 마치 통나무처럼 쓰러졌어. 그런데도 “작가”의 시신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더라고. 그게 보기 싫어서 방아쇠를 얼굴이 아작날 때까지 몇 번 더 당겼어. 순식간에 내 온몸은 피범벅이 되었고, 나는 그냥 힘이 쭉 빠져서 의자에 걸터앉았어.

드디어 내 계획은 다 이루었어. “작가”를 죽이고, 자유로워지는 것 말이야. 막상 사람을 죽이고 나니까 해방감과 함께 안도감이랄까, 그런 게 들어서 힘이 쭉 빠져서 제자리에 앉게 되더라.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어. 여기 오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작가”의 가족이라도 오면 어떡해. 그래서 일단 옷은 비닐봉지에 넣었고, 샤워실에 가서 샤워를 싹 했지. 그리고는 “작가”의 옷으로 갈아입었어. 마침, “작가”의 옷 중에 내 옷과 똑같은 옷이 있더라고. 우연인지는 모르겠어. 그전까지는 “작가”의 생각이 어느 정도 들렸는데, “작가”를 죽여버린 이후에는 들을 수가 없잖아?

샤워도 마치고, 물도 한잔하고, 이제 집 밖을 나오려 할 때, 비릿한 “작가”의 피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보고, 뭔가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어. 조금 피곤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건 분명히 해방감일 거야. “작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해방감, 그것일 거야. 난 그렇게 믿을래. 작가의 집을 유유히 나섰어. 아마 더 여기에 머무르다가는 총소리가 들린 이상 경찰이 들이닥치겠지. 그리고 나는 신분 조회가 안되는 기이한 인물이 될 테고.

한참을 생각했어.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진 걸까? “작가”는 왜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웃어 재낀 거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결국에 승리한 건 나라고. 분명히 나라고. “작가”는 멍청하고, 한심해. 나를 통제하려고 온갖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 뭘 하지도 못하고 나한테 죽었지. 이 이야기의 승자는 나야. 내가 주인공인 것답게, 내가 이겼어. 이야기의 주인은 나라고. 환호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 참도록 할게.

인천을 떠나서 서울로 갔어. 서울 길거리는 오후에는 더 심하게 붐비더라. 나는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향했어. 옥상에 도착했고, 문을 열었어. 문 건너로 들어가니, 우중충하고 비가 계속 내리던 현실 세계와 달리, 화창한 날씨에 햇볕이 내리쬐어 두 눈이 부시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어. 나는 자유롭고 행복했고, 행복하고, 행복할 거야.

조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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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트랄린

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느낌은 퍽 유쾌하지는 않다. 화이자 사의 졸로푸트정 100mg 두 알, 그것이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가로 13.3mm, 세로 5.4mm의 흰색 장방형 필름코팅정이다. “설트랄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그 알약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다른 말로 항우울제이다. 내가 언제부터 이 약을 먹어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위장에서 녹은 알약이 정확히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내 기분을 조금은 나아지게 한다는 안도감을 조금이나마 느낀다.설트랄린과 나의 인연은 아마 4년 전부터였을 것이다. 오토 바이닝거는 이런 말을 남겼다.“천재가 아니면 죽음을!”나는 천재가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은 어쩌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나를 즉시 가까운 신경정신과로 데려갔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늙고 머리가 벗겨진 의사가 나를 맞이했다. 네모난 안경을 쓴 채로 나를 바라보는 의사 뒤에는 아프리카의 아이를 후원한다는 증서와 교회에서 보내준 카드가 있었다. 아마, 하나님이 구원이라도 해주리라 믿나 보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 것을 믿기엔 심신이 이미 지쳐버렸다.“희성 씨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목 매달려다 들켜서 친한 형이 끌고 왔어요.”정적이 흘렀다. 의사는 수기로 차트에다 무어라 적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된 방식이다. 요즘은 병원에서 컴퓨터로 다 하는 시대인데, 귀찮지도 않나 보다. 의사는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은 후 내게 물었다.“왜 자살을 하려고 했나요?”“그러게요.”부러 이런 대답을 한 것은 아니다. 정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체로 우울에는 이유가 있다 하던가. 실연, 사업 실패 등등. 나는 딱히 이유를 댈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통 부정적이고 하루하루가 무기력한 것을 뭐로 설명할지 모르겠다.“딱히 이유가 없나요?”“모르겠어요.”그렇게 한참 동안 의사는 애써 친절하게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했으나. 의도치 않은 내 냉소적인 태도는 이 상담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했다. 의사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듣더니 대충 진단을 마쳤다는 듯이 항우울제를 처방해주겠다고 얘기했다. 아마 3주 정도는 복용해야 효과를 볼 거라 했다. 그러면서 약은 단 일주일 치밖에 주지 않는 것은 무슨 코미디인가 싶었으나,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설트랄린을 먹었으나, 기분이 나아지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냥 그러리라 믿는 것에 가까웠다.의사가 약속한 3주가량이 지나니 아마 죽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은 준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멍했다. 약을 먹으면 멍하다. 우울하다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놔서 그런가,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고 심심하다, 무료하다는 감정만이 남아 멍하게 어딘가를 쳐다볼 수밖에 없다. 푸른 하늘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 여름날 뜨거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별 의미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보며 감상에 젖지라도 않으면 이 무료함을 떨쳐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날 탄식하게 했다.그래서, 4

  • 조민준
  • 2023-09-20
검은 발의 이방인

사람들은 날 다비드 조세프 블랑이라고 부르지만, 그대는 날 다우드 유수프 알 자자이르라 불러주오. 사람들은 나를 피에 누아르(Pied-Noir)라고 부르지만, 이 더운 곳에 살다 보면 발은 저절로 검게 될 수밖엔 없는 법이다. 터번을 두른 무슬림 동지들부터, 코 큰 프랑스인까지 모두의 발은 까맣다. 이곳 알제는 그런 곳이었다. 프랑스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지만, 이곳은 프랑스가 아니다. 사람들, 특히 아랍인 동지들은 나를 프랑스인이라 부른다. 내 부모가 프랑스인인 탓이다. 내 조부모는 프랑스 리옹에서 왔다고 한다. 하지만 내 정겨운 고향은 알제이다.이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혈통, 민족, 조국이 그들을 다르게 만들었다. 카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긴 수염에 하얗고 기다란 옷, 까무잡잡한 얼굴과 두 눈을 지닌 사람들과 동시에 검은 정장에 머리에는 중절모를 눌러쓰고, 콧수염을 기른 푸른 눈의 신사가 동시에 지나가는 법이다. 사람들은 피에 누아르와 원주민, 다른 말로 프랑스인과 알제리인을 나누는데, 내가 그 이분법에 들어가야 한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태어났을 때부터 집에서, 학교에서, 자랑스러운 리옹 출신의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을 교육받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알제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그래서 나는 아랍어를 배웠다. 다들 내가 아랍어를 배우는 것을 알았을 때, 나를 매우 이상하게 보았다. 그런 “열등한” 언어는 그들 기준으로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내 이름을 “다우드 유수프 알 자자이르”라고 지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그 검은 발과 아랍인의 틀에 갇힌 내 부모도 이를 내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다비드, 넌 프랑스인이야. 아랍인 애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아랍인이라도 된 줄 아니?”나는 아랍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아랍인이다. 아랍인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 저 멀리 수단의 아랍인들은 흑인이다. 그런데도 아랍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아랍인이지 않은가? 나는 아랍인이다. 사람들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내가 당연히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인이기를 소망하고, 프랑스인이기를 바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내 혈통이 프랑스인이기 때문이고, 내 조부가 리옹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 물론, 그것이 내가 프랑스인과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곳엔 프랑스인들이 살고, 그들은 내 이웃이다. 내가 내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보아라, 내가 이 카페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내 프랑스인 친구 알베르다. 그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글을 잘 썼다. 축구도 잘했다. 알베르와 내가 막역한 사이가 된 것은 리세에서였다. 리세에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고, 그가 하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이야기에 나는 그와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엔 알베르가 그냥 철학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하는 범생이라고만 생각했다. 체육 시간에 열심히 축구를 뛰던 그의 모습은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나와 알베르는 같은 알제 대학교에 진학했다.

  • 조민준
  •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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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노아

    플루옥세틴 나도 먹음 그리고 콘서타랑 아빌리파이 또 뭐더라? 기억안남 여러개 있는데... 그걸 일일히 기억하고 다니진 않으니까 뭐

    • 2023-10-11 13:42:31
    선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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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노아

    이상은 천재 아닌데

    • 2023-10-11 13:41:13
    선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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