爾[너]
- 작성자 이거되나
- 작성일 202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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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
〈三人之爾 三者面對〉
1 我
너는 사랑하다. 너는 손을 뻗다. 너는 책을 읽다. 너는 그림을 그리다. 아무도 그림을 그리지 않다. 역시나 당신은 눈을 크게 뜨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다. 나의 눈에 감추어진 우주를 꿰뚫을 듯 바라보다. 우주 속에는 우주가 있다. 대우주와 소우주. 소우주는 인간이 부재하다. 우리를 감싸고 전체에 존재할 뿐. 계속, 끊임없이 존재할 뿐……
2 余
너흘 맞남ᄋᆞᆫ 계졀조차 긔억 아니날 까맣아득히 머ᇍ 과거일디니 내 저흘 긔억ᄒᆞ며 내 녚ᄋᆡ셔 구룸을 바라보오ᇝ 젼ᄎᆞ인이라. 하ᄂᆞᆶᄋᆞᆫ 흐르고 내[川]ᄂᆞᆫ 긔 거스ᇍ쪽ᄋᆞ로 가ᄂᆞ니 록빛 ᄉᆞ과ᄂᆞᆫ 내게로 다가와 먹히는이라. 나ᄂᆞᆫ ᄭᅬ죄죄ᄒᆞᆫ 하ᄂᆞᆶ 아래 새ᄅᆞᆯ 보고 워기는데 福이가 다가와 짓글히ᄃᆡ,
“쥭어라, 쥭어. 먹혀라, 먹혀. 이히히.”
3 吾
삼삼오오 모여 짓걸이는 꼴이 역력하나 지금 뵈는 광경만치 역력하지는 않으니, 당신의 존재가 나와 맞닿은 까닭이라. 당신은 나보다 너른 존재이니 잘 아시리라. 내가 당신께 미치는 힘이 벼룩의 간만큼도 못함을. 그러니 나는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니,
“죽여라, 죽여. 먹어라, 먹어. 이히히.”
1 我
너는 푸르른 나무 아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는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자 서둘러 일어섰는데, 들판은 싸했고 강은 졸졸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렀다. 계단을 올라 근처 지붕 아래에 뛰어든 너는 웃었다. 하하 웃었다.
이윽고 이슬비가 가득 내리기 시작했다. 가는 선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폭우였다. 너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기에 정자에 앉아 구경하던 내게로 와 말했다.
“우산 좀 빌려줄 수 있어? 어차피 여기 계속 있을 거잖아. 비 그칠 때까지.”
“안 돼.”
너의 귀에 들어은 나의 대답이었다. 너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왜?”
“바로 갈 거니까.”
“어디로?”
“집으로.”
그러나 나는 집으로 가지 않는다. 비가 계속 내린다. 나의 대답은 너의 귀에 닿지 않았다.
“어디로?”
너는 다시 한번 묻는다. 하기에 나도 다시 한번,
“집으로.”
그러나 나의 대답은 너의 귀에 닿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가지 않는다. 너는 부러 못 들은 척을 하였다. 어차피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 계속 있을 것이었기에.
“바로 갈 거니까.”
하고 나는 말을 잇는다. 나는 부러 집으로 가지 않았다. 너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비 그칠 때까지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너의 귀에 닿지 않았다. ‘비 그칠 때까지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라는 나의 대답은 너의 귀에…….
“그럼 딴 사람 찾아봐야겠다.”
너는 그냥 가 버린다.
2 余
어느새 너는 내게 이시더니 너는 내게로 다가와 말ᄒᆞ되,
“이셔 주외.”
ᄒᆞ나 나는,
“가요, 얼릉.”
ᄒᆞ고 너를 내ᄶᅩᆾ옴이엿고 나는 ᄯᅩᄒᆞᆫ 너를 바다드리고자 ᄒᆞ얏지만 죵내,
“이셔 주외.”
ᄒᆞ나 너는,
“가요, 얼릉.”
(ᄯᆞ라자블수업슨ᄯᆞ라잡기、순라계속바ᄭᅱ는순라잡기)
3 吾
하고 나는 너를 보앗스나 너는 나를 보지못하얏고 그러나 나는 네 안에 잇엇기에 이는 어긋남인 동시에 포옹이엇던 바이라. 하나 나는 생각하기에 대관절 네 안에 잇슨 적이 없음으로,
“너는 정말 내가 아니엇고 나는 정말 네가 아니엇고…….”
하기에 우리의 비극은 시작되엇음인가.
1 我
우리의 방향이 맞몰린 때는 오직 단 한순간, 우리의 마지막 만남 때뿐이었지만 그곳에는 다른 이들이 없었기에, 맞닿음은 결국 흩어져버린 것이었다.
내게 우산이 없었던 그때는 같은 곳에 있었던 우리의 첫 대화에 불과했지만 너는 내게, 네가 나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음을 가르쳐주었다, ‘어차피’로써.
너는 나의 반대편에 있었다. 지하철이었다. 너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네 뒤의 창밖으로는 밤의 쓸쓸한 정경, 세상에서 가장 도시적인 정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정경의 빠른 지나감 때문에 그리고 가로등 불빛의 화려함 때문에 그 정경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너, 너의 조는 모습만은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너는 긴 감[黑]색 머리를 길게 늘여뜨리며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겨울이어서 불그죽죽한 체크무늬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있었고, 감청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눈의 일부를 가릴 정도로 기른 앞머리의 엉망인 형태가 눈에 띄었다. 너의 그 앞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둘 사이의 거리―고작 세 걸음 남짓―가 너무 멀어 나는 일어섰음에도 걸음을 내딛지 못하였다. 지하철은 덜컹거렸다.
역에 도착하여 나는 너를 뒤로하고 내렸다. 졸고 있던 너는 종착역까지 가서야 잠에서 깨었다. 너는 내가 언제부터 잠들어 있었던가 하며 몽롱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너는 위를 보았다. 천장이 보였다. 형광등 몇 개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역 전체를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빛이었으므로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개표구를 지나 너는 역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바람이 네 뺨을 스치었다. 은은한 미소가 네 입가에 지어졌다.
2 余
그곳에는 아모도 업섯다. 형광등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넘치고넘쳣지만 그곳에는 아모도 업섯다. 지하철은 덜컹덜컹햇지만 너는 창밖을 본다. 역시 아모도 업다. 너는 허리를 가꾸로한다. 허리가 역으로 접힌다. 이루말할수업는 뒤틀림, 그것이 네허리의 이름이엇다. 너는 네쪽창문을 본다. 물논 아모도 업다. 너의행동은 보답받지 못하엿다.
이것은 내이야기엿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뒤늦게 파악한다.
3 吾
너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만다. 너는 한참을 안들여보다가 만다. 나는 너에게 묻는다: “너는나를본적이잇나요.” 그러나 너는 대답지 안는다. 그러나 침묵으로 일관하지도 안는다: 너는 상투적인 말로 내게 대답햇음이다. “아뇨.” 오호 그렇구나. 하나 나는 알고 잇다. 너의 진실한 대답을.
“그러지 말구.”
“그르지 마세요.”
이중적 의미는 그야말로 함축적이기에 알맞았다.
1 我
달이 저 높은 하늘에 잘도 떠 있었다. 아아 휘영청 밝아라. 휘영청이란 말은 참 재밌어. 하고 너는 생각했다.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 네 발치의 풀들이 나부꼈다. 너의 긴 옷도 나부꼈다. 나는 마치 세상에 너와 나 단 둘만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세상에는 너밖에 없었다. 나는 그러한 세상을 그려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끔찍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 동시에…….
이것은 그림이 아니야. 그렇지? 하므로 세상에는 너밖에 없었다. 휘영청이란 말은 참 재밌어 하는 네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그러나 그 동시에…….
달은 저 높은 하늘에 절로 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 네 발치의 풀들이 나부꼈다. 나는 한심했다. 나는 작았다. 그러나 그 동시에 너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너를 찾았지만 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시에…….
너는 어느 울타리에 걸터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네게 하고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수많은 일들이 네 머릿속을 스치어 갔다. 나는 그 일들을 알 수 없었다.
네 감빛 머리칼이 휘이 나부꼈다.
나는 아직도 학교에 있었다. 딴 사람들은 이미 하교하거나 퇴근해 없었다. 정문도 뒷문도 잠겨 있었다.
조금 어둑했다. 또다시 비가 오려나 하고 고개를 쳐들어 구름을 살폈다. 먹구름은 없었다.
“에이 가자.”
하고 나는 너를 포기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2 余
볼 수 업섯다. 맹목적이엇다. 너를 기다리던 나는.
허나 너는 계속 기달렷다. 영원히 나를 기달렷다. 어ᄶᅢ서? 나는 묻는다. 허나 너는 “그냥.”이라고 말할 ᄲᅮᆫ. “그냥”이라고만 말할 ᄲᅮᆫ…….
엇저면 너는 나를 줄곧 바라보고 잇엇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너는 나를 줄곧 바라고 잇엇는지도 몰른다.
“내 말을 들어 줘요. 내 말을 들어 줘요.”
하며.
그러나 나는 그런 너의 말을 들은체도 않고 길을 지난다. 구걸하는 너를 지나고 「콩—크리트」로된 길을 걷는다. 걸음에는 반듯이 ᄭᅳᇀ이 잇지만 길에는 ᄭᅳᇀ이 업다. 나는 내 발의 물집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계속계속 ᄯᅡᆨᄯᅡᆨ한 길을 걷는다.
3 吾
우리는 멈춰 있다. 무의미한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너’를 지껄이고 있다. 너의 발밑에는 수많은 동물의 사체가 있다.
달이 아름다이 밝다.
1 我
사실 기다림이라기보단 망설임에 가까웠다. 언제 떠날까 하는 망설임에 가까웠다. 그래, 그렇다.
졸업하기 직전에 나는 너를 추억했다. 추억 속에서 너는 그렇게 밝을 수 없다. 축축한 눈가에 발그레한 뺨이 그렇게 예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너를 저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다. 부끄러웠던 것일까? 아니다. 나는 그저 싫었다. 네가 그저 싫었다.
다른 추억 속에서 너는 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휘 밝은 너를 나는…….
너는 시간이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 어디 하루 묵을 곳을 찾아보지만 쉽지가 않았다. 애초에 돈이 없었다. 지갑도 휴대전화도 집에 두고 왔었다.
결국 너는 어디 공원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공원에는 마침 적당한 장의자가 몇 개 있었다.
너는 장의자에 몸을 뉘었다. 가로등이 네 머리의 옆을 비추었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별로 없어 달이 잘 보였다.
너는 눈을 감았다. 춥거나 하지는 않았다. 편안한, 마치 우리 마음속 고향의 푸르른 들판에 큰대자로 들어누운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는데 저 멀리서 사박사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게슴츠레 눈을 떠 발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니, 사람이었다.
그는 어딘지 허름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고운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힘든 일이라곤 손도 대지 않은 듯한 깨끗하고 고운 피부……. 마치 강렬한 불협화음이 사람으로써 표현된 듯했다. 너는 누운 데서 일어났다.
이윽고 그 사람은 멈춰 섰다. 공원의 중앙쯤 와서였다.
(찾았었고, 잡았었다.)
그는 불현듯 조끼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색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종이접기를 하기 시작했다. 접는 과정이 왜인지 익숙했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많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보아 온 종이접기였다. 그것은 접는 사람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그의 접는 과정 자체에서 비롯된 듯싶었다.
종이는 인제 네모가 아니었다. 일련의 과정으로써 흰 종이 비행기로 일변한 것이었다. 흰 종이는 가로등의 빛을 받아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2 余
흰비행기가하늘을지난다.
거지를지나듯이
하늘을지난다.
3 吾
삶에 우리 두 사람은 엮였음인가. 나는 고민하지만 결국 일어서기로 한다.
1 我
달빛이 날아가는 종이 비행기를 파랗게 비춘다. 너의 시선은 종이 비행기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 종이 비행기가 달과 같은 하양을 띠고 있었던 까닭이다.
곧 비행기는 나아감을 멈춘다. 추락한다. 고작 십 미터 남짓한 거리를 비행기는 날았다. 그는 비향기가 추락한 자리로 뛰어간다. 비행기는 아직도 달빛을 받고 있어 파랗다.
너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수많은 별이 까만 하늘에 마치 반짝이처럼 흩뿌려져 있다. 잘도 떨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안녕.”
하는 말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비행기를 날렸던 그 사람이 장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너는 조금 놀랐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안녕 못 해.”
하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어머.”
“비행기가 잘 안 날아갔거든.”
“그렇군요.”
“어떻게 하면 더 잘 날릴 수 있을까?”
“글쎄요. 좀 더 세게 던지면?”
“해 봤는데, 오히려 더 못 가더라.”
“각도가 뭔가 잘못된 거 아녜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런데 그 각도를 잘 잡는 게 여간 어려워야지.”
“그건 연습하면 나아질 거예요.”
“그래서 연습하는 중이다.”
하고 그는 다시 공원의 중앙으로 가 종이비행기를 접고 날렸다.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면 주머니에서 종이를 하나 더 꺼내 다시 종이비행기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날렸다……
2 余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잠기운이 좀 가시고 나서야 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몽중(夢中)에 공원에 가 평소 하던 대로 종이비행기를 접고 날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의 그런 광경을 어느 학생이 지켜보고 있었다. 왜인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날던 비행기가 또다시 떨어졌다.
3 吾
일어날 시간. 모두가 일어날 시간. 그러나 나는 일어나지 않으니, 늦잠꾸러기는 아니고 다만 올빼미인 까닭이라. 미네르바의 올빼미인 까닭이라.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헤겔의 것이 아니고 차라리 데카르트의 것이기에 나는 꿈속에서도 포조의 하인 럭키마냥 생각을 내뱉는 것이리니, “××× 씨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고 하기에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합목적성을 지니는……” 함이라.
그러한 까닭에 나는 전연 알지 못하는 것이라. 바깥에서 무엇이 어찌 되고 누가 어찌 되고 정세는 또 어찌 되고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 하나 나는 만족하는 것이라. 나의 꿈속 세상은 너무도 광대하고 창활(昌闊)하여 질릴 새가 없기 때문이라.
한편 나는 고개를 쳐들지 않음이라. 꿈속 하늘에는 아주 무서운 것이 있는 까닭이라. 그것은 너무도 괴악한 생김새를 지녀 보기만 해도 오줌을 질질 싸 버릴 지경이 되는 것이라고 들은 바 있음이라.
(그것은 실상의 정경이라.)
1 我
나는 뒤늦게 잠이 들었다. 꽤 오랫동안 밖에 나가 있었던 때문인지 잠이 달콤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네 걱정이 되었다. 그리 잠들어서 혹여 큰일이 나버리는 건 아닐는지. 물론 그런 걱정은 몰려드는 잠의 강압성에 비할 바가 안 되어서, 내 정신(精身)의 눈은 그 강압적인 무게에 스르르 감기어 버린 것이었다.
어둠이 찾아왔었다. 고깃덩이로 뒤덮인 어둠 속에선 보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틀린 상념이다. 그런 어둠 속에선 물론 강렬한 시각의 잔상이나 형형색색의 선형 구조도 보이는 법이지만 역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바로 허상이다. 맺히지 못한 상의 설운 목마름이다.
너 역시 그런 목마름을 몇 번 들었으리라. 그 무너진 하늘인 듯한 검은빛 발성을 말이다. 아니라고? 안 들었다고? 그것이야말로 아니다. 너는 들었다. 너는 분명 들었다. 너는.
나에게도 그 발성이 찾아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어날 시간. 모두가 일어날 시간.”
2 余
진작 영원한 비행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으면서 내 손은 끊임없이 시도를 목말라하는 것이었다. 하나 그런 한심스러운 짓거리도 이제 마지막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도인 것이다. 하며 나는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날린 쪽으로 센바람이 불었다. 종이비행기는 휘 부는 비행기의 한 좌석에 앉아 날아갔다.
3 吾
꿈속에서 너를 본오라.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이 너의 생활을 관람한오라. 푯값은 싼이라. 열다섯 시간의 수면 시간. 그뿐이라.
열다섯 시간이 비싸다고 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없는 것이라. 나는 시간이 만한오라. 아주 썩어 넘친오라. 누구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물론 내가 여느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산다거나 피곤해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不]라. 이는 그저 이곳이 꿈속이기 때문이라.
바깥보다 느린 이곳은 깊게 흐른이라. 함으로써 샘이 이심이라. 이러한 샘은 나의 심장에서 발간 모습으로 흐른이라. 하나 그것은 단지 눈 깜빡할 사이의 환상일 뿐임이라. 너의 모습마저 그저 환시일 뿐임이라…….
1 我
일어났다. 꿈을 꾼 듯하기는 하지만,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전연 기억나지 않았다.
양치를 했다. 잇몸이 좀 아팠다. 거울에는 내 모습이 비쳤다. 안경 벗은 나는 썩 잘생겼다. 아니, 다시 보니 못생겼다. 일 분쯤 지나고 양칫물을 뱉었다. 입을 헹궜다. 혀에 치약 맛이 계속 남아 있었다.
나만 쉬는 날이라 집안에는 아무도 없어, 불 꺼진 거실에는 금붕어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금붕어가 있는 어항에 다가가, 그것을 통통 두드린다. 금붕어들은 깜짝 놀란 듯하기도 했고 무심한 듯하기도 했다. 귓가에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인지 차가 지나가는 소리인지 모를 것이 왱왱거렸지만 사람은 없었다. 나만 쉬는 날이었다.
쉬는 날에는 할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무작정 밖엘 나갔다. 어제의 그 우중충한 하늘은 일절 없었고, 다만 푸르고 탁 트인 하늘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하늘을 마냥 치어다보았다. 조각난 구름들이 바람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문득 종이비행기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날린 그것은 잘도 바람을 따라 비행하고 있었다. 훠이 훠이 새야 날거라…… 새이야 새이야……. 그러나 새는 한 마리도 뵈지 않았다.
2 余
나는 벙쪄 있었다. 십수 년간의 염원이 이렇게 허무하게 이루어졌다니. 그림의 떡을 먹는 듯했다.
“멀리도 날아가네요.”
구경하고 있던 학생이 말했다. 종이비행기는 인제 너무도 멀리 있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네.”
달이 아름다이 밝은데 나는 참 겨우가지만치 초라했다. 너는 초라한 내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는지, 하며 나는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었다.
3 吾
임(妊)아! 약기운에 몽롱한 상태로 네게 편지를 쓴온이라.
만일 네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좋을이라. 그러나 분명 닿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이리 편지로 보냄이라.
잘 지낸으냐? 나는 잘 지낸오라. 작월에 내가 보낸 편지가 있던데, 내가 그걸 잘못 보지나 않았는지 걱정된오라.
내 이리 편지를 써 보내는 이유는, 다름아닌 네가 새로이 시작하더라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서이라. 네가 새 삶을 시작하더라는 소문에 걱정이 되어서이라.
임아, 내 걱정은 어차피 안 할 테니 걱정 말라는 소린 말오라. 다만 내가 널 걱정코 있음만을 알아 줬으면 싶은오라.
……(후략)……
1 我
보이지 않는 새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무슨 답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정말 안다. 네가 사라졌음을.
(사이. 광고. 광고의 중간. 중간은 아무것도 없다.)
2 余
너는 어느 편지를 받았댔다. 빨간색으로 쓰인 소름돋는 글자들. 너는 그것들이 무섭댔다. 나는 모르겠다, 그런 것들이 무서운지.
너는 나를 찾아왔다. 아니지, 내가 너를 찾아왔다. 너는 항상 공원에 있었고, 그 공원에 찾아오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공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라진 공원. 인적이 끊긴 공원. 오직 나만이 갈 수 있던 공원. 그곳에 너는 침입하였다. 너는 노란빛 옷을 입은 침입인이었다. 그러나 그 동시에 너는 침입인이 아니었다. 너는 침입하지 아니하였었다. 너는 오히려 나를 침입자로 생각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까닭은 네가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도망쳐나온 참이었음이다.
너는 그 사람이 편지를 보냈고, 그 사람이 자기를 틀에 박아 넣었다고 했다. 어떻게 박아 넣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대답했다.
“우산을 씌어 줬어.”
나는 당최 이해가 안 되었다.
3 吾
검은빛 무대 위.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는 길을 걷다라. 의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걸음이러라.
“얼마 만에 바깥으로 나온 거지.” ― “…….”
“이야 삼 년 만이군.” ― “…….”
“삼 년 새에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어. 그렇지 않아?” ― “…….”
너는 침묵하더라. 나는 참을 수가 없다라. 그러나, 어떻게? 나는 참지 않는 법을 모르다라. 너무도 오래 참고 있다라. 몸의 한 구석도 남김없이 수동적인 인간이 되고 말다라.
“이야 얼마 만에 바깥으로 나온 거지.” ― “…….”
“십 년 만이군, 아마.” ― “…….”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 ― “…….”
(그러나 헛말이라. 헛발채기로 나는 그만 고꾸러져 버릴 양한이라.)
“이 얼마 만의 바깥이냐…….” ― “…….”
“원래 저곳에 건물이 있었든가? 내 기억상으론 저기가 분명 산이었는데…….” ― “…….”
“저기는 옛날 그대로군. 조금 낡아 버린 것만 빼면 기억과 똑같애.” ― “…….”
(그러나 나는 아직 꿈속이라. 꿈속에서 미망하는 새[鳥]라.)
1 我
몰래금 설치한 나의 비밀스러운 동화(動畫)를 들여다보았다. 네가 비치고 있었다. 투명함에 둘러싸여 너는 비치고 있었다.
너는 나를 보고 있었다. 화면 너머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식겁하였다. 그러나 안녕, 하는 나의 인사에 너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듯이. 분명 들을 수 있으면서.
하나 나의 헛소리다. 귀담아들을 필요는 하등 없는 나의 헛소리다. 나는 이렇듯 자기 말이 온통 헛소리뿐임을 알면서도, 헛소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2 余
汝 꽤 멀리서 왔어요. 멀리라 해 봤자 서울 끝에서 끝 정도일 테지만.
余 어디서 왔는데?
汝 글쎄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余 여기 올 때 항상 지하철 타잖아.
汝 무의식적으로 타거든요.
余 아무리 그래도 보통 자기 타는 역쯤은 기억하지.
汝 제가 워낙 생각이 짧아서요.
余 그쯤 되면 그냥 생각이 없는 거 아냐?
汝 그럴지도요.
3 吾
汝 …….
吾 나를 기억하니?
汝 아뇨.
吾 편지 계속 보냈잖아.
汝 …….
吾 아무리 그래도 이쯤 보내면 기억해야지.
汝 당신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吾 나의 실제를 보길 주저하는 게 아니고?
汝 그럴지도요.
1 我
그리고 이조차 헛소리였기에 나는 너의 비밀스러운 동화를 그만 부수어 버렸다. 어차피 이조차 헛된 것이었다.
검은 눈물이 흘렀다. 탄내가 났다. 탄내의 속에는 엉큼한 분홍색이 있었다. 내가 여지껏 그려 온 너의 피부색이 있었다. 달콤했다. 설탕 타는 냄새가 났다.
지하철에서 본 후로, 너는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이 지하철역에서 널 봤다고 했다. 나는 지하철을 별로 타지 않아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내 동화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었다. 너는 하루도 빠짐없이 역에 가 ×호선을 탔다. 하행열차. 우리네 얕은 고장은 노선의 끝자락에 있어서, 잘만 타면 금방 종착역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종착역에 도착하여 너는 내렸다. 그 사람과 만나는 것은 밤의 일이었지만, 도착한 너는 아침 하늘을 보았다. 시간을 착각한 것이었던가? 아니다. 그저 네 저릿한 눈빛의 표출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너는 곁에 사람 한 명 두지 않은 채 홍등광협로(狹路) 나돌듯 길을 걸었다. 나로선 너무도 먼 길을, 너는 걸었던 것이다.
나는 너와 학교를 겹치어 본다. 학교에는 네가 있었고, 너는 학교에 있었다. 그러나 너는 지금 학교에 없다. 있으려야 있을 수 없다. 너는 학교란 데를 졸업하였기에. 하기에 내 겹침은 그저 망상으로서만 종결된다. 헛되이, 아주 헛되이.
네게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네 곁에 사람이 있었음을 부정한다. 내게 너는 그저 외톨이였다. 외톨이여야만 했다. 그래야 나는 너와 동일선상에 있을 수 있었다.
외톨이인 너는 학교가 파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느라 학교에 남는 날이면, 나는 종종 도서실 창문을 통해 네가 하교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곤 하였다. 썩 높은 층에 있는 도서실이었기에 사람들이 전부 검은빛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너의 머리칼만은, 똑같은 검은빛인데도 불구하고 참 잘만 보였다.
그러나 흑점형(黑點形)의 너는 금방 사라져 버렸다. 내가 보려야 볼 수 없는 곳으로 행하여 버렸다. 나는 네가 없는 학교에 홀로 남겨져, 외사랑을 하였다.
(자랑스럽고 소름 돋는 나의 첫사랑.)
2 余
汝 아저씨랑 있으면, 왜인지 마음이 편해져요.
余 내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汝 노숙자 아녜요?
余 내가 노숙자처럼 보여?
汝 아뇨.
余 …….
汝 하지만 왜인지, 노숙자 같으세요.
余 칭찬은 아니지?
汝 칭찬이에요. 제 나름의 칭찬.
余 별 칭찬을 다 듣네. 애최 칭찬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긴 하지만.
汝 그래요?
余 받을 만한 일을 별로 안 했거든. 해 줄 사람도 없었고.
汝 지금은 해 줄 사람이 있으세요?
余 물론 있지. 어머니, 친구들, 지인들……. 너는 있고?
汝 글쎄요. 절 칭찬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긴 해요. 그런데……
余 칭찬을 잘 해 주진 않는다?
汝 네, 왜인진 모르겠지만요.
余 부끄러워서 그래. 다 어른이들인 거야.
汝 아저씨도 어른이시잖아요. 아니, 어른이이시잖아요.
余 나도 어른인 동시에 어른이이긴 하지. 칭찬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받는 거든, 하는 거든.
(사이)
汝 ……성숙해진다는 건 뭘까요.
余 글쎄다, 성숙한 사람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는데. 너는 밤마다 공원에서 종이비행기나 날리는 사람한테 대체 뭘 물어보는 거야?
汝 성숙한 사랑이란 건 또 뭘까요.
余 갑자기 웬 사랑?
汝 아는 사람이 누구랑 사귀고 있거든요.
余 이런 건 꼭 자기 이야기던데.
……
3 吾
보일 수 없더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보일 수 없더라. 네가 나를 보지 않던 때문이라. 허나 나ᄂᆞᆫ.
흐들흐들ᄒᆞᆫ 수면ㅅ아래. 가마ᄑᆞᄅᆞ래ᄒᆞᆫ 그림제. 우리는 서르를 울힌오라. ᄒᆞ나 나는.
말장난. ‘모든’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너는 너무도 어린이라(둘 모두의 의미로). 나는 이러한 연유로 네게 다가가지만 바닷속 너는 너무도 찬란하던이라. (그러하외, 정말로. 하매 이시어 주오이. 나는 ᄀᆞᆯ온이라.)
汝曰 죽으면 어떻게 돼요?
吾曰 서서히 굳어가지. 물질이 되어 가는 거야. 영혼이 빠져나가고, 볼이 옴폭해지고, 살이 썩어 가고…….
汝曰 …….
吾曰 무섭니?
작디작았던 너. 너는 그 무엇이러니 나는 너를 본오라. 다시 한번의 봄[視]은 회상이러라.
1 我
汝 착각도 유분수지.
我 대체 뭐가 착각이라는 거야? 우리 분명……
汝 너는 자기 믿음 속에 갇혀 있을 뿐이야.
我 뭐?
汝 다 네 착각이라고. 지금껏 네가 말한 모든 게.
我 …….
汝 내가 너를 기다려? 개소리 좀 작작 해. 난 너에게 정말 아무런 관심도 없었어. 그저 같은 반 애들 중 한 명으로 생각했었다고. 그런데 넌, 대체 뭔 지랄이야? 그게 범죄인 건 알아?
我 미안……
汝 그뿐이야? 지금껏 네가 한 짓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진 알아? 정말 미칠 지경이었어. 항상, 매일매일 네가 듣고 있지는 않을까, 또 어디에 카메라를 숨겨 놓진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그런 생각이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아. 아니, 이미 미쳐 버렸는지도 몰라. 불을 끄고 주변이 온통 어두워지면 머릿속에서 환청이 들려와. 나를 잊었느냐고, 다 네 탓이라고, 지금이라도 네게 싹싹 빌라고 하는, 끝없는 환청……. 너는 그 환청을 들어 봤어? 들어 봤냐고.
我 정말 미안해, 난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그냥 네가 걱정돼서…….
汝 같잖은 변명 하지 마. 나를 감시하고 싶었던 것뿐이잖아. 네 같잖은 욕구를 채우려고.
我 아니야. 나는 정말,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아니라……, 아무튼 제발 믿어 줘. 그딴 더러운 욕구 때문은 아니었어.(그 비밀스러운 화면에 비치던 너는 너무도 반짝였다.) 믿어 줘…….
汝 대체 내가 왜? 네 행동은 더럽게밖에 보이지 않아. 누가 봐도 넌 그냥 의심할 여지 없는 쓰레기이고, 범죄자라고 낙인찍혀 사회에서 매장당할 새끼야.
我 난 정말 네가 걱정돼서 그랬던 거야. 지하철에서 잠든 걸 보고, 무슨 호된 일이라도 당하면 안 되니까.
汝 여기가 무슨 슬럼가야? 아니지, 아무리 치안이 안 좋은 곳이라도 지하철에서 잠든다고 반드시 뭔 일이 일어나진 않아. 거기다 여긴 치안이 그리 나쁘지도 않다고. 신문물에 적응하지 못하는 1 我9세기 사람이라도 돼? 네 행동은 그냥 빼도 박도 못할 범죄야. 인정해.
我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멀어 나는 걸음을 내딛지 못하였음은 분명하다. 하나 그 대신에 나는 일종의 프러포즈를 한 것이었다. 그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딱한 프러포즈를.) 아니야. (그 멋진 프러포즈를.) 인정 못 해.
汝 …….
我 인정 못 해…….
2 余
연락이 끊겼댔다. 잘 된 일이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그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어긋나 보였다. 너와 세상 사이에 어떤 메꿀 수 없는 틈새가 있는 듯했다. 또한 너는 그 틈새를 계속 벌리고 있었다. 틈새는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져 언젠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 만약 실제로 그리 되면 너는 너의 행동을 후회할까, 하고 나는 궁금해했다.
꾸준히 너는 나를 기다렸다. 정말 단 하루도 빠짐없었다. 어떻게 나를 이리도 꾸준히 기다리는지가 썩 의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러 묻지 않았다. 홀로 벤치에 앉아 있던 너의 그 갈 곳 잃어 두려워하는 표정을 나는 언젠가 흘끔 보았었다.
“물론 후련했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어요.”
“할 말이 더 남았던 거야?”
“음, 그것보단, 말할 감정이 남았었어요.”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했다고?”
“네.”
“나도 가끔씩 그러지.”
“아저씨도 화낼 때 있어요?”
“너무 당연한 질문 아니냐?”
“그렇긴 하네요.”
“어쨌든, 물론 있지.”
“뭐 때문에 화내셨는데요?”
“친구가 내게 청첩장을 보내서. 내게 남은 마지막 친구였거든. 걔 말고 다른 친구는 죄다 지 가족들이랑만 두런거렸는데, 인제 걔도 지 가족이랑만 두런거리게 되었으니…….”
“고작 그거 때문에 화내신 거예요? 외로워서?”
“그렇지 뭐. 해도 술자리에서 화냈으니 망정이지, 결혼식에서 난장판을 쳤으면 어우, 말하기도 싫네.”
“얼마나 화를 내셨길래요?”
“음식도 쏟고 병도 깨지고…… 그만한 난리도 없었지. 다행히도 친구가 사람이 좋아서, 아주 관계가 끊어지거나 그러진 않았어. 그런데 왜 이리 캐묻는 거냐?”
“그냥, 궁금했어요. 어른도 화를 낼 때가 있나 해서.”
“어른이라고 화를 안 낸다는 건 또 어디서 나온 말인지. 화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네 부모님은 화를 잘 내시는 편이셨니?”
“아뇨, 별로요. 좋은 부모님이셨어요. 좋은 부모님이셨는데…… 굳이 더 말을 하고 싶진 않네요.”
“왜인지 어른스럽네.”
“그런가요?”
“적어도 나보단 어른스러워.”
“어디가 말예요?”
“여기가.”
하면서 나는 나의 측두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검지 않다는 게.”
3 吾
(종내 닿지 않았다.
…….
그러니 부모로서 말한다.
종내 닿지 않았다.
…….
낭비일 뿐이런가.)
2 余
그를 언급하는 일은 결국 사라졌다. 그러나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오히려 늘어서, 연애라곤 대학생 때 몇 번 치기로 해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이야기가 조금 거북살스러웠다. 때문에 나는 “저기,” 하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너에게 말을 걸었다.
“왜요?”
“나랑 말하는 거, 지겹지 않아?”
“아뇨, 재밌어요.”
“대체 어디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느니 하는 이야기에 뭔 반응도 안 나오는 대환데.”
“그런 게 가장 재밌어요…….”
너에게서 나는 학대의 흔적을 엿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을, 즉 나의 시선을 네게는 부러 말하지 않았다. 보통 그런 유의 아이들에게 연민을 보이는 건 오히려 독이 된다고 어디서 주워들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는 사실 너무도 잘못된 접근법이었다. 특히 너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는.
3 吾
내가 빛을 잃었을 제 너는 그저 보송한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 너는 아으 이 얼마나 참한 모습이냐.(나는 그러리라고 믿는다.) 내 빛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네 모습은 정말, 그다지도 어여쁠 수가 없었다. 물론 내 자식이라서 그랬겠지마는…….
나는 아직도 그 새천년을 기억한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전회하던 너의 별자리를 기억한다. 너는 내게 운명을 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운명이나 신항로(新航路)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그렇기에 새롭지도 구면이지도 않은 운명이었다.
너도 알듯이 운명은, 정말 시나브로 찾아와선 또 시나브로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운명을 어떻게든 잡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닿을락 하면 떠나고 또 닿을락 하면 떠나는 게 그 본성이라, 다만 시선을 둘 수만 있을 뿐, 그 하얀 광원을 우리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듯싶다. 하나 나는 이 운명이라는 것을, 피부가 다 해지도록 좇고 또 좇다 보면 언젠가는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이유인즉 너의 성장, 그뿐이다. 정말 그뿐이다.
너는 날이 갈수록 성장해 갔다. 어머니 없이도 쑥쑥 잘만 크더라. 나는 그런 네가 자랑스러웠다. 그런 네가 장했다. 그러나 내 행동은, 갈수록 내 마음과 반대가 되어 갔다. 너에게 대한 나의 태도가 점점 더 냉담해져 간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네게 사과해야 하겠다. 나는 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주지 못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너로 하여금 내가 널 미워한다고 생각하게까지 하여 버렸다. 뒤늦게 나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더라. 하기에 이 과오를 나는 내 명이 다할 때까지 간직하기로 하였다.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그래, 그 대상이 될 사람이 죽어버렸단 듯이 속죄하려던 것이다.
0 爾
誰 차라리 싸구려 신파 영화 속이기를, 하고 생각했어. 울음소리뿐인 지루한 십 분이 지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이 시간이 끝나는 거지. 관객 대부분은 하루이틀 후엔 영화의 내용을 완전히 잊을 거야.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지게 될 거고. 그러면 마침내는, 나조차 자기를 잊게 될 거야.
誰 이미 너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없어. 애초에 있던 적이 없었어. 다들 제멋대로 자기들만의 너를 상상해 낼 뿐이었지.
余 어른스럽네.
示 전혀요.
2 余
……그럼에도 너를 알고 싶었다. 다른 것은 어찌 되든 좋았다. 어찌 되든 좋으니, 너를 돕고 싶었다.(오지랖이니 뭐니 해도 좋다. 실제로 나의 행동은 오지랖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입을 뗐다.
“몇 살이야?”
너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지도 않고,
“열여섯 살이요.”
“만 나이가?”
“세는나이로.”
“생각했던 것보다 어린데.”
“몇 살이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열아홉 정도.”
“그렇게 늙어 보여요?”
“열아홉이 늙은 거면 난 무슨 송장이냐?”
“송장이죠.”
“얘가,”
하고 나는 뭔가 말을 더하려다가 웃음보를 터뜨려 버렸다. 그 꼴을 너는 웃음기 없이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메마른 표정이었다.
3 吾
……
하나 나는 지금, 생기가 얼마 남지 않은 때에서야 깨달았다. 나의 직접적이지 않은 속죄 방법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그래, 내가 아무리 처절하게 속죄한다 해도, 그 목소리는 네게 닿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너에게 또 한 번 사과하여야만 한다.
그러니 사과한다
너의 마음을 지나쳐 버린 것에
나의 마음을 속인 것에
너를 너로서 생각하지 않은 것에
나를 나로서만 생각한 것에
0 爾
저의 종아리를 파랗게 물들인 것에
저의 눈을 빨갛게 물들인 것에.
당신은 저를 미워하셨기에 이리 눈물을 흘리셨으니
저 또한 당신을 미워하기에 이리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저는 당신을 미워하는가? ―그렇다. 반은 당신의 죄 때문에, 나머지 반은 당신의 속죄 때문에.
당신은 이를 아는 둥 모르는 둥 눈을 감았다.
2 余
너는 그러나 너 자체에 대해서는 일체 말이 없었다. 즉 너의 생일, 너의 집, 너의 가족은 알려줄지라도 너의 성격, 너의 취향, 너의 생각은 전혀 알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알려주지 않는 것을 궁금해하였지만, 부러 그들에 대해 물어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달랐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알고 싶었기에…….
하기에,
“왜 나를 자꾸 찾아오는 거야? 빈말이라도 괜찮으니 답을 좀 해 줘.”
“그게 궁금해요?”
“응.”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요?”
“뭐, 그냥 궁금할 뿐이니 꼭 중요한 거라곤 할 수 없지.”
“그러면, 대답 안 해도 되죠?”
“되긴 되는데…… 왜 이리 대답을 피하는 거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저씨한텐 말하기 싫기도 하고.”
“왜? 뭣 때문에?”
“당신이 저를 기다려 주기 때문에.”
너는 그러고 나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췄다. 나에겐 없는 어떤 것을 너는 보고 있었다. 거짓부렁으로 점칠된 우리[吾等]였다.
3 吾
“너는 정말 나엿고 나는 정말 너엿고…….”
함에서야 우리의 희극은 시작함일가.
아니리다. 이리하얏다 해도 우리는 정말이지 피 한방울 안 석긴 남남임에는 변함이 업기에.
하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얏슬가. 흐리어가는 의식속에서 나는 생각하얏다. 물논 답은 나오지 안앗다. 영원한 하양에서 나오지 안앗다…….
아으 어ᄶᅵ 그리도 비극적인 결말일가. 하고 말하니 너는, 마치 고요한 극장인듯 묵묵하얏다. 눈물 한방울 안 흘니며……. 막은 내려간지 오래엿다. 결말은 나의 종명(終命)이엿다. 진작에 내어진 영결(永訣)이엇다.
내가 눈을 감을 제 너는 무어라 말햇든가―
“밉더ᅌᅵ요.”
하더라.
……ᄭᅳᇀ으로 나는 사라졋다.
0 爾
그것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러나 반쪽짜리 진심이었다. 즉 꾸밈없는 심(心)이긴 하였지만 망설임없는 진(眞)은 아니었음이다.
(후회에 대하였었다.)
“저기,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얘기 들어 보니까, 그래도 쌌던 것 같은데.”
“그렇죠?”
(까닭에 대하여: 외면은 아니었다. 과장도 물론 아니었다. 나의 눈으로만 판단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라고 말하려 했지만, 거짓임이 분명하였기에 실지로 행하진 않았다. 다만 그 대신,
“아저씨는 제가 왜 여기 온다고 생각하세요?”
2 余
나는 그 물음에 조금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해도 돼?”
“되다마다요.”
“……집안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너는 그 말을 듣더니 풋 하고 비웃음을 냈다. 그러곤,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응.”
“웃기지도 않네…….”
그녀의 눈동자에 언뜻 실망이 스쳤다.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게 아님 뭔데? 학교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왜요? 학교 일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거였으면 학교 일을 편하게 말하진 않았겠지.”
“괜찮은 척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지. 뭐가 진짜인지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려.”
“그래도…….”
너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나는 장의자에 앉아 묵묵히 앞을 보고 있었다. 어째선지, 이런 시간의 끝이 다가오는 듯했다.
줄곧 나는 서툴렀다.
0 爾
그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余를 떠났다. 余와 더 있으면, 나도 그처럼 세상과 괴리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余와 함께 있음으로써만, 余와 같은 장의자에 앉음으로써만, 나는 세상에서 괴리되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의해 이해될 수 있었다…….
역을 떠나오면서, 나는 내가 갈 데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 이제 학교도, 집도, 공원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汝가 아니었다. 그저 他일 뿐.
爾 ‘그저 他일 뿐’이라…….
하고 나는 어떤 말을 덧붙이려다가 만다.
爾 나를 ‘爾’라고 불러 준 사람이 있었던가.
있었다 해도 나는 지금 기억하지 못하기에 무용(無用)하다.
爾 모든 사람이 다 이런 걸까? 다 나처럼 ‘나’로서 불리지 못하는 걸까?
그러하리라.
爾 그렇다면 나는 왜, 남들도 다 겪는 걸 못 견디어서……?
(나는 누구 한 명 찾을 수 없었다. 누구 한 명 뵈지 않았다. 내가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했기에?)
爾 ……그[余]도 혼자일가?
모른다. 여지껏 내게 하였던 말이 온통 거짓부렁일 수도 있고, 내가 공원을 떠난 이후 새로운 만남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나는 모른다. 그를 모른다.
爾 모르는데 왜 나는 余를 떠났을가?
나도 그처럼 세상과 괴리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아니다. 사실은, 너무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의 눈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이, 그럼으로써 나는 희롱되고 결정되어 爾가 아닌 汝가 된다는 것이…….
하나 어쩌면, 애최 나 또한 그러한 爾로써 나를 희롱하고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팔다리를 꺾고 뒤틀어 ‘爾’라는 대명사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실제로, 그리 잔혹한 짓을 하고 있다.
爾 이러한 생각에 너는 한없이 서글퍼졌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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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되나
- 2024-04-28
《회색빛 골목길》 아(我) - 암캐한 블록을 가서 왼쪽으로 돌고, 이제 두 블록을 가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또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내가 익숙해하여 마지않는 어느 한 골목이 나온다. 나는 이 골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곤 하는데, 즉 “나의 골목”이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다.나의 골목에는 다른 골목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이 골목에는 ‘그들’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가족―정확히는 나의 부모님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는, 이 골목에는 어두움이 없다는 점이다. 어두움은, 없어야 마땅한 것이다.내가 이 골목에 ‘나의’라는 관형어를 붙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 이 년쯤 됐을까.(살아가는 기간에 비해서는 굉장히 짧다.) 내가 이 골목을 처음 발견한 당시에는, 정말 빨강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지러웠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빨강.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어지러운 점에 마음이 끌렸다. 그 끌림에 저항하지 않고 나는 골목을 꾸미기 시작한 것이었다.처음에 빨강이었던 골목은 차차 녹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바뀌어 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회색이 되었다. 이 골목이 처음 회색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내게 야유를 보내는 듯했다. 그들은 뭐라도 색이 있는 골목이 더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회색을 좋아하는 것을.회색은 색이 없으면서도 어둡지 않아서, 어렸을 적부터 죽 좋아해 왔다. 칙칙할망정 어둡지는 않다. 색이 없을망정 결코 어둡지는 않다. 그러한 회색이야말로 최고의 색상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회색이 내 골목의 색이 되었을 때, 나는 그야말로 환호했다. 어디서 파티라도 열 듯했다. 아니, 자그마하게나마 실제로 열었다. 판자 위에 빵 몇 조각과 우유 한 컵을 놓고, 두 명이서 파티를 즐겼다. 한 명은 나고, 다른 한 명은 개다. “야”라는 이름의 개.‘야’는 하얀 진돗개, 그러니까 흔히 ‘백구’라고들 부르는, 그런 시골 개다. 다른 백구들과 차이가 있다면, 조금 작고, 조금 더 아프다는 것뿐이다. ‘야’와 만난 지는 아직 한 달 정도밖에 안 되고, 당시에는 더욱이 얼마 안 되었는데, 즉 그때의 만남이 거의 초봉(初逢)이었던 것이다.“너도 먹을래?”한참 파티 중이던 내가, 멀리서 어슬렁거리던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기에 나는,“싫으면 말고.”“……으음.”그는 망설이다가, 이윽고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빵 조각을 집어 왼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에게 빵 조각을 올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에 주둥이를 대고, 빵 조각을 물었다. 씹고, 결국에는 삼켰다. 그의 하얀 몸체에는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나 있었다.“하나 더 먹을래?”나는 다른 한 조각을 다시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가 “으응” 하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빵 조각을 내밀었다. 그는 기쁜 듯했다.우유마저 그에게 줘 버리고 나서야, 나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이름이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리라고 다짐했다.‘야’라는
- 이거되나
- 2024-01-30
〈바다〉 1“어디서 왔어?”으레 그런 것이었다.“저쪽.”나는 저곳을 가리킨다. 어렴풋이, 빛바랜 색으로 보이는 섬. 그곳에는 나의 가족이 있고, 나의 친구가 있고, 내가 있다. 그러나 그곳에 나는 없다. 나는 떠나가 버렸다. 물론, 별일은 아니다. 으레 있다.……“전학 온 지 한 달인데, 뭐 불편한 건 없니?”“딱히요.”“그렇구나. 선생님은 요즘 네가 너무 혼자서만 다니는 것 같아 걱정이란다.”“신경 쓰지 마요. 어련히 잘살고 있으니까.”“지후야, 나는 네 선생님이란다…….”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과거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듯한, 그래서 내가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는 듯한…….그러나 하늘은 푸른빛이었다. 아콰마린 따위는 보석이 아니었다. 나는 그만 그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만다. 눈앞에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 눈부셨던 하늘이.하늘은 이제 회색이다.하늘은 내게로 고갤 돌리며 말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너무나 기가 찼다. 그러나 하늘은 맑게 개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날씨는 더 이상 비가 아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었다. 영롱한 보석들, 굴곡진 운율. 시적인 그의 말들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아 곧 유희였다. 하나 나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유희로…….유희란 이름이었던 듯도 하다. 아무래도 예쁘다.엉망진창이다. 발이 끈적거린다.회색 하늘에서는 이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이제 회색도 아니다. 청색에, 맑다. 나는 맑게 갠 하늘을 치어다보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미소가 환했다. 2미소가 좋다. 은은한 것이 좋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저 웃음이 좋은가 하면 그것도 또 아니다. 나는 그저 미소만이 좋은 것이다.하늘은 무심치 않아 죽 내 곁에 있었다. 뭉친 문장들이 풀리지 않는다. 영화 필름처럼 말끔하지가 않다. 내 곁에 있어서, 그는 있었다. 있었는가? 글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계속하여,“딱히요.”딱따구리처럼. 이제 아무것도 없는 하늘의 속에는 나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글쎄. 생각해 본 적 없어.”“내가 보기에 너는……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어.”“왜?”“선생님 같으니까!”“하하하!”순수하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하지만 이 회상은 그저 회상일 뿐이다. 필름이 망가진 다큐멘터리 영화일 뿐이다. 나는 인식한다. 3띄엄띄엄. 그것이 나의 기억이다. 망가져 있다. 무대는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진다. 나는 웃지 않는다.하늘은 여직 푸르다. 4아니다. 안 된다. 나는 떠올려야 한다.섬과 육지 사이를 뒤덮은 바다는 아주 푸르고 또 창창하여서, 그리고 광활하여서― 나는 그만 그를 모르고 만다. 모른 채 그는 나를 깜짝 놀래키려고 아주 작정을 하는 것이다.“와!”바다가 널따랗다. 널따란 바다는 나를 감싸고 있었다. 섬의 아이다. 섬이 낳았다고도 할 수 있는 아이다. 나는 편안했다. 하기에 그의 놀래킴에는 당하지 않은 것이다.솨
- 이거되나
- 20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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