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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 굽던 여인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3-11-17
  • 조회수 655

광화문 사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새문안 교회 앞 횡단보도에는, 붕어빵을 파는 노점이 하나 있었다. 그 즈음에 나는 정동에 위치해있던 예술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으므로, 학교가 끝나면 이따금 친구들과 그곳에 들러 붕어빵을 사먹었다. 막 구운 듯한 팥앙금과 때깔곱게 녹아내리는 금빛 슈크림이 바삭한 껍질 속에서 연기를 뿜어댔고, 친구들과 난 겨울이면 추위를 피해 붕어빵으로 속을 뜨겁게 채우고는 했다. 

가을에서 겨울이 다가올 때 까지 그랬다. 

특히 겨울의 노점은, 주황천막으로 덮여있던 탓에 검은 정장을 입은 직장인 무리들이 거리로 나올 때면 눈에 띄게 돋보이고는 했는데, 그 노점에 사람은 나와 친구들을 제외하자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렴풋이나마 그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었다. 노점상 때문이었다. 노점상은 보푸라기가 가득 덮인 낡은 옷가지를 걸치고, 붕어빵을 굽던 꽤 중후한 여인이었다는데,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기다리다보면 가끔씩은 천막 안으로 손님이 들어오기도 했다. 

여기 붕어빵 3천원 어치만 주세요

노점상은 붕어빵을 봉투에 담다가도 누군가가 오면 수어와 웅얼거리는 말씨로 무언가를 표현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마주한 사람들은 대게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급히, 또는 아무말없이 현수막을 빠져나갔다. 

그럴때면 친구들과 나는 노점상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면전에서 무시하거나, 자리를 피하는 손님들을 욕했다. 손님들이 도덕지이지 않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는 코로나가 성행하기 시작한 겨울이었다. 

뇌종양 판정을 받았고, 잠시 학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의사는 수술과 후휴증 치료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회복하라고 해보았자, 영혼 없는 육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시간의 나는 영혼의 잔재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제기불능의 상태와 다름없었다. 그 몇 달 동안 붕어빵은 그렇다치고, 광화문으로조차 나설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병실에서 삶도 죽음도 이도저도 아닌 무언가를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글쓰기를 권했다. 마음을 추스리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거라고, 초기 발견 덕분에 살았으니 고마운 줄 알고, 노력 해보자고 말이다. 

 전부터 비평이나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 기회를 통해 조금이나마 살고자하는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 (물론 제대로 된 비평, 또는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전이었으므로 그 것들을 글보다는 불쏘시개 정도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알맞다.)

그 몇 달동안 글은 완성하고 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이 후 요양을 위해 잠시 캐나다에서 생활을 하다가 제작년 겨울 몇 주간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겨울을 마주했고, 서울 시내를 싸돌아다녔다. 교보문고에 들려 몇년간 밀린 책들을 사고, 일년 가까이 창고에 묵혀있던 이젤과 연필 상자를 꺼내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동안 수집하기를 멈췄던 골동품들을 사기위해 인사동을 자주 들렀다. 집 거리에 있었는데도 몰랐던 독립영화관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그러다가는 문득이 어느 겨울마다 입 속에서 몸을 데우던 붕어빵이 생각났다. 붕어빵이 먹고싶었던거다. 붕어빵을 팔던 노점으로 향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새문안 교회 앞 횡단보도. 그곳에 든 것은 겨울바람과 신호등을 건너는 마스크 쓴 직장인들 뿐이었다.  

광화문 사거리 교회 앞 횡단보도에는, 더 이상 붕어빵을 굽던 아주머니와 주황 천막을 두른 노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듯이 겨울 오전 해만 돋았다. 그 곳에서 한참을 서있는동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붕어빵 굽던 아주머니는 어떻게 되셨을까. 

같이 이곳에서 붕어빵을 먹던 친구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직장인들은 무얼위해 길을 건너는가. 이제 붕어빵은 어떻게 먹지. 길을 건너온 사람들은 나를 힐끔씩 쳐다보며 아무 일없이 발을 땠다. 내가 지금껏 보낸 시간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다. 그렇다면 나의 가슴 속 사무치게 맺힌 이 공허함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도대체 어떤 게 나를 이리도 씁쓸히 만들었을까.

시간없는 시간폭풍이 몰아친 겨울이었다.


한 때 문학 평론가 김현은 ‘소설은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이 세상은 과연 살만한 세상인지 아닌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하기위한 가장 명료한 길이라고 했다. 

저번 주 토요일, 11월 11일은 세계 1차 대전 종전의 날이었다. 

참전국들은 전쟁에서 죽어나간 전사자와 참전용사들을 기렸다. 뉴스에는 참전용사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시상식이 보여졌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일었다. 

참전용사들은 국가에 떠밀려 동족을 죽인 살인자나 다름없는데, 정부에서는 자신들의 추악한 과오와 민낯을 은폐시켜버리고 살인자들을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한다. 

이 상황을 도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입막음? 세뇌? 부조리? 

참전용사에게는 죄가 있지만 없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여유조차 벌지 못했다. 정부가 그들을 괴롭혔다. ‘당신들이 적군을 죽이므로서 가족과 동지들을 구했습니다’라는 프로파간다적 합리화에 살인자들을 종속시켰고 순응시켰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살인은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참전용사들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개인 중 누구가는 원치않든 원하든 사람을 죽이면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윽 형을 선고받는다. 한국같은 법치국가일수록 그 문제는 더욱 기시화된다. 알량한 민족주의적 사고를 떨쳐내버리면 어차피 살인은 다 같은 살인인데, 국가를 위한 살인은 영웅이고 개인을 위한 살인은 범죄라는 것인가. 어림 없는 소리다. 동생에게 나의 생각을 말하자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에게 내 의견의 문제점을 물었다. 동생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 스스로도 나에게 ‘미친놈’이라고 말했으나, 정작  내가 왜 미친놈인지 서술하지 못한 것을 상기해본다면 동생역시 자신의 사고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모르지 않았을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그 모양인 이유는, 골치아픈 사고를 하지 않기 때문일테다. 사고하는 생각은 이야기가 된다. 

나는 골치 아픈 사고를 더욱 쉽게 유도하기위해 글을 썼다. 병상에서 든 많은 생각들. 당신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나를 조금이라도 가늠시켜주고 싶았다. 뱡문안을 오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이해해', 또는 '많이 힘들었구나' 처럼 동정어린 시선의 껍질 뿐인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의 발가벗은 몸을 그들에게 보였다. 글쓴이로서 타자의 세상을 다시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모순이 아닌 자신에게 일어난 조금의 새로운 시각의 변환이며, 결국 작가의 설득이라는 것을 모르면 안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개인의 사유는 개성이 되고, 자신의 사유를 들어낼 수록 타자는 새로이 무언가를 상기해보게된다. 어느날은 동생이 내게 내게 물었다.

작가는 어떤 거야? 나는 이해와 사유를 위해 애쓰는 나를, 무어라고 설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느적 동생이 내가 왜 미친놈인지 설명하지 못했던 것 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나. 그 해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글에 목숨을 걸 만큼, 작가의식이 압도적인 미친놈의 사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일을 곰곰 되새기면 되새어볼수록 붕어빵 가게 아주머니가 떠오르고는 했다. 사람들 속에서 붕어빵을 굽던 한 여인. 말 못하는 그녀를 마주하면 운수 똥 되었다는 표정을 짓던 사람들. 기억 속에 나와 친구들은 그 사람들을 욕했다. 

때는 알지 못했다. 오래 전 겨울, 내가 사회의 질타를 받던 그녀에게 했어야 할 일은, 자리를 회피한 손님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욕당한 노점상을 바라보아야 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아직도 이따금 나는 멸시를 받은 그녀가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 알고자하는 호기심과 죄책감이 뒤섞인 괴상한 욕망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그러나 이제 그 겨울들에 대해 내 머릿 속에 남은 것은, 아무 말 없이 철판에 계란물을 붇고 앙금을 붙이던 그녀의 모습 뿐이다. 붕어빵을 만들 때 마다 그녀의 입가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래, 아마 그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늘 그런 멸시를 받아왔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한다고,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고 멸시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멸시를 가슴 깊이 되뇌이기 보단, 아주머니처럼 그저 작은 미소로 붕어빵을 만드는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붕어빵은 아주머니와 사회를 유일하게 이어줄 메게체의 산물과 다름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쓸쓸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나는 아직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아주머니가 당황한 손님에게 방긋웃음으로 붕어빵이 담긴 봉투를 건네었듯이, 나 또한 작은 미소로 동생에게,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고만 싶다. 

내가 먹었던 붕어빵은 아직도 내 몸 속에서 체화되지 못한 채 배회하고있다. 나는 붕어빵을 소화하기 위해 오늘 날 까지도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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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든지 간에 끝난다는 건 씁쓸하다. 왕자와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통속적이고 관념적인 여느 이야기 마저 그렇다. 처음 글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꺠달은건, 황순원 작가님 덕분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를 보고 내 영혼이 젖어버림을 느꼈다. 이 후 씨의 작품을 열렬히 사모하게 되었다. '막은 내렸는데', '눈', '우산을 접으며' '땅울림'등등의 것들을 읽으며 나는 곧 소설이 사람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는 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멜라씨의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러했다. 와 , 와 을 읽을 떄, 그곳에서 내가 만난 것은 나의 어떠한 깊은 심장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은 김현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이다. 와 을 읽으며, 나도 이런 평론가의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소설로 방향을 튼 것은 아마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고나서 일 거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몰라도 나의 비평은 소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솔직히 하자면 태어나서 세계문학전집같은 걸 눈에 담아본 적 없다. 누군가 톨스토이와 카뮈와 카프카를 이야기 할 때,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그들의 무거운 글들을 잡아서 소화해낼 마음이 서지 않았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폴 드 만과 데리다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외국 작가였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어디 가서 부끄럽게도, 하고 있는 일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 싫어서, 억지로 토해내듯, 글 써요, 하는 말을 내뱉을 때, 난 수치심을 느꼈다.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면 주변에서 대치동 강남에서 학원받으며 과학고 간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고, 누군가는 한심하게 쳐다본다. 초등학교 떄 별볼일 없던 친구가 예고의 문예창작헉과에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너도 글 써? 나도 글 쓰는데...하고 말하면 듣는 말이, 좋아하는 작가 누구야? 카프카? 톨스토이? 글 보여주면 좋겠다...등의 것들이다. 난 사실 정지용과 황순원과 김멜라와 권여선을 사랑한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 곳에서 뽐내기 위해 아는 척 했다. 톨스토아보단 도스토예프스키지 않아? 사실 난 그 누구의 작품도 읽어본 적 없다. 이건 고해성사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말의 의중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알까? 마지막으로 쓴 글은, 작년 11월에 글틴에 기고한 다. 그건 내 전부다. 나는 그 글을 쓰며 나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알았고, 이 후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 후 알게 된 사실은, 결국 글이란 세상이란 거다. 문장이란 것을 조립, 배치하며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재미다. 근데 그 세상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결국 내 세상은 어떠한 욕망의 발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조립된 세상의 이면에는, 그 어떤 계기나 동력도 존재하지

  •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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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 2024-01-10
검은세상, 하얀 겨울

세연에게 가고 있다. 겨울이었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폭설로 인해 공사를 잠정중단하거나, 일당을 미지급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기에 하루에 붙들릴 일도 없다. 서울역 노숙자들은 눈 오는 날보다 따수운, 그러나 여전히 찬 겨울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다. 늘 막히는 한강대로도, 눈으로 인해 교통체증을 빚을 일이 없었고, 택시나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는 일도 없다. 눈을 녹이기 위해 도로에 뿌려질 염화칼슘이 세연에게 가기를 괴로워하는 나를 설득하듯,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믿서 오독오독 비명을 지르며 부숴질 일도 없었고, 그게 신경은 좀 쓰이겠지만, 나를 멈춰세울 일이 없었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또는 어느 벽 담장에 메달린, 산성비가 굳게 되어버린 고드름을 핥으려 안달난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눈은 우리를 막는 병폐로 존재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눈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을 괴롭히는, 비효율적인 자연재해인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교통체증으로 피해 볼 일이 없고, 노동을 할 일도 없으며, 노숙을 할 일은 더욱이 없었다. 누군가를 괴롭게 만나러 갈 일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여전히 추운 겨울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 만화영화를 보다가 힐끔, 창 밖을 확인하며 눈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찬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유리창 앞에 서서, 언젠가는 눈이 내릴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어른들은 출근하기 전 창 밖을 보며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교통체증으로 직장에 늦을지는 않을지, 날씨가 추워서 하루가 고되지는 않을지 걱정 하며,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지닌다. 나는 눈이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눈이 내리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을 사람은 나다. 나는 구질구질한 어른들의 세계에 살아서, 눈이 내리고 나버리면, 나를 가로막을 하얀 얼음,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도저히 세연에게 갈 수 없을거다. 세연은 눈이 내리길 바라고 있을테지. 그녀에게는 나를 만나는 것 보다 눈이 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할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적어도 하나를 알고있다. 이 세상은, 겨우 동심 하나로 어른들의 세상을 덮어 버리기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세연에게로 가고있다. 세연을 만난 건, 눈 내리지 않는 육년 전 겨울이었다. 당시 초임 영화 평론가였던 나는, 삼류 독립영화 감독들을 취재하기 바빴고, 광화문에서 한 신인 감독이 저예산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해서, 잡지사는 촬영지 근처 살고 있던 내게 신인감독 인터뷰를 맞겼다. 영화촬영장은 굉장히 지저분했고 스태프도 대여섯명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감독이라는 작자는 꽤 단아하고 청순한 여인이었는데, 어림잡아 이십대 중반, 나와 엇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안녕하세요, 신인감독 이세연입니다.그녀는,기운이 밝고 흔쾌해서 늘 깐깐하게 굴던 여타 중견감독보다 훨씬 좋았고, 질문에 답을 빙 돌려대서 말하는 어느 예술감독에 비해 시원시원한 답들과 기상천외한 담론들을 꺼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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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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