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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의 첫사랑이다

  • 작성자 난바다
  • 작성일 2023-11-20
  • 조회수 662

너는 참 신기한 아이였다너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그랬다너는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아이인가그럴 지도 모르지.

 

난 서서히 잦아지는 참새 소리를 귓가에 얹고선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을 자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참새 소리가 퍽 낭만이라며 참새가 싫다던 내게 잔소리를 한 지는 언제고참새가 왔다는 것을 알면 울상을 지은 채 내게 왜 깨우지 않았냐며 매달릴 것을 알면서도 난 일부러 너를 깨우지 않았다너의 동그란 두상을 이 때만 볼 수 있었으니까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이렇게 말하면 철없는 나의 친구들은 내게 그 애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면서 놀려댈 것이 분명한가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들을 명랑한 종소리와 함께 난 꿀꺽 삼켰다하나벌떡종소리만 울리면 일어나는 습관이 있는 것인지너는 삼킨 내 말들과 함께 일어나서는 총총 창문으로 뛰어갔다씩씩대는 등을 보니 어지간히 분한 모양하긴간절히 원하는 참새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니 그럴 만하긴 했다역시나 너는 붉어진 얼굴로 내게 달려와 나의 등을 찰싹 때렸다작은 고추가 맵다고키도 작은 녀석이 손은 매웠다내 하루를 말하자면 대부분 이러한 일상이 다였다내가 너를 놀리면 너는 내게 총총 달려와 화풀이를 하고나는 거기에 웃고언제 네가 내 일상에 없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내 일상에 너는 확실히 박혀 있었다.

 

그런 내가 언제 너를 처음 만났나내가 이리 말하면 첫 번째로 너는 그걸 왜 물어보냐고 화 낼 것이었고 결국 머리를 감싸 매고 곰곰이 생각하다 아마 작년 겨울이라고 답할 것임이 분명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너의 대답은 오답우리의 첫 만남은 일곱 살의 겨울이었다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의 일이었다그 때는 첫 눈이 내리던 날이었고 길거리에선 모두가 연말을 즐겼다나는 후진 놀이터 그네에 앉아 담요를 둘러싼 채로 흰 눈을 맞았다그리 얇은 옷으로 나갔다간 감기에 걸릴 것이 분명한데도 난 밖을 나섰다첫째로 그런 나를 말려줄 부모님은 두 분 다 출장을 나가셨다는 점과 둘째로 차라리 감기에 걸린다면 부모님이 집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일곱 살의 나는 눈을 맞고 싶어 했고일석이조라면서 나는 얼레벌레 집 밖을 나섰다나는 낭만을 기대하며 나섰지만 푸른 색 담요만 휘감은 채로 눈을 맞는 것은 낭만보다는 서러움에 가까운 일이었다아마 담요만이 그것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그네에서 서러운 울음 소리마냥 끼익 소리가 났던 것도지나가는 사람마다 혼자가 아니었던 것도나름 문학 소년이었던 내겐 이 모든 것들이 다 구슬펐던 지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그네에서 끼익 소리가 날 때마다 입에서도 엉엉 소리가 나왔다겨울바람에 눈물이 계속 마르는데도 눈은 여전히 촉촉했다눈물이 아니라 눈인 거야눈 때문에 촉촉한 거야나는 연신 혼잣말을 해대며 눈을 비볐다흰 눈을 맞으러 나온 것인데 도리어 흰 눈이 보기 싫어졌다차가운 눈은 나를 더 혼자로 만들고 있었다서러움에 또 다시 엉엉눈물을 쏟으려 할 때에 내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얼굴에 따스함도 느껴졌다.

 

-왜 울어?

 

일곱 살의 너는 나보다 컸다작년 네가 첫 만남으로 오인하던 그 때에 기린이라며 나보고 왜 이렇게 크냐고난 작아서 속상하다며 말하던 네 말과는 달리 너는 나보다 훨씬 컸다너무 커서 내가 고개를 이리 들고 너를 보아야 할 만큼하늘에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을 때라 눈 위로 흰 눈이 겹쳤다따가웠다근데도 상관없었다네 뒤에서 흰 눈이 반짝이며 내리고 너는 그보다 더 반짝이며 내 볼을 만지고 있었으니까왜 우냐는 네 물음에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너를 바라보았다너는 무심한 눈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우리 사이에 흐르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정작 말을 건네주니 대답을 하지 않는 내게 단단히 심통이 난 것인지아니면 흥미가 없어졌던 모양인지너는 나와 같이 한참을 나를 쳐다보다 이내 먼저 뒤돌아서서 지금과 같은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눈 위로 너의 발자국이 남아있었다네가 간 뒤나는 일부러 너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그러다 보면 우연히 너의 발과 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었다그게 뭐라고너는 이미 떠나가 없는데 난 그걸 가지고 그렇게 좋아했었다그 이후의 후일담을 풀자면 나는 너를 찾으려고 온 동네를 쑤시고 다녔다는 것과 그러다 감기에 걸렸다는 것그럼에도 부모님은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이제는 섭섭하지 않다부모님께도 사정이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그 뒤의 내용은 별 다르지 않다무던한 나날을 보냈고 무던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무던한 성격을 가지게 되어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지루하고 또 지루한 나날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너와의 만남은 꽤나 기적처럼 느껴졌다내 무던한 일상을 없애줄그런 기적 말이다앞서 말했듯 나는 어렸을 적부터 문학 소년이었다. (스스로를 문학 소년이라 칭하는 것은 꽤나 오글거리기는 하다.) 그러다 보니 내 취미 중 한 가지는 자연스레 책방을 가는 것이 되었다그것도 오래된 책방최근에 생긴 책방은 아무래도 인터넷에서 많이 홍보하는즉 이미 인기가 많은 책밖에 없었다나는 그런 책보다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소설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그러한 책들은 대부분 오래된 책방에 있었으므로게다가 나는 오래된 책방 그 특유의 분위기 역시 사랑했다낡은 책 향 속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살이란낭만 그 자체라고 해야 할까그러다 보니 동네에 숨겨져 있는 책방을 탐험하는 것이 어느 새 학교 끝나고 난 뒤에 하는차례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다그 날도 학교 끝나고 교복을 반듯이 차려 입은 채 인터넷에서 겨우 찾은 오래된 책방을 찾고 있었다워낙 꼬불꼬불한 길 끝에 있었고 가면서 워낙 벽마다 낙서가 가득했던 데다 아침에 눈이 내려서인지길도 미끄러운 탓에 이번 딱 한 번만 가고 다시는 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던 참이었다그 순간에 네가 그 책방에서 나왔다겨울바람에 다리가 시릴 텐데 너는 나와 마찬가지로 반듯한 교복을 입은 채였다만화책 속에서나 보던 빗자루를 들고 나와 그 날아침에 내린 눈을 너는 쓸고 있었다그러다 나는 너와 눈이 마주쳤다너의 눈은 흰 눈만큼이나 깨끗했다이윽고 너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꽂혔다.

 

-기린이다!

 

초면에 말하기는 꽤나 무례한 말이었다너는 그것을 알았는지헉하고 입을 틀어막곤 내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내 별명이 기린인 것은 어찌 알았는지추위 때문인지부끄러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귀가 새빨개진 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웃고 말았다계속 내가 웃은 탓일까너는 너무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고선 고개를 계속 흔들었다나는 그런 네 모습에 또 웃고 말았다너무 크게 웃었던 것 때문인지곧 이어 책방 안에 있던 남자가 나와서는 나와 너를 연달아 보았다그리곤 찰싹너의 등을 때렸다아버지라며 애교를 부리던 너의 말투너는 그 책방 아저씨의 딸이었다그 모습을 보곤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씩씩거렸던 내 생각은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툭하니 버려버렸다나는 이젠 그 책방의 둘도 없는 단골이 되었다매일 학교가 끝나자마자 달려가며 늘 첫 손님 역할을 해냈다처음에 나를 별로 좋게 보지 않던 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던 것 때문인지이제 내가 책방에 오지 않으면 도리어 연락을 해 왜 오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너는 좋은 녀석이었다.

 

아저씨 역시 (그니까 너의 아버지는너만큼이나 좋은 분이셨다오래된 책방에 내가 오랫동안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몰래 음료를 내놓으시면서 자신이 예전에 샀던 것이라며 예쁘게 포장된 편지지를 주셨다그러곤 자신의 아내에게 편지를 전달할 것이라면서 또 다른 편지지를 꺼내와 내 옆에서 글을 쓰셨다아저씨 얼굴엔 상처가 어렴풋이 남아 있어 누군가가 보면 험상궂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외모였으나 그런 외견과는 달리 아저씨는 나보다도 훨씬 감성적인 분이셨다글씨체도 예쁘셨고 편지지를 포장하는 솜씨나 그 끝에 작은 꽃을 꺾어 꽂아 넣는 것을 보면 그러하였다가끔은 소설책만 읽는 내게 편지를 쓰는 방법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으시기도 하셨다처음엔 거절하였지만 이런 감성적인 분은 도대체 어떤 글을 쓰실까 궁금하여 얼떨결에 너도 모르는 글쓰기 강의가 열리기도 했다. 물론 그 글쓰기에서 배운 것들은 모두 너에게 줄 편지에 쓰곤 했지만 너는 모르는 사항이었다. 강의로 인해 신기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난 악필로 소문난 사람이건만어느 순간부터 내 글씨체가 예쁘다면서 칭찬하는 애들이 늘어났다아저씨는 어쩌면 책방을 운영하기보단 캘리그래피 강의를 열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그렇지만 정말로 책방 문을 닫으라는 소리는 아니다아저씨의 책방 역시 내게 있어 너무 소중한 장소이니까.

 

정말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유명해지길 바라지만 나만 알고 싶은그런 곳이었다다만 아저씨의 책방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운 편이었다너무 구석에 있던 탓이었다책을 워낙 좋아하고 수집하길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선 나름 유명했으나 이 곳까지 오는 데 너무 길이 복잡한 탓에 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더 학교 근처에 있으면 좋을 텐데괜한 아쉬운 마음에 아저씨에게 물었다왜 이 곳에 책방을 지으신 거냐고그럼 아저씨는 훤히 덧니를 보이시곤 대답하셨다여기가 햇살이 잘 들잖아이 책방에 자주 오는 사람만이 아는 공간이 있다바로 일명 유리방책방 깊은 곳에 들어가면 천장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유리방으로 부르곤 했다그 곳에 놓인 소파에 누워있으면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그것이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설마고작 그런 이유라니햇살 하나로 이 곳에 책방을 지으신 아저씨의 생각이 놀라우면서도 퍽 시인의 감성이라 나는 아저씨를 더욱 달리 보게 되었다아저씨는 정말 멋있는 분이시구나하고늘 감탄을 했었다.

 

너는 그런 멋있는 분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 아저씨와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네가 수업 시간에 깨어 있는 이유도 특별했다봄에는 벚꽃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잠을 자지 않았고 여름에는 매미 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눈을 치켜떴다가을에는 낙엽 지는 소리를겨울에는 겨울 참새가 짹짹하고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졸린 눈을 비비고 너는 굳세게 고개를 들었다정말이지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고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깨어 있다니그렇게 말하는 네가 신기하면서도 웃겼다키가 큰 나는 늘 뒷자리라 키가 작은 너를 뒤에서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러니 네가 잔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꽤나 신나는 일이라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필기하는 것도 멈추고 동그란 너의 머리가 꾸벅 꾸벅 조는 것만을 바라보았다너에겐 중요하다던 그 모든 소리는 내게 잘 들리지 않았다겨울 참새의 부푼 그 모습 역시 잘 보이지 않았다동그란 너의 머리만 보였다.

 

그 탓에 오늘도 어김없이 너에게 맞는 신세가 되었지만 후회는 없었다나는 충분히 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그리고 너도 내게 투덜거리며 나의 어깨를 세게 치긴 해도 또 내게 조용히 줄 이어폰을 내밀어 같이 라디오를 듣자고 할 것이었다너와 버스를 타고 책방을 가던 길이면 너와 나는 늘 그렇게 이어폰을 각 한 쪽씩 나눠 낀 채로 책방을 향해 떠났다역시나 너는 그랬다나는 버스의 덜커덩 소리와 함께 줄 이어폰 한 쪽을 말없이 내미는 너를 한참을 바라보았다너는 변함이 없었다너는 줄 이어폰과 함께 오렌지 맛 사탕을 건네주었다난 아무렇지 않게 오렌지 맛 사탕을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손이 떨렸다.

 

고요히 들려오는 라디오 노랫소리를 들으며 나는 힐끔 너를 쳐다보았다정말이지너도아저씨도참 라디오를 좋아하셨다특히 낡은 라디오치지직 소리가 연신 나 내용이 뭔지 잘 들리지 않으면서도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참 좋아하셨다그 소리가 뭐가 좋다고내가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모르는지매정하게도 버스 창가만을 바라보던 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흥얼거렸다나도 너와 맞춰 노래 한 소절을 몰래 따라 불렀다음치라 그런가너처럼 맑은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책방에 도착하자 오늘도 전과 마찬가지로 아저씨가 나와 우리를 반겨주셨다어김없이 책방에서는 너와 같이 듣던 라디오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아저씨가 음료를 가지러 오러 잠깐 들어간 사이너는 흥을 참지 못하고 그것에 신이 나 벌떡 일어서서는 한 바퀴를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치지직치지직너의 그 모습을 바라보니 김춘수의 을 패러디한 시가 문득 떠올랐다그 시 내용처럼 현대인들의 가볍고 경박한 사랑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그저 그 시 제목 말이다그것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어도 그저 자연스레 내 머릿속엔 그 제목이 떠올랐다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너는 내게 그 제목을 들었을 때 뭐라고 반응했던가모두의 라디오는 다 고장 난 것이라 하였던가.

 

-얘들아음료 마시자.

-콜라는?

-추우니까 핫초코 먹어.

-콜라콜라.

-탄산 몸에 안 좋아.

-그래도.

 

아저씨는 네가 좋아한다던 마시멜로우는 빼먹지 않고 핫초코에 올려주셨다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너는 결국 콜라도 좋지만 핫초코도 좋다며 헤헤하고 웃음을 지어보였다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핫초코를 마시며 나는 다시금 소설책 하나를 뽑아 자리를 잡고 읽었다내게 어김없이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이었다너는 자리에 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고 아저씨는 편지를 쓰고어느덧 익숙해진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나는 네가 준 오렌지 사탕을 주머니에서 꺼내 입 안에 넣었다데굴데굴동그란 사탕이 계속 내 이를 건드렸다살짝 씁쓸한 피 향이 느껴졌다그리고 꽤나 큰 추위가 느껴졌다이상한 일이었다분명 아저씨는 늘 책방을 따뜻하게 하시는데라디오 노이즈 소리와 겹쳐진 포근한 소리도 들려왔다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천장에 달린 유리창은 새하얗다뒤이어 너의 목소리가 겹친다.

 

-눈이다!

-잠깐추워!

 

금세 뜨개질하던 것을 책상 위로 던진 채 너는 딸랑 담요 하나와 슬리퍼를 챙긴 채로 밖을 나섰다아저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지만 너의 모습은 그리 빨리 사라졌더라머쓱하게 운동화 한 켤레를 들고 있는 아저씨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가 갔다 올게요.

-그래줄 수 있니?

-오랜만에 눈도 맞고 싶고요.

-잠깐 있어보렴.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아저씨는 담요 하나를 더 챙겨오셨다이렇게 나가면 추워두툼한 담요를 내게 둘러주시고는 내 머리카락을 거침없이 헝클이신다머리카락 끝에 남은 온기에 나는 잠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떠나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슬리퍼 자국이 잔뜩 남겨진 눈밭을 바라보곤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아저씨는 그 두툼하고 큰 손을 흔들고 계셨다.

 

슬리퍼 자국을 따라가니 곧 네가 보였다발이 새빨개져서는 추위도 잊은 것인지 너는 눈밭에 마구 너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너는 언제나 그대로였다나는 빠르게도 내리는 눈을 헤쳐 너에게로 다가갔다.

 

-안 추워?

-추워.

-운동화 신어야지.

-그건 싫은데.

-너 발 새빨개.

-그게 뭐 어때서.

-감기 걸려.

-그것도 낭만 아니겠어.

 

너는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덧니를 보이며 웃었다결국에 나와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 끝에 너는 내게 붙잡히고 말았다슬리퍼를 벗기고 운동화 끈을 다시 묶어주는 내게 너는 삐진 말투로 물었다.

 

-네가 내 아빠야?

-아버지는 아니더라도 아버지 측근이야.

-날 더 일찍 만났으면서.

-동시에 만났지.

-아니거든.

 

나도 알거든.

 

네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너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눈이 쌓인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털고 있었다순간 말문이 막힌 나를 향해 너는 다시 말을 꺼냈다.

 

-모를 줄 알았어?

-....

-넌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너는 내 겨울인 걸.


너는 내 겨울이라니.

 

네 말에 너보다도 내 얼굴이 더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너는 아무 의미 없이 붙인 말이겠지만 그 말에 쑥스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코끝이 시리다바람이 불었다내 잔잔한 강에 파동을 일으킨 너는 그런 내 속도 모르는지 그저 눈이 왔다며 좋아하고 있었다너의 머리 위로 눈이 내려앉았다네가 좋아하는 동화에 맞게 몸소 얼음여왕이 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이 소리를 내었다하고짧고도 굵게그러나 너는 듣지 못할 정도로참으로 알맞은 소리였다너는 여전히 하늘에서 쏟아지는 흰 눈만을 너의 눈 속에 담고 있었다나는 너와 달리 흰 눈이 아닌 다른 눈을 내 눈에 담기 바빴다한 번만이라도 그 눈으로 흰 눈이 아닌 나의 눈을 담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문득 그 생각까지 도달하자 추위로 인해 빨개지는 것이라 굳게 믿었던 내 얼굴이 더욱 빨갛게 익어가는 것이 느껴졌다정말이지.

 

불어오는 바람에 더욱 눈이 시린 난 고요히 눈을 감았다바람이 나부끼는 소리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너의 깡총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아니야설마 정말이겠어라고계속 부정해오던 내 어리석은 생각들은 하나둘씩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눈꺼풀을 슬며시 드니 눈으로 인해 물기를 잔뜩 머금은 속눈썹 사이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너의 모습이 내 눈에 자연스레 담겼다.

 

차가운 바람 사이여전히 흰 눈에 반짝이는 너의 연갈색 머리카락살짝 붉어진 볼그리고 철없이 지어지는 너의 미소.

 

네가 웃는다흰 눈보다도 더 새하얗게.

 

나는 나도 몰래 샐쭉 웃음을 지어보였다갈비뼈를 마구 두드리는 심장 소리가 나의 모든 것을 나타내주고 있었다네가 만든 눈사람처럼 하얗게 맑은 너의 발걸음에 맞춰 내 심장 소리가 둥둥 울린다입 안에선 네가 준 사탕이 데굴데굴 굴러간다이명처럼 귓속에선 너와 같이 듣던 낡은 라디오 속 노래가 슬며시 흘러나왔다너에게 쓸 편지를 주려 네가 좋아한다던 시집을 찾기 위해 낡은 책방에 하루 종일 글자를 쓰던 나의 모습이 이 순간 떠오르는 이유는 뭐지?

 

.

 

그제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오래된 라디오이자 책이며 글자인 너는.

 

너는 나의 첫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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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연극배우 일을 그만 두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안 되어서. 지극히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인 이유. 하지만 내가 만약 이성적이고 현실만 계산하는 사람이었더라면 애초에 연극배우 일을 하기로 마음먹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니까, 어쩔 수 없다는 소리다. 내가 몇 십 년간 내 삶을 바쳤던 극단이 망한 것도,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투잡으로 뛰던 편의점 알바와 십 만원이라는 종이 쪼가리라는 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결정된 사항들이었다. 그 사항들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있었다면 차라리 내게 말해주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만큼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뭐, 내가 이렇게 말해봤자 사람들은 이것 역시 세상의 이치이며 핑계라고 말하겠지만 그냥. 말이라도 하는 건 가능하니까 해보는 거였다.“크.”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가는 소주의 맛은 썼다.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는 술 같은 건 마시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이 술을 마시진 않고서야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몇 년 만에 마시는 거였다. 늘 컵라면으로 버티던 내 몸뚱이는 오랜만에 맛보는 소주가 어색한 모양인지. 파르르 떨어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라면 돼지 껍데기로 끝났을 내 안주 역시 이번만큼은 곱창! 일인분에 삼 만원. 소주 하나에 사천 원. 평소 같았으면 덜덜 떨며 애써 외면할 것들. 그러나 오늘만큼은 호쾌하게 질러보았다. 나와 같이 곱창을 이것저것 주워 먹고 있던 김씨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며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글쎄. 김씨 아저씨야말로 소주를 연달아 마시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아저씨가 취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 처음 본 사이인 사람에게 곱창을 같이 먹어도 되냐고 물어볼 정도로 깡다구를 지닌 사람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걸까. 잘 모르겠네. 의식이 흐릿해지니 김씨 아저씨와 어떻게 곱창을 먹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김씨 아저씨가 자신을 ‘김씨 아저씨’라 부르라고 한 것만 어렴풋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성이 김씨냐는 내 물음에, 제 성은 김씨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많은 성이 김씨이니 그렇게 불러달라고 말하던, 괴짜 아저씨. 평소 같았으면 동석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지만 오늘이 날이라 그런 건지. 그냥 누군가와 술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그 거지꼴을 보고도 흔쾌히 좋다고 말한 거일지도 모른다.우리는 한참을 곱창을 주워 먹다 진로 한 병과 참이슬 한 병, 그리고 곱창 일인분을 추가로 시켰다. 평소 술은 두병까지 최대인 내가 이렇게나 많이 마시다니. 곱창을 한 번에 세 개는 밀어 넣던 김씨 아저씨는 소주만 연신 마시던 나를 슬그머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어디서 뭐하다 왔나?”“그냥 배우 일하다 왔습니다.”그래 라고 말하고는 김씨 아저씨는 말없이 소주를 입에다 털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아저씨를 따라 소주를 입에다 털어냈다. 소주는 썼다. 크. 김씨 아저씨와 내 입에서도 동시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다른 테이블과 달리 유난히 고요하게 곱창만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김씨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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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4
물거품

비가 오면 망할 반지하 방에는 물이 스며들어왔다. 비는 멈춘 지 오래이건만. 이미 반지하 방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들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이 물을 푸는 와중에도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물줄기를 보며 숨이 턱 끝까지 막혔다. 역시 이 놈의 가난은 내가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내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이 새어 들어오는 물줄기인지, 아니면 내가 흐르는 눈물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이 망할 가난은 물줄기와도 같아서 퍼내고 퍼내어도 끝이 없이 쏟아지고. 결국엔 이 방을 무슨 어항처럼 만들고는 우리를 다 익사시키지는 않을까, 하고. 창문 바로 밑에 주전자를 두고 다시 테이프를 덧붙이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은 동생이 풀어야 한다고 떼를 썼던 문제집과 내 소설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맨 위 선반에 두었다는 점일 것이다. 불행은 동생의 교복이 쫄딱 젖었다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그러면 불행이 너무 큰가? 알 수 없다. 하필이면 오늘이 또 일요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마 아빠가 지어주신 민주라는 이름은 총명할 민慜에 모일 주輳가 아닌 망할 민泯에 살 주住겠지. 내 인생이 이렇게 망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아, 아니지. 주는 살 주住가 아닌 젖을 주澍인가? 물에 빠진 쥐새끼마냥 쫄딱 젖은 내 꼬락서니를 보면 말이야. 사실 잘 모르겠다. 뭐, 어느 쪽이 되었든 내 인생이 시궁창 인생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별로 상관할 필요도 없긴 했다. 어떨 때는 시궁창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제 처지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으나 그것도 옛말. 지금은 시궁창 인생에라도 머무르려고 몸부림치는 중이다.물론 어렸을 때부터 운이 더럽게 없는 놈이라는 소리는 자주 듣고는 했었다. 태어나 보니 집은 반지하에 어머니라는 사람은 빚을 잔뜩 진 채로 내 나이 열하나에 소리 소문 없이 도망쳤다는 사실은 어지간히 운이 더럽게 없지 않고서야 일어나긴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가 그나마 민환이와 나를 챙겨주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셨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 세상을 뜨셨다. 사인은 영양실조. 현대 사회에서 웬 영양실조가 사인인 경우도 있냐고 하지만 그 경우가 우리 가족이었다. 30대 청년이 아사로 사망했다는 뉴스에 요즘 누가 영양실조나 아사로 죽냐는 댓글을 바라보며 그래, 그 경우 여기 있더라, 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지막 인사할 때는 웃으면서 인사하고 싶다던, 삐쩍 말라붙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손으로나마 인사하고 싶었지만 또 그러지 못했다. 엉엉, 또 울면서 아빠, 아빠 가지 마요, 라고 떼를 썼다. 내 나이 열아홉, 민환이 나이 아홉. 영장사진을 겨우 드는 민환이의 손을 꾹 붙잡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네 손에는 물 안 묻히게 해 줄게. 누나가 민환이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라고. 엉엉 우는 민환이의 귓가에 손을 대고 다짐과 같은 말을 뱉었다. 그 다짐, 아직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교복을 말리러 밖에 나선 이 순간에도 민환이

  • 난바다
  •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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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바다

    그동안 올렸던 소설은 좀 우울한 내용이 많아서 한 번쯤은 산뜻한 느낌의 소설도 써보고 싶었어요 ㅎㅎ 모두가 한 번쯤은 누군가의 첫사랑이겠거니, 하고서 쓴 글이라 인물 간의 이름은 굳이 안 넣었어요! 늘 감사드립니다

    • 2023-11-26 14:23:26
    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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