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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잊혀짐2: 막은 내렸는데 / 황순원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3-12-03
  • 조회수 592

 

주인공 나와요걸음걸이가 그래서 쓰나끼니가 없어 죽는 자살자는 아니잖어실연한 자의 죽음두 아니구어깨를 좀 펴구 큰걸음으루 걸어요한 손은 포켓에 찌른 채루 좋아그렇지그 손으룬 약을 만지작거려야지이따가 먹을 극약 말야.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구 있는줄 아나보군천만에자살하기루 작정한 뒤룬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졌다는 걸 알아야지내 걸음이 이런 건요 얼마전부터의 습관에서 온 것 뿐인데.

남자는 약간 걸음에 신경을 쓰면서 앞으로 걸어간다.

오늘밤에도 길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다남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통 보지 않고 걷는다이것도 최근에 생긴 습관이다이 끊임없는 행인들 속에서 남자는 저만치 유리돼있는 자기를 느낀다돌연 앞에서 불빛이 번쩍한다거리의 사진사가 플래시를 터친 것이다물론 남자 자기를 향해서일 리 없다옆에 팔을 끼고 걷는 남녀를 향해서인 것이다그러나 남자는 어쩌면 자기의 어느 한 부분이 사진 속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는다아무런 개체를 지니지 못한사진 주인편에서 보면 거추장스럽기 마련인 한낱 군더더기로서그러면 어쨌다는 건가남자의 입가장자리에 잠깐 쓴 웃음이 번진다.

남녀에게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쇼윈도우가 눈에 들어온다남자는 살 물건이나 있는 것처럼 가까이 가 들여다본다.

주인공의 뒤를 펜끝이 바싹 쫓는다.

형광등 불빛 속에 진열돼있는 각종 시계들그것들이 모두 저저끔의 시간을 가리킨 채 멎어있다남자는 아직 시간에 구애될 때가 아니라는 걸 안다그러면서도 점포 안에 걸려있는 괘종시계를 기계적으로 바라본다

아홉시 삼십분 조금 전시계에 이어 진열된 보석에 시선을 옮긴다갖가지 보석과 귀금속들이 저나름대로의 모양을 지니고 저나름대로의 광택을 발하고 있다남자는 한번도 이러한 것들을 소유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그것들의 용도가 없는 것이다그저 이러한 보석 귀금속들을 대낮에 허공을 향해또는 밤거리를 향해 짝짝 뿌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지금도 남자는 이것들을 몇 움큼 쥐어서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포도에다 흩뿌려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앞을 물러난다.

 

얼마를 가다 남자는 눈에 띄는 한 골목으로 꺾어든다그리고 서너 집 들어 간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왕대폿집 앞이다.

술 생각이 나는가보군들어가두 좋아그렇지만 너무 취하도록 마셔선 안 돼몽롱한 상태에서의 자살은 내게 필요없으니까어쩌면 또 자살 하려는 결심을 마비시킬지두 모르는 거구.

아니지남자는 얼른 부인한다술따위에 사로잡힐 내가 아니지남자는 홀 안으로 들어선다상당히 큰 홀 안이 왁자그르르하다아무데고 빈 자리를 찾아가 앉는다한 탁자에 여럿이 동석을 하게 된 자리다먼저 와 있는 옆의 사람들이 일방 마시고 일방 떠들어댄다남자는 막 리 반되를 시켜 따라 마신다.

주위는 한결같이 왁자지껄하다그 소음 위로 간간 높은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솟는다이런 속에서 남자는 또 생각한다나는 혼자다떨어져나온 하나의 조각이다그러다가 남자는그러나하고 생각을 바꿔본다그렇지만 않았던 때가 내게도 있긴 있었지내가 설계한 빌딩의 현장 감독까지 맡고 있을 때였지의욕과 정열은 과로를 무시했고그래서 어느날 현장 2층에 맨 비계를 헛짚고 밑으로 떨어졌지실려가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자기의 전신이 도무지 내 몸같지가 않았어그런데도 잠시 동안 정신은 이상하게 또렷했지영롱할 정도로 또렷했지인제 자기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눈앞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지어머니나 아버지 얼굴이 아니었어우리들만은 한번 보람있는 일을 해보자고 부푼 포부를 갖고 뜻을 같이했던 몇몇 친구의 얼굴들이었지서로 가 배반하지도배반할 수도 없는 얼굴들그때 자기는 혼자가 아니었어그들과 함께 이세상에 무엇인가 손톱자국같은 것이라도 남기고 싶었는데정말 그대로 죽긴 억울했어눈물이 와락 솟았지그제야 부모의 얼굴 이 눈앞에 어룽져왔었지.

 

남자는 반되 주전자를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됐어거기는 술을 먹자구 들면 서너 되쯤 문제가 아니지허지만 오늘은 그만해두는 게 좋아요역시 의지가 굳군.

 

남자는 담배를 피워문다그러고도 아직 담배 한 가치가 남아있다그 거면 된다하늘을 쳐다본다별빛이 있다계속해서 날씨가 좋군그러다가 남자는 피식 웃는다날씨에 관심할 것 없지 않은가자기 주검 위에 비가 뿌리거나 이슬이 내리거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포켓 속 약을 만지며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시간을 보내기 위해 부근을 거닐 참이다자살할 장소와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장소를 한강 모래사장으로 택한 데에는 별 이유란 없다첫번째로 생각난 곳이란 것 뿐이다시간도 그렇다초가을이라 요즘도 밤에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그들에게 혹시 약을 먹은 뒤의 신음소리라도 들리게 되면 주한 실패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그래서 사람들이 강변에서 없어질 열두시를 잡았을 따름이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앞으로 전선주 곁에 서있던 한 여자가 나와 쉬어가세요한다남자는 모른 체 지나쳐버린다얼마 안 가서 또 여자 하나가 이번에는 팔까지 잡아끌며 같은 말을 한다여기에도 이런 동네가 있었던가남자는 몇번이고 여자들에게서 같은 단련에 같은 말을 듣는다남자는 문득 자기에게 남은 돈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그리고는 다음에 붙드는 여자 하나를 따라간다.

괜찮아그것두 시간을 보내는 한 수단이 될 테니까게다가 마지막으루 여잘 한번 안아보는 것두 괜찮지.

여자가 좁디좁은 샛길 안쪽의 어떤 집 한 방으로 먼저 들어가더니 전등을 켠다천정이 얕은한 평이 될까말까한 방에 요와 이불이 미리 깔려 있다여자가 선 채 이쪽을 건너다본다바깥 어둑한데서 얼핏 보았을 때보다 여자의 나이가 퍽 어려 보인다그다지 이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런대로 전체의 균형이 잡힌 귀염성있는 자그마한 얼굴이다.

-몇살이지?

여자가 울림이 없는 나직한 목소리로,

-스무살이예요

한다.

아니 이런데 처음 오는 것두 아니면서 그 상투적인 대화를 하긴가이제 또이름이 뭐냐고향이 어디냐여기 온 지가 얼마나 되느냐어쩌 다 이런 데에 오게 됐느냐하구 물을 참이겠군그러나 이 여잔 어쩌다 자기 나일 곧이 곧대로 대는 것같지만죄다 손님이 묻는 말에 적당히 얼버무려 대답한다는 걸 모르나?

참 그렇군,

남자가 담배꽁다리를 문 밖으로 던진다.

여자가 그냥 움직이지 않고 선 채 이쪽을 건너다본다오라값을 먼저 치러야지남자는 호주머니에서 꾸겨진 지전을 움켜내어 버스값만 남기고 천원 가량의 돈을 몽땅 여자에게 내준다여자가 돈을 받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간밤 주무세요?

한다.

남자는 대답지 않는다간밤을 생각하고 줄 리 없다그렇다고 동정을해서 준 돈도 아니다이따 한강까지 나가기만 하면 그 뒤론 자기에게 돈이란 게 필요없는 것이다어쩃든 차비만 남기고 털어줄 기회를 얻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하다.

여자가 밖으로 나간다포주에게 돈을 건네기 위해선지 이런 곳 여자들이 돈을 받아들자 일단 밖으로 나가는 수가 있다는 걸 남자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그런데 여자가 좀체로 돌아오지를 않는다그냥 일어설까 하고남자는 생각한다한강 모래사장으로 나가 있자아직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거기서 그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면 되지 않느냐.

옳은 생각이야그렇게 하두룩 해아니여자가 돌아오는데?

한참만에 돌아온 여자는 저쪽을 향해 옷을 벗으며,

-불 끄시겠어요?

한다.

뭣이 부끄러워서하며 남자는 불을 끈다어둠속에서 여자를 끌어안는다가슴에 여자의 브래지어가 와 닿는다원 이런 멍청한 여자가 있나이왕이면 하고남자는 거칠게 브래지어를 벗으라는 손짓을 한다여자가 잠시 머무적거리다가 벗는다남자는 그 것을 확인하려는 듯 확인하려는 듯 여자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간다그 손에 팽팽한 유방이 만져진다남자는 이런 풍만스런 유방은 처음이라고 느끼면서 손아귀 듬뿍 그러쥔다여자가하고 가느다란 소리를 지르더니,

-미안해요 젖이 불어서 그래요긴밤 손님이라 나가서 젖을 짜내왔는데두 소용없네요그렇지만 기분나빠 마세요.

남자는 여자의 유방에 손을 멈춘 채,

-어린이가 몇달이나 됐게?

-엊그제 백날이 지났어요

-이런 델 나오려면 우율 먹여야 하지 않어?

그 무슨 쓸데없는 소리람.

-우유값이 얼마나 비싸다구요그저 여기 나와있는 동안은 암죽을 먹여요.

-애아버지가?

-애아버진 없어요.

꽤 할 소리들이 없는 게로군.

잠시 후 여자는,

-뻔하잖아요남자한테 속는 케이스

속는 케이스공부 좀 한 여잔가보다.

-그럼 이렇게 나와있을 땐 누가 앨 보나?

-집에서 놀구 있는 오빠가 봐주구 있어요자아그까짓 생각 마시구 어서.

애 얘기를 더 해서 손님에게 불쾌한 감정을 주지 않으려는 말투다.

여자의 말대루 어서 거기 할 짓이나 해치우지촌스럽게 미주알고주알 캐물을 것 없이.

그래야겠다고 남자가 다시 여자를 껴안는다그러나 자기의 남성이 행동으로 따라주지를 않는다.

펜끝이 멈칫한다.

웬일이지본시 임포는 아니잖어?

좀전만 해두 이렇지 않았는데.

그럼 어떻게 된 거야?

나두 모르겠소.

애어머니라구 해서 기분이 잡친 건 아냐?

그렇지만은 않은 것같은데.

불안하지 않어?

뭐 이제와서...... 하여튼 조금 두구봐야지.

남자는 여자의 팽팽한 유방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어루만진다속이 알차게 딴딴하다젖이 상당히 불은 모양이다남자는 다른쪽 젖으로 손을 옮긴다그리고는 적이 놀란다그쪽 유방은 이쪽것에 비해 반도 못되게 작은 것이다그리고 몰랑몰랑하다.

-본시 짝짝이었어요근데다가 애를 낳구선 이쪽 젖만으루 애가 배불리 먹군 해서 더 짝짝이가 돼버렸죠.

그리고 여자는 불은 젖쪽이 거북해 못견디겠다는 듯 손바닥으로 문지 르며,

-이 젖만이 아니구 인생 자체를 짝짝이루 살아온 셈이에요저는애 아버지와의 관계만 해두 그렇죠제가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홀몸이 아니었어요.

여자의 말엔 제법 조리가 있다.

남자는 묵묵히 귀를 기울임으로써 다음 말을 재촉한다.

 

-어느날 저녁 그이의 부인이라는 여자가 찾아왔죠아찔하드군요애까지 셋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하늘이 캄캄해지네요그러나 하는수없었죠저는 결심했어요다음날 아침 그일 찾아가서 결판을 내자그리구 그길루 몸속에 있는 핏덩이를 깨끗이 떼어버리자하구

말예요참말루.

남자는 어둠속을 더듬어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그 담배가 마지막이란 걸 알아?

물론!

그렇다면 여기서 꾸무적거릴 때가 아니잖어그런 신파쪼 얘길 들으면서.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날밤 전 잠시두 눈을 붙이지 못했어요날이 새기를 기다려서 숙집을 나섰죠방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용산역 앞에 있는 그이 사무실을 찾아갔죠사무실이 있는 빌딩 앞에 가보니까 일곱시두 안됐지 뭐예요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공연히 버스를 타구 시내쪽으로 들어갔다 오기두 하고노량진쪽으루 갔다 오기도 했죠그래두 어디 시간이 가야죠일월 말께였으니까 날은 또 좀 추워요생각다못해 역전에 있는 해장국집엘 들어갔죠막벌이 꾼같은 중늙은이 둘이 뭔가 먹구 있드군요저는 막걸릴 달라구 했죠그 두 사람이 제쪽을 힐끔힐끔 훔쳐봤지만 부끄러운줄두 몰랐어요그땐 뭐가 씌었었나봐요처음 먹는 술인데 막걸리 한 사발을 한두 번 쉬어가면서 다 들이켰죠여자가 아침에 와서 한 사발 만 먹구 나가면 주인이 재수 없다구 할까봐 또 한 사발 청했어요사실은 술을 더 마시구 싶어서 그런 변명을 자신에게 했는지두 모릅니다이렇게 네 사발을 마셨죠속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게 무엇보다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아서 좋드군요걸음이 약간 휘청거렸지만 정신은 말짱했어요그이 사무실이 있는 길 건너 맞은편에 가 섰죠얼마 있으려니까 사람들이 그 건물 안으루 들어가드군요그 빌딩 안에는 그이 사무실 뿐 아니구 다른 여러 사무실이 있는것 같앴어요근데 말예요눈이 흐려져 잘 보이지가 않아요술탓인지 전날 밤 잠을 못 잔 데다가 날씨가 차서인지눈이 자꾸만 흐려오는 거예요손으루 아무리 훔치고 닦아두 소용없었어요빌딩 안으루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이만 같애 보였어요아홉시가 지나서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이만 같애 보였어요아홉시가 지나서 들어가는 사람들 발길이 뜸해지구나섣두 한참만에 길을 건너가 현관 수위에게 그일 좀 불러달라구 했죠수위가 인터폰으루 연락을 해주드군요조금 뒤에 2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그이 모습이 보였어요흐린 눈인데두 그이 모습이 화악 들어왔어요졸보더니 층층다리 도중에서 우뚝 서는 거예요그리구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지 않겠어요그 웃음이 통 종잡을 수가 없었어요당황해하는 웃음인지반갑다는 웃음인지미안하다는 웃음인지날 가엾이 여기는 웃음인지..그런데 단 한가지 제가 바라구 기대했던 그런 얼굴은 아니었어요그때 제가 바라던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지금두 모르지만요그만 눈앞이 더 캄캄하게 흐려지면서 아무것두 보이지 않는 거예요저는 말 한마디 못하구 홱 돌아서서 그곳을 정신없이 달아나와버리구 말았어요그리구는 그만예요그이두 날 쫒아오지 않구 나두 다시는 그일 찾아가지 않았어요돌아오는 길루 병원엘 들렸죠그랬드니 달수가 지나서 긁어낼 수가 없다는군요그떄는 이미 뱃속에서 애기가 놀구 있었으니까요한약방에서 약을 지어다 먹였죠근데두 애기가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벼의별짓을 다해봤지만 그예 안 떨어졌어요.

-사내인가계집앤가?

-계집애예요아주 이뻐요지금와선 앟길 잘했다구 생각해요.

-그동안 죽어버리고 싶다든가뭐 그런 걸 생각해본 일은 없구?

-글쎄요.이런 일은 있어요꿈에 그이가 나타나서 절 죽일 것처럼 막 때리구밟구나중엔 칼루 찌르기까지 하는 거예요근대두 왜 그런지 조금 아프지는 않데요꿈이 돼서 그럴까요?

남자는 담배를 두어 모금 깊이 빨아 들이켜고나서,

-그럼 앨 위해서라두 애아버지와 다시 인연을 맺구 싶진 않은가?

그러자 여자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좀 딱딱해진 말씨로,

 

-그럴 필요 뭐있어요설사 그이가 모든걸 청산하구 온대두 전 들이지 않겠어요그인 그이대루 살아가는 길이 있구전 또 제대루 살아 가는 길이 있는걸요애가 아주 커지기 전에 조그만 장사밑천이라두 쥐구 얼른 이짓을 집어쳐야겠는데 밤낮 그날이 그날이군요.

남자가 담뱃불을 빈 담뱃갑에 비벼 끈다.

시시한 얘긴 그만허구 일어나지아무래두 거기의 남성행위는 틀린 것 같으니.

좀 기다리시오.

한강으루 달리려는 펜끝을 남자는 막는다.

아까는 모래사장으로 나가 사람들이 없어질 때까지 게서 기다리기루 하지 않았나그만 일어나.

남자가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나이어린 애어머니의 팽팽한 유방으로 다시금 손을 가져간다그 내민 손에 물기가 만져진다젖이 나와있는 것이다남자는 저도모르게 젖꼭지로 입을 가져간다조그만 젖꼭지다여자가 자연스럽게 가슴을 내맡긴다.

하기는 이왕 이런데 들어온 바엔 한번 그런 장난 해보는 것두 무방하겠군.

빨아도 젖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여자가좀 세게요하고 속삭인다그러나 팽팽한 유방에 젖꼭지가 작아 제대로 빨 수가 없다여자가 다시 귓속말처럼애기만두 못하시네요좀더 세게요하면서 한 팔을 이쪽의 목덜미 밑으로 넣어 머리를 받쳐 안 듯하고는 가슴을 이쪽의 얼굴 위로 가져온다한결 빨기 쉬운 위치가 되었다그래도 여자는 성차지 않은 듯다른 한 손으로 유방 안쪽을 주물러 젖을 짜내준다그제야 젖발이 선다남자는 입안에 찬달큰하고 배릿한 젖을 어디다 배앝을까 하다가 꿀꺽 삼켜버린다그리고는 입에 힘을 주어 다시 빨아 삼키고 삼키고 한다목에서 꿀꺽 소리가 나고호흡이 거기에 맞춰진다어린 애어머니는 애어머니대로 곧잘 익숙한 솜씨로 이쪽이 편하도록 젖을 빨린다.

그만해둬 이젠꼴이 차차 망측스러워지지 않어?

남자는 자기도 왜 이러는지를 모르면서 그냥 젖을 빨아댄다입 양쪽 언저리가 뻐근하다그래도 힘껏힘껏 빤다연방 삼켜가면서그러는 남자에게 차분한 졸음기가 밀려온다무슨 일일까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빨고빨고 한다그러나 자꾸만 졸음기가 밀려온다그것은 금이 간 심신 밑바닥에 겹겹이 쌓였던 어떤 불순물이 몰려나가면서 대신 밀려오는막을 수 없는 아주 아늑한 졸음기인 것이다.

아니 이봐대체 어떡하겠다는 거야주책없이 잠이 들어버릴 작정이야그러지 말구 어서 눈을 떠이제와서 죽는 게 겁이 났나그렇지 않음 빨리 여길 빠져나가 하려던 일을 실행하란 말야난 거기의 자살하는 모양을 정확히 보구그걸 상세히 그려야해속히 정신을 차리구 일어나!

남자는 잠자코 여자의 젖을 문 채 자꾸만 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그러는 그의 머릿속이 한순간 맑아온다지난날 건축 현장에서 떨어져 자동차에 실려갈 때와도 비슷했다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때의 그가 아니었다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서로 배반하지도 배반할 수도 없는 얼굴 들의 변모그리고 그 뒤엎어진 얼굴들이 꾸민 추잡스런 거래견디기 어려웠다정말 견디기 어려웠다미칠 듯이 노해도 보고사내답잖게 울어도 보았다그러나 결국 그는 절망만을 안은 조각이 되고 말았다수제 병원에서 그냥 깨어나지 않은 것만 같지못했다.

그러기에 한강 모래사장으루 나가야 하는 게 아냐시간 없다이때를 놓치면 영 틀려버린다자아 ,어서 일어나라왜 아무런 대답이 없지무슨 말이건 해라그래야 졸음기를 물리칠 수 있는 거다!

남자는 빨려들어가는 잠 속에서 애써 정신을 차린다나더러 무슨 대꾸를 하라는 거지아무것도 할 말이 없소지금 나는 나 자신이 예기치 않았던거기가 표현하려는 한계 밖에 있다는 걸사실 남자는 조금 전까 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는 분명 달라져있다는 걸 느낀다그러나 말로는 그게 어떠한 것이라는 걸 나타낼 수가 없었다다만 이 변화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만은 은밀한 가운데 느낄 따름이다그러는 그의 눈 앞에 저저끔의 시간을 가리킨 채 멎어있는 시계들이 다가온다그런데 다가온 시계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초침들이 분주히 돌아간다뒤이어 가지각색의 보석 귀금속들이 저나름대로의 모양을 지니고 저나 름대로의 광택을 발하며 다가오더니 곁의 어둠 속 여자에게로 쫙쫙 뿌려 진다뿌려진다.

 

마지막으로 말한다제법 용기가 있는 자루 알았는데 이게 뭐야이러다간 비겁자란 누명을 면치 못할 거다그리구 그 추잡스런 인간관계 속으루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는 거다이제라두 후딱 일어나기만 하면 늦지 않다지금쯤 모래사장엔 아무두 없을 거다자아정신을 차리구 일어 나라어서 속히!

남자는 어느새 캄캄한 어둠속 깊이 잠겨들어가있다둘레가 아주 좁다랗다그 둘레만큼 자기의 몸뚱이도 조고맣다연약한 팔다리를 놀려본다조금도 부자유스럽지 않게 움직여진다갑자기 어떤 자극물이 자기를 이 둘레 밖으로 내몰려 한다기를 쓰고 버틴다몇 번이고 같은 일이 거듭된다기진맥진되어서도 끝내 밖으로 몰려나지 않는다그리고는 유약한 몸을 움직거려 어두운 둘레 속을 유유히 돌기 시작한다남자는 이 탯속의 조고만 자신의 움직임을 안온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다.

에잇한심한 녀석인제 난 모르겠다너 될대루 되거라!

펜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주위로 잉크가 튀었났다.

 1967년 칠월


 * 황순원 / 막은 내렸는데 (탈/기타, 1990년 10월 20일) 

우리 문학의 거목이었던 작가 황순원은 순수문학부터 참여문학, 여러 실험적 소설들까지, 여러 시도를 했던 진정한 문학가였다. 그러나 현세대에 그는 <소나기>, <독 짓는 늙은이>,<카인의 후예>의 작가로 기억될 뿐이다. 대중은 일제치하 아래 억압받던 민족의 한을 소설의 미덕으로 걸출하게 풀어낸 그의 걸작 <목넘이 마을 개>를 알지 못한다. 해방이후 민족의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유려하고 서정적으로 서술되는 그의 명작< 모든 영광은>을 알지 못한다. 4.19 세대에 침묵할 수 밖에 없던 개인의 고통을 혼란스럽게 전가시키는 실험적인 역작 <문자풀이>또한 알지 못한다. 황순원이 산문시대 이전 가로쓰기를 최초로 시도했던 작가라는 것도 모른다. 대중은 작가 '황순원'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황순원'은 잊을 수 없는 잊혀짐이란 제목에 가장 알맞게 이 시대에 메우 빠르게, 그러나 서서히 잊혀져가는 작가 중 한명일 것이다. 하물며 사람 '황순원'은 어떠한가? 내가 잊을 수 없는 잊혀짐의 두번째로서 그를 꼽은 것은 사람 '황순원' 덕분이었다. 1920에서 1940년 해방 전까지, 일제의 문화통치는 그야말로 모든 문화적 표현과 예술을 일체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며 민족의식 말살을 목적으로 하던 비윤리적 정책이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이광수, 서정주 등 많은 문학가들이 친일로 변절되었다. (사족 -이광수는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설이자 결코 가늠할 수 없는 희대의 명작<무정>로 등단했으나, 조국을 버리므로 소설의 가치 또한 버려버린 -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그릇되지 못한 - 모순적인 인물이다. ) 그러나 그 시절 황순원은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절필을 선언하고 고향에서 오랜 기간 자숙하며 <소나기>, <독 짓는 늙은이>, <눈> 등의 순문학들을 지었다. 하물며 군부독재와 민주화 운동이 일었던 80년대에도 정권에서 찬양글을 쓸 것을 요구하자 또다시 절필을 해버리는 등, 그는 여러모로 윤리적이고 금욕적이며, 철저한 자기 신념을 지키던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람다운 사람'이었다. 예술작품은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사람이 잘못되면 작품 또한 좋게 나올 수 없다. 작품을 삼가더라도, 필시 작가라면 그의 인간적 면모를 본받아야 마땅할 따름이다. <막은 내렸는데>는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죽음의 끝에서 아기가 되어 태초로 회귀하고픈 욕망을 지닌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칭의 표현과 대화의 장을 허무는 여러 성공적인 실험적 시도들로 의미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관념적인 것을 허물고 새로이 쌓겠다는 '작가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막은 내렸는데>는 한 작가의 패기가 돋보이며, 앞으로 글쓴이들이 나아가야할 윤리적 표상을 확립했다는 것에서 결코 잊혀져서는 안되며, 계속되어 상기되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우선시 되어야 하는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의 해답과 다름없다. 결국 사람작가 황순원은, 우리에게 미래를 구축하고 묻게 하는, 잊혀졌으나 잊혀져서는 안될 정도로 문단에 몇없는 진정한 어른이다. 그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고 황순원 선생을 살도록 하는 여러 반증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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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마지막 소설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든지 간에 끝난다는 건 씁쓸하다. 왕자와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통속적이고 관념적인 여느 이야기 마저 그렇다. 처음 글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꺠달은건, 황순원 작가님 덕분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를 보고 내 영혼이 젖어버림을 느꼈다. 이 후 씨의 작품을 열렬히 사모하게 되었다. '막은 내렸는데', '눈', '우산을 접으며' '땅울림'등등의 것들을 읽으며 나는 곧 소설이 사람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는 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멜라씨의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러했다. 와 , 와 을 읽을 떄, 그곳에서 내가 만난 것은 나의 어떠한 깊은 심장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은 김현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이다. 와 을 읽으며, 나도 이런 평론가의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소설로 방향을 튼 것은 아마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고나서 일 거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몰라도 나의 비평은 소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솔직히 하자면 태어나서 세계문학전집같은 걸 눈에 담아본 적 없다. 누군가 톨스토이와 카뮈와 카프카를 이야기 할 때,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그들의 무거운 글들을 잡아서 소화해낼 마음이 서지 않았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폴 드 만과 데리다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외국 작가였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어디 가서 부끄럽게도, 하고 있는 일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 싫어서, 억지로 토해내듯, 글 써요, 하는 말을 내뱉을 때, 난 수치심을 느꼈다.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면 주변에서 대치동 강남에서 학원받으며 과학고 간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고, 누군가는 한심하게 쳐다본다. 초등학교 떄 별볼일 없던 친구가 예고의 문예창작헉과에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너도 글 써? 나도 글 쓰는데...하고 말하면 듣는 말이, 좋아하는 작가 누구야? 카프카? 톨스토이? 글 보여주면 좋겠다...등의 것들이다. 난 사실 정지용과 황순원과 김멜라와 권여선을 사랑한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 곳에서 뽐내기 위해 아는 척 했다. 톨스토아보단 도스토예프스키지 않아? 사실 난 그 누구의 작품도 읽어본 적 없다. 이건 고해성사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말의 의중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알까? 마지막으로 쓴 글은, 작년 11월에 글틴에 기고한 다. 그건 내 전부다. 나는 그 글을 쓰며 나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알았고, 이 후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 후 알게 된 사실은, 결국 글이란 세상이란 거다. 문장이란 것을 조립, 배치하며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재미다. 근데 그 세상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결국 내 세상은 어떠한 욕망의 발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조립된 세상의 이면에는, 그 어떤 계기나 동력도 존재하지

  • 화자
  • 2024-03-21
가을 소나타

디귿씨는 요몇칠 동안 인력 사무서를 전전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모 기업에서 사무부장을 지냈다는 디귿씨는, 회사 내부평가에서 “당신은 이 회사에 무얼해주실수 있나요?”라는 대표이사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내부평가 다음날, 디귿씨의 책상에는 각종서류들과 필기구, 타자기 등이 대용량 상자에 담긴 채, 한쪽 구석으로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지저분했던 자신의 자리에는 오랜 직장동료 임 차장이 앉아있었지요. 임차장은 대용량 상자를 아무렇지 않게 디귿씨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날 디귿씨는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회사를 위하지 않은 사람은 필요없으니, 이제 그만 퇴직하시라는 대표이사의 통지서와 함께 말이지요. 집에 돌아가는 길, ‘당신은 아무래도 회사를 위하지 않고 있군요.’라는 대표이사의 말이 자꾸만 눈에 걸렸습니다. 30년 동안 뼈빠지게 오로지 한 직장에 몸담아온 디귿씨는, 자신이 버텨원 세월들이 부정당한 것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이 회사에 무얼 해주실 수있나요아무리 그 질문을 상기시켜본다해도 디귿씨는 답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질문이 임 차장에게 돌아갔다면 임차장은 답 할 수 있었을까요? 이사 본인조차 이 질문에 답은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돈을 위해 회사를 다닌 것 뿐인데. 디귿씨는 잠시 상심했습니다. 이제 자녀들의 대학비와 식비, 자취비, 아내의 용돈,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월세와 세금은 어떡하나요. 그는 그 모든 것을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해고통보를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비밀로 부치던 참이었지요. 해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디귿씨는 사람들이 즐비한 인력 사무소에 들어섰습니다. 형광등이 나란히 마주 앉은 사람들 위로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디귿씨는 형광등의 끝자락에서 처음으로 놓여진 등에 다다를 때까지 오래간 기다렸지요. 그렇게 해가 저무는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상담원에게 닿을 수 있었습니다.막노동이라도 할 참이니 아무거나 주시오. 디귿씨의 말에 상담원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시는 분이니 막노동도 힘들 것 같다고. 애 쓰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시라고. 디귿씨는 억울했습니다. 무릇 인간이라면 늙기 마련인데. 나이를 먹는다는게 디귿씨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 녀석들은 꼭 디귿씨를 노인 취급입니다. 디귿씨는 이만 나가보라는 상담원에게 자신이 앉아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던졌습니다. 홧김은 아닙니다. 눈에는 타오르는건 분노가 아니라 억울한 울음이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모두 디귿씨를 쳐다봅니다. 이 것을 시작으로 벌써 삼주 동안 인력 사무소만 드나들었습니다. ***이른새벽부터 디귿씨는 정장차림으로 버스에 몸을 욱여 넣었습니다. 아내는 아직도 자신이 사무부장을 지내는 줄로만 알아서, 입으나 마나인 정장을 답답하게 걸치고 있습니다 . 요 몇달간은 퇴직금으로 여차저차 월급을 메꾸었다지만, 이제 퇴직금도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버스 창문으로는 여러 직장인들이 스칩니다. 디귿씨는 ‘회사를 위해 무얼해주실 수 있나요’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자신 스스로가

  • 화자
  • 2024-01-10
검은세상, 하얀 겨울

세연에게 가고 있다. 겨울이었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폭설로 인해 공사를 잠정중단하거나, 일당을 미지급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기에 하루에 붙들릴 일도 없다. 서울역 노숙자들은 눈 오는 날보다 따수운, 그러나 여전히 찬 겨울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다. 늘 막히는 한강대로도, 눈으로 인해 교통체증을 빚을 일이 없었고, 택시나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는 일도 없다. 눈을 녹이기 위해 도로에 뿌려질 염화칼슘이 세연에게 가기를 괴로워하는 나를 설득하듯,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믿서 오독오독 비명을 지르며 부숴질 일도 없었고, 그게 신경은 좀 쓰이겠지만, 나를 멈춰세울 일이 없었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또는 어느 벽 담장에 메달린, 산성비가 굳게 되어버린 고드름을 핥으려 안달난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눈은 우리를 막는 병폐로 존재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눈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을 괴롭히는, 비효율적인 자연재해인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교통체증으로 피해 볼 일이 없고, 노동을 할 일도 없으며, 노숙을 할 일은 더욱이 없었다. 누군가를 괴롭게 만나러 갈 일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여전히 추운 겨울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 만화영화를 보다가 힐끔, 창 밖을 확인하며 눈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찬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유리창 앞에 서서, 언젠가는 눈이 내릴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어른들은 출근하기 전 창 밖을 보며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교통체증으로 직장에 늦을지는 않을지, 날씨가 추워서 하루가 고되지는 않을지 걱정 하며,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지닌다. 나는 눈이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눈이 내리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을 사람은 나다. 나는 구질구질한 어른들의 세계에 살아서, 눈이 내리고 나버리면, 나를 가로막을 하얀 얼음,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도저히 세연에게 갈 수 없을거다. 세연은 눈이 내리길 바라고 있을테지. 그녀에게는 나를 만나는 것 보다 눈이 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할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적어도 하나를 알고있다. 이 세상은, 겨우 동심 하나로 어른들의 세상을 덮어 버리기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세연에게로 가고있다. 세연을 만난 건, 눈 내리지 않는 육년 전 겨울이었다. 당시 초임 영화 평론가였던 나는, 삼류 독립영화 감독들을 취재하기 바빴고, 광화문에서 한 신인 감독이 저예산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해서, 잡지사는 촬영지 근처 살고 있던 내게 신인감독 인터뷰를 맞겼다. 영화촬영장은 굉장히 지저분했고 스태프도 대여섯명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감독이라는 작자는 꽤 단아하고 청순한 여인이었는데, 어림잡아 이십대 중반, 나와 엇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안녕하세요, 신인감독 이세연입니다.그녀는,기운이 밝고 흔쾌해서 늘 깐깐하게 굴던 여타 중견감독보다 훨씬 좋았고, 질문에 답을 빙 돌려대서 말하는 어느 예술감독에 비해 시원시원한 답들과 기상천외한 담론들을 꺼내 들어서

  • 화자
  •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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