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불꽃

  • 작성자 난바다
  • 작성일 2023-12-21
  • 조회수 724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 경성에서 제일로 큰 집에서 일을 하던 하인들이었다그러다 서로 눈이 맞게 되었고그러다 나를 가지게 되었고애써 나를 죽이려고 발버둥 쳤으나 결국 나를 낳았다며내가 세상 밖에 나왔을 적부터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노라고 어머니는 덧붙여 말했다나를 끝까지 죽이려다 어머니의 부푼 배를 보고 이내 포기했다던 아버지는 내 둥근 머리가 공기와 맞닿고 내 우렁찬 울음소리가 온 방을 뒤덮었을 때조용히 내 귓가에 이 말을 속삭였다고 한다.

 

너의 울음은 자유로이 살지 못해 내지르는 처절한 괴성이로구나.

 

이제 막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에게 하기엔 매우 부적절한 말이었다물론 나는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타당하다는 생각까지 든다정말로 나는 자유로이 살지 못하고 내 핏줄에 걸 맞는 하인 노릇을 하다 죽을 테니까그저 물 위에 떨어진 나뭇잎마냥 둥둥 떠다니다 파도를 만나면 휩쓸리고안 만나면 계속해서 둥둥 떠다니고나는 그리 살다 가겠지.

 

운명이란 것이 참으로 얄팍하지만 결국엔 다 그런 것이었다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것나는 그저 하인이 될 운명을 타고났고 그것에 순응할 뿐이었다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나는 이제 막 걸어 다니고 옹알이에서 벗어날 시점부터 일을 했다는 것이다나는 네 살이 되던 해부터 몸종 일을 시작하였는데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이것은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 하셨다아이가 아직 어리니 적어도 여덟은 되고 허드렛일을 시키겠다고 주인어른께 말씀하셨고 이를 주인어른 역시 허락해 주셨다며갑자기 주인어른께서 말을 바꾸었을 뿐 그 일을 생각하면 너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뒤이어 사과하셨다나는 주인어른께서 갑작스레 말을 바꾼 이유를 안다그 분의 따님그니까 아가씨의 요구였다아가씨께서 우연히 집 앞 정원을 지나는 길에 그 근처 풀숲에서 나뭇가지로 그렸던 나의 그림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주인어른의 통보를 들은 뒤나는 그 분의 밑으로 들어가 말동무를 하며 몸종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어머니는 설명하셨다그 분을 이제부터 아가씨라 부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시면서 내 어깨를 강하게 부여잡으셨다아릿하게 나를 조여 오는 어깨의 통증에 눈물이 찔끔 나면서도 나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였더라.

 

그렇게 어연 십 삼년내가 넷부터 시작했으니 잠만십 사년인가. (십 삼년의 반이라고 하자.) 아무튼 나는 내 키가 대나무만큼 빨리 큰다는 소리를 들으며 이 집안에서 아직까지 일을 하고 있다나와 같이 허드렛일을 하는 언니들은 이제 곧 시집 갈 나이가 되었다며 설레발을 치지만 그건 글쎄아직 잘 모르겠다아가씨께서도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가는 것도 웃기는 일이기도 하지.

 

나는 힐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아가씨께서는 어여쁜 자태로 눈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셨다어깨에는 아가씨가 키우시는 새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주인어른과 친한 일본인이 선물해주신 것인데 아가씨께서는 저 새를 굉장히 아끼셨다하루 종일 저 새와만 놀 정도로아마 그것이 주인어른께서 분통을 터트리시는 이유 중 하나겠지물론 가장 큰 것은 혼인이겠지만.

 

내 나이 열여덟도 곧 혼인을 해야 한다며 난리 칠 나이인 것은 사실이나 아가씨는 그보다 네 살이 더 많은 스무 둘이셨다그 말은 바로 혼인을 서둘러야 할 때복도를 지나가면서 주인어른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서두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늦은 나이라나그래서 그런지 요즘 집에 모르는 남정네들이 자주 보이곤 했다어떤 이는 아가씨와 비슷한 나이처럼 보였고 또 다른 이는 오히려 주인어른과 비슷한 나이처럼 보이기도 했다다만 그들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아가씨를 보고 모두가 혼인을 하고 싶다고 주인어른께 말하는 것이었다그것도 그럴 것이 나의 아가씨께서는 경성에서 제일로 가는 미인이셨기 때문이다어찌나 아리따운지 그들은 아가씨와 이야기도 하기 전에 혼인을 하고 싶다고 하였고 주인어른께서도 그러한 뭇 남성들의 반응이 싫지 않은 모양인지 늘 아가씨를 만날 때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셨다아가씨께서는 그에 대한 답으로 자그마한 미소를 짓는 것이 다였다길을 걸을 때에 찰랑거리는 머리카락하며곱고 흰 피부와 얇은 팔목그리고 어찌 보면 바스러질 것만 같은 미소까지아가씨께서는 남성들이 싫어하려고 해도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가씨께서는 지금 내 나이열여덟부터 스무 둘이 될 때까지 남성들로부터 열렬한 청혼 신청을 끊임없이 받아왔다주로 꽃과 함께 말이다그들이 그러면서 뭐라고 했더라당신이야말로 이 꽃보다 아름답대나 뭐래나그 허접한 말을 듣던 주인어른께서는 참 너와 닮은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 선물해준다며 잘 생각해보라고 이어 말을 하였으나 그 모든 꽃들은 결국 불에 다 던져질 운명이었다불씨가 마구 타올라 꽃들이 재가 되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아가씨께 물었다.

 

-왜 태우셔요?

-사람들이 다 저 꽃이 나 같다고 해서.

-그럼 더 예쁘게 가꾸셔야죠.

 

아가씨께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셨다그 표정은 퍽 슬퍼보였다.

 

-난 언젠가 시들 꽃이 아니야난 한 순간이라도 뜨겁게 타오를 불꽃이야.

 

아가씨께서는 손을 꽉 쥐시고선 그리 말씀하셨다불에 꽃이 검게 타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문득 그 순간에 아가씨께서 내게 한 말씀이 떠올랐다나의 피에는 검은 재가 흐르고 너의 피에는 검은 먹이 흐른다는그런 말참 이상한 말이었다아가씨께선 애초에 괴짜이시니 이상한 건 아닌가하긴 괴짜가 아니라면 경성에서 내로라하는 화백들의 그림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신 분이 고작 내 그림 따위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잠깐 스쳐지나간 낙서를 보고 이리 부를 일도 없고.

 

그런 탓에 아가씨께서는 외모만 경성에서 유명한 것이 아니었다그 특이한 성정도 유명했다예를 들어 앞서 말했듯 나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며 네 살 때부터 옆에서 그림을 그리도록 시킨 일처럼 말이다그림에 굉장히 까다롭던 이 씨네 딸이 몸종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했더래라며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퍼졌다아마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 유명한 그림쟁이가 나라는 사실은 거의 다 알지도 모른다한 평생 가난하게 살 핏줄을 타고난 사람들은 만져보지도 못한다는먹과 한지를 손에 달고 살며 그림을 그리고고귀한 사람에게 어린 시절부터 총애를 받는 것을 보던 내 몇몇 또래 친구들은 나를 미워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나 역시 누군가 그랬더라면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누군가 너를 괴롭힌다면 알려달라고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으나 아직까지 말한 적은 없다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연아.

-.

-그림을 그려 줘.

-무슨 그림이요?

-새랑 나무.

 

아가씨는 그렇게 풍경을 한참을 바라보시다 말고 내게 말했다나는 자연스레 붓을 들어 쓱쓱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보통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아가씨께서는 옆에서 책을 읽으시거나 내 그림을 구경하시곤 하셨다그러나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으신지여전히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꽤나 깊은 정적그 정적이 어색하여 나는 아가씨께 괜히 말을 건넸다오늘 아침에 몸종 언니가 한 말이었다.

 

-최근에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찾는다고 엄청 성나 있더라고요.

-...그래?

-키도 무슨 서양 사람처럼 커서 그런지 빨리 잡힐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몸종 언니는 그리 말을 하면서 너도 꼭 조심하라고 단단히 덧붙였다화를 내는 것처럼 성난 목소리이기에 나는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하긴그럴 만도 했다독립 운동을 하는 이로 착각 받기라도 했다가는 끌려가는 것도 모자라 거기에서 온갖 고문들을 당한다고 하니그 모든 것들은 다 몸종 언니에게서 얼핏 들은 것이기에 나 역시 자세한 것은 모르나 착각 당해서 좋을 건 없다는 것을 알기는 한다요새 경성에서 온갖 독립 운동을 외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나는 탓에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전에 아가씨가 먹고 싶다는 고등어를 사러 갔다가 들었다.) 몸종 언니가 목소리를 높여 말한 것도 나를 걱정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아가씨께서도 조심...

-그만.

-?

-그만하래도.

 

아가씨는 딱딱한 말투로 답했다아가씨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진 것을 보아 내 말에 심기 불편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정적을 풀려고 꺼낸 내 말 때문에 오히려 아가씨와 내 사이에서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눈치를 보며 한지에 먹을 묻혔다한지가 울기 시작한다마치 내 마음 같다.

 

-연아.

-.

-미안해.

-무엇이요.

-그냥.

 

나의 아가씨께서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시라 자신이 조금이라도 짜증을 내면 곧바로 사과를 하셨다참으로 감정적인 분이시지그런 부분을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아가씨는 사과를 하고도 계속해서 입을 우물쭈물 대셨다정말 미안하셨던 모양이다나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셔요저는 아가씨가 하는 말이라면 다 좋아요.

-그게.

-.

 

아가씨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내 눈동자를 묘하게 피하는 그 묘한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졌을 때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나 결혼해.

 

한지에 먹이 번졌다오랜 시간 동안 붓을 멈추고 있으면서 한지가 축축해질 정도로 먹이 번지는데 지금 내가 그러했다나는 아무 말 없이 나의 눈을 애써 피한 채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아가씨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아가씨가 말을 시작하면 보통 내가 그 다음 말을 이어 하는데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꾹 입을 다물고 있었다시간이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조용히 내가 묻는다언제 정해진 거래요아가씨가 답한다아주 오래 전에.

 

아가씨가 이어 말하기를아가씨와 마찬가지로 이십대 초반의 남성이며 아가씨의 집안만큼이나 큰 집안사람이라고 하였다주변 사람들이 다 일본에서도 잘 나가는 이이며 일본 군인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라 집안이 커져가는 속도가 매우 크다고주인어른께서는 아가씨가 승낙한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시며 결혼식을 빨리 잡겠다고 말하셨다고 한다그래서 조만간 이 집을 빨리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빠르게 덧붙이셨다정말이지아가씨가 하시는 말씀들은 다 너무 빨랐다먹이 붓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입만 떡 벌린 채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아가씨께서는 언제 내 옆으로 온 것인지 먹이 번져 나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을 들고 옅은 미소를 지으셨다고맙다며 감사인사를 하시는데 뭐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결혼을 하셔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아가씨만큼 예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내겐 보람찬 일일 테니까그러나 나에게 아주 작은 바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가씨가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는 것이었다아가씨가 원하고아가씨가 꿈꾸고그저 아가씨의 마음에 따라 혼인을 결정하길 바랐다아무리 주인어른과 주변 사람들이 아가씨의 나이를 보고 혼인하기 이미 늦은 나이라 나무래도 아가씨의 나이는 나이가 들면 결코 돌아가지 못할 청춘의 절정에 다다른 나이임을 나는 알 수 있었기에괜히 자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청혼을 거절하는 아가씨를 보며 제 마음 한 구석에 존경하는 마음도 조금 품었던 것도 같다.

 

괜스레 나는 한지라도 찢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내 옷을 잔뜩 움켜잡았다옷이 사정없이 구겨졌다아가씨의 혼인 소식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내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한 끄덕거림뿐그게 다였다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건아가씨의 혼인에는 사랑 하나그거 하나는 없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아가씨를 바라보았다뒷모습만 보여주시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환히 웃으신다그 무엇보다 환하게그 모습을 보며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나는 그 미소를 따라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이상하게도 울고 싶었다내 나라 하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남의 행복을 바라는 것 또한 과분한 일인 걸까참 우스운 일이지경성에서도 아가씨의 집안은 제 나라 팔아먹은 집안이라 단단히 알려졌음을그럼에도 아가씨의 행복을 기원하는 나도 미친놈이지그저 주종관계에 그칠 사이인데나는 운이 좋아 아가씨께 눈이 띈 것뿐이고 그렇게 그저 아가씨의 밑에서 일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건만자꾸만 기어오르게 된다혹시 모른다그 때 내가 아닌 내 친구 순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더라면 지금 이 곳에 있을 사람은 내가 아닌 순이일지도.

 

나는 웃는 아가씨를 향해 언제 혼인을 올릴 것이냐 물었다아가씨는 머뭇거리다 말고 겨울이 다 지나기 전에 올릴 것 같다고 말하셨다.

 

그 말에 다시금 창문을 힐끔 바라보았다오늘 눈이 잔뜩 쌓인 것을 보아 아직 겨울의 정점그래도 혼인을 준비하다 보면 겨울은 훌쩍 지나갈 것이 뻔했다겨울이 다 끝나기 전에 혼인을 올리고 싶다고 한 것을 보면 주인어른께서 어지간히 빨리 올리고 싶으신 모양이었다나는 괜히 손을 꼼지락 거리곤 아가씨를 다시금 쳐다보았다아가씨는 의연해 보였다.

 

-미안해.

-뭐가요어차피 저는 아가씨를 따라 갈 텐데요.

 

정 들었던 몸종 언니들과의 헤어짐이 살짝 아쉽고 평생 살았던 이 집을 떠나려니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나의 운명은 네 살이 되던 때그 때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다른 이들이 우연이라 치부할지라도 상관없었다나는 나를 스쳐지나가는 모든 인연과 운명을 사랑하였다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아가씨는 더더욱.

 

아가씨와 눈을 맞추었다아가씨의 눈이 너무 슬퍼보였다금방이라도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려올 것만 같았다.

 

-그 때 너에겐 새벽부터 심부름을 시킬 생각이야.

-...?

-나는 그리고 너를 데리고 가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순간 눈물이 떨어질 뻔했다다행히 간신히 참아냈으나 나는 아가씨가 떠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그 세 글자를 중얼거렸다그 말에는 명백한 부정이 담겨 있었다정말이지귀에 바닷물이 들어가기라도 했나하루 종일 귀가 먹먹했다눈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내 그림이 싫어지시기라도 했나아니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분명 내 그림을 평생 좋아할 것이라 하셨는데나는 그 이후로 일거리가 끝나고 나면 새벽까지 그림만 그렸다내 그림을 보았다가 내가 아가씨께 한 행동들을 되새겨보고그러다 아가씨가 주신 한지가 다 떨어지면 밖으로 나가 울었다내 그림이 변한 적은 없었으므로그리고 내가 아가씨께 한 행동 역시 변한 것이 없었으므로그 뜻은 아가씨께서 무슨 일인지 내가 헤아릴 수 없으나 나를 미워하게 됐다는 뜻이었다.

 

나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아가씨의 말은 정말 맞았는지 아가씨께서는 나를 부르지 않으셨다아가씨의 옆에는 다른 아이가 있었다한지가 다 떨어진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그저 아가씨를 묵묵히 바라보았다저만치에서 바라봤는데도 날이 갈수록 아가씨는 아름다워지셨다주인어른의 방에서 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하루에도 일본군인 수 십 명이 왔다 가는 것도아가씨가 정말 혼인을 하신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몸종 언니가 내게 말하길아가씨의 혼인은 십이월 말에 할 것이라고 한다정말 겨울에 혼인을 올리는 구나. 내 코 끝에서 일렁이는 싸한 바람이 정말 아가씨의 혼인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 하나는 거짓말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땅거미 진 어둠에 달빛이 비추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껴졌을 때에 아가씨께서 내게 쪽지를 남기셨다마치 몸종들 중에서 글자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양유려한 글씨체에 난 입술을 꽉 짓물었다사랑채에 만나자는 글글 읽는 것은 사치뿐인 몸종에게 글자를 알려준 것도 아가씨였으니난 대충 천을 둘러 싸맨 채로 방문을 열었다입김이 공기 중으로 번졌다. 

 

사랑채에 다다르니 아가씨의 인영이 흐릿하게 보였다아가씨는 그 누구보다 다소곳하게 앉아있으셨다잘 지내셨어요?, 라 물으니 아가씨께서는 그저 미소만 지어보이셨더라.

 

-나도 이 곳을 쓰고 싶었지.

-늘 그러셨잖아요.

-너도나도우리는 못 쓰는 공간이니까.

 

주인어른께서는 아가씨를 매우 아끼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련님과는 다른 대접을 하셨다예를 들어 사랑채에 들어갈 수 있느냐아니냐의 차이도련님께서는 아직 어린 나이시지만 사랑채를 사용할 수 있으셨다그러나 아가씨는 스물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랑채에 주인어른이 보시는 한들어가실 수 없으셨다남자들만의 자리라고 하셨나그 탓에 아가씨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모두가 잠든 이 밤에만 잠깐씩 사랑채에 들어가셨다슬프게도 아가씨는 이 사랑채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셨다. 그렇기에 이 장소는 밤이 되면 우리들만의 장소가 되었다. 밤이 되어야만 우리가 이 곳에 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겐 슬픈 이유였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 곳에서 일어난 모든 추억들과 기억들을 사랑하였다. 아가씨의 새와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새소리에 맞추어 그림을 그렸을 적에는 내 심장이 뛰고 있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힐끗 아가씨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있어야 했던 새는 보이지 않았다.


-새는요?

-새 말이니.

-네.

-풀어줬어. 이 아이라도 자유롭게 살아야지.


예상치 못한 답변에 한참 입을 쩍 벌리고 있을 적에 아가씨께서는 참으로 아픈 말을 뱉으셨다. 이 아이라도, 라니. 마치 자신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나는 사랑채에 앉아 계시는 아가씨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사랑채는 새장이 아닐까. 아가씨께서는 새장에 갇힌 새이고. 아마 그렇다면 나는 새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바람 정도나 되겠지. 아, 나는 바람마저도 되지 못하려나.


내가 바람이라면 새장의 문이라도 열어줄 수 있겠지만 도리어 새장의 문을 단단히 잠근 셈이니. 오히려 나는 새장의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괜스레 내 손에 힘이 들어가 천이 마구 구겨졌다.


아가씨는 그런 나를 보고도 태평한 것인지. 옆에 놓인 쪽지와 돈을 정리하시며 내게 건네셨다. 그 광경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삐쭉 내민 채 그것들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꾸깃 꾸깃한 종이는 왜인지 축축했고 돈도 내가 한 평생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금액의 것이었다.

 

-지금 항구에 가면 이휘언이라는 이를 만날 수 있을 거야그 사람에게 이 것들을 전해주렴.

-오늘 혼인을 올리시나 보네요.

 

유독 화려한 치장이며 모습이며아가씨는 누가 보아도 오늘 혼인을 치르는 새신부와 같은 자태였다아가씨는 그 말에 잠시 멈칫거리고는 미소를 띄우셨다.

 

-그래.

-축하드려요.

-고맙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축하한다는 말그것 하나밖에 없었다몸종인 내가 아가씨께 무어라 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으니그저 아가씨께서 주신 소정의 돈으로 항구로 가 이휘언이라는 이에게 쪽지를 빨리 전해줘야겠다는 마음만 들었다그래야 아가씨의 혼인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으니까.

 

-천천히 갔다 오렴오늘 바람이 차다 들었다.

-.

-내 동생은 오늘 앞집인 수희네 집에 맡아두었어오늘 하루 내 동생은 너에게 부탁할게.

 

도련님 말씀이신가하긴 아직 여섯도 안 되신 나이이시니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나는 아가씨께서 주신 쪽지를 정리하며 고개를 조용히 끄덕거렸다오래 전부터 말씀하신 부탁치고는 꽤나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만 나가려고 하자 아가씨께서 다시금 나를 붙잡으셨다.

 

-잘 갔다 오렴.

-.

-이것도 더 챙기고.

 

아가씨께서는 자신이 늘 챙기고 다니던 비녀를 내게 건네셨다오늘 혼인을 해야 하기에 빼신 것 같았다이것을 내게 주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굳이 말을 이어가기 싫어 나는 비녀를 받았다그러자 아가씨께서 환히 웃음을 지어보이셨다우습게도 최근에 본 웃음 중 가장 밝은 웃음인 것 같았다내심 혼인을 올리시고 싶으셨던 건가나는 눈을 얇게 뜬 채로 아가씨를 째려보곤 휙 하고 나갔다왜인지는 몰라도 그러고 싶었다.

 

나는 다시금 방에 들어가 아가씨께서 주신 비녀를 꽂고 재정비를 했다꽃 모양과 비슷한 비녀가 마치 아가씨 같았다겨울인데 왜인지 모를 꽃향기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마 저 비녀 때문이지 않을까괜한 느낌이겠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어차피 나는 오늘 이후로 아가씨를 별로 보지 못할 테니.

 

새벽바람은 생각보다도 훨씬 차가웠다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추위가 내 코를 스쳐지나가 기침이 나올 것만 같았다아가씨가 주신 돈으로 인력거꾼을 찾으려 했으나 워낙 추위도 추위고 이른 새벽이다 보니 보이지 않았다겨우 인력거꾼을 찾아 항구로 향했을 때에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항구에 다다르자 바다가 거세게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그리고 그 항구 앞에는 멀대같이 큰 남자가 딱 잡힌 정장을 입은 채 있었다깔끔한 모자와 잘 어울리는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이휘언 씨 인가요.

-누구시죠.

-저는 윤아 아가씨의 심부름을 받고 온 하연이라고 합니다이 것을 전달해 달라고 아가씨께서 부탁하셔서요.

 

내게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말을 했으면서 내가 온다고 말을 하지 않은 것인가나를 모르는 눈치의 남자를 보고 내심 당황하여 급히 말을 덧붙였다이상하게도 남자는 내 설명을 듣자 더 희게 질린 표정이었다.

 

-윤아는요.

-아가씨요?

-같이 오지 않았나요?

 

급한 것인지 남자는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남자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을 보아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내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자 남자의 표정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해서는 내가 전달한 쪽지를 구겼다사정없이 구겨진 쪽지와 그보다도 더 구겨진 남자의 얼굴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 내가 입만 떡 벌리고 있을 때에 남자는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빨리 돌아가세요당신의 집이 다 불태워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집이불이라니무슨 말이지?

 

남자의 말을 어찌 들었는지 모르겠다그럼 당신은 왜 같이 가지 않느냐는 나의 말에 남자가 자신은 중국으로 건너가 아가씨께서 주신 돈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의 정장에서는 묘한 화약 냄새가 났고 그의 손은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그의 말에서, 그의 모습에서 나는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언니에게서 들은 말이 어렴풋이 귓가에 울러 퍼졌고 왜놈들이 찾는다는 그 남자의 외형이 내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다.


서양인만큼이나 큰 키, 상처투성이의 손. 그에 반해 깔끔한 정장, 구두.  

 

이 모든 것들이 내 뇌를 다 스쳐지나간 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어떤 정신으로 인력거꾼을 불렀는지 모르겠다온통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인력거꾼이 땀이냐 물을 정도로 눈물이 나왔다보지 않은 쪽지의 내용을 알 것만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뭔가 수상하다 싶었지도련님을 수희 아가씨께 맡긴 것도 항구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 쓰라고 준 돈이 왜 이리 많은 까닭도전혀 알지 못했다엉엉 우는 내 목소리에 인력거꾼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인력거를 끄는 소리만이 내 귀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아가씨아가씨.

 

저 멀리 보이는 연기가 우리 집에서 나는 것은 아니겠죠아니라 해주세요.

 

아가씨아가씨.

 

불꽃을 갈망하셨지만 실제로 불꽃이 되시겠다 말씀하신 건 아니셨잖아요.

 

눈동자에 불길이 일렁거렸다아직 아침인데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도련님의 울음소리 역시 들렸다비녀에서는 이제 꽃향기가 아닌 잿더미 향이 느껴졌다왜인지또 다시 아가씨가 하신 말들이 떠올랐다내 피에서는 재가 흐르고 너의 피에선 먹이 흐르고나는 꽃이 아닌 불꽃이라는주인어른께서 들으셨다면 비웃으셨을 그 말.

 

불꽃이 결국 재가 되더라도 한 순간이라도 타오르고 싶다는 아가씨의 말은 맞았다그 불꽃은 너무나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그래어쩌면 모든 것을 바꿀 불꽃이다.

 

그러니 꽃아나의 꽃아.


타오를 것이라면, 언젠가 꺼진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타오를 작정이라면.

 

너의 주인에 맞게 붉게 피어 타올라라너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타올라라.

 

추천 콘텐츠

독백

연극배우 일을 그만 두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안 되어서. 지극히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인 이유. 하지만 내가 만약 이성적이고 현실만 계산하는 사람이었더라면 애초에 연극배우 일을 하기로 마음먹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니까, 어쩔 수 없다는 소리다. 내가 몇 십 년간 내 삶을 바쳤던 극단이 망한 것도,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투잡으로 뛰던 편의점 알바와 십 만원이라는 종이 쪼가리라는 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결정된 사항들이었다. 그 사항들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있었다면 차라리 내게 말해주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만큼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뭐, 내가 이렇게 말해봤자 사람들은 이것 역시 세상의 이치이며 핑계라고 말하겠지만 그냥. 말이라도 하는 건 가능하니까 해보는 거였다.“크.”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가는 소주의 맛은 썼다.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는 술 같은 건 마시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이 술을 마시진 않고서야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몇 년 만에 마시는 거였다. 늘 컵라면으로 버티던 내 몸뚱이는 오랜만에 맛보는 소주가 어색한 모양인지. 파르르 떨어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라면 돼지 껍데기로 끝났을 내 안주 역시 이번만큼은 곱창! 일인분에 삼 만원. 소주 하나에 사천 원. 평소 같았으면 덜덜 떨며 애써 외면할 것들. 그러나 오늘만큼은 호쾌하게 질러보았다. 나와 같이 곱창을 이것저것 주워 먹고 있던 김씨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며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글쎄. 김씨 아저씨야말로 소주를 연달아 마시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아저씨가 취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 처음 본 사이인 사람에게 곱창을 같이 먹어도 되냐고 물어볼 정도로 깡다구를 지닌 사람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걸까. 잘 모르겠네. 의식이 흐릿해지니 김씨 아저씨와 어떻게 곱창을 먹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김씨 아저씨가 자신을 ‘김씨 아저씨’라 부르라고 한 것만 어렴풋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성이 김씨냐는 내 물음에, 제 성은 김씨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많은 성이 김씨이니 그렇게 불러달라고 말하던, 괴짜 아저씨. 평소 같았으면 동석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지만 오늘이 날이라 그런 건지. 그냥 누군가와 술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그 거지꼴을 보고도 흔쾌히 좋다고 말한 거일지도 모른다.우리는 한참을 곱창을 주워 먹다 진로 한 병과 참이슬 한 병, 그리고 곱창 일인분을 추가로 시켰다. 평소 술은 두병까지 최대인 내가 이렇게나 많이 마시다니. 곱창을 한 번에 세 개는 밀어 넣던 김씨 아저씨는 소주만 연신 마시던 나를 슬그머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어디서 뭐하다 왔나?”“그냥 배우 일하다 왔습니다.”그래 라고 말하고는 김씨 아저씨는 말없이 소주를 입에다 털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아저씨를 따라 소주를 입에다 털어냈다. 소주는 썼다. 크. 김씨 아저씨와 내 입에서도 동시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다른 테이블과 달리 유난히 고요하게 곱창만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김씨 아

  • 난바다
  • 2024-07-24
무명

개인사정으로 글 내립니다

  • 난바다
  • 2024-06-24
물거품

비가 오면 망할 반지하 방에는 물이 스며들어왔다. 비는 멈춘 지 오래이건만. 이미 반지하 방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들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이 물을 푸는 와중에도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물줄기를 보며 숨이 턱 끝까지 막혔다. 역시 이 놈의 가난은 내가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내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이 새어 들어오는 물줄기인지, 아니면 내가 흐르는 눈물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이 망할 가난은 물줄기와도 같아서 퍼내고 퍼내어도 끝이 없이 쏟아지고. 결국엔 이 방을 무슨 어항처럼 만들고는 우리를 다 익사시키지는 않을까, 하고. 창문 바로 밑에 주전자를 두고 다시 테이프를 덧붙이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은 동생이 풀어야 한다고 떼를 썼던 문제집과 내 소설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맨 위 선반에 두었다는 점일 것이다. 불행은 동생의 교복이 쫄딱 젖었다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그러면 불행이 너무 큰가? 알 수 없다. 하필이면 오늘이 또 일요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마 아빠가 지어주신 민주라는 이름은 총명할 민慜에 모일 주輳가 아닌 망할 민泯에 살 주住겠지. 내 인생이 이렇게 망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아, 아니지. 주는 살 주住가 아닌 젖을 주澍인가? 물에 빠진 쥐새끼마냥 쫄딱 젖은 내 꼬락서니를 보면 말이야. 사실 잘 모르겠다. 뭐, 어느 쪽이 되었든 내 인생이 시궁창 인생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별로 상관할 필요도 없긴 했다. 어떨 때는 시궁창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제 처지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으나 그것도 옛말. 지금은 시궁창 인생에라도 머무르려고 몸부림치는 중이다.물론 어렸을 때부터 운이 더럽게 없는 놈이라는 소리는 자주 듣고는 했었다. 태어나 보니 집은 반지하에 어머니라는 사람은 빚을 잔뜩 진 채로 내 나이 열하나에 소리 소문 없이 도망쳤다는 사실은 어지간히 운이 더럽게 없지 않고서야 일어나긴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가 그나마 민환이와 나를 챙겨주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셨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 세상을 뜨셨다. 사인은 영양실조. 현대 사회에서 웬 영양실조가 사인인 경우도 있냐고 하지만 그 경우가 우리 가족이었다. 30대 청년이 아사로 사망했다는 뉴스에 요즘 누가 영양실조나 아사로 죽냐는 댓글을 바라보며 그래, 그 경우 여기 있더라, 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지막 인사할 때는 웃으면서 인사하고 싶다던, 삐쩍 말라붙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손으로나마 인사하고 싶었지만 또 그러지 못했다. 엉엉, 또 울면서 아빠, 아빠 가지 마요, 라고 떼를 썼다. 내 나이 열아홉, 민환이 나이 아홉. 영장사진을 겨우 드는 민환이의 손을 꾹 붙잡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네 손에는 물 안 묻히게 해 줄게. 누나가 민환이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라고. 엉엉 우는 민환이의 귓가에 손을 대고 다짐과 같은 말을 뱉었다. 그 다짐, 아직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교복을 말리러 밖에 나선 이 순간에도 민환이

  • 난바다
  • 2024-06-1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난바다

    댓글이 삭제 되었습니다.

    • 2023-12-21 01:33:26
    난바다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