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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의 당신의 죽음으로부터

  • 작성자 난바다
  • 작성일 2023-12-31
  • 조회수 819

우리는 그니까너와 나는 열여덟이라는 나이로 죽으려고 했었다그걸 아는 이유는 단순했다비슷한 사람들끼리 친구를 한다는흔히들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친구답게 성격도 죽고 싶은 이유도죽고 싶은 날짜도 비슷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학교 내 작은 자살 모임이라고 한다면 이해하기 쉬울까우리들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자고 하자니 뭐라 말하기 어려웠다다른 이들은 우리를 범생이와 양아치라는 꽤나 이색적인 명칭으로 부르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우리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범생이와 양아치에서 나는 범생이너는 양아치였다하지만 나는 범생이라는 말과 달리 담배를 피웠다아빠 양복 주머니에서 훔친 담배였다호기심에 몰래 피우던 담배들이 어느 새 쌓이고 쌓여 날 중독 시키게 만들었다. (네가 끊으라고 했으니 지금은 애써 끊는 중이기는 하다.) 그리고 너는 양아치라는 말과 달리 감성적인 부분이 있었다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

 

교복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쪽지들을 꺼냈다다소 비관적인 내용의 쪽지였다.

 

죽고 싶은 날짜는요십이월 삼십일일이요.

죽고 싶은 이유는요...그건 글쎄요그냥요.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남긴다면 하고 싶은 말은말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제 죽음을 너무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나요저는 그냥 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어요 예를 들면 바다에 빠져들기같은 거..

 

왜 썼는지도 기억도 안 났다굳이 기억을 더듬거리며 찾자면 아마우리가 같이 죽을 날짜를 정하려고 했을 때 쓴 글이라고 하면 편할까내가 십이월 삼십일일이 어때?, 라 물으니 너는 고개만 끄덕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그 모습을 보고 나도 내 딴에 내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몰래 끄적거린 글이라 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원래 내가 찢어버리려고 했던 것이었다그 이유를 말하자면내 글씨체로 써진 내 속마음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그렇지만 왜 하필 너는 이 쪽지 위에 네 예쁜 글씨체로 다시 이 내용을 덧대서이 쪽지를 찢기 어렵게 만들어.

 

언제 썼을지도 모를 네 글씨체를 한참을 바라보았다언제 발견했는지그리고 어쩌다 쓰게 되었는지 생각도 하기 전에 나는 입을 열었다.

 

...

 

찢지 말까?

 

찢지 말자.

 

찢고 싶지 않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모순적인 사람이었다고작 저 짧은 세 마디를 뱉고선 쪽지를 찢어버리지 않았으니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오히려 만족스러웠다이 쪽지는 아직 내 교복 바지 주머니 안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볼펜으로 써서 그런지 글이 조금 번지긴 했어도 괜찮았다내겐 이것이 부적 같은 것이었다남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지만 섣불리 보여줄 수 없었다이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면 왜 이것을 썼냐고 물어볼 게 뻔하니까근데 굳이 그 이유에 대해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이 학교에서의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생각을 해 보았을 때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나무라고.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너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들 중에 가장 비슷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또 가장 너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했던 나의 오만한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너와 나의 닮은 구석을 어떻게든 내 방식대로 표현하려고 온갖 애를 써댔다. 이 쪽지야말로 그 표현 방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선생님들 입장에선 나의 표현 방식들이 전부 우습기만 했던 모양이다매일 같이 아침 조회 시간만 되면 담임선생님은 내게 따라와라는 말을 하시고 나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네라고짧게 답했다나를 스쳐지나가는 무관심한 시선들 속에서 선생님 뒤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 순간교무실선생님은 자신의 자리 옆에 놓인 자리에 나를 앉혀놓곤 다시 입을 열었다.

 

-너 그 친구랑 계속 만날 거니?

-그 친구라니요.

-친구 말이야맨날 학교 빠지고 머리는 노오랗게 염색한 애.

-.

-계속 만날 거야?

-.

 

선생님들은 너의 이름을 잘 몰랐다그저 노오랗게 염색한 애또는 왼쪽 귀에만 피어싱 한 애라고 일축하여 너를 부를 뿐이었다바보였다너의 피어싱은 왼쪽 귀가 아닌 오른쪽 귀에만 한 것인데그거에 대해 정정을 부탁하면 너 정말 왜 그러니와 같은 말로 선생님은 날 나무랄 뿐이었다. (그러니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말대답은 하지 말자오히려 피곤해지는 길이다.)

 

우습게도 선생님께서 그 아이를 비하하려는 목적으로 그리 부르시는 거겠지만 그 모든 말들을 완성시킨 건 나였다우스갯소리로 혹은 지나가는 말로 말한 적이 있었다.

 

-나 노랗게 염색하고 싶어.

-그래?

 

그 다음 날에 넌 노란 머리였다그것에 신난 것인지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 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 다음 날내가 말한 상태로 너는 나타났다너는 모르겠지만 그런 너를 보며 내심 한 쪽 마음에선 희열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피어싱 모양은 네가 골랐니?

-.

-예쁘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선생님들이 그 아이의 피어싱에 집착하는 이유에는 학생이 피어싱 같은 걸 하다니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걔의 피어싱 모양이 꽃 모양이라는 거에도 어느 정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수학 선생님께서도 넌 무슨 지지배 같은 피어싱을 하니라고 말씀하셨고 문학 선생님께서도 들꽃 같네라고 걔의 머리를 일부러 들춰가면서까지 말씀하셨으니까선생님들 중에선 문학 선생님 제외하고는 그 아이의 피어싱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렇지만 사실은 나는 걔의 피어싱을 정말 좋아했다괜히 점심시간네가 잠을 잘 때면 몰래 옆자리로 와 너의 오른쪽 귀를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그러다 잠에서 깬 너의 속눈썹을 바라보다 찡그린 너의 표정에 맞추어 웃고 그랬다.

 

-선도현너 내 말 안 듣니?

-...

-됐어어서 가너 내가 생기부 쓴다는 것만 잊지 마렴.

 

하도 멍 때린 탓이려나선생님께서는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눈치 챈 모양인지 시뻘건 얼굴을 한 채로 어깨를 씩씩 거리고 있었다선생님께서 내 생기부를 가지고 이리 말한 것도 몇 십 번째. (몇 번째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세 본 것으론 열다섯이 지나자 세는 것도 포기했다.) 아무리 선생님께서 이리 말씀하셔도 결국 내게 좋은 말을 가득 써줄 것이라는 건 알고 있다이 학교에서 내가 제일 공부를 잘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그래흔히들 말하는 전교 1그게 나였다.

 

매체에서는 전교 1등이 되려면 피눈물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한다고 말한다그 말은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맞는 말이었다나도 꿈이 있었을 적에는 공부를 아득 바득 어떻게든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다그래서 새벽같이 공부를 하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학원 선생님을 일주일에 몇 번이고 찾아가 여쭈어 보고그 짓거리들을 반복했다.

 

내게 그럼 갑자기 공부에 대한 미련을 없애느냐 물어본다면... 솔직히 뭐라 답해야 할지는 모르겠다아무 이유도 없었다극적인 이유그러니까 매체에서 흔히들 말하는 비극적인 이유없었다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신다거나 (우리 부모님은 멀쩡히 잘 살아계시는데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불효자라면 일단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한 마디 남기고 싶다.) 괴롭힘을 당한다거나원인 모를 우울함이건 해당될 수 있지.

 

그니까 내가 죽으면 기사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기사로 나오는 애들은 보통 사회가 애써 감추고 있는 비극적인 이유들로 안타깝게 떠나는 아이들이니까나의 죽음이 기사로 나온다 하더라도 헤드라인은 아마 어른들의 무관심십대 학생들을 죽이다정도되겠지사실 무의미하다관심이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왜 죽었는지 몰라 분통 혹은 울분을 터트리고 있지 않을까괜히 학교에 찾아가 내가 괴롭힘을 받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매일 밤 내 사진을 끌어안고이 생각을 하니 부모님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씀 드리기도 죄송해 진다우리 부모님은 힘든 형편에서도 날 어떻게든 잘 대해주려 아득바득 노력하신 분들이라 더 그런 거일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만약 죽을 것이라면 유서 한 장 정도는 쓰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나는 유서는 쓰고 싶지 않았다유서 한 장을 쓴다면 아무 때나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그리고 뭐랄까내 존재가 이 세상에 남겨진 것 같아서라고 답을 내세우겠다딱 십이월 삼십일일그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떠나고 싶다전지전능한 누군가가 소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리 답해야지.

 

안타깝게도 엄마 아빠 휴대폰에는 나의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의 사진이 너무 많아 아마 엄마아빠는 나를 평생토록 기억하겠지만... 나머지 아이들만큼은 나를 잊어주면 좋겠다그런 애가 있었나정도로만 기억했으면그리고 그 이후론 자신의 일상 얘기만 하면 참 좋을 것 같다.

 

근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이런 나의 소망이 너에게만 제외가 되는 것이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했을 적엔 너는 내게 말했다정말 나를 잊어주길 바라선뜻 그래라고 답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내 입에서 나온 것은 정말 내 의지대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아니.

 

그래라는 두 글자 대신 나온 아니두 글자너는 그런 나를 보고도 참 천연덕스럽게 웃어댔다웃겨웃기냐고내가 계속 묻는대도 너는 그저 고개만 도리도리 저을 뿐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 날은 바람이 거세서 우리의 옷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이 계속 펄럭거리고 있었다너의 피어싱을 그 무엇보다 잘 볼 수 있는 날이었는데계속 바람 때문에 내 머리가 날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순간 짧은 비가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한 발짝두 발짝너에게 다가갔다너는 내 손목을 끌어당겨 너의 귀 쪽으로 내 손을 당겼다딱딱한 피어싱이 만져졌다꽃잎 모양이 참 뾰족하기도 하지하마터면 손가락이 들켜 피가 날 뻔했다혼잣말로 그리 중얼거리니 너는 화들짝 놀라서는 내 손을 패대기쳤다아릿하게 아파오는 내 손의 감각에 놀라 눈을 깜빡거리면서도 나보다도 훨씬 놀라는 네 모습을 보며 그냥 웃었던 것 같다그 날 아마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크게 웃은 사람일 것이다.

 

너와 만난 시간은 짧고 또 짧았지만 너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특별한 사람이었다너의 모순적인 태도가 내겐 마음에 들었다.

 

나처럼 죽고 싶다고 말하는 주제에 이 세상에 널린 것들에서 너는 행복을 느끼곤 했다내가 죽고 싶어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너는 그냥그냥 행복을 느껴댔다이러한 사람은 죽고 싶어 할 리가 없는데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그리고 너는 모두를 이해했다공감이라고 해야 되나이런 걸 보통 체념이라고 말하지언제는 선생님들과 학교 애들이 몰래 하는 이야기로 너는 학교가 끝나면 오토바이를 몰고 한강으로 가 조직 폭력배의 일원으로 지낼 거라고 했다너는 그렇지 않은데너무 터무니없는 말에 괜히 모두를 째려보며 외치고 싶었다너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나 역시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행복을 잘 느끼는 것만큼 네가 불행을 잘 느끼는 거일 수도 있다하지만 너는 학교가 끝난 후에 바로 식당으로 가 서빙을 하고설거지를 하다가 불어 튼 손가락에 연고를 바르고사람들은 네 손의 흉터들을 보면 누군가와 싸워서 그런 거겠지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겠지만 그저 네가 길고양이들을 좋아해서 예뻐해 주다 생긴 상처들이라는 것만큼은 안다.

 

그래서 너에게 적극적으로 해명하라고 말했다너는 그런 아이가 아니잖아너는 좋은 사람이잖아라고말하라 괜히 짜증 내 듯 말했다그런 와중에도 너는 허허 웃고 있었지.

 

-왜 웃어?

-그냥.

-왜 웃냐니까.

-어차피 네가 알아주는데 뭔 상관이야.

 

사람들은 모두 겉으로만 보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지.

 

너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 그 순간의 그 넓은 등짝을 안아주고 싶었다안경에 찬 습기 때문일까앞이 뿌옇다나 정말 왜 그러지오늘따라 왜 그러나재빨리 안경을 벗으려 했으나 너는 그런 내 손을 잡곤 오히려 네가 나를 안아주었다내가 안아주려고 했는데이번만큼은 내가 너에게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그 넓은 몸통에 기대 내 등을 두드리는 너를 보며 나는 망각했던 사실들을 되새겼다오늘 내가 안경을 벗고 학교에 등교했다는 아주 작은 사실을.

 

그리고 이 순간에도 날짜는 십이월 삼십일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째깍째깍.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

 

주말 아침나는 일찍 일어났다따뜻한 이불 안에서도 묘한 추위가 내 코를 감싸 돌았다크리스마스 때부터 지금까지 눈이 계속 오더라니슬쩍 창문을 열어 손을 뻗었다다행히 오늘은 눈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어젯밤부터 준비해 놓은 옷을 입었다엄마에게 이것들을 입고 싶다고 말하니 네가 부탁도 할 줄 아는구나라며엄마가 밤새 다려놓은 옷들이었다그걸 생각하자니 엄마에게 미안했다이 옷들은 결국 발견되어봤자 바다에서 발견이 될 것들인데주섬주섬옷들을 입으며 낡은 손으로 날 챙겨주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큰 점을 보고 나는 뭐라 말했었지엄마 얼굴에 밤바다가 있어라고 말했던가그리 말하자 엄마는 엉엉 울어댔다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커다란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 줄도 모른 채로엉엉울었지울어댔지.

 

나도 모르게 엄마의 점에 손을 댔다주름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엄마의 얼굴이 꿈틀댔던 건 환하게 지은 엄마의 미소 때문이었다그 미소를 따라 나도 웃었다엄마가 말한다.

 

-생일 축하해아들.

-고마워.

-너무 늦지 말고.

-.

-바다 잘 보고 오고맛있는 것도 먹고.

 

엄마는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종이 다섯 장을 건넸다나는 그 중 세 장만 챙기며 엄마에게 인사를 건넸다엄마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잘 갔다 와도현아.

 

갔다 오라니나의 이별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살짝 움찔거렸다가도 다시 재빨리 발을 움직였다네가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었으니버스 터미널로 가 곧 나를 이끌고 출발할 버스 안으로 미리 발을 디뎠다한참 전부터 예약한 버스에는 한참 전부터 예약한 보람이 없게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방 안미리 보려고 전에 주문한 시집 하나를 꺼냈다젊은 여성 시인의 작품으로 너는 이 작품을 특히나 좋아한다고 말했다독특한 취미라고 생각했다현대 시에 관심이 있는 열여덟은 흔치 않을뿐더러 젊은 여성 시인을 너만큼 많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고요히 시집을 꺼냈다시집에는 작가가 짧게 독자들에게 남긴 말이 있었다.

 

당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시집에 제가 함께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신으로부터라.

 

괜히 이 말이 낯간지러워 여러 번 손가락으로 그 활자를 만져댔다황홀했다그와 마찬가지로 감격스러웠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작가 역시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었던 것인지이 시집의 유예기간이 고작 하루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당연한 일이었다이 시집은 내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두를 위한 것이었으니까그저 마지막 하루에 내게 황홀한 감정을 선사해 준 이름 역시 처음 들어본 젊은 여성 시인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버스는 덜컹 소리를 내며 우리나라 끝 쪽을 향해 달려갔다가면 갈수록 논밭이 펼쳐지고 도시에서의 아스팔트 향이 옅어지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나는 한 장을 남긴 시집을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외지인에게 무관심하다고 들었다바다와 가까우면서도 먹을거리는 넘치고슈퍼마켓 아주머니도 불친절하다고 덧붙였던가마음에 들었다누군가는 왜 그런 곳에 가냐고 물어보겠지만 혹시나 우리가 바다를 뛰어들 적에 누군가가 괜히 우리를 구하겠다고 파도에 휩쓸려 내가 남의 가정을 파토시키는 일을 없도록 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밤새 찾은 동네였다그리고 괜히 친절한 아주머니를 만났다가는 괜히 나의 모순적인 성격에 휩쓸려 다시 버스를 타고 엄마 곁으로 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작년에도 실패한 경험이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다만 한 가지 간과했던 사실은 이 동네가 정말 정말로 도시에서 떨어진 곳이라는 점이다버스 정류장도 없어 버스가 나를 도로가 쫙쫙 갈라진 이 곳에 버리고 갈 줄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급히 휴대폰을 켰다먹통이었다아무리 작은 동네라 하더라도 이 곳에서 휴대폰도 없이 너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막막한 마음을 다 안고 갈라진 도로가 이어진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올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꽃 향이 났다신기한 동네였다옆에는 바다가 보이지도 않은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데 짭짤한 향은커녕 꽃 향이 나다니갈라진 도로 틈 사이로 피어난 들꽃들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이래서 꽃 향이 났던 거구나하고.

 

도로 틈 사이에 꽃이 피어난 것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라 꺾고 싶었다가도 그러다간 네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싶어 이내 포기했다저 흰 들꽃은 이 곳에 오는 내가 아닌 또 다른 외지인에게 이런 감정을 선사할 것이다나는 다시 바다를 향해 다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런 말이 있다바다 근처 동네에서 태어난 사람의 첫사랑은 바다라고엄마를 따라 바다에 많이 놀러갔던 나답게 이 말을 엄마에게서 끊임없이 들어왔다. (엄마의 말로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바다 근처에서 살았다고.) 아빠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엄마는 그 말에 맞는 사람이었다엄마의 첫사랑은 바다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검은 점이 오히려 달 같다고 생각했다엄마를 따라 바다에 머리를 푹담그고 있는 검은 달바다 같다고 생각했다검은 점이 아닌 엄마가 바다라고 생각했다엄마는 아마 그 검은 점을 바다 같다고 내가 말한 줄 알겠지만 아니었다엄마는 바다 그 자체인 사람그런 사람이었다.

 

근데 우습게도 요즘에는 그런 엄마를 보면 네가 떠올랐다노오랗게 염색하여 오른쪽 귀에 꽃 피어싱을 달고 있는모두에게 양아치라고 인식 받고 있는 네가바다 그 자체인 사람에게서 너를 보다니너는 그럼 어떤 사람인가너의 모습에서 바다를 본 적이 없는데일단 외향에서부터 너는 바다와 멀었다머리는 노랗고 얼굴은 딱딱하게앳됐지만 좀 날카롭게 생겼다그러고 보니 너의 꽃 피어싱은 아까 전에 본 들꽃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기도... 어쨌든너는 모든 것에서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사람이었다너에게선 짭짤한 향도 나지 않았다오히려 난다면 설거지를 할 때 쓰는 세제 향이 났지너에게서 바다를 연상시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근데도 나는 너에게서 바다가 보였다저 멀리서 밀려오는 바다가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나를 향해 쏟아지는 파도가 너와 같았다그래서 죽는 많은 방법들 중에서 바다와 죽을 수 있는익사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우리가 아무리 손을 잡고 바다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발견이 되었을 때그 옆에 너는 없을 수 있다그러니 바다너와 함께 있고 싶었다누군가 들으면 우스운 이야기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랬다.

 

어느덧 해가 땅거미를 삼킨 채 추락하고 있었다바다를 보며 계속 걸은 탓에 내 앞에는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추위에 이가 딱딱 떨리고 양말을 안 신은 발이 새빨갰지만 신발을 벗고 긴 바지를 걷어 올렸다조심스레 바다에 엄지발가락을 내밀었다차가웠다.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파도에 내 발을 맡겼다발뿐만 아니라 이제 종아리까지 빨개지고 있었다이거야 원바다에 빠지기도 전에 저체온증으로 죽을 판이었다슬슬 모래사장에서 너를 기다릴까 생각하던 찰나에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도현!

 

까만 비닐봉지 두 개를 한 손에 들고 나풀거리며 다가오는 네가 보였다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지은 너의 미소는 꽤나 모순적이라서그래서 좋았다.

 

-늦게 왔네.

-이거 사오느라.

-뭔데?

-스파클라랑 초코파이생일 축하해!

 

아무 전조도 없이 너는 냉큼 내게 생일 모자를 씌웠다꼴이 우스워 보일 것이 뻔했다다리는 새빨갛고 윗옷은 패딩에머리에는 생일 모자라니웃긴 조합이었다마음에 들었다너는 그런 우스운 차림새의 나를 끌고 와선 모래사장에 앉혔다그러곤 내 앞에 모래를 끌고 오더니 그 위에 플라스틱 접시를 놓았다그 위에 초코파이를 하나...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우리 열여덟이잖아각각 아홉 개그래서 열여덟 개는 올려야지.

 

마치 우리 둘이 하나가 되면 열여덟그 자체가 되는 것 같아서 아홉 개를 다 못 먹을 것이 뻔하면서도 난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초코파이를 들었다나도 초코파이를 들었다이상하게 따뜻했다겨울 바람이 가장 차게 느껴진다는 이 바다 앞에서 왜 초코파이는 따뜻한지네게 묻고 싶었지만 너의 표정이 왜인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져 이는 삼가기로 했다.

 

-왜 못 먹어?

-배불러.

-더 먹자.

-배부르다니까.

-그럼 내가 더 먹을 거야.

 

너는 내가 남긴 초코파이 세 개를 그렇게 다 먹었다너는 아마 이리 생각하지 않았을까이걸 다 못 먹으면 우리는 열여덟을 완성시키지 못한다는그런 생각우습기도 우습지만 한 편으론 사랑스러운 생각이었다모두가 너를 보고 사랑스럽다는 그 문장을 못 떠올리겠지만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너는 사랑스럽다는 그 문장과 가장 흡사한 사람이었다.

 

네 옷에 묻은 초코파이 가루를 털고웃고네 입 주위에 잔뜩 묻은 초코파이 가루를 보며 놀리고작년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홀로 온 작년에 나는 어찌 살아서 나갔는지 이젠 도통 모르겠다.

 

다시금 꼼지락꼼지락너는 무슨 마법 지팡이라도 보이듯이 스파클라를 자랑스럽게 내게 보여주곤 어떻게 가지고 왔는지 모를 점화 라이터 역시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너 라이터 키는 방법 알아?

-몰라.

-내가 킬게.

 

겁도 많은 네가 무서워할까나는 왼손에 스파클라를오른손에 점화 라이터를 들었다라이터를 꾹 누르자 화악불이 켜졌다.

 

-너 손 조심해!

-어차피 안 와.

 

내 손을 향해 다가오는 불빛에 네가 샀음에도 너는 화들짝 놀라서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당연히 화약은 여기까지 안 발라져 있지바보야그리 말해야 하는데 그런 네 모습에 웃기 바빴다.

 

-별 같다.

-?

-.

-웬 별.

-밤에 있을 별을 우리가 가지고 온 것 같아하늘 봐 별이 많아.

 

나도 몰래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도시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별들이 지금 내 눈 앞에 놓여 있다들꽃 같았다그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위 간신히 피워 낸 그 수많은 들꽃들들꽃들이 활짝 피었다.

 

예뻤다.

 

짜증나게도 예뻤다죽기 싫을 정도로내 앞에서 별을 들고 있는 네 모습이나 밤하늘에 활짝 핀 들꽃이나겨울바람이 불어도 차갑지 않고 따뜻했던 초코파이그리고그리고...

 

-우리살까?

 

네가 먼저 말했다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 꿈이 생겼어.

-뭔데.

-장례 지도사.

-참 우울한 거 하고 싶어 하네.

 

오늘도 안경을 안 가지고 왔는데 왜 이리 앞이 흐린지 모르겠다뾰루퉁한 내 말에도 곰곰이 생각하던 너는 들꽃이 핀 것처럼 활짝.

 

-아직 너 죽는 거 감당이 안 되거든.

-거짓말쟁이.

-맞아나 거짓말쟁이야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네가 죽었을 때의 장례는 내가 치루고 싶어.

-.

-마지막까지도 너랑 있고 싶어.

 

그럼 네 죽음을 그 이후에 담담히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만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바람이 불었다여전히 들꽃은 활짝 피운 채였고 초코파이 가루와 섞인 모래도 여전했다우리 옆에 수북이 놓인 스파클라며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파도며내 발끝을 살짝 건드리는 물결빨갛게 변한 나의 엄지발가락그리고.

 

바다는 깊고네 말도 깊었다.

 

사실알고 있었다.

 

네가 죽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살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너만큼 사소한 행복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리 쉽게 바스라진다는 건 말도 안 됐다그런 너의 모순적인 모습들을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나는나는.

 

...

 

-우리살자.

 

울다 보면 바닷물이 내 코나 귀에 들어간 것 마냥 텁텁해지곤 했다내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던 모양인지너와 같이 있을 때면 붉게 변하는 내 얼굴이나 눈물이 나오는 것이 못내 쪽팔렸다.

 

고개를 푹 숙였다그 때처럼 네가 넓은 몸통으로 날 안아준다십이월 삼십일일절대로 열아홉의 해는 보지 않고 바다와 죽겠다는 나의 소망은 파도에 부딪혀 부서졌다다시는 붙여지지 않을 조각들이 되어 바다 깊숙이깊숙이아주 깊숙이.

 

-그래.

 

이번엔 아니라는 두 글자 대신에 그래라는 말이 나왔다아니라 해야 하는데역시나 나는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

 

내 옆자리에서 너는 눈을 감고 있다어젯밤의 일이 힘겨웠던 모양이다나는 바닷물에 살짝 젖은 내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꽃 향이 났다.

 

문득 이곳으로 올 적에 보지 못했던 시집 마지막 장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가방 지퍼를 쭉 당겼다약간 쪼글쪼글해진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접은 종이를 찾아 손으로 넘겨 마지막 장으로 향했다제목은 이랬다.

 

언젠가의 당신의 죽음으로부터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마치내가 죽지 않을 것을 알기라도 하는 양언젠가라고 쓴 시인의 표현에 표정이 감추어지지 않았다.

 

-언젠가의 당신의 죽음으로부터.

 

괜히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너는 아직 자고 있었다언젠가언젠가라...

 

버스 창문을 바라보았다올 때 커튼을 쳐서 몰랐으나 버스는 바다를 그리며 달리고 있었다.

 

언젠가의 나의 죽음이 내게 편지를 쓴다면 이러겠지.



 

너는 결국 나를 멀리 하겠지.

 

생일 축하해그리고 내년도내후년의 너에게도. 이 말을 전해줘.


고마워. 좀 나중에 만나.

 

-언젠가의 너의 죽음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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