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크툴루 신화에서 운명애 보기

  • 작성자 데카당
  • 작성일 2024-02-28
  • 조회수 432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엄밀한 정의 수준 까지는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논의한다고 가정했을 때  결정론을 지지한다면 그것은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내 생각마저 신경세포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난 결과라면 내 의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신경세포 사이의 상호작용은 미시세계에서의 사건이고 따라서 관찰자를 기준으로 한 시점에 관찰대상의 운동상태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생각은 이론적으로 인과적일 순 없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이 자리잡은 것은 1940년대의 일. 우리에게는 그 이전의 소설이 존재한다. 게다가 우주적 결정론을 보유한! 그러나 조금은 유연한 결정론. 그렇다. 크툴루 신화에 대해 써보려 한다.  크툴루 신화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와 후대의 작가들이 쓴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는 우리 우주의 외부에 우리의 감각을 초월한 무언가 존재하는 세계이며 소설 내의 시점에서는 활동하고 있지 않지만 모두가 깨어나는 날 우주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멸망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깨어나는 조건은 태양계 행성의 정렬이며 소설이 쓰인 시기는 1930년대이므로 당연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우주는 멸망을 향해서 달려나가는 것이다. 무력한 인간 앞에 나타난 확정된 멸망 혹은 개별 등장인물의 파멸로 작가는 무력한 인간을 제시하고 독자는 이를 받아들여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확정된 미래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가끔 지나가듯이 행성의 정렬을 읊을 뿐이다. 이유는 물론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결말이 정해진 연작에서 예정된 결말의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더 재밌는 것이다. 또 개인적인 관점에서 올려다보는 구조가 작가가 의도한 공포에 적합한 것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작가의 의도, 독자가 공포로 받아들이는 것을 풀어서 거기에 자신의 운명에 담대하게 직면하고 그 운명을 사랑하는 인간적인 이들에 대한 의도치 않은 헌사를 밝혀내고자 한다.  작가는 이해 불가능한, 따라서 무력감을 주는 것을 대면한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크툴루 신화가 신화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그리스 신화 중 많은 영웅신화는 어느날 내려온 신탁에서 알게 된 운명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지만 결국 그 노력으로 인해서 예정된 운명을 직접 실행하게 되고 낙담한 채 늙어죽거나 자살한다.  크툴루 신화도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화자는 우연한 계기로 신탁의 장소인 신전에 대응하는 특정한 장소 혹은 신관, 신탁에 대응하는 기록물, 물건을 통해 운명에 대응하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편린을 감각하고 그 존재를 피하거나 혹은 막으려고 심지어는 신탁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와 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존재의 활동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즉 영웅의 파멸이고 그 결과는 광기이다. 광기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며 따라서 실질적으로 죽는다. 크툴루 신화의 수없이 많은 초월적 존재들은 그리스 신화의 세 운명의 여신 중 두번째, 세번째의 역할을 맡는다. 첫번째는 실을 뽑아 생애 주기의 시작을 열고 두번째는 실을 감아 어떻게 살아갈지를 정하며 세번째는 실을 끊어 생을 끝낸다. 이에 대응해서 화자가 어떤 식으로 광기에 잠식될지를 자신의 특징과 연관되게 유도하며 완전히 미치게 만들거나 죽게 한다. 이때 원전에서의 위상과 화자가 발생과정이 중요하진 않은 인물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첫번째 여신의 역할은 굳이 수행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망 없는 신화들의 어떤 점에서 운명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발견되는가? 우선 그리스 신화에서의 태도를 살펴보겠다.  니체는 비극의 의의에 대해 논하면서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생명력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영웅들의 고군분투에서 그들의 생명력이 분수처럼 쏟아지고 그 끝에서 상승하는 삶의 종지부가 찍히는 것이다. 이때 종장에서 죽거나 꺾이거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명력은 삶을 어떤 형태로든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 상승하는, 활력을 느끼고 자부심을 가지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으로 나타나고 이때 두 의지는 서로 반대되는 경우까지 생기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관객이 건강한 힘에의 의지를 지닌 사람의 충만한 생명력의 발산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승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극단적으로 들어가면 같은 순간들이 무한히 반복되더라도 그 반복되는 순간들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  이에 크툴루 신화의 요소를 대입하면 화자가 이성을 유지하고자 행하는 다양한 고군분투는 무력감을 느낀 순간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삶을 사랑하여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자연스럽게 운명에 맞서 투쟁하게 되지만 동인이 운명의 지연, 회피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투쟁의 대상이 비록 작가의 개인적인 두려움에 가면을 씌워 빚어진 것이긴 하지만 이미 앞에 나온 영웅신화와의 구조적 유사성에서 나온 장치들로 운명과 동격을 이루게 되어서 독자로 하여금 운명에 체념한 채 순간을 지나가지 않고 고정된 순간들일지라도 열심을 다해 살아갈 선택을 하는 인간적인 이들을 칭송하기 위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니체는 자유의지, 거기서 나오는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이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겨 통제하기 위한 발명품이며 원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자유의지는 창시자들이 주장하기로 위로부터 부여받아 너무 멀리 떨어져 인간의 이성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제 1 원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지금의 논의에서 나온 삶의 순간들에서의 행동들을 자유로이 선택하는 듯 보이는 일종의 의지는 여러가지로 나열된 사항 중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무엇 하나 성공하지 못하지만 자신을 거쳐가는 순간을 활기차게 보내며 지나간 순간을 기억함에 사랑하고 다가올 운명을 환영한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정의해 사용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간 삶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며 이때 자유의지의 존재여부는 무시된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이 크툴루 신화를 써내려간 작가들은 개인의 막연한 공포와 근거 없이 구분짓기 위한 혐오를 마찬가지로 막연하고 근거 없이, 조리있지 않게 표현했으며 그런 혐오와 공포가 일으키는 무력감이 모여 하나의 결정론적 세계를 이루게 됐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그들 자신은 그렇게도 겁이 나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일을 그들이 포기한 정확히 그 지점에서 출발했어도 성취해낸 일물들을 만들어냈다.  이렇듯 크툴루 신화는 얼핏 허무주의로 빠지는 듯 하지만 삶에 대한 인식이 가장 부정적인 때 방향을 틀어 파놓은 땅굴을 되짚기 시작한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크툴루는 물거품으로 사라지며 르뤼에는 제자리를 찾아 추락한다. 다시 떠오르는 해, 다시 시작되는 삶에서 색색의 빛이 쏟아져 나온다.

추천 콘텐츠

말도로르의 반항

말도로르의 노래는 로트레아몽이 발표한 산문시집이다. 카뮈는 그의 책 반항인에서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며 한 가지 예로 로트레아몽을 드는데 이후에 서술되는 반항하는 인간상과는 꽤나 큰 차이를 보이는 말도로르의 경우를 자신이 사용하는 반항의 계보에 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말도로르의 특징은 신, 즉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반감과 그에 따르는 사회 규범의 파괴이다. 예를 들어 당시 사회 규범에서의 모범이 되는 가족(명예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아버지, 가족 간 예의를 지키는 현명하고 다정한 어머니,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들)이 나오는데, 그 가족의 아이를 꾀어내고 마대자루에 담아 포물선을 그리게 던져버린다. 반항의 사전적인 뜻을 찾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맞서 대들거나 반대함'이므로 말도로르의 일차원적인 테러들을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카뮈의 반항은 아무런 숙고 없이 벌이는 무차별적인 테러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이때 반항은 절대적 부정에서 변화해 일어난 행동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절대적인 부정은 모든 의미를 거부하면서도 생을 유지하려 하는데, 생을 선택하는 것에서 이미 생에 대한 가치판단을 한 것으로, 이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조리한 인간이며 1차 대전을 통해 막 종교와 이성의 신성화에서 벗어난 유럽에서는 부조리의 추론으로 자살의 정당성을 숙고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절대적인 의미없음에서 나오는 살인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보다 자신까지 부정해서 자살로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시작되고 끝난 시기 유럽에는 부조리의 추론을 비틀어 국가적 단위의 살인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고 개인적인 숙고에서의 자살은 사실상 사라졌다. 부조리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이 아니라 살인을 선택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반항이 아니다. 반항은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침해를 막는 것이다. 침해를 거부하는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반항할 수 있다. 따라서 반항은 절대적 거부도 파괴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적인 긍정이다. 가치의 인정과 거기서 나오는 보존을 원하는 긍정이고, 따라서 폭력은 가치의 보호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써만 행해질 수 있으며 그 책임 또한 짊어져야 한다. 말도로르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한다. 섭리, 절대선 등의 것과 거기서 오는 희망을 없애고자 한다. 그런 것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섭리가 희망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따르는 이들도 용납할 수 없다. 섭리에 대항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섭리만을 공격하고 끝내는게 아닌 것이다. 이때 반항적인 추론은 가치를 손으로 가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섭리를 밀쳐내고 마침내는 섭리를 끌어내리는 것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기준이 아무것도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반항의 추론은 섭리를 끌어내고 자신이 거기에 앉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추론의 단계에서는 이미 섭리의 자리에 앉은 말도로르에게 섭리를 기준

  • 데카당
  • 2024-05-07
전락과 21st century schizoid man

전락은 대화의 형식을 빌린 극에서의 기나긴 독백이다. 작가는 대화 상대역의 말을 주인공이 대신 되받아 말하도록 했고 이에 그 연극은 일인극이 된다. 일인극에서의 독백. 주인공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전개되는 독백은 세계를 만든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은 현대인의 특징이다. 그리고 극을 정신분열로 치환하면 21세기 정신분열성 인격장애 남자다. 일단 전락을 먼저 보자. 화자는 우선 자신의 예전 삶을 털어낸다. 약자의 편에 서는 잘 나가는 변호사로 평판까지 좋아서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 의도로 바라봐진다. 그런 상황을 연기라고 하면서 일부러 이해되기 힘든 주장을 할 때 이 평판은 저주가 된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피곤한가보다! 하는 식이다. 이미 화자는 사라지고 변호사(화자)가 만들어졌다. 물론 화자는 지속적인 노력,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 변호사를 죽였다. 그러나 변호사는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의 세계에서 발판이었기 때문에 화자는 허무함을 느끼며 방탕한 생활을 했고(전락) 또다른 허무함을 만들다 보니 시간이 흘러 방탕하게 살기에는 몸이 받쳐주지 않는 나이가 됐다. 이때부터 화자는 작은 항구마을로 가서 원래보다는 한가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청자가 왔을 때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자는 과거를 말하면서 자신을 피고석에 세운다. 그리고 피고로 선 화자는 역으로 세상을 고발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냉소는 변호사라는 직업 전반에 대한 냉소로 확장되고 자신이 구하지 않은, 다리에서 떨어진 여자의 이미지로 나타내지는 자신의 법정이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는 법정으로 팽창한다. 동시대의 사고에 갇히지 않고 비판하는 화자는 물론 현대적이지만 화자가 나타내는 현대의 인간은 세상에서 떨어진 개인일 뿐이다. 화자가 법정에 서는 이유는 세상을 고발하는데 있지 성찰을 위하는데 있지 않으며 모든 과정이 화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법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화자는 자신을 쪼개 청자를 만든다. 별개의 인격이 된 둘은 법정을 통해서 다시 한 곳에 섞여든다. 그렇게 진행된 재판에서 확장된 법정은 세계의 주인을 다시 자그마한 개인으로 전락시킨다. 두번째 전락이다. 세계에 빠진 개인은 허우적거리지만 세계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형량의 증가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만든 세계이기에 사형을 언도받는 일은 없고 허우적거리던 화자는 얕은 물 위에서 공포에 질렸었다는 것을 깨닫자 다시 청자에게 밖의 세계를 고발한다. 화자가 계획하는 세번째 전락이지만 화자만의 세계는 무너졌고 밖은 미동도 없다. 무너진 세계와 무관심을 살아가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후의 심판이다. 화자는 냉철한 이성의 합리적 시각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화자의 전락의 모티프는 최후의 심판에서 나왔으니 신앙에 기반한 시각, 신앙에 기반한, 황금률, 보편 윤리에 기반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신앙과 이성이 양립 가능하다고 보고 싶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신앙이 이성의 형식만을 따온 것이다. 이성의 공리

  • 데카당
  • 2024-04-20
자살의 밈화

자살. 스스로 죽는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지금까지는 자살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개인의 철학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만을 듣고 배우고 가져 왔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관점 또한 필요할 때인 듯 하다. 시작은 복제 단위로서의 밈이다. 가계를 따라 수직 낙하할 수밖에는 없는 유전자와는 다르게 밈은 가계를 벗어난 것에 더해 수평적이거나 역전되는 전달이 가능하다. 이것은 유전자가 번식기까지는 개체를 유지시키려 하는 것에 비해서 밈은 개체의 안전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효과를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적인 밈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민족끼리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어서 결국 민족국가를 침체시킴에도 끝없이 퍼져나갔고 현재까지 복제되고 있다. 밈으로서의 자살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자살 통계를 보면 때 30대 이상 연령층에서 한순간에 수와 비율이 폭증하는 것을 근거로 자살이 유전자의 작용이 아니냐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전의 특징 덕분에 번식기가 지난 후 발현되는 치사 유전자는 도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논의는 끝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에 논의는 계속된다. 자살이 유전자 차원의 어느정도 퍼져있는 표현형이라면 경험적으로 노화라는 현상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오면서도 그 현상의 표면적인 이유를 집어서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 같은 고전 자료에서 자살이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고 성서에 자살을 죄악으로 적어놓은 것을 보면 자살이 어느정도는 퍼져있다는 가정은 맞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고 극복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또 자살을 죄악으로 터부시하던 중세를 지나면 자살을 예찬하는 이들이 등장해 자살이 훌륭한 이유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하니 이들이 자살 밈을 성공적으로 퍼뜨린 개체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의 자살 예찬을 유전자의 기능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해당 시기, 근대의 유명한 자살 예찬가들이 말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삶의 방식에서 삶 또한 예찬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 플룻을 연주한 어떤 철학자와 풍성한 식사자리에서 자살을 논한 쇼펜하우어가 좋은 예시이다. 자살이 유전자의 표현형이라면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므로 밈이 개입했다고 보겠다. 탈출구, 해결책으로 던져지던 자살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서 드디어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더이상 삶과 자살을 동시에 예찬하지 않는다. 밈의 복제과정은 유전자보다 덜 엄밀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는 단계별로 억제제를 갖지만 밈의 복제에 있어 억제제는 개체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라는 또다른 밈 뿐이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개별 유전자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반면 밈은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감각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복제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며 따라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위의 주장이 사회, 철학적 관점을 모두 사용한다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밈으로서의 자살과 철학적 자살, 사회 구조적 자살을 보는 관점 사이 관계를 짚어야겠다. 우선 밈에 관한 관점이 가장 근본적이다. 개

  • 데카당
  • 2024-04-1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데카당

    여러가지 학설을 있는대로 끌어다 제 마음대로 썼습니다. 그렇긴 해도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24-02-28 01:16:36
    데카당
    0 /1500
    • 데카당

      3/8 수정

      • 2024-03-08 19:21:41
      데카당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