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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 피어나는 유월의 월장원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6-11
  • 조회수 307

그러니깐, 글틴 비평 게시판에서 그토록 고대해왔던 월장원에 선정되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행복, 성취감, 뿌듯함이 아니라 내 속 깊숙히에서 묵혀왔던 어느 것이 꾸역꾸역 올라와서 내장을 베베 꼬아버리는 감각이었다. 그렇게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솓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구역질을 했다. 무척 기쁘고 좋은 일인데, 어째서 내 몸은 나를 따르지 않을까. 


작년 이맘때 즈음에, 나는 처음으로 글틴에 글을 기고했다. <이명>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었는데, 나름대로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쓰게 된 글이었다. 또는, 처음으로 문학다운 문학을 하게 된 글이었다. 그 이전의 나는 그저 초중고 국어시간에 소설창작 과제를 매우 잘 수행하는 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보다 책을 더 눈에 오래 두는, 그러나 영화를 더 좋아하는 청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브레송을 사랑하고 이만희를 사랑하고 로셀리니를 사랑하며, 황순원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는 문득 그들의 작품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이 일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습작으로 서너 편 정도. 그러다 글틴에 올린 <이명>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을 글로 온긴 작품이었고, 나는 문학적인 장치와 기법들을 가볍게 넣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당시 소설 게시판에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할 좋은 작품들이 없었고, 그 달은 내가 쉽게 월장원을 ‘우승’하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다음 달을 기다렸고, 대차게 ‘떨어졌다’. 나는 당시 그것을 ‘떨어졌다’고 받아들였다. 솔직히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은 바로 ‘글장원’의 후보로 올랐었기 때문이었다. 그 달의 무수히 많던 소설들 중 내 작품이 후보로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월장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나는 글을 처음 써보았으니깐. 다음번에는 월장원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희망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서 그 희망을 확신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후 적어도 한 달에 한두 편씩은 꼭 소설을 썼다. 


희망이 헛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세 달 후였다. 월장원에서는 좋은 작품만 후보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글을 기고한 신인 글티너들에게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너무 못나지 않은 이상은 후보로 선정해 주는 관습이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 관습의 물살에 휩쓸린 신인 글티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어떠한 질문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내가 글을 쓴 것이 월장원을 위한 것이었나?’


아니었다. 나는 월장원에 당선되고 싶어서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거고, 굳이 글틴에 올린 것은 유명한 문인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월장원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내 심장을 더욱 깊숙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매달 매달 소설을 올리고 월장원이 발표될 때마다 내 심장은 꾸겨져갔고, 결국 구멍이 뚫려버려서 망가져버린 지경까지 갔다. 나는 매달 소설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생각했다. 나는 이런 것을 위해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고. 월장원을 위해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월장원 선정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서 늘 김칫국부터 들이마셨다. 그 김칫국은 언제나 쓴 고배였다. 나는 부패해가고 있었다. 나보다 못난 이들이 월장원을 탔다는 지저분한 생각을 했고, 그래서 나 스스로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때 만난 건 선노아였다. 그는 내가 월장원에 눈이 멀어있는 동안 두 번에 걸쳐 소설 게시판에서 월장원을 석권한 인물이었는데, 나는 그가 월장원을 탄 것에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글을 잘 썼으니깐. 나는 그의 글이 지닌 어떤 폭발력과 불쾌하게 아름다운 서정적인 감정을 좋아했다. 그의 글은 지저분한 욕망의 집합체였지만, 나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이글거리는 욕망 덩어리였던 그의 글을 혐오했고, 동시에 사랑했다.

실제로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서로 고다르를 좋아한다는 점, 타르콥스키와 브레송을 좋아한다는 점. 실제로 만난 그는 정신병자였다. 어쩐지. 맨 정신으로 쓸 수 없는 글을 쓰더라. 그래도 그가 좋았다. 나는 그와 많은 개인사를 터놓고 이야기했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의 뼛속까지 알았다. 우리는 같은 작가를 좋아했다. 서이제. 우리는 실제로 함께 서이제 작가님을 뵈었고, 선노아는 여전히 만남 이후 여전히 서이제를 좋아했지만, 나는 더 이상 서이제라는 작가에게 다가서지 않게 되었다. 선노아와 함께 하며 나는 월장원의 아픔을 잠시나마 지워버릴 수 있었다. 선노아는 이제 글틴을 졸업했다고 하는데. 잘 살고는 있을까? 연락이 끊긴 지도 오래다. 여하튼 그와 함께 했던 그 시간은, 끔찍했지만 아름다웠던 때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당시의 나는 더 빠르게 망가졌을 테니까. 


그즈음, 월장원에 당선된다면 소감으로 수상을 거부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길만이 나를 그 지독한 세상 속에서 끌어당겨주는 유일한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수상을 거부해야만 나를 옭아매던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수상거부를 위한 기회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 스스로 점점 더 썩어가고 있었고, 망가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쓰게 된 것이 소설부문의 <까뮈의 시네마와 이상한 세상에 대한 연구>였고 여러 비평글이었다. <카뮈의 시네마와 이상한 세상에 대한 연구>는 내가 월장원이라는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했다. 그 글을 쓰며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도인이 되어있었다. 욕망을 벗어던졌다. 혐오감이 들 정도로 색욕과 도약을 피해 다녔다. 그것들이 내 옆으로 슬며시 다가오면 나는 불패의 불벽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를 흔들지 못했다. 그건 곧 월장원에 대한 우승 뿐 아니라 글을 써야 한다는 욕망을 지워버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확신했다. 이제는 소설을 쓸 수 없을 거라고. 쓰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확신을 실행하기 위하여 한 편의 글을 썼다. <내가 쓴, 마지막 소설>은 그 결과물이었다. 그건 나 다운 글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나 다운 글이었다.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은 감각에 어색했고, 서툴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 모든 것은 이미 끝나있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힐난하므로서 과거의 나를 구덩이에 떨어뜨리고 새로운 나로 개과천선하려고 했다. 그렇게 내 속에 예전의 나를 묻었다. 나는 월장원에 찌들어있던 지난날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얻는 것이다. 이후 비평을 썼고, 비평을 하며 소설가로서의 나 자신을 떨쳐버리고 싶다는 마음과, 여지껏 내가 경험해 본 모든 것을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끼고 글을 썼다. 그것이 바로 <예술과 자기 비평>이라는 글이었다. 그 글은 사실상 소설이다. 소설인 한편으로, 비평이다. 난 내 인생이라는 소설을 비평했다. 보통 문인들은 누군가 자기 작품을 좋지 않게 평가하면 더러 일을 벌이고는 하던데, 나는 그 반대로 안 좋은 평가을 계기로 도약했으면 했다. 나 스스로 막혀있던 부분을 깨부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틴에 글을 기고하려고 들어왔다가 그 글이 월장원에 당선된 것을 본 거다. 순간 여러 감정과 생각들이 의식 저편에서 나를 향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내 명치 깊숙히 무언가가 매우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감각 역시 느꼈다. 알 수 없는 감각과 감정은 서로 경주를 하듯 나에게로 빠르게 몰려왔고,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를 내뿜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무언가가 그냥 쏟아진거다. 그 속에서 나는 보았다. 그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자 문득 떠오른 것은 <이명>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글틴에 발표한 글 <이명>의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자신을 괴롭혀오던, 잊을 수 없는 (그리움에 가까운) 과거, 또는 그 과거의 표상인 추상적인 인물 선우의 이명에서 벗어나게 되자 구토를 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구토를 할 때, 그것은 곧 자신의 그리운 과거와 단절되었음을 의미했다. 그 구토 속에는 자신이 평생을 지니고 있던,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가 담겨있다. 


이제 나는 내가 뿜어낸 구토 속, 변기물에 둥둥 떠다니는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검고, 작았으며, 필사적으로 꾸불거리고 있었다. 그건 고독蠱毒이었다. 내 몸 속 내부를 괴롭게 했던 그 건, 내가 나의 내부에 묻어버렸던 욕망과 욕구, 또는 더럽기 그지없던 나 자신이었던 거다. 나는 알 수 없는 후련함과 아련한 감정이 나를 감 싸도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정말 소설 같은 일이다. 나는 이 소설 같은 일을 겪게 된 거다. 문득 나름대로 이제는 조금 개운한 몸을 가지고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삶. 그것이 내 앞에 놓여져있다. 이제 무엇을 해야하지? 선노아에게 드디어 내가 월장원을 탔다고 자랑할까? 이제는 아득해져 버린 그 사람을 한 테? 아니, 답은 간단했다. 나는 변기통의 레버를 내렸다. 물이 회오리쳤고, 구토와 검은 고독은 물살을 따라 뱅글뱅글 돌더니, 점점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똥을 싸지는 않았지만 개운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정말이지 개운하게. 그리고, 이제 좀 제대로 된 글을 쓰려고 한다. 지금은 유월이고, 나뭇잎들은 서로 부딪히며 바람과 공명하고 있었으며, 하늘은 쨍쨍하니깐. 지난해에는 이런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심코 컴퓨터를 키며 글틴으로 들어가려고 마우스만 까딱거리고 있었겠지. 올해는 그럴 일 없도록 해야겠다. 하. 유월의 여름은 정말이지 그리운 것도 슬픔에서 행복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니깐. 정말로 올여름은 오랜만에 즐겨야겠다.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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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수필쓰기

어느 적날 피천득 선생님께서는 수필을 이리 말씀하셨다.'수필은 청자 연적 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의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문득이 글틴 누리집을 뒤적이다가 스친 생각이다. 그냥 내 짐작컨데 요번 7월 간 소설은 스무편이 넘게 투고되었고 시는 백편에 가깝지 않을까 하지만은 이 수필은 채 열편에 간당간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소설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고 어느 시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어느 수필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나 역시 이 수필이란 것을 쓰려고 해본 것이 두어번이 아니다. 그러나 글을 쓰면 쓸수록 백이면 백 십중팔구로 소년감성의 오글거리는 마요네즈가 수필이라는 것으로 식탁에 오르니 밥상을 엎을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다른 학생들 같은 경우도 나와 마찬가지의 까닭으로 수필을 접은 것을 여럿 보았다. 글틴에 수필의 양이 적은 것 또한 그 것과 맥락이 같을테다. 결국 수필의 차이는 필시 피천득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십대는 절대로 쓸쑤없는 감수성의 서술 내지는 그에 준하는 경험의 차이에 있다. 하기야 요즈음 들어서는 TV 프로그램에서 바닷가 여행은 보여줘도 등산하는 것은 본 적이 오래고 정열의 십대로서 학우들이 깨끗하고 조용한 주택가는 일절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안타깝기만하다. 그래서 나는 수필을 썼다. 나는 글자가 입혀진 옷을 입지 않았다. 나는 화사한 것들을 피했다. 누군가 화장을 하면 지저분하다했다. 허구한 날 요즈음 청년들의 몸에 그려진 타투를 보면 괜스레 구역질을 하고는 했다. 개량한복을 입고 다녔다. 일부러 이제는 단종된 충무공이 그려진 백원 지폐를 수집하여 마트에 지불하고서 쫒겨난 적도 있다. 나는 새 것들이 싫었다. 그래서 오기로 수필을 썼다. 정열이 아닌 인조의 것으로 글을 썼다. 그러나 나의 수필은 어디까지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보았자 주변으로 듣는 말은 ‘애어른이네’라는 말 뿐이고 나는 속된 말로는 젊은 틀딱일 뿐이었다. 나는 이제 내 수필의 미래를 안다. 고작 14번 내지는 15번의 가을과 겨울과 여름과 봄을 보았음에도 나는 알 수가 있었다. 그 중 5번의 가을은 수난의 시대를 또 다른 5번의 가을은 촛불의 시대를 살게된 까닭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비롯 코로나 시대에서 수필은 거의 멸종했다. 언제까지나 이 정열의 시대에서 마음 놓고 중년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터였다. 근 5년 사이에 30%를 앞다투어 찍던 TV프로그램들의 평균 시청률은 3% 안 팎이라고 한다. 이제는 바닷가를 보여주거나 등산 프로그램을 보여줘도 볼 사람이 없다. 정열의 시대에 더 이상의 쉼은 무용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느새

  • 화자
  • 202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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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바다

    전부터 화자님의 글을 많이 보았지만 이제서야 댓글 남겨요 저 역시 월장원에 대한 집착이 유독 심했고 그러다 보니 제 글이 형편 없다고 느꼈던 사람인지라 이번 글은 유독 공감이 가네요 제가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할 처지의 사람은 아니지만 제가 작년, 글틴에 처음 오고 보았던 글티너분들 중 화자님이 정신적으로도, 글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졌다고 느껴졌던 글이었습니다 화자님이 제 글의 후기로 남겼던 게 고전 소설을 좋아할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는데 저는 오히려 화자님의 문체가 고전 소설과 더 닮아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고전 소설을 좋아하는 것 맞지만 화자님의 글 중에서 보이는 매력이 그에 더 가깝다고 느꼈거든요 저는 그런 화자님의 매력이 계속해서 글 속에 묻어있길 바랍니다 월장원 축하드려요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 2024-06-18 23:27:23
    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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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난바다님.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무어라 포문을 열어야할까요. 실은 전부터 난바다님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이 너무나도 많은데요, 그 중 유독 저에게 인상깊었던 것이 바로 작품에 수필과 희극이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기를 아직도 기억해주시고 있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저 역시 난바다님께서 후기에 대한 코멘트를 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요, 모든 작품을 무조건 단정짓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냐고 질정해주셨지요. 현재 저는 비평 게시판에서 주로 활동 중인데요, 비평글을 쓸 때마다 그 말을 신조 삼아 나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월장원에는 저 뿐 아니라 제 글의 척도가 되어주신 난바다님도 함께 계신 것입니다. 난바다님의 소설을 전처럼 보기 힘든 요즘인데요, 비록 월장원은 아니었어도 저는 난바다님의 글들을 좋아한답니다. 저는 월장원을 타지 못하거도 일년을 지냈습니다. 지금도 소설은 쓰여지지 않지만, 저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어떻게든 글을 쓰기위해 발버둥치고 있어요. 써지지 않는 글이지만 억지로라도 쓰고 있어요. 그렇게 일년을 지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 저희가 글을 쓰는 건 상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쓰는게 좋아서 그런 거잖아요. 너무 당연한건데도 너무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스쳐지나가듯 까맣게 잊고지내던 월장원이란 우연을 요번에 스치듯 마주한 것 뿐이에요. 난바다님도 계속 쓰시다보면 그 우연을 마주칠 것 같습니다. 현재 글틴에서 그 우연과 가장 맞닿아있는 분이니까요. 저는 난바다님의 글을 읽고 싶습니다. 많이 부족한 작품을 품에 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로 제 글 역시 고전적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전 황순원 작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답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그분의 발끝에라도 따라간다면 참 좋은 일이겠지요. 난바다님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024-06-19 11:00:54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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