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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 작성자 초가집에비오는날
  • 작성일 2008-07-28
  • 조회수 450

4학년 때 처음으로 릴레이 계주선수로 뽑혔다. 여자 둘, 남자 둘, 뽑힌 계주선수는 모두 넷이었다. 이 넷을 뽑으려고 수요일 체육시간이 통째로 날아갔다. 붕 뜬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선생님은 수업 종이 칠 때까지 고국분투를 하셨다. 너도나도 까지는 아니었지만, 계주선수가 되고 싶었던 몇몇 아이들이 계속해서 선 안쪽으로 달렸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눈에 불을 켜고, 그 아이들을 지명해내셨다. 하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고, 그 몇몇 아이들이 정당하게 뛰어 줄 때까지 계주선수에 지망한(또는 추천된) 아이들은 몇 번이고 다시 뛰어야만 했다. 날 앞지른 아이도 그 중 하나였고, 결국 선생님께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그 아이는 끝까지 선을 밟았다고 우겼지만, 절반이 넘는 아이들이 본 터라 설득력이 없었다. 꽤 친한 친구였는데, 이 일로 사이가 틀어졌다. 세 번째로 들어온(다시 말해 떨어졌던) 내가 계주선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계주선수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는지, 그 아이는 실내화를 갈아 신으며 날 무섭게 흘겨보았다. 나 말고, 또 다른 계주선수가 된 Y는 진짜 잘 달리는 아이였다. 3 학년 때도 계주선수 였다고 했다.

나는 계주선수로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동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기뻐했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대단히 들떠 지냈으며, 난생 처음 달리기 연습을 했다. 계주선수가 되길 원했던, 또는 한 발 차이로 계주선수에서 떨어진 아이들에게는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았다. 그건, 떨어진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썩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운동회 날, 여태 응원만 하다가 처음으로 응원을 받으며 뛰었다. 흙먼지가 날렸다. 봉을 조금 주춤하며 받은 것만 빼고는 잘 뛰었다. 선두를 내 주지도 않았고, 엉뚱한 얘한테다 봉을 건네주지도 않았고, 넘어지지도 않았고, 봉을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백군과 청군은 둘 다 사이 좋게 한번씩 봉을 떨어뜨렸다. 주자가 고학년으로 올라가자 엎치락 뒤치락 자주 선두가 바뀌었다. 고학년 언니 오빠들은, 특히 6학년 오빠들은 태풍처럼 달렸다. 뛰지 못하는 아이들은 벤치에 앉아서 학교건물을 무너뜨릴 기세로 응원을 했다. 벤치는 점수를 알리는 마이크 소리와 고함과 타악기와 약간의 욕설을(물론 좋은 뜻으로) 토해냈다.

그리고 며칠 뒤, 학년별 릴레이 시합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자그마한 상품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 계주에서는 한 사람이 한 바퀴를 전부 돌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경기를 했다. 나는 두 번째로(그러니까 마지막 선수로) 뛰었다. 계주선수를 해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마지막 주자로 뛴다는 것은, 매우 막중한 임무 떠맡고 적진으로 향하는 것 같아서, 어떤 의미로 초긴장 상태다. 보통 가장 잘 뛰는 사람이 맨 처음과 나중에 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를 추월하지도 당하지도 않았을 때와, 역전을 시켰을 때와 당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이 극과 극을 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안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주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몰랐었다.

Y는 우리반의 대표 여자 계주 선수답게 정말 잘 달렸다. 4학년은 전부 아홉 반이었고, 그 아홉 명의 아이들 중 첫 번째로 돌아와 내게 봉을 주었다. 그 아이는 가장 먼저 돌아왔을 뿐만이 아니라 거리도 엄청나게 벌려놓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봉을 쥐고 트렉을 따라 달렸다.

그리고, 2명에게 추월을 당했다. 한명도 아니고 두 명이 나를 앞질렀다. 반쯤 돌았을 때 첫 번째 아이가 날 지나쳤고, 조금 더 가서 두 번째 아이가 날 앞질렀으며, 간신히 세 번째 아이보다는 한 걸음 앞서 골인했다. 첫 번째 아이와는 눈이 마주쳤었다. 정확히는 돌아봤다. 키가 굉장히 컸다.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그렇게 우리 반은 3 등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졌다는 사실보다는 부끄러움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조금 무섭기도 했다. 한창 축구에서 이기는데 연속으로 자살골 3개를 넣은 기분이었다. 뱃속에 내가 싫어하는 초콜릿 선데 아이스크림을 쑤셔넣은 기분이기도 했다. 다 이긴 시합에 내가 초를 쳤다는 건 5살짜리 아이도 알 터였다. 그것도 엄청 꼴사납게 말이다.

릴레이가 끝나고, 남자아이들 몇 명이 내 옆을 지나가면서 일부러 어깨로 거칠게 부딪혔다. 욕을 뱉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은 보란 듯 중얼중얼 불평을 했고, 다른 반 아이들은 날 보고 수군댔다. (물론 이긴 반이었다.) 친한 친구들은 “괜찮아. 질 수도 있지.”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친구들이 실망한 걸 눈치 못 챌 만큼 둔하지 못했다. Y는 내 손에서 봉을 빼앗듯이 낚아채서 선생님께 돌려드렸다.

그날 오후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계주선수를 뽑을 때 반칙으로 날 앞질렀던 그 아이는 일약스타가 되었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Y가 일등으로 돌아왔단 말이야, 어떻게 그걸.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나도 어이가 없다.

“그 상황에서 3등 하는 것도 힘들걸? 그렇게 차이가 벌어져 있었는데! 나는 우리가 4등 하는 줄 알았어.” 누가 그걸 모르나. 나도 세 명에게 내리 다 추월 당하는 줄 알았었다.

“너 그거 알아? 계주선수 뽑을 때 말이야….”

그 짧은 시간에 온갖 말들이 만들어졌다.

집에 와서 베개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나는 내가 내성적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몰랐다. 나는 온전히 내가 한 실수와 친구들의 냉담한 반응 때문에 울었다. Y가 반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학년에서도 굉장히 잘 달리는 아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몰랐다. 나는 반에서는 실수로 계주선수가 된 멍청한 꼬마에 불과했고, 또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일 주일쯤 지나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진 나는, 엄마한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당연히 엄마는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라며 선생님께 갔고, 그 사실을 안 나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한바탕 엄마와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선생님은, 정말 지극히 평범한 초등학교 선생님답게, 나를 먼저 불러내 물으셨다.

“누가 너를 따돌리던?”

그때까지만 해도 릴레이 사건을 순전히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로 여겼던 나는, 이 질문에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반 친구들 거의 다, 인데요.’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내가 더 빨리 달렸다면. 이겼었다면. 하다못해 2등이라도 했다면.’이란 말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선생님은 괜찮다며 말하라 하셨다. (나는 괜찮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거듭되는 재촉에 나는 Y라고 대답했고, 곧 바로 후회했다. 방과후 학교가 끝나고 Y가 선생님께 불려갔다. Y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긴 했었지만, 그 애는 계주선수 였다.   

다음날, 방과후 Y가 날 불러 세웠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걱정과는 정반대로 Y는 미안하다며 “좀 더 네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해.”라고 말했다. 그리곤 손을 흔들며 친구들한테로 뛰어갔다. 긴장이 풀리면서, 순간 Y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마지못해 한 사과가 아니었고, 다른 속내를 감추고 한 말도 아니었다. 진솔한 감정이 담긴 말이었다. 무척 기뻤다. 

그 후로는 학교 생활도 그럭저럭 적응할 만 해졌고, 힘들어도 버틸 줄 알게 되었다. Y와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루는 나보고 5학년 때도 계주선수를 할 거냐고 물었다. 어물쩍 거리며 대답을 못 하자, 하라고 강하게 말해주었다.

5학년을 올라가면서, Y와는 다른 반이 되어 다시 멀어졌다. 새 친구들을 사귀었고, 5학년의 가을이 다가왔다.

계주선수가 되었다.

 

,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멋질 것 같다. 이것도 부활의 한 종류니까. 하지만 4 학년의 릴레이에서 이겼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미숙하지만, 이 뒷이야기를 글로 풀어 쓸 수 있는 재주가 내게 있어서 기쁘다.

솔직히 운동장에 다시 섰을 때,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운동장이 조금 좁아진 느낌이 들었다. 내 키가 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5학년 1반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다행히도, 4학년 9반의 남자아이는 백군 아이보다 댓 걸음쯤 뒤쳐져 있었다. 못된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이기고 있었다면 나는 제대로 뛰지 못했을 것이다.

봉을 건네 받고, 뛰었다.

앞서 봉을 받고 달려나간 여자아이는 아는 아이였다. 3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나처럼 운동을 좋아했다.

그런데, 뛰면서 굉장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응원소리가 커졌다. 나와 그 아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생각과 거의 동시에 나는 백군의 계주선수를 앞질렀다.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안도감과 성취감이 밀려오면서 온 몸이 오싹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

작게 등 뒤로 그 아이가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계속 달렸고, 그대로 같은 반의 남자아이에게 봉을 넘겼다. 숨을 몰아 쉬고 뒤돌아보자, 그 아이가 막 다음 주자에게 봉을 넘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왈칵 울 뻔했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방금 누구든지 그 애를 당당히 따돌릴 수 있는 구실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그 와중에도 6학년 계주선수들은 달렸고, 마지막 주자에게 봉이 넘어갔다. 백군은 여전히 거리는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청군의 응원에 귀가 먹먹했다. 비명인지 응원인지…….  

이겼다. 나도 청군도.

반 아이들이 있는 벤치로 돌아가자, 아이들은 날 둘러싸고 펄쩍펄쩍 뛰었다. 아이들은 내 어깨를 툭 치고 어깨동무를 하고, 머리를(난 키가 굉장히 작았다.) 쓰다듬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야 열심히 웃었지만, 착잡한 마음은 내가 앞지른 그 아이를 찾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망설였다.

‘이건 반별 릴레이가 아니잖아. 이건 그 애 친구들의 문제야. 어쩌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4학년 때 날 앞지른 계주선수 역시 작년도의 같은 반 친구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만약 4학년 때 그 친구가 릴레이가 끝난 후 나에게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면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서로 조금씩 만 더 친절해지자.”고 말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계단을 올라가고 있던 그 아이는 찾았지만, 뒷 모습만 보다가 반으로 돌아오고 말았으니까.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본다. 잘 한 건지 못 한 건지를 제쳐두고, 나는 참 겁이 많은 녀석이었다는 것을.

15살의 여름, 두 동생이 다 계주선수가 되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나도 그 학년에서 가장 잘 뛰는 아이들 중 하나였구나 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조금만 더 친절해지자.”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만도 대단한 변화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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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에비오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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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가집에비오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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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요, 정말 대단한 변화를 겪으신 겁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끔씩 명사와 조사를 띄어 쓴 것만 제외하고는...

    • 2008-07-29 04:38:5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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