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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 작성자 여우씨
  • 작성일 2011-10-03
  • 조회수 604

자장면, 하면 어렸을 때의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어렸을 때의 생각을 하면 엄마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 난 태어날 때부터 힘들게 태어났다. 태반에 끼어 엄마와 내가 둘다 목숨을 잃을뻔하였다. 난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4살 때 아파트에서 떨어지게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온몸을 붕대로 감고 깁스를 하고 버텨야만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 자신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나는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병원에서 나는 약냄새와 붕대냄새를 맡으며 침대에 계속 누워있어야 했다. 내 일상은 먹고 자고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 뿐이었다. 4살인 나에게는 억울한 현실이었다.

 

‘시간이 약이다.’란 말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시간은 내게 가장 필요한 약이었다. 시간은 천천히 나의 건강과 병원생활의 적응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퇴원을 얼마 안 두고 어느 화사한 햇빛이 드는 날 할머니께서 병문안을 와주셨다. 할머니의 걱정과 안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니께서 ‘우리 손주 뭐 먹고 싶은 거 없나?’ 라고 물으셨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 어눌한 말투로 ‘따당면’이라고 말했다. 발음 때문에 ‘자장면’이 ‘따당면’이 된 것이다. 나의 말과 동시에 할머니는 중국집으로 달려가 자장면을 포장해서 가져 온 것이다. 그때 먹은 자장면의 기억은 희미하게나마 잊지 않고 있다. 포장해온 자장면을 허겁지겁 먹어 정확히 맛은 모르겠지만 ‘맛있었다.’라는 것은 기억한다.

 

지금 17살인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자장면은 좋아하는 음식중의 하나이다. 즉석식품이나 봉지형태의 자장면이 아닌 시켜 먹는 것을 좋아한다. 배달이 되기 전 기다리는 즐거움 그리고 자장면의 비닐을 뜯을때의 설레임, 형용할수 없는 맛있는 맛,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에 자장면을 포기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마다 ‘뭐 먹을까?’라는 부모님의 질문에 나는 100번이라도 더 한 ‘자장면’이라고 대답을 한다. 부모님은 질린다고 다른 것을 먹자고 하지만 텅빈 냉장고의 현실을 보면 그냥 시키라고 하신다. 그렇게 나와 동생 부모님들은 자장면을 시켜 먹는데, 유독 엄마만 자장면을 다 못드시고 남기시거나 동생들이나 나에게 주신다. 한 두 번이 아닌 자장면을 시킬 때마다 남기신다. 그래서 왜 안 드시냐고 물으면 맛도 별로이고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드시기가 싫다고 대답하셨다.

'무슨 기억 때문에?'

'있어 그런게..'

'아 뭔데?'

끈질기게 물어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냥 자장면만 먹고 있으면 네 어렸을 때 병원에서 할머니가 사준 자장면 먹는 기억이 나서..'

엄마는 자장면만 보면 내가 아팠을 때의 기억이 나서 먹을 기분이 안 생긴다고 말하였다.

엄마의 말을 듣자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나 때문에 엄마는 슬퍼하고 힘들어하셨다. 자장면을 볼 때마다 안 좋은 기억이 나는 엄마를 보면 너무나 죄송해진다.

 

아마 내가 커서도 자장면을 먹게 되면 어렸을 때가 생각 날테고 그리고 엄마가 생각 날 것이다. 같이 자장면을 먹다가 '에휴 못 먹겠다. 우리 아들 많이 먹어라' 하면서 내 그릇에 덜어주는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엄마에게 나는 언제나 감사한 존재이다. 어렸을 때부터 약해서 아플때마다 내 옆을 언제나 지켜주셨고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미안한 존재이다, 나 때문에 죽을 고비도 넘기셨고, 내 사소한 일 까지도 도와주신다. 하지만 난 언제나 엄마의 속을 썩힌다. 진로 문제와 성적 문제로 사소한 다툼을 많이 하는데 엄마가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을 알고 엄마에게 투정 부리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서 꼭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해지겠다. 그래서 커서 엄마와 같이 자장면을 먹을 때 엄마에게

'엄마 어렸을 때 아파가지고 병원에서 빌빌거리던 애가 이렇게 성공했으니까 이제 자장면 먹을 때 내 어렸을 때의 모습 잊어버리고 자장면만 맛있게 먹어 알겠지? 하고 말하고 싶다.

여우씨
여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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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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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우씨
  • 201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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