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 작성자 식신녀
- 작성일 20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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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는 늘 사람 정신을 쏙 빼놓는다. 진지한 얘기가 필요할 땐 학교 옥상이 최고다. 지하철로 겨우 한 정거장 차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다. 상대방의 허락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될 때가 많지만 의외로 내 친구들은 옥상으로 가자는 나의 제안을 간단히 거절 해버리지는 않는다.
내 절친은 휴학을 했다. 2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1학년 후반부부터 가져왔던 그녀의 막연한 꿈이 결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일반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휴학을 한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말하는 그런 이유란 흔히들 문제 학생이라 하면 쉽게들 떠올리는 요소들, 다시 말해, 행동이 기이하다던가, 학업이 충실치 못한 보편적인 이유가 아니란 말이다. 그녀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너무 일찍 말려든 셈이다.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이 이상 더 자세히 써내면 큰일 날 것 같아서 그녀의 개인사정에 대한 글은 여기서 그만 멈춰야할 것 같다. 말하자면 그녀는 소문과 평판에 매우 민감해서 자기에 대한 비슷한 얘기라도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나약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녀는 말발 하나는 죽여준다. 생각도 깊다. 그런 것 같다. 한창 방황하는 광대였던 나를 심장이 쿡쿡 찔리는 말로 괴롭게 만들 정도라면. 그래서 곧 연기를 그만두고(물론 남이 그만하라고 해서 그만 둘 내가 아니다. 명확한 나의 생각으로 내린 판단이다. 여기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날이 올 것이다) 일반인으로 돌아오려는 노력을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옳게 말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주제가 그녀에 대한 것이라고 다른데서 영감을 얻었던 생각을 그녀 덕이라고 착각하고 지껄이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래도 내가 영 거짓말을 하는걸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녀의 영향을 많이 받긴 받았으니. 그렇지만 단 한 가지 이유로 삶은 바뀌지 않는다. 여러 가지 요인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복선도 깔려야 운명을 짐작하고 무언가 바뀌어야함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자살도.
이야기가 딴 데로 흘러갈 뻔했다. 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내려가니까. 그래도 몇 번 읽어보니 영 쓸모없는 부분은 아닌 것 같아 내버려둬도 무방할 것 같다.
옥상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해야겠다. 그 날은 할로윈이었다(나는 삼하인 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다). 나는 독특한 정장패션을 하고 그녀와 또 다른 친구 한명과 시내를 한껏 돌아다녔다. 우리 세 사람은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가 저녁을 먹었다. 집에 볼일이 있다는 또 다른 친구를 보낸 뒤, 나는 그녀에게 학교 옥상으로 가 단둘이 얘기할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바람만 불면 내 옷에 내리쬐던 그 황금빛 온기는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우리는 온 몸으로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어 머릿속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그 느낌은 기억이 나는데 정확히 글로 옮기려니 잘 되지 않는다. 분명히 긴 대화였을 텐데, 무슨 대화가 사무쪽지처럼 이렇게 간단명료하고 정보력만이 넘치느냔 말이지. 아무튼 평소 우리 대화가 이렇게까지 무미건조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래 대화를 읽어주길 바란다.
"난 기왕 사는 거 잘 살고 싶어. 넌 앞으로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니?"
그녀의 말이다. 난 내 계획을 설명했다.
"앞으로 3학년이니 내신보단 수능공부에 집중해야지. 평균 3등급을 목표로 잡고 남은 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할거야. 대학은 장학금 여부 살피고, 복수전공이 가능한지도 알아봐야 해. 반값 등록금이 책정된 곳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야. 공립대를 가면 좋을 것 같군. 경북대. 서울대는 너무 높아서 엄두가 안 나고. 근데 경대가면 꿈도 희망도 없다고 우리 과 어떤 애가 그러더라. '경대가면 니 꿈을 못 펼친데이'라고. 난 이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니? 하지만 크게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해. 하기 나름이지 않겠어? 거기서 장학금을 받을지도 모르고, 조금만 노력하면 교생실습에 나갈지도 모르잖아. 전공은 조소과랑 심리학과. 두 전공을 동시에 하는 게 쉽지는 않다고 들었어. 하지만 건성으로 배울 생각이 아니라 정통 학문으로 자세히 공부하고 싶으니 나쁠 것 같진 않아. 대학 나와서는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 조소과를 나왔으니 실력만 된다면 작품을 낼지도 모르고, 미술학과 심리학을 전공했으니 미술심리치료사가 될 수도 있을 거야. 거기에 대한 자격증은 나중에 자세히 알아 봐야겠지만. 아예 상담가로 활동할 수도 있겠지. 글도 어느 정도 쓰는 편이니 소설가도 될 수 있을지 모르고."
나의 '계획'에 대해서 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왜 살아가는지는 잘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돈 많이 버는 게 잘 사는 거냐? 잘 먹고 잘 살면 끝인가. 우린 동물이 아니잖아. 우리가 먹고 싸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마지막 말에 악센트를 주었다. 그 과장된 태도와 당돌한 말에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옛날에 그녀가 했던 말, '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 라고 하면서도 내 이야기에 이따금씩 무관심해지던 그녀의 태도. 내가 답답한 이야기만 늘어놓을 때 그녀는 그랬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그녀의 기준은 무엇일까? 난 그때 순식간에 해답이 떠올랐던 것이다.
"네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아."
옥상에서 내려가던 중이었다. 계단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갯짓을 해보였다.
"난 말이야, 미숙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머릿속에 완전한 말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 사람이 풀고자 하는 문제를 풀어서 내 것으로 만들기도 해."
나는 서둘러,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아."
하고 말을 끝맺었다. 그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학교는 예술 고등학교다. 그 날은 원래 공휴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렇게 여유롭게 놀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날이 신입생을 뽑기 위한 시험을 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내내 갈고 닦았던(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나도 여기 속한다. 참고로 나는 면접만 보았다) 실력을 모두 쏟아 내야하는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은 모든 선생님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잊고 미술과 사무실로 무작정 들이닥쳤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 날은 할로윈을 기념할 날밖엔 안 되었던 건데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만나려 했던 한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여길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들어오면 안 된다고 굳은 표정으로(분명 웃어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 당황하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서둘러 나갈 수밖에 없었고, 뒤에는 어색한 기분만 남았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운명을 곧 맞았다. 내가 서둘러 나오는 것을 보며 그녀가 교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을 때 한때 같은 반이었던 동급생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우리는 반가운 척 인사를 하고 서둘러 교문 밖으로 나갔다. 우리 학교 주변에는 원룸형 주택으로 즐비하다. 그 골목들을 통과하다가 우리는 한 건물 앞에 앉았다. 그녀는 지쳐보였다. 난 좀 안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와 친했던 한 친구의 이름을 얘기하며 그 친구가 자길 찾을지도 모른다, 너랑 같이 있는 것을 본 애들이 나에 대해 소문을 퍼트릴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 친구에 대해선 이미 이전에 들은 바가 많다. 그런데 솔직히 난 뭐가 그렇게 심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 친구는 집착이 심해 그녀가 휴학을 한 후에도 꽤 오랫동안 연락을 하려고 애썼던 전력이 있었다. 2학년 올라오고 새로 사귄 친구인데, 자긴 집안일 때문에 경황이 없을 때 어쩌다보니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크게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자기도 모르게 친해진다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다반사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친구가 좀 심하게 사람을 차별한다는 데 있었다. 공부를 장학금을 탈 정도로 잘하지만 그야말로 안하무인에 안면몰수-나는 물론이고 그녀 주변 인물들을 싹 다 깠다는 것이다. 나보고는 치마 길이가 길다고 어쩌고 했다나. 공부를 잘해도 실기 못하면 깠다. 성격이 착해도 깠다(나도 찌질한거랑 착한거랑의 차이정돈 안다). 심지어는 선생님들의 학력까지 꿰차고 그들도 깠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친구는 겉으로 보이는 친분에만 연연하고 그걸 진짜 우정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자기 동생 번호와 아버지 번호를 알고, 서로의 집에 들른 적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정이 완전히 확인되었단 식이란 거다.
내가 이렇게 길게 그녀의 빌어먹을 절친 이란 년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완벽하게 그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친구는 나쁘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그 친구를 의식하는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다. 혹시 그녀가 그 친구에게서 "난 사실 레즈야. 널 존나 갖고 싶어." 하는 고백이라도 받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민감하게 구는 그녀. 그녀는 휴학 후 잠적했다. 연락이 되지 않아 집까지 찾아가서 연락처를 따냈다. 그녀는 날 보더니 의외로 반가워했다. 그녀는 현재 연락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고에서 알던 애들과는 거의 연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소문을 너무 두려워한다. 본인이 학교에서 이름이 불려 질걸 두려워한다. 그녀는 베스트 프렌드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그쪽은 아무하고도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그녀와 연락하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걸 그녀는 두려워한다. 그녀는 그날 본 동급생들을 두려워했다. 같은 반 애들도 몇몇 있었다. 어쩌면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소리. 뭐가 그렇게나 두려운 건데? 기껏 소문 나 봐야 죽이기까지야 하겠어? 어떤 소문이 두려운 건데? 아니, 그보다도 소문이 나는 게 왜 두려운 건데? 너도 나의 그 멍청한 친구처럼 어려운 집안 사정을 얘기하면서도 동창회 때문에 대학은 가야겠다는 그 태도인건가? 부끄러워? 아!
아....... 우린 이중성을 받아들여야 할 거야. 그런데 그게 쉽지 않지? 난 일부러 너의 단점을 모른 척 하는 것뿐이야. 2학년 올라가서 서로 다른 반이 된 후 너는 그 친구와 친해졌지. 그 뒤부터 나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내가 잊어버렸을 줄 아나? 만날 때마다 달가워하지 않는 너의 분위기가 어색해서 한갓 바보짓을 하고 돌아서는 내 뒤에서 들려왔던 소리는 옆에 있던 네 친구에게 내 험담을 시작하려는 소리였어. 그런데 지금 와서야 만들어진 결과를 '난 가만히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친해져 있더라.' 는 말로 순전히 그 친구 잘못인 것처럼 떠넘기는 건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이제 와서 내게 그 친구 욕을 마구 얘기하는 것은 두려운 마음 때문이겠지? 내가 혹시나 그 친구랑 얘기하다가 "걔 옛날에 너 욕하던데" 라는 말을 듣고 올까봐서? 그럴지도 모르지....... 이유가 이 정도라면 나라도 충분히 발작에 가깝게 몸서리 쳐지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 사이는 이상해져 버릴 테지. 어떻게 해도 돌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세상 모든 일을 다 아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고 지킬박사와 하이드 속의 인물인 라니언박사가 말했지.
완전한 내 편은 없다. 그럴 수 없다. 아 나도 안다고. 완벽한 게 어디 있겠어? 서로의 얼마나 큰 단점까지 안고 갈 수 있느냐에 따라 현명한 사람의 여부가 갈리는 게 아닐까. 이래저래 부딪치고, 사람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고, 모순된 태도를 지녔지만 난 그래도 좋다. 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해 주는 것도 좋고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아. 내게 있어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는 건 너 하나 뿐 이거든. 이 학교 와서 제일 잘한 게 있다면 너란 녀석을 사귄 거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헤어지든지 이건 변함이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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