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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minor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8-12-27
  • 조회수 1,168

B minor

 

 

 

 

1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첫 문장으로 이별을 했어¹이렇게나 지루하고 무료해도 괜찮은 걸까오래 잡았던 걸 이렇게 놓아 버려도 괜찮은 걸까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

이불에 힘없이 엎어져 있다가 흐물거리는 몸을 애써 일으켰어지루해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책장 앞에 다가섰어빈틈없이 꽂혀 있는 책장이 반듯했어원래 네 명이 한 방을 쓰는데우리 방에는 학기 초부터 세 명이 배정되었고룸메이트 중 한 명이 학기 중에 퇴사를 해서 네 명 분량의 책장을 두 명이서 쓰고 있는 꼴이었거든학교에도 책상 옆 바구니며 사물함에 책들이 빼곡했지만이건 정말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야 할지 모르겠더라.

대부분의 책들은 버려야 했어아무리 일 년을 더 하겠다고 했어도 이미 다 풀린 책으로 공부를 할 수는 없었거든연습장에 풀었던 책들은 죄다 다시 풀지 않아도 될 책이었고다시 풀어봐야 할 기출은 이미 몇 번이나 풀어 너덜너덜한 상태였어.

아래층에 쌓아 둔 기출문제집부터 정리를 시작했어책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넘겨보는데 꾹꾹 눌러 쓴 글씨들이 눈에 띄더라PT 일정 → 부피비 몰수비분자량비 밀도비. PVT 일정 → 몰수비 분자량비 밀도비. 한참이나 책을 넘겨봤어다 기억이 나는 거야이 날 어떤 펜이 고장나 다른 펜으로 필기했었는지이해가 안 돼서 강의를 몇 번이나 돌려 봤었는지까지 전부.

그렇지만 연민에 빠져 있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머리를 비웠어버릴 책들을 쌓으니 기숙사 방 한쪽을 가득 차지할 것 같아서 반쯤은 기숙사 계단참에 가져다 두었어남은 책들 중 반쯤은 다시 볼 거라서 맨 윗칸에 옮겼고나머지 반에는 기숙사 호실과 이름을 적은 포스트잇을 두 개 붙인 후에 책장 맨 아랫칸에 꽂았어삼 년 내내 꽉 차 있던 책장이 두 칸을 제외하고 비워지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침대에 다시 누워도 책장 쪽으로 눈길이 가더라.

정말로 이렇게 쉽게 털어내도 괜찮은 걸까다시 무료해지기 시작했어.

 

 

2

레이스를 마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온 날모두가 각자 억눌러 왔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더라누군가는 미디를 배우러 버스로 이십 분 거리를 착실하게 오갔고누군가는 그간 앉아만 있어 망가진 체력을 다시 기르겠다며 헬스장에 등록했어누군가는 버킷리스트를 수험기간 내내 적어두고 하나씩 취소선을 긋기도 했고.

너는 뭘 하고 싶냐는 물음에 의외로 별 생각 없이 대답이 나왔어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어.

돌이켜 보면 빼곡하게 새겨 두었던 습관이었지무엇도 확실하지 않았고아무것도 확신해서는 안 되었던 나날들날아오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었으니까성적과 대학소문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그런 질문들을 들을 때면 꼭 첫 전국대회를 앞둔 피겨스케이트 선수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이번 점프는 잘 뛸 수 있겠지음…… 어쩌면요못 뛸 수도 있고요잘 모르겠어요해 볼게요.

억지로 눈을 떠 겨우 세수만 하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등교한 학교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누구도 닦달하지 않았고누구도 순응하지도 않을 걸 알았고기껏해야 휴대폰으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거나 타조베개에 얼굴을 끼워 넣은 채 엎드려 잠을 청하는 게 다였어학교에 갇혀 있어야 하는 네 시간은 생각보다 길더라푹 자고 일어나도 열 시가 넘어가지 않더라고그 동안은 쉬는 시간 없이 치열하게 모의고사 세 회분을 풀면 끝나는 시간이었는데.

단단히 이어 두었던 줄이 끊어진 부표처럼 떠다니던 나날들이었어끊어진 줄을 다시 이어붙일 생각도 없었고.

멀리 나갈 힘도 없어 가까운 피아노학원에 등록했어그래도 아주 떠내려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기숙사로부터 걸어서 삼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어횡단보도 하나를 건너 늘어서 있는 상가 건물 이 층 끝여기에도 이미 같은 학교 친구들이 등록했다는 소식이 들렸어.

슈베르트 즉흥곡그게 내가 연습실에 들어가서 받아든 첫 곡이었어왼손은 간단하고오른손은 스케일 연습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정적이었지만 그만큼 정확하고 부드러운 타건을 요구하던 곡.

머리가 조금 빽빽해졌을 때부터모차르트쇼팽베토벤멘델스존까지 여러 악곡의 연습을 거쳤지만새 곡을 펼치는 순간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악보를 읽고 미처 적혀 있지 않은 감정표현이나 피아니스트의 새로운 해석을 추가해 적어두던 버릇이 있었거든피아노를 손에서 놓은 지는 육 년이 넘었지만 습관은 남아있더라유튜브에서 백건우와 크리스티안 지머만을 비롯한 여러 영상들을 검색했고새로 복사해 온 악보는 곧 빼곡해졌어.

알레그로빠르게템포는 120에서 140까지그러나 실제 연주 영상의 템포는 190을 웃돌더라악보만 봤을 때는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난이도 있는 곡에 도전해봐도 될 것 같았는데연주를 들어보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니더라고초견은 쉽지만 완성은 어려운그런 부류의 곡선생님이 처음 제시해 주셨던 템포는 100이었어손목에 힘을 빼고첫 음의 힘만으로 나머지 음까지 밀어준다고 생각하면서음정은 정확하게다만 하나하나를 분리해서 연주하지는 말고.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습관처럼 중얼거리자 선생님은 연습을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어손에 익혀서 외워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학원에 매일같이 나가기 시작했어학교가 끝나면 점심을 먹고 피아노학원 문을 열었어그러면 곧 선생님들이 오셨고어느 정도 손이 풀렸다 싶었을 때즈음 들어와 레슨을 봐주셨어다섯 시간을 쉼 없이 연습하고학교에서 저녁을 먹고다시 피아노학원으로 돌아가 곡을 펼쳤어그러면 선생님들은 하나둘 퇴근을 했고나는 기숙사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연습을 하다가 학원을 나서는 거야.

그러다 보니까 문득 버려버린 몇 년간이 자꾸 떠오르더라.

 

 

3

이별은 아무렇게나 버려두어도 괜찮았지만 재회는 어떤 방식이라도 버거웠어.

성적표가 나온 날 많이 울 거라고 생각했지만사실 인강 사이트에서 가채점을 돌리자마자 다 쏟아내 버려서 더 울 것도 없더라고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고성적표가 나오기 전에 이미 재수학원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했었으니까.

시험이 끝나고 감자탕집에 갔어수능 전엔 급식에 감자탕이 자주 나왔는데그걸 먹을 때마다 들깨가루를 뿌린 감자탕이 그렇게 그리웠고끝나기만 하면 감자탕집에 제일 먼저 갈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거든.

온전히 평가원의 페이스에 말려서 원래 등급보다 훨씬 못 미칠 거라는 걸 문제를 풀면서 직감했고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마지막 교시라는 걸 알아챘을 때에서야 수능은 정말 도박이었다는 걸 깨달았지전날 준비했던 마인드 컨트롤도선물받은 수십의 초콜릿도혹시나 추울까 챙겨 간 핫팩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정작 들깨가루도 없는 감자탕을 먹는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아무런 맛도 안 느껴지더라아무것도그냥 뇌가 빨리 자라고 파업을 하고 눈을 억지로 감겨버리는 것 같았어한숨 자고 일어나지 않으면 몸에 치명적인 타격이 올 거라고 예고를 했던 거야나는 그것도 모르고 터덜터덜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휴대폰을 켰어.

고생했어이제 꽃길만 걷자선배 수능 수고했어요.

카카오톡이랑 문자들이 쏟아지는데사람 속도 모르고 가입했던 인강 사이트에서는 오늘 단 하루수능 채점 이벤트라면서 자기네 가채점 사이트를 보내오더라혼자 가채점을 하면 못 버틸 것 같아서 기숙사 위층에 사는 친구를 불렀어친구가 내 앞에서 뜨개질을 하는 동안 나는 수험표 뒷장에 써 둔 답을 천천히 사이트에 입력했어.

그렇게까지 사람이 온 생을 부정당할 수 있을까.

나는 조용히 수험표를 반으로 접었어제일 먼저 성적을 보낸 건 육개월간 나를 맡았던 과외 선생님한테였어카톡이 오더라괜찮냐고무슨 일이냐고괜찮다고 답장을 보냈어지금까지 나를 조금씩 가르쳐 오셨던 과외 선생님들한테 연락을 보내자하나같이 재수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하셨어모두 재수를 하고 대학에 합격하신 분들이었거든.

선생님과는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났어저녁을 먹고 야간자율학습에 불참한다는 포스트잇을 붙인 후에곧장 교복을 갈아입고 카페로 향했어과외는 늘 일곱 시 삼십 분에 시작했는데나는 여섯 시부터 앉아 시작하기 전엔 음료수를 시키고 모의고사 한 회를 풀었어그러면 시간이 딱 맞았거든매번 시험을 봤고모르는 문제들을 물어봤고숙제를 받아왔어가끔씩은 공부 방법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손에 샤프를 잡고 하루 종일 공부를 해서 새빨개진 중지손가락의 굳은살이 짓무르기 직전까지 함께 문제를 풀었어.

과외를 마치고 나서 나온 밤거리에는 무겁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어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왼쪽을 보면 차도에 차들이 출발했다 멈췄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그 불빛들을 보면 내가 실수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어단순한 계산 실수부터 접근 실수그리고 잊어버렸던 공식들과외 선생님이 머리를 쓸어넘기던 모습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 동안 저질렀던 바보 같았던 개념 실수들수능에서 그런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차도에 몸을 던지는 게 낫지 않을까수십 번을 생각했어그러면서도 돌아가서는 금세 무감해져서 기숙사 자습실에서 책을 펴고 복습을 하고 국어를 한 회 더 풀었어늘 같은 방식의 순환이었지.

분명 긴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킬러 문항들은 전부 맞고 쉬운 문제들을 틀렸더라어이없게.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음악들을 골랐어차라리 이어폰을 끼고 침대에 틀어박혀 있으면 조금 나을까 싶어서신나는 노래가 고막을 때리는데 자꾸 엎드려 울게 되더라나는 뭘 잘못한 걸까뭘 더 포기해야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이 결과중심주의가 팽배한 곳에서뭘 얼마나 더 놓아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열심히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내 지난 시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는 정말잘 모르겠어.

구역질이 날 때까지 울다 자는 바람에 다음날엔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그래도 뭘 해야 할지는 알았어부모님한테는 말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재수학원을 찾아봤지재수학원에도 등급컷이 있더라왜 인풋이 잘 하는 아이들이니 아웃풋이 좋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건지를 어렴풋 알 것도 같더라고수능 성적만 보는 곳도 있었고나처럼 수능을 망친 학생들을 위해서 평가원 모의고사까지 받아 주는 학원도 있었어.

대충 훑어보니까 등급컷이 높을수록 좋은 학원으로 불리는 것 같았어당연한 일이기는 해그렇게 컷이 높아도 선착순 접수 일주일 만에 자리가 꽉 찰 정도라니까그만큼 재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6월 모의고사 주요 과목의 등급은 나쁘지 않아서 평가원 모의고사를 받아 주는 학원들을 찾아보기로 했어전화를 해 보고후기를 찾아보고모집요강과 일정표를 꼼꼼히 읽었어.

조금 쉰 후에 찾아보는 게 정신적으로는 낫지 않았겠느냐고분명 그 말이 맞지만그러다가는 재수선행반에 들어가기도 전에 전부 마감되었을 게 뻔했으니까마음 놓고 슬퍼할 틈도 없이 성적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위치를 상기시켜야 했던 거야잔인하게도 그래야만 했던 거야.

 

 

4

마음 정리를 온전히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어.

원래 계획되어 있던 일본 여행은 그때에서야 찾아보려니 남은 자리가 없었고아쉬운 대로 서울이라도 다녀오기로 했어암묵적으로 수능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입시 육 년 동안 엄두내지 못했던 일들을 해 봤어전시회에서 느긋하게 작품을 감상한다거나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깔깔 웃는다거나한 번도 가지 못했던 피씨방에 가서 게임도 해 봤고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잡고 영화를 다섯 편 다운받아 보기도 했고오후 네 시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기도 했고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어치우면서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결국엔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고 있더라꼭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그러나 나는 나여야만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그 동안엔 자기 전이나 쉬는 시간에 짧게 휴대폰에 써 두거나문제집 한 귀퉁이에 급하게 갈겨 써 뒀던 문장을 복기해 왔는데 막상 흰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 하나만 바라보고 있자니 어려웠어.

오후 세 시 쯤부터 노트북을 켰어오랫동안 못 써 온 소설을 써 보려고인물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구상해 왔었어키워드 하나를 인물에게 부여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려서그걸 글로 태어나게 하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이 시간이 아니면 영영 글로 쓸 수 없겠구나하고.

그건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볼 수 있는 두 실험체의 이야기였는데사실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소재는 꿈으로부터 나온 거였어꿈의 내용과 소설은 꽤 거리가 있고 차용해온 건 소재뿐이지만어쨌든 꿈은 이렇게 시작했었던 것 같아.

콜로세움을 닮은 지하 원형 극장 안에 검은 로브를 입은 학생들이 각자의 시험지를 든 채 차분하게 앉아 있었고선생님은 강단 위에서 시험의 답을 불러줬어하나의 답이 들려올 때마다 학생들의 입에선 탄식 혹은 소리 없는 환호가 흘러나왔어선생님은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보더니 13번 문제의 답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어봤어내가 말한 답은 틀렸고선생님은 내게 시험지를 가져와 보라고 했어내가 가운데로 난 길로 선생님께 걸어가자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어선생님은 내 시험지를 훑어보고 고개를 기울이면서 왜 어려운 문제들은 다 맞춰 두고서 쉬운 문제들에서 틀렸냐고 핀잔을 줬어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험지를 받아 자리로 돌아갔어채점이 끝나고 우리는 지하에서 바깥으로 나왔고다시 뒤를 돌아보니 지하 극장에는 반이 넘게 물이 차 있었어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이 개개인한테 실망한 만큼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거였어.

이미 말했을지 모르겠지만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야특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도 많고어렴풋이 어땠는지 소재 정도만 기억하는 꿈도 만만치 않아그중에서도 악몽이 비중이 높은데가위에 눌리거나꿈속의 꿈을 반복해서 꾸거나꿈인데도 온몸이 생생하게 아파오는 꿈들은 아직까지도 선명해.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단 한 번도 수능을 잘 보는 꿈이나의사가 되어 현장에서 뛰는 꿈을 꿔 본 적이 없어작가가 되어 글을 쓰는 꿈도 꿔 본 적이 없어간절히 원한다면 꿈에까지도 나온다고 하는데나는 어쩌면 간절하지 않았던 걸까.

추상적이고 붕 떠 있는 인물들을 하나의 세계로 데려와 엮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생각보다 그 애들은 자기주장이 강했고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유대감도 내 생각보다 깊더라고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원고지 팔십 장 내외의 단편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원하는 걸 다 들어 주다 보니 밑도 끝도 없이 길어지더라그래서 마지막에는 급하게 진정시켰지만.

원래 내가 생각했던 이 소설의 엔딩은 배드엔딩이었어잘 쳐 줘 봐야 메리 배드엔딩남들이 보기에는 비극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행복인둘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죽어버리는그런데 자꾸 이 애들이 살고 싶다고 하더라고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신이 있다면 신을 저주할 테고사실을 알게 되면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저주할 거라고.

쓰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어이 애들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얼마나 간절했기에 해피엔딩이 아닌 결말엔 도달할 수 없는 걸까오전 네 시에 결국 결말을 바꾸기로 했어써 둔 결말을 지워야 했지만 아깝지 않았어.

있잖아나는 얼마나 더 간절해져야 내 결말을 바꿀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

 

 

5

수능이 끝나는 시기엔 매년 기숙사가 행사를 주관하곤 했어수능 끝난 지 얼마 안 된 학생들 모아다가 뭐가 제대로 진행되겠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해마다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하더라풀지 않은혹은 다른 종이에 풀어 거의 새것 같은 책들을 이제 수능을 볼 후배들한테 되파는 거야물론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금세 쉬고 돌아와 피아노 치는 것 외에는 할 게 없기도 했고전엔 한 번도 참여해 보지 못해 아쉽기도 해서 친구와 함께 도우미 지원을 했어점호하기 직전포스트잇을 붙여 둔 책들이 기숙사 8층 계단부터 옥상까지 빽빽하게 들어섰어. 8층 맨 아래부터 국어영어과학탐구사회탐구실전모의고사그리고 옥상에 수학인기 있는 책들은 여러 권이 올라올 때도 있었어그러면 우리는 낮은 가격의 책이 높은 가격의 책을 덮도록 정리했어.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를 했어우리가 이래서 재수하는 게 아닐까그럴지도 몰라그런 것 같아.

다들 알고 있었어열심히 했고한 번의 실패는 삶의 실패가 아니며미끄러져 일 년을 더 해야 하는 건 본인의 탓으로 온전히 돌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더 힘들어지는 걸 막기 위해 그냥 공부를 하지 않은 거라고 합리화하는 거라고열심히 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거라며 그렇게 웃어넘겨야만 하는 거라고거기에는 수능을 잘 본 친구들도수시로 대학에 갈 수 있는 친구들도 있었으니까그렇게 자신의 책임이라며 자학해야만 더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후배들의 기숙사 자습이 끝나는 시간부터 진열해 둔 계단과 8층 복도는 붐볐어우리는 엘리베이터와 엘리베이터 사이에 앉아 작은 상자 두 개를 옆에 끼고 후배들이 가지고 온 책들을 계산했고계산이 끝난 후배들이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빠른 순환이 될 수 있도록 도왔어우리 앞에 자리를 잡은 무료코너에선 책을 나누어줬어캐셔가 아닌 친구들은 위에서 후배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계산대로 후배들을 안내했어역시 예상했던 대로 실전모의고사가 가장 빨리 동나더라.

이틀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빠르게 계산을 하고쉴 시간도 없이 새벽 한 시까지 맞지 않는 시재를 검토하느라 머리를 부여잡고 정산을 하고다음 날 아침까지는 남은 책들을 버려야 한다는 말에 미리 정리를 해 둬야만 했거든.

옆에는 마지막 정산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고몇몇은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계단 위쪽으로 올라갔어새벽에 조금이라도 정리를 해 두는 편이 다음 날 아침에 편할 것 같았거든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어어쩌다 보니 나는 옥상에 있었어힘이 쭉 빠지더라남은 책휴대폰 플래시에 비쳐 거의 색을 잃어버린 책들.

잘 모르겠어.

습관처럼 하던 말이었지만정말로 잘 모르겠어.

내가 이렇게 많은 책들에 둘러싸여 뭘 얻고 싶었는지앞으로 내가 손에 쥐고 기어코 끝낼 책은 얼마나 많을지책으로 빽빽해 거의 빈틈이 보이지 않는 아래쪽 벽과옥상 바깥쪽으로 향하는 굳게 잠긴 문과헤집고 가 엉망이 되어 버린 남은 모의고사들.

그 어둠이 꼭 스며드는 것만 같아서앞으로 내게 닥칠 새로운 한 해를 풍경으로 묘사한다면 꼭 이럴 것만 같아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공중으로 떠오르는 사람처럼습관처럼 숨을 들이쉬고 눈을 여닫으면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어.

있잖아그 밤은 너무 길더라.

모든 일을 대강 마치자 새벽 한 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을 잘 수가 없었어몇 번이나 뒤척이고방을 나서서 물을 마시고 돌아오고눈을 감고 뜨지 않아도 도무지 쉽게 잠들 수 없었어여러 생각을 했던 것 같아재수 비용부터 일 년간의 불투명한 미래까지대체 종이에 적힌 점수 하나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나는 늘 잠을 설쳐야만 하는지우리 집이 조금 더 부유했다면 재수를 결심했을 때 싫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을지재수학원에서 혼자 다니면 힘들다던데 그걸 견뎌낼 수 있을지무엇보다일 년 재수를 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언제부터 대학이 내 전부가 되었는지.

그래도 아침은 오고학교에 가야 했고늘 그랬듯 아침은 거르고 허겁지겁 등교를 했어수능을 망친 다음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도 야속하게 찾아왔던 것처럼등굣길엔 선생님이 사복을 입은 내게 몇 학년이냐고 물었지만삼학년이라는 말에 금세 놓아주었어우리는 정말로수능을 위해서만 달려왔구나.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피아노학원으로 향했어몇십 시간을 같은 스케일만 반복하니까 이젠 눈을 감고도 칠 수 있겠더라익숙해진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어. E플랫 장조로 시작해 1부에서는 허공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모양새로 분명한 터치를 이어가고간단하고 가벼운 손가락의 회전이 패시지를 유려하게 연주하더니다시 어느새 2부에서는 B단조로 옮겨가 폭발적이지만 억압된 춤곡이 되어 있는 곡.

생각을 하고페달을 밟고다시 시선은 악보에 머물러이미 도약해야 할 거리는 계산되어 있으니 익숙하게그러나 기계적이지 않게집중을 하면서 피아노를 쳐.

B단조의 악센트는 첫 박을 오른손이두 번째 박을 왼손이 가져가나머지는 있는 듯 없는 듯부드럽고 약하게 건반을 눌러야 하는 거야조화로우면서도 어디엔가 갇혀 있는 것 같이 조심스러운언제 폭풍우가 불었냐는 듯이 첫 주제가 다시 반복되면마지막은 꼭 이것만을 향해 달려왔다는 듯이우리를 기다리는 건 자학적이고 가학적인 코다야.

지금까지의 모든 스케일을 부정하려는 듯이같은 프레이즈와 같은 박자로 연주하지만 음 하나씩이 자꾸만 어긋나기 시작해불안하던 주선율을 더더욱 뒤흔들고 어쩌면 넘어질 것도 같이 위태롭게 굴다가마지막에는 힘을 싣는 왼손의 화음과 오른손의 새로운 스케일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치달아 멈추는 게 이 곡의 전부야.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꼭 단조의 한가운데에서 온몸이 부서져라 달려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¹여성민, <장미 여관변용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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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백일장에 요즘 사이코 있대. 사이코? 어. 이과인데다가 문창과도 안 갈 거 같은 앤데, 자꾸 나가서 상 뺏어 온다더라. 미치겠어. 문학특기자 점수로 다 들어가는 건데 솔직히 양보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구는 절박해 죽겠는데 참.     Y는 토요일마다 어딘가로 떠났다. 어느 주말에는 기숙사에서 통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가지런히 개어 두어야 마땅할 이불은 늘 구겨져 있었고, 낡은 문제집이나 연습장 따위가 침대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기도 했다. Y는 숨을 몰아쉬었다. 계단과 내리막길을 위태롭게 뛰어내려온 Y는 기다리고 있는 택시의 문을 익숙하게 열었다. 안녕하세요. Y는 늘 택시에 오를 때마다 조급하게 구는 습관이 있다. 기사님,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 고속버스터미널이요. 평소였다면 삼십 분 하고도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만 한산한 새벽에는 십오 분도 걸리지 않는다. Y는 익숙하게 택시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바깥을 응시했다. 매주 보는 길의 순서를 외우지는 못했지만, 교차로는 차례로 읊을 수 있다. 사거리, 로데오, 다시 사거리, 그리고 삼거리. 제대로 빗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스스한 반곱슬 머리카락은 곧 다른 창문으로 옮아갔다.   고속버스 좌석에 간신히 앉은 Y는 남청색 백팩을 뒤적였다. 그럴 때마다 Y는 톱톱하고 붕 뜬, 자신이 썼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눈썹이 묘하게 치켜올라간 Y의 손에 보라색 시집이 딸려 나왔다. 나오기 직전 서둘러 고르는 시집의 표지는 명도가 높고 채도가 낮은 색상이 대부분이었다. Y는 자신이 무채색이기 때문에 너무 쨍한 색깔은 자신을 부술 테고, 그렇대서 색깔이 없다면 우울이 얼룩처럼 짙어질 거라는 독백을 징크스처럼 상기했다. Y는 책의 앞부분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몇 장을 넘겼다. 핏기 없는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버스가 출발한 후로 Y가 책을 다시 펼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것이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른손으로 쥐다가, 왼손으로 옮기다가, 이따금 품에 껴안기도 하면서 잠을 청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Y의 입속에서는 금세 까 넣은 초콜릿 하나가 달콤하게 녹아갔다.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Y는 강당의 불편한 의자에 앉은 채 학교와 이름을 차례로 원고지 오른쪽에 기재했다. 아무리 고속버스에서 잤다고 해도 잠의 질이 아주 뛰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짐을 챙기고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시간을 매번 확인했기 때문에 Y는 눈을 연신 비빌 수밖에 없었다. 눈을 꾹 눌렀다가 떴다. Y의 시야가 서서히 트이자 세미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럼 시제를 발표하겠습니다. 시 부문 시제는……. Y는 화면에 크게 띄워진 시제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쁜 발자국 소리들이 강당을 꽉 메웠다. Y는 그제야 원고지와 펜을 꽉 쥔 채 강당에서 벗어나는 무리에 합류했다. 대부분의 백일장에서 그러했듯 서정을 종용하는 시제였다. Y는 손톱이 손바닥에

  • 윤별
  • 2018-03-31
연극이 끝나기 전에*

연극이 끝나기 전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그게 이학년들끼리 비상회의를 소집해 나온 결과였다. 축제까지는 이제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원래대로라면 소품까지 전부 준비되어 들고 동선을 맞춰야 하는 시점이었다. 박스도 몇 번만 더 주우면 그만 주워야 할 정도로 꽉꽉 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본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은 전년도 축제를 준비한 입장에서 보자면 축제에 공연을 올리고 싶기는 한 건지,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을 품기 충분했다. 저녁에 삼학년 선배들이 내려왔다. 동아리 시간에 삼학년 기장 선배가 내려와 한바탕 혼이 난 후였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도 동일하게 이 주일이었다. 이학년 기장 Y에게 문자를 받은 순간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직격했다. 삼학년뿐 아니라 이학년들도 거의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이학년들이 매달려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삼학년 선배께서 직접 내려와 상황을 체크하고 최선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회의를 소집하면 텅텅 비어 있곤 하던 큰 강의실은 어쩐 일인지 이학년과 일학년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학년 기장 Y가 울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년간 걱정 될 정도로 연극부를 위해 헌신한 건 Y였고, 맨 땅에 헤딩을 하려던 일학년들에게 완충작용을 한 것도 Y였고, 의욕 없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대본을 쓰게 시키고 지속적으로 찾아갔던 것도 Y였다. Y는 할 만큼 했고, 짊어질 만큼 짊어졌다.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Y를 위로했고, 그 후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남자작가 H와 배우장 G와 부원 J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이 모였다. 일학년들은 학교 편의점 앞의 공간에서 저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학년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을 법한 벽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게 타일을 불규칙적으로 밟는 소리만 들렸다. “대본도 아직 안 나왔다며.” 내가 운을 뗐다. “일단 장면 전환 아홉 번은 미친 짓이야. 절대 못 올려.” “너희가 계속 같이 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봐 줬지, 봐 줬는데…….” 약속하기라도 한 듯 우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우리는 그 전 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 비상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학년 기장 S와 다른 부원들 간의 불화에 대한 문제가 주 안건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힘 빠진 논쟁이 오갔고, 연극부 특성상 이번 무대를 어떻게든 올린다고 하더라도 불화가 지속된다면 당장 다음 무대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애들이 자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오리엔테이션 무대를 올리지 못하고 동아리는 폐동되고야 말 것이다. 아찔한 감각이 목 뒤편부터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갔다. “Y는 이제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거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놓고 있을 거야?”

  • 윤별
  • 2017-11-30
숨의 기억

숨의 기억     숨을 쉴 수 없을 때 머리를 처박는 법을 배웠다.   ─너 도서관 안 가? ─거기 자리 맡기 힘들잖아. ─그래도 더 집중은 잘 되잖아. ─으음, 그냥 기숙사에서 할래. 귀찮아.   기숙사는 조용했다. 으레 방문을 뚫고 복도에서 들리던 수다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이들은 모두 실어증을 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의적으로 입을 다물고 책상 앞에 몸을 붙인 채 펜을 놀리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망가져가는 오른손에 고무줄을 감았다.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처럼 반복되는 세계는 시계와 닮아있었다. 문득문득 치솟는 생각이 있었다. 시계초침을 부러뜨리고 싶다. 언제나 같은 리듬의 삶에서 벗어나 죽음의 문을 두드리고 싶다. 다섯 명이 함께 지내는 호실에는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열댓 권의 책들을 의자 밑에 쌓아두고, 그 책들이 한 번씩 손을 거치고 나서야 자신의 호실로 잠시 돌아가 책을 바꾸어 올 뿐이었다. 수학과 과학 책을 잔뜩 가져와 무리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던 시절이었다. 언어를 머릿속에 C언어처럼 입력하고 올바른 답을 도출하기 위해 잠을 줄였다. 비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되풀이되었다. 언제나 같은 결과를 이끌어내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교재를 잡았다. 책을 바꾸기 위해 호실로 들어가던 찰나, 숨이 들이켜지지 않았던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출력값이었다. 내뱉은 단어들이 없어 들어올 것도 없었다고 판단했을까. 아니면 쓸모없는 몸뚱이가 연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까. 어느 쪽이든, 공기의 유입을 폐가 거부하는 중이었다. 나는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숨을 들이켜기 위해 하늘을 보고 막힌 공깃구멍을 뚫기 위해 애썼다.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이 끌어내려지고, 삶을 갈구하는 몸짓만을 반복했다. 목을 쭉 빼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처절했다. 죽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무렵들과 삶의 밧줄을 추악히 그러쥐는 몸뚱이가 겹쳐보였다. 역겨웠다. 그렇게 생의 중단을 꿈꿔왔으면서. 나는 발버둥치기를 멈추고 무릎 사이로 머리를 처박았다. 숨구멍이 트여 죽음의 수갑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든 날이 있다. 할 일들은 자습실 책상 위에 형체를 갖추고 쌓여 있는데, 마치 아지랑이처럼 금세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 버리는 날. 몸을 웅크린 채 심장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찰나들이 연속적으로 찾아온다. 몸이 떨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제어하면 발끝부터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 마치 환청처럼, 아른아른. 세상의 아름다운 인식과 상반되는 추악한 섬뜩함. 밖으로부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문 쪽을 바라보았다. 룸메이트가 슬리퍼를 끌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애는 자신의 노트북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 여러 색깔의 책을 챙겼다. 방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간은 단 일 분이 되지 않았다. 오직 따뜻한 공기뿐이 남은 기숙사 방 안에서 나는 도망가는 나를 보았다. 고

  • 윤별
  •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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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잠깐은 윤별님과 비슷한 감정을 가졌던것 같아요.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수는 실패가 아니라, 흘러가는대로 공부했던 삶에서, 스스로 비전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더 멋진 대학생활을 즐기기위해서 스스로를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인거죠.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부분은, 나 자신이 간절하지 않았던걸까 하며 되묻는 부분이었네요. 저는 그런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본인이 더 간절하지 못했던것 같다며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의지와 노력이 직결되어 보이는것 같아 보이지만, 줄넘기를 1천개 하는 프로선수가 있고 줄넘기를 1백개 하는 일반인이 있을때, 프로선수가 일반인보다 의지가 강해서 더 많이 하는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1천개를 심심풀이로 끝내는 프로선수보다, 1백개하는 일반인이 더 간절하게 노력했을 수도 있고요. 스스로 정신이 나약해지지말고, 수험생 '프로'답게 ^__^ 본인은 충분히 노력했지만 안타깝게 운이 따라주지않았다라고 생각해보세요. 의지를 불태우기보다 훈련을 통해서 체력이 튼튼한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화이팅 합시다! + 화2내용이 눈에 들어오네요. 투과목 이과생인줄은 몰랐어요~ 대단하네요.

    • 2019-01-01 03:35:13
    받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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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성현

    안녕하세요, 윤별님. 지난 일 년간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의 또 다른 일 년이 어떻게 펼쳐질지 잘은 모르겠지만 결과에 따라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스스로 다르게 평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사이코'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나네요. 칭찬을 절제하려 나름 노력했습니다.^^ 'B minor'에서는 12년간 조금씩 다잡고 만들어 온 생활의 틀을 어느 한순간 놓아버리는 것에 대한 허탈함,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의 불안함과 초조함 등을 B 단조 피아노곡을 통해 섬세하게 풀어주었네요. 무엇보다 수능을 끝낸 이후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달 넘는 시간 동안의 심리 변화를 잘 담아내어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능 이후 '사물함의 책들을 치우며', '뭘 하고 싶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그리고 '피아노를 연주할 때'와 '옥상에 놓인 많은 책을 보며' 반복했던 말 “잘 모르겠어.”라는 문장이 지금 윤별님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듯하네요. 그래도 윤별님 스스로가 어디에 서 있는지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긋나고 불안하고 위태롭지만 무너지기 직전까지 달려가는 중이네요. 하지만 쓰러지지 않고 달려가 목적지에서 멈출 것이고 B 단조의 피아노 곡도 잘 마무리될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윤별님이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 너머에 있을 거예요.¹ 단순히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후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또 다시 수능 준비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새로운 일 년을 보내며 자신이 진정으로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¹임경섭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 너머에 있다' 인용

    • 2018-12-31 01:59:29
    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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