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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숙함에의 갈망

  • 작성자 김한세
  • 작성일 2018-12-30
  • 조회수 646

 

 

지난 12월 22일, 잠실 롯데 콘서트홀에서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 독주회가 있었다. 나는 힘겨운 수험 생활에 지칠 때면 힐러리 한이 연주한 바흐의 샤콘느를 들었다. 단정한 음색과 안정된 기교가 전달하는 질서정연한 슬픔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름의 역경 속에서 갖게 된 애정 탓인지, 바이올린의 거장을 그리는 마음이 깊어져 결국 연주회의 티켓을 구매했다. 빈곤한 지갑 사정으로 인해 만족스러운 좌석에 앉지는 못했고, 2시간의 연주회 내내 그의 등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만족했다. 항상 이어폰 너머로 접하던 이를 직접 보고, 그 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기 때문이다.

이날 연주회는 내게 두 가지의 감정을 선사했다. 첫 번째 감정은 경이였다. 힐러리 한에 대한 나의 애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모양이었다. 입장하는 순간 비치던 그의 옆모습을 보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울컥 올라왔다. 미소 띤 얼굴로 넓은 무대로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그 모습이 참 단단해 보였다. 나는 그가 첫 소리를 내는 순간까지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두 번째 감정은 괴로움이었다. 사실 이 감정이야말로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내 수험 생활을 지탱해주었다는 개인적인 서사에서 비롯되는 감동은 힐러리 한이 첫 음을 내는 순간까지만 지속되었다. 나는 힐러리 한의 연주에서 아무런 감상을 느낄 수 없었다. 내 가슴에서 오롯하게 우러나오는 생각을 갖고서 그의 음악에 임하지 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투브에 연주회의 곡목을 검색해서 들어보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나는 두 시간 동안의 공연 내내 왼쪽에 앉은 관객의 외투 스침소리에 괴로워야 했고, 오른쪽에 앉은 관객의 코먹는 소리에 고단해야 했다. 연주회가 끝나고서 8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마음에는 망연자실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토록 그리던 힐러리 한의 연주를 두 귀로 직접 들었는데도 머리에는 박힌 게 없었다. 각종 클래식 커뮤니티에 감상을 검색해보았다. 콘서트를 갔다 온 모든 사람들이 힐러리 한의 연주를 두고 길이 남을 거장이라며 기립박수를 쳤다. 왜 나는 그의 음악에서 감동을 느낄 수 없었을까? 나는 뭐가 부족했을까?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채 회장에 들어갈까, 그런 걱정에 티켓을 구입하자마자 프로그램에 올라와 있는 곡목을 공부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바흐의 파르티타를 들었고, 그 비평을 찾아보았다. 그 무엇도 내 감상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는 생각에 강남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허망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내 것이 아닌 감상을 마치 내게서 비롯된 오롯한 사유인 양 그렇게 떠들었다. 힐러리 한이 스타일을 바꾼 느낌이었어요. 왜, 그 사람은 되게 기계적인 연주의 정석이잖아요. 정경화랑은 대조적으로요. 그래서 그 질서정연한 맛이 좋아서 평소에 그분의 연주를 선호했는데, 특히 바흐 말이에요, 이제는 스타일을 바꾸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포르테가 대담해지고 주제의 강조가 극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일정한 경지에 오른 이들일수록 자신이 여태껏 추구해온 방향을 틀기는 어려운 법인데 그 분이 그렇게 변화하는 모습을 목도한 제가 행운아네요. 되게 문학적인 모멘트, 음 에피파니? 를 목격한 거나 다름없잖아요.

고리타분한 표현. 지켜지지 않는 문법. 성긴 구성. 허술한 내용.

내 빈곤한 언어를 저주한다. 내 얄팍한 이해를 증오한다. 내 가난한 안목을 혐오한다. 그날 밤, 눈을 들어 내가 가진 궁핍한 자산들을 끌어 모아 보았다. 맥락의 수긍 없이 단순하게 반복하는 지식, 치밀한 논증이 없는 결론, 책들이 바스러지는 서재, 어릿광대처럼 허풍 섞어 늘여놓던 내 모습까지. 무지의 선율을 노래하는 혓바닥을 잡아 챈 다음 손가락 끝으로 혀뿌리를 더듬고 어두운 목구멍 안을 헤집어보면 검은 기름때가 낀 오물을 끄집어 낼 것 같다. 형체가 되다 못한 부스러기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자석이 고장나버린 나침반과 같아서, 내가 황량한 길을 헤쳐 나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나침반을 망가뜨린 건 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이 빠른 물살처럼 밀려들어온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만 싶다.

방의 서재에 꽂혀 있던 민음사의 햄릿. 그 책등에 박제된 셰익스피어의 눈이 나를 향했다.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던 햄릿. 그 선택지 앞에서 구차한 시간을 이어나가는 나를 본다. 햄릿은 제 죽음을 완성했는데,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셰익스피어의 시선이 계속 따라온다. 우울감이 나를 진득한 늪으로 끌어내린다. 오욕에 찬 생을 어떻게든 변제하고자 하는 추악한 탐심은 혀를 날름거리며 내가 명예의 명패를 갖도록 닦달한다. 이 욕심이 불순한 동기임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내 자신에게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만다.

김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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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그 애들

1. 그 애한테서는 독특한 향이 났다. 나는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언제 한 번 향의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애는 향의 이름부터 출처까지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 애의 음성을 떠올리려 하자, 자음과 모음이 뒤섞이다가 뭉그러지고 말았다. 기억 한 줄기를 겨우 건져냈다. 스리랑카에 산다던 그 애의 할머니가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거라고 말했던 것 같다. 어쩌면 떠올리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운 순리일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서 그 애의 향을 맡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향은 그 애의 오롯한 색깔인 셈이다. 그 애의 이름 세 글자면 향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충분했다. 향은 낯선 거리감을 상쇄하려는 듯 그 애의 흔적이 깃든 거의 모든 곳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그 애의 옷가지, 그 애의 머리카락, 그 애의 책, 그 애의 침대에서. 그 애의 육체를 이루는 분자에도 향이 스며있을 것처럼. 언제 한 번 그 애가 긴팔을 걷어 올린 채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을 때, 손등을 붙잡고 체취를 맡고 싶다고 생각해봤다. 그 애의 향기는 여름에는 서늘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다가왔다. 사람에게는 집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대부분의 애들이 그랬다. 다들 집이 품고 있던 향기를 몰고 왔다. 어렸을 때 친구들의 집에서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온갖 냄새를 섭렵했다. 옷장 속의, 이불 속의, 화장실 속의 냄새. 그렇게 다른 애들이 갖던 냄새의 출처를 금방 알아챘다. 그 애는 내가 알던 것과 반대였다. 마치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 같았다. 우리의 집은 기숙사였다. 우리는 기숙사에서 공부했고, 잤고, 먹고, 울었고, 놀았다. 그러니까 기숙사는 우리 집이었다. 기숙사에서는 기숙사의 냄새가 났다. 지하실 창고에서는 누군가 햇볕 아래 땅콩을 말리는 것처럼 고소한 향이 났는데, 어떤 애는 그 향을 두고 지네의 발자취 냄새라고 했다. 어떤 때는 녹슨 냄새가 나기도 했다. 수돗물이 잘 정비되지 않은 쇠파이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청소 대행업체가 기숙사비를 떼어먹었다면서 수군거렸다. 북쪽을 바라보는 벽에 위치한 방들에서는 단단한 나무의 냄새가 났다. 밤에 방에서 자다가 아침에 교실로 막 나온 북쪽 방의 학생들에게서는 숲의 어둠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 애와 내가 쓰는 방은 이도저도 아닌 곳에 있었다. 지하와 옥상의 딱 중간에 걸친 층, 사감실 쪽 화장실과 연결된 덕에 녹슬 일 없는 수도관 파이프, 학교 본동과 기숙사를 연결하는 통로 근처에 위치한 방. 우리 방 앞에 서면, 문이 닫혀있는데도 그 애의 향이 흘러나왔다. 나는 호실 숫자를 따로 읽지 않더라도 냄새만 맡고서 우리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가끔 복도에 아무도 없을 때면,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서 새어 나오는 냄새를 맡았다. 만약 사생 중에 몽유병 환자가 있었다면, 우리 방을 이정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향은 문에 코를 갖다 대지 않아도 될 만큼 풍요로웠고, 그만큼 품위 있었다. 두개골 속의 뇌가 향기로 완전히 잠길 때쯤이면 황급히 문고리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 김한세
  • 2020-02-10
심해

중간 고사를 봤다. 새로운 시점에서 맞게 되는 첫 중간고사였다. 내 첫 과목은 일요일 오후 3시에 잡혀 있었다. 인터넷 강의의 필기 고사 일정은 모두 주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4시간을 소요하는 통학생이었다. 고로 3시의 시험에 맞추기 위해서 적어도 1시에는 나가야 했다. 나는 1시 반에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바닥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교재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도 못했고, 책을 읽자니 활자가 눈에서 미끄러졌다.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버스의 도착 예정 시간이 1분씩 줄어들 때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딱 도살당하기 직전의 가축 같았다. 어떻게든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교재를 펼쳤다. 읽히지 않았다. 진리표가, 귀납이, 기호가, 영어가, 한글이, 아무것도. 주말 오후의 고속도로는 평일 출퇴근 시간의 그것에 비하면 한산했다. 버스는 세차게 달렸다. 항상 내리는 정류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버스의 맨 뒷자리에다 머리를 구겨 넣었다. 결국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했다.   나는 낯선 정류장에 내렸다. 봄볕이 좋았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벚꽃 아래로 화사한 색을 자랑하는 철쭉이 싱그러웠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노는 아이들이 고왔다. 카페로 갔다. 최근에 유명하던 브라운슈가치즈폼스무디를 주문해봤다. 빨대에 처음 입술을 가져다 대었을 때 밀려오는 맛이 새로웠다. 가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캐롤을 꺼내 들었다. 타피오카 펄을 씹으면서 책장을 넘겼다. 원수 같은 활자들이 그제야 고개를 조아렸다. 서로에게 헌신하는 테레즈와 캐롤의 사랑 이야기는 낭만적이었다.   싱그럽다, 곱다, 달다, 사실 이 감상은 전부 거짓말이다. 옷 위로 내려앉는 햇빛이 따뜻했지만 그저 따뜻한 것으로 끝나버렸고, 철쭉과 아이들은 금방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페에서 주문한 음료가 첫 맛은 새로웠지 몰라도 그 이후에는 마시는 행위에서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며 삼켜냈다. 테레즈와 캐롤의 이야기는 거칠한 종이 위로 버석버석하게 그려졌고, 나는 거기서 로맨스의 독서에 충실하기 위해 쥐어지지 않는 낭만을 찾아 헤맸다. 그러므로 저것들은 내가 체험한 풍경을 열거하고 그에 대해서 기계적인 반응을 뱉어내는 말에 불과하다. 저것들은 내 말이 아니다. 상황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끌어온 타인들의 언어다. 그 관습적이고도 온후한 어휘들은 내게는 없는 언어였다. 누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박탈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내가 열거했던 어휘들을 진실한 정서로 표현할 수 있는, 현실감과 유사한 성질을 띠고 있을 것이다. 내게는 온종일 한탄하고 원망할 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홀로 박탈감을 설명해야 했다. 일상적인 박탈감은 덩어리지다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물결이 잔잔해졌다. 내가 스스로의 관찰자가 되어 먼 곳에서 나를 조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모든 상황으로부터 격리된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nbsp

  • 김한세
  • 2019-04-30
포스트 수능의 시대

11/15~16   지난 12년, 그 중에서도 이번 1년은 유난히 고통스러웠다. 육체도 정신도 모두 고달파서, 그래서 내가 영원히 고통 속으로 침전할 줄 알았다. 그동안 나는 스트레스성 두드러기로 인해 매일 밤마다 온몸을 긁어야 했고, 병원에서 임시방편으로 처방한 약을 먹어야 했다. 계속 앉아있던 탓에 척추는 뒤틀렸으며, 더 이상 내 허리를 뒤로 젖힐 수 없게 되었다. 체력은 내 육신을 떠받치는 것으로 그 쓸모를 다했다. 움직이는 일이 없으니 육체는 물 먹은 솜인 것 마냥 불어났다. 자유로운 정신이 살로 이루어진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 매 순간이 답답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침마다 갈빗대 아래의 가죽을 가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나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된 상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날카로운 메스가 뱃가죽을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가 그 안의 장기를 하나씩 빼내, 종내에는 붉은 살덩이 몇 점으로 환원될 내 존재를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나를 이루던 것들이 의미를 상실하고 의미 없는 자유를 누릴 영혼을 상상했다. 뒤틀린 해방감이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내 12년의 공교육은 막을 내렸다. "막을 내렸다"고 표현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수능을 치르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영영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았던 탓이다. 그토록 내 정신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미성년의 삶이 이제는 정녕 그 뒤통수를 보이고 있다. 이내 나는 비로소 강압적인 의무에서 탈피해서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제도교육 12년의 종착지가 있었고, 동시에 12년의 내 인생에 대한 구속이기도 했던 그것은 비로소 끝을 맞았다. 어떻게 보면 나는 1789년의 정신을 만들어 낸 파리의 민중들처럼 내 자신에 대한 자유를 쟁취해 낸 셈이다. 시험을 마친 후에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제 2외국어 과목까지 다 보고 나니, 태양은 산 너머로 이동한 지 오래였다. 버스 창 너머로 휙휙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 라 단조를 들었다. 그 특유의 딱딱하고 절도 있는 리듬, 바로크 음악의 단아한 화음 진행이 피아노의 청명한 소리와 어울려 내는 소리가 질서정연했다. 선율이 내게 선사해주는 그 질서감에 안정감이 들어, 나는 버스에서 내리고도 계속 그 곡을 들었다. 주황색으로 빛나는 가로등 불빛을 맞으면서 기숙사가 있는 산 위를 올라갔다. 내 두 발로 경사를 밟아 올라갔다. 그러면 나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기도를 홧홧하게 태우는 숨을 뱉었다. 비로소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시험이 끝나기 전부터 벼르고 있던 롤랑 바르트를 뒤적거렸다. 단테의 신곡 첫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의 삶이 어떻게 소설을 창작하는 재료가 되는지에 대해 전개되는 아이디어가 피어나는 꽃처럼 고매했다. 텍스트를 훑은 다음에는 피아노를 쳤다. 1학년과 2학년이 모두 빠져나가고, 귀사한 3학년이 한 줌이 되지 않는 학교에서였다. 부조니가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샤콘느의 음색은 아무도 없는 넓은 강당을 오롯하게

  • 김한세
  • 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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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성현

    안녕하세요. 김한세님.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접하며 느낀 감정들을 소재로 글을 올려주셨네요. 이번 글에서도 다양한 비유와 묘사가 담긴 문장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원숙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묘사들이 무척이나 신중하고 정확하게 잘 사용됐다는 생각입니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다만, 이야기가 두 가지로 분리된 듯했습니다. 독주회 감상에 대한 이야기와 원숙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요. 글의 서두에 독주회에 대한 작자의 기대가 크게 드러났던 만큼 그러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서 독자의 궁금증이 컸는데요, 그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추상적인 내용의 이야기들이 진행되어 글 전체가 유기적으로 하나되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원숙하지 못하다고 해서 연주회에서 감동을 못 느낀 거라고 하기에는 다소 이유가 약해 보입니다. 고리타분한 표현, 지켜지지 않는 문법 등의 내용이 연주회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 이유와 개연성이 확보되면 지금보다 더 좋은 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2019-01-06 01:58:24
    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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