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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을 쑤시다

  • 작성자 표리부동
  • 작성일 2019-03-02
  • 조회수 667

벌집을 쑤시다

 

벌집은 벌이 사는 집이다. 당연한 말이다.(하지만 두꺼비집에는 두꺼비가, 닭똥집(위)에는 닭똥이 살지 않는다.) 벌집은 벌이 분비하는 밀랍으로 만들어지며 방수성을 띤다.

 

벌집은 여러 상황을 비유하는데 사용되지만 가장 흔히 사용되는 건 벌집을 쑤신 듯 하다, 와 벌집을 건드리다, 라는 관용구들이다. 벌집을 쑤셔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벌에 쏘여본 사람이라면 벌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리라 믿는다.(과민성 쇼크는 즉각적 조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다. 과민성 쇼크를 제외하고 생각해도 벌침은 아프다.)

 

벌집을 쑤시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목적을 가진 행위이거나 무심결에, 우연한 행위다. 경우가 어쩄든 벌집을 쑤시는 건 변하지 않는다.

 

보통 집이 부숴지거나 흔들릴 때 사람이라면 밖으로 뛰쳐나가 경위를 확인하고 경찰을 부르거나 무턱대고 멱살을 잡겠지만 벌들은 부를 경찰이 없다. 어지간 해서는 인정되지 않는 자력구제가 유일한 해결법이다. 그렇다 벌침을 쏘아대는 일이 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상대가 말벌이라면 침을 쏘는 대신 몸을 비비겠지만)(말벌의 겉껍질은 의외로 단단해 벌하면 떠올리는 꿀벌의 침이 곧잘 들어가지 않는다)

 

벌들은 흥분해 벌침을 쏘아대고 벌집을 쑤신 사람은 혼비백산 도망치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애쓴다. 우연히 쑤셨다면 손을 훠이훠이 휘두르며 달리는 일이 당연하고 꿀이나 벌집을 원한다면 상관없이 벌집을 건드리는 일이 당연하다. 벌집을 건드릴 각오한 사람이 아무 준비도 없이 벌집을 쑤실일은 없으니 말이다.

 

풀을 베거나 땅을 파던중에 우연히 벌집을 쑤지지 않았다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벌집을 쑤시는 것이다. 꿀을 따던 애벌래를 노리던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쑤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꿀도 애벌래도 필요없는 사람이 벌집을 쑤시는 일도 가능한가? 현대사회에서 꿀과 애벌래는 어느정도 시간을 쓸 여유가 있다면 어렵지 않게 구할수 있다.(물론 꿀과 애벌래를 생산하는 일을 하고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구태여 벌집을 쑤시는 일이 필요없는데도 벌집을 쑤시는 사람. 예를들어 충분한 꿀과 애벌래를 가기고 있음에도 벌집을 쑤시는 사람과 언제든 꿀과 애벌래를 구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미 꿀을 가지고 있음에도, 꿀을 구할 여유가 충분함에도 왜 벌집을 쑤시는 것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이건희가 사과가 먹고 싶다고 청송에 밭을 구매하고 직접 물을 뿌리며 사과를 기르는 일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건희라면 굳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청송에서 제일가는 사과를 받아먹을 수 있는데 말이다.(이건희가 주말농장을 가꾸고 싶은 경우를 제외하고)

 

그런 행위의 동기는 무엇인가? 충분히 소유하고 있고 소유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고행을 고집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행위의 주체가 고행자인가? 고행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고행자는 깨달음을 위해 고행을 고집하는 사람들이니)

 

그러나 고행자가 아니라면? 생업? 꿀을 따고 애벌래를 모아 시장에 매매하는 일이 생업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생업도 아니라면?(꿀 따는 사람이 꿀을 따기 싫다고 따지 않는다면 굶어죽지 않을까?)

 

정신적 만족과 생업의 유지를 제하면 굳이 고행을 감수할 이유는 찿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공연히 벌집을 쑤시는 사람들은 광인인가? 벌침에 쏘이는 고통을 즐기는 피학성애자들인가?(피학성애자들을 광인이라 생각하지는 않음) 아니다. 벌침을 쏘임으로 피학성애를 만족하고 정신적 만족을 얻기에 정신적 만족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해하지 힘들다. 통상적으로 의미가 없어보이는 일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발견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발명? 발견과 발명에 가능성을 싣고 생각해보자.

 

처음 갈릴레이가 지구가 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돌아버린건 당신 머리가 아니냐고 조소를 보냈다. 갈릴레이가 관측기구와 기록을 붙잡고 씨름할 때 사람들은 신의 진리에 반하는 행동이라 말했다. 그러나 갈릴레이 돌았던가? 돈는 것은 갈릴레이의 머리가 아니라 지구였다. 신의 진리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늘이 도는 건 진리가 아니었다.

 

의미없어 보이는 행동이 사실은 무척이나 의미있는 행동이었던 일은 생각해보면 굉장히 많다.

위대한 일들은 의미없어 보이는 행동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공연히 벌집을 쑤시는 일은 위대한 발견을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이것도 아니다. 행위를 보고 동기를 판단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 행위가 완료되고 결과 세상에 나왔을 때 동기를 파악할 수 있다. 미쳐서 쑤시는지, 벌들의 행동 알고리즘을 분석하려는 건지는 결과를 보아야 알 수 있다.

 

속단의 결점이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면 사실관계를 왜곡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벌집을 쑤시는 이가 피학성애자인지, 양봉인인지, 과학자인지는 천천히 판단해도 늦지않다,

 

그러니 길을 지나다 벌집을 쑤시는 사람을 본다면 곤경에 처한 것 같지 않거든 한번 물어보자. 왜 벌집을 쑤시고 있는거냐고.

표리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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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리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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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리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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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성현

    안녕하세요. 표리부동님. 벌집을 쑤시는 경우의 사례와 그때 벌들의 반응을 담아주셨네요. 목적 없이 의도적으로 벌집을 건드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해 주셨구요. 몇 가지 전제들을 정리하신 뒤에 이야기를 풀어주셔야 정리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꿀이 충분한 사람이 목적 없이 의도적으로 벌집을 건드린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일은 거의 없기에 사례가 나와주면 저 좋습니다. 벌집을 쑤신다라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쓴 게 아니라면 실제 가능한 일인지, 작자는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 먼저 소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벌집을 '쑤신다.‘라는 표현을 벌집을 '딴다.‘라는 단어로 바꿔주면 어떨까요? 벌집을 쑤신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기보다 의도적인 행동으로 해석되며 얌전히 있는 상대를 건드린다, 혹은 혼란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 회장이 좋은 사과를 먹으려 밭을 구매해 기르는 행동과도 사례의 비유가 맞지 않게 느껴집니다. 벌꿀이 필요 없는 상황(생업이 아니라고 하셨으므로)에 벌집을 쑤신다는 것은 우연히 발견한 벌집을 건드리는 행동이어서 의도적으로 사과나무를 길러 사과를 먹는다는 내용과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목적 없이 의도적으로 벌집을 쑤셔 벌침의 쏘이는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을 피학성애로 풀고 정신적 만족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이 일을 발명과 발견 그리고 갈릴레이의 일화와 비유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발명과 발견은 지식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출발점부터가 맞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각, 의문, 사고를 가지고 글을 써준 점은 칭찬해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비유를 좀 더 적절히 사용하고 논리적인 주장을 펼 수 있도록 퇴고하며 글을 쓴다면 앞으로 더 좋은 글 보여 줄 거라 생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2019-03-08 23:31:57
    전성현
    0 /1500
    • 표리부동

      감사합니다.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는데 조언좀 부탁드립니다

      • 2019-03-09 15:34:02
      표리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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