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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1-08-20
  • 조회수 506

나와는 연도 없을 상들을 받아 출판되는 책보다는 아마추어가 쓴 투박한 글을 좋아합니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문장들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문장보다는 목구멍에 걸리는 일이 잦으니까요. 소화되지 않는 글들이 좋았어요. 소화가 되지 않은 채 오래오래 덩어리처럼 내 기억 한구석에 처박혀있으니.

기성 작가처럼 다듬어진 글은 써낼 자신이 없어서 투박한 글을 쓰는 법을 배웠어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홀로 좋아하는 글을 출력하고 필사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된 건 그것 때문이에요. 모서리가 거친 글을 좋아했고 그렇게 써도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잠깐 비겁한 변명 하나 할까요.

처음엔 다양한 작가의 글을 읽었지만 갈수록 폭이 좁아진 건 취향이 확고해졌기 때문이에요. 다듬지 않은 문장을 좋아했고 어렵고 과격한 단어가 종종 섞이는 걸 좋아했고. 사랑을 주제로 한 글이 좋았고 사랑의 썩은 부분만 드러내 보여주는 글이 좋았고 그럼에도 결국엔 사랑을 놓지 못하는 사람의 멍청함이 좋았고. 읽는 게 비극적인 사랑 글뿐이니 쓸 줄 아는 것도 그것뿐이에요. 사랑이라곤 해본 적 없으면서 자꾸만 사랑 타령하는 건 사랑이 가진 독특함이 좋아서예요. 인류가 부릴 수 있는 가장 신비로운 마법 같아요 내 심장이 썩어 문드러져도 상대를 위해선 기꺼이 죽은 심장 바꿔 끼울 수 있다는 것.

비극적인 사랑을 좋아하는 취향은 자연스레 퀴어 소설로 이어졌어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되고 무릎 꿇게 된다는 아마추어들의 퀴어 소설 클리셰가 마음에 들었어요. 읽었던 글들은 대부분 비슷해요. 마음이 걸레짝 되면서도 영원히 순종적일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항상 존재했고 그건 내 글도 다르지 않단 걸 알아요. 내 취향은 그런 쪽으로만 굳어갔고 이제는 깨부수는 것도 불가능해요. 영영 틀에 박힌 클리셰가 존재하는 글을 쓰겠지요.

퀴어 소설을 자주 읽으면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는 나름의 목표가 생겼어요. 현실에선 여전히 차별받는 동성애자들이 내 글 속에서만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그런 게 당연한 것처럼 굴면 언젠가는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아까도 말했듯 실은 사랑조차 해본 적 없으면서 뻔뻔하게도요. 연애를 책으로 배우면 안 된다고 많이들 우스갯소리로 내뱉지만 실은 어려운 일이란 걸 알는지요. 사랑은 가끔 호구 같고 자주 미쳐있다는 게 글로 배운 연애예요. 이런 내가 글을 써도 되는 걸까요? 이미 자신감은 동났고 그나마도 글을 놓지 않는 건 의무감 때문이에요 꿈을 잃고 미아가 되기는 싫으니.

실은 퀴어 소설을 자주 읽어 그것밖에 쓸 줄 모른다, 는 말을 제법 잘 짜 맞춘 목표라고 생각해요. 사랑이란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글을 쓰면서 어떻게 소외된 모든 이들을 위해 글을 쓰겠나요. 사랑은 연애의 형태로만 존재하진 않지만 내가 쓸 줄 아는 건 연애의 형태로 된 사랑뿐인걸요. 이것 외에도 모순은 존재해요. 투박함으로 치부된 아마추어의 글은 출판이 목적이 아니므로 빈번하게 수위 높은 욕설이 사용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멋지다고 생각했던 때가 존재한다는 점. 병X, 씨X 등의 욕설이 아무렇지 않게 글에 섞이고 투박하지만 매력 있는 문체로 포장하면 나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동경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작년엔 글 속에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비속어를 자꾸만 넣었고 최근엔 저급해 보여 자제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게 멋져 보일 때가 있어요. 이제야 깨달았어요 이런 건 누군가를 위한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은연중에 퍼뜨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결국 남은 건 없지요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글을 쓰던 거예요.

 

나는 한 번도 쓴 글을 홀로 썩힌 적 없어요. 플랫폼이 어디든, 봐주는 사람이 있든 꿋꿋이 글을 올렸어요. 비록 이웃 0명 블로그에 서로 이웃 공개로 글을 올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선택할 수 있잖아요 내 글을 읽을지 읽지 않을지. 그래서 좋을 대로 굴었어요. 아까 말했던 취향을 잔뜩 모아 첫 글을 썼고 나머지는 꾸준한 재활용이었어요. 좋아하는 취향이 한정되어 있어서 그걸 자꾸만 돌려썼고 우려먹었고 그러면서 비슷한 글을 찍어내고 있단 자각도 없었고. 구애받지 않고 쓰는 글은 문장이 이어지는 데 걸리는 장애물이 없어요. 행복했어요,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요즘은 너무 높은 벽에 부딪힌 것 같아요. 넘지 못하고 주춤거리기만 벌써 이 년이 흐르고 있어요. 꿋꿋이 투박한 글을 좋아하고 그렇게 쓰려 해요. 자꾸만 조사를 빼먹는 것도 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쓰는 것도 문학에서만 가능한 표현을 끼워 넣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그런 것들을 남용해 글을 쓰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내 글이 감시당한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어요. 세상에 꺼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글의 모서리를 다듬게 돼요. 투박한 글을 동경하면서 써낼 줄 모르고, 매끈한 글엔 면역력이 없어 자꾸만 삭제하는 이 무한의 고리를 빙빙 돌고 있어요. 슬슬 멀미를 할 것 같지요.

 

내 능력은 너무 궁핍합니다. 그걸 잘 알고 있어요. 좁고 얕은 실력으로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언젠가는 대박 터질 거라며 생각하는 꼴이 추해요. 성장하려 발버둥 치지만 성장은커녕 퇴보하니 포기하게 됐어요. 떳떳하지 못한 글을 업로드하고 난 후에는 꼭 글을 정당화시켜요. 이를테면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런 소재를 사용해야만 했던 이유, 매번 비슷한 글만 내놓는 이유 같은 것들요.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요. 눈을 막고 귀를 닫으려 들면 영영 성장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부여하고 싶어요 떳떳하지 못한 글을 위해 비겁한 변명의 글을 바치면서.

 

올리기 직전의 글은 가장 아름답지만, 세상에 내놓는 순간 급속도로 닳아서 바닥까지 처박혀요. 내내 그런 마음으로 글을 올렸어요. 간직하던 글이 빠져나가며 비어버린 마음에선 우울과 자책과 자괴감이 입주하기 시작하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지요. 세상 앞에 까발려진 부끄러운 나의 글이 한동안 수면 위를 떠다니고, 그렇다면 나는 글 쓰는 게 싫은 걸까요. 이 지겨운 애증의 관계.

분명 이 글을 올린 뒤에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매일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할 테지요. 그렇지만 내 글이 못났다고 자책하면서도 놓지 못할 거예요 죽지 않는 한. 세상 앞에 까발려질 나의 부끄러운 글에게 인사합니다. 어쩌면 나는 이 글을 다시는 찾지 않을 테니까요.

카임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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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낙

    안녕하세요. 항상 카임님의 소설들을 읽으며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어떻게 이런 글을 쓸까 하고 궁금했는데 이렇게 수필 게시판에서 카임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소설을 쓸 때마다 매번 비슷한 이야기만 써내는 것 같아서 고민이라고 하셨는데, 읽으면서 제게도 있었던 비슷한 시절이 떠올랐어요. 저는 2017년부터 쭉 글틴에서 활동하며 글을 써왔는데요. 아무리 다양한 글을 쓰려고 노력해봐도 결국 글의 기저에 깔린 주제는 하나같이 입시 제도 속에서 느끼는 고통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면서부터 글 쓰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불면과 커피에 대한 은유를 시에서 그만 사용하고 싶고 공부하느라 힘들다는 하소연 말고 다른 내용을 담은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폭넓게 글을 쓰려고 노력해봐도 글이 자꾸만 내가 지금껏 써온 익숙한 주제와 방향으로 흘러갈 때의 자괴감에 많이 공감됐어요. 그렇지만 그런 고민 때문에 카임님께서 너무 힘들어하시지 않았으면 해요. 물론 다양한 이야기를 쓸 줄 아는 것은 좋은 작가의 자질이겠지만 억지로 그것을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저희는 청소년이잖아요. 아직 해보지 못한 경험, 느끼지 못한 감정, 해보지 못한 생각이 많으니까요. 저희는 앞으로 더 많이 성장하게 될 텐데, 그러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지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어요. 굳이 이전과 다른 주제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요. 꽂히는 주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 가지 이야기를 자꾸자꾸 쓰다 보면 그 주제를 더 깊이 다각도에서 탐구하게 될 테고, 몰입해서 많은 글을 쓰다 보면 글 실력도 발전할테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카임님의 글들을 아주 좋아해요.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 2021-10-06 14:06:33
    소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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