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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보다 금방 뒤집히곤 했지만

  • 작성자 사랑하마
  • 작성일 2021-09-14
  • 조회수 659

배를 보이고 죽는 것들이 있다. 적어도 우리는 아니다. 우린 반드시 엎드린 채 죽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등을 드러내며 숨이 멎는다는 것은 평범한 임종이 아니다. 등줄기가 공중에 훤히 드러난 채로 잠들어버린 이들이 늘어난다 해도 가슴에 묵직하게 놓인 서러움이 풀려야지. 우린 그걸 제대로 된 죽음이라 부른다. 자꾸만 떠오르는 숨들은 파도를 마신 후 주마등에 덮인다. 점점 뭍으로 다가오는 운동화들을 본 적 없겠지만, 그중 한 켤레는 분명 주인의 발보다 치수가 크겠지. 신발끈 매듭은 늘 단단해야 보기 좋아 보이던데. 급하게 떠나는 여행이라서 대충 묶었을 것이다. 혼자 한강 다리에 가서 철로 된 난간의 차가움을 쓸어내고 싶었다. 검게 그을린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모르는 이들의 얼굴을 그려보는 것이다.

이 별을 밟는 것에 죄책감이 들곤 한다. 우리의 운동화도 너무 더러워서. 턱까지 차오르는 뜨겁고 싸한 기운을 이겨내려고 자기 전 약 봉투를 뜯을 때마다 나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는 건 너무 짧아 한정판 상품을 대량 구매하는 것처럼. 한 번이라도 더 숨 쉬는 것을 의식해봐야지.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어렵사리 세상을 떠나 다른 별로 옮겨 간 이들을 떠올린다. 약의 둥근 모서리가 손바닥의 손금을 타고 구를 때. 너무 쉽게 떨어지는 몸들을 생각하면 자꾸 우리가 떠오른다. 수면등을 키고 얇은 이불을 덮어도 나의 입속에 털어놓았던 모진 말들의 몸집이 커져 숨통이 막히게 된다. 병든 사람들의 신음이 위 속에 녹을 때까지. 부작용이 없길 소망하는 기도를 중얼거린다. 부작용, 배를 감싸 쥐다가 밤을 지새우고. 간혹 열린 베란다 밖으로 풀벌레 소리가 별 알갱이들처럼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아파하고, 아파도 되는지 고민하게 하는 것. 높은 다리 주변에는 잡초가 많다. 홀로 남은 사람들은 나방의 날갯짓 소리에도 나처럼 복통을 느꼈을 것이다. 야밤에 서성이던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소화제 몇 알과 사람의 목소리였다.

은은한 새벽달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순간, 네가 있는 메신저 방에 알림이 뜬다. '다들 자는 거야?' 친한 언니에게서 온 메시지. 지금은 새벽 다섯 시잖아. 나는 피식 웃음을 낸다. 그런데 여름엔 이른 다섯 시에도 해가 뜨긴 하는구나. 그렇게 낮이 오면 우리는 늦잠에 들고 한층 느린 꿈을 꾼다. 나의 잠버릇은 좀 고약한 편인데 주변의 이불을 끌어모았다가 다시 풀어헤치고 완전히 두 손발 벌리며 잔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낮에 일어나 볶음밥을 한다. 약 먹은 빈속에 배고프면 잠이 안 오지. 식사를 마친 후 싱크대에 그릇을 넣고 물을 받아둔다. 지금 나는 그럭저럭 살 만하다, 너도 그렇니. 글을 쓰면 입술을 닫고 있는 근육이 이완되는 것처럼 뭐든지 편히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너도 오늘 새벽에 깨어있었지. 널 만나면 나의 걱정이 솟는다. 과연 우리 모습을 이 용지에 담아낼 수 있을까. 내가 너에게 손을 제대로 뻗는 중일까. 최대한 오랫동안 숨결을 지어낼 수 있길 바라며 내게 있어, 애원하듯이 적어 내린 극복 서사는 질리지 않는다. 몇 번이고 이야기해야 그 일이 정말 생길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며칠 전 하늘에 잿빛이 드문드문 묻었던 날, 네게도 기억이 날지는 모르겠다. “나의 정신을 건드리는 약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 그런 약을 먹게 된다면 나 자신을 잃을 것 같아.” 라고. 넌 카페 입구 유리 벽에 흐르는 물방울을 보며 말했고. 나는 녹차라테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당뇨병 환자도, 갑상선암 환자도, 뭐 가볍게는 감기 환자도 필요한 약이 있어. 정신질환도 질환이야. 약을 먹는 것은 얼마나 아픈지에 따라 필수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빗소리에 맞추어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지만 낫길 바라며 약을 꾸준히 먹는 건 분명한 네 의지야. 그 결정이 널 잡아먹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정신과에 다니면서 약을 지어 먹는 사람들은 오히려 건강하게 살 채비가 되어있다고. 너는 그때 살짝 웃지 않았나. 아니 내가 웃었을지도 모른다.

새벽 냄새가 달구어지면 바로 낮의 하얀 공기가 된다. 카페에 있던 우리의 그 날은 비가 그치질 않았지만, 오늘 드디어 베란다 후크에 걸어놓았던 모빌에서 햇빛이 반사되었다. 빛은 여려서 자주 쪼개졌다. 속으로 가장 아끼는 사람과 같이 죽기로 했던 다짐이 있었는데 그것도 곧 부서질 것 같았다. 가시광선이 잘 드는 곳으로 모빌을 옮기기 위해, 후크를 살짝 밀어낸다. 흩어지는 무지개 파편과 무릎 아래에서 넘실대는 소리, 시선을 내리니 손가락만 한 매미가 얇은 다리를 방충망 사이에 끼워놓은 것이다. 나는 방충망에 딱밤을 날린다. 매미는 시끄러운 목소리를 한 보따리 하고 달아나버렸다. 생각해보면 저 매미는 참 질긴 생을 매고 있다. 나는 주방으로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연다. 찬 기운을 만끽하다가 정신을 차리며 사이다를 들고 거실로 나오는 길에, 약 봉투를 본다. 앞으로도 매일매일 몇 년을 삼킬 예정이지만, 지겹도록 만나는 약물의 이름들. 아빌리파이, 쎄로켈. ‘우리 치열하게 살아온 게 맞는 거지.’ 나는 핸드폰을 켜서 그 구절을 절반 정도 쳤다가 다시 지운다. 머그컵 안에 사이다의 거품이 서서히 오르다가 푹 꺼진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 수 있을까. 사실은 나 그냥 사는 게 좋은 것 같아. 물론 그 말은 곤충들처럼 금방 뒤집히곤 했지만. 거기서 발버둥 하며 되돌아오는 거지.

집 주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행사를 열면 달려가는 일, 새로운 문자가 오면 또 누구일지 약간의 호기심을 품는 일도 있다. 물론 가슴에 남아있는 관통상이 미칠 듯이 쓰라릴 때도 있다. 그래서 쪼그라드는 자세와 함께 엎드린 채로 죽을 날밖에 안 보이겠지만. 열아홉이 되어도, 고등학교 교복도 입어 본 적 없고 동창은 겨우 두 명밖에 없는 이 협소한 삶에서. 사실 나는 청소년의 여유를 잘 모른다. 물론 어른들도 그렇다. 대학교에 다니는 나와 달리 평범한 고등학생인 너도 어린 마음을 잃어버렸겠지. 약간의 미소조차 우린 잘 모르니. 일단 삶에서 미리 떠나갈 사람들의 명단을 양팔에 한가득 들자. 그걸 삶 속으로 몰래 훔쳐 와야겠다. 너도 그 도둑질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방충망에 붙은 울음을 수거해간 그 매미처럼.

몇 개월이 지나 내가 성인이 되면 너는 그걸 핑계로 내게 더 의지해 줘. 대신 평범하게 죽자. 시시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나는 핸드폰을 한참 붙잡는다. ‘오늘 만날 사람?’ 급히 윗옷을 입고 청바지의 지퍼를 잠근다. 몇 분 후, 두 번 정도의 알림이 울린다. 핸드폰을 한 손에 꽉 쥐고 이어폰을 연결한다. 뉴에이지 음악을 틀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쭉 편 등허리에 너의 등이 맞닿아 있을 테니. 곧잘 뒤집혀야 서로의 배 위에 햇볕이 자주 누울 수 있겠지. 그럼 살 만할 거다.

사랑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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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늦겠지만

버스에 타면 늘 단골 자리가 있다. 교통카드를 찍고 한 계단 올라가서야 탈 수 있는, 기사님의 운전석 바로 뒤 위치한 자리이다. 눈이 오지 않았는데 나는 늘 미끄러질 생각만 했다. 몸을 뒤로 넘어뜨리고 나서야 의자 등받이가 내 뒤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참 다행이지. 버스 문이 피식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바퀴가 굴러갔다. 처음에는 한 발짝 정도 슬슬 나아가다, 본래의 속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버스가 1단지에서 출발했어. 뒤에 있는 아주머니께서 전화하시는데. 그분의 따님일지 반갑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이셨다. 머지않아 나의 핸드폰도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발신자명이 떴으나 눈앞이 희뿌옇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벗고 화면을 내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세희 언니였다. 전화를 받은 후, 정말 간단한 대화였다. 세희 언니는 오늘 낮에도 크리스마스 잘 보냈는지, 오늘 애들과 함께 저녁 먹으려 미리 모여있는데 몇 시까지 올 수 있을지 물었다. 이후로 버스 내 전광판을 지켜보았다. 몇 분씩은 꼭 어긋나있는 시계였다.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고 오른손으로 전원 버튼을 몇 번이고 눌러댔다. 일정하게 바뀌는 시간 속 숫자들에 압박감을 느꼈다. 창가로 서리가 눌어붙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투명해지는 자국을 보았다. 버스는 좌회전해서 여느 대형마트 앞 정류장에 섰다. 그런 식으로 버스에 탄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리고 버스는 계속 왼쪽으로 돌았다. 때로는 덜컹거리고, 때로는 급정차했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거리를 보니 동네 중학교 벽면에 붙여진 메시지들이 눈에 밟혔다. 때마침 버스 바닥 부분에서 히터를 틀어서인지 발목이 따뜻했다. 물론 가슴 한구석도 그리 춥지는 않았다. 어느덧 번화가 쪽으로 회전하는 버스. 나는 멍하니 다시 하얘진 창가를 보았다. 버스용 신호등에 초록빛이 켜지니 금방 목적지였다. 하차하며 카드를 찍었다. 매서운 공기에 눈물이 고였다. 눈이 완전히 없어진 광장은 몹시 차가웠고 메말랐다. 기나긴 바람과 함께하는 성탄절이다. 나는 광장의 트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 트리는 수백의 전등이 달려있었다. 모든 전등의 얼굴은 파랗다가 다시 하얗게 빛을 뿜었다. 인파 속에서도 아는 얼굴이 하나 보였다. 나를 포함한 넷이서 저녁을 먹기로 했던 친구 중 한 명인 서연 언니였다. 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기에. 아마도 이 날씨에 짜증 나지 않았을까. 나는 머쓱하게 언니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언니도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우리는 별말 하지 않았다. 내가 “날씨가 너무 추운데 기다려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면 언니는 “아, 괜찮아, 어차피 우리 온 지도 얼마 안 되어서.”라고 앞장설 뿐이다. 서연 언니는 같은 무리였지만 그렇게 자주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니까, 어색한 게 당연하겠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성탄절 캐롤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각자 대열을 바꾸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황홀한 사람들은 셔터가 터지는 작은 소리에도 웃을 수

  • 사랑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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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한계를 뚫고

노력과 재능 모두 한계가 있다. 나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재능이 없으면 얼마나 초조한지 잘 안다. 이번 주 내내, 몸도 정신도 지쳐있었다. 텅 빈 용지 위에 쓸 수 있는 문장은 없었다. 한 글자도 쓸 수 없어, 숨이 턱턱 막혀와서 가만히 엎드렸다. 팔뚝에 눈물을 다 묻혔다. 종이 한 장을 꺼내 간단한 그림을 그렸는데 자꾸 입술이 말랐다. 그림도 그릴 수 없고, 글도 쓸 수 없는 이 무력함에 빠져들었다. 나는 입술을 뜯었다. 뜯은 딱지가 으깨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결과물이 없어도 과연 상관없을까. 다른 농도의 의견들이 머릿속에서 섞였다. 그러다 드는 생각, 나 정말 노력하고 있나. 과연 재능이 있을까. 어느 분야에서든 한계를 마주한다는 것에 너무 미숙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넓은 도화지의 맛을 처음 알았다. 그 텅 빈 바닥은 나에게 점을 찍어보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연필을 잡고 몇 시간 동안 그린 작품이 있었다. 물론 그전에 무언가를 제대로 그려본 적은 없었다. 비뚤게 튀어나온 선들을 겨우 덧칠했던, 크기도 손가락만 한 그림은 정말 허접했다. 마음에는 이미 그림을 향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이후로 새벽 6시에 기상했다. 학교 가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버릇이 되었다. 좋은 습관도 아니고 조금 까다로운 버릇이었다. 잠이 많아서 학교와 학원의 쉬는 시간에 선잠을 자야 했으나. 그것도 거부했다. 틈이 날 때마다 색연필을 들었다. 가방 안을 주섬거리다 한 뼘짜리 스케치북을 꺼내고. 꾸벅꾸벅 졸며 선을 그었다. 몸이 약해져서 링거를 자주 맞았는데. 일단 한 손도 못 쓰고, 입에서는 마늘 향과 비슷한 약 냄새가 났다. 오른손잡이답게 링거를 맞을 땐 항상 왼팔을 들이밀었다. 왼팔 중앙부의 혈관을 못 찾는다면 손, 혹은 팔목이라도 맞아야 했다. 오른손으로 그림의 구도를 짜며 알사탕을 깨물던 나는 희열을 느꼈다. 그림을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때는 몰랐다. 나는 말주변이 없었다. 거절 표현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눈초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걸로 나를 여러 방식으로 찢어버릴 것 같았다. 체육 시간에는 짝이 없었다. 짝이 생기더라도 그 애는 어설프게 3인조 팀을 만들거나, 몇 번 릴레이를 하다 어딘가로 달아나는 것이다. 나는 반에서 며칠 결석을 하더라도 모를 아이였다. 그렇지만 생판 모르는 애들도 내 그림만 보면 늘 기대 이상의 칭찬을 해주었다. 예고를 목표로 하며 입시를 하던 친구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나를 잘 알았다. 교내 그림대회에 세 번 나가서, 두 번 1등을 거머쥐고 왔다. 체육대회 현수막을 그릴 땐 언제나 내가 있었다. 아이들이 그림을 보며 숙덕일 때, 전시된 그림을 비교하는 내용이 다수였지만 그곳에서도 실력으로 밀린 기억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미술 관련 진로를 찾아보라며 권유하셨고. 드디어 맨몸으로 뛰어든 도화지에서 성공적인 잠수를 해냈다. 더 깊게 잠수할 의지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나가며 입시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나는 내 그림을 선생님

  • 사랑하마
  • 2021-08-06
하얀 얼굴 그리기

커튼이 바람에 밀려 창문 옆 책상을 삼켜버릴 때가 있었다. 자리 주인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몇 년 뒤에도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의 모서리는 둥글어졌다. 그렇다고 완벽한 원형의 모습은 아니었다. 곡선 끝에는 각각 다른 직선이 있어 우리가 흔히 엎드리던 책상의 모양이 되었다. 언덕을 네 번 넘으면 올해의 사진첩을 묻어두었던 곳에 도착할 것이었다. 우리 발에 묻은 먼지가 나무의 무늬를 따라 빙빙 돌았다. 세 번째 언덕을 걷던 나는 너에게 물었다. 사진을 보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도 그러기로 했다. 돌아온 우리는 맨손으로 책상에 뚫린 구멍을 더 넓혔다. 그 안에는 사진첩이 있었다. 사진마다 글이 적혀있는데 눈을 찌푸려도 보이질 않아서 읽는 것을 관뒀다. 숫자가 드문드문 보였다. 분명 날짜일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자고. 모든 사진의 너머로 나무의 핏줄이 비쳤다. 책상의 가공된 부분은 반들거리고 볼록했다. 팔꿈치를 사진첩 곁에 두려고 움직이며 급여된 우유곽을 쳤다. 진한 냄새가 나는 방울들이 책상 모서리에 매달렸다. 나는 우유를 실수로 흘릴 때마다, 그 책상에 무슨 계절이 왔다고 불러야 하는지 통 알 길이 없었다. 우유 방울의 늘어나는 팔을 보면 고드름이 자꾸 떠올라 겨울이라 불렀고, 찝찝한 기운이 흐르면 여름이라 불렀다. 너는 사진첩을 보느라 흘린 우유를 늦게서야 보았다. 물수건을 꺼내 대강 얼룩을 닦아내는 네 뒤에서 나는 적당한 날씨의 계절을 그리워했다. 목련이 깔끔한 꽃잎을 내밀던 봄, 비둘기가 새털구름을 뚫기 위해 높이 날아올랐던 가을. 그러니까 언제나 하얀 얼굴을 했다. 다들 마스크를 쓰지만. 우리는 십 년 전부터 늘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지금 비린내가 나는 책상 앞, 그리고 네 곁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포갰다. 너를 잘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나는 웅얼거렸다. 자라며 잃고 얻은 것이 많아서. 네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만난 적이 없으니까. 너도 나의 옷자락 대신 팔뚝에 있는 살을 잡아당기지 않을까. 옷을 벗고 도망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서로의 살점을 꼭 붙들어놓았다. 이제 방과 후 교실에서 커튼만 일렁이는 것이다. 보드라운 귀 안팎에는 아무것도 매달리지 않았다. 다만 천이 스치는 소리가 뒷등을 따라 움직였다. 막연히 결핍만을 생각했던 시절에도, 평범했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여덟 살의 나는 좀 더 깔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골목길 사이를 뛰어다니다, 뒤에서 늦게 따라오시는 할머니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 골목에는 공구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가게 주위에는 높은 턱이 길쭉하게 있었고 이를 살살 넘었다. 내리막길을 가다 보면 카네이션 서넛이 어느 텃밭에 자라있었다. 철로 된 울타리 너머 자리를 텄기에 그것을 직접 따올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처럼 자랄 수 없었지만, 나를 꽃처럼 바라보던 아이가 있었다. 권호는 몸집이 조금 컸다. 행동도 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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