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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1

  • 작성자 가고일
  • 작성일 2021-10-21
  • 조회수 1,597

……

당신은 이곳에서

어떤 미신적 기념물의 흔적조차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도덕과 언어는

극히 단순한 형태로 축소되었다,

마침내!

아르튀르 랭보, 「도시Ville」,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

 

 

가끔 내 이름 한가운데 박힌 예,가 미리 예豫가 아닌 예외例外의 예例가 아닐까 생각한다. 본보기 예例, 바깥 외外. 본보기의 바깥에 있다. 이 한 문장으로 살며 나는 오래 앓았다. 예외란 것이 어떨 때는 인간 치외법권이 된 양 아주 편리하지만, 실상 그런 이벤트가 부재한 대부분의 일상에선 아주 외롬뿐인 일이다. 지루함뿐인 일이다. 중학교 때까지 열심히 살았고 꽤 잘 살았다고 자부한다. 기껏해야 기이한 한국 셈법으로 십육 년 산 이들이 잘살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 묻는 이들, 당신들은 예외의 범주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는 원죄라 함은 발목 덜미를 갈고리처럼 움켜쥔 예외의 범주를 뿌리치지 못한 일. 원래 죄라는 게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도 쉬이 녹지는 않는다는 걸 몰랐다.

 

나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20021022 - 나는 내 생년월일의 숫자를 꽤 좋아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젊은 부부의 장녀로 태어나 네 살 때 한글을 떼고 영특하단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학생회장의 전형으로 대표되는 쾌활하고 열정적인 학생. 공부도 곧잘하고, 반나절 동안의 축제 사회를 보는데도 대본 없이 무대 위를 올랐던 아이. 수요일마다 교복 검사를 나가야 하는데 막상 본인이 교복을 제대로 입고 다닌 날이 손에 꼽는 아이. 그럼에도 제집처럼 드나들던 교무실에 갈 때마다 선생님들이 이름 석 자 대신 딸로 부르는 아이. 나이 너덧이 많은 남자친구가 있던 친구가 임신했을 때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던 아이. - 멍청한 계집애, 할 수 있던 것도 없으면서 잘도 그 연락을 받았다. 술 취한 아빠가 빨래 건조대로 자던 딸을 죽도록 팼을 때 그 딸이 집에서 기어 나오며 전화할 수 있는 아이. - 고작 우리 집 계단으로 불러 같이 밤을 새운 게 전부였다. 그런 것들로 간략한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겠다.

 

 

졸업할 때쯤 나는 한국 명문대 진학률로 순위 매긴 고등학교 리스트의, 어쩌면 가장 위에 있는 학교에 합격했다. 또 입학할 때의 면접 점수도 아주 좋아서 기숙사 입소와 동시에 학교의 모든 사람이 나를 알아보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다른 점은 많은 이들에게 미움도 받았다는 것. 하필 그 시기에 거기 모인 특정한 이들에겐 사랑을 표현하는 것보다 미움을 표현하는 게 더 쉬워 보였다는 것. 그릇이 크지 않아 함부로 용서한다는 말은 못 하겠다. 용서는 삶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시를 적기도 했으므로. 그러나 나 그렇게 미워하는 게 더 아팠을 텐데, 나 그렇게 미운 애 아니었는데, 따위의 자기 파괴적인 감상은 자주 찾아온다.

 

 

입학 반년 만에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를 살인자 보듯 보던 칠십 개의 눈알을 기억한다. 축제날 아파서 잠자던 나를 밤늦게 교무실에 불러 너 같은 애는 가둬놓고 뒤지게 패야지 정신을 차린다, 너를 더 볼 바엔 폐암 걸려 몇 년 학교를 쉬고 싶다,던 교사의 목소리는 아직 선명한 이명으로 남아있다. 그 교사와 나를 빼고 아무도 없는, 차가운 공기마저 기울어져 긴장됐던, 철제문으로 굳게 닫힌 교무실에서 점점 빨개지는 눈알로 화를 내는 그 중년 남성을 앞에 두고 나는 정말 뒤지게 맞을까봐 문을 향해 고쳐 앉는 게 고작이었다 . 차라리 때리거나 대놓고 욕을 하지, 170의 키와 여태 쌓았던 은근한 인상 덕분에 차마 대놓고 해코지를 가한 이는 없었으나 나를 학교 모두가 무시하던 열일곱이 고역이었다. 고개만 돌리면 쏟아졌던 뒷말들이 날마다 더 뾰족하게 연마됐다. 교탁 앞에 떨어진 화장품 파우치의 주인을 찾던 사회 교사가 “이런 걸” 갖고 다니는 “업소 아가씨”를 찾는다고 일종의 선언을 하며 교실을 순회할 때 아무말 없이 물끄러미 날 보던 아이들, 내가 식판 들고 급식실에 앉을 때 우르르 몰려와 날 둘러싸고 밥 먹었던 남자 선배들, 날 ‘구경’하러 와서는 위압감 조성을 위해 구태여 내 이름을 물어보던 선배들 - 아니, 알고 찾아온 게 아니던가. 보통 이런 경우는 이름 말해준 후 반대로 선배 이름은 뭐예요? 물어보면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나와 말하던 다른 반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나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친절히 일러줬다던 그 애의 젊은 담임.

 

 

아직 선명하다. 자주 되돌아 보지 않을 뿐이다. 고등학교 삼 년 내내 학교 축제에 나간 일이 없으며,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무관하게 같이 점심 먹을 친구가 없어서 내리 이주 넘게 도서관에서 보낸 점심시간을 기억한다. 하루하루 내가 줄어가던 그 삼십 시간은 아마 계속 그곳에 묶여있을 거고, 그래서 도서관에선 아직도 군내가 난다. 그때 내 옆엔 문자 그대로 아무도 없었다. 잡을 검불 하나 없었다. 돌아갈 집이 없었고, 안길 부모의 품이 없었고, 연락할 철없는 친구 하나가 없었다.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팠다. 객기로, 독기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게 특기였다. 그래서 날 싫어하던 사람들은 더 열 좀 받았을 거고, 그때 찍은 내 사진들에선 표독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며, 열일곱에 사람 눈알 믿으면 나만 병신된다는 진리를 깨우쳤다. 물론 이 발화는 나를 불쌍해하라는 저의가 아니다. 말했잖아, 나는 항상 예외인 사람이라니까.

 

 

‘본보기’인 고등학생은 어떤 태도로 그 시기를 살아낼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내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돌았다. 기간 내에 미리 신청하기만 하면 외박이 가능했던 기숙사 학교의 시스템을 이용해 토요일에 학교 밖을 나가 일요일에 돌아왔다. 매주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며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밤새 삶을 얘기했다. 신학교에 다니다 신은 죽었음을 깨닫고 니체를 공부하던 H대 미학과 대학원생 Y, Y와 함께 신학교에 다니다가 신보다 내가 더 먼저 죽을 것임을 깨닫고 아시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던 W, 추위를 많이 타 맨날 내 롱패딩을 뺏어 입고 제임슨 담긴 플라스크를 홀짝거리며 농업으로 회귀를 주창하던 영국인 M, 영국 미대로 유학 가 M을 만나 결혼한 디자이너 H, I대에서 스토아 철학을 전공한 B, 디지털 노마드의 전형 같던 잘생긴 D, 잘나가던 광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을지로에 ‘핫플’을 차린 G와 C, 파주 출판사에서 일하며 나처럼 주말에만 서울에 왔는데, 술만 취하면 빠른 시일 내로 너가 겪는 것들에 대한 원고를 보내라고 닦달하던 머리숱 많던 J, 한국에서 30대 동성애자 남자로 사는 것에 대해 니가 뭘 아느냐며 나를 붙잡고 울었던 A, 그 외 셀 수 없는 얼굴들.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글틴을 알려준 이도 그때 만난 K 언니였다. 글틴 관련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되바라진 나는 나보다 최소 8살 최대 15살은 많은 그들의 이름을 호칭 없이 불러댔고 그들도 나를 친구로, 적어도 사람으로 대해 주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사람대접받는 12시간을 위해 그렇게 매주 이태원, 을지로를 옮겨 다니며 나는 어른의 구질구질함을 배웠다. 이승훈 시인, 최승자 시인, 박서원 시인, 성기완 시인의 글자를 성경처럼 외웠다. 열일곱 겨울이었다.

 

 

만날 때마다 처음 두어 시간은 유발 하라리와 슬라보예 지젝이 평할 한국의 2018년, 프로이트와 바타유 철학의 공통점 같은 걸 논하며 서로 핏대를 세웠지만 결국 마지막은 종로 경찰서 앞을 무단횡단하며 지긋지긋한 취업, 가엾게 눌어붙은 전 연인, 징그러운 가족 따위를 토로하기 바빴다. 어른도 별다른 게 없었다. 내 앞에서 남자친구에게 둔탁하게 빰을 맞고서도 헤어지지 못한다는 언니와, 자해 상처 숨기려 고양이 발톱탓을 하던 오빠와, 이제니 시인의 말마따나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이었다. 일요일 첫차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며 또다시 버틸 일주일을 아득히 씹어댔다. 한겨울 땀에 절을 때까지 한바탕 울고 온 후에도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뒤집어진 인간은 계속 뒤집혀 살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바라는 구원은 지옥이라는 반증이다, 삶은 아사리판이다, 남들이 아프게 하기 전에 스스로를 해쳐야 덜 아프다, 지금 죽어야 호상이다 따위의 말을 진언처럼 되새겼고 실제 그런 류의 상징이나 구절을 몸에 문신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맨 처음에 말의 여러 국면들을 밑의 여러 국면들로 읽었다
내 밑의 여러 국면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전히 불쌍하다”

- 20181010의 독서 노트 발췌

 

그때쯤 올린 시에 시인이 평한 ‘위악적’이라는 말에 분을 못 이겨 잠 못 드는 밤도 있었다. 당신이 나를 아는가, 고향엔 매년 임신 중인 친구가 있고 자기네들을 로열 패밀리로 여기는 귀족 학교에서 튕겨져 나가 스스로를 죽이면서도 아득바득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나를 아느냔 말이야. - 지금 생각하면 다만 웃긴데, 당연히 시인은 그걸 모를 게 첫 번째 이유고, 실제로 위악적 태도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게 맞았으면서 그거 인정하기 싫다고 애꿎게 화낸 내가 안쓰러운 게 두 번째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매력 없고 원래 뭐든 조금 나빠야 재밌는 게 맞으므로 이어간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나는 열여덟이 되었다. 나 같은 애는 ‘가둬놓고 뒤지게 패야 정신 차린다’는 논제의 조건부는 결국 실현된 셈이었다. 산골에 가둬져 세상과 사람에게 눈 뒤집혀 뒤지기 직전까지 맞았는데 안타깝게도 정신은 못 차린 상태였다. 그 겨울에 입술을 뚫고 와 학교가 뒤집어진 일 - 교칙에 귀 장신구에 대한 조항은 있었지만 다른 부위는 없었기에 그들은 새로운 조항의 창조를 고민해야 했다. 알약을 영양제마냥 먹다가 결국 한 번 크게 탈이 난 일, 암흑을 목전에 두고도 정신 못 차리다 아찔한 사고를 치고 교장교감과 면담한 일, 고향 외딴 도로에서 친구가 죽은 일이 있었고, 그렇게 울적한 짐들을 진 상태로 하여튼 나는 열여덟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쉽게 살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쉽게 죽었다 

 

반이 바뀌고 담임이 바뀌면서 stage 2, ready?를 준비하던 전투적인 내게 세상은 잠시 쉬어갈 시간을 주었다. 외려 새 담임은 나랑 한 번 부딪히기라도 하면 내가 터져버려서 꼭 자기도 죽게 할 시한폭탄인 양 날 대해주었다. 나도 담임 과목이 무려 윤리인데 문학적 시발을 남발하는 일은 줄여야지, 생각하며 기쁘게 화답했다. 재능이 없어서 고민이라는 내게 세상을 보는 네 눈이 재능이라고 말해주며 달래준 이이기도 하다. 학교 안 예외의 시작이었고, 나는 새로 전학 온 것마냥 적응하기 바빴지만 열일곱 겨울을 버틴 내게 유순한 일상으로의 적응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너무 쉬워서 문제였는지 나는 사주가 역마살로 가득 찬 사람처럼 쉬는 날마다 혼자 여행을 다녔다. 여수, 부산 같은 국내부터 홍콩 같은 해외까지 열기를 옮기기 바빴다. 홍콩 가기 직전 공항에서 입술 피어싱을 뺐는데 여행 끝까지 다 아물지 않았다. 구멍 뚫린 입술을 가지고 왕가위를 생각하며 잘도 다녔다. 란콰이펑 숙소 근처에서 구경 다니던 나를 붙잡고 같이 마약 하자고 했다가 싫다고 하니까 갑자기 나치즘을 욕했던 벨기에 남자, 못 들어가니 더 궁금해져 기웃거리려고 가까이 가니 카지노 문 열어주던 흑인 보안 요원, 마카오로 가는 페리에서 옆 중국인 할머니랑 나눠 먹은 월병. 양의 방향이든 음의 방향이든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당연한 게 아니었던 경험 많이 하고 자랐다.

 

여수에서 글자들이 머리를 때리고 폰은 꺼져서 잊지 않으려 팔에 썼던 구절들

 

학교 안에서도 나는 나름 유망한 심리학 동아리의 부장과 교내 유일한 페미니즘&LGBTQ 동아리의 차장을 맡아서 후배들에게 따스한 선배가 되기 위해 애썼다. - 실상은 애들이 고민 상담하면 다 듣고 오래 생각하다가 결국 “어우 얘 그래도 뭐 어쩌겠니.. 차악의 선택 속에서 잘살아 보자 나도 그걸 못 해서 딱히 조언할 게 없다.”하는 게 끝이었다. 여름 방학 직전 만든 그림과 조형물로 학교 한가운데에서 개인 전시를 열고, 안티테제의 뒷면을 보겠다는 객기로 한국 저항 문학에 대한 소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때 읽은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이 다음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시집이 아닌 책을 많이 읽은 시기였는데, 삼국지에 빠졌고, 한국 근대 소설에 빠졌으며, 서구권이 아닌 국가의 문학을 사랑했다. 윤리 수업 시간에 생기부 기재를 위한 수행 평가가 발표였던 적이 있는데 남들 5분하고 끝내는 거, 수업 시간 꽉 채운 50분을 열변으로 다 써서 시험 기간인데 진도 더 늦어졌다는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신문 곰내 나는 노인들 앞에서 ‘생물 공멸의 사례와 타나토스적 의의’등의 개소리를 담은 발표와 틈틈이 쓴 글로 용돈 벌이를 하고 또 청소년과 비거니즘에 대한 영화를 찍으며 방학을 보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때 입김 센 누구네 엄마가 다른 엄마들에게 너를 미친년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더라, 너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누구누구가 너가 어떠어떠한 일을 할 정도로 정상 아닌 애라고 해서 무서워서 못 다가왔다 등의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냥 사람 좋게 웃는 수밖에 없었는데 웃음의 반은 딱히 할 말도 없고, 떠오르는 감정도 없어서였으며 나머지 반은 대충 맞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기숙사 골방에서 잠들기 전 이 페이지를 펼쳐 읽으며 조금씩 울다 자는 게 버릇이었다

 

나름 안정기인 열여덟 두 번째 학기에 대학에 대한 압박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래퍼 이센스와 리짓군즈 콘서트를 다니며 시간을 잘 배웅했고, 열아홉엔 역병과 수험생의 삶이 동시에 들이닥쳐 낭만이나 예외를 논할 일이 별로 없었다. 열일곱에 사고치고 면담했던 교감이 새 담임이 되었다. 학생들을 아가,하고 부르는 아저씨 선생님이었는데, 다른 애들이 보라색 옷만 입고와도 다른 이들의 집중을 흐트러뜨린다며 훈계하신 분이 내가 떡하니 코를 뚫고 와도 보석같이 예쁘다고 하시며 날 무사히 졸업시키기 위해 열심이신 분이었다. 졸업 사진 찍는 날 내가 교복 안 맞는데 츄리닝 입으면 안 돼요? 해도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지시는 분이었다. 낭만에 가까운 일 중 기억나는 건 열아홉 초봄에 첫사랑 때문에 오랜만에 아주 많이 운 일, 그래서 그 다음 날 몸살이 난 일. 시발, 내가 사랑 하나는 진짜 잘하는데, 내 연애 편지 받을 사람이 나조차도 부러운데, 넌 평생 나보다 더 널 좋아할 사람 못 찾아 병신아,를 중얼거리며 박상영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첫사랑 테마송을 윤지영 - 언젠가 너와 나,로 정했고, 그때의 유일한 문제점은 욕설이 반이었던 그 중얼거림을 구태여 내가 직접 당사자에게 전한 일이었고, 구겨졌고, 찌질했고, 구질구질했고, 잠시 종로 경찰서 앞에서 나눴던 온갖 서울 사랑 얘기를 떠올리며 난 아직 어려서 괜찮다고 끝까지 박상영 소설 주인공처럼 합리화했다. 괜찮다고 일러주는 이가 없어서 익숙한 일이었다.

 

첫사랑에게 이런 걸 보내는 사람의 사랑은 역시 좀 어려운가

 

겨우 정신 차리니 계절이 바뀌었고 타지에서 혼자 살았던 여름 방학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내 외롬을 먹어줬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가을, 겨울이 지나 난 스물이 되었다. 언제나처럼 지각한 졸업식에선 사진 촬영도 이미 다 끝나 담임 선생님이 반 아이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으며 너는 어떠어떠한 모습이 좋고 앞으로 어떠어떠하게 살고, 축복에 가까운 인사를 눈물바다 속에서 나누고 있었다. 슬그머니 내 차례를 기다렸는데, 막상 내 앞에 선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한참을 있다가 너의 삶을 살아, 너의 삶을, 한 게 전부였다. 옆에 있던 친구들은 배를 잡고 웃었고 나는 그 말이 묘하게 아파서 졸업식 뒤풀이에서 조용히 그 말을 안주로 소주만 삼켰다. 이후로는 피 토할 정도로 술 마시다 보니 - 비유적 표현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할 일이 생겼고, 딱 술을 끊고 3개월만에 12키로가 몸에서 빠져 나갔으며, 스물의 반이 지나가 있었다. 그렇게 오늘이 되었다.

 

 

참회는 단 한 줄도 없는 참회록이 되어버린 이 글은 아무도 요청한 적 없지만 스물 생일, 이 공간의 졸업을 하루 앞두고 남기는 선물이다. 세상이 세상 같지 않아 무서울 때 글자들이 나 대신 버텨준 밤이 많았다. 나조차 내가 아닐 때 나의 글자가 대신 살아준 날이 많았다. 몇몇 날에 쓴 일기는 남의 일기처럼 시려서 아직 펴 읽지를 못한다. 다만 오랜만에 돌아본 발자국이 기억보다 단단해서 고마웠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있다.

많이 울던 그 애를 어리석은 애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울상을 간직해준 글자들에게 감사를 전함과 동시에,

앞으로도 신세 좀 지겠다.

 

 

가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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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너무 야릇했었지

여름이 오면 나는 사람이 더 더 더 싫어지고, 뭉툭한 손톱으로 긁어모은 욕심과 희망으로 체하느라 허기를 잃는다. 다른 사람이랑 그림자조차 닿기 싫은 나는 간신히 여름을 버틴다. 그럼에도 사랑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랑을 죽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네가 사람 때문에 울지 않고, 아무리 날이 덥더라도 내가 그렇게 미운 애는 아니라는 걸 알아보면 좋겠다. ⠀ “준다고 바다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사람이 마시기는 한 사발의 물. 준다는 것도 허황하고 가지거니 함도 철없는 일. 바다와 한 잔의 물. 그사이에 놓인 골짜기와 눈물과 땀과 피. 그것을 셈할 줄 모르는 데 잘못이 있었다.” - 광장, 최인훈 ⠀ 근데 나는 너 바다 주고 싶어. 너 질긴 울음 입에 물고 있을 때 같이 나눠 물고 싶어. 너 더워서 헛구역질할 때 옆에서 막걸리 마시면서 등 두들겨 주고 싶어. 너의 불운함에 사랑을 걸어볼게. 있잖아, 넌 나한테 속지 마. 영악한 눈빛과 울렁이는 글자 몇 자에 속지 마. 너까지 속으면 난 광대가 된다. 넌 꼭 날 이겨내라. ⠀ 겨울엔 세상이 건조한 만큼의 물기를 대신 머금고 살아간다 믿었는데, 이렇게 눅눅한 여름엔 그따위 조악한 변명도 할 수가 없다. 젊음은 새 신발을 신고도 피해가지 못하는 어떤 진창이다. 땀냄새 가득한 수조에 갇힌 비명이고, 덜 익은 무화과를 무식하게 먹다 입가에 붉게 번지는 알러지다. 해열제도 안 듣는 알러지. ⠀ 이제 나는 끊어진 손목으로 했다는 시인들의 수음도 궁금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누워 너의 땀방울을 센다. 하나, 둘, 엉망인 끝말잇기만 쓰인 편지는 전부 무더위 탓으로 돌리자. 봄날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던 시인의 말, 그거 나는 여태 모르는 일이고 다만 여름엔 눅진한 마음이 제철이다. 너 하품할 때 손가락 쑥 집어넣고싶었다. 그걸 어디선 애정이라고 부른다며. 별, 세상엔 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 우리는 그중에서 일등하자.   꺼이꺼이 울고 싶은데 비가 안 온다. 올해는 장마가 지각한다고 했던가, 그럼 그동안 나는 다시 술을 마셔야하나? 왜 너는 아침이고 밤이고 항상 취해있느냐고 물었던 친구들의 핀잔과, 면세점에서 산 양주와 소주를 병째 마시고 기억을 잃은 와중에도 고스톱에서 딴 구천원과, 새벽에 목 말라 깨서 잠결에 들이킨 페트병에 물대신 들어있던 담금주와, 밤산책마다 빨대 꽂아 마신 바카디와, 주사가 되어 버린 영어와 중국어 진언들, 눈이 오던 날 술기운에 덥다고 버스 정류장에 벗어서 버려버린 아끼던 티셔츠, 이런 것들. 돌아보면 죄다 병리적 증상들이다. 나아졌다고 믿는다. ⠀ 신앙이 있는 사람과 진득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싶다. 신앙을 옮겨주세요.   나는 나를 제외한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이게 내 병약인가? 그렇다면 나는 왜 징그럽게 뒤집어진 인간으로 살았지. 태도의 기조가 변환하는 그 순간을 사람으로 못 박고 싶진 않다. 유한함에 의지하고 싶지 않다. 이게 내 강박인가? 나는 왜 새가 아닌데 폐곡선으로 살아가는 기분이지.

  • 가고일
  •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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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고일

    사진은 4년간 모은 빽빽한 클라우드를 오랜만에 훑어보며 단락에 해당하는 시기의 사진으로 골라 올렸습니다. 이거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어 언젠간 지울 거 같지만 일단은 졸업작을 올린 기분이라 후련섭섭하네요. 글을 재단해 저장하고 기억하는 나쁜 습관이 여실히 발현되었는데요, 저야 시 전문을 옮겨 저장했지만 여기에 있는 건 너무 단편적이라서요, 저 소중한 파편들은 이승훈 - 당신의 방,에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고맙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 2021-10-22 16:35:09
    가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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