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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신드롬즈의 노래를 좋아하다 번아웃이 온 사건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2-09-05
  • 조회수 1,162

아무래도 이건 좀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을 3주 앞두고 별안간 번아웃이 닥친 건,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1

번아웃은 꼭 우울처럼 찾아왔다. 내 하루에 밑바탕처럼 은은히 깔려있다가도 어느 날엔 덩치를 불려 일상을 통째로 잡아먹는, 아주 예의가 없는 놈이었다. 언제쯤 나를 괴롭게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매일 두려움에 떨도록 했다.

처음 번아웃 증세가 나타난 건 기말고사가 3주 하고도 조금 더 남았을 무렵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무언가 나를 꾸욱 짓누르고 있단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잠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맞고만 있었다.

열기에 익은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침이니 머리를 깨울 필요가 있다. 태블릿을 연결해 노래를 틀고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가 그 위로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무언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단순히 입버릇처럼 늘어놓던 하기 싫다의 개념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무작정 거실로 뛰쳐나왔다.

거실에서 엄마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하기 싫다, 못 하겠다, 말을 하며 울었고 속으로는 이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험은 고작 3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엄마는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말했다. 어차피 안 되는 공부를 붙들고 있지 말고 차라리 잠을 더 자라고 말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 대신 책상으로 향했다. 공부는 여전히 되지 않았다.

 

2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수학 문제는 풀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수학 문제를 앞에 둔 채 울기만 했다. 비참하고 초라한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았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순간을 노래로 기억하는 내가 그 당시 무슨 노래를 듣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노래 역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그때 내 머리는 백지처럼 하얬다.

머리를 쓸 수 없으면 강의라도 듣자고 생각했다. 머리 굴릴 일 없이 불러주는 설명과 눈에 보이는 판서를 필기하기만 하면 되는 가성비 좋은 공부. 윤리 강의을 틀어놓고 노트를 폈다.

정확히 5초간 들었다. 음성을 듣자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피로해졌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어떤 기관을 거치지 않고 아주 거대한 공처럼 몸을 부풀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문장, 못 하겠다.

처음으로 엄마의 말을 들었다. 이럴 시간에 잠이라도 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

 

3

공부도 할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는 시험 기간의 청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시 엄마를 찾아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 말대로 잠을 자려고 했는데 잠조차도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잠이 안 와요. 계속 눈물만 나와요. 공부도 못 하겠어요.

엄마는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건 옆에서 내 사정을 함께 듣던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울었고 둘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내가 원했던 말은 공부 같은 거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남의 입을 통해서라도 듣고 싶었다. 공부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돼. 네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자. 잠을 자라는 말 대신에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 오늘 하루는 공부하지 않아도 된단 말 대신 평생토록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 듣고 싶었다.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끝내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 나는 울다 말고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차라리 조금 걸으면 머리가 정리될 것 같기도 했다. 사실은, 비 오는 날의 위험한 차도에 덥석 뛰어들어 영영 사라져버리려는 심산이었다.

 

4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라고 돈을 쥐여주는 엄마를 거절하고 MP3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한 손엔 우산을, 한 손엔 MP3를 쥐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하필 엘리베이터가 늦었다. 아주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아주 하늘까지 치솟아 느릿느릿 돌아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주저앉았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엘리베이터마저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늦게 와서 울었다. 지친 풍경 속에 무기력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힘들어 울었다. 엄마가 밖으로 나와서 토닥여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비상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차라리 그곳이 더 안정감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지쳐있던 상태였으므로 일어선 상태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고, 비상계단의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아무도 오가지 않는 흰 계단을 바라보며 MP3의 전원을 켰다. 마지막으로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루시의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을 들으며 조금 더 비참해졌다.

우울할 때 우울한 노래를 듣는 건 아무짝에도 도움 되지 않는단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우울한 노래를 찾아들었다. 신나는 노래를 들을 기분은 아니었다.

 

5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1층 대신 지하 1층을 누르고 터벅터벅 걸었다. 영영 사라져버릴 거란 다짐을 하고 집을 나섰지만 정작 향하는 곳은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공원이었다. 그곳은 자동차는커녕 오토바이도 다니지 않는다.

무작정 집을 나오긴 했지만, 그다음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방황하며 이리저리 걸었다. 비를 맞는 건 조금 비참하단 생각. 하지만 우산을 들 힘이 없었다. 우산을 쓰지 않고 잠깐 걸었다. 비 오는 날씨에도 놀이터에 나온 어린 애 두 명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때까지도 내 귀에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노래였다. 멜로디가 축 처지는 노래긴 했지만 우울한 노래는 아니었고, 되레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부른 노래였으나 어째서 그게 그토록 슬펐는지 모르겠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하고 노래하는 목소리가 열심이라 슬펐다. 순간으로 사라지고 싶은 때에 언제까지를 노래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비참한 기분은 어째서 이렇게 노래로 기록되는 건지. 듣는 노래에는 순간의 비참함을 흡수하는 기능이 있는 것 같다.

 

6

다시 우산을 쓰고 걷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그곳은 천장이 있고 놓인 물건이 별로 없어 목소리가 잘 울렸다.

죽는 법을 검색하려다 사는 법을 검색했다.

 

7

나는 평소에 상담 센터를 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곳은 퇴근 시간이 명확하고 주말은 운영하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건 전화는 모두 부재중으로 넘겨졌다. 나의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에게 내 사정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받지 않는 전화를 붙들고 나는 조금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청소년 자살 예방 상담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곳은 24시간 언제든지 운영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 곳에 전화해보는 건 처음이라 구글에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고 난 뒤에야 용기를 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보세요, 상담 되나요, 하는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튀어나왔다.

 

8

말하자면 남자와 대화하는 일에 서툴다. 전형적인 여중 여고 학원 안 다님 루트를 타고 살아온지라.

분명 구글에서 본 후기들에선 여자 상담원이 친절하게 상담해주었다고 그랬는데, 나는 남자 상담원이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아무것도 털어놓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전화를 했으니 웅얼웅얼 나의 상황을 털어놨다. 이때까지의 일들부터 오늘 갑작스레 몰아친 무기력함, 동시에 죽기 위해 밖에 나와 있다는 말까지. 상담원은 시간이 많이 없으니 나의 힘든 일 중에서 한 가지만 정해 얘기해보자고 말했다. 나는 학업을 선택했다. 어쩐지 전화기 너머 상담원이 조금 황당해하는 것 같았다. 두서없이 늘어놓았던 그 많고 많은 우울한 일 중에서 고작 학업? 나의 피해망상 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마음에 대해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있지만 할 수 없는 것도, 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하는 것도. 말하자면 공부가 힘들다는 말을 했다. 전형적인 한국 청소년의 사사로운 고민거리. 누구나 겪는데 나만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 말을 하는데 건너편에선 사무적인 문장만 흘러나와 비참하고 부끄러웠다. 내가 별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상담원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더니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했다. 나는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듣기 위해 질문했다.

저 오늘 공부 안 해도 괜찮나요?

상담원은 괜찮다고 말했다. 하루쯤 쉬고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다. 그 말에 순종적으로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다음에도 열심히 할 자신이 없는데 어쩌지.

 

9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냐고 상담원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실 얼른 끊고 싶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내가 허름해지는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나와 대화를 나누던 상담원은 전화를 끊기 직전에 아주 로봇 같은 말투로 정해져 있는 듯한 멘트를 발음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청소년 상담 센터 XXXX였습니다, 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니 조금 더 비참해졌다.

결국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됐잖아.

하고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상담원에게도 들렸는지 모르겠다.

 

10

조금 더 비를 맞으며 아파트 단지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서는 무기력하게 누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으며 그저 휴대폰만 봤다. 유튜브 쇼츠는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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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분은 그날 하루만 지속되진 않았다. 나는 이후로도 계속 무기력에 시달려야 했다.

다만 그날처럼 아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기분은 아니어서 조금 더 힘들었다. 분명 하기 힘든데, 무기력한데, 결국 연필을 들 힘은 있으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상담원이 했던 말처럼 쉬었으니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책임에 대해 나는 계속 고통받았다.

사실은 하루를 쉬니 더 쉬고 싶어져서 영영 그날 같은 하루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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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우울해서 그런 줄 알았다. 원래도 우울했는데 그게 시험 기간이 되니 아주 크게 몸을 불려 나를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가 꼭 그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지독한 무기력을 겪은 후 등교한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이 번아웃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번아웃. 그 단어를 듣자마자 가슴에 콱, 하고 처박혔다. 나는 번아웃이 분명하다.

영어 선생님은 번아웃이 오지 않기 위해 적당한 휴식을 취하고 즐겁게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셨다. 번아웃이 오지 않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설명해주는 선생님한테 나는 묻고 싶었다.

이미 번아웃이 온 사람은 어떡하느냐고.

 

13

나는 무기력하고 우울한데 일상은 평소처럼 흘렀다. 나의 시간과 세상의 시간엔 시차가 존재해서 버거웠다.

국어 시간엔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담임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수업을 하다 중간중간 시험공부를 열심히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원한다면 공부를 하도록 잔소리를 해줄 수도 있으니 교무실에 내려오라고도 했다. 나는 공부라는 말이 너무 진저리가 났다. 가라앉아있던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꼬박꼬박 대답하던 평소와는 달리 대답도 하지 않고 뚱하게 앉아 필기를 받아 적기만 했다. 그때 내 마음은 아주 옹졸해져 글씨마저도 옹졸하게 쓰였다.

 

14

시험 기간엔 점심을 자주 거른다. 그날도 점심을 거르고 교실에 남았다.

홀로 앉아 수학 문제를 풀다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교무실로 향했다.

담임 선생님이 없었다.

 

15

홀로 앉아 수학 문제를 다시 풀다가 또다시 벌떡 일어나 교무실로 향했다.

담임 선생님이 없었다.

 

16

홀로 앉아 수학 문제를 풀다가…

이번에도 없으면 그냥 내려가지 말아야지. 무기력에 침몰 되어 괴로웠던 토요일의 일 같은 것도 나만 알아야지. 수업 시간 내내 뚱했던 태도에 대해서도 나만이 알고 있어야지. 선생님한테 조언을 구하지 말아야지. 실은 위로를 원하는 거면서 잔소리를 원하는 것처럼 교무실에 찾아가지 말아야지.

담임 선생님이 없었다.

담임 선생님한테 영원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게 되었다.

 

17

하필이면 특강이 있어 수업과 보충이 끝난 후에도 학교에 남았다. 석식을 신청하지 않아 중식도 거르고 석식도 거른 배고픈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라지고 싶단 생각은 언제라도 존재했다. 누구보다 신호등을 착실히 지키지만 저 차에 부딪히면 많이 아플까 같은 생각을 했고, 양쪽에 이어폰을 끼고 걸으면서도 좌우를 살펴 길을 건넜다. 그래도 사라지고 싶었다. 신이 나한테 너 죽을래 살래 물으면 죽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살 용기도 죽을 용기도 없는 용기 결핍의 상태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울하게 특강까지 들었다. 집에 가려고 신발을 챙기니 밖이 어두웠다. 이렇게 어두운 날엔 교통사고 정도는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이상하고 무서운 생각을 하며 하교했는데, 글쎄 그 시간엔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다는 정보만을 얻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가 없어졌다. 집 앞 벤치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18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무작정 걸었다. 딱히 목적지를 정해둔 건 아니고 걷고, 걷고, 걷다 보면 어디든 가지겠지 싶어 걸었다. 그러다 보면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도 나올 테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다리도 나올 테고, 하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19

그렇게 도착한 곳이 상담 센터였다.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다니는 곳을 죽을 생각을 하면서 찾아왔다. 퇴근 시간이 정해진 그곳은 이미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긴 채였지만 나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 앞을 조금 서성거리다가 누군가 오면 괜히 가방을 뒤지는 척을 했다.

 

20

돌아가는 대신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이 없어 부끄럽지 않았다. 반대편의 병원 건물에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죽고 싶은 사람 처음 보나… 하는 생각을 했다.

 

21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니 아빠와 함께 데리러 왔다.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말했는데 뭘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굳이 음료수를 사서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 음료수는 마시지 않았다.

며칠째 냉장고에 방치되어 우유와 시럽이 분리되었다.

 

22

그래도 공부는 계속된다. 처음 무기력해졌을 땐 시험까지 3주가 남았지만, 날이 갈수록 디데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무렵엔 나름대로 강박을 없애려고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쓰던 열품타(경쟁식의 스톱워치 어플이다)도 삭제했고 틈만 나면 영어 지문을 읽어대는 일도 관두었다. 마음먹은 시간에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하려고 했다.

열품타를 지우고 나니 자꾸만 휴대폰으로 딴짓을 하게 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어차피 열품타가 있어도 평소엔 하지도 않던 갤러리 구경이나 했었으니 결과는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를 다독였다.

 

23

나름대로 잘 해보려고 할 때마다 무기력해졌다. 나를 찾아온 옆 반 친구에게 나의 번아웃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평소엔 서로 툭탁거리며 장난을 자주 쳤기 때문에 그때도 그 친구는 장난식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내가 감정에 북받쳐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자(나는 그냥 인간 수도꼭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제야 나를 토닥여주며 위로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아는 친구라 공부를 못하겠다는 말에 너 글 잘 쓰잖아, 글 쓰면 되지, 하고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내 글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애석하게도 그 위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별로 못 쓰는 글을 쓰기 위해서 기말고사를 포기하는 건 도박이 아니냐고, 그런 부정적인 대꾸를 했다. 친구는 한참 나를 위로해주려 노력하다가 결국엔 슬럼프가 단단히 왔구만, 하는 말을 내뱉고는 돌아갔다.

 

24

윤리 보충이 잡혔다. 모의고사가 당장 내일이라 기출 풀이를 해주러 들어오신 거였다. 들어오자마자 선생님께서는 내줬던 기출 문제들을 풀어봤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네, 하고 대답했지만, 앞에 앉은 애들이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내 자리는 비교적 뒷자리였으므로 선생님께서는 앞자리 애들의 목소리만 들으셨고 결국 나의 대답은 그렇게 공중에서 분해되어 사라졌다. 그것에 또 지독한 무기력이 도져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뚱한 표정으로 칠판을 보지도 않고 내주었던 시험지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25

친구에게 빌렸던 책을 돌려주러 교실을 나서다가 앞문으로 빠져나온 윤리 선생님과 마주쳤다. 선생님은 나한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펐는지 모르겠다. 담임 선생님께도 털어놓지 않았는데 윤리 선생님 앞에서 울어버렸다. 그리곤 나의 지독한 무기력과 할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나를 다독여주며 자신의 고등학교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곤 내일 모의고사가 끝나면 맛있는 거라도 먹고 푹 쉬어야겠다는 말을 하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 감사하기도 부끄럽기도 동시에 약간의 반항적인 마음도 들었다. 모의고사가 끝나도 기말고사는 끝나지 않았는데?

 

26

반항적인 마음을 품었던 것과는 별개로 모의고사라는 짐을 덜고 난 후에는 조금 더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27

상담을 받으러 가는 날이라 정식으로 불이 켜진 센터에 향했다.

상담 선생님의 앞에 앉아 무기력으로 점철된 하루의 이야기와 사라지고 싶었던 순간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해결해보려 발버둥 친 흔적들, 이를테면 열품타를 지운 일이라던가 이동할 때마다 영어 지문 읽는 일을 관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앞으로도 차도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나를 갉아먹으며 공부하지 말라고 했다.

많고 많은 일 중에 그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었나보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정말 그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차도에 뛰어들고 싶을 만큼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했을 뿐인데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었으므로.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나를 더욱 강박으로 모는 것들을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칭찬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시간을 재지 않고 공부하는 나의 선택에 조금 더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28

무난하게 흘렀다. 종종 무기력해지긴 했으나 그런 무기력 정도는 이겨낼 수 있었다.

버겁고 비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나는 이제 매일을 은은한 우울 속에서 은은한 정도의 슬픔만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사람이나 달고 다니는 감정이었다.

지독한 무기력에 못 견디던 나는 서서히 하굣길에도 영어 지문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단단한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29

번아웃 신드롬즈의 노래를 좋아하다 별안간 번아웃이 온 사람.

그런 우스갯소리를 생각하다 보니 기말고사가 끝났다.

 

30

지독한 번아웃을 견디고 무사히 치른 기말고사의 성적은 사실 좀 처참했다.

좌절하기도 했다. 괴로운 시간을 견뎌냈는데도 돌아온 결과가 고작 이거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후련했다. 더는 무기력에 침몰 되어 헤엄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시험지를 손에 쥐고도 눈물은커녕 웃음만 나왔다. 그게 멘탈이 깨져서 나오는 허탈의 웃음이었는지 번아웃을 이겨내고 쟁취한 끝이라는 단어에 대한 후련함의 웃음이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31

그렇게 괴로웠는데도 꿋꿋이 해보려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천천히 해나가고, 평소만큼의 열정은 아니더라도 회복할 수 있는 선에서 열정을 회복하려 발버둥 치니 결과적으로 나는 1학기 총 성적표를 들고 웃고 있었다.

망한 줄 알았는데 그다지 망하지 않았던 기말고사와 상상 이상으로 잘 나온 성적을 보고 그래도 견디길 잘했다는 생각을 조금 했다.

사실은 순간의 행복에만 집중했다.

그 순간 견뎠다는 표현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행복했다. 그게 다였다.

 

32

내일이면 돌입하는 2학기 중간고사 시험 기간을 두고 나는 또 두렵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 강하게 자리 잡은 탓일까? 무기력을 경험해버린 나는 또다시 무기력이 두렵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기억들이 강력해서, 나는 두렵다.

그래도 해보려고 한다. 이제 나는 열품타를 켜지 않을 것이고 밥 먹으며 영어 지문을 읽다 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소함에서부터 시작한다. 지지 않으면 얻는 온전한 행복을 아직 잊어버리지 않았다.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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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의 3월이다. 어렴풋하던 성인의 경계가 조금 더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글틴에 더는 글을 올릴 수 없어지는 날도,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다. 카임이라는 닉네임과도 작별이다. 글틴 헌정의 수필을 쓰고 싶어졌던 건 그래서이다. 글틴에 존재하는 나의 모든 행운들에게. 나는 나의 닉네임을 아주 많이 불러보았다. 대개 이름이란 상대가 자신을 호명하기 쉽도록 붙여진 것으로, 정작 그 이름을 지닌 본인은 그것을 불러볼 일이 적다는 게 특징이지만. 카임이란 닉네임의 유래는 처음 글틴에 가입하던 당시, 읽고 있던 웹소설에서 시작된다. 그 웹소설의 주인공은 오래오래 (작품 내에서) 미움을 받았던 아이돌 캐릭터였고 카임은 그의 활동명이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도 사주팔자를 모두 고려하는 마당에, 사랑받지 못하는 캐릭터를 나의 이름으로 내세운 까닭은 단순했다. 카임이 작품 속에서 받지 못했던 모든 사랑을 내가 대신 받아주겠어!그를 생각하며 썼던 시는 아직도 글틴의 데이터 속에 남아있다. 제목은 <동경>. 언제부터인지 저는 소설 속 인물을 동경하였습니다.무엇에 끌렸던 걸까요.비현실적인 풍경, 비현실적인 사건, 비현실적인 캐릭터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이 있습니다.그곳에서 주인공은 영영 죽어버렸지요.그러나 그 인물이 독자의 마음속에 영영 살아있을 수 있다면그것은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저는 이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소설 속 인물을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죽지 않았음에도 모든 이들에게 잊히는 내가죽었음에도 모두의 마음속에 품어진 그들을 동경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요. 아아, 차라리 내가 사는 이곳이 소설 속 어느 한 페이지라면 좋겠습니다.모두의 마음속에 홀로 남아 내 이름 석 자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아직 카임이란 이름으로 그 어떤 것도 쟁취하지 못했던 때. 마지막으로 치달은 소설의 끝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명백히 새겼다. 그것이 부러웠다. 본래 의도와는 달리 내가 그의 이름 버프를 받으며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나는 카임이라는 이름이 나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진짜)카임을 동경하고 부러워하며 실은 카임이 아닌 내 이름 석 자로 활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하지만 (가짜)카임으로서의 그 모든 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행복했고 후련하다. 이제 카임으로서 모든 숙명을 다 해낸 것 같다. 글틴을 떠나기 전 그간의 기록들을 살폈다. 잊었던 작품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지금의 나를 구성하지 않는 글이 없다. 처음 올렸던 소설은 <여름의 초상>이다. 열여섯의 내가 쓴 열여덟 소년의 이야기. 당시에는 일상의 로맨스를 담았던 소설인데 다시 읽으니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어 어쩐지 판타지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자주 가출의 충동을 느끼는 주인공 의현의 모습은 여전히 반영이 잘 되어 있는 듯하다. 나는 열여덟은 무슨, 스무 살이 되고도 종종 가출을 했고, 부모님 속이 다 썩어갈 때쯤 집에 돌아오는 게 취미였다.반면 <종

  • 카임
  • 2024-03-16
내 장례식엔 당신이 오면 좋겠어

나는 사람이란 가장 약한 순간에 진심을 드러내는 법이라고 믿는다. 올해는 버거운 한해였다. 대한민국에서 고삼이라는 타이틀을 쥐고 살아가는 것이 무릇 그렇듯. 평소에도 스트레스에 취약했던 내게 고삼은 권력이기 전에 바이러스였다. 집안에서 고삼부심을 부려보기도 전에 온몸에 퍼진 유해함. 아주 많이 나약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죽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죽는 상상을 했다. 아침이 되어 날 깨우러 온 가족들이 생기 없는 내 얼굴을 마주하는 상상을 했다. 나는 가족들을 아주 사랑한 것도 아주 미워한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가족의 온도. 그게 내가 우리 가족을 대하는 태도였다. 사실 사춘기 때는 우리 가족을 좀 많이 미워한 것도 같다. 그건 아마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에서 하는 거라곤 소리를 꽥 지르고 가출하기, 비명을 지르다 경비실에서 신고 들어오기, 일주일에 네 번 조퇴하기. 온갖 기괴한 사춘기는 다 겪으며 엄마와 아빠를 미워했었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엔 사이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싸울 때가 있었고 그런 날에는 가출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는 상상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가족들일 줄 몰랐다. 너무 식상했다. 동시에 속상했다.3월엔 모두가 잠든 밤에 옷장 안에서 숨을 참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내 방문 한 번을 열지 않는 가족들이 미웠다. 바로 옆 방에서 딸은 죽어가는데 쿨쿨 자는 아빠가 미웠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어 싸늘해진 내 얼굴을 발견할 표정을 생각하면 미안했다. 나는 아빠가 미워서 죽는 게 아니었는데. 엄마가 미워서도 아니고 언니가 미워서도 아니고 동생이 미워서도 아니었는데. 그러나 뭐가 됐든 처참할 내 꼴을 마주할 사람은 가족들이었다. 사춘기 때는 죽으려는 생각을 할 때면 어린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죽지 못했다. 좀만 더 크면 작은 언니의 존재조차 잊을 저 아이가, 언젠가 엄마에게 나한테도 작은 언니가 있었냐고 물어볼 그 아이가 생각이 나 죽지 않았다. 그 애에게 얼굴도 모르는 자매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애는 오래오래 나를 기억할 만큼 컸다. 이제 나를 잊을 가족들은 없을 텐데…. 고삼이 된 나는 그날 죽지 못했다. 미안해서 죽지 못했다. 내 인생의 가장 비참한 모습을 마주할 가족들에게 미안했고, 나를 따라 죽고 싶어질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6살일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아주 오래오래 사랑한다고 말해준 할머니에게 내 부고 소식을 알려야 할 상황이 미안했고 더는 내 방문을 열어보지 못할 언니에게 미안했다. 숨을 쉬었다. 켁켁 거리며 쉬었다. 구토감이 몰려왔고 숨이 조금 쉬어진 뒤에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그날은 다이어리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가족들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는 편지를 썼다. 죽지 않는 이상 나만이 볼 수 있을 그 편지를. 중간고사 무렵에는 내 처지가 비참한 순간이 많았다. 대학이 인생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기에 잘 챙겨주지 않기로 소문이 난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우울해졌다. 종종 학교를

  • 카임
  • 2023-11-18
길에 노래를 깔아두었다

music is my life, 무식 이즈 마이 라이프, 무식은 나의 삶. 어쩐지 귀여워서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다. music이 나의 삶인 것도, 무식이 나의 삶인 것도 맞다. 이토록 나를 잘 설명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이것은 '무식 이즈 마이 라이프'를 입버릇처럼 남발하고 '고생 끝에 락이 온다'를 신조처럼 여기고 사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을 무식하게 나열하는 글이다.   <DAY6 - Better Better> 한 노래를 좋아하는 데 이유란, 멜로디가 좋아서 가사가 좋아서 가수가 좋아서. 그 세 개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설명되기엔 너무 깊숙이 박혀버린 노래가 종종 존재한다. 그리고 이건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와 장기처럼 몸 깊숙이 자리를 차지한 노래이다. 새해에 처음 듣는 노래가 그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을 아는가? 신은 믿지 않지만, 미신은 극도로 신뢰하는 사람인지라 매번 새해의 첫 곡을 결정할 때는 신중해진다. 그런 와중에 2019, 2020, 2021, 마침내 2022년. 4년에 걸쳐 새해의 첫 곡을 장식해준 노래가 DAY6의 Better Better다. 2018년 무렵엔 자주 아팠다. 마음이 아프면 자연스레 몸이 아플 수 있다는 걸 스스로 터득했을 때였다. 스트레스가 육체적 고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혹독하게 굴리는 탓에 그랬다. 고작 열네 살이었는데, 이런 삶을 원했던 게 아니라며 홀로 훌쩍였다. 봄에 가장 아팠고 여름과 가을에 잠깐 잦아들었다가 겨울에 다시 발발해서는 또 악을 쓰고 도망치고 숨어버리고. 그러나 죽을 용기가 없어 운명에 내 죽음을 맡기기로 했었더랬다. 좀만 더 가면 돼 한 발짝만 더 디디면 모든 게 끝나 미련하게 잡고 있지마 날 그만 놓아줘 - 종현, 놓아줘 1월 1일엔 종현의 놓아줘를 들어야겠다. 그런 맘을 몰래 간직하고 맞이한 2019년의 1월 1일에 나는 화장실에 숨어 DAY6의 Better Better를 들었다. 충동이었다. 재생목록에 나란히 놓여있던 놓아줘와 Better Better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밖에선 언니가 가요대제전을 보고 있었고 부모님과 동생은 새해가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고, 그런데 나는 화장실에서 꼬질꼬질한 줄 이어폰을 낀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내일을 전혀 기다리지 않던 나에게 넌 한걸음 내딛을 이유가 되어줬어 멀지 않은 앞에서 내게 손을 뻗어 줬어 - DAY6, Better Better 미신을 믿는 건, 믿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들어맞아서이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행운과 불운. 아직도 그 기준은 모르겠고 모호하고 어쩌면 나는 행복하다가도 불행하고 행운이 작동하다가도 운수가 없다. 하지만 3년이란 간격을 둔 채 멀찍이 떨어져 2019년을 바라본다. 그때 난, 내일이 오기를 기대했었다.   <Sufjan Stevens - Mystery of Love>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활자로만 남아있던 세계가 실제로 구현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무리가 존재한다. 내 이야기다. 영화화, 드라마화

  • 카임
  •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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