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와 읽기
- 작성자 옥상정원
- 작성일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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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름이 끝나가는 게 느껴진다. 주위에선 외투를 하나 둘 입기 시작했고, 에어컨도 잘 틀지 않는다. 나는 이런 늦여름, 가을 날씨가 좋다. 무엇 하나 극단적이지 않아서 좋다. 덥다거나 춥다거나 하는 일이 드물어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선선한 날씨에 걷는 것도 좋아한다. 웬만해선 걷는 게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을 뽑는다면, 첫 번째는 손가락 운동, 두 번째는 걷기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걷기란 그저 ‘걷기’일뿐일지도 모른다. ‘걷다’에 접사를 붙여서 명사로 변형한 단어, 그 정도일 수 있겠다. 아니면 자동차, 버스, 지하철에 비해 불필요하고 불편한 이동수단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걷는 행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걷는 것은 내가 사유할 수 있는 범위, 도전해보고 싶은 범위 내에서 이뤄낸 성취가 아니다. 태어났고, ‘울고, 웃고, 먹고, 싸고’ 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자연스레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걷기’라는 동작 자체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맹맹한 단어인지라, 사람들은 비슷하게 ‘산보’, 혹은 ‘산책’, 조금 더 발랄하게 ‘소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소풍, 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걷다’는 굉장히 희미해진다.)
그러나 오랫 동안 앉아있었고, 또 앞으로도 앉아있는데에 시간을 오래 쓸 나는 ‘걷기’가 곧 삶과 연결된다. ‘걷기’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지 과거의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테다.
나는 황정은 소설가의 <일기>라는 수필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공감의 홍수에 휘말리게 됐다. 황정은 소설가는 꾸준히 운동한다. 그녀는 걸으며 생각이 많을 땐 1시간 1분의 산책을, 데드 리프트 90개와 스쿼트 60개, 플랭크 3분을 목표로 하고 (보통 2분 30초에서 단념하는) 대단한 소설가이다. 나는 황정은 소설가처럼 운동을 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걷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공감이 됐다. ‘꾸준히 걷고 글을 쓴다’는 맥락에서 그녀의 문장은 어딘가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고질병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최근에 어떤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참가해 곤욕을 치뤘다. 한 시간 반도 채 되지 않는 그 행사에서 나는 허리가 너무 아팠다. 원래도 허리와 손목이 약한 편인데, 이번엔 허리가 문제였다. 꼿꼿이 허리를 펴도 아프고, 구부리면 더 아프고, 등에 기대 누우듯 앉아도 통증이 지속됐다. 강연을 들으면서 이리저리 몸의 방향을 바꾸다가 결국 단념했다. 걷지 못하는 날이 지속되면 바로 이렇게 허리가 아파온다. 저릿하면서도 날카로운 걸로 콕, 콕, 찌르는 느낌. 바른 자세의 중요성을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내게 ‘걷기’는 생명이다. 나는 어떤 행위에 의미부여를 잘 하는 편인데, ‘걷기’에도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생명이라고. 나는 이 행위가 없으면 허리 통증 때문에 버틸 수 없게 될 것이다. 원고 노동에 시달리진 않기 때문에 황정은 소설가처럼 격렬히 운동할 필요는 없지만 (또 그럴 시간이 한국의 고등학생에게 주어지는지 의문이지만), 일상 속에서 자꾸 걷고 걸으면서 생각하는 습관이 나에게는 하루의 전환점이 된다. <일기>를 통해 얻게 된 좋은 연결고리라고 볼 수 있겠다.
가끔 걷고 싶을 때, 혹은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키고 싶을 때 <일기>를 읽는다. 때마다 다른 나의 감정 상태를 그 밑줄로 확인할 수 있어 좋기도 하다.
그런 걸 생각하고, 그런 걸 보고 왔다. (113p)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걷기’와 ‘읽기’에 오래 마주친다. 걷는다는 것과 무언가를 오래 관찰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은 ‘그런 걸 생각하고, 그런 걸 보고 왔다.’로 서술되는 하나의 완전한 형태라는 것을, 누군가 오래 전 ‘생각하고 보고 온 것’을 활자로 재현하고 그것이 독자의 세계로 이전되는 것이 얼마나 생명력 있는지를 알게 된다.
황정은 작가는 묻는다. "산보 하시나요. …… 거기선 산보, 가능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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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최근 무릎이 안 좋아져서 맘 편히 걷는 것도 힘들어졌어요. 그래서인지 '걷기'를 다시 바라보게 됐는데요, 생각보다 걷는 동안 걷기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정말 드물더라고요. 산책을 풀어 말하면 '걸으면서 정취를 느끼고 사유하기'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것 말고, 걸으면서 빵 먹기 같은 것 말고 정말 걷는 동안 오직 걷는 게 목표가 되면, 즉 문장과 우리를 굴러가게 할 동사가 아닌 주어로 바라보게 되면 정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고,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스몸비들 사이에서 허리를 반쯤 숙이고 무릎을 절뚝이며 용맹한 사투를 벌이는 중인 전사를 보았던 것처럼요. 그렇게 된다면 다양한 생각과 걸음걸이 덕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산보 길이 여기서 더 많아지겠죠? 그럼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이라는 산을 오를 수 있게 될 테고요. 아무튼요, 한바탕 걷고 난 뒤의 호흡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이 문장들로 내뱉고 싶었던 건요. 방금 막 '옥상정원'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서 정말 기뻐요. 앞으로도 거기서 산보,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