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장례식엔 당신이 오면 좋겠어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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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란 가장 약한 순간에 진심을 드러내는 법이라고 믿는다. 올해는 버거운 한해였다. 대한민국에서 고삼이라는 타이틀을 쥐고 살아가는 것이 무릇 그렇듯. 평소에도 스트레스에 취약했던 내게 고삼은 권력이기 전에 바이러스였다. 집안에서 고삼부심을 부려보기도 전에 온몸에 퍼진 유해함. 아주 많이 나약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죽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죽는 상상을 했다. 아침이 되어 날 깨우러 온 가족들이 생기 없는 내 얼굴을 마주하는 상상을 했다. 나는 가족들을 아주 사랑한 것도 아주 미워한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가족의 온도. 그게 내가 우리 가족을 대하는 태도였다. 사실 사춘기 때는 우리 가족을 좀 많이 미워한 것도 같다. 그건 아마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에서 하는 거라곤 소리를 꽥 지르고 가출하기, 비명을 지르다 경비실에서 신고 들어오기, 일주일에 네 번 조퇴하기. 온갖 기괴한 사춘기는 다 겪으며 엄마와 아빠를 미워했었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엔 사이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싸울 때가 있었고 그런 날에는 가출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는 상상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가족들일 줄 몰랐다. 너무 식상했다. 동시에 속상했다.
3월엔 모두가 잠든 밤에 옷장 안에서 숨을 참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내 방문 한 번을 열지 않는 가족들이 미웠다. 바로 옆 방에서 딸은 죽어가는데 쿨쿨 자는 아빠가 미웠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어 싸늘해진 내 얼굴을 발견할 표정을 생각하면 미안했다. 나는 아빠가 미워서 죽는 게 아니었는데. 엄마가 미워서도 아니고 언니가 미워서도 아니고 동생이 미워서도 아니었는데. 그러나 뭐가 됐든 처참할 내 꼴을 마주할 사람은 가족들이었다. 사춘기 때는 죽으려는 생각을 할 때면 어린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죽지 못했다. 좀만 더 크면 작은 언니의 존재조차 잊을 저 아이가, 언젠가 엄마에게 나한테도 작은 언니가 있었냐고 물어볼 그 아이가 생각이 나 죽지 않았다. 그 애에게 얼굴도 모르는 자매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애는 오래오래 나를 기억할 만큼 컸다. 이제 나를 잊을 가족들은 없을 텐데…. 고삼이 된 나는 그날 죽지 못했다. 미안해서 죽지 못했다. 내 인생의 가장 비참한 모습을 마주할 가족들에게 미안했고, 나를 따라 죽고 싶어질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6살일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아주 오래오래 사랑한다고 말해준 할머니에게 내 부고 소식을 알려야 할 상황이 미안했고 더는 내 방문을 열어보지 못할 언니에게 미안했다. 숨을 쉬었다. 켁켁 거리며 쉬었다. 구토감이 몰려왔고 숨이 조금 쉬어진 뒤에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그날은 다이어리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가족들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는 편지를 썼다. 죽지 않는 이상 나만이 볼 수 있을 그 편지를.
중간고사 무렵에는 내 처지가 비참한 순간이 많았다. 대학이 인생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기에 잘 챙겨주지 않기로 소문이 난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우울해졌다. 종종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엄마 앞에서 엉엉 울 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담임이 되면 어쩌자는 거냐고, 나는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 내 12년을 다 망쳐버릴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엉엉 울었다. 꽤 자주. 그렇게 담임에 대한 불만이 쌓여갈 때쯤 사건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이번엔 반 애들이 문제였다. 그때가 아마 뉴스에 자살 소식이 자주 들려오던 때. 학급 애들 중 일부가 내 주변에서 투신자살하는 영상을 소리까지 키운 채 보면서 평가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민폐를 주냐, 차라리 어떻게 죽어라, 하고 말하는 것이 실은 내가 시도해본 것이었다. 그렇게 죽으려 했던 사람이 바로 뒤에 있단 걸 눈치도 못 챈 채 계속해서 투신자살하는 영상을 봤다. 그날도 나는 집에 가서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며칠 뒤, 평소에 다니던 청소년 상담소에 갔다. 상담 선생님께 그 주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눈을 꾹 감았다. 선생님이 그날 일을 상상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정말 위태로워 보이니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병원은 중간고사가 다 끝난 후에 짬을 내어 갔다. 여러 검사를 하고 이 상태면 공부를 제대로 할 수는 있나? 싶은 결과를 들은 뒤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내게 병원에 다니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들은 소리가 그거였다. 엄마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속상했다. 병원에선 정신과 기록이 내 인생에 미칠 영향만 걱정하고, 병원을 나선 뒤엔 내 사정이 누군가에게 알려질 것을 걱정하는 게. 그때 또 가출 본능이 도져서 엄마를 두고 혼자 도망쳐버렸다. 그러다 길을 잃어서 헤매다 보니 엄마를 만났고 엄마는 미안하다며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나는 “엄마 미워요”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고 엄마는 나를 사랑한단 말을 대답처럼 뱉었다.
병원은 평일에만 갈 수 있어서 학교에서는 8교시를 빠져야 했다. 담임 선생님께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던 날에 선생님은 내게 왜 병원에 가냐고 물었다.
“그냥 좀… (선생님 때문에 가는 건데 그걸 선생님한테 어떻게 말해요)”
“스트레스 때문에 가나?”
“네. 제가 스트레스에 약해서…. 그것 때문에 안 좋은 생각도 자주 하고요.”
그 말을 하자 선생님은 내가 평소에 친구랑도 잘 안 지내고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해서 그렇다는 말을 하며 하교증을 건네주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한테는 아직 대학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져서, 꼭 성공하고 싶어서,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놀고 싶어도 쉬고 싶어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건데…. 나도 친구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가방을 메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작년 담임 선생님 생각이 났다.
사춘기 때 다니던 상담실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상담 역시 평일에 가야 했는데, 그러려면 마찬가지로 8교시를 빠져야 했다. 그걸 말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께 다짜고짜 “저 심리 상담받으러 가야 해서 8교시에 빠져야 해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나를 복도로 따로 불러내셨다. 나는 내가 스트레스에 유독 취약하단 점 등을 얘기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글을 쓰는 아이니까 남한테 공감도 많이 하고, 감수성도 풍부하고,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감정이 예민한 거야. 상담 잘 다녀오렴.”
이후로도 상담 날이 될 때마다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상담이 너에게 도움이 되니?”
“말할 사람이 생겼다는 게 좋아요.”
“다행이네.”
그 다정했던 모습이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떠올랐다. 선생님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선생님이었다면 내가 병원에 다니기로 했단 말을 들으면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분명 선생님이 담임이었다면 병원에 다닐 필요도 없었겠지만…, 적어도 내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겠지.
그래서 며칠 뒤에 찾아갔다. 사실 그땐 시험 출제 기간이라 교무실 출입이 불가능했는데 선생님을 보려고 일부러 선생님 시간표까지 외워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교실 앞으로 뛰어갔다. 복도 끝에서 교실을 나오는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 하고 크게 부르니 선생님이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맞아주셨다. 왜 왔냐고 묻길래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스몰토크를 조금 이어가다가 요즘 공부가 잘 안 된다는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작년엔 선생님께서 ‘공부가 안되면 교무실로 찾아와라. 공부하도록 자극을 주겠다.’라는 말을 자주 하셔서 그걸 명목 삼아 물꼬를 튼 것이다.
“사실 제가 정신과 병원에 다니게 됐어요. 작년에도 상담 다녔었잖아요. 그런데 상담 선생님이 병원에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고 추천해주셔서 병원에도 다니게 됐어요. 그런데 약을 먹으니까 너무 졸려요. 졸려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계속 졸기만 해요. 그래서… 공부가 안돼서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끝 무렵엔 거의 울먹이며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도 눈가가 빨개지는 게 보였다. 선생님은 내 말이 끝나자 나를 꼭 껴안아 줬다. 선생님은 품에 안겨서 우는 내 귓가에 계속해서 너는 잘 될 거야, 너는 잘 될 거고 잘 견뎌내고 있고, 정말 응원하고 있어… 그런 말을 한참이나 반복해주셨다. 그러고 나선 반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 함께 걸어주셨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따뜻해서 눈물이 났다. 선생님과 헤어진 뒤에도 혼자 조금 더 울다가 교실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론 죽는 상상을 할 때면 내 장례식에 찾아오는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선생님이라면 나를 절대 잊지 않아 주실 것 같아서 그런 상상을 한다. 담임 말대로 나는 친구도 별로 없고 책상에만 앉아 있는 외톨이지만 선생님이라면 내 장례식에 찾아와줄 것 같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죽는다면 선생님이 내 장례식에 찾아와준다면 좋겠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 영정 사진을 쳐다보는 생각을 하면 죽는 걸 잠시 미뤄두게 된다.
작년의 담임 선생님과 비슷하게 죽으려던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또 있다. 담당 동아리 선생님이다.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에서 여자는 남들 앞에서 우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나는 유독 그 선생님 앞에서 자주 질질 짰다. 선생님이 새로 부임하고 2달도 채 안 돼서 선생님 앞에서 질질 짰고, 그해 12월쯤에 또 질질 짜던 걸 들켰고, 하여간 여러모로 추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정말 불량공주 모모코의 교훈대로 잘살고 있었는데 말이지….) 동아리 부장직은 내가 맡기엔 너무 버거운 직책이었다.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단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냥 글이 좋아서 문예부장직을 덜컥 맡았다. 부장이란 글을 좋아하고, 이 동아리에 문학적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으로 몇십 년간 시도하지 않은 동아리 운영 방식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혁명을 일으키기에 내 실행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내가 2학년이던 땐 우리 동아리에서 2학년 부원들이 대거 탈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교지를 만들 때 최적의 인원이라 10명을 뽑아오던 부서에서 자그마치 5명이 탈퇴를 한 것이다. 덧붙여 추가로 1명이 더 자퇴를 하는 덕에 10명에서 4명으로 폭삭 쪼그라든 대규모 탈퇴 사건이 하필이면 주축이던 2학년에게서 벌어졌다. 그때 선생님은 거의 본인이 부장인 양 동아리를 이끌어주셨다. 원래라면 2학년 부장이 대부분의 일을 맡아 처리하고 남은 9명의 부원들이 분담해서 운영하는 학생 위주의 동아리 활동이었지만 선생님은 모두가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주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1학년이 추가되어 14명이란 인원이 되었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준 선생님 덕에 나는 선생님의 말만 따르면 됐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그 힘들다던 2학년 동아리 활동이 비교적 수월하게 흘렀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을 맹신했다. 선생님을 자주 졸졸 따라다녔다.
교지를 완성해야 할 시기에는 2학년 부원들의 참여가 저조해서 거의 혼자 교지를 편집하고 있었다. 모든 글의 1차 퇴고를 혼자서 하고, 글 배치며 편집이며, 자그마치 방학식 날까지 학교에 혼자 남아 그러고 있었다. 그게 서러워서 처음으로 부원들에게 화를 냈던 적이 있다. 집에서나 가출할 줄 알지 밖에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서 손을 덜덜 떨었다. 2주일간 적당하고 권위 있게 화낼 대본을 짰다. 당일엔 심장이 너무 뛰어서 복도에서 마주친 친구를 붙잡고 울었다. 나 이제 혼내러 가야 한다고, 걔네가 참여만 잘 해줬으면 이럴 일도 없었는데 나 정말 너무 힘들었다고. (나중에 친구는 니가 혼나러 가는 입장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화내기 전 홀로 울고 있을 때 선생님을 마주쳤다. 선생님은 자신이 대신 부원들에게 말해줄지 물었으나 2주일의 대본이 아까워서 직접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 내가 같은 학년의 부원들 사이에서 약간은 떠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묘하게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감정은 묵혀두는 게 아니고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살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할 말을 하고 나니 다 나를 떠나버렸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혼자 교지 편집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님만큼은 계속 있었다. 고3 담임을 맡을 때라 할 일도 많으셨을 거면서 동아리 일까지 자기한테 다 넘기라고 하셨다. 결과적으로 다 넘기진 않았으나 최종 퇴고 등은 선생님께서 전부 해주셨다. 그러면서도 나를 꼬박꼬박 ‘부장님’이라 불러주셨고(실상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도 못했는데)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으며 세특에는 나의 수고와 리더십에 대해 잔뜩 써주셨다. 내게 리더십이라곤 쥐뿔도 없었고 수고는 선생님이 더 많이 하셨으면서도. 그걸 보고 나니 어떤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도 나를 잊지 않아 주시겠구나.
죽을 생각을 할 때면 두 분의 선생님을 떠올린다. 내 장례식에 찾아올 2학년 담임 선생님과 동아리 담당 선생님을 떠올린다.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른다. 적어도 나를 잊지 않아 줄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죽기를 관두는 일이 많다. 덕분에 살아난 목숨으로 지금까지 동아리 부장직을 열심히 수행 중이다.
학교 백일장 대회 날, 3학년은 참가가 불가하다는 소식을 듣고 제시어라도 알고 싶어 국어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이번 주제가 ‘징검다리’였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나라면 어떤 글을 썼을지 오래 고민해봤다. 아무래도 나의 징검다리는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견딜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아닐까. 내 징검다리를 떠올려보니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던 1년이라 생각했는데 촘촘할 정도로 건널 길이 많았다. 성적이 오를 거라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는데 열심히, 잘하고 있다며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준 수학 선생님, 얼굴도 모르는 내게 자랑스러운 제자라고 말해준 인강 영어 선생님과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게 해준 인강 국어 선생님. 수능 전날 다 괜찮으니 건강하기만 하라고 말해준 사회 선생님, 등굣길에 너는 가장 열심히 하는 학생이니 분명 잘 될 거라고 꼭 안아준 영어 선생님,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과자들과 그에 동봉되어 함께 온 소중한 응원의 메시지들, 그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과 몇 년이 지난 제자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4학년 담임 선생님, 수능이 끝나자마자 연락해온 동아리 선배들, 사랑하는 후배들과 수능 전날 서로를 꼭 껴안아 주었던 친구까지.
그 모든 사람들이 내 장례식에 와주기를. 이건 죽겠다는 무언의 협박이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는 진심의 증거다. 사랑하고 고맙단 말로는 부족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 장례식엔 당신이 오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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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의 3월이다. 어렴풋하던 성인의 경계가 조금 더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글틴에 더는 글을 올릴 수 없어지는 날도,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다. 카임이라는 닉네임과도 작별이다. 글틴 헌정의 수필을 쓰고 싶어졌던 건 그래서이다. 글틴에 존재하는 나의 모든 행운들에게. 나는 나의 닉네임을 아주 많이 불러보았다. 대개 이름이란 상대가 자신을 호명하기 쉽도록 붙여진 것으로, 정작 그 이름을 지닌 본인은 그것을 불러볼 일이 적다는 게 특징이지만. 카임이란 닉네임의 유래는 처음 글틴에 가입하던 당시, 읽고 있던 웹소설에서 시작된다. 그 웹소설의 주인공은 오래오래 (작품 내에서) 미움을 받았던 아이돌 캐릭터였고 카임은 그의 활동명이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도 사주팔자를 모두 고려하는 마당에, 사랑받지 못하는 캐릭터를 나의 이름으로 내세운 까닭은 단순했다. 카임이 작품 속에서 받지 못했던 모든 사랑을 내가 대신 받아주겠어!그를 생각하며 썼던 시는 아직도 글틴의 데이터 속에 남아있다. 제목은 <동경>. 언제부터인지 저는 소설 속 인물을 동경하였습니다.무엇에 끌렸던 걸까요.비현실적인 풍경, 비현실적인 사건, 비현실적인 캐릭터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이 있습니다.그곳에서 주인공은 영영 죽어버렸지요.그러나 그 인물이 독자의 마음속에 영영 살아있을 수 있다면그것은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저는 이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소설 속 인물을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죽지 않았음에도 모든 이들에게 잊히는 내가죽었음에도 모두의 마음속에 품어진 그들을 동경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요. 아아, 차라리 내가 사는 이곳이 소설 속 어느 한 페이지라면 좋겠습니다.모두의 마음속에 홀로 남아 내 이름 석 자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아직 카임이란 이름으로 그 어떤 것도 쟁취하지 못했던 때. 마지막으로 치달은 소설의 끝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명백히 새겼다. 그것이 부러웠다. 본래 의도와는 달리 내가 그의 이름 버프를 받으며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나는 카임이라는 이름이 나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진짜)카임을 동경하고 부러워하며 실은 카임이 아닌 내 이름 석 자로 활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하지만 (가짜)카임으로서의 그 모든 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행복했고 후련하다. 이제 카임으로서 모든 숙명을 다 해낸 것 같다. 글틴을 떠나기 전 그간의 기록들을 살폈다. 잊었던 작품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지금의 나를 구성하지 않는 글이 없다. 처음 올렸던 소설은 <여름의 초상>이다. 열여섯의 내가 쓴 열여덟 소년의 이야기. 당시에는 일상의 로맨스를 담았던 소설인데 다시 읽으니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어 어쩐지 판타지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자주 가출의 충동을 느끼는 주인공 의현의 모습은 여전히 반영이 잘 되어 있는 듯하다. 나는 열여덟은 무슨, 스무 살이 되고도 종종 가출을 했고, 부모님 속이 다 썩어갈 때쯤 집에 돌아오는 게 취미였다.반면 <종
- 카임
- 2024-03-16
아무래도 이건 좀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을 3주 앞두고 별안간 번아웃이 닥친 건,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1 번아웃은 꼭 우울처럼 찾아왔다. 내 하루에 밑바탕처럼 은은히 깔려있다가도 어느 날엔 덩치를 불려 일상을 통째로 잡아먹는, 아주 예의가 없는 놈이었다. 언제쯤 나를 괴롭게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매일 두려움에 떨도록 했다. 처음 번아웃 증세가 나타난 건 기말고사가 3주 하고도 조금 더 남았을 무렵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무언가 나를 꾸욱 짓누르고 있단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잠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맞고만 있었다. 열기에 익은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침이니 머리를 깨울 필요가 있다. 태블릿을 연결해 노래를 틀고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가 그 위로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무언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단순히 입버릇처럼 늘어놓던 하기 싫다의 개념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무작정 거실로 뛰쳐나왔다. 거실에서 엄마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하기 싫다, 못 하겠다, 말을 하며 울었고 속으로는 이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험은 고작 3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엄마는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말했다. 어차피 안 되는 공부를 붙들고 있지 말고 차라리 잠을 더 자라고 말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 대신 책상으로 향했다. 공부는 여전히 되지 않았다. 2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수학 문제는 풀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수학 문제를 앞에 둔 채 울기만 했다. 비참하고 초라한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았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순간을 노래로 기억하는 내가 그 당시 무슨 노래를 듣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노래 역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그때 내 머리는 백지처럼 하얬다. 머리를 쓸 수 없으면 강의라도 듣자고 생각했다. 머리 굴릴 일 없이 불러주는 설명과 눈에 보이는 판서를 필기하기만 하면 되는 가성비 좋은 공부. 윤리 강의을 틀어놓고 노트를 폈다. 정확히 5초간 들었다. 음성을 듣자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피로해졌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어떤 기관을 거치지 않고 아주 거대한 공처럼 몸을 부풀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문장, 못 하겠다. 처음으로 엄마의 말을 들었다. 이럴 시간에 잠이라도 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 3 공부도 할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는 시험 기간의 청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시 엄마를 찾아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 말대로 잠을 자려고 했는데 잠조차도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잠이 안 와요. 계속 눈물만 나와요. 공부도 못 하겠어요. 엄마는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건 옆에서 내 사정을 함께 듣던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울었고 둘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내가 원했던 말은 공부 같은 거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 카임
- 2022-09-05
music is my life, 무식 이즈 마이 라이프, 무식은 나의 삶. 어쩐지 귀여워서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다. music이 나의 삶인 것도, 무식이 나의 삶인 것도 맞다. 이토록 나를 잘 설명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이것은 '무식 이즈 마이 라이프'를 입버릇처럼 남발하고 '고생 끝에 락이 온다'를 신조처럼 여기고 사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을 무식하게 나열하는 글이다. <DAY6 - Better Better> 한 노래를 좋아하는 데 이유란, 멜로디가 좋아서 가사가 좋아서 가수가 좋아서. 그 세 개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설명되기엔 너무 깊숙이 박혀버린 노래가 종종 존재한다. 그리고 이건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와 장기처럼 몸 깊숙이 자리를 차지한 노래이다. 새해에 처음 듣는 노래가 그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을 아는가? 신은 믿지 않지만, 미신은 극도로 신뢰하는 사람인지라 매번 새해의 첫 곡을 결정할 때는 신중해진다. 그런 와중에 2019, 2020, 2021, 마침내 2022년. 4년에 걸쳐 새해의 첫 곡을 장식해준 노래가 DAY6의 Better Better다. 2018년 무렵엔 자주 아팠다. 마음이 아프면 자연스레 몸이 아플 수 있다는 걸 스스로 터득했을 때였다. 스트레스가 육체적 고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혹독하게 굴리는 탓에 그랬다. 고작 열네 살이었는데, 이런 삶을 원했던 게 아니라며 홀로 훌쩍였다. 봄에 가장 아팠고 여름과 가을에 잠깐 잦아들었다가 겨울에 다시 발발해서는 또 악을 쓰고 도망치고 숨어버리고. 그러나 죽을 용기가 없어 운명에 내 죽음을 맡기기로 했었더랬다. 좀만 더 가면 돼 한 발짝만 더 디디면 모든 게 끝나 미련하게 잡고 있지마 날 그만 놓아줘 - 종현, 놓아줘 1월 1일엔 종현의 놓아줘를 들어야겠다. 그런 맘을 몰래 간직하고 맞이한 2019년의 1월 1일에 나는 화장실에 숨어 DAY6의 Better Better를 들었다. 충동이었다. 재생목록에 나란히 놓여있던 놓아줘와 Better Better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밖에선 언니가 가요대제전을 보고 있었고 부모님과 동생은 새해가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고, 그런데 나는 화장실에서 꼬질꼬질한 줄 이어폰을 낀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내일을 전혀 기다리지 않던 나에게 넌 한걸음 내딛을 이유가 되어줬어 멀지 않은 앞에서 내게 손을 뻗어 줬어 - DAY6, Better Better 미신을 믿는 건, 믿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들어맞아서이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행운과 불운. 아직도 그 기준은 모르겠고 모호하고 어쩌면 나는 행복하다가도 불행하고 행운이 작동하다가도 운수가 없다. 하지만 3년이란 간격을 둔 채 멀찍이 떨어져 2019년을 바라본다. 그때 난, 내일이 오기를 기대했었다. <Sufjan Stevens - Mystery of Love>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활자로만 남아있던 세계가 실제로 구현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무리가 존재한다. 내 이야기다. 영화화, 드라마화
- 카임
- 2022-02-05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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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글 보고 펑펑 울었네요...정말 몰입해서 읽었던 글입니다. 저는 평소에 나의 장례식에 누가 올까를 떠올려보곤 했는데 고마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당신이 오면 좋겠다는 표현에 삶의 태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런 글을 보게 되어서 저에게는 너무 행운인 것 같습니다...이겨내주셔서 감사해요 한 명의 팬으로서 먼발치에서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식빵연필 식빵연필 님, 안녕하세요! 제 글이 식빵연필 님께 잘 전달된 것 같아 기쁩니다:). 실은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엉엉 울었어요.(ㅎㅎ..) 내가 쓴 글에 내가 과몰입하는 건 굉장히 부끄럽지만..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그렇게 읽어주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저야말로 이런 댓글을 받게 되어 행운입니다>_<!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하루에 몇 번이고 죽음을 떠올릴 만큼 고된 인생에서, 사랑하고 고맙단 말로는 대체 불가능한 따듯한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꼭 와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정말 인상깊은 표현이에요. 앞부분을 읽으며 상상도 하지 못할 카임님의 우울함이 와닿아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글을 읽고 제 인생에서 고마웠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멋진 글 감사합니다!
@예리 안녕하세요 예리 님! 따뜻한 감상평 감사드립니다;-) 수능을 끝나면 쓰고 싶었던 글들이 참 많았는데 막상 끝나고 보니 그 어떤 것보다도 이 글이 제일 먼저 쓰고 싶더라고요. 저도 이 글을 쓰면서 고마웠던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렸어요. 그러다보니 그 모든 사람들을 언급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예리 님도 제 글을 보시고 고마웠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됐다니 정말 좋은 일이에요! 우리 인생은 혼자서는 만들어나갈 수 없는 것이니까요´・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