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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 친구

  • 작성자 식빵연필
  • 작성일 2023-12-15
  • 조회수 830

소꿉친구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고 당신은 나의 이름을 잊고

그럼에도 나는 그대 얼굴을 기억한다만은 당신 기억 어느 곳에서도 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마치 썩어버린 시체처럼 그저 그때 누군가 있었지하는 티끌같은 회상 속에 내 존재의 의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겁니까

이제 우리의 추억이란 오로지 제 기억속에서만 살아숨쉬는 겁니다그렇기에 제가 죽는 순간 추억도 함께 죽습니다잊혀진다는 것만큼 죽음의 정의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저는 죽는게 두렵습니다그렇기에 잊혀지지 않아야합니다또한 우리의 추억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사랑스러웠기에 살아남아야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겨울날저는 LED조명 아래 환하고 작은 제 방 속에서 불멸을 위한 필사를 해내는 중입니다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로운 빗소리가 제 시린 마음을 도려내는듯합니다광화문 광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날 제 이름 석 자가 당신의 입에서 나오기를 바랐는데 누구세요?” 라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기대가 무너져내렸습니다당신 속에서 죽어가는 제가 보였습니다추억을 던지며 불씨를 키워보려했지만 당신은 제 노력을 즈려밟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옛날일이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사람과 함께한 적이 없습니다.”

미안해요.”

사람을 잘못보셨습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

그 날 저는 당신의 선고문에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저도 당신을 죽이고 나만의 삶을 살아내려 했습니다미친 듯이 잠을 자고 미친 듯이 일을 하고 미친 듯이 취미를 즐기기도 했습니다그러다 정신이 피폐해져 갔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규칙적으로 매일의 성장을 즐기며 살기로 했습니다. 하루를 살아내며 점점 잊혀지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어느새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름 죽이기저는 당신을 잊기 위해 이름을 죽여버렸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해방되어 가는 것 같다그런 느낌에 저는 제 삶을 성실히 살아나가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사랑의 기억은 족쇄와 같아서 제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불현 듯 꿈 속에 찾아와 추억을 내뱉으니 괴로움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는 일이 잦았습니다잊지 말라고 아직 사랑한다고 그 말이 허상임을 알면서도 믿고 싶었습니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꿈,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습니다마침내 저는 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당신은 나처럼 되게 하지 말자는 생각. “ 불멸하라내가 영원을 줄테니” 그것이 이 기록의 존재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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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구이의 철학

점심에 버섯구이를 해 먹었다. 버섯은 씹을수록 향이 강해진다길래 그 향을 음미하려 잘근잘근 부숴댔다. 향은 분명히 강해졌지만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버섯구이에서 두부구이와 같은 향이 나는 것이 아닌가? 조각나는 버섯을 머금으며 그만 사색에 잠겨버렸다. 버섯구이가 두부향을 닮은 것인가? 두부구이가 버섯향을 닮은 것인가? 하지만 금방 깨달았다. 그 무엇도 서로를 닮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무의식 속에 본심을 뱉어대듯 완벽하게 콩기름을 빨아들였다가 뿜어낸다. 제 안의 수분을 날려내고 기름으로 채워낸 기억, 씹는다는 것은 그 기억을 들여다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콩기름이란 버섯의 트라우마다. 뜨겁고 매끈한 검정 기억은 나의 미각으로, 나의 후각으로, 나아가 나의 사고로 전달되었다. 버섯과 두부에게서 트라우마를 맛보고 있던 나. 서로는 닮지 않았다. 그러나 섬세하게 느껴보지 않으면 제 3자는 모르는 법이다. 나는 줄곧 그런 차이를 모르는 채로 콩기름 향을 음미하던 것이다.버섯의 트라우마를 찾아내는 것도 사색하지 않고서야 쉬운일이 아닌데 나는 또한 얼마나 많은 타인의 트라우마를 즐겨왔는가. 타인의 어색한 웃음을 보고서 가식을 비난하고 무례한 사람을 보며 무작정 분노하고 스스로의 온정이라 생각하며 베풀면서도 그것이 부담될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영혼의 무정부 상태가 싫다 말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무얼 위해 행위하는가에 대해 답하지 못하는 모순적인 자세. 나는 나의 트라우마 또한 즐겨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조금 서툴렀던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젊음의 이유로 목적론에 서투른 것이라면 말이 된다. 내가 버섯의 향이라고 생각하던 것도 두부의 향이라고 생각하던 것도 사실은 그 본질이 아니었다. 콩기름 향, 그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나는 버섯구이의 향도 두부구이의 향도 정확히 음미하지 못한 채 살아왔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두 맛의 근원이 콩기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둘의 본질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름을 적게 두르면 타거나 눌어붙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둘은 기름에 젖어 들어야만한다. 조리가 끝난 두 음식은 너무 많은 콩기름 향이 배겨있다. 나는 아무리 씹어도 버섯의 향을 알아채지 못할 것만 같다. 이것이 버섯이라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식감 탓이지 않은가. 두부 같은 식감에 콩기름 향이 났더라면 그것이 설사 버섯구이라해도 두부구이로 믿어버렸을테니까. 아, 그들은 얼마나 많은 세상에 젖어들어야만 한단 말인가.사색을 마치고 눈을 떴다. 젓가락으로 버섯을 잡는다. 버섯은 콩기름을 뿜어내고 미끄러진다.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쿡 찔러 입에 넣고 씹는다. 기름향이 허무해 대충 씹다 삼켜버렸다.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아챈 순간 음미의 목적도 사색의 목적도 갖지 않기로했다. 버섯을 위한 작은 애도, 혼자만의 고독한 사색이다.

  • 식빵연필
  • 2024-04-13
김소월 효과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을 아십니까? 의무 교육을 받았다면 누구나 한 번쯤 접해봤을 작품입니다. 저는 진달래 꽃을 사랑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가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달래 꽃이라 답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에게 웃으면서 "아는 시가 그것밖에 없긴 하겠다." 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유명한 작품을 사랑하면 자주 듣는 말입니다. 고흐의 해바라기와 뭉크의 절규를 이야기해도 같은 반응입니다. 유명한 것은 유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그 많은 이들 중 하나였을 뿐인데 이러한 평가는 조금 야속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마치 특별한 것을 좋아해야한다고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쉽게 접해서, 친근해서, 배운적이 있어서일까요. 사실 배운다는 것도 타인의 감상을 습득한 것은 아닐까요. 문학에 대한 해석도 관찰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저 역시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형식적인 타인의 해석을 습득중입니다. 이게 길이라면 걷는 것이 맞으나 제 발자국 하나는 선명히 찍으며 걷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 저는 이런 유명한 작품을 좋아한다 외치면 그렇게 말한 화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을 '김소월 효과' 라고 이름 붙여놓았습니다. 분명 이에 대한 다른 용어가 있을테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요한건 익숙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안다는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고등학생이 될 무렵 누군가 저에게 좋아하는 그림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속으로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외치고 있었지만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탓에 '레이디 고다이바' 와 '병든 아이' 를 토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작품을 알리가 없었고 그덕에 저는 '서양 미술을 잘 아는 사람' 으로 비춰져 보였습니다. 저는 그저 신기했습니다. 병든 아이는 뭉크의 작품인데도 뭉크하면 오직 "절규!" 하고 외치는 그 사람들을 보며 저 유명한 작품처럼 자신도 모르게 속을 찌그러트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세속적인 것이 그들 위에 있는 듯한 우쭐함에 기뻐하며 스스로를 그들의 시선대로 변화시켜나가게 되었습니다. 해바라기,절규,레이디 고다이바 점점 난해한 곳으로 가자 마라의 죽음,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 작품을 전부 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반갑습니다. 하지만 모른다하여도 괜찮습니다. 토를 품은 위는 항상 해바라기와 진달래 꽃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속의 것들을 전부 토해내면 제 속에서는 꽃향기가 날듯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모르는 사람일뿐입니다. 억지로 가르쳐주려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을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는 것이 적다해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의 가치가 큽니다. 그렇기에 저는 기본적인 것을 말할수록 그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 내가 참 좋아하는 시야" 하고 말한다면 아마 저는 눈에 불을 붙이고 밤을 새도록

  • 식빵연필
  • 2024-02-12
꽃이 죽어버려서

'나의 소중한 벚꽃이 이내 죽어버렸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이 시를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벚꽃이 죽어버렸다가 아니라 시들었다고 표현해야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에서 일말의 저항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꽃에게는 시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죽어버렸다고 표현한 것은 고의적인 꾸밈이었다. 그 시에서 벚꽃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여서 내 뜻이 잘 해석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표현을 벚꽃을 향해 치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의도가 너무나도 쉽게 부정당해버린 것 같아서 속으로 씩씩대며 줄을 긋다 그만 표현을 지워버렸다.여정의 끝을 의미하는 두 단어 '죽다와 시들다' 꽃에게 있어 무엇이 더 감각적인가를 두고 보아도 시들다가 좀 더 풍성한 이미지를 준다. 시들다라는 말은 소리 없이 서서히 그러나 우아하게 푸름에서 붉음으로 가다 끝내 어둠으로 장식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가진다. 그러나 죽다라는 말은 조금 다르다. 육체로서 살아있음을 경험하고 동족과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외롭게 또 누군가는 행복하게...그리고 결말은 백골과 썩은 살덩이라는 다소 씁쓸한 잔해를 남긴다. 물론 이렇게 표현한 탓에 죽다라는 말이 시들다라는 말보다 감각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진행형으로 바꾼다면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들고있다는 푸름에서 붉음으로 죽다는 활력에서 침묵으로, 전자는 감각적이지만 후자는 추상적이다. 그리고 죽다의 추상을 시들다는 함께 가져간다. 죽다의 장점은 꽃의 끝맺음과 동물의 마무리를 모두 포용할 수 있다는 것 진달래가 죽었다던가 지구가 죽어간다던가 어느 사물에 써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는 것. 죽다는 시들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꽃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시들다라는 표현을 쓰기로했다. 꽃에게 있어서 죽다는 섬세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꽃을 이용해 글을 쓸 때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너에게 집중하고 싶어' 다소 오글거리는 발상이지만 한 문장 한 문장 함축하고 싶은 의미가 많기 때문이다.좋은 글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이해 되기 쉽게 쓰는 것, 둘째는 풍부한 표현을 쓰는 것, 셋째는 문장을 짧게 짧게 쓰는 것, 작가가 이것을 어기고 위험부담을 감수할 때는 그만한 가치의 의도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 시를 잘 쓰기 어려운 이유다. 내 의도를 드러내려 힘쓰다보면 이해 되기는 쉽지만 그만큼 표현상의 결점도 쉽게 남는다. 표현을 풍부하게 하려 힘쓰다보면 의도는 감춰지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느낌이 강해져 이해가 어려워진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의 중용을 지키는 것인데 이 중용이라는 것이 참 애매한 부분이라 시를 씀에 있어 많은 고민을 하게된다. 그러나 나는 5년 전 기억 속에서 그 답을 찾아 낸 듯하다. 중용이란 작가에게만 중용이면 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죽어버렸다고 표현했다가 함축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으며 시들다라는 표현을 생각해보면서는 되려 풍부

  • 식빵연필
  • 202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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