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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고록

  • 작성자 식빵연필
  • 작성일 2023-12-21
  • 조회수 619

 엊그제였다. 땅을 보며 걷다 고개를 든 순간, 힘 없는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에메랄드 빛 홍채는 겨울빛에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녀석으로부터 공포를 느끼고 한 발짝 물러섰다. 녀석의 주위에는 웬 파리떼가 몰려있는 것인지 당황한 기색에 두 발짝 걸어가니 목뒤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게 아닌가. 나의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고 내가 본 것은 에메랄드 빛 홍채가 아니라 그 속의 죽음이었다. 사실 나는 녀석의 삶을 매일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녀석이 아니라 녀석과 같은 종의 삶을 말이다. 나의 작은 유리창 너머에서는 고양이가 맹리 수백만개의 좋아요를 받으며 사랑받는다. 말랑말랑한 발바닥과 똘망똘망한 눈동자는 우리의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충만하다. 나 역시 좋아요를 누르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죽은 고양이 시체 앞에서 본능적인 뒷걸음질을 친 내가 정말 고양이를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가 가진 발바닥과 눈동자,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역동적인 생명의 태동이 아니었을까.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나이기에 활력의 징후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닐까. 인간을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시체를 던져주면 기겁하고 도망갈 것이 뻔하니 생명은 숨이 붙어 있을때만 사랑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뒤에도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을 잊지 않겠다는 말을 돌려말한 것이지 죽어버린 육체에 대한 의미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마릉ㄴ 과거를 추억하겠다는 말의 표현이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형태가 변한 어떤 것에 대하여 같은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늙어버린 부모님이 더이상 든든하지 않은 것, 자라버린 내 몸으로 파워레인저 흉내를 내지 못하는 것, 구구단을 모조리 맞추어도 기쁘지 않은 것과 이제는 크리스마스가 아무 설렘도 주지 못하는 것. 세상은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과 같아서 항상 역동적으로 태어나고 죽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단지 생명 같다는 이유로 쉽게 사랑해버린다. 죽어버린 세상조차 사랑해온 나인데 고양이르 보며 느낀 생각과 제대로 충돌했다. 나는 죽어버린 것도 사랑하는가? 그럼 고양이 시체에 대한 혐오감은 무엇이었나. 아, 어쩌면 죽은 이엥 대한 추억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죽어간 사람에 대한 추억일지도 모르겠구나. 죽어버린 세상에 대한 추억은 죽어간 세상에 대한 추억이구나. 시대를 그리워한다는게 이런뜻이구나. 역시 다들 살아있는 것에 대해 사랑을 이야기하는구나. 나는 에메라드빛 동공으로부터 죽음의 향을 피했던 것이지 죽어간 동공을 미워한 건 아니었구나. 살아있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그 이유로 모든 사랑을 납득해버릴 것만 같다. 그러니까 나는 죽어버린 세상을 사랑해온 것이 아니라 죽어간 세상을 사랑해왔던 것이고 약간의 향수병에 젖어 사랑을 이야기하는거다. 현재만큼 중요한 건 또 없다하지만 현재라서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게 아닐까. 나는 고양이를 향해 작게 내뱉었다. "사랑했어. 그리고 사랑할거야." 해가 저물 때쯤 뼈만 남은 고양이 시체를 지나 나는 집으로 왔다.


 살아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나는 그 불완전함을 사랑하고있다. 그리고 영원이란 수없이 들어온  바와 같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영원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하여 참으로 영원이라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젊은 같은 것들 나는 부모님이 영원한 버팀목이 되어주실거라 생각했지만 세월은 견딘 머리에는 벌써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볼 정도로 너무나도 크게 자라있다. 유년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른들은 소년의 한탄정도로만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유년시절이란 십년이 아니라 몇십년을 지나야하는 먼 과거이기 때문일테다. 8살의 나와 18살의 나, 30세의 아버지와 40세의 아버지께서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를것이다. 아버지는 가끔씩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 마음은 아직도 10대의 청춘 속에 살아 있는데 거울 속에는 주름진 황혼이 웃고 있구나." 나는 아버지의 웃음에 공감하지 못했다. 나는 18년 동안 줄곧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글픈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생하신 아버지의 주름은 죽어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늙는다는건 나에게도 두려운 일이다. 다만 당사자보다 그런 감정이 덜한 것은 내가 너무나도 젊기에 그것이 어른들의 유년시절처럼 아주 먼 미래처럼 느껴지는 것과 아직 늙음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까닭이다. 한때 나는 어른들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했다. "10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저마다 제각각 다른 답을 하셨지만 공부를 한다던가 춤을추고싶다던가 무언가 하나에 몰두하며 살아보고 싶다는 말은 대부분 일치했다. 그런 답을 들으며 지난 삶을 돌아봤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유튜브 쇼츠를 보고 인스타 릴스를보고 그러다 공부를하면 밤이 찾아온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식사를 먹고 다시 공부를하다가 폰을 좀 만지작거리고 잠이 든다. 그리고 이런 삶이 하루하루 반복된다. 좋아서 몰두할 수 있는일이 나에게 무엇이 있을까.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을 좋아하고 몰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기로부터의 세뇌를 일구는 것이다. 아, 그러면 허망하게 시간을 쓰는 일이 없을텐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시간을 허투로 쓰고있나. 그런데 되려 그 원인이 젊음이 아닌가? 나는 18년동안 줄곧 젊은 사람이었어서 젊음을 영원처럼 믿어버렸다. 그리고 그 젊음을 영원처럼 믿자 시간마저 영원이 된듯 믿어버리고서 막 쓰고 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기시켰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

유년시절에 본 책에서는 '메멘토모리(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언급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매일을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문장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썼다 '네가 살아있음을 기억하라.' 죽는다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면 이건 살아가는게 너무 두렵다.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최후의 날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라면 사는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차라리 살아있음을 기억하고 기쁘게 움직여라고 나는 그런 의미를 문장에 담아내고 싶다. 외부의 존재에 직접적인 힘을 가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놀랍고 특별한 일인가? 그런데 이러한 특성을 유튜브나 인스타를 보는데 쓰려하다니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나는 나만의 격언을 다시 되새겼다.  이제야 마음에 활력이 깃든다. 두렵지 않아서 뭐든 할 수 있다. 젊음이 영원하지 않아서, 영원하지 않은 젊음 속에 내가 살아있어서 나는 하루하루의 원동력을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시간에 대한 상징 또한 인간의 관념에 불과하다. 시간은 1년, 2년 이런게 아니라 줄곧 자기 흐름대로 연속되어왔다. 오늘이 특별했다면 모든 날이 특별했으며 특별하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을 살아있다는 환희 속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8살 아이가 내게 "유년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그냥 소중하게 웃으면서, 사랑하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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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병

(1) 여름 감정, 여름 감성 여름향을 맡으면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련한 감정에 휩싸인다. 이건 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먼발치에서 사랑을 품고 있을 때의 감정에 가깝다. 가끔은 애틋한 마음에 추억의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추억할만한 기억이 재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두 감정의 유사점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여름의 애틋함은 그리움일까. 이 감정이 설마 그리움이라해도 나는 무얼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이 역시 그리움의 기억이 재생되지 않는 탓이다. 어떤 감정을 동일시하려 해도 항상 근거없는 추측이된다. 이 증세는 도무지 ‘여름 감정’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나조차도 모를 괴상한 여름 감정은 나를 줄곧 몽롱하게 만들어왔다. 몽롱함은 이상한 문구를 자주 떠올리게 해서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놓은 나의 문장 노트는 칠 팔월에 유난히 두꺼워진다. 어떤 날은 수업 중에 좋은 문장이 떠올라 교과서에 적어 놓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갑자기 걷다가 스마트 폰 메모장에 문장을 적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도 문장을 적지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2시간이나 글을 쓰고 잤던 기억도 있다. 수면 패턴이 망가질 때가 많지만 이만큼 집중이 잘 되는 것도 없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하며 자찬하다가도 다음날에는 문장이 맘에 들지 않아 전부 지워버린 적도 있다. 그럴 땐 시간이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문장을 고민하는 과정이 즐거웠으면 만족하는 편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하루종일 불쾌함을 붙여둔 채 집념으로 문장을 다듬는데 이러면 글을 쓸 때 빌려올만한 좋은 문구가 많이 생겨나서 참 좋다. 과정이 끝난 후, 나는 항상 웃고있다. 모든 문장에 만족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만족이라는 것이 이루어질 때가 많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여름의 문구를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다. 감각적인 나의 세상은 현실임에도 소설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는게 그 이유다. 이 이야기를 외부를 향해 드러내보였을 때 누가 내 세상을 긍정해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걱정. 더군다나 주관적인 입장에서 나는 스스로의 ‘이상한 문구’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짙은 감성 표현 탓에 귀엽다거나 오글거린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질투의 감정을 ‘사랑을 깨물다’ 라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동굴로 들어간 아이’ 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 예다. 혹여나 두 부류의 말 중 어느 하나를 듣더라도 나는 여전히 부끄러워 할 것임을 알기에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사적인 즐거움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감정의 이중성은 항상 부드러운 연기가 되어 한기를 품었다.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이 역시 묵히다 꺼낸 여름 문장의 집합일 것이며 그건 내가 적지 않은 용기를 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의 ‘이상한 문구’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작은 용기가 부끄럽지 않도록, 각자의 여름에서 소년의 자취를 따라 걸어주길 바란다. (2) 여름나기 울적하면 자주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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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구이의 철학

점심에 버섯구이를 해 먹었다. 버섯은 씹을수록 향이 강해진다길래 그 향을 음미하려 잘근잘근 부숴댔다. 향은 분명히 강해졌지만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버섯구이에서 두부구이와 같은 향이 나는 것이 아닌가? 조각나는 버섯을 머금으며 그만 사색에 잠겨버렸다. 버섯구이가 두부향을 닮은 것인가? 두부구이가 버섯향을 닮은 것인가? 하지만 금방 깨달았다. 그 무엇도 서로를 닮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무의식 속에 본심을 뱉어대듯 완벽하게 콩기름을 빨아들였다가 뿜어낸다. 제 안의 수분을 날려내고 기름으로 채워낸 기억, 씹는다는 것은 그 기억을 들여다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콩기름이란 버섯의 트라우마다. 뜨겁고 매끈한 검정 기억은 나의 미각으로, 나의 후각으로, 나아가 나의 사고로 전달되었다. 버섯과 두부에게서 트라우마를 맛보고 있던 나. 서로는 닮지 않았다. 그러나 섬세하게 느껴보지 않으면 제 3자는 모르는 법이다. 나는 줄곧 그런 차이를 모르는 채로 콩기름 향을 음미하던 것이다.버섯의 트라우마를 찾아내는 것도 사색하지 않고서야 쉬운일이 아닌데 나는 또한 얼마나 많은 타인의 트라우마를 즐겨왔는가. 타인의 어색한 웃음을 보고서 가식을 비난하고 무례한 사람을 보며 무작정 분노하고 스스로의 온정이라 생각하며 베풀면서도 그것이 부담될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영혼의 무정부 상태가 싫다 말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무얼 위해 행위하는가에 대해 답하지 못하는 모순적인 자세. 나는 나의 트라우마 또한 즐겨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조금 서툴렀던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젊음의 이유로 목적론에 서투른 것이라면 말이 된다. 내가 버섯의 향이라고 생각하던 것도 두부의 향이라고 생각하던 것도 사실은 그 본질이 아니었다. 콩기름 향, 그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나는 버섯구이의 향도 두부구이의 향도 정확히 음미하지 못한 채 살아왔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두 맛의 근원이 콩기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둘의 본질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름을 적게 두르면 타거나 눌어붙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둘은 기름에 젖어 들어야만한다. 조리가 끝난 두 음식은 너무 많은 콩기름 향이 배겨있다. 나는 아무리 씹어도 버섯의 향을 알아채지 못할 것만 같다. 이것이 버섯이라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식감 탓이지 않은가. 두부 같은 식감에 콩기름 향이 났더라면 그것이 설사 버섯구이라해도 두부구이로 믿어버렸을테니까. 아, 그들은 얼마나 많은 세상에 젖어들어야만 한단 말인가.사색을 마치고 눈을 떴다. 젓가락으로 버섯을 잡는다. 버섯은 콩기름을 뿜어내고 미끄러진다.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쿡 찔러 입에 넣고 씹는다. 기름향이 허무해 대충 씹다 삼켜버렸다.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아챈 순간 음미의 목적도 사색의 목적도 갖지 않기로했다. 버섯을 위한 작은 애도, 혼자만의 고독한 사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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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효과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을 아십니까? 의무 교육을 받았다면 누구나 한 번쯤 접해봤을 작품입니다. 저는 진달래 꽃을 사랑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가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달래 꽃이라 답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에게 웃으면서 "아는 시가 그것밖에 없긴 하겠다." 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유명한 작품을 사랑하면 자주 듣는 말입니다. 고흐의 해바라기와 뭉크의 절규를 이야기해도 같은 반응입니다. 유명한 것은 유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그 많은 이들 중 하나였을 뿐인데 이러한 평가는 조금 야속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마치 특별한 것을 좋아해야한다고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쉽게 접해서, 친근해서, 배운적이 있어서일까요. 사실 배운다는 것도 타인의 감상을 습득한 것은 아닐까요. 문학에 대한 해석도 관찰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저 역시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형식적인 타인의 해석을 습득중입니다. 이게 길이라면 걷는 것이 맞으나 제 발자국 하나는 선명히 찍으며 걷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 저는 이런 유명한 작품을 좋아한다 외치면 그렇게 말한 화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을 '김소월 효과' 라고 이름 붙여놓았습니다. 분명 이에 대한 다른 용어가 있을테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요한건 익숙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안다는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고등학생이 될 무렵 누군가 저에게 좋아하는 그림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속으로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외치고 있었지만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탓에 '레이디 고다이바' 와 '병든 아이' 를 토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작품을 알리가 없었고 그덕에 저는 '서양 미술을 잘 아는 사람' 으로 비춰져 보였습니다. 저는 그저 신기했습니다. 병든 아이는 뭉크의 작품인데도 뭉크하면 오직 "절규!" 하고 외치는 그 사람들을 보며 저 유명한 작품처럼 자신도 모르게 속을 찌그러트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세속적인 것이 그들 위에 있는 듯한 우쭐함에 기뻐하며 스스로를 그들의 시선대로 변화시켜나가게 되었습니다. 해바라기,절규,레이디 고다이바 점점 난해한 곳으로 가자 마라의 죽음,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 작품을 전부 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반갑습니다. 하지만 모른다하여도 괜찮습니다. 토를 품은 위는 항상 해바라기와 진달래 꽃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속의 것들을 전부 토해내면 제 속에서는 꽃향기가 날듯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모르는 사람일뿐입니다. 억지로 가르쳐주려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을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는 것이 적다해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의 가치가 큽니다. 그렇기에 저는 기본적인 것을 말할수록 그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 내가 참 좋아하는 시야" 하고 말한다면 아마 저는 눈에 불을 붙이고 밤을 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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