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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언은 여름

  • 작성자 난바다
  • 작성일 2024-06-17
  • 조회수 95

여름날에 태어난 사람의 첫사랑은 여름. 하필 그 여름에 태어나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다던 첫사랑을 시작부터 떠안은 채, 일 년에 한 번씩 그 첫사랑과 마주한다. 


여름의 맛이 무엇인지 아니? 사실 나는 안다? 바닷가에서 귓가에 속삭이던 언니의 목소리, 손 안에는 가득 담긴 바닷물. 삼켜 봐, 여름의 맛이야. 멀리서 보면 푸른색이던 바다가 언니의 손 안에서는 살구색이다. 수박 맛일까, 레모네이드 맛일까. 살구빛 여름, 꿀꺽,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짜. 


컥컥거리던 나의 목소리가 웃긴 모양인지 언니는 그 첫사랑을 배경으로 한 채 모래사장을 뛰어 나가고. 엄마는 다급히 뛰어가 음료수 속 얼음 하나를 입 안에 넣어주었다. 얼음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소리는 이리도 선명한데 짠맛은 지워지지도 않는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맛, 그래. 첫사랑은 여름. 여름은 눈물 맛. 나의 첫사랑의 맛은 짠 눈물 맛이었다.


여름이 올 때면, 그리고 눈물이 흐를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나의 첫사랑. 지독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 첫사랑. 언니. 언니 말이 맞았어. 첫사랑, 그니까 여름의 맛은 눈물 맛이 맞아. 개도 안 걸린다던 여름 감기마저 내게 지독한 걸 보면 말이야.


여름 감기에 유독 아팠던 일곱, 얇은 여름 이불이 끈적한 땀과 뒤섞여 나의 몸에 찐득하게 달라붙고. 귓가에 카세트테이프처럼 계속해서 중얼대시던 엄마의 한 마디가 스쳐 지나간다. 


여름 감기, 너무 지독하지 않니? 


끄덕거리고 싶다가도 이마에 비해 너무 커다랗고 무거운 수건에 짓눌려 가쁜 숨소리만 겨우 내던 때.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창가에 보이는 여름은 이번엔 푸른색 여름, 꿀꺽.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역시, 짜.


엄마가 넣어주었던 얼음의 맛보다 여전히 입 안에선 소금기가 계속해서 남아있다. 언니가 쥐어주었던 사탕은 어느 새 녹아 끈적해지고 결국 손에는 다시 짠 향만 가득해진다. 바닷물이 계속해서 자신의 색을 바꾸는 것처럼 나의 첫사랑과 여름은 다른 형태로 내게 되돌아 온다.


첫사랑은 지독하다. 아니, 여름도 지독하다. 지독한 것 두 가지가 나에게 눅진하게 달라붙어서는 같이 녹아내리게 만들어 버린다. 


시끄러운 선풍기 소음과 그 바람결에 맞춰 나풀거리던 책장, 잠옷, 그 이 외의 여름날들.


여름은 아이스크림도 빙수도 나의 뇌도 녹아내리게 만든다. 그렇게 만들고서는 쿵, 쿵, 쿵 무너트리게 하고. 여름 물비린내에 질식하거나 그 열기에 말라버리거나. 혹은 그 찝찝한 향기와 물기 가득한 공기에 울음이 터져버리거나. 첫사랑은 죽을 때까지 평생 기억한다는 말에 걸맞게 아마 나는 첫사랑과 같이 태어나서는 평생을 그리 기억하다가 함께 죽어버리겠지.


그렇다면 나의 사인은 여름.


나의 유언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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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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